Daum | 카페 | 자주가는 카페 - 전체보기 - 편집 - 내 쪽지 |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로그아웃 음악을 들으시려면 ▶ 버튼을 눌러주세요 음식 (공개) 카페지기 서로몬 회원수31,416 방문수366 프로필 ▼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정회원 메일 11 쪽지 0 내가 쓴 글 내글 반응 카페 글쓰기 카페 전체 메뉴▲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15) 노을뱅이<나>gpfus너굴사율미니민이응, 안녕?은빛바다데구루루구룽우웅곰린민하울착한사람송연경체리홀릭일등급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숨기 RSS | 자주가는카페 추가 카페 탈퇴▶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스크랩]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01~10)|　　　　펌인기소설 작은별소녀 | 조회 9423 | 06.06.06 23:39 http://cafe.daum.net/boyhamr/5M8v/656 ------------------------------------------ 반하늘입니다. ------------------------------------------ 제가 기본적으로 다는 말머리, 팸주소나 도용금지 멘트(?)를 그대로 올리시면 괜찮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숑~~ ^^ ------------------------------------------ ＊──────────────────────────────＊ （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학교가 있었다. 약 100여 년전에 지어진, 최고의 명문학교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때 당시 학생이었다면 누구나 한번쯤 가고싶은 1지망에 '윤세고등학교'를 적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윤세고등학교는 아이큐가 160이 넘지 못 하는 학생은 입학할 수 없었다. 천재중에 천재들이 다니는 학교로 최고급 시설을 갖춘 고등학교. 그곳의 이름은 바로 '윤세고등학교'. 그러나 어느 해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더니, 급기야 모든 학생을 졸업시키고 나서는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고,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이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했다. 그렇게 무한한 세월이 흐르고 약 20년정도가 지났을까. 어느날..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닫혔던 교문, 드디어 활짝 열다!' 라는 문구가 모든 신문 1면에 새겨지더니, 뉴스에까지 특급속보로 보도되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닌, 아시아 전체를 뒤흔들만한 소식이었다. 아시아에서 최고의 천재로 꼽을 만한 이들이 모두, 한국의 '윤세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0한국은 천재들이 가장 많이 양성되는 곳이다!” 라고. “약 20여년동안 문을 닫고, 신입생입학을 거부하던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가 드디어 올해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약 20여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A- 1~2반. 예체능을 목적으로 하는 B- 1~2반. 기술을 목적으로 하는 C- 1~2반, 연예계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D- 1~2반, 총 8개의 반으로 나뉩니다.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러왔는데요, 터무니없는 숫자의 학생들이 시험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아아,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찢어지게 할 만큼 아쉬운 순간인데요.” 검은색 깔끔한 정장을 입은 기자가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아나운서가 잠시 브라운관에서 사라지더니, 자신의 시험지를 들고는 좌절하는 이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최고의 명문고이니 만큼, 시험을 본 즉시 자신의 점수와 입학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차례로 시험을 받게 되는데, 다 풀고 나서 시험지를 담당선생님께 내면 기계에 즉시 넣어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4330번 김현성양. 지망 A반, 점수 66 아이큐 152탈락입니다.” 딱딱한 기계음이, 기계에서 흘러나오고 기대에 찬 얼굴로 기계를 바라보고 있던 한 여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간다. 아이큐 152. 정말 똑똑한 머리이다. 그런데 어째서 66점을 맞았느냐..? 66점. 대학교 교수들도 버거워할만한 문제들이다. 또한 50문제 중 20문제는 '심화'문제인데.. 보통 수준의 문제가 대학교 교수들도 버거워할만한데, '심화'라 불리는 문제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정말 안타깝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시험장안에서. 한다은이었습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고등학교. 천재가 아니라면 결코 다닐수 없다는 고등학교. 최고의 시설을 갖췄다는 고등학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약 20여년간 닫았던 문을 열다! “천재라고 자부하는 이들이여! 윤세고등학교로 오라!” 1. “강시연.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헥. 미라야, 너 귀 안 좋았었어?” “야!!!!!!!!! 내 귀가 안 좋은게 아니잖어, 지금!!!!!!!!!!!!” “헤엑.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에!!!!!!! 내 사랑스러운 귀가 아야! 하잖어~” 약간은 비정상인듯 고함소리에 자신의 귀가 아파한다며, 귀를 쓰다듬는 소녀와,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을 주체하지 못 하고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는 소녀. 반짝거리는 흑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흑색 머리카락과는 대조되는, 하얗고 뽀얀 피부에 눈밑에 자리잡은 귀여운 점 하나. 커다란 두 눈망울...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편이지만, 보통의 눈크기에 비해 훨씬 큰 편이며 살짝 처진 눈꼬리. 적당하게 솟은 오똑한 코에, 붉고 작은 입술. 오목조목 이리저리 따져봐도 정말 예쁘게 생긴 이 소녀의 이름은 강시연. 겁대가리는 더럽게 없고, 모든게 태평하며, 걱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엉뚱계의 일인자인 소녀이다. 진미라, 그녀는 시연의 그러한 면을 이때까지 아무말없이 묵묵히 받아줬었다. 그런데 이것만큼은 아니다! 최고의 명문고라 불리는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했다니! 이 세상 어느 누구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거짓말 치지마!!!!!! 윤세고등학교가, 개나 소나 다 입학할 수 있는 데냐!!!!!!!!!!!!!” “아씨잉~! 당연히 그건 아니지! 나 강시연님은 개나 소따위가 아니라구, 헤이잉~” 시연은 빗을 꺼내 가슴선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빗으며 말했다. 미라는 갑자기 심하게 밀려오는 두통에 휘청거렸다. “헤에에엑?! 메가펀치 철인무적 진미라가 휘청이다니!!!!!!! 특종이다아아앗!!!!!!!!!!!!!!” 자기덕에 밀려오는 두통때문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휘청거린 것이 특종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강시연. 시연때문에 쓰러질것만 같은 미라였다. “흐음. 그러니까 내가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한 게 말도 안된다, 이거지?” 점심시간.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시연이 미라에게 물었다. 미라는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미라의 두 눈은 궁금증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뭐가 말이 안되? 이 강시연님이 얼마나 똑똑한데!!!!!!!” 시연의 푼수끼에 미라는 고개를 저었다.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밀려올 것 같았다. “장난하지말고. 응?” “사실은...” “사, 사실은 뭐?” 미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것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약 10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미라는 두 눈을 더욱 빛내며 시연의 뒷말을 기다렸다. “우헤헤헤, 내가 숨겨져있던 대한민국의 최고의 천재거덩!!!!! 움하하하핫~!!!!!!!!!!!!!!! 악, 왜 때려어어~!!!!!!!!” 퍽. 퍽. 푸퍽. 팍. 팍. 미라의 무자비한 발길질은 계~속 되었다. 쭈우우욱~~~~~ “나 미라랑 굿바이 하기 싫은데.” 시연은 정말 헤어지기 싫다는 듯 울상으로 말했다. 미라는 아무말없이 시연의 흑색 고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시연의 손에 사탕하나를 쥐어주었다. 딸기맛 사탕. “굿바이는 무슨, 씨이~ 또 만날건데. 근데 강시연! 너 진짜 말 안 해줄거야?” “진짜 나 천재라...으으윽~ 또 왜 때려!!!!!!! 꾸아아아악, 최고의 천....재 강시연 살려어어엇~!!” 끝까지 자신을 천재라 박박 우기는 시연이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말. 천재. 저런 애가 천재라구? 헹, 그걸 누가 믿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등학교. 아시아에 단 하나뿐인 최고의 고등학교. 천재중에 천재들만 다닐 수 있는 그 고등학교. 머리면 머리, 기술이면 기술, 예체능이면 예체능, 연기면 연기!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 그런 고등학교에 강시연이 입학했다..? 물론 외모만큼은 여느 연예인보다 뛰어난 시연이기는 하지만... “움하하하핫~!!!!! 나도 내가 천재인 줄은 몰랐는데~~ 우헤헤헤헷~~!!” 이런 소녀가 천재라니.. 그다지 믿고 싶지는 않은 현실이다. 게다가 저 멘트로 보아하니 연예인을 목표로 하는 D반에 입학한 건 아닌것 같은데....? 24평,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굉장히 넓은 집. 집에 들어온 미라는 가방을 아무곳에나 내팽겨치고는 소파에 앉아 곰곰히 고민했다. 설마 시연의 말이 진실일 줄이야. 졸업식, 즉 오늘 시연은 입학통지서를 내게 내밀었다. 분명 시연의 이름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고, 교장의 도장까지 찍혀있었다. “믿고 싶지 않다......” 시연은 외모 하나만큼은 끝내주었다.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 마냥 순진하고 큰 눈하며, 하얗고 뽀얀 작은 얼굴하며, 특히 긴 흑색의 반짝이는 머리카락. 시연과 자신은 남자애들의 비교대상이었다. 여느 연예인보다 더 뛰어난 외모를 가진 시연과는 달리, 자신은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못생긴 얼굴도 아니건만 시연이 워낙 뛰어난 외모를 가진 터 라 자신은 항상 못생긴 못난이 취급을 받아왔다. 그 점에서 자신은 열등감을 느꼈고, 죽어라 공부를 했다. 공부라면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점수차는 30점이나 벌어졌다. 그런데 최고의 명문학교 윤세고등학교에 입학이라니? 정말... 말도 안되!!!!! “말도 안된다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항상 같이 있었고, 함께 지내왔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쭈욱. 도대체 같이 지내온지도 몇 년인가. 그럼에도 자신은 시연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사랑까지 빼앗아간 시연이 아닌가! “강....시연!” 강시연이라는 이름.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녀덕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이젠 잊고 싶었다. 강시연이라는 이름을. 강시연이라는 인간을. “더 이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아아아, 준연오빠.” 유일한 사랑. 그 사랑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보다는 시연을 더욱 좋아했고, 시연에게 더 호감을 갖었다. 흑색 머리카락처럼 진학 흑색의 눈동자가 어느 한 곳을 향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다마냥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넓은 마당에. 가는 이의 발목을 잡는, 한번 자신에게 빠져보라는 듯 푸른색 물을 찰랑이는 수영장과. 빨강. 노랑. 초록. 이 세가지색이 조화롭게 섞여서 하늘거리는 정원. 그리고 마지막으로...크고 화려한 궁전같은 건물. 이곳은 시연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윤세고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자. 세상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아버지. 디자인계의 최고로 손꼽히는 어머니. “아빠아아아아앗~~~~~” 시연과 같은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성. 40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다정함과 기품이 물씬 풍겨나오는 이 남성은 시연의 아버지이다. 시연은 그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그는 보기좋은 미소를 얼굴에 한껏 머금으며 시연의 볼에 살짝 입맞춤하고는 시연과 소파에 앉았다. 한번 둘러보자. 시연의 집을. 아아아. 얼마나 멋진 집인가! 밖에서 보기엔 굉장히 웅장하고 화려해보였지만, 그렇게 까지 사치스러운 이들은 아니었는지 적당히 꾸며져있는 집안. 하얀 앞치마를 둘른, 깔끔하게 생긴 여성이 오렌지주스 두 잔과 예쁘게 깎은 사과를 내왔다. 시연은 포크를 들어 사과를 콕 찍어 아삭아삭 씹어먹으며 말했다. “근데 아빠, 엄마는?” “네 엄마야 당연히 또 디자인구상중이지.” “헤엥, 또? 그만 좀 자지~” 분명 그의 입에서는 '디자인 구상 중'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어찌하여 시연은 '그만 좀 자지~'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럼 천천히 시연의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보자. 말 한마디 없는 조용한 방. 굉장히 넓은 방안은, 여러가지 화려한 옷들을 입은 마네킹이 유리관에 갖힌 채 벽에 장식되어있었다. 여러가지 옷을 만드는 도구들이 가득 차 있는 방안에, 시연의 흑색 머리카락과는 달리 약간 붉은빛이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한 여성이 있다. 새하얀 얼굴에 기품과 도도함을 한번에 머금고 있는 여성. 그 여성은.. 시연의 말대로 침대에 엎어져 자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아빠, 엄마 임신 한거 아녜요? 어떻게 날마다 자냐구~” “하하하. 그런데 시연아, 들리는 소문에 한하면 너가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했다던데.” “아! 네에, 우헤헤헤. 아빠, 전 숨겨져있던 대한민국의 천재인가봐요~!!!!!!!! 움하하하핫~~!!!!!!!” 시연의 푼수끼에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시연이 손을 그의 눈앞에서 몇 번 휘저으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시연의 이마에 콩 하고 살짝 때려주고는 말했다. “A반에 입학한거니?” “네에~! A- 1반이요. 근데 정말 희한하죠? 내가 A -1반에 입학하다니~ 움헤헤헷~!!!!” “시험은 봤니? 어땠니, 쉬웠어?” “보긴 봤는데 진짜 어려웠어요. 그래서 마구 찍었는데...” “그럼 천재는 아닌가보구나. 대단하네, 우리 딸? 찍어서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하다니.” “우헤헤헷~ 전 천운이 따라주나봐요.” “그런데 그렇담 분명 아이큐에서 제약이 걸려올텐데.” “아뇨. 때마침 아이큐 확인 기계가 망가져가지고요, 시험보러 간 애들 다~ 아이큐 확인은 못 했어요. 움헤헤헤헷~!!!!!! 생각해보니 이것도 정말 기적같은 일이네. 그쵸, 아빠~~~?” “하지만 언젠가는 들통날텐데... 그때가서 쫓겨나지말고 지금 옮겨보는게...” “에히잉~ 아빠 재수없는 소리 말아요. 그럼 빠더~ 소녀는 자러 가겠사옵니다~~~~” 대낮에 자러간다니. 역시 모녀가 쌍쌍으로 논다. 시연은 그의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하고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폴짝폴짝 뛰어 2층으로 냉큼 올라가버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연이가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했다라...” 2. “시연아가씨, 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옆집 아줌마처럼 푸근한 인상을 가진,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한 소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 방. 언뜻보면 평범한 여고생의 방같지만 물건, 물건의 값어치는 사실상 굉장했다. 보통 가구 하나의 값의 5배이상에 달하니, 그 값어치는 상상이상이다. “시연아가씨, 어서요.” 푸근한 인상의 여성이 한 소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고 있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흑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강시연이다! 여성의 재촉에 소녀는 눈을 비비며 조심스레 일어선다. 부시시하게 떠오른 흑발 머리카락과, 언뜻 보이는 하얀 자국. 그럼에도 귀엽기만 하다. “아가씨, 어서 씻고 나오셔요. 기다리고 계셔요.” “네에. 하아아아암~ 벌써 아침이라니.. 달! 너무 하잖어, 벌써 가버리는게 어딨어어어~!!!!” 해를 노려보며 달에게 애달프게 외치는 시연이었다. 시연은 기지개를 한번 피고는 벌떡 일어섰다. 부시시한 흑발을 끈으로 깔끔하게 묶었다. 잠에서 덜 깨 몽롱하게 변해있던 눈빛이, 한순간 유리가 깨지듯 사라지며 총명함이 떠오른다. 마치 하나의 별마냥 반짝이는 두 눈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모른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그녀의 눈동자는 살아있다! “그래. 시연이 오늘부터 윤세고등학교에 다닌다구?” “네. 근데 엄마! 혹시 뱃속에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숨쉬고 있는... 악! 왜 때려, 오빠!” 음흉한 눈빛으로, 검붉은 색의 매력적인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에게 말하던 시연은 갑자기 날라온 돌주먹에 머리를 감싸쥐고 아파했다. 바로 시연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시연의 오빠 '강다연'의 소행이었다. “못 하는 말이 없다. 아빠랑 엄마, 나이가 몇인데 애를 또 낳냐?” “헤엥. 그래두 희한하잖어. 어떻게 인간이 맨날 잠만 자고 살어?” “.......흐흑...흐흐흐흑~! 미워미워, 시연이 미워. 어떻게 이리 사랑스럽고 고귀하신 어머님께 그런 막말을..! 흐흐흐흑~~~!!”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봐. 성격까지 똑닮은 모녀였다. “하하하. 여보, 또 우시오?” 쫙 다려진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넥타이를 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시연의 엄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시연의 아버지, 강성환이다. 실제 나이는 40줄에 접어들었건만,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에 피부 또한 깨끗하며,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남성이었다. 게다가 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지, 윤세고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자이자 최고의 천재인 그였다. 살짝 파인 부드러운 재질의 옷을 입은 한 여성. 겉보기에는 굉장히 젊어보이나, 이 여성도 사실은 40대 초반이다! 시연처럼 하얗고 뽀얀 얼굴에, 큼지막한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시연의 아버지가 윤세고등학교의 A -1반 반장을 도맡던 천재였다면, 그녀의 어머니는 윤세고등학교의 C -2반 졸업자, 최고의 디자이너다!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인 그녀였다. “흐흐흐흑~! 전 단지 자꾸 몰려오는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 했을 뿐인데...흐흐흐흑~!!!! 하나밖에 없는 몹쓸 딸년이...!!!! 흐흐흐흐흑~“ “헤엥~ 그럼 엄마는 몹쓸 딸년의 엄마네? 움헤헤헤헤~ 그럼 쌤쌤이네, 뭐얼~” 역시나 존경할 만한 모녀다. 어쨌건 그럼 이번엔 시연옆에서 밥을 먹고 있는 굉장히 잘생긴 미청년에게 살짝 시선을 돌려보자. 강다연. 현재 윤세고등학교에 3학년. 윤세고등학교가 다시 교문을 열고 나서로 치자면, 1기. 엄마를 닮아 귀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 검붉은색 머리카락. 흑색의, 반짝 이는 두 눈동자와 오똑한 코에 붉은 입술. 어떻게 보자면 기생오라비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감히 그에게 누가 기생오라비라 표현하겠느뇨! 온 몸에서 카리스마와 기품이 흘러넘치는 그에게! A- 1반 회장이자, 학생회장인 그였다. 윤세고등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학년에 따른 구분이 없다. 구분할 수 있는 건 명찰의 색깔. 1학년은 빨간색. 2학년은 푸른색. 3학년은 검은색. 한 반에서 모든 학년이 다같이 수업을 받고, 구분이라 치자면 공부냐, 예체능이냐, 기술이냐, 연예계 진출이냐.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움헤헤헤헷~~~~~” 시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며, 집을 나섰다. 시연의 오빠인 다연은 학생회장이기때문에, 시연보다 20분 먼저 출발하였고, 덕분에 시연은 혼자서 쓸쓸히 등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쓸쓸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붉은빛이 도는 교복이, 시연의 몸을 휘어감고 더욱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옷이 날개다.' 라고.. 그러나 지금만큼은 옷이 날개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옷 때무에 시연이 빛나기보단, 시연덕에 옷이 빛난다. 그래, 이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정말로! 햇살을 머금은, 그 어느때보다 순수하게 빛나는 시연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특히..! 반짝이는 저 두 눈동자! “어떤 친구들을 만날까? 우으음.” 시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윤세고등학교에 등교했다. 보통 학교의 운동장의 1.5배 크기에는 많은 아이들이 줄을 맞춰 서있었다. 그렇게 시연의 파란만장한 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3.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을 3년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가르칠 김기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깔끔한 정장차림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A -1 반을 3년동안 가르칠 김기현이라고 하였다. A -1반은 현재 두명씩 짝지어져 앉은 형태로 3분단이 있는데 왼쪽부터 1학년, 2학년, 3학년 순이다. “하하하. 2학년, 3학년애들은 알겠지? 내가 얼마나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인지?” 기현은 2~3학년 학생들이 앉은 분단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2~3학년 아이들은 똥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 그럼 자리는 이렇게 앉도록 하고, 내일 보자꾸나.” 학생들은 미리 책상서랍에 들어있었던, 새 교과서들을 챙겨 쇼핑백이나 가방에 넣고는 삼삼오오 짝지어 교실문을 열고 나갔다. “흐응.. 나도 친구를 만들긴 해야 겠네.” 시연은 나가는 1학년 아이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말이라도 걸어볼 셈으로 그들쪽으로 다가갔다. “단비야, 너 진짜 머리좋다~” “호호호. 그건 당연한거야. 윤세고등학교에 머리에 똥 찬 애들이 들어온다는게 말이나 되니? 아무리 아이큐 확인 기계가 고장났다구 해두 말야.” “깔깔깔, 그래그래. 근데 단비야 너네 되게 빵빵하다며?” “호호호. 당연한거 아니겠니? 나를 좀 봐, 어디 한 군데라도 천박스러운 데가 있나.”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시연은 인상을 팍 구겼다. 정말 공주병에 잘난척병에. 아주 쌍쌍으로 난리들이다. 저런애들과 친해져서 뭐하리. 갑자기 미라가 떠올랐다. 아이들은 미라를 예쁘다고 표현한 적 없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예쁘게 생긴 미라는 아니므로. 그러나 미라의 고운 성격만큼은 언제나 부러웠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다정하게,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미라는 자신에게 있어 없어어는 안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헤잉... 미라 보고 싶다.” 시연은 터덜터덜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중, D반 교실층에서 왠 여자 울음소리를 들었다. “에에엑? 혹시 이게 그 유명한 귀신울음소리?!” 시연은 콩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살금살금 D반 아이들이 쓰는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근처로 다가가니 그 울음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시연은 숨호흡을 한번 하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상큼한 레몬향과 함께 깔끔하고 넓은 화장실. 그리고 울고 있는 한 소녀. 황금을 갈아 염색한 듯 노란색 찰랑이는 머리카락에, 굉장히 작은 머리. 큼지막한 눈에 오똑한 코, 붉은 입술. 게다가 8등신 미녀임에도 불구 몸무게는 40대인 듯 삐쩍 마른 소녀. “에힝! 요즘 귀신들은 염색도 하나?” 시연은 울고 있던 그 아름다운 소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투덜거렸다. 귀신이라고 치기엔 너무 아름답고 예쁜 소녀이기에. “누, 누구...세요?” 시연이 두려운 듯 살짝 떨리고 있는 목소리. 얼마나 울었는지 큰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고, 목소리도 한참 잠겨 있었다. 시연은 말없이 치마 주머니에서 딸기맛 사탕을 꺼내 그 소녀의 늘씬한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는 손에 쥐어진 딸기맛 사탕을 보고는 의아한 눈치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움헤헤헤헷! 나는 세계 최강 천재님이 되실, A -1반의 1학년 강시연님이시다~!!!!!” 화장실이 떠나갈 듯한 큰 목소리에 소녀는 잠시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글프게 울어?” 소녀는 말없이 몇분간을 침묵했다. 시연은 기다리기가 짜증이 났는지 치마주머니에서 딸기맛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으로 쏘옥 집어넣고는 오도독 오도독 씹고 있었다. “내가 우는....이유는요..” 약 몇분 뒤 소녀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난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대한민국 대표 가수, 뭐 이런거요. 내 노래를 모든 사람들이 듣고, 흥얼거려주길 바랬어요. 그래서 피부에 좋은거, 덕지덕지 얼굴에 다 쳐바르고 다이어트 제품에 운동기구를 다 사서 몸 가꾸기에 여념없었어요. 그런데요, 제가 현재 한 기획사에 속해있는 상태인데요.. 내가 나갈 기회를 항상 다른 애가 가로채요. 분명 실장님이 말하셨거든요? 조금 있음 무대게 설 수 있으니까 노래 연습 많이 하구 있으라고. 그런데 또예요. 또 다른 애가 그 기회를 가로챘어요. 실장님은 말하죠. 제가 부족해서 아직은 안된다고..안된다고... 저는 그 이유가 너무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몰래 실장님을 미행하고, 지켜보다가 드디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죠. ‘슈엔, 걔는 예쁘고 실력이 있긴 한데 형편이 너무 딸려. 그거 알어? 걔네 엄마랑 아빠, 싸워가지고 엄마는 집 뛰쳐나가고 아빠는 알콜중독자라며. 그런 애를 어떻게 우리 기획사 얼굴로 내세워? 차라리 조금 실력이 딸리더라고 얼굴 이쁘고 집안 빵빵한 민아가 더 낫지.’ 라고요. 절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요, 우리 엄마 집 뛰쳐나갔고 아빠는 알콜중독자예요. 덕분에 샀던 운동기구 다 팔아서 겨우겨우 집안 일으켰구요, 요즘 관리도 제대로 못 했어요. 먹을 거 제대로 먹지도 못 해서 터무니없이 마르기만 하구요, 집안 꽝이라서 티비에 나가지도 못 해요. 그래서 울어요. 저 우습죠.. 저 우습죠????” 길고 긴 말이 끝난뒤, 자신을 ‘슈엔’이라 언뜻 밝인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실력이 되는데도 집안형편때문에 무대에 설 수 없는 소녀. 그 기구한 운명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시연은 말없이 묵묵히 오도독 오도독 사탕을 씹고 있었다. 소녀가 울음을 멈추고 세수를 할 때 쯔음 시연이 드디어 그 작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너.. 모델 한번 해볼래?” 세수를 하던 소녀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뒤돌아 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시연을 쏘아보며 외쳤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내말을 뭘로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뭐, 디자이너라도 되요? 무슨 모델? 웃기지도 말라...”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디자이너거든. 한번 해볼래?” 소녀의 매서운 눈빛에도.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시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추욱 하고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당신...엄마가, 디자이너라구요..?” “응.” “..정말..저 서게 해줄 수 있어요..?” “응.” “모델로 성공하면 가수도 될 수 있겠죠..?” “응.” “....그럼..나 서게 해줘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노력을 해도 되니까.. 서게 해줘요..제발..” 소녀는 또 다시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거의 독백 수준이었다. 소녀는 생각했다. 어떤 무대라도 괜찮다고. 기자 한명 안 와도, 사람 한명 없는 무대라 할찌라도 그 위에 설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OK. 우리 집으로 가자. 슈엔?” 슈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져 있던 쇼핑백을 들었다. 쇼핑백 안에는, ‘고운 목소리를 내는 방법.’ ‘확실한 무대매너가 당신을 빛낸다.’ ‘다이어트, 그것은 결코 힘들지 않다.’ 등등, 연예인 진출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가자.” 슈엔은 말없이 시연의 뒤를 따랐다. 찰랑이는 흑색 머리카락에, 자신 뺨치게 하얗고 뽀얀 피부. 그리고 언뜻 생각해보면 자기보다 조금 작긴 해도 만만치 않게 큰 눈에 흑색 매력적인 눈동자까지. 오똑한 코에 조그맣고 붉은 입술. 정말 예쁜 여자다. 정말 매력적인 여자다. 어쩌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하지만 저 소녀는 말했다. A -1반이라고. 그렇다면 연예인보다는 회사경영, 뭐 이런쪽으로 나가고 싶다는 뜻인데.. 그럼 머리도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소녀의 엄마라면 그렇게까지 유명하진 않더라도, 꽤 이름은 알려진 디자이너일 것이다. 기자가 수백명이 달려오진 않더라도 한~두명 쯤은 올것이고, 주위에 알고 있던 사람들 몇 십명은 오겠지. 그거면 된다. 난 그들 앞에서 내 매력을 뽐내기만 하면 되! “도착!” 슈엔은 곰곰히 생각하며 걷고 있다가, 문뜩 도착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동네는 부자들만 사는 동네인데...? 집을 확인하려 고개를 든 슈엔은 눈이 왕방울 만 해져서 시연을 바라보았다. 정말 훌륭하고 거대한 저택이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왕자, 공주들이 사는 집! 그런 집에 저 소녀가 살고 있다고? “저, 정말 여기 살아요?” 슈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이 집에서 사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 소녀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레벨이 된다.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되는... “응. 얼른 들어와!” 슈엔은 그 대답을 듣고 다시 뒤 돌아서려고 했다. 분명 속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비교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소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소녀의 흑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소녀는 진실만을 말하는 소녀라고. 매력적인 소녀라고. 친해지고 싶다고. “엄마~!!!!! 이 잠탱이~!!!!!!!! 또 자는 거야아아아아~?” 소녀는 이 거대한 집이 떠나갈 듯 외치다가, 엄마가 나오지 않자 슈엔을 소파에 앉히고는 어느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우아하게 검붉은색 머리를 틀어올린, 정말 매력적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이 소녀와 걸어나왔다. 그리고 가정부가 내온 오렌지쥬스를 마시던 슈엔은 그만 쨍그랑! 컵을 놓쳐 깨트리고 말았다. “세, 세계적인 디자이너.. 정혜란씨....?” 깨져버린 컵은. 땅에 쏟아져버린 오렌지 쥬스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내가 저 유명한. 모든 디자이너, 모델, 연예인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인 세계적인 디자이너 정혜란씨의 무대에 설 수 있다?!!!! “응. 내가 정혜란이야. 그 쪽이... 우리 시연이 친구, 슈엔양? 후훗, 정말 예쁘게 생겼네? 호호호호, 일단 따라오라구.” 정혜란은 우아한 몸동작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슈엔은 넋이 나간듯 멍한 눈동자로 뚜걱뚜걱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겨진건 시연뿐. “아아악~!!!! 미워미워, 자기들끼리만 가구~!!!!!!!!!!” 4. “음. 패션모델을 하기엔 조금 작은 키이긴 하지만, 하이힐로 어느정도 커버할 수 있겠고.. 음.. 몸은.. 조금만 찌우면 되겠고..얼굴도 예쁘게 생겼구. 원래 꿈이 가수라고?” “네.” “모델이나 연기자를 해도 크게 성공할텐데.” “다른 사람에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내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를요.” 혜란은 슈엔의 단호한 말에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의 각오를 다진 아이라면 충분히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가능성이 없다면, 아무리 시연의 친구라고 해도 냉정하게 돌아섰을 혜란이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 불타는 열정과 투지가 보였다. 그래서 허락했고, 그래서 결정했다. “일단 슈엔양?” “네.” “기획사와 계약해지하세요.” “예? 하, 하지만.. 계약 해지를 하려면 기간이 훨씬...” “돈은 내가 해결해줄게요.” "그, 그럴 순 없어요! 무대 위에 서주시게 해주시는 걸로도 충분히 감사한걸요!” “물론 공짜는 아니예요. 우리 바보같은 시연이랑 잘 놀아주고, 또 나중에 커서 유명해지면 갚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집안 형편이나 따지는 그런 기획사말고 다른 좋은 기획사 찾아봐요. 내가 찾아봐줄 수도 있구요.” 엄마같이 다정한 어투에 슈엔은 울컥 뭔가가 치솟는걸 느꼈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고, 뭔가가 뺨을 간지럽히며 흘러내렸다. 뺨이 촉촉이 젖어들 때 쯔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눈물을 닦아내었다. “슈엔양, 울지 말아요.” “맞어! 슈엔 뚜욱~!” 혜란은 손수건을 슈엔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시연은 자신의 치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딸기맛 사탕을 꺼내 슈엔의 손에 쥐어주고는, 베시시 웃었다. 혜란은 시연을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이빨 다 ??는다고 했지!” “헤잉~ 내 이빨은 강해서 상관없단 말야.” “...까불래, 너?” 혜란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연은 주머니속에 든 딸기맛 사탕을 두 주먹에 꼭 쥔 채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흥!l 이것 만큼은 넘겨 줄 수 없다!!!!” “내놓아라!!!! ... 흠흠.. 아.. 저.. 슈엔양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되겠죠? 사실은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 “웃기시네~! 이 성격은 엄마한테 닮은 거라구! 어쩜 이리 거짓말을 잘 하실까?” “너 자꾸 까불래? ... 흠흠.” 흔히들 달동네라고 불르는 곳. 그 곳에 꿈을 버리지 못 하는 소녀, 슈엔이 살고 있었다. 집안 사정을 한번 이야기해보라는 혜란의 말에, 슈란은 계속 눈물을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집은 원래부터 가난했어요. 술집에서 일하던 엄마는 가난하지만 다정한 아빠에게 반해서, 겨우겨우 술집에서 탈출하셨죠. 아빠와 엄마는 정말 서로를 사랑했고, 저 또한 아껴주셨어요. 그러나 가난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겪어내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어요. 가난에 지치고 지친 엄마는 술집에서의 생활이 더 행복할거라며, 나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셨고, 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고 운동기구를 팔아야했어요. 그럼에도 저는 제 꿈을 절대 버리지 못 했죠. 처음에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아빠였지만, 가난과 그리움에 지친 아빠는 엄마를 욕하며 매일 술만 드셨고.. 결국 알콜중독이라는 병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셔야 했어요. 저는 단 한번도 제 출신이 부끄럽거나,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젠 정말 부끄럽고 원망스러 워 미치겠어요! 흐흐흐흑....” 아무말 없이 묵묵히 슈엔의 말을 듣고 있던 혜란은 정이 넘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슈엔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슈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볼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슈엔은 더욱 눈물이 났다. 엄마가 떠올랐다. 아플때면 따뜻한 자신의 품에 끌어 안아 조심조심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따스한 손길까지... “슈엔.” “...” “일단 씻고, 오늘은 우리집에서 하루 묵고 가. 시간이 늦었으니까.” “....동정..하시는 건가요...?” “후후후. 아니? 내가 왜 슈엔을 동정해야 하지?” “그럼 왜...” “슈엔양과 나. 우리둘은 거래를 한 거야. 나는 잠자리와 음식을 슈엔양에게 제공하는 대신, 슈엔은 그 두배에 달하는 이득을 내게 안겨줘야되.” “제, 제가 무슨 수로...”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 ‘나 정혜란은 절대 이득 없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후후후. 그리고 난 실제로 이때까지 이득 없는 거래는 해본 적이 없구 말야. 슈엔 때문에 깨지지 않게 해줘. 알았지?” 혜란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올려 시연을 쳐다보았다. 멀뚱히 서서 오도독오도독 딸기맛 사탕을 씹어먹고 있는 시연은, 정말 누가봐도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웠다. 혜란의 눈에 따스함이 가득 찼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사랑! “사랑스러운 따알?”“웅... 오독오도독... 왜?” “사탕 그만 먹고 슈엔이 묵을 방 좀 정해주지?”“우웅...오도독... 그럼은 슈엔 우리 집에서 사는 거야?” “음... 일단은.” “앗싸!!! 오도독..꿀꺽.. 근데 오빠가 반대하면 어떡해? 못된 공부벌레 놈!”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다연이야 내가 설득하면 되고..” “치. 공부벌레 맞는데 뭐... 슈엔 따라와!” 시연은 사탕을 하나 더 입에 물고는, 한참을 울어 퉁퉁 부은 눈을 자랑하는 슈엔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2층으로 이끌었다. 슈엔은 처음보는 넓고 거대한 집에 넋을 잃은 채 두리번 거리느라 바빴다. 2층에는 총 5개의 방이 있었다. 시연의 방과 다연의 방, 서재와 피아노방. 그리고 빈방. “에헤헤. 슈엔은 이제부터 여기방 쓰면 되. 앗! 딸기맛 사탕이 다 떨어졌잖아~! 우엥, 안되안되! 어서 가지러 가야지~!!!!” “자, 잠깐만.” 텅 비어버린 치마주머니를 보며 눈물지으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시연은, 갑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소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빙그르르 몸을 돌려 슈엔을 쳐다보았다. 고귀함을 지닌 흑빛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머리카락 한올이 찰랑일때마다 향긋한 꽃향기가 집안을 뒤덮는 듯 했다. “왜?” “나에게... 왜 이렇게 많은 걸 베푸는 거야? 이득이 없는 거래는 안 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움헤헤. 슈엔, 바보야?” “그게 무슨...” “이득이 없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즉, 당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겠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건.. 정말 못 할 짓이겠죠?” 비웃음이 아닌, 정말 진심을 머금은 미소가 시연의 얼굴에 걸렸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평온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그런 부드러운 미소는 슈엔의 눈동자에 아주 뚜렷하게 새겨졌다. “그럼 난 이만~” 시연은 매정하게도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있는 슈엔을 뒤로 한 채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2층 거실에 멍하니 서있는 슈엔의 석류빛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무한한..가능성을 믿겠다고...? ...이들은 정말...날 믿어주는 걸까? 진심으로....? 누군가가 날 믿어준다. 누군가가 내 뒤에 서준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이 느낌이 제발 헛되지 않기를! 이들이 항상 내곁에 있기를! 슈엔은 작고 흰 두 손을 말아쥐었다. 작지만 강한 파워를 지닌 두 주먹은 슈엔에게 준비가 ?榮募? 듯 부르르 떨렸다. 슈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날 믿어주는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진 않을것이다! 힘에 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스스로 주저앉진 않아! 강한 투지를 보이는 슈엔을 보며 혜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흠.. 현재까진.. 아시아를 좌지우지 할 만한 가수가 될 가능성 25%정도? 훗.” 5. “시, 시연아~” 시연의 방이 빼꼼히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한참 달콤한 잠에 푹 빠져있던 시연은, 자신을 부르는 부드럽고 촉촉한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우웅. 슈엔... 어서 자지 않구 뭐해..” “자는데 진짜 미안한데.. 저, 내가 무대에서 부르려고 준비했던 노랜데..” “하아아암... 응, 근데?” “녹음도 못 했고, 미완성이긴 하지만.. 한번 들어보고 평 좀 부탁해도 될까...? 진짜 미안해..” “아, 뭐.. 괜찮아. 한번 불러봐. 하아아아암.” 시연이 한쪽눈은 감은상태에서 한쪽눈만 힘겹게 뜬채로 슈엔에게 물었다. 시연의 힘겹게 뜨인 눈동자에 슈엔의 긴장된 얼굴이 비춰졌다. 시연의 허락이 떨어진지 약 30초가 흘렀을까, 긴장한 듯한 슈엔의 표정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천천히 석류빛 예쁜 입술에서 곱고 달콤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남자라면 절대 거부하지 못 할 아름다움과, 얼음도 스르르 녹여버릴 듯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성이 시연의 방을 은은히 울렸다. 약 3분간 슈엔의 노래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전혀 느끼지 못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그만큼 매혹적이고 달콤한 노래였다. “어, 어때? 이, 이상해?” 슈엔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되어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름...다워, 유리속에 담긴 보석같달까. 만지만 때가 탈 것 같고, 톡 하면 깨질 것 같은 느낌. 그 안에 아름답고 화려한 무언가...” 시연의 평가에 슈엔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 유리속에 담긴 보석. 이런 평을 누군가에게 받아 본 적이 있는가. “흐흐흐흑...” “그 아름답고 화려한 무언가는, 네 노래를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게 분명해. 역시 슈엔은 대단해” “시, 시연...” “엄마같은 사람이 왜 널 믿었는지 슬슬 이해가 가려고 하는데?” 시연의 흑빛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반짝임은 사라졌다. “시, 시연아~!!!!!” 시연의 몸이 한 쪽으로 기울더니 쿵! 잠들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연이 친구라는데 한번 키워보려고 하는데, 다연이 생각은 어떠니? 당신은요?” “글세, 당신이 키워보겠다고 할 정도면 가능성이 있나 본데?” “후훗, 글쎄요. 뭐, 열정과 투지 만큼은 높이 사줄만 하죠.” 혜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빛을 본 성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의 선택! 난 받아들이겠소.” “...뭐, 엄마가 그렇게 강력하게 밀고 나갈 정도면 가능성은 있나보군요. 저도 뭐, 괜찮아요. 여동생 하나 더 생긴셈 치죠. 그런데... 시연이 같은 성격은 아니죠?“ 어제까지만 해도 4개였던 의자가, 어느새 5개로 바뀌어져 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큰 눈망울을 가진 순정만화 캐릭터를 똑닮은 슈엔이었다. “오빠, 슈엔 이쁘지. 이쁘지, 이쁘지, 이쁘지~?” “글세, 시끄럽대두. 밥이나 먹어.” “치이.” 찡얼거리는 시연의 머리를 살짝 매만져주고는, 시연의 밥 수저위에 반찬 하나를 집어 올려주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슈엔쪽을 바라보는 다연이었다. 고동색의 눈동자와, 흑빛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그다지...” 밥 한 숟갈을 떠먹으며 무심히 내뱉는 다연이었다. 슈엔은 다연의 말에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외모라면 어디가서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길거리에 나가도 따라오는 남자들이 무수히 많았고, 대충 하고 나가도 연예인인줄 알고 쫓아오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연이 자신의 외모에 감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다연의 대답은 ‘그다지’였다. “그다지라고? 흐음. 슈엔 이쁜데.” “밥이나 먹어. 그럼 저 먼저 학교 가겠습니다.” 다연이 숟가락을 식탁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붉은빛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왔다. “저 녀석, 무지 힘들텐데.. 어제도 밤새도록 공부하는 것 같더구만.” 깔끔한 정장차림의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성이 말했다. 시연의 아버지, 성환이었다. “아, 슈엔양?” “예... 예?” 슈엔은 성환의 물음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실수는 하고 말았다. 성환은 보기좋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아.. 예.” “후후훗. 반드시 유명해져서 보란듯이 기획사에 복수해야죠? 날 놓친건 당신들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다!” “헤헤헷. 네에.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와요. 근데 정말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하하. 그럼요, 있고 말고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어봐요, 꼭! 여보, 나도 이만 나서야겠어.” “벌써요?” “하하. 미안하오, 오늘은 좀 바쁘다오. 그럼 다녀오겠소.” 성환이 혜란의 볼에 촉 하고 뽀뽀를 하고는 나가버렸고, 시연은 닭살이라며 팔을 손으로 싹싹 비비며 말했다. “쳇! 40살이나 먹었으면서 주책은~” “.....흐흐흑..! 아이고, 여보오오오~!!! 못난 딸이 또...” 푼수떼기 두 모녀의 어이없는 행동에 한숨을 내짓는 슈엔이였다. “끝날때 기다려. 우헤헤헤~!!! 먼저 가면 밥 안 줘~!!!! 알았지?” “휴. 알았다니까? 벌써 5번째야!” “헤에.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 진짜 갈게!” 시연은 슈엔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반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A - 1반. “아쿠아머린이네! 너무 예쁘다~” “그럼그럼. 게다가 세공도 굉장히 잘 되었다고. 예쁘지? 호호호.” “진짜 비싸겠다.” “당연하지? 값어치로 따지면 니네 죽을때까지 먹여살릴 수도 있다구.” “단비야, 넌 진짜 좋겠다. 아빠가 보석도 막 사주고...” “호호호. 좋기는.. 아빠가 나중엔 더 좋은거 사주시기로 했거든. 이 정도 쯤이야. 호호호호.” 1분단, 1학년 아이들이 앉은 분단에 여자4명이서 깔깔깔 웃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푸른빛 아쿠아머린이라는 세공이 잘 된 보석목거리가 들려있다.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것은 당연했다. “에힝, 저런 것 보다는 딸기맛 사탕이 훨 좋은데...” 시연은 투덜거리며 맨 끝자리에 앉았다. 창가쪽이라 그런지 푸른색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시연은 문뜩 오빠생각이 나 3분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을 읽고 있는 강다연. 아름답다. 고귀하다. 기품있다. 멋있다. 몇몇 여학생들은 침을 흘리며 다연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간혹 디카를 꺼내 몰래 찍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쳇! 저런 책벌레가 뭐가 좋다고!” 시연은 다연의 모습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 한 채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빛을 갖은 것 같은 바람이 시연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아. 상쾌해...”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자리에는 딱 한자리. 시연의 옆자리만 비워져있었다. 여자애들이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았을 터 이지만, 남학생들이 시연의 옆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점이었다. 사실은 이랬다.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시연이 혼자앉아있는데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바람의 맛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침을 질질 흘리며 가위바위보를 해 시연의 옆자리를 정하려했다. 그러나, 가위바위보에서 졌다고 순순히 물러날 이들이 아니다. 상대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시연이다! D반 애들과 대결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시연의 옆자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였다면 가위바위보를 애초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치고박고 싸우던 중, 선생님이 들어온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연의 옆자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 “늦어서 죄송합니다.” 짙은 검은색의 매력적인 머리카락과,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에 하얀 피부. 전체적으로 사나운 느낌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소년이었다. 다연과 비교하자면 정반대타입! 다연은 아름답고 기품있는 귀공자 타입이라면, 저 소년은 날카롭고 차가운 성격의 반항아 타입이랄까? “아, 어서 앉도록!” 그렇게 소년과 시연은 짝이 되었다. 서로에게 아무런 호감도 느끼지 못 한 채. 6. 시연은 자신의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시연의 눈동자에 비친것은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앞머리에 살짝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매서운 눈매. 오똑한 코와 붉그스름한 입술이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이미지의 외모만 보고 살아왔던 시연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여중을 나왔기때문에 남자를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안녕? 나는 강시연이라고 해.” “난 민여환.” 붉그스름한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만큼 달콤한, 매혹적인 보이스가 흘러나왔다. 민여환. 시월중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짱'자리를 차지했던 소년이다. 싸움을 좋아하거나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연히 걸어온 싸움에 한번 대응해줬을뿐인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시월중학교 전 '짱'이어서 자동스레 '짱'이 되었다. 아이큐 170의 가히 상상도 불가능케 만드는 천재였다. “여환아. 여환아.” “...?” “넌 몇 점 맞구, A-1반 된 거야?” “2개 틀렸어.” 턱을 괸 채 여전히 시선은 선생님쪽을 향한 채로, 여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대답에 시연은 입을 쩌억 벌렸다. “헤에에엑, 진짜? 와! 진짜 짱이다.” “...? A-1반이면 애들 대부분 다 그렇게 맞았을 텐데?” “에.. 설마.” “역대 선배들만 따져봐도 그래. 저 쪽에 앉은 붉은빛 띈 머리카락 선배만 해도, 올백맞고 들어온 천재중의 천재라고.” 그 ‘붉은빛 띈 머리카락 선배’는 시연의 오빠 ‘다연’이었다. 그랬다. 시연과 달리 다연은 정말 총명하기 그지없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며, 자기 자신을 제어할 줄 알고 관리할 줄 아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아, 그래?” 이런 공부벌레 놈! 그 요상한 문자들이 마구 나오는 시험을 다 올백 맞다니. 저게 인간이냐고. 씨. 역시 공부벌레 였던 거야. “이번 학생위원회에서 나온 ‘수련회’에 관한 의견인데. 음.. 많은 의견들이 나왔지만, 북경과 도쿄에 가자는 의견이 가장 많았거든. 너희들 생각은 어때? 교장선생님께서 우리반에게 결정권을 내리셨는데 말야.” 고등학생이 도쿄와 북경으로 수련회를 간다니. 보통의 고등학생이라면 꿈도 못 꿀 정도였다. 제주도도 못 가본 애들이 투성인데 무슨 도쿄와 북경이란 말인가. “도쿄는 많이 갔던 데 잖아.” “그러게. 도쿄랑 북경은 너무 시시하지 않아?” ...아아아. 이들은 보통 17~19살의 어린 청소년들이 아니다! 이들은 바로 그 유명한 '윤세고등학교'의 주요 급 A- 1반이다! 아시아를 이끌어가는 힘의 원천이라 여길 수 있는 윤세고등학교의 학생들인 것이다! “너희들은 어디가 좋을 것 같니?” “북경이 낫지 않나?” “아냐, 도쿄가 낫지! 예쁜 누나들이 얼마나 많은데.” “북경에는 없냐. 그리고 북경 맥주가 맛이 끝내주거든?” 기현은 여러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다가, 학생위원회 최고 급인 학생회장 강다연을 쳐다보았다. 깔끔하고 지적이며, 다정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다연. 검붉음과 흑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소년! “음..” 같은 남자가 봐도 부러울 만큼 아름다운 소년이다. 기현은 살짝 고개를 더 돌렸다. 학생회장 후보에 올라있는 2학년 김선우. 예쁘다는 말이 가장 적격인 소년이긴 하지만.. 왠지 모를 차가움과 신비로움덕에 더욱 매력적인 소년이다. 1학년 분단. 예쁜 아이들이 많기로 유명한 학년.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반임에도 불구 정말 예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주단비. 성명그룹의 외동딸로, 머리도 좋고 어렸을때부터 기대를 많이 받아던 소녀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오목조목 예쁘장한 것이 정말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 민여환. 저 녀석에 대한 것은 알려진게 별로 없다만... 날카로운 기세가 장난이 아닌 녀석이다. 아이큐 170에 그 어렵다는 시험을 2개밖에 안 틀린 녀석. 그것도 심화문제는 다 맞았다! 가히 천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녀석. 그리고. 그 녀석 바로 옆자리에 앉은 흑색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 투명하고 뽀얀 하얀 피부에 흑색눈동자를 가진 매력적인 소녀이다. 뭐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달까.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그런 소녀였다. 특히 석류빛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릴때면 반 남학생들은 다 뒤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저 소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두뇌와 평범한 실력으로 입학한 소녀. 강 시 연. 그러나... 기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강시연은... 그리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럼 다수결로 의견을 정하도록 하자.” 각기반마다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기현이 먼저 북경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했고, 많은 여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술을 좋아하는 남학생도 몇명 손을 들었고. “그럼 도쿄에 가고 싶은 사라암~?” 그 순간... 천장이 무너질 뻔 했다. 모든 남학생들의 손이 번쩍! 천장을 향한 것이다. 그 이유야... 뻔했다. 섹시한 누님들에게 혼이 팔렸던 것이다. “여환아아~” “...” 만난지 고작 15분인데 이름까지 부르며 친근하게 구는 시연이었다. 그렇다. 시연에게 낯가림이란 전혀 없었다! 여환의 짙은 검은색의 깊은 눈동자가 시연을 향했다. 흑요석같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시연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연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저.. 너는 왜 손 안 드냐고.” “어차피 못 갈테니까.” “에.. 못 가다니? 왜? 비행기 공포증이라도 있어?” “...” 그 물음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는지, 입을 다무는 여환이었다.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여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환의 앙 다문 입술은 전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걸로 도쿄에 가는 것으로 결정하겠다. 그럼 오늘 하루도 수업 재밌게 받도록!” 기현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앞문을 열고 나갔다. 시원시원 성격좋은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은 시연이었다. 선생님이 나감과 동시에 여환은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여환의 크고 듬직한 등이 시연의 눈에 비춰졌다. “치이. 가르쳐주면 어디가 덧나냐? 퉤퉤퉤, 치사해서 그냥 간다, 뭐! 슈엔이나 만나러 가야지.” 슈엔을 만나러 갈 셈으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쫑쫑 뛰어가는데, 어떤 여학생들 뭉탱이가 자신의 오빠, 다연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주단비라는 여학생과 그 패거리였다. “흐응.. 아침에 아쿠아머린 목걸이 가지고 자랑하던 그 여자애잖아?” 시연은 물끄러미 다연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 오빠, 저는 주, 단, 비 라고 해요.” “...그런데?” “이거 드시라고요. 되게 비싼 쿠키예요. 오빠 혼자 맛있게 드셔야되요. 후훗.” 주단비 패거리는 다연에게 쿠키상자를 건낸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요염한 포즈로 앉아 도도한 표정으로 다연을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결국 자신에게 넘어오게 되있다. 나의 아름다움과, 나의 화려한 뒷배경에. 주단비. 겉으로 보이는 청순하고 예쁘장한 외모와는 달리 중학교때부터 소문이 안 좋았던 소녀이다. 여학생들은 치를 떨만큼 그녀를 싫어하고 혐오했지만, 남자애들은 항상 그녀의 외모에 혹해서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었었다. 아무리 임자가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든 뺏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항상 자신이 유혹 한번 하면 남자들이 넘어왔었기에 남자를 거의 뭐보듯 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강다연이라는 남자는 외모에 혹해서 쉽게 넘어갈 남자가 아니다. 흔히들 따지는 외모. 그러나 다연은 외모를 보지 않는다. 더 쉽게 말하자면. “흐응... 불쌍해서 어쩌지. 우리 오빠는 여자한테 관심 없는데.” 강다연은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는 철칙의 소유자였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공부에만 관심이 지대한 그였다. “난~ 슈엔이나 만나러 가야겠네~” 7. “슈엔!” 시연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D -1반을 둘러보며 외쳤다. 가수 지망생인 아이들과 모여서 댄스 연습에 한창이던 슈엔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에 춤추던 것을 멈추고 교실 뒷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흑발을 휘날리며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소녀. 정말 매력적인 소녀. 무슨 짓을 하건 예뻐보이기만 할 것 같은 소녀. 생전 처음보는 자신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집으로 들인 소녀. 자신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소녀. ‘강시연’. “왠일이야, 시연아?” “그냥 심심해서.” “휴우. 공부 안 해?” “글세?” “휴. 조금 있음 수업종 쳐.” 시연은 슈엔의 말에 교복 소매를 살짝 걷어부치고는 시계를 보았다. 깔끔한 디자인의 갈색 시계가 하얀 손목에 걸려있었다. “휴, 벌써 이렇게 ?楹?. 나 가야 겠다. 슈엔 안녕!!! 좀 있다가 봐~~~” 시연은 마구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슈엔은 그런 시연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게 새로운 희망을 준 사람... 강시연...” 2교시 수업을 시작합니다. 한 여성의 부드러운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지지직 소리가 날 법도 하지만, 마치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기만 했다. “너 조금만 더 늦었음 지각이였어.” “헤헤헤. 나도 알어.” 여환의 말에 시연은 베시시 웃어보였다. 여환은 베시시 웃어보이는 시연을 빤히 쳐다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시연은 서랍에서 수학교과서와 노트를 꺼내고는 긴 생머리를 질끈 묶었다. 긴 생머리가 찰랑이며 좋은 향기를 냈다. 수업이 끝나고 시연은 아무리 풀어도 안 풀리는 수학문제 때문에 끙끙대다가 결국 다연이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문학 도서를 읽고 있던 다연은 누군가가 자신앞에 서자 읽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옮겼다. “...왜?” “오빠, 이거 어떻게 푸는지 가르쳐주면 안될까? 헤헤헤.” “휴우. 전혀 이해가 안 갔던거야?” “응!” 그럴만도 했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가히 따라가기 힘들정도의 수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1, 2, 3학년 별로 수준이 다르고, 선생님은 문제지만 나눠주고 개인별로 풀라고 한다. 문제를 푸는 아주 기본적인 설명만 해주고 응용해서 풀라는 것이다. “휴. 간단해. 이건...” 다연의 설명이 약 3분간 진행되었다. 다연의 설명을 집중해서 듣고 있던 시연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렇게 푸는 거구나. 헤헤헤. 오빠 고마워!” 시연은 수학책을 들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시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따라 나와.” 시연은 따라나오라는 주단비라는 여학생의 말에 의아해하다가 주춤주춤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주단비 일행은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레몬향이 나는 D반층 화장실과는 달리, A반층 화장실에서는 상큼한 사과향이 났다. 은은한 사과향에 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 “뭘 웃어, 좋냐?” 그러나 자신에게 꽃히는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과, 자신에게 쏘아붙이는 이들 때문에 금새 기분이 나빠졌다. “왜 그러는 건데?” 시연의 질문에 아이들은 피식 웃었다. 건방지게 되묻는 시연의 행동이 어이없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쓰윽 쓸어넘긴 주단비가 입을 열었다. 립클로즈로 인해 반짝이는 입술이 벌어지면서 약간의 무시조가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야. 강다연이 네가 덤벼도 될 인물로 보이냐?” 시연은 주단비의 물음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덤벼도 될 인물이라니? 자신은 단순히 수학문제가 너무 어려워, 자신의 친오빠인 그에게 가서 설명을 받으려 했을 뿐이다. “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랄이야.” “...알아듣게 말해.” “아, 이거 진짜 건방지네. 야, 얼굴 반반하면 다냐. 엉?” 분홍색 하트핀을 꽃은 여학생이 침을 딱 뱉으며 말했다. 시연은 이들의 오만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 표정은 뭔데. 넌 지금 니 잘못을 모르겠다는 거냐?” “...” “강다연은 말이야... 니가 넘볼 만한 인물이 아니시거든? 우리 단비가 찍은 분이시니까 건들지 말어라? 엉? 반반한 얼굴만 믿고 설쳤다가, 확- 긁힐 줄 알어라. 어? 알아듣겠냐?” “있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그러니깐. 반반한 얼굴 믿고 설치는 년들이 제일 싫다니까.” 시연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단비패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항상 활곡선을 띄는 입꼬리도, 생기로 살아넘치던 눈동자도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웃음, 밝음? 시연의 얼굴에는 원래부터 그런 감정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더구나 흑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서는 차가움이 한층 더 해져있었다. “야, 니가 그 따위 표정 지으면 누가 겁낼 줄 아냐?” “꼴깝 떨고 자빠졌네, 진짜.” “아오, 진짜 확 그어버리고 싶네.” 쏟아져오는 비난과 욕설에 시연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가고 있었다. 얼음같다. 그래. 그 것이 딱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맨날 실실 헤프게 웃으며, 푼수끼가 다분하던 시연의 모습은 이제 온데 간데 사라져버렸다. 눈빛 하나로 모든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기운이 퍼져나왔다. 차가움. 냉정함. 카리스마. 그것은 집안 내력인 듯 했다. 항상 헤프게 웃고만 다닐것 같던 시연은 이제 없었다. 집안 내력, 그 차가움과 냉정함이 살아나고 있었다. “후후후, 거렁뱅이 주제에... 같은 반에 섞여 있는 것도 짜증나죽겠는데, 감히 누굴 넘봐? 너, 이런거 본적은 있니? 잘 봐둬라~ 니 몸 팔아도 생전 구경 한번 해볼까, 말까한 거야.” 다갈색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진 주단비가, 아쿠아머린 목거리를 시연의 눈앞에 흔들며 비꼬았다. 시연의 흑색 눈동자에 아쿠아머린의 푸른빛이 새겨졌다. 흑색에 푸른빛이 곁들어지니 굉장히 아름다운 보석인냥 찬란하게 빛나는 시연의 눈동자. “왜에? 할말이 없나부지? 하긴 너 같은게 이런 값비싼 보석을 알겠니? 흥. 꼴같잖은 거렁뱅이 주제에 감히 누굴 넘봐? 웃기지도 않아서.” 주단비는 딱딱하게 굳은채로 서있는 시연을 하찮다는 듯 내리깔아보며 휙 돌아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단비 옆에 서있던 아이들도 킥킥 웃으며 욕 한마디씩 하며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시연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꼴...같잖은 거렁뱅이...?” 잠시 뒤 화장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몇 분이 흘렀을까, 쉬는 시간 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청소부의 비명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어머!” 화장실에 걸려있던 큰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있었고, 바닥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면대위에 갈색 시계하나. 깔끔한 디자인의 예쁜 갈색 시계 하나만이 쓸쓸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8. 시연을 지나쳐 교실로 돌아온 주단비와, 그녀의 일행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하호호 깔깔대며 수다를 떨었다. 시연의 차가운 눈동자. 서리가 낀 듯 꽁꽁 얼어붙은 눈동자. 자신을 무관심하게 쳐다보던 그 눈동자. 단비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시연의 차가운 눈에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승은이 단비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물었다. “단비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아니...” “근데 아까 걔 눈 봤어? 정말 장난 아니더라... 뭔 눈이 그렇게 매서운지. 소름이 다 끼쳐.” 단비의 10년 친구인 승은은 고급 브라우스에 가려진 팔을 마구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뒷문이 드르르륵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흑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얼굴에는 함박미소가 가득한 소녀, 바로 강시연이다. 아까의 차갑고 냉정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밝고 명랑한 시연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생기발랄한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은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다연은 아무렇지 않은 시연의 모습에 안심했으나, 시선을 내리다가 피로 범벅된 손과 피로 젖은 소매를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바로 시선을 올려 시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는 눈동자. 다연의 얼굴이 굳어지고, 붉은 입술이 하얀 이에 꾸욱 깨물어졌다. “...성격 제어 불가능.” 시연은 방긋방긋 웃으며 자기의 자리에 냉큼 앉았다. 그리고는 부시시한 머리를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키는 여환의 머리를 대신 매만져줬다. 하얗고 가녀린 시연의 손에 잡힌 여환의 검은빛 머리카락은 조용히 머리위에 내려앉았다. 왠지 엄마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시연을, 여환은 그다지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가만히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피비릿내에 얼굴을 굳혔다. “피..냄새..” “...응? 뭐라고, 여환아?” “...” 여환은 아무말없이 시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 시연에게는 피비릿내가 나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여환은 피범벅이 되어 보기 흉하게 된 오른손을 발견하였다. “아... 이, 이거는..” “소독 해줘야되. 안 그러면 곪아.” 여환은 뭐라 변명할 지 몰라 허둥대는 시연에게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은채 벌떡 일어나 교실뒷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런 여환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연은 한숨을 퍽 쉬었다. “휴우.. 근데 매너는 진짜 좋네? 헤헤헤.” 3교시 수업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여환은 3교시 수업이 시작했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들어와 체크 당하지 않았다. 여환의 손에는 빨간 소독약과 마데카솔, 데일밴드가 들려있었다. “손 내놔봐.” “내가 해도 되는데.. 헤헤헤.” 시연은 덥석 손을 내밀었다. 여환은 시연의 그런 거리낌 없는 태도에 피식 웃으며, 소독약을 발랐다. “아아앗..!!” 마데카솔을 바르고 데일밴드까지 붙여준 여환은 그제서야 시선을 돌렸다. 시연은 데일밴드와 여환을 번갈아 보며 베시시 웃었다. 굉장히 매섭고 차가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한 면도 있는 그였다. 첫만남이지만 좋은 느낌이 드는 상대다. 친해지고 싶다. “여환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알았지?” 여환은 수업을 듣다가, 자신의 앞으로 척 손을 내밀며 친하게 지내자는 시연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녀석이다. “하하하. 정말 황당하다, 너.” “친하게 지내자, 알았지?” “후후후.” 여환은 시연의 하얗고 작은 손을 살짝 잡았다. 시연은 여환의 손과 마주잡는 순간 뭔가가 지르르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약간의 떨림 비스무리한 것? “헤헤헤.” 시연의 푼수끼 섞인 웃음소리와 함께 여환은 또다시 한번 웃었다 점심시간. 삼삼오오 아이들이 짝지어서 급식실로 향했다. 책을 읽고 있던 다연은 책을 탁 덮고는, 시연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시연도 다연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참이었기 때문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시연은 다연을 보며 베시시 웃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다연의 말에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한창 집중해서 공부중이던 김선우는 다연의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김선우. 강다연 다음으로 최고의 인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대한민국의 주시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절대우상은 강다연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넘지 못 한다면 그의 뒤에 바짝 붙기라도 하겠다.’ 김선우가 본 강다연은 절대 한눈을 팔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자보기를 돌보듯 하는 사람. 학업에만 열중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멋진 사람. 그런데 그가 여자에게 말을 걸다니. 선우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여환아, 같이 먹자.” “아.. 나는 그다지 생각이...” “친구! 얼른 일어나세요!” 결국 여환은 시연의 손에 이끌려 급식실로 향했다. 9. “저, 시연아.. 누구...?” 슈엔은 처음 보는 얼굴 두개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하나는 하얀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갖은 민여환이었고, 하나는 긴 갈색 머리카락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이지만 고운 선과 붉은 입술이 예쁜 얼굴임을 증명하고 있는 김선우였다. “아, 얘는 내 새로운 친구! 민여환! 헤헤헤. 그리고 이쪽은.. 흠..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김선우라는 선배님!” 시연의 간단한 소개에 슈엔은 더 갈피가 안 잡혀, 확실한 다연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놈 다 몰라.” 결국 여환과 선우는 각자 소개를 했다. 그러나 둘 다 간단함에 경지에 올라있었다. “민여환.” “김선우.” “...휴...” 급식실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북적북적. 그러나 그렇게 시끄럽던것도 잠시. 다연. 시연. 슈엔. 선우. 여환의 등장에 모두들 말을 잃었다.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인냥 너무도 아름다웠다. 슈엔은 D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빛이 나는 아이였다. 타고난 재능은 물론이며, 그 정도면 좀 뻗대고 오만할 만도 한데 그런것도 전혀 없이 굉장한 노력파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예쁘장한 외모는 D반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항상 겸손하고 더욱 노력하려는 태도는 정말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게다가 시연과 다연은 또 어떤가. 흑색. 검붉은색. 그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조화에 학생들은 또 한번 넋을 잃었다. D반이 아니라 A반인데..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김선우. 짙은 갈색 머리가 눈을 덮고 있어 외모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했지만, 분명히 그는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 예쁠것이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이 적당한 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의 여자들보다도 고운 얼굴선에 하얀피부와 오똑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 정말 너무나 예쁠 것이다. 그의 얼굴은. 마지막.. 민여환.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흰 피부.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 그러나 마치 조각같은 아름다움. “아아아....” 그렇게 급식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 그 5명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밥을 받아, 먹을 뿐이었다. “원래 A반 학생들이 외모가 더 출중한건가?” 슈엔은 잠시 국을 떠먹는 것을 중단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슈엔은 다시 한번 여환을 훔쳐보았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길고 많은 속눈썹에 살짝 가려진 검은 눈동자가 정말 매혹적이었다. 약간의 반항기와 섹시함이 슈엔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러나 슈엔 보통의 여학생인가. '연예인'지망생인 그녀였다. 그것도 D반의 최고로 손꼽히는. (겨우 이틀째임에도 불구) 외모따위에 쉽게 흔들릴만큼 슈엔은 보통의 '여고생'은 아니었다. 슈엔 선우와 다연과 시연을 두루두루 바라보았다. 다갈색 머리카락의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리고 있지만, 고운 선과 언뜻 보이는 예쁜 눈망울로 추측해보건데 선우란 사람은 정말 예쁘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검붉은색 머리카락과 흑색 눈동자, 그리고 몸 전체에서 풍겨오는 카리스마와 지적인 섹시함을 가진 다연. 흑색 머리카락에 흑색 눈동자,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냥 너무나 예쁘고 순수하게 생긴 시연까지. “아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슈엔은 눈을 두어번 껌뻑였다. 어제 화장실에서 울고 있던 것이 자신이 살면서 가장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좋은 친구인 시연도 얻었고, 부모님같이 친절하신 시연의 부모님에, 아늑한 안식처와 친절하진 않아도 속마음은 꽤 다정한 듯 보이는 다연오빠. 게다가 이렇게 당당하게 A반 대표급의 인물들과 밥도 함께 먹고 있다. 다연은 이미 '윤세고등학교'의 대표 엘리트였다. 선우 또한 윤세고등학교의 대표 후보에 오른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평소에 푼수끼가 다분하긴 해도 A반인데다가, 유전자가 뛰어날것 같아 보이니 시연도 한 인물 하고. 여환 또한 A반인걸 보니 머리도 좋은 것 같고. “휴으..” 그에 비해 자신은 얼굴이 예쁜 것만 빼면 잘난것이 하나도 없었다. 집안도 형편없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얼굴이 예쁠 뿐. 하지만 이들 앞에서는 당당히 내세울만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과 맞먹을... 아니, 자신보다 더 뛰어난 듯 보이는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들앞에서 자신의 외모를 어떻게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까. 슈엔은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국을 떠먹었다. "후르릅... 앗, 뜨거!" 윤세고등학교의 급식은 바로 끓여 바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열기가 다 가시지 않아 뜨거운 상태였다. 그런데 국을 냉큼 입안으로 넣어버렸으니 혀를 데고 만것이다. 슈엔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무렵, 다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약 30초 가량이 지난뒤에 다연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얼음까지 동동 띄운 물이 담긴 물컵을 들고서. 다연은 무뚝뚝하게 슈엔 앞에 물컵을 내밀어주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슈엔은 다연의 예상치 못 한 행동에 깜짝 놀라하며 물컵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얼음까지 동동 띄운 맑은 물이 슈엔의 눈에 비춰졌다. “하아...”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슈엔~!!! 기다려야 되!!!!” “휴으. 벌써 13번째거든요? 이젠 그만 해도 되거든요?” 슈엔은 시연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낯짝 두꺼우신 시연은 그걸 못 느꼈는지 연신 헤헤 거리며 쫑쫑 뛰어다녔다. “그럼 있다봐요~~~ 안녕~~~~” 시연은 손을 마구 흔들고는 교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다연은 아무말없이 슈엔은 한번 쳐다보고는 교실안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그 뒤를 선우가 따랐고, 여환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고는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슈엔은 아무말없이 서있다가 D반 층으로 향했다. "다연오빠... 참 멋있단 말야." 10. 자리에 앉은 선우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연쪽을 쳐다보았다. 팔꿈치를 책상위에 댄채로 얼굴을 기대고 있는 모습은 정말 청순해보였다. 큰 눈을 반쯤 속눈썹으로 가려버린채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시연. 그리고 그 옆... 책상에 엎드려 있는 여환이라는 놈. “아마도 저 녀석이 1학년 강력 후보가 되겠지?” 기본 문제에서 실수로 2문제 틀리고, 그 어렵다는 심화 문제에서는 다 맞아버린 천재. 집안도, 뭣도 알수없는 미스테리한 녀석. “학교 중앙 컴퓨터.. 한번 해킹해볼까?” 좋은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보통의 윤세고등학교 A반 학생도 아니고, 2학년 대표인 그였다. 물론 다연이 도와준다면 더욱 손 쉬울테지만, 조금만 땀 흘리면 자신 혼자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안이 철저하다지만. “한번 시도라도 해봐야겠군.” 그렇게 단정지은 선우는 다시 시연을 쳐다보았다. 흑색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일때마다 꽃향기가 교실을 뒤덮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예쁘긴 하다. 모든 여성이 부러워 할만한 외모를 갖이긴 했다. 하지만 강다연이란 인물이 쉽게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줄만한 남자는 아니다. 그럼 도대체 왜? 항상 밥도 혼자 먹던 그가 왜?” 바람이 세어들어오고 모든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선우의 다갈색 머리카락도 바람에 맞춰 흔들렸다. 선우의 맑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예쁘기 그지없는 눈이었다. 여자보다 훨씬 예쁜 얼굴이었다. “후우...” 한 편의 영화같았다. 선우의 수심 어린 모습은.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받으며, 깔깔대며 들어오던 단비는 제자리에 우뚝 설 수 밖에 없었다. 뒤에 따라오더 아이들이 덩달아 멈춰서며 물었다. “단비야.. 왜 그래?” 아이들의 질문에 단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채 어느 한 곳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단비가 어딜 쳐다보고 놀라하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자신들도 헉! 하며 숨쉼을 멈췄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여자보다 고운 선과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 이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 했던, 다갈색의 너무도 예쁜 눈동자. 오똑한 콧날에 붉은 입술까지.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오승은...” “어.. 어? 으응?” “김선우. 자료 부탁해.” 김선우를 계속 주시한 채로 주단비는 도도한 자태로 자리로 향했다. 그 뒤를 아이들이 따랐다. 주단비는 강다연과 김선우, 민여환을 번갈아보았다. “...탐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이거 고민되는 걸?” 그렇게 몇 교시가 더 흐르고, 윤세고등학교의 교문이 닫혔다. “단비야, 미안해. 내가 최선을 다 해봤는데 더 이상은 무리야.” 어느 집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벽이 다 황금으로 도배된냥 삐까뻔쩍한 집. 물건 하나하나의 값어치가 상상을 초월하고, 무엇 하나하나가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오승은, 이게 뭐야! 결국 이게 끝이란 말야?” “휴... 최선을 다 해봤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우리 학교 중앙컴퓨터 해킹이 어디 쉬운 줄 알아? 강다연, 김선우가 아닌 이상 힘들다고.” 승은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올빽해서 묶고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비는 승은이 내민 A4 2장을 휙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승은에게 잘 가라는 말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휙 들어와버렸다. 승은은 힘 없이 가방을 메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승은의 핸드폰이 밝은 빛을 내며 전화가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가씨, 차 대기시켰습니다.” “나갈게요.” 승은은 핸드폰을 다시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단비가 들어간 방을 힐끔 쳐다보았다. 승은이 갈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단비는 인사도 하지않았다. 이미 승은은 그런 단비의 행동에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단비는 승은이 건내준 부족함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료를 힐끔 쳐다보았다. 1. 김선우. (본명) 2. 나이 18세. . . . . 20. 가히 천재라는 별호를 붙여줘도 마땅할 만큼 머리가 좋다. 물론 강다연과 비교한다면 조금 떨어지는 수준이긴 하나 굉장히 머리가 좋은 것만은 확실하다. “에게, 이게 뭐야! 이 정도 자료를 누가 못 구해! 하튼 오승은, 할 줄 아는게 도대체 뭐야?” 단비는 A4용지를 휙 집어던지고는, 씩씩 대었다. 그러다가 화장대에 비친 약간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열을 삭히려고 애썼다. “얼굴 망가질 뻔 했잖아, 휴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시연과 슈엔, 그리고 다연은 길거리에서 솜사탕을 파는 아줌마를 발견하고는 멈춰섰다. 달콤한 솜사탕에 유혹당하고 만 것이다. 시연은 냉큼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3장을 꺼내 “솜사탕 이따만한거 3개요!” 이렇게 외쳤다. 손으로 동그라미를 굉장히 크게 그리며 말이다. 솜사탕을 팔던 아줌마는 시연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을 지으시면서 시연의 부탁대로 솜사탕을 크게 부풀려 주셨다. “헤헤헷, 아줌마 감사해요. 달님, 해님의 축복을 모두 받으실거예요~!!!! 헤에에에.” 시연은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며 말했다. 아줌마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연일행이 솜사탕 하나씩을 받아, 솜사탕 아줌마와 거리가 멀어질 무렵. 어떤 남자무리가 솜사탕 아줌마 앞에 나타났다. 솜사탕 아줌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까 시연일행과 같은 교복이었다. “...음. 우리의 시연님이 이 곳에서 솜사탕을 사드셨군.” “그러게 말이야. 역시 먹는 것도 아름다우셔.” “솜사탕~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지. 역시 우리 시연님은 달콤한 분이야.” ... 솜사탕 아줌마는 그들의 왠 미친놈으로 보였다. 물론 아까 그 여학생 일행은 하나같이 훤칠하고 미모도 굉장히 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봐라. 완전 스토커에 미친놈이 아닌가. “아줌마, 우리 시연님이 드신 파란색 솜사탕 3개 주시오.” “...” “아줌마, 빨랑 달랑께요?” “...” “..아줌마!!!!” “글씨 안보여? 선불이라고 선불!!! 먼저 돈을 내놔야지 줄 거 아녀!!!!!” 그들은 어색하게 솜사탕기계에 붙어있는 [선불]이라는 글씨를 확인하고는 1000원짜리 지폐 3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줌마는 별 미친놈을 다 봤다는 듯 인상을 확 쓰며 돈을 받고는, 솜사탕을 대충 부풀려 그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 이런, 시연님을 놓치겠어!” “어서 뛰자!!!!” 그렇게 왠 남자무리들이 재빠르게 시연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시연의 일행은 뭔가 뒷통수가 찌릿하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냠냠. 아, 달콤해. 진짜 맛있다.” “맞어. 솜사탕은 언제 먹어도 달콤해.” 다연은 말없이 솜사탕을 먹다가 힐끔 시연과 슈엔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솜사탕의 달콤한 맛에 푹 빠져 다연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다. “후훗, 바보.. 똑같애.” 그 시각. 선우의 집에서는. 선우의 재빠른 손놀림에 의한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선우의 뽀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선우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후우...” 다른 사람같았음 때려쳤을게 분명하지만, 선우는 어떻게든 해킹을 하겠다는 듯 힘이 들면 들수록 더욱 눈에 빛을 냈다. 그렇게 5시간이 흘렀다. “하아, 다 ?榮?...” 5시간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중앙 컴퓨터 해킹 작업에만 몰두한 선우는 결국 중앙 컴퓨터를 해킹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왜 이렇게 오래걸렸냐고 할테지만, 사실 윤세고등학교 중앙 컴퓨터를 해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앙 컴퓨터의 보안장치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천재들(물론 윤세고등학교 졸업생)이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완벽에 가깝기 때문이다. “보자...” [A -1] 딸그닥. [. . . . . . . . . . . . . . .13번 민여환.] 딸그닥. “이름 민여환. 나이 17세. 희대 천재라 불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어렸을때부터 인정받은 천재. 현재 사업가로 이름을 유명히 떨치고 있는 강성환 못지 않게 치밀함, 사업력, 냉철함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의 아버지는 요즘 돈에 미친 더러운 놈팽이들과는 달리 모든것을 냉정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민수원 국회의원이다. 그의 어머니는 제 2의 피카소라 불리고 있는 김미현이다. 역시 배경도 뛰어나고... 대단하군.” 선우는 인터넷 창을 끄려다가 문득 X로 가던 마우스를 뒤로로 향하게 만들었다. [5번 강시연] 딸그닥. “이름 강시연. 나이 17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돌연변이라 칭해진다. 돌연변이? 왠 돌연변이?” 선우는 뭔가 기대와는 다른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계속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의 부모님은 사업계의 거물, 희대의 천재라 불리어지는 강성환... 가, 강성환?”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하는 선우에게도 강성환의 이름은 흥분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강성환. 그의 이름에 담겨져있는 무게는 얼마인가. 윤세고등학교 마지막 졸업자이자,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그.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배짱 좋은 사람이라도 벌벌 떨수밖에 없을 만큼, 카리스마 있고 좌중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그런 강성환의 딸이.. 황당하고 엉뚱한 강시연이라고? 그는 침을 꾹꺽 삼키며 스크롤바를 더 아래로 내렸다. “그의 어머니는 연예인들의 최고의 우상이자, 디자이너들의 어머니, 모델들의 존경대상인 정혜란.... 하... 하하..하...” 거기까지 읽은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강성환. 정혜란. 그 둘의 이름에 담긴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강성환 하나뿐이 아니라 정혜란까지. 그렇게 시연의 화려한 뒷배경에 넋이 나간 선우는 결국 마지막 두줄을 읽지 못 했다. 출처 :♥｀-^)／소설만땅넷ⓥ＼(＇-＾♥ 원문보기▶ 글쓴이 : 개장형아(완결) 댓글 38 인쇄 | 스크랩(34)▼ 여진Sz 여기도 내가 일빠? 06.06.07 15:18 답글 사냥나간꽃돼지 우와~ 진짜 잼있어요.^^** 맨 뒷줄 은.. 뭘까?? 06.06.10 14:31 답글 너만을... 앞에가 약간... 초콜릿공장 스토리?? 06.06.17 00:51 답글 はた。 재미있어요 ㅇㅁㅇ ~ 06.06.17 13:27 답글 선자12 와싸~~`잼나죽겟어요 06.06.19 21:16 답글 클리오네 재미있어요>ㅁ<~ 06.06.21 19:48 답글 파란나라 재밌어요~ >㉦< 06.06.24 14:56 답글 코코샤넬 퍼 갈께요~>_< 06.07.08 08:44 답글 love유~ 06.07.09 11:34 답글 테디베어 퍼갈게요 06.07.13 17:25 답글 *소설* 이거나!!봤는데... 06.07.13 18:27 답글 냠냠ㅇㅅㅇ** 재미있어요 ><ㅋㅋ 06.07.18 17:02 답글 준숙이핫투! 와~재밋어요ㅋㅋㅋㅋ와우~ㅋㅋㅋ 06.07.26 13:42 답글 호이♥ 시..시연이가 . 다연이 동생이란걸 알면 주단비나 선우나...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ㅋㅋㅋ 06.07.29 12:13 답글 류세이 안뇽하세요 시아입니다ㅇ_ㅇ 06.07.29 17:28 답글 하늘바다§ 재미있어요~~>< 06.08.08 17:04 답글 己r일락 향 ┐l☆ 스크랩해가요~ 06.08.13 11:49 답글 -FLORENCE- 마지막 두줄은 시연이 오빠 다연이일듯..ㅋㅋ 06.08.16 15:39 답글 봉황새 이거왠지 학교구성이 판타지소설 뉴라이프랑 비슷함 06.08.16 19:24 답글 흰나라 미라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 아니네요 근데 미라라는ㅇ ㅐ가 주인공인줄알았는데 아니네... 그래도 재밋어요 06.08.18 16:39 답글 이별뒤눈물 나도 들어가고 싶다~~~~~~ ㅡㅡ~~~~~~ 06.08.24 16:12 답글 마이마루 재밌어요~~ *>ㅇ<* 06.10.31 15:45 답글 하나님사랑 혹시 마지막 두줄은 다연의 동생이다라는 내용인가 이거 넘 잼있다 >_< 06.10.31 22:24 답글 멍청ㅇㅣㅋ 진짜 마지막 두줄 진짜 궁금ㅋㅋ 설마 다연이 오빠라는 그런 흔한???ㅋㅋㅋ 06.12.16 18:19 답글 barbara130 재미있어요~마지막 두줄 진짜 궁금하네요~ 06.12.23 22:03 답글 *은빛날개*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07.01.02 18:35 답글 나만사랑해줄래 스크랩.. 07.01.28 12:34 답글 天血[리듬] 와~;; 내가 들어 가면 미쳤군 ㅡㅡ 아씨 짜증나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ㅜㅜ [공부를 하냐?] 07.02.04 17:46 답글 muiy냥 너무너무 재밌어요! 마지막 두줄 너무 궁금.ㅋㅋ 07.03.15 22:30 답글 사랑해서죽을래 너무 재밌어~~ 07.05.10 21:03 답글 소설폐인 음냐음냐 도통무슨애긴지...시작부분읽다 패스! 07.05.25 22:09 답글 유숙이 퍼 갈께요~>_< 07.06.23 09:08 답글 ㄹㅔ몬사탕 재미잇어요 07.08.17 10:41 답글 사수 자리a 퍼가요 ~~ 07.11.21 19:37 답글 오늘은웃자 대단합니다..ㅋㅋ 08.02.14 20:08 답글 류비아 이거봤던거 같은데 -_-;;;;으흠 08.06.25 11:10 답글 『 묘(猫_)』 아마도 마지막 줄은 다연이와 혈연 관계라는 내용이겠죠?ㅋㅋ 하여간 머리는 진짜 좋다 들.....나는 아이큐 검사하면 두자리수 나오는거 아녀?- _-헐... 08.07.21 16:31 답글 월햐소설 스토리 좋을듯해요 ㅋㅋㅋㅋㅋㅋ 09.10.25 18:44 답글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회원은댓글을 쓸수 없습니다.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윗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11~20) 2006.06.06 ▼아랫글 | [미늬천사능★]º★광명고일진짱 주광현 ♥ 광명파보스딸 은혜원★º 사랑대작전。71~79[完] 2006.05.30 ▲top 서비스 약관/정책 | 권리침해신고 | 카페 신고 | 이용약관 | 카페 고객센터 | 검색비공개 요청 음식 (공개) 카페지기 서로몬 회원수31,416 방문수367 프로필 ▼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정회원 메일 11 쪽지 0 내가 쓴 글 내글 반응 카페 글쓰기 카페 전체 메뉴▲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17) 노을뱅이<나>gpfus너굴사율미니민이응, 안녕?은빛바다데구루루구룽우웅곰린민하울착한사람송연경체리홀릭일등급버니스loves811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숨기 RSS | 자주가는카페 추가 카페 탈퇴▶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스크랩]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11~20)|　　　　펌인기소설 작은별소녀 | 조회 3641 | 06.06.06 23:39 http://cafe.daum.net/boyhamr/5M8v/657 ＊──────────────────────────────＊ （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 11. “자.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라는 사실, 모두 알고 계시죠?” 담임의 말에 아이들은 힘차게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몇 몇 아이들의 표정은 암울했다. 시험.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모두 꺼려하는 존재.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시험이라는 말에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소녀는, 연예계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D반 학생들이랑 겨뤄 한 치의 밀림도 없을 것 같은 예쁜 외모를 가진 '강시연'이다. “넌.. 조금 있음 시험이라는데 겁 안 나?” “흐응.. 여환이는 시험이 무서워? 왜 겁이 나?” “글??, 무섭지는 않지만...” 여환도 걱정은 되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시연은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은 그냥 테스트에 지나지 않는걸? 내 수준을 알아보는 것에 불과한데 뭐가 겁나?” 여환은 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시험은 현재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를 측정하고, 더욱 보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학생들의 대다수는 시험이란 말을 들으면 걱정하고, 두려워 하고, 꺼려한다.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일런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D반 아이들은 모두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D -1 반 선생님인 김유리가 한 말은 아이들을 모두 긴장시켜버렸다. “여러분은 오는 중간고사날 대한민국 톱스타들을 키운 기획사 분들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각자의 목적에 알맞게 노력하세요.” 슈엔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돌아오는 중간고사. 약 2주일 정도 남았다. 2주일 뒤면 톱스타들을 키운 기획사 높은 분들에게 평가도 받을 수 있고, 조금 더 있으면 정혜란씨의 무대에도 설 수 있다. 슈엔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올라왔다. 참기가 힘들 정도로.. 뜨거운 무언가가 슈엔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슈엔의 가슴속에서 차갑게 식었던 무언가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꿈에 대한 '열정' 이었다. “그러니까 중간고사날 우리는 시험을 보고, 슈엔은 평가를 받는다고?” “응.” 슈엔은 빙긋 웃으며 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연은 뭔가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는지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치, 그런게 어딨어. 우리는 이상한 문제들만 푸는데.." "글쎄, 나한테는 그 이상한 문제들보다 그들앞에서 노래 부르는게 더 힘들게 느껴지는데?" "슈엔은 가수가 꿈이랬지?” 시연과 대화를 나누던 슈엔은 혜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슈엔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아줌마...” “네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봐.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하고.” “...” “참, 패션쇼 날짜 잡혔으니까 워킹에 좀 더 신경 쓰고, 몸매 관리 철저히 하고.” 슈엔은 혜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혜란은 좀 쉬라며 시연과 슈엔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작업실로 향했다. 슈엔과 시연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방으로 향했다. 시연이 방에 들어가고, 방에 들어가려던 슈엔은 문득 멈춰서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다연의 방이었다. “오빠, 뭐하고 있을까...?” 슈엔은 슬그머니 다연의 방문을 열었다.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고 방문은 스르르 열렸다. 다연은 자고 있었다. 침대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뽀얀 피부와, 검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길고 짙은 속눈썹, 오똑한 콧날...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한번 만져보고 싶다. 쓰다듬어 보고 싶다. 강한 욕구가 치밀어올랐다. 슈엔은 살그머니 다연의 뺨에 손을 얹었다. 보드라운 느낌이 손으로부터 천천히 느껴져왔다. “으으음...” 뒤척이는 소리에 슈엔은 깜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다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에 빠져있었다. “휴...” 슈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연을 한번 더 쳐다보았다. 지적인 섹시함, 카리스마, 내면에 숨겨진 다정함과 부드러움... 왠지 탐이 나는 남자. “...내가 왜 이러지.” 슈엔은 머리를 거칠게 좌우로 흔들며 모든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연오빠가 너무 잘생겨서 그래! 맞아, 그래서 그런거야. 그래서 그런걸거야.”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앞에 모두 모인 가족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때 성환이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아, 시계는 어디 갔니?” “시계? 아, 그거 당연히 여기... 아!” 생각해보니 저번에 화장실에 두고 왔었던 것 같다. 아, 바보 같으니라고. 아빠가 사준 시계를 그냥 두고 오다니! “그게.. 방에 있어요. 헤헤헤.” “마음에 든다고 맨날 차고 다니더니만?” “아.. 요즘 팔이 좀 답답해서요.” 그렇게 얼버무린 시연은 어디가서 시계를 찾을지 고민이었다. 그런 시연을 보며 다연이 조용히 말했다. “청소부 아주머니께 여쭤봐.” “아! 그럼 되겠구나! 오빠 땡큐.” 그런 시연을 보며 다연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하얗고 가녀린 손에 붙어있는 데일밴드. 그런 데일밴드를 보며 다연은 더욱 걱정이 되었다. 이 바보가 윤세고등학교에서 잘 생활 할 수 있을까. 12. 밥을 먹던 슈엔은 살짝 고개를 들어 다연을 쳐다보았다. 검붉은 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밥을 먹는 모습은 마치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 아름답고, 너무 멋있었으며 슈엔의 심장을 설레게 만들었다. “아아아..” “슈엔? 왜 그래, 어디 아파?” 옆에 앉아있던 시연은 슈엔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한 눈으로 다연만 쳐다보고 있는 슈엔을 보고 시연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미라의 증세랑 비슷하네.. 흐응..” 미라가 어떤 남자를 볼 때면 항상 이런 표정이었다. 약간 넋이 나간 듯한 표정. 그런데 슈엔도 약간 넋이 나가서 자신의 오빠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증세는 분명 미라가 말하길 ‘사랑’이라고 했다. “헛..!” 그럼 슈엔이 오빠를? 아, 그건 말도 안되. 말도 안 돼. 설마. 만난지 얼마나 ?榮鳴?!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슈엔을 쳐다보았다. 밥을 먹고 있던 다연은 자신을 향한 너무 강렬한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연이 데려온 약간 바보 끼가 있는 슈엔이라는 녀석이었다. 깡 마른 데다가 성격도 약간 시연을 닮아 바보같고, 가끔 멍할 때가 많은 녀석. 그런데 왜 저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거지? “핫..!” 슈엔은 다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리 앉았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밥만 열심히 퍼먹었다. 아니, 먹었다기 보다는 그냥 들이부었다는 말이 적격일 듯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음식을 마구 밀어 넣은 슈엔은 고개를 끄덕해보이고는 벌떡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버렸고, 그 뒤를 시연이 따랐다. 한 순간에 식탁에는 정적이 찾아왔고, 고요함만이 남았다. 결국 다연도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고, 성환과 혜란은 이런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슈엔이 우리 다연이를 좋아하는 건가?” “후훗, 우리는 간섭 말아요. 알았죠?” 혜란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슈엔의 수심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엔, 뭐야. 응? 우리 오빠 좋아해?” 슈엔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에게 묻는 시연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자신도 자신의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확신이 없었다. 그냥 그를 보면 설레고, 다가가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단정 지을 확신이 없었다. “말을 해봐, 슈엔!~” “..그게..” “응!” “보면 떨리고, 보면 또 보고 싶고, 보면 다가가고 싶고... 왠지 보기만 해도 웃음 나오고...” 슈엔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런 확신도 없으면서 이것저것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부터 정리 한 후에 시연에게 말하고 싶었다. 입을 굳게 다문 슈엔을 보고는 시연은 조용히 슈엔의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서있는 다연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아씨! 놀랬잖아, 오빠!” “왜 저러냐. 바보 투?” “바보..투?” “그래, 넌 바보 원. 저거는 바보 투.” “뭐야?!! 내가 왜 바본데에에!!!!!!!” “바보니까 바보지. 그리고 쟨 왜 날 빤히 쳐다보고 난린데? 밥 먹는데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시연은 다연의 투덜거림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휙 들어와 버렸다. 저런 게 어디가 좋다고, 쳇.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역시나 다연은 먼저 학교로 향했고, 10~15분 뒤 슈엔과 시연이 뒤 따랐다. 슈엔은 노란색 긴 생머리를 고데기로 웨이브지게 하고는 반묶음으로 하트 핀을 꽃았다. “슈엔 오늘따라 되게 예쁘다.” “헤헷, 고마워.” “왜 이렇게 예쁘게 한 건데?” “그냥.” 슈엔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받으며 유유히 교문을 통과했다.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른 시연은 왠지 누군가가 화장실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화장실 칸 안을 한번 씩 쓰윽 ?y었다. 역시나 한 여자애가 변기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시연이 살짝 손을 뻗어 그 여자애에게 손을 데려는 순간, 그 여자애가 날카로운 손놀림으로 시연의 손을 쳐냈다. “아!” 시연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호의를 왜 저런 식으로 무시한단 말인가. “너 몇 반 누군데!” “...” “씨이.. 나는 A- 1반 강시연이야. 넌 몇 반 누구냐고!!” “...” “씨이! 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시연은 쀼루퉁하게 입술을 쭉 내밀고는 그 여학생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흘렀다. 침묵 끝에 결국 그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A- 1반... 김연희..” “에에? 나랑 같은 반이잖아, 그럼! 너 한번도 못 받는데!” “난 너 봤어! 많이!”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볼에 주근깨가 많은,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 묶은, 그저 그런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여고생. “날 많이 봤다고? 난 너 한번도 못 봤는데...” “하긴 A- 1반에 꽃인 너가 날 봤을 리가 없지.” “뭐라고?” 가시가 콱콱 박힌 듯한 날카로운 말에 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자신에게 이리 공격적으로 나오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우리 반 꽃 아니니? 그러니 나 같은 게 보이기나 하겠어? 주위에 많은 꽃들과, 남자들의 시선만 느끼겠지. 너희들은 하나같이 다 그렇잖아, 아냐?” 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서히 김연희라는 여자애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결국...” “...” “니 말은 내 외모를 질투한다, 이거잖아?” 시연의 얼굴이 다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시연의 장난기 섞인 말에 김연희란 여자애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어졌다. 상대가 기분 나쁘길 바라고 톡톡 쏴붙인 건데, 오히려 상대는 헤헤거리며 되받아쳤고, 자신을 더 황당하게 만들어버렸다.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서로 기분 상할 뻔 했잖아. 헤헤.” “....뭐, 뭐라고?” “내가 보기엔 너도 충분히 이쁜데, 왜 그래?” “너 지금 나 희롱 하냐? 엉?” “에이, 설마. 이거 받아.” 시연은 김연희란 여자애의 손에 무언가를 꼬옥 쥐어주었다. “이게 뭔데?” “내 친구라는 증표!” 시연은 헤헤 웃으며 손을 물에 한번 헹군 뒤 화장실을 나갔다. 김연희란 여자애가 시연이 나가는 것을 보고 손을 펴보는 순간, 또다시 황당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시연이 쥐어준 친구라는 증표는 바로 딸기맛 사탕이었다. 13. 교실에 들어온 연희는 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찰랑거리는 결 좋아 보이는 검은색 긴 생머리와 창백하다 싶을 정도의 하얀 피부. 게다가 순정 만화 주인공처럼 동그랗고 큰 눈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정말 얄미웠다. 정말 미웠다. 정말 부러웠다. 나는 아무리 썬크림에 뭐에 발라도 주금깨만 늘어나고, 하얗지도 않은데 저 아이는 그다지 가꾼 것 같지도 않은에도 뽀얗고 하얀 피부를 가졌다. 재수없다. 정말 재수없다. 왜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쫓아다니는 지 알 만 했다.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은 하얀 피부도, 큰 눈도 결 좋은 머리카락도, 오똑한 코도, 붉은 입술도 없었다. 신이 미웠다. 왜 여자는 예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로 나뉘고, 왜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더 선호하는가. “씨이... 증표 좋아하시네! 칫!” 딸기맛 사탕을 필통에 꾸셔넣고는 시선을 옮겨 ‘주단비’라는 여자애쪽을 쳐다보았다. 보석인냥 찰랑대는 다갈색 머리카락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순한 이미지의 시연과는 달리 날카로우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우리반 여자애들은 왜 하나같이 다 예쁜거야!” 단비의 단짝이라는 승은도 한 인물하는 아이였다. 올빽한 머리에 시원시원한 인상. 쿨해보이면서도 여성스러워보였다. “재수없어, 다! 씨이.” 엄마는 말씀하셨다.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일단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여자라고 무조건 남자등뒤에 서 남자만 바라보고 있을 시대가 아니라고. 여자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노력했다. 그다지 좋은 머리가 아님에도 불구 죽어라 공부하고, 죽어라 노력했다. 음식, 향기, 게임등 머리에 좋다고만 하면 무조건 매달렸었다. 그리고 최고의 명문고라는 윤세고등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했을땐 입이 귀에 걸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도대체 뭘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내가 손에 넣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애들의 비교어린 시선? 비웃음? 남자애들 뿐만이 아니었다. 여자애들도 예쁘고 날씬하고 집안이 빵빵한 애들한테만 관심을 갖을 뿐, 자신처럼 평범한 아이들에겐 시선조차 잘 주지 않았다. “밉다... 정말 밉다...” 그 중 가장 손꼽히는 인물이 강시연이었다. 그녀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목받았고, 그럼에도 외로워할 줄 몰랐다.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아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반짝 반짝 빛난다. “재수없어...”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은 질투와 시기로 바뀌어 시연을 향했다. 여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숙제를 하던 시연은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휙 휙 둘러보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연희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러자 연희의 얼굴이 살짝 붉그스름해지더니 고개를 확 돌리는 게 아닌가. “어어? 왜 그러지?” 한편 연희는 붉어진 뺨을 식히느라 바빴다. 시연을 째려보고 있는데 시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쳐다보는게 아닌가. 꼴에 예민하기까지 해요! 계속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방긋 웃는게 아닌가. 환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에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같은 여잔데, 내가 왜 이러지!!!! 마치 자신이 변태가 된 느낌이었다. “음, 이제 부서를 정해야 한다. 부서 종류는 회장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니까 종례시간까지 다 정할 수 있도록. 회장! 알아서 처리해라.” “예.” “그럼 오늘 하루도 보람있게!” 기현의 활기찬 인사에 아이들은 덩달아 활기차게 인사하며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시연은 또 다시 엎드려 잘 준비를 하는 여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여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막 잠에 빠져들던 여환은 시연의 장난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왜.” “헤헤, 여환아 너는 어느 부서 들 거야?” “도서부.” “에엑? 도서부? 재미없잖아!!” “나름대로 할 만해. 도서 정리하면서 책도 볼 수 있고. 조용하고 차분하고.” “치..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럼 다른 부서 들 던가.” “안 되지, 그거는. 아마 강다연놈도 도서부일걸? 나 혼자 뭐하라고! 흠, 연희한테 물어봐야 겠다.” 다연과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려던 여환은 벌떡 일어나 앞줄로 향하는 시연덕에 다시 입을 다물고는 다시 책상위에 엎어졌다. 도대체 밤에 뭘 하기에 매일 학교에서 잠만 자는지 모르겠다. “연희야.” 붉어진 얼굴을 식히고 책을 읽고 있던 연희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미성에 고개를 돌렸다. 시연이 쪼그려 앉은채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놀아달라며 주인을 보채는 강아지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꽉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연희는 깜짝 놀래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여, 연희야?” “왜 부르는데?” 시연의 말에 연희가 차갑게 톡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 시연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어느 부서 들거야?” “알아서 뭐하게?” “헤에, 우리 친구잖아~” “누가 니 친군데!!!” “증표까지 받아놓구선 나 버리는 거야?” 시연의 말에 연희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필통에서 딸기맛 사탕을 꺼내 다시 시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줬다, ?瑩??” “헤에,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제가 사탕을 준 지.. 음, 15분이 넘게 흘렀으니까 이자 붙여서 30개로 갚으세요. 1분에 2개씩. 30개 주면 없던 걸로 해줄게.” “뭐, 뭐라고?” “지금 당장 주는게 좋을걸? 오늘 하루 지나면 몇 백개로 갚아야 되는데..” “야!” “지금 당장 갚을 능력 안되면 그냥 친구하던가. 헤헤헤.” 시연은 헤헤 웃으며 다시 연희의 손에 딸기맛 사탕을 꼬옥 쥐어주었다. 연희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시연은 매력적인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갚을 자신 없으면 우리 그냥 친구해요. 헤헤헤. 우리 도서부 들자, 알았지?” 14. “도서부 나 포함 7명.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다연은 학생들의 신청서를 두루두루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것도 많이 줄은 것이었다. 아까 미소년사모단체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 와서는 ‘시연님과 단비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라고 외치면서 얼마나 난리를 쳐대던지. 난감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도서부 신청서 ; A-1 일학년 주단비. 오승은. 강시연. 민여환. 김연희. A-1 이학년 김선우. A-1 삼학년 강다연. 다연은 도서부 외 몇 몇 부서 아이들의 신청서를 차곡차곡 정리해서 책상서랍에 집어넣고는 시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인 자신이 봐도 예쁜 녀석이니, 미소년사모단체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 따라다닐 법도 했다. 얼굴만 예쁜 것만이 아니라, 마음도 순수하고 맑은 녀석이었다. 상처를 주며 안 될 것 같은 아이... 그래서 윤세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이 되었다. 이 곳은 보통 학교가 아니다. 굉장한 녀석들만 다니는 학교인 것이다. 똑똑하고 머리 좋은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혹시나 시연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 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별 일 없으니까...” 미소년 사모단체의 대상 중 하나인 주단비. 예쁘긴 예쁘다. 그도 남자인 이상 예쁜 여자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학업에 대한 열정이 너무 뜨거워서 여자에게 빠지지 않는 것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쿠키를 내민 소녀. 도도한 웃음과 당당함이 매력적인 소녀. 하지만 허영심과 사치가 너무 심한 소녀였다. 그냥 예쁘게만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흠. 뭐... 그래도 내 동생이 훨씬 이쁘구만.” 그렇게 중얼거린 다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책을 폈다. 그의 뛰어난 뇌는 아직도 많은 지식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다. 24시간 중에 23시간은 책과 함께 보내는 그였다. 책이라면 질색하고 도망가는 시연과는 정반대였다. 다행히 도서부를 신청한 학생은 다른 반에서는 거의 없었다. 사실 머리가 좋은 탓인지 학업에는 그리 열중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서부를 신청했던 A- 1반 7명은 모두 합격되었고, 시연은 C부분의 책 분류 담당을 맡았다.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들이었다. “우우우, 이런게 뭐가 좋다고.” 시연은 입을 빼꼼히 쭈욱 내밀며 여환과 다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책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여환의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치, 이런 책들이 뭐가 좋다고. 나는 냄새만 맡아도 싫구만. 웩.” “시끄러, 뭘 그렇게 중얼거려?” 연희가 톡 쏘아붙이며 말했다. 그러자 시연이 베시시 웃으며 연희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연희씨 왜 이래.” “야.” “아잉~~ 이러지 마, 난 자기가 너~무 좋단 말야. 에헤헤.” “미, 미쳤냐. 너?” “아니요~ 안 미쳤는데요? 에헤헤.” 넉살좋은 시연의 웃음에 연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홱 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연희의 그런 차가운 행동에도 시연은 넉살좋게 웃으며 책을 꽂기 시작했다. 어느새 몇 십 권의 책들이 시연과 연희의 손에 의해 책장에 꽂혔고, 다른 아이들도 다 꽂았는지 손을 탁탁 털며 도서부 담당 선생님께로 향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신 차분하게 생긴 여 선생님은 열쇠를 다연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도서부 담당인 임미혜야. 앞으로 잘 부탁하고, 열쇠는 다연이한테 맡길게. 내가 도서부실에 없더라도 알아서 잘 해줬으면 좋겠어. 일주일에 세 번 책이 백권씩 들어오니까 차곡차곡 알아서 정리해주길 바라고 매일 방과후 2시간씩 남아주면 되. 내가 매일 이곳에 있는게 아니니까 내가 없더라도, 두 시간 뒤에 문을 잠구고 교무실에 걸어놓으면 되고.” “네.” “그럼 오늘은 가봐.” “안녕히 계세요.” 그들은 다시 가방을 맨 체 도서실에서 나왔다. 단비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그머니 다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연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연인 줄 알았는데, 단비라는 여자아이가 미소를 지으면서 서있었다. “아.. 내게 볼일 있나?” “예, 오빠. 저기 오늘 시간 되세요?” “미안하지만 안되겠는데.” “예?” 당연히 오케이 할 줄 알았던 단비는 단호한 다연의 거절에 놀라 다연을 쳐다보았다. 다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단비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연의 맑은 흑색 눈동자에 단비의 얼굴이 한가득 담겼다. “시간 없다고. 가도 되겠지?” 그렇게 말한 다연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단비를 지나쳐 가버렸다. 남겨진 단비는 멍한 표정으로 다연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다가, 상황 판단이 되었는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잘 안 넘어오네. 하긴 너무 잘 넘어오면 재미없잖아?” 단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휙 몸을 돌려 승은에게로 향했다. 승은은 단비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걷기만 할 뿐이었다. “우응.. 오빠가 어디 갔지? 슈엔 반으로 먼저 갔나?” 시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윗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다연이 뒷문 옆 벽에 기댄 채 서있었다. 다연을 반갑게 부르며 달려가려던 찰라, 뒷문이 열리며 슈엔이 나왔다. 노란색 머리를 틀어 올린 슈엔의 모습은 왠지 성숙해보였다. “집에 가야지.” “아.. 네, 네.. 오빠.” 슈엔의 뺨이 붉어지며 더듬거리는 모습에 시연은 풋 하고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거리가 있는 터라 다연과 슈엔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어디.. 아프니?” 다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다연의 부드러운 음성에 슈엔은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시, 시연이는요?” “흠.. 글쎄, 먼저 갔나. 안 갔으면 이리로 오겠지.” “아, 네..” “가방 가지고 나와. 갈 준비 해야지.” “아, 네!” 슈엔은 냉큼 잽싸게 반으로 들어가 베이지색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시연은 왠지 자신이 비켜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활짝 웃으며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왔다. “잘해봐, 슈엔!” 시연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시연을 불렀다. “강시연?” “엑?” “뭘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래?” “휴, 여환이구나.”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 찰라 윗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슈엔과 다연인 듯 싶었다. 시연은 깜짝 놀래서 여환의 손목을 잡고는 후다다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시연에게 손목을 잡혀 이끌려 내려간 여환은 정문에 다달아서야 멈출 수 있었다. “왜 그래?” 여환의 숨은 고르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헤엑헤엑... 모, 몰라... 헉헉.. 그런게 있어..헤엑헤엑..” 시연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여환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기 때문에 시연의 뛰는 속도와 거의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여환아.” “어, 어?” “우리 이왕 이렇게 된 거 놀러가자.” “어딜?” “따라와봐.” 15. 처음 와보는 곳이라서 그런지 여환의 인상은 밝지 않았다. 시연이 잡아 이끈 곳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으며 북적북적, 시끌벅적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조용한 것에 익숙해진 여환에게는 그다지 호감을 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시연이 잡아 이끈 곳은 바로 ‘명동’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에? 여기가 어딘 지도 몰라?” “으응. 처음 와보는데..” “헉. 명동을 처음 와보다니, 너도 대단하다.” “명동? 아, 중학교 때 들어본 적은 있어. 근데... 그다지 달가운 곳은 아니다.” “에? 명동이 뭐 어때서? 난 좋은데, 옷도 많고 액세서리도 많고~” 여환과는 달리 시연은 한껏 들떠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라와는 자주 다녔지만 미라와 학교가 갈리면서 최근 명동에 온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연은 이곳저곳을 기웃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옷도 구경하고, 액세서리도 구경하고, 모자도 구경하고. 그렇게 한참동안 구경을 하고 있는데 여환이 시연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순간적으로 시연의 몸이 돌아가며 여환과 마주보는 형태로 바뀌었다. “..?” 시연은 의아하다는 눈치로 여환을 올려다보았다. 여환의 얼굴은 살짝 붉은 홍조를 띄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봐.” 시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 우리를 왜 쳐다보지?” 시연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의아해했다. 그때 사람들의 속닥거림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쟤네 윤세고 학생들인가봐.” “그러게. 와, 윤세고라 그런지 완전 빛이 나는 구먼.” 사실 시연과 여환은 보통 캐주얼 옷을 입고 있어도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적당히 붙은 근육, 그리고 배우 뺨치는, 살짝 반항기가 보이는 외모의 여환. 적당한 키에 늘씬한 몸과,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에 큰 눈은 시연을 청순가련 미소녀로 전락시켜버렸다. “옷부터 사자.” 여환이 시연의 손목을 잡고는 어디론가로 향했다. 사실 알고 간 것이 아니라, 눈에 첫 번째로 띄인 옷가게로 무작정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여환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입고 있는 윤세고등학교 교복 때문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줄 알았지만, 사실 사람들에게는 윤세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그렇지만, 뛰어난 미모가 더욱 눈을 끌었던 것이다. “어서와요~ 아이 어쩜 이리 멋있게도 생겼을까.” 여환은 주인 언니의 약간의 호들갑이 섞인 인사에 아무 말 없이 옷을 고르기 위해 진열대로 향했다. 예쁘고 화려한 디자인의 옷들이 순서대로 촤르르륵 걸려있었다. 여환은 뭘 사야할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살짝 깨물고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시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골라줄게, 헤헷.” 시연은 옷을 주르르륵 한번씩 훑어보다가 초록색 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는 하늘색 민소매티와 하늘색 청바지를 골랐다. 옷의 가격을 치르고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시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때쯔음 화장실 앞에는 어떤 남성이 기대서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 하얀 피부와 매서운 눈매, 훤칠한 키와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에 걸쳐입은 초록색 셔츠와 청바지. 어떤 여성인들 혼이 팔리지 않을까. 저렇게 멋있는데. 그때 한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큰 눈이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툭 치면 쓰러질 만큼 가녀려보이지만, 흑색 눈동자에 잔잔히 흐르는 장난기가 은근히 매력적인 소녀. 그다지 튀지 않게 입었음에도 불구 둘은 너무도 화려하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음, 다음 코스는 어딘데?” “떡볶이 집!” 떡볶이 집에 들른 둘은 떡볶이 한 접시와 김밥 두 줄을 시켰다. 그리고 몇 분 뒤 음식이 나왔고, 시연이 먼저 떡볶이 하나를 냉큼 집어먹었다. 우걱우걱 떡볶이 떡을 씹어 삼킨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떡볶이 떡을 하나 더 집어서 여환에게 내밀었다. 받아먹으라는 의미였다. 여환은 ?榮募? 듯 손을 저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젓가락에 떡을 꽂아 여환의 코앞에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여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연이 내민 떡볶이 떡을 받아먹었다. “히히힛.” 시연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퍼졌다. 여환은 그런 시연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같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같이 있으면 더욱 같이 있고 싶게 만드는 존재... “헤에, 내가 또 먹여줘야 되는 거야?” “어? 아, 아냐.” 여환은 김밥 하나를 집어먹으며 다시 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는 짓은 엉뚱하고, 귀여운 녀석이었지만 얼굴에는 청순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렇게 음식을 다 먹은 둘은 값을 내고 식당에서 나왔다. 초저녁이 되서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아, 시원해.” 시연이 두 팔을 양 옆으로 벌리며 말했다. 여환은 시연의 행동을 어색하게 따라하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시원한가?” “그냥 뭐랄까... 바람 부는 날, 이렇게 두 팔을 쫙 뻗고 무언가를 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지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바람이 내 품에 안기는 것만 같거든? 그때 그 느낌이 얼마나 짜릿한지 몰라. 이 세상, 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내 품안에 들어온다.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되는데.” 여환은 시연의 말에 말없이 양팔을 양옆으로 쫙 벌리고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었다. 바람이 여환의 품에 안기듯 여환에게 불어왔다. “진짜...” 시연의 말을 듣고 나서 이런 경험을 하니, 시연의 말처럼 진짜 바람이 자신의 품안으로 쏘옥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둘은 미친 사람마냥 바람을 만끽하며 서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끝이 났다. 16.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시연은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슈엔과 다연일 것이다. 가정부가 문을 열자 역시 시연의 예상대로 다연과 슈엔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연보다 늦게 온 것을 보니 분명 둘도 같이 어딘가를 다녀온 것 일텐데. 시연은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다가갔다. 다연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아무 것에도 관심 없는 듯 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들떠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시연은 다연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즐거움과 들뜸을 발견하고는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시연은 슈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찰랑거리는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예쁘게 생긴 여자가 얼굴을 붉히고 서있었다. “오, 오빠.. 그럼 쉬세요.” “응, 너도.” 평소라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다연이었는데... 이번에는 슈엔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며 ‘응, 너도.’라고 다정하게 대답해준다. 슈엔은 설레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남기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올, 이러다가 우리 부모님 한복 꺼내 입겠네.” 다연은 시연의 말을 이해하고는 당황해하며 시연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시연은 2층으로 종적을 감춘 뒤였다. 다연은 당황한 것을 진정시키며 손으로 뺨을 한번 쓰다듬었다. 슈엔의 입술이 닿았던 곳... 부드러운 입술이... “아, 내가 왜 이러지!” 다연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무 당혹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너, 너야 말로 어디 갔던 건데!!!!” “에잉, 빨리 말하세요오오오. 어디 갔다 왔어? 다 알고 있다니까? 말해, 그냥!~” 슈엔은 시연의 장난기 가득한 눈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장난기 가득한 눈을 보고는 말하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시연은 슈엔이 고개를 휙 돌리자 슈엔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말해줘, 응? 아잉~ 우리 친구잖아. 우리 친구 맞잖아, 그치?” 슈엔은 시연이 자꾸 ‘친구’라는 말로 유혹해오자 더 이상 참기 힘들어졌다. 결국 슈엔의 굳게 다물어져있던 입술은 조심스레 열리고 말았다. “와아!!! 벌써 뽀뽀까지 했단 말이야?” “아냐, 그런 거! 입술 대 입술이 아니라... 그냥 뺨..” “오빠가, 아님 너가?” “내, 내가...” “..오올~ 슈엔 대단한데. 그렇게 적극적인 사람인지 몰랐어.” “그, 그게...” “와. 진짜 우리 부모님 한복 입게 생겼네!” “......이익!! 너!!!” “잘 해봐, 난 무조건 네 편이니까. 히힛.” 시연은 슈엔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보이고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방을 나갔다. 슈엔은 침대에 몸을 눕히며 생각했다. “너무 앞서나가지말라고, 강시연... 난... 다연오빠에 비하면 부족한 게 너무 많잖아. 너희 부모님이 나의 가능성을 높이 사서 받아주시긴 했어도, 날 며느릿감으로는 받아주시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슈엔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항상 엉뚱하고, 어이없고, 재미있는 녀석이지만... 그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신뢰하게 되는, 그런 특이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니까. 한편 침대에 누운 시연은 문득 슈엔과 다연이 얄미워졌다. 영원히 오빠, 친구로 남을 것 같은 둘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 대는 걸 보니 축하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묘하게 섭섭해지고 얄미워지기도 했다. “하아... 뭐, 예상하고 밀어줄라고 한거잖아.” 섭섭하다. 얄밉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너무 부러웠다. 나도 설레어보고 싶다. 입맞춤 하나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얼굴만 봐도 몽롱해지고, 눈을 감아도 떠도 오로지 그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되고... 그런 감정이 사랑이겠지? 사...랑? 사랑이라. 사랑이라. 글쎄... 시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랑. 사랑. 사랑. 그때 시연의 감은 눈 앞에 누군가의 영상이 흐릿하게 새겨졌다. 시연은 그 누군가가 누군지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단호하고 냉정한 남자. 차가운 듯 보여도 다정한 남자. 무뚝뚝해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남자.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남자. “민...여환...? 내, 내가... 미, 민여환을?” 그렇게 밤이 가고 아침이 밝았다. 고급스러운 윤세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멋들어진 세 남녀가 현관문 앞에 서있다. 강씨 남매와 슈엔이었다. “오빠 왠일로 일찍 안 간 건데?” “어? 아, 그게..” 다연은 시연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슈엔과 같이 가고 싶어서 먼저 출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학생 회의는 원래 그다지 이른 시간에 시작되지도 않을뿐더러, 시연과 슈엔이 워낙에 이른 시간에 등교하기 때문에 지금 가도 조금만 빨리 걸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음..., 학생 회의가 조금 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다연이 끝을 살짝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서툴뿐더러 별로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다연의 대답에 시연은 피식 웃으며 먼저 뛰어가며 소리쳤다. “치! 슈엔이랑 손 붙잡고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런 거 다 아네요!!! 피이!!!” 시연의 말에 다연은 당황했지만, 이미 시연은 많이 앞서나간 상태였다. 다연은 어색하게 슈엔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갈까?” “네? 아, 네. 오빠...” 슈엔과 다연의 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자연스레... “아! 앞으로는 맨날 나 혼자 등교해야 한단 말야? 우씽..” 시연은 혼자 칭얼거리며 교문을 통과했다. 그때 한 남학생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많이 눈에 익은 저 등... 분명 민여환이 틀림없었다. 여환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시연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환아!” 새로 나온 책들중 뭘 구입할까 고민하며 교실로 향하던 여환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강시연이었다. “일찍이네?” “헤에, 나 원래 일찍 등교하는 걸?” “오늘따라 더.” “헤에, 그런가?” 슈엔과 다연 때문에 조금 뛰었으니 평소보다는 일찍 등교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연은 여환의 손에 뭔가가 들려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여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들며 물었다. “뭐야?” “아, 구입하고 싶은 책 목록...” “책-?” 시연은 책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들을 쭈욱 읽어 내려갔다. 영어부터 시작해서, 일본어, 한국어, 불어까지. 제목들이 뭐가 이리 어려운 지. “그냥 한국어로 번역된 거 읽지?” “번역된 건 왠지 내용이 조금이라도 틀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이라도 틀려지는 거 싫어.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그대로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튼 이상한 놈.” “너도 그다지 평범하진 않아.” 여환의 말에 시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난 강시연인데! 푸훗!~” 17. 그렇게 3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 윤세고등학교는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다. 중간고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윤세고등학교 학생들은 뛰어난 자신들의 머리를 과시하였지만, 문제 출제자가 윤세고등학교의 교사이니만큼 문제의 난이도는 굉장했다. “시험 잘 봤어?” 여환이 시연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물었다. 시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봤다고 생각하냐.” “글세.” “완전 개판오분전이라고! 으아아악, 짜증나!!! 뭔 문제를 그렇게 어렵게 낸대?” “윤세고등학교니까. 윤세고등학교가 그렇게 만만할 줄 알았어?” 여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시연은 고개를 몇 번 젓다가 책상에 고개를 폭 처박았다. 다연이라면 분명 3학년 전교 1등을 할 것이다. 그럼 또 잘난 척이란 잘난 척은 다 하겠지. (다연은 전혀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난 분명 전교 꼴지 할 텐데!!!! 악!!!!! 짜증나아아아!!!!!!!” 시연의 비명소리와 함께 중간고사는 끝을 맺었다. 그렇게 전교 교실 앞문에는 희고 큰 종이가 붙기 시작했다. 바로 전교생의 전교 석차와, 평균 점수를 공개하는 것이었다. “내, 내 이름은...” 시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 시연과는 달리 여환은 쉽게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민여환 전교 석차 1/100 평균 98.79점. “헉! 찾았다...아아....아악...내가 미쳐어어어!!!!!!!” 강시연 전교 석차 100/100 평균 19.02점. “아효... 강시연, 너 공부를 하긴 한 거냐?” “으응? 그, 글쎄...” 시연은 죽을 것 같았다. 도대체 100등이 뭐란 말인가. 19.02점이 뭐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 공부도 못 하고 바보같은 존재였다니. “어? 내가 1등이 아니잖아?” 약간의 요염함이 섞인 목소리가 시연과 여환의 귀에 파고들었다. 시연은 울상인 얼굴을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주단비’였다. “흐응.. 3점 차라니. 많이 나잖아... 민여환?” 단비는 고개를 빳빳히 든 채 여환을 쳐다보았다. 여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단비를 쳐다보았다. 단비는 요염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법인데... 강다연 다음으로 꽤 끌리는데...?” 시연은 단비의 말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인상을 펴며 중얼거렸다. “남의 남자한테 기웃거리는 거 사절이네요. 피이.” “응? 뭐라고?” 시연의 중얼거림을 정확히 듣지 못 했는지 여환이 반문했다.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빼꼼 베어 물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헤.” 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3학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강다연 전교 석차 1/100 평균 점수 99.01점. 아아. 저게 정녕 사람 점수란 말인가. “윽. 재수 없어.” “누구?” “강다연!” “아, 강다연 선배..” 시연의 입에서 ‘강다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사실 여환은 시연이 다연에게 자꾸 관심을 갖는 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기분 나빴다.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면서, 그 행동은 아무 의미조차 담기지 않은 행동들이란 말인가? 아무 의미없이, 아무 호감 없이 나에게 친절하게 굴고, 나에게 다정하게 굴고, 나에게 스킨십을 하는 것일까? “여환아?” 시연은 갑자기 여환이 얼굴을 굳힌 채 입을 다물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러나 여환은 아무 대답도 없이 시연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향해버렸다. 시연은 그런 여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와!!! 슈엔, 그럼 너가 그 평가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단 말야?” “물론 동점자도 있긴 하지만... 1등인 건 맞아.” “와, 대단해!!!!” 시연이 축하해주자 슈엔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다연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 오빠는 축하 안 해줘요...?” 슈엔의 말에 다연이 씨익 웃었다. 그의 웃음은 마치 신이 내린 축복인냥 너무도 아름다웠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슈엔이 그의 웃음에 빠져 허우적 거릴 무렵 다연이 슈엔의 손을 살짝 잡았다. 슈엔이 눈이 동그래져 다연을 쳐다보자, 다연이 한번 더 씨익 웃으며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촉. 부드러운 다연의 입술이 슈엔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손등에 닿았다. 슈엔의 얼굴과 다연의 얼굴은 한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으, 이 닭살들. 정말 못 봐주겠네. 여자한테 관심없다고 말하던 놈이 누군데 벌써부터... 그래, 옛말이 다 맞다니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맞을래, 강시연?” “치이. 둘이 잘 해봐라! 동생 앞에서 닭살이나 떨고! 에비에비에비!” 시연은 둘의 다정한 사이에 부러움을 느끼며 먼저 집으로 향했다. 치. 솔로인 자신앞에서 꼭 저렇게 티를 내야 하는지... 문득 여환이 너무도 보고 싶어지는 시연이었다. 시연은 처박아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최신형은 아니지만 그다지 구형도 아닌 평범한 핸드폰이었다. 시연은 가방안에 들어있는 분홍색 수첩을 꺼내 뒤적이다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민여환 - 010 - xxx - xxxx “헤에.” 시연은 여환의 번호를 꾹 꾹 눌르기 시작했다. 신호음이 쭈욱 이어지더니 건조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환아!!!” -“누구?” “나 시연이!!!” -“...” “여보세요?” -“나 지금 바뻐. 내일 학교에서 얘기해. 뚝-” 차갑고 단호한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시연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에...에?” 뭔가 분명히 달라진 여환이었다. 18. “너 어제 왜 그런 건데?” “뭐가.” “어제 전화말야!!” 시연이 약간 따지듯 말했다. 솔직히 어제는 너무 서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용기내서, 너무 듣고 싶고, 보고 싶어서 건 전화였다. 그런데 그렇게 매정하게 뚝 끊어버리다니. “어제 바빴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게 뚝 끊는 건 예의가 아니지!!!” “언제나 놀기만 하는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너와 떠들고 있는 1분도 아까워. 미안하지만 바쁘다고 한번 말했으면 좀 알아들어줬음 하는데.” 차갑다 못 해 듣는 사람을 꽁꽁 얼려버릴 것 같은 여환의 말에 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러는 걸까. 내가 도대체 뭘? 뭐 때문에?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래?” “글쎄.” 여환은 여전히 책을 읽으며 시연의 말에 귀찮다는 듯 성의 없게 대답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시연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제 학교에서만큼은 다정하게 대해주던 여환이었는데... 친한 척 구는 내가 짜증났던 걸까? 관심도 없는 여자애가 자꾸 건드니까? 자꾸 말거니까? “미안. 정말 미안.” 시연은 그 말을 끝으로 다른 남자아이와 자리를 바꾸었다. 결국 여환의 옆자리는 시연이 아닌 다른 남자아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 여환은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이런 고통은... 너무 오랜만이었기에 더욱 참기 힘들었다. “저기 시연아.” “...” “시, 시연아?” “...” 계속 말이 없는 시연때문에 난감한 건 시연의 새로운 짝 쪽이었다. 시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교복도 다시 단정하게 고쳐 입고, 멋있는 척 하고 앉아있었지만 시연은 그런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 시연아. 울어?” 그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연의 큰 눈에서 눈물이 또그르르 하고 떨어졌다. 맑고 고운 빛을 띄는 그 눈물은 시연의 보드라운 뺨을 거쳐 바닥으로 톡 하고 떨어졌다. 좋아하지 않을게. 말도 걸지 않을게. 다가가지도 않을게. 친한 척 굴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차갑게 굴지말아줘. 너무 가슴 아프니까. 너무 심장 떨리니까. 너무.. 죽을 것 같으니까. “시연아, 어디 아퍼? 응?” “아니야.” 슈엔은 난감했다. 언제나 밝고 명랑했던 시연이 이렇게 축 늘어져서는, '아냐!!! 에헤헤헤~'라고 웃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니야.'란다. 다연도 시연이 걱정되는지 걱정된다는 얼굴로 시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강시연. 무슨 일 있었어?” “아니라니깐.” “강시연.”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니깐? 왜 자꾸 그러는데!!! 둘은 가서 닭살이나 떨라구!!!!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란 말야!!!!!!!” 시연의 폭주. 다연은 당황했다. “강시연! 정신차려!” “제발 나 좀 내버려두라고!! 짜증나 미칠 것 같단 말야!!!!” 그렇게 시연이 폭팔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때 쯔음, 여환이 하교를 하고 있었다. 여환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 시연의 모습이 한가득 담기기 시작했다. “시연...”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엔... 그가 있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두란 말야...” 시연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맺히더니 톡 하고 떨어졌다. 슈엔은 시연의 눈물에 깜짝 놀라했다. 화는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이 눈물을 흘리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시연아.” “흐흐흑...” 다연이 입술을 깨물며 시연을 꽈악 안아주었다. 슈엔은 그런 다연과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오늘만큼은 남매가 편안하게 같이 함께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가장 서로를 위하는 두 남매가 자신 때문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게 되었다. 이번 만큼은, 시연이 이렇게 아파할 때 쯤은, 다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이 함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슈엔은 먼저 집으로 향했다. “아아..” 여환의 눈에 시연을 꽈악 안고 있는 다연과, 그런 다연에게 폭 안겨있는 시연이 보였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말에 상처받은 듯 했던 시연이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다. “...” 시연에게 달려가려던 여환의 발걸음은 뚝 하고 멈추었고, 여환의 발은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점 오해의 골은 더욱 깊어져가고 있었다. 19. 집에 도착한 여환은 가방을 휙 집어던지고는 침대위에 누웠다. 그리고는 팔로 눈을 가리고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뛰어가서 서로 부둥껴안고 있는 둘을 확 띄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도 남을 안을줄 알고, 안아줄 품 있다. 왜 하필 그 녀석인가. 그래, 강다연. 그가 잘난 것은 나도 인정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지만.. 시연 너까지 그에게 빠져야 하는 가? 널 사랑하는 난 보이지도... 사랑? 사랑이라니? 지금 내가 시연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나? “사랑...이라니..” 항상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오고, 꾸밈없고 거짓 없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항상 밝게 웃고, 맑아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해보이고 깨끗해보여 호감이 생겼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사랑이라니,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고 또,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이다. “내가 시연을 사랑한다고? 내가? 나 민여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상대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형.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여환에게 미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떠난 그들. 여환은 사랑받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 하고, 사랑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 하다. 그런 여환에게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은 설레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시연도 부모님, 형처럼 그렇게 말없이 떠나버릴까봐. 아니, 시연이라면 그렇게 말없이 떠날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 그녀에게는 다연이 있다. 나보다 훨씬 근사하고 멋지고 똑똑한 강다연. 그는 그녀보다 나이도 많으니 듬직하고 어른스러울 것이다. 자신처럼 어리고 근사하지 못 하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나 따위는... “하아.” 자기 비하가 계속 되었다. 현재 여환의 생각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의 생각을 들은 모든 이가 그를 안타까워할 만큼. 자기 비하를 계속 하던 여환은 핸드폰을 꺼내 중학교 때 유일하게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에잉? 혹시 나의 사랑스러운 여환군인가요?” 고운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여성은 약간의 비음을 섞으며 여환에게 말했다. -“여환군 맞죠? 무슨 용건으로 제게 전화를 다?” “아..., 새련아.” -“호홋, 맞군요. 나의 사랑스러운 여환군. 어인일로 전화를 다?” “저기 한번 생각해봐. 두 남자가 있어. 그 중 한명은 어떤 여자와 사랑하는 사이야. 그 남자는 굉장히 멋지고, 근사하고, 잘생겼으며 공부도 엄청 잘하고 머리도 좋아. 게다가 그 여자보다 나이도 많아. 2살 정도.” -“응, 그래.” “그리고 또 한명은 그 여자를 짜, 짝사..랑 하는데..” -“알았어. 짝사랑하는 데, 뭐?” “흠흠. 짝사..랑하는데 얼굴은 그냥 그저 그렇고, 공부도 머리도 그 남자보단 떨어지고 나이도 동갑이고... 후, 내가 생각해도 딸리네.” -“후훗, 여환군 좋아하는 사람 생겼나보지? 아, 사랑이라고 해야 되나? 후훗.” “아, 아냐!!!” -“아니면 그냥 끊는다?” “아.. 저기..” -“분명 뭔가 상담하고 싶어서 전화한 걸거 아냐. 그럼 솔직하게 먼저 털어놓는 게 기본적인 예의.” 새련의 ‘다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털어놔’라는 투의 말에 여환이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榮쩝層? 몰라. 그냥... 그녀가 다른 남자 얘기를 하면 막 질투 나고 시샘하게 되고, 떨어뜨려놓고 싶어져. 그냥 내 곁에 있게, 그 남자 못 만나게 하고 싶어.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거잖아. 그 남자가 너무 완벽해서 너는 쨉도 안 될까봐.” “그래.” -“후훗. 여환아, 너는 내가 몇 년을 걸쳐 말했는데도 인정 안 하는 게 한 가지 있어.” “응?” -“넌 내가 보기에 굉장히 멋있고, 근사하고, 듬직하고, 존경스러워. 넌 네 외모가 그저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 잘생겼고, 너무 화려해. 근사한데다가, 가끔은 듬직하기도 하지. 뭐랄까, 이 남자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줄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 달까? 게다가 머리도 굉장히 좋고, 똑똑한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해.” “...” -“니 자신을 믿어봐. 넌 충분히 멋있으니까. 아무리 멋있는 남자라도 용기 없고 자기 비하나 하는 그런 놈은 딱 질색일 거야. 너의 그녀도.” “...그럴까?” -“걷어차이건 어떻게 되건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찔러봐야지. 안 그래?” “고마워, 새련아.” -“후훗, 뭘. 그럼 나중에 한번 보자고. 그리고 1등 했다며? 진짜 왕 추카. 후훗.” 그렇게 새련과의 전화통화는 끊겼다. 여환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고마워. 언제나.” 집에 돌아온 시연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추욱 늘어졌다. 여환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이유도 모른 채, 그에게 차갑고 냉랭한 태도를 지켜봐야 하는 시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 고통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누워 천장만 응시하고 있는데 어제 여환에게 걸기 위해 꺼내놓았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미라?” 미라일까 싶어 시연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고 추욱 늘어져있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저기..” 시연은 그 상태로 얼어버렸다. ‘저기’라고 중얼거린 남자의 목소리. 분명... 분명... -“나 여환인데. 저기 시연..아?” 시연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억지로 벌려, 목소리를 짜내었다. “으응.. 왠일..이야?” -“아, 그게... 지금 시간..있니?” “시간? 있긴...한데...” -“그럼 공원으로 나와줘!” 전화를 끊은 시연은 내심 설레고 기뻤지만, 한 켠으로는 걱정되고 초조했다. 혹시 너무 지겹게 굴어서 짜증났었다느니 이런 식으로 완전 친구사이도 끝내자고 할까봐. “아아.” 시연은 교복을 입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슈엔과 소파에 앉아 대화중이던 다연은 시연이 급히 나가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디가?” “요 앞 공원.” “공원은 왜?” “만날 사람이 있어.” 시연이 급히 나가자 다연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누구길래 저러지..?” “혹시 그 남자 아닌가?” 슈엔의 말에 다연이 몇 초간을 고민하는 가 싶더니 슈엔을 보며 말했다. “역시 슈엔, 대단해!” 공원에 미리 나와 시연에게 전화를 건 여환은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혹시나 시연이 싫다고 거절할까봐였다. 그러나 시연이 자신의 말에 ‘응’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의 기분은 날아갈 듯 기뻤다. 일단 그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꺼낸 말로 인해 그녀가 더 힘들어하고 더 혼란스러워 하진 않을까?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슴이 더 아플 것 같다. 그렇게 몇 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연...이었다. 시연의 눈은 살짝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고, 몸에도 힘이 별로 없어보였다. 여환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너 때문이잖아... 눈물이 솟아넘칠 것 같은 것을 꾸욱 누르며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말해야 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을. 하지만 뭐라고..? 여환은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에 침을 한번 묻히고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흑색 눈동자와 그의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의 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을 내뱉었다. “시연아.” “...?” “난 너가 강다연과 함께 있는 게 싫어.” 시연은 여환의 말에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여환을 응시했다. 그것을 본 여환은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나 따위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하는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라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가슴이 더 아려왔다. “강다연 만나지 마라. 응?”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냐면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말이 툭 튀어나오려는 직전에 부스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와 그녀쪽으로 다가왔다. 검붉은 색 머리카락의 미소년과, 노란색 긴 생머리를 섹시하게 틀어올린 소녀. 강다연과 슈엔이었다. “오빠! 슈엔!” “야, 이 자식아.” 다연은 다짜고짜 여환의 뒷통수를 살짝 때렸다. 이유 없이 뒷통수를 맞은 여환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연을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밉상인데! “사랑한다고?” 여환은 다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연을 휙 쏘아보며 대답했다. “네.” 그 물음에 더 놀란 것은 시연이었다. 사랑한다니? 누가? 민여환이? 나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렇지, 이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피를 나눈 오빠랑 만나지 말라고 그러냐. 어?” 다연이 뭐라고 할까 생각하며 다연을 쏘아보고 있던 여환은 한순간에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피를 나눈 오빠...?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피를 나눈 오빠라뇨.” “헤에. 여환이 몰랐구나? 강다연. 강시연. 둘이 남매인데.”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고, 머리색이 다르긴 하지만 눈동자 색도 똑같고 이목구비도 비슷비슷하고... “이런 젠장!” “뭘 젠장 이야, 제 멋대로 오해한 니가 잘못이지. 어디서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을 울리고 난리야, 이게 죽을라고.” “울 다뇨?” “너 책임져라! 우리 시연이 울린 거 니가 처음이다! 책임 못 지겠다고 하면 아주냥.. 확!” 20. 선우는 중간고사 성적표를 보며 ‘역시’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톱 강다연은 절대 전교 1등이라는 자리를 남에게 넘겨주는 법이 없다. 이번에도 시험의 난이도가 최상위급이었음에도 불구 높은 성적을 받아내며 전교 1등이라는 자리를 꿋꿋이 지켜냈다. 물론 자신도 2학년 전교 1등이었다. 하지만 다연이 너무도 부럽고, 질투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자로써의 매력도 충분하고, 머리도 좋고, 집안도 좋고, 외모도 출중하고... 도대체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시기하고 질투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완벽했다. 그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무언의 카리스마. 그는 생각 끝에 강시연이 떠올랐다. 자신의 우상이자 라이벌인 강다연의 동생 강시연. “전교 1등이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1학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교 1등 민여환. 아? 시연이 소수점차로 밀린 건가? 2등 주단비. . . . 100등 강시연. “꼬, 꼴지?” 선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시연은 꼴찌였다. 분명 뇌는 인식했지만 마음이 받아지지가 않았다. 말도 안돼..., 강다연의 동생인 강시연이 꼴찌라니! 어떻게 남매가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선우는 시연의 자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시연은 자리에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리번 하다보니 시연이 원래 앉던 자리보다 세네칸 앞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맑고 투명한 큰 눈에 맑은 이슬 같은 무언가가 고여 있다는 것도... 결국 그 이슬은 또그르르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쳐지고, 그녀의 흰 이가 붉은 석류빛 입술을 꾸욱 깨무는 것까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확대되어 선우의 눈에 들어왔다. “울지마..” 학교에 온 시연은 여환을 보고는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가슴이 떨리고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웬일인지 여환은 책상에 엎드려 있지도 않았다. “들어와.” 그때 여환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연은 미세하게 들리는 여환의 목소리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들어와, 강시연.” 시연은 깜짝 놀랐다.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자신이 등교한 지 어떻게 눈치챘느냔 말이다. 눈이 옆에서 달려있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자 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바로 코앞에 마주선 둘. 둘의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환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주 미세한 네 향기로 느낄 수 있어.” 여환의 말에 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떨리는데, 여환이 저런 말까지 하니 미칠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너도 내 미세한 향기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여환이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연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과 여환의 눈이 마주쳤다. 시연의 석류빛 붉은 입술이 활곡선을 띄며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시연의 말에 여환이 활짝 웃으며 시연의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주었다. 한편 아이들과 깔깔 대며 수다를 떨고 있던 주단비는 시연과 여환의 친근하고 다정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 까짓게 뭐가 좋다고, 저런 거렁뱅이 따위가! 윤세고등학교를 먹칠하는 거렁뱅이에 전교 꼴등 주제가 뭐가 좋다고! 생각해보니 김선우, 강다연과도 연관이 있잖아? “하?” 아름답고, 완벽한 자신도 마다한 그들이 왜 저까짓 것한테 신경을 쓴단 말인가. 왜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왜? 왜? 왜? 주단비가 입술을 꾸욱 깨물며 시연을 한번 노려보았다. “저 까짓게 뭐가 좋다고...” 왜 자신보다 저 까짓 계집애가 더 주목받아야 한단 말인가. 왜? 어째서? 내가 저 계집애보다 훨씬 아름답고, 훨씬 뛰어나고, 훨씬 완벽한데! 저 계집애는 얼굴만 반반할 뿐 실력도, 가진것도 없잖아.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연희는 깔깔 대며 돈자랑을 하고 있던 주단비가 입을 다물고 어디 한 곳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뒷문앞에 서서 다정스럽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여환과 시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희의 위치에선 여환의 뒷모습밖에 보이진 않았지만, 조심스레 떨리는 손으로 시연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것을 보니 왠지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은 이때까지 지어온 그 어느 때의 미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상 시연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연희였지만,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움을 한껏 머금은 시연의 웃음에 그런 감정이 사그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워.” 아름다웠다. 이때까지의 웃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의 웃음이 왠지 거짓으로, 억지웃음처럼 보였다면 이번 웃음은 정말 기뻐서, 좋아서 웃는 것 같았다. 진심을 담은 웃음. “...”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주목하는지, 왜 이렇게 그녀가 주목받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명예로운 명문고 윤세고등학교의 전교 꼴등 따위가, 공부는 커녕 매일 놀 생각이나 하고, 자기 싫다는 사람에게 딸기맛 사탕이나 건내며 친구라는 증표라고 말하던 저 엉뚱한 소녀가 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지, 왜 주목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그 천진난만함이. 그 맑음이.” 악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맑고 투명한 소녀. 왠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소녀. 부러워. 정말 많이 부러워.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 있어서. 그렇게 맑을 수 있어서.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보다는 더럽고 추악함을 먼저 배워서 너처럼 천진난만하고 맑을 수 없어. 넌 귀한 집 외동딸로 곱게 곱게 자라왔을 테지만, 나는 아니니까. 하루하루가 가난함과 배고픔과의 전쟁이니까. 그 전쟁에서 지면... 죽음이니까. “부러워.” 너가 밉진 않아. 이제 너가 밉진 않아. 너가 잘난척이나 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부러운 마음을 지울 순 없을 것 같아. 나도 너처럼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났다면, 너를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연희의 두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병원에서 하루하루를 위태위태하게 버텨가는 어머니.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있는 어머니. 수술만 받으면 가능성이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위태위태하게 버티시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니, 난 바라지 않아. 귀한 집 외동딸 같은 거 아니여도 좋아. 난 가난해도 우리 어머니가 좋으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랑하는 자식 먹이겠다고, 콩 한 쪽도 아끼시는 그런 어머니니까 나는 우리 어머니가 좋아. 부럽지만, 정말 부럽지만... 바라진 않을래. 나한텐 우리 어머니가 있으니까. 그렇게 학교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이 한창일 때 4교시 쯤 이었을까, 담임 선생님이 급하게 들어오며 연희를 호출했다. 수업을 듣고 있던 연혜는 의아해하며 교실밖으로 나갔다. 한편 여환에게 몰래 장난을 걸며 웃고 있던 시연은, 선생님의 호출에 잠시 밖으로 나갔던 연희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교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가방을 챙기며 입술을 바르르 떨며 밖으로 나갔다. 연희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음을 파악한 시연은 4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급하게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 연희 어떻게 된거예요?” “아, 시연이구나. 시연이가 연희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안다만, 선생님된 입장에서 함부로 가르쳐줄 순 없겠구나.” “연희는 제 친구예요! 아까 연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셨어요?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을 보셨어요? 바르르 떨리던 입술과 손은 보셨어요? 지금 연희에겐 기댈 사람이 필요하다구요. 분명 무슨 일이 있잖아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그는 시연의 두 눈에서 간절함을 파악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무겁게 입을 떼내었다. “나도 잘 모른다만 연희의 어머니가 아프신 모양이더구나. 병원에 입원중이신데 지금 위태위태 하신가보더라고. 그래서 보호자를 찾더구나.” “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버지는... 후.” 그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는 시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어느 병원이예요?” “서울 대 병.. 그건 왜 묻니?” “감사해요, 선생님. 제가 5~6교시 땡땡이 쳐도 막아주셔야되요. 아셨죠?”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연을 쳐다보자 시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연희는 제 친구예요. 연희가 아무리 절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증표를 반납하지 않은 이상 연희는 제 친구예요. 친구로써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건 당연한거잖아요.” 말리려던 그는 시연의 단호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두 눈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눈빛이 굉장히 선명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라면 믿을 만 하다!’ 출처 :♥｀-^)／소설만땅넷ⓥ＼(＇-＾♥ 원문보기▶ 글쓴이 : 개장형아(완결) 댓글 29 인쇄 | 스크랩(34)▼ 여진Sz 왜 답글일 없지? 06.06.07 15:18 답글 사냥나간꽃돼지 그러게요!! 이렇게재미있는데.-0- 06.06.10 15:16 답글 소설광ㅋ 너무너무 재미있써요>_< ㅋ까하핫... 06.06.11 13:26 답글 はた。 재미있어요 ㅇㅁㅇ 06.06.17 13:50 답글 소설에ㅁ ㅣ 친 뇬 재미 있으삼 ,,ㅋ ㅇㅁㅇ 06.06.17 19:55 답글 선자12 헤헤 ~~~ 06.06.19 22:01 답글 파란나라 헤헷.. 너무 재밌어요~ >㉦< 06.06.25 10:30 답글 코코샤넬 퍼가용~ 06.07.08 08:45 답글 하누리 fou... 너무잼있어요 06.07.08 20:52 답글 테디베어 퍼갈게여 06.07.13 17:27 답글 냠냠ㅇㅅㅇ** ^────^* 06.07.18 17:33 답글 호이♥ 주단비 짜증나. -3-...ㅋㅋㅋ 다연이 제스타일, ㅎㅎㅎ 06.07.29 12:28 답글 류세이 안뇽하세요시아입니다ㅇ_ㅇ 06.07.29 17:28 답글 이별뒤눈물 나도 네 친구할래~~~~ 06.08.24 20:48 답글 흰나라 주단비같은년은재수없어ㅡㅡ 재밌어요^^ 06.12.23 17:46 답글 barbara130 재미있어요~^^ 06.12.23 22:32 답글 *은빛날개*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07.01.02 18:35 답글 나만사랑해줄래 스크랩.. 07.01.28 12:34 답글 天血[리듬] ㅠㅠ 재미있어요 ㅠㅠ [아,.. 나도 공부하면 잘할까나......] 07.02.04 18:15 답글 ЁT인형 재밋삼ㅋㅋㅋㅋㅋㅋ 07.02.09 12:22 답글 muiy냥 너무 재밌어요!!!!ㅋ 07.03.15 22:47 답글 유숙이 퍼 갈께요~>_< 07.06.23 09:08 답글 ㄹㅔ몬사탕 재미있네요~ 07.08.17 16:07 답글 오늘은웃자 연희도 시연의 절친이 될것같은데요 08.02.14 20:24 답글 류비아 ㅇㅅㅇ 08.06.25 11:27 답글 『 묘(猫_)』 연희 마음 백변 이함... 그렇지 부럽긴 엄청 부럽지... 엄청 부러워 08.07.21 16:57 답글 소중한나예요 우후후. 진짜 재밋다.... 흑.. 08.08.06 16:27 답글 Lie걸 재밌어요^^ 08.08.14 18:23 답글 월햐소설 천재집단이네 ㅋㅋ 09.10.25 18:44 답글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회원은댓글을 쓸수 없습니다.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윗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21~30) 2006.06.06 ▼아랫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01~10) 2006.06.06 ▲top 서비스 약관/정책 | 권리침해신고 | 카페 신고 | 이용약관 | 카페 고객센터 | 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Daum | 카페 | 자주가는 카페 - 전체보기 - 편집 - 내 쪽지 |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로그아웃 음악을 들으시려면 ▶ 버튼을 눌러주세요 음식 (공개) 카페지기 서로몬 회원수31,416 방문수369 프로필 ▼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정회원 메일 11 쪽지 0 내가 쓴 글 내글 반응 카페 글쓰기 카페 전체 메뉴▲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16) 노을뱅이<나>gpfus너굴사율미니민이응, 안녕?은빛바다데구루루구룽우웅곰린민하울착한사람송연경체리홀릭일등급loves811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숨기 RSS | 자주가는카페 추가 카페 탈퇴▶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스크랩]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21~30)|　　　　펌인기소설 작은별소녀 | 조회 3202 | 06.06.06 23:40 http://cafe.daum.net/boyhamr/5M8v/658 ＊──────────────────────────────＊ （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 21. 시연이 연희의 어머님이 입원하신 병원이 어디인지 알아내고 연희에게 가기 위해 교무실을 나왔을때, 그녀의 흑색눈동자에 비추어진 것은 자연을 담은 창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민여환이었다. “여환아.” “같이 가줄게.” “응?” “혼자는... 외로운거잖아.” 시연은 여환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여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여환의 체온이 시연의 손을 타고 전해지며 가슴이 찌르르 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닌 둘이다. 혼자는 외롭다. 둘은 외롭지 않다. “연희는... 많이 외로웠겠다.” “글쎄.” 서울 대 병원. 시연은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를 하나로 깔끔하게 묶고는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관계자가 김연희로 되어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몇 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데스크에 앉아서 급하게 서류를 처리하던 간호사는 귀찮다는 듯 시연을 대하다가 김연희란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김연희라면 최고의 명문고라는 윤세고에 다닌다는 학생이 아닌가? 얼굴을 들어 시연과 여환의 교복 또한 윤세고의 고급 브랜드 껏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405호실인걸로 아는데?...요.” 시연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레베이터를 이용해 4층까지 올라갔다. 405호실의 문을 살짝 여니 보이는 것은 울고 있는 연희와, 창백하지만 인자할 것 같은 아주머니였다. 많이 아픈 듯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여환아, 여기서 기다려.” 시연의 말에 여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가슴 윗부분에 손을 얹고는 쉼호흡을 한 뒤 마음을 굳게 먹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강시연?” “친구는... 원래 이럴 때 같이 하는 거야.” “뭐?” “증표 반납도 안 한 주제에.” 시연의 말에 연희는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시연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까짓 증표 내가 성공하면 이자까지 쳐서 줄게. 그니까 좀 가.” “싫은데.” “뭐?” “연희야, 혼자서... 혼자서 많이... 외롭지 않아?” 시연의 말에 연희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가득 차며 투명한 무언가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시연은 천천히 연희에게 다가가 연희를 꽈악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뭉클한 관심에 연희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여환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집으로 향했다. “그럼 어떡하지?”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아르바이트?” “응. 근데 고등학생을 시켜주려고 할까? 게다가 1학년 밖에 안?榮쨉?.” 연희의 말에 시연은 입술을 빼꼼히 내밀고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아르바이트 같은건 생각해본적도, 해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연희의 입에선 쉽게 쉽게 나온다. 시연의 생각처럼 윤세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지 잘난맛에 살았던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나도, 나도 같이 해줄게.” “아냐, ??..” “둘이 하는게 돈도 더 많이 벌잖아?” “그렇긴 한데.” “무엇보다... 혼자는 외롭잖아.” 시연의 정이 가득 묻어나오는 말에 연희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친구를 사겨서, 정말 날 사랑해주는 친구를 사겨서 너무 좋다. 나 따위가 윤세고등학교 공주님에게 관심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으쓱해진달까. “안녕하세요, 저기 여기서 일을 좀 해보려고..”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연과 연희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간단하게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어도 앳되어 보이는 인상은 지우기 힘들었다. “너희 몇 학년이야?” “...” “딱 보니까 중학생 아니면 고1일텐데 까불지말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해.”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말하니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단지를 붙이자니 그렇게 따지면 붙여야하는 전단지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햄버거집 서빙보는 거나 청소등을 하려고 했는데 받아주질 않는다. 처음으로 시연은 실감했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이 곳에서 빈털털이 '혼자'가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건지를. 다음날 학교. 시연은 엎드려있는 여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시연의 손을 샤샤샥 빠져나갔다. 시연은 그 느낌이 좋은 듯 계속 하고 있었다. “여환아, 너는 어떻게 나보다 머릿결이 좋아? 남자가~” “흐음, 너도 좋아.” “칫.” 그때 담임선생님이 시연을 따로 호출했다. 교무실로 불려간 시연은 의아해하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왜요?” “시연아, 교장 선생님께서 널 좀 보겠다는 구나.” “저...를요?”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는 고개를 무뚝뚝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교장실로 향했다. 왜 나를 보자는 걸까? “저 교장 선생님.. 부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간 시연은 교장 선생님을 보고는 눈이 똥그래졌다. 대머리에 주름이 많은 할아버지를 예상했건만, 소파에 앉아있는 그는 달랐다. 귀를 살짝 덮는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갖은 아주 젊은 남자였다. 동안이라 쳐도 20대 중반정도일 것 같았다. 시연은 갑자기 조여오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남자를 보니 왠지 머리가 띵해지며 심장박동수가 빨라진다. “너가 강시연이니?” “예? 아 제가 강시연 맞는데... 왜 부르..셨어요?” “네 성적은 잘 보았다. 눈으로 확인을 해도 감당하기 힘들더구나.” “...아..” “난 너같은 아이가 어떻게 우리 윤세고에 입학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아무리 아이큐 측정 기계가 고장났다고 해도 필기시험을 통과하긴 힘들어. 회의 결과 너가 입학한 뒤로 공부를 안해서.., 그래서 못 본걸로 나왔다.” 그 말에 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몰래 쉬었다. 다행이다, 쫓겨나는 줄 알았잖아! 손이 땀으로 인해 축축해져 있었다. “시연.” “..?” “재시험을 보기로 했으니 요번주 토요일에 교장실로 오거라.” 22. 여환과 슈엔, 다연에게 상담을 해보았지만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시험 보기까진 딱 이틀 남았고, 지금부터 죽어라해도 그 어려운 문제를 다 맞아 합격할 자신도, 희망도 없었다. “난 윤세고등학교가 마음에 드는데, 이 곳은 아니었나봐. 하긴 매일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내가 뭐가 마음에 들겠어.” 시연은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얀 얼굴이 질려 더욱 창백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큰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붉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또 한마디를 토해내었다. “나가고 싶지 않아.”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를 들은 슈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법이 없었다. 윤세고등학교에서 남기 위해선 이틀안에 천재가 되는 수밖에는. 슈엔은 안타까운 눈초리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예쁘기만 하고, 엉뚱하기만 한 소녀. 하지만 자신에게 희망을 준 유일한 소녀. 슈엔은 시연에게 딸기맛 사탕을 쥐어주며 말했다. “벌써부터 포기하지마.” 시연은 딸기맛 사탕을 꼬옥 쥐며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더욱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슈엔이었다. “으응.” D-day. 시연이 윤세고등학교에서 짤릴 위험이 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는 여환이었다. 어디가냐고 계속 묻는 여환을 어렵게 떼어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장실로 향했다. 가고 싶지 않아. 가고 싶지 않다. 가고 싶지 않다고. 지금 가면 학교에서 널 볼 일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왔구나.” 교장실에는 교장, 교감 선생님과 몇 몇 선생님들이 계셨다. 시연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들을 쏴악 둘러본다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조심스레 시험지를 건내받았다. 역시나. 입학 시험과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상상외였다. “흐으...” 아무리 천재라 한들 가르쳐주지 않은걸 다 풀어내진 못 한다. 천재성도 보석처럼 깎고 다듬고 매만져줘야 비로서 빛을 내는 법이다. 시연의 입술에서 안타까운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시연. 총 68점. 불합격입니다.” 시연의 불합격 소식은 그날 바로 학교 게시판에 올라갔다. 많은 아이들이 시연의 불합격, 전학사실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윤세고등학교의 꽃인 강시연의 전학사실은 충격이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환과 다연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된거야, 강시연?” “...” 다연의 무거운 목소리와 여환의 의문의 눈초리가 시연에게 쏟아졌다. 슈엔은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며 시연을 쳐다보았다. 시연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담담한 척 말했다. “헤에, 뭐... 어차피 언젠가는 들통날 사실이었잖아. 너무 빨리 들통나긴 했지만.” “강시연!” “오빠도 알잖아. 난 오빠처럼 천재가 아니야. 오빠도, 아빠도, 엄마도 언젠가 이런 일이 한번쯤 터질 것이란거 예상하고 있었잖아. 물론 너무 빨리 들통나긴 했지만, 오히려 후련하고 좋을 거야.” 시연의 말에 다연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화를 내었다. 바보같이 헤헤 웃는 시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울고 불고 자신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원하지. 다른 학교로 전학가기 싫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애원하면 내가 교장앞에서 빌어볼 수라도 있는데... 왜 그렇게 강한 척 하니. 너한테 오빠의 도움은 필요 없었던거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 이제 내일부턴 여기 안 나오겠다. 일주일 쉬면서 다닐 학교 생각해봐야지.” 다음날. 시연의 말대로 시연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출석을 부를 때도 시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시연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했다. 주단비처럼 날카로운, 앙칼진 매력이 아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지녔던 만큼 시연은 1,2,3학년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시연의 전학사건은 가슴아픈 사실이었다. “시연...” 여환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그 귀여운 소녀를 떠올렸다. 하얗고 뽀얀 얼굴에 큰 눈을 갖은 흑색 머리칼이 너무 매력적인 여자. 언제나 밝게 웃기만 하는 여자. “강시연...”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가 행복해하지않고 슬퍼하면, 그녀가 밝은 웃음이 아닌 슬픈 웃음을 지으면, 그녀가 발랄한 목소리가 아닌 슬픈 목소리로 말을 하면, 내 가슴이 더 터질것 같고 내 가슴이 더 찢어질 것 같아. 여환은 마음을 다 잡고 교장실로 향했다. 그때 연희가 여환의 뒤를 뒤따라왔다. 여환은 의문의 눈빛으로 연희를 쳐다보았다. “꼭... 시연이 학교에 나오게 해줘.” “...?” “시연이는... 내게 희망을 건낸 유일한 친구니까... 그렇게 가는 거 원치 않아. 딸기맛 사탕... 꼭 값아야 한다고..” 연희가 더듬더듬 어색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여환이 미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녀는 빛을 갖은 여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빛을 반사시켜 빛을 내게 만드는 존재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건내려는 여자다. 그런 여자라서 사랑한다. 그런 여자기 때문에 아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아파하는 것은 죽어도 안된다. “안녕하십니까. A -1반 민여환이라고 합니다.” 그의 당찬 목소리가 교장실을 울렸다. 교장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있던 젊은 교장은 비웃음인지 웃음인지 구별안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저는... 윤세고등학교가 천재양성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재양성소가 아니다?” “시연은 비록 천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다소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훗, 여환이라고 했나?” 그의 묘한 보이스가 여환의 귀를 타고 흘렀다. 여환은 온몸에 긴장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위험한 남자다. “윤세고등학교는 천재양성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미안하게도 우리 윤세고는 천재양성소가 맞아. 아무나 받아들여줬다면 우리 윤세고등학교가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하지만이란 것은 없어. 그것은 힘 없는 자의 궁색한 변명밖엔 되지 않지. 여환군. 당신의 머리는 상당히 좋은 편이야. 그 잘 돌아가는 머리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 지금 너가 하는 말들이 실현 가능한지 말야.” 여환도 알고 있다. 시연이 전학을 가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예전같았음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다. 학교에서 하는 대로 냅뒀을 것이다. 하지만. 시연을 사랑한 뒤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고, 나만 생각할 수 없었다. 시연은 주위에 빛을 반사시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갖은 어둠이 시연을 잠식시킬까봐 억지로 빛을 내려고 애썼다. “교장 선생님.” “...” “저도 알아요. 하지만 시연이가 이렇게 나가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많이 아파할 녀석이예요. 무작정 받아주는 것엔 무리가 있겠죠.” “흠.” “재시험을 한번 더 보게 해주세요. 대신 기일을 조금 늘려주세요. 한달이라는 기간동안 시연이를 재시험에 붙게 만들어놓을게요. 제발 부탁드려요.” 여환의 말에 교장 선생님은 대답없이 의자를 여환의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여환에게는 교장 선생님의 등밖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 행동이 허락의 의미같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환이 교장실을 나가고. 그의 매력적인 보이스가 교장실을 쓸쓸히 울렸다. “여전히 남자보는 눈 하나는 탁월하구나, 시연아.” 23. “그럼 단비 니가 한 짓이었단 말야?” 승은은 흘러내린 옆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주단비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우아하게 웃었다. 웃을때 드러나는 고른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뭐, 그런 셈이지.” “하!” “아무리 공부를 안 했다 해도 20점은 너무 심하지 않니?” “하지만..” “봐봐, 역시 되는 사람들한테 몸을 팔아서 들어온 거 맞지? 어떻게 재시험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떨어지니, 떨어지기를. 여튼간에 천박한 것들은. 쯧쯧쯧.” 자신의 친구가 너무 사악하고 잔인하게 보였다. 짜증난다, 짜증난다 매일 입에 달고 살았었긴 했지만 쫓겨나게 할 줄 이야.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주단비는 함부로 대하기엔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자신의 부모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짝. 이라는 살과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과 함께 단비의 목이 옆으로 세차게 돌아갔다. 주단비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과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져서는 자신을 때린 상대를 쳐다보았다. 평범하지만. 모든게 평범하지만 지적인 매력이 있는 소녀였다. “김연희?” “넌... 넌 정말 나쁜 애구나.” 깔끔하게 잘 정리된 방에 여자 하나, 남자 둘이 마주 보고 앉아있다. 흑색 머리카락에 순정만화 주인공마냥 생긴 여자는 고급 원피스를 입고있었고, 검붉은빛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귀공자 같이 생긴 남자와, 검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매를 갖은 남자는 고급 브랜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재시험을 또 보라고?” “그래.” “싫어.” “강시연!” “또 떨어질텐데... 그런데 또 보라고? 결과가 눈앞에 훤히 보이는데?” 시연의 말에 다연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시연은 벌떡 일어나서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슈엔 패션쇼 보러 가야되.” 시연이 방을 나가고 한동안 방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여환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일어나서 시연의 뒤를 ?i았다. 그리고는 시연의 팔을 힘있게 잡아끌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강시연.” “...” “내가 사랑한 강시연은 항상 웃는 얼굴을 갖은 여자였고, 내가 사랑한 강시연은 절대 포기란 것을 모르는 여자였고, 내가 사랑한 강시연은 미리 겁내며 포기하기보단 맞서 싸우는 여자였고, 항상 주위에 빛을 뿌리는 여자였어.” “...” “시연아..” “...그럼...너가 책임지고 나 붙게 해주는 거지?” 시연이 울먹이며 말했다. 여환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시연을 꽈악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한편 시연에게 이런 위기가 닥쳐있음에도 불구 슈엔의 첫 데뷔무대인 패션쇼 진행은 한창이었다. 시연에게 위기가 닥쳤지만 혜란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였다. 그런 엄마였다.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이익이 먼저이다. 이윽고 패션쇼가 시작되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유인 즉 첫번째, 디자이너가 모든 패션리더들의 우상인 정혜란이라는 점이고 두번째, 정혜란이 자신있게 추천한 소녀가 등장한 다는 점이었다. 모든 이들의 주목을 순식간에 잡아챈 혜란의 패션쇼는 역시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옷들은 조명을 받으며 더욱 화려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역시 정혜란이야.’라며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쇼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 소녀. 그 소녀로 인해 그 패션쇼는 더욱 빛이 났다. 찰랑이는, 마치 보석같아 보이는 탐스러운 레몬빛 머리카락. 동그랗고 큰 눈에 말아올라간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코에 붉으스름한 입술. 예전처럼 삐쩍 마른 것이 아니라 적당히 볼륨있고 적당히 매력있는 몸매. 아! 너무도 아름답도다. 이런 소녀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정혜원입니다.” 슈엔이라는 가식적인 이름보다 정혜원이라는 순수 한국이름이 더욱 마음에 든다는 다연의 말에 정혜원 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그녀였다. 혜원이 환히 웃으며 한 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고급 원피스를 입은 시연과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다연과 여환. 그 셋은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도,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패션쇼가 끝나고, 혜란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혜원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목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마음에 들었다. 혜란은 뿌듯한 마음으로 혜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딸인 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많이 슬퍼보이는 자식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시연아.” 시연은 자신을 부르는 혜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혜란이 시연을 향해 성큼 다가와서는 꼬옥 안아주었다. “힘들더라도 참아라. 많이 아프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꾸벅였다. 밝은 색 계통의 정장을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그는 분명..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분명 교장 선생님이었다. 시연과 여환은 교장 선생님이 왜 이곳 까지 오셨을까, 혜란의 팬이었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본 다연의 표정은 놀람과 경악 그 자체였다. “다, 당신은..” “제법 남자티 난다, 이젠.” “혀..형.” “그래, 오랜만이구나. 다연이도 시연이도 이젠 어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겠는걸. 하핫.” 24. “아아...” 교장선생님이 오빠와 아는 사이라고? 시연은 의아한 눈치로 다연과 교장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시연이 의아해하고 있음을 눈치챈 다연은 당황해하던 표정을 금새 지우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시연이는 기억 안 나나보구나. 이준형,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그렇게 쫓아다녀놓구선. 근데 형이 교장선생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다연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하는 동생을 바라보듯 아주 따스했다. “윤세고등학교의 교장이 되기위해서 미국에 갔던거니까.” 그 말을 끝마친 이준은 다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접고 시연에게로 옮겼다. 시연은 입을 다물지 못 하고 넋이 나간채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은 시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꼬마 공주님, 안녕.” “아아...” 시연의 눈동자에 눈물이 ?션慧?. 그럼에도 불구 시연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이준의 품에 폭 안겼다. 이준은 따스한 미소와 함께 시연을 꽉 안아주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오빠였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똑똑하고 예의바르던 이준을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떤 감정이었던간에 이준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환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혜원(슈엔)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혜원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들썩일 뿐이었다. 집. 이준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그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연은 이준이 내민 쪽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A-1042 이게 뭘 뜻 하는 걸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시연은 다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을 읽고 있던 다연은 방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책을 덮었다. “시연아.” “오빠, 궁금한게 있어서..” “뭔데?” “A-1042가 뭐야?” 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연의 눈동자가 급속히 커졌다. 입술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다연은 어색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연에게 다가가서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그거... 어디서 들었어?” “오, 오빠?” “어디서 들었어, 시연아.” “이준오빠가...” 다연은 시연의 말에 인상을 굳히며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고, 방에 홀로 남은 시연은 급히 다연을 쫓아 나갔다. “어? 어디갔지?” 급히 1층으로 내려왔지만 다연이 어딨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다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향한 곳은 아버지용 서재였다. 시연은 살금살금 그 문쪽으로 다가갔다. 간혹 여자 목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혜란의 목소리인 듯 했다. “어머니, 이미 끝난 일이예요! 시연이가 다시 아프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프다니? 내가 어디가 아프다는 거지? “시연이가 어렸을 때 얼마나 고통 받...” 그때 누군가가 시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연은 화들짝 놀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란색 긴 생머리를 깔끔히 하나로 올려묶은 혜원이었다. 혜원은 시연의 반응에 즐거워하며 시연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시연아?” “아, 그게..” “나 지금 슈퍼갈껀데, 같이 갈래?” “아, 그, 그게..” “얼른 가자, 응?” 더 들어야 하는데, 호기심이 미치도록 반응했지만 혜원의 손에 이끌려 결국 슈퍼로 향하는 시연이었다. 시연이 밖으로 나갔음에도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았다. 슈퍼로 향하는 내내 시연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언제 아팠다는 걸까? 나처럼 건강한 애도 드물꺼라던 그 장난들은 거짓말이었을까? 혜원은 시연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 궁금해서 물었다. “시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응? 아, 아니야.” “흐음, 너 이상해~” “하하, 아니야.” 다연의 흥분은 어느새 가라앉아있었다. 다연의 목소리도 어느새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다연은 혜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때 분명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셨죠. 차라리 천재성을 죽이겠다고. 그런데 이제와서 시연이를 또다시 병원에 가두려는 이유가 뭡니까?” “시연이가 지금 그 머리로 살아가길 원하는 게냐? 시연이는 희대의 천재로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고! 그때의 시연이는 너무 어리고 약했기때문에 천재성을 죽인 것 뿐이야. 지금은 시연이가 그 고통을 다 이해하고, 다 감당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건 니 아버지와 이준이도 동의한 일이야!” “어머니!! 시연이는 아직도 많이 어리고 약하다구요!!!” “다연아, 열을 식히거라 우선.” 성환의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다연은 입술을 꾸욱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연의 눈빛은 혜란을 쏘아보고 있었다. 성환은 다연을 침착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시연이가 윤세고등학교에 떨어질 위험에 당했다지.” “네, 그렇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인것 같구나. 하늘이 돕는 거란다, 다연아.” “아버지!” “시연이도 시연이 나름대로의 운명이 있는 게란다. 운명을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순 없단다. 그건 하늘을 배신하는 일이니깐.” “하지만..” “네가 옛날처럼 시연이가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받아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안다. 나도 시연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이때까지 기다린 거란다. 더 기다릴 참이었지만 이미 일이 터졌고, 차라리 이 김에 수술을 하는게 나아. 시연이는 예전처럼 어리고 약하지 않아, 또한 의료시술도 많이 발전을 했고.” “... 그럼 시연이는 언제 입원을 하게 되죠?” “내일 모레 쯤이란다.” 다연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가 잠시 뒤 고개를 다시 들며 물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반항적이고 상처받은 듯한 눈빛이 아닌 침착하고 냉정한 눈빛이었다. “시연이가 어렸을 때처럼 많이 아파한다면 어떻게 하실껍니까.” “당연히 중단할 참이다.” “그렇죠. 아버지는 분명히 지금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어머니, 아버지의 선택이 옳다고만 생각하여 말리지조차 않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시연이가 아파하면 가차없이 중단시킬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연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성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어둠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언제까지나 어둠이 지배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빛이 될 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25. “감히 천한 계집따위가 내 뺨을!” 주단비. 아름다운 외모와 권력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마녀와도 같은 미녀. 그녀는 지금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못생긴데다가 돈도 없는 천한 계집따위가 감히 이 주단비님의 뺨을 때리다니! 그것도 손바닥으로 세게! 부모님에게조차 한번 맞아본 적 없는 내가, 그따위 계집에게 뺨을 맞았다니!! “다, 단비야.” 주단비의 단짝 친구 승은은 단비의 화난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김연희라고 하는 시연의 친구가 와서는 단비의 뺨을 세차게 때리고는 치욕적인 말들을 남기더니 사라져버렸다. 잡을수 조차 없었다. “빌어먹을 천한 계집애! 네까짓게 감히 나를 때려? 나를? 두고봐, 강시연 그 계집애와 쌍으로 자근자근 밟아줄테니깐.” 승은은 단비의 잔인한 표정에 화들짝 놀랐다. 단비의 모습은 예쁜 미녀의 탈을 쓴 마녀와도 같았다. 너무도 잔인했고, 냉정했다. “하아...” 여환은 침대에 누워 눈을 지긋이 감으며 아까의 장면을 떠올렸다. 교장선생님의 등장, 그의 정체. 그리고... 시연의 그 눈동자.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림끝에 만났다는 듯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눈동자. 가슴이 아프다. 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누구란 말인가. 여환은 머리라도 식힐 겸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걷고만 있는데 어떤 여자 두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낯익은 얼굴인 듯 싶었지만, 언젠가 한번 만났던 사람이거니 하고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술을 먹었는지 삐뚤삐뚤 가는 차가 보였고, 그 둘이 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라의 순간이었다. 자칫하면 생사의 갈림길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여환의 순발력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여성은 차에 치였을 것이다. 그 차는 그녀를 치일 뻔 했음에도 불구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렸다. 얼떨결에 집에 걸어가게 된 승은과 단비. 단비는 더욱 화가 난 상태였다. 천한 계집에게 뺨을 맞진 않나, 집까지 걸어가기까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승은에게 모든 화를 풀며 집으로 가고 있는데, 환한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을땐 하얀 승용차가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것이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살고 싶다' 뿐이었다. 온 몸은 마취제라도 맞은 듯 마비가 되어 찌르르르 전기가 통할 뿐이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땅에 붙기라도 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움직여지는 것은 두 눈뿐. 껌뻑 껌뻑 거리며 차를 노려보았다. 제발 멈춰라! 하지만 그 차는 멈추지 않았고, 죽음을 예상하는 순간... 어느 강한 힘이 자신을 꽈악 끌어당기더니 옆으로 밀쳐내었다. 그 위급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을 누군가가 꽈악 안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팔에 겨우 힘을 주어 상대를 밀쳐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은 눈물이 맺혀 흐릿 했지만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반항아적인,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사내. 민여환이었다. “고,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누구 앞에서나 등허리를 꼿꼿히 펴고 실수를 해도, 죄를 지어도 죄책감 한번 느껴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고맙단다. 승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비를 쳐다보았다. 단비의 뺨은 불그스름 했다. “별로.” 여환은 손을 탁탁 털더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여환이 떠났음에도 불구 단비의 몸은 한번의 미동도 없이 굳어있었다. 승은이 걱정스럽다는 눈치로 단비를 건드리려는 순간에 단비의 입술이 열렸다. “저 남자야.” “응? 뭐, 뭐가?” 단비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녀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또그르르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여느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내 운명의 남자.” 26. 어느새 아까의 일은 잊은듯 시연은 혜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노오란 달빛이 그 둘이 가야할 길을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꼭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애.” “하여튼 강시연, 상상하는 거 하고는. 깔깔깔.” 시연과 혜원은 두 손을 마주잡고 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때 혜원이 마침 궁금했다는 듯 손벽을 짝 마주치며 시연엔게 물었다. “시연아, 근데 교장선생님하고는 무슨 관계야?” “응?” “아까 패션쇼에서 만난 교장선생님 말야.” “아아, 인준오빠 말하는 거구나?” “오빠아?” “예전에 옆집에 살았던 오빠야. 정말 잘생기고 너무 다정하고 아는 것도 되게 많았어. 그래서 항상 존경하고 동경했었지. 하나도 모르는 문제를 쓱쓱 풀어주고, 내가 실수를 하면 혼을 내기는 커녕 내 머리를 쓱쓱 다독여줬었거든. 그래서 많이 좋아했었어. 어떻게 보면 첫사랑이라고나 할까? 헤헤헤.” 혜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연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시연을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선 정말 예전에 좋아했던 오빠일뿐 사랑의 감정은 서려있지 않았다. 여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야 겠어. 그때 누군가가 시연과 혜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로등에 비쳐 미세하게 보이는 그는 시연의 첫사랑, 교장 인준이었다. “오빠?” 이젠 교장선생님이란 명칭 대신 '오빠'라는 친숙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더이상 멀리서 바라봐야할 사람이 아니었다. 첫사랑이었던, 동경했던 서인준. '그'였다. “시연아, 잠깐 얘기 좀 할까?” 결국 혜원은 먼저 집으로 향했고, 시연과 인준은 가까운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선 은은한 클래식이 흘러나왔고, 그들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농도 짙은 커피 두 잔이 놓여있었다. “오빠, 할 얘기가...” 시연의 말에 인준은 한숨을 퍽 내쉬며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의 붉은 입술은 커피로 인해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는 커피보다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시연의 이름을 불렀다. “시연아.” “에..?” 그의 반투명한 눈동자가 시연을 가슴아프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살짝 눈물이 고여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걱정된다는 듯 걱정이 서려있었다. “오, 오빠.. 왜 그래.” “시연아.” “으응?” “3살 때의 일을 기억하니?” 너무 예뻐서 인형같아 보이는 한 어린 아이가 있다. 하야디 하얘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희고 투명한 피부에, 흑색 큰 눈동자가 너무 인형같은 아이였다. 얼굴은 조막하다 못해 주먹 하나보다도 더 작았고, 붉은 입술은 너무 귀엽고 앙증맞았다. 그렇게 신의 축복이란 축복은 모조리 받고 태어난 그 예쁜 아이는 행복의 웃음대신, 슬픔의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아픔, 고통, 실연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어린 아이는. 안타깝게도 너무도 축복을 받은 덕택에 뇌에 문제가 있었다. 아이의 뇌는 뛰어났고, 어린 아이가 이겨낼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희대의 천재라 불릴만큼 뛰어났고, 아이가 이겨낼 정도의 수준이 아닌, 성인도 이겨내지 못 할 만큼 뛰어난 뇌였다. 그래서 결국 아이는 '미쳐버린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차분하지만 슬픔이 깃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막막함과 가슴 아픔에 정신을 잃을 듯 눈앞이 깜깜했다. “어쩔수가 없다, 성환아.” 흰 가운을 입은 30대 초반의 남성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성환은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듯 외쳤다. “그렇담 나의 아이를, 나의 사랑하는 시연이를 이대로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자기 혼자 밥도 못 먹고, 자기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아예 미쳐버린 상태인 아이를 그냥 미쳐서 살도록 내버려 둬야 하냔 말이야!!!! 자네 뛰어나잖아, 우리 나라 최고지 않은가!! 자네라면 고쳐줄수 있을꺼야, 자네라면!!!” “성환, 흥분을 가라앉히게. 이건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야. 지금의 의료기술로서는 저 아이를 정상으로 돌려내기엔 불가능해.” “아무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때 한 여성의 또박또박한 가늘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붉은색의 웨이브진 머리카락에, 청초한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 혜란이었다. 혜란의 손에는 작은 손 하나가 매달려있었다. 검붉은색 머리카락에 흰 피부, 귀공자 같은 예쁜 외모를 갖은 남자아이. 다연이었다. “혜란, 무리예요.” 대한 민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인 혜란은 누워있는 예쁜 아이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방법이 없진 않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요?” 성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혜란을 바라보았다. 혜란은 성환이 앉아있는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맞춤을 했다. “너무 슬퍼말아요. 시연이는 어떻게든 정상으로 되돌일 거예요.” “혜란...” “기원씨.” “예?” “아이의 천재성을 죽여주세요.” 27.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아? 헤헤, 3살때 일을 어떻게 기억해.” “너가 3살이었을때, 희대의 천재가 죽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을 기억하니.” 시연은 큰 눈동자를 떼구르르 굴리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인준에게 물었다. “희대의 천재가 죽었다고? 난 잘 모르겠는걸?” “강시연이라는 천재를 모른다는 거니.” 강시연이라는 천재라니? 시연은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인준을 쳐다보았다. 인준은 다시 한번 커피를 들이키며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며 말을 꺼냈다. “너의 뇌는 너무 활발했고, 너의 작은 체구로는 결코 그 뇌를 이겨낼 수 없었어. 결국 너의 부모님께선 너의 천재성을 잠깐 죽이기로 하셨지.”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난 천재성 같은거 없어. 정말로.” “근데 너의 어머니께서, 너의 천재성을 살려내자고 말씀하셨다. 내가 저번에 줬던 종이에 써져 있던 번호를 기억하니?” “A-1042...?” “너가 어렸을때 입원했을 때의 환자 번호였어.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될 거야.” 인준의 말은 충격 이상의 충격이었다. 야구 빠따에 머리를 얻어맞은듯 띵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에도 걷고 있는지조차 느끼기 힘들었다. 충격을 받았을 뿐인데, 뇌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지 시연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또그르르 흘러내렸다. 가슴이 콱콱 메어지며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아무것도 떠올리기 싫을 만큼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 만큼 가슴이 아팠다. “아파, 아프다구...” 3살 때의 아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프다고 외쳤다. 아프다고 소리쳤다. 아프다고 주변에 있던 모든것을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어 던져댔다. 그래도 가족들은 모른척 했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다연이 오빠까지. 날 모두 무시하고 못 본체 했다. 흰 가운을 입은 아저씨가 너무 미웠다. 나를 독방에 가두고, 어떤 때는 가족들도 못 만나게 했다. 내 얼굴만한 주사를 내 몸 곳곳에 넣고, 나를 못 살게 굴었다. 아프다고 그렇게 울어대는데, 그 아저씨는 못 본체 했다. “아아아아아악!!!!!!!!!!!!!!!!” 두 손으로 귀를 세게 쥐어뜯듯 막으며 길거리에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단지 그때처럼 아프기 싫을 뿐이야. 또다시 가족들과 헤어져 독방에 갇혀있기도 싫다구. 환한 햇빛을 보며 가족들과 두손 부여잡고 뛰어놀구 싶었을 뿐인데... 그랬을 뿐인데... 단지 그걸 원했을 뿐인데... 시연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아퍼. 머리가 아퍼. 온 몸이 욱신 거려. 그때 주사 바늘이 통과했던 내 모든 살들이 저려와. “싫어, 정말로!!!” 시연의 감겼던 두 눈이 확 뜨였다. 눈물 범벅이었던 얼굴은 말끔히 닦여있었고, 어떤 침대에 누워져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혹시 그 병원의 독방인가 싶어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 거렸다. 그러나 독방같아 보이진 않았다. 쿵쾅대던 심장이 다시 침착해지며 시연은 살짝 일어났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누군가는. 너무도 사랑하는 그, 여환이었다. “여, 여환아...” 시연은 무작정 여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에 두 손을 걸고 그의 따스한 품에 와락 안기었다. 그의 체온과 그의 향기가 미친듯이 시연에게 휘감겨왔다. 여환 또한 손을 들어 시연을 안아주었다. 시연은 그의 손길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연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시연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또 한번 불렀다. “시연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여환아.” “아픈거 아니지?” “응.” “힘든거 아니지?” “..응.” “괴로운거 아니지?” “...응.” “아프면, 몸이 찢어질듯 가슴이 찢어질듯 아프면 내게 기대어와도 좋아. 힘들면,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릴만큼 힘들면 내게 안겨와도 좋아. 괴로우면, 이 세상을 통째로 집어던져버릴 만큼 괴로우면 내게 달려와도 좋아. 그러니까 혼자 감당해 내려고 하지마.” “...” “아픔과 힘듬과 괴로움을 머금은 천사는 다른 사람에게 빛을 줄수 없잖아.” 그렇게 잠이 들었나보다. 그의 따스함과, 그의 체온과,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나보다. 모든 슬픔을 잊고서 그렇게 잠이 들었나보다. 28. “시연이가 겪고 있는 일, 시연이에게 벌어질 앞으로의 일들, 제가 모르고 있는 모든 것. 무례해보일지 모르고, 괜한 간섭에 기분이 나쁘실지도 모릅니다. 허나 저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하겠습니다.” 혜란과 성환, 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환을 쳐다보았다. 조금 더 시선을 돌려보면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시연이 시야에 들어온다. 천사같은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는 시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웃음이 나오게끔 행복해 보인다. “여환.”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는건 사내로서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어째서 선배님까지 저에게 벽을 두고 대하시는 겁니까. 부족합니까? 시연이의 배우자로서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인 겁니까?” 다연은 붉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다연, 그에게 있어 시연이의 3살때의 기억은 최악이었고 최악의 기억이었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렸는데도 그때의 일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머리가 좋아서인지, 아님 너무 충격적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동생, 시연이 너무도 아파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따스한 손길을 너무도 갈망했었다는 사실을.. “여환군.” 그때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냉기가 서려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의 어머니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혜란이었다. 여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연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패션쇼에서 잠깐 만난 것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우아한 자태에 도도한 인상. 천방지축에 활발하고 명랑한 시연과는 전혀 매치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예.” “혜원양에게 들어서 여환군이 우리 시연이와 교제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예.” “하지만 교제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시연이가 말하길 원치 않는 다면 전 말해줄 수 없어요. 나는 시연이의 엄마일 뿐이지, 시연이의 속마음까지 읽어낼순 없으니까요. 시연이가 이 일을 여환군과 같이 극복해나갈 마음이 있다면 시연이가 스스로 입을 열거예요. 그리고 도움을 청할테죠. 그때 여환군이 그 손을 잡아 주세요. 내 말 이해하셨나요?” “...” 혜란이 고개를 살짝 까는 여환을 보며, 아니 정확히 말해 여환의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함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미소였다. “머리카락이 정말 아름답군요.” 시연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떳을땐 약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 쯤이었다. 시연의 흑색 눈동자가 주변 사물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있을 때 쯔음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곯아떨어 잠이 든 남자가 사랑하는 '그' 임을 알았다. 시연의 손을 혹여나 놓칠 새라 꽈악 잡고서 잠이 든 그는 시연이 일어났음에도 불구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잠에 빠져있었다. 시연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이 곳이 자신의 방임을 알아 차렸다. “여환...” 딱 한번 와본 것일 뿐인데도 그는 시연의 집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해내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탓일까, 아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으음..” 시연이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올 때 쯔음, 침대가 떨리는 바람에 여환이 낮은 신음성을 내며 뒤척였다. 깬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고는, 시연은 이불을 여환의 어깨위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여환의 짙은 검은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매만져주었다. 팟. 여환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시연의 앙증맞은 작은 손이 누군가의 큰 손에 덥석 잡혀버렷다. 시연은 놀라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상대는 시연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여, 여환.” 시연이 당황해하며 여환을 불렀다. 창문의 틈새로 들어오는 노오란 달빛에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달빛을 머금은 그와 그녀는 누가봐도 인정할 만큼 아름다웠다. 시연은 큰 눈을 껌뻑이며 당황해서는, 잡힌 손조차 빼내지 못 하고 멀뚱멀뚱 여환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 같았음 시연의 이런 순수한 모습에 미소 지었을 그이건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는 서려있지 않았다. “여...환아?” 시연은 여환의 무표정한 얼굴에 당황해서는 여환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그러나 여환의 입은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시연이 당황해서 일어나 불을 켜려고 할 때 쯤, 여환이 시연의 손을 한번 더 세게 끌어당겨버렸다. “아앗.” 반쯤 일으킨 시연의 몸이 여환의 힘에 의해 기우뚱 하며 여환의 품으로 안겨졌다.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는 시연을 여환이 제지하며 시연의 허리를 든든한 팔로 감쌌다. 시연의 얇은 허리는 그의 팔에 쏘옥 감기어졌고, 시연은 조금의 움직임 조차 할 수 없었다. 시연이 여환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빠져나가려 하였지만, 그럴 수록 여환의 팔은 더욱 더 세게 조여올 뿐이었다. “여, 여환아.” 큰 눈에 살짝 눈물을 달고서는 시연이 당황해서 외쳤다. 그때 여환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서려졌다. 그러나 다정하고 편안한 웃음이 아닌, 약간은 잔인하고 악마같은 웃음이었다. “Kiss me.” 그의 입술에서 세어 나온 말에 시연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여..여환..” 그때 여환의 부드러운 입술이 시연의 살짝 벌려진 입술에 그대로 맞닿았다. 시연은 당황해서는 큰 눈만 껌뻑 이며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못 했고, 여환은 한 손은 시연의 허리를 세게 쥐고, 한 손으로는 시연의 턱을 살짝 잡아올리곤 농도 짙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몇 초간 흘렀을까. 드디어 사태파악이 된 시연은 그제서야 여환을 밀쳐내려 했지만, 시연의 작은 체구는 이미 여환의 크고 단단한 팔에 감싸진 뒤였다. 동동 거리며 여환의 키스에서 벗어나려하던 시연은, 점점 여환의 농도짙은 키스에 온 몸의 힘이 다 풀려버렸다. 시연의 힘이 풀린걸 알았을까, 그의 키스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29. 전국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뽑고 뽑아서 가득 채운 학교, 최고의 명문고등학교 윤세고. 모범생의 선망의 학교. 그러나 별 볼일 없는 실력으로는 절대 넘볼 수 없는 학교. 온 세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는 고등학교.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보다도 더 유명하고, 더 뛰어난 학교. 대학 안 나와도 윤세고 나왔다고 하면, 취업률 100%인 학교. 천재들중의 천재들만 다니는 윤세고. 어찌보면 영악하고 이미 세상의 때가 다 묻은 학생들만 다니는 윤세고. 세상의 맛을 알고, 세상의 법칙을 아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겉보기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때란 때가 다 묻어있는 윤세고를 그런 윤세고를 환히 밝히던 한 소녀가 이주일 째 안 보인다. 모든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던 한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천사와도 같은 아늑한 미소를 가지고 있던 소녀. 빛을 머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뿌려 환히 밝혀주던 소녀. 한 학생의 말처럼 가난하고 천박할지 몰라도 정말 순수하던 소녀. 그 실력으로 어떻게 윤세고에 들어왔는지, 중간고사를 당당히 꼴찌하던 소녀. 그런 주제에 학교 대표들하고만 어울리던 소녀. 흰 백색이 너무도 잘 어울리던 소녀. 강시연. “보고 싶어.” 여환은 그리움이 가득찬 짙은 눈동자로 시연의 자리만을 아무 생각없이 계속 주시했다. 시연이 앉아있어야 할 의자와, 시연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큰 손으로 시연의 책상을 한번 쓰윽 매만졌다. 차가움이 손바닥의 말초신경부터 서서히 느껴져왔다. 시연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연과의 추억만 되새겨 보며 멍하니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여환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음.” 윤세고 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이는 소녀였다. 여느 여고생처럼 평범해보이는 소녀였다. 곱게 땋은 양갈래도, 콧등 위에 걸려있는 무테 안경도 모든게 다 평범해 보이는 소녀였다. 하지만 안경 너머 살짝 보이는 짙은 속눈썹과 짙은 눈동자가 강한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머리를 푸르고 안경을 벗으면 꽤나 도도해 보일 것 같은 소녀였다. “저기, 시연이 왜 학교에 안 나오는 지 알아? 너가 시연이랑 사귀는 사이니까, 잘 알 것 같아서.. 정말 짤려서 학교에 못 나오는 거야?” 소녀의 왼쪽 가슴팍에는 '김연희'라는 이름표가 곱게 달려있다. 여환은 아무 대답없이 연희의 맑은 눈동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악의는 없는지, 그녀가 시연에 대해 묻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시연이를 아프게 할 존재는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여환은 연희의 맑은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시연처럼 겉모습부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예뻐서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선 시연처럼 환한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연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런 환한 빛. 닮고 싶을 정도로 밝아서, 너무 아름다워서 자신 때문에 때가 묻진 않을 까 걱정스러웠던 그 빛. 그 빛이 이 소녀에게도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소녀 또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아..” 여환은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시연을 향해 주위의 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해 줄수 없는 거니?” “아니.” “시연이 왜 학교에 안 나오는 거야?” “오늘, 아님 내일쯤 퇴원을 할꺼야.” “퇴원? 어디 아픈거야?” “응. 걱정 마, 다 나았을 테니까.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게 안겨올 테니까. 학교가 끝나고, 한 소녀가 터덜터덜 힘 없이 병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평범함이 가득 하지만, 몸에 걸쳐있는 교복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친구가 아픈데...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줬던 친구가 아픈데.. 난 그것도 몰랐구나. 친구가 상처받아 힘들어할 때.. 그때도 난 몰랐었는데. 난 시연에게 친구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연희는 산소호흡기를 통해 겨우 숨을 내쉬고 있는 한 병자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어 얼굴을 뚜렷하게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고운 주름살이 정말 다정했을 것 같은 4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연희는 엄마의 손을 꽈악 잡았다.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꽉 잡았다. 예전에는 따스함이, 부드러움이 느껴졌는데 왜 이젠 아닌건데. “엄마.” “...” “왜 항상 나에게는 슬픈 일만 생기는 걸까? 아빠도 교통사고로 죽고, 엄마도 병으로 이렇게 몸져 눕고... 이젠 싫다해도 항상 나를 쫓아다니던 시연이도 아프고... 나 때문에 그런 건가봐. 나 때문에...흐흐흑...” 연희의 맑은 눈동자의 뿌연 무언가가 가득 채워졌다. 이윽고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흰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목소리도 갈라져서는 꺽꺽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왜 나는 노력해도 안되는 거지? 정말 열심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엄마 호강 시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유일한 내 꿈이었는데... 흐흐흐흑... 그게 그렇게 잘못된거야? 그런 거야, 엄마?” 대답없는 엄마를 계속해서 부르며 꺽꺽 울었다. 대답 좀 해줘. 대답 좀 해주세요. 정말 가슴 아프단 말이야. 정말 아파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생일 날 선물 사가지고 오고 있다는 아빠의 전화. 엄마와 생일 케이크에 촛불 하나 켜놓구선 베시시 웃고 있었는데.. 아빠의 전화일줄 알고 빨리 들어오라고 외쳤는데, 그랬는데.. 차갑고 무뚝뚝한 한 여자가 말했다. 교통사고라고.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아빠가 무서웠다. 그래서 말끔히 씻고 선물을 들고 나올 아빠를 기대했다. 그러나 아빠는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피에 절은 한 토끼인형만 남기고서. “흐흐흑...” 그때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어깨에 닿았다. 연희는 화들짝 놀래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맑은 두 눈동자에 한 소녀가 비추어졌다. “시, 시연아?” 흑색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흰 피부가 더욱 창백해져 안쓰럽게 보일 정도에 흑색빛의 큰 눈을 가진 소녀였다. 흰 원피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예쁜 소녀였다. “오호라~ 내 친구를 울린게 누구야~!! 다 주욱었어~!!!” 30. 지난 이주일은 지옥에서의 천 년.. 아니, 만 년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거대한 크기의 주사기가 내 온 몸의 혈관들을 자극해대었고, 하루하루를 엄청난 양의 약물로 겨우겨우 지탱하며 버텨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픔속의 '외로움'이었다. 난 이렇게 아픈데.. 아무 죄도 없는데 이렇게 아파야하는데 내 주위엔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마저도 없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요. 아프다구요.” 아프다는 말만 되뇌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1분 1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온 몸이 터질듯 아려오고 눈앞은 흐리멍텅 했다. 간간히 몸을 어루만지는 손의 차가움을 느낄때는 또 다시 큰 고통이 닥쳐왔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악몽같은 이주일이 흘렀다. “보고 싶어, 여환.” 가까스로 퇴원을 한 시연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가뜩이나 마른 몸은 더욱 빼짝 말라서는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고, 흰 피부는 더욱 창백해져 핏기가 가신 상태였다. 시연의 얇고 작은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성환의 차를 타며 다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성환은 시연이 많이 걱정되는지 운전하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혜란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단지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는 사실과, 많이 수척해졌다는 사실이 시연을 많이 걱정했다는 증거였다. “시연아 아직도 아파? 혜원이가 많이 걱정했었어.” 패션쇼 이후로 연예계 활동이 적극적으로 시작되면서 많이 바빠진터라, 혜원은 그녀의 퇴원을 반겨주지 못 했다. 그러나 다연의 말을 들어보니 혜원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시연을 많이 걱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젠 괜찮아, 오빠아.” 시연은 몸을 더욱 다연에게 기대며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다가 핸드폰 폴더를 열어 여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분 좋은 클래식 뒤에 여환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시연아.” 시연은 여환의 말에 피식 웃으며 가만히 듣기만 했다. -“너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응. -“알지 못 했다면 너에게 소홀히 대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응. -“사랑하는 시연아. 난 너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나도 그래. -“하지만 시연아. 나보다 널 더 필요로 하는 이가 있어. 우린 잠시 뒤에 만나자.” 시연을 태운 성환의 차는 한 병원앞에 멈춰섰다. 고급 승용차뒤의 낡은 병원이라니. 뭔가 모순된 것 같다. 차는 다시 떠나고 시연은 환하게 웃으며 병원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갑자기 등장한 예쁜 소녀의 모습에 병원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때 저번에 시연을 한번 보아 시연의 얼굴을 외운 간호사 한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연희 학생 보러 온 거니?” “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잘 좀 챙겨먹으렴.” “헤헷, 네.” 시연은 해맑게 웃어보이며 연희 어머니의 병실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시연의 차갑지만 따스한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녀의 동그래진 눈이 시연의 모습을 비출 때 시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강시연이 돌아왔대! 역시 잘린게 아니었대도!!” 윤세고는 지금 한바탕 난리였다. 잘린 줄만 알았던 윤세고의 순백의 꽃, 강시연. 그녀가 돌아왔단다. “안녕하세요오오.” 흰 얼굴에 흑색 눈동자, 흑색 긴 생머리가 매력적인 소녀가 밝은 톤으로 인사하며 들어온다.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 만큼 예쁘게 생겼다. 그녀의 옆에는 한 소녀가 있다. 큰 뿔테안경을 벗고, 양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 대신 차분하게 길게 늘어뜨린 소녀. 예전의 단정함과 약간의 촌스러움 대신 도도함이 빛나는 소녀, 김연희였다. “쟤...기, 김연희 아냐?” 누가 그랬던가. 변화가 있는 사람은 아름다워 보인다고. 평소에도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항상 단정한 외모에 공부만 하고 조용히 사라지던 소녀가 도도해져서 돌아오자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안녕, 친구들.” 연희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이젠 못 산다고 기죽지 않을래. 이젠 못생겼다고 기죽지 않을래. 이젠 못한다고 기죽지 않을래. 사람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사랑할 권리도 있으며, 존중받을 권리 또한 있다. 아무리 윤세고가 뛰어난 이들의 자재들만 다니는 곳이라고 한들,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괜히 기죽어하고, 괜히 비교나 해대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도 이들과 비교당해도 절대 꿇릴거 없다고. 과외 한번 못 받아봤던 나인데도 이 자리까지 올랐다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야. 연희는 고개를 돌려 시연을 쳐다보았다. 정말 예쁘다. 순수하게 정말 예쁘다. 그 말밖에 안 나올 정도로 예쁘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예쁜 이유는 내면의 아름다움이었음을 왜 나는 몰랐던 걸까. 천사같은 아늑함과 다정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던 걸까. ‘인생은 도박이야.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게? 바로 당당함이야. 그런데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떠는 쥐마냥 왜 그렇게 기죽어있는 거야. 왜 그렇게 벌벌 떠냐고.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 너에겐 히든 카드가 있잖아. 나를 믿고 당당해지라고.’ 도박. 당당함. 히든카드 시연. 무섭지만. 기죽지만. 움추리게 되지만. 이 정도의 수준급 히든카드라면 믿어봐도 될 것 같아. “여환.” 어느새 여환과 포옹하고 있는 시연을 보며 아니꼽다는 눈치로 시연을 쏘아보던 연희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자리로 향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완벽한 변신의 연희와, 이주만의 컴백의 시연에게 향해있었다. 분노에 찬 눈의 한 소녀와, 그리움이 담겨있는 눈의 한 소년. 아마도 시연의 윤세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리 평탄할 수는 없을 듯 싶다. 출처 :♥｀-^)／소설만땅넷ⓥ＼(＇-＾♥ 원문보기▶ 글쓴이 : 개장형아(완결) 댓글 26 인쇄 | 스크랩(33)▼ 여진Sz 1빠 재밌어요 ^^ 06.06.07 15:18 답글 소설광ㅋ 재미있어용~ㅋㅋㅋ 필독 같아용~ㅋㅋㅋㅋ 06.06.11 13:48 답글 はた。 재미있어요 ㅇㅅㅇ 06.06.17 14:21 답글 파란나라 꺄아~ 시연이 다시 윤세고에 와서 다행이에요~ >㉦< 06.06.25 10:58 답글 곷... 근데 중간에 짤렷나요??좀 모르겟네여...-ㅅ-;;아무튼 재미잇어여^^ 06.07.02 01:20 답글 코코샤넬 퍼가용!~~~ 06.07.08 08:45 답글 테디베어 퍼갈게여 06.07.13 17:27 답글 검은펜♥ ^^ 06.07.18 22:09 답글 류세이 안뇽하세요 시아입니다ㅇ_ㅇ 06.07.29 17:30 답글 세핀 재밌어요 06.08.14 15:51 답글 이별뒤눈물 나도 예뽀지거 싶어~ ㅋㅋ 06.08.24 21:02 답글 잠탱이† 너무 재밌어요~~ 나도 안경벗으면 이뻐질까?..ㅋㅋ 06.09.08 23:59 답글 마이마루 역시 재미있다~ㅋㅋ ㅇ_ㅇ 06.10.31 16:46 답글 barbara130 너무 재미있어요~ 06.12.23 22:53 답글 *은빛날개*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07.01.02 18:36 답글 나만사랑해줄래 스크랩.. 07.01.28 12:34 답글 天血[리듬] 재미있어용~^^ 07.02.04 18:32 답글 유숙이 퍼 갈께요~>_< 07.06.23 09:08 답글 은비령。 > ㅂ<너무 재밌어요!! 07.10.21 14:15 답글 썩소ㄱ-소녀 재밌어요~>< 08.02.01 22:43 답글 오늘은웃자 해피해피~~~^^ 08.02.14 20:31 답글 류비아 잼써여~~~ㅋㅋㅋㅋ 08.02.27 12:41 답글 류비아 ㅇㅅㅇ 08.06.25 11:44 답글 소중한나예요 재밋다.. 우핫. ^^ 08.08.06 16:58 답글 몽미ㅋㅋ 꽤 재밌 08.08.10 16:19 답글 월햐소설 너무 흥미진진해요 ㅋㅋㅋ 09.10.25 16:18 답글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회원은댓글을 쓸수 없습니다.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윗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31~40) 2006.06.06 ▼아랫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11~20) 2006.06.06 ▲top 서비스 약관/정책 | 권리침해신고 | 카페 신고 | 이용약관 | 카페 고객센터 | 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Daum | 카페 | 자주가는 카페 - 전체보기 - 편집 - 내 쪽지 |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로그아웃 음악을 들으시려면 ▶ 버튼을 눌러주세요 음식 (공개) 카페지기 서로몬 회원수31,416 방문수369 프로필 ▼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정회원 메일 11 쪽지 0 내가 쓴 글 내글 반응 카페 글쓰기 카페 전체 메뉴▲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18) 노을뱅이<나>gpfus너굴사율미니민이응, 안녕?은빛바다데구루루구룽우웅곰린민하울착한사람송연경체리홀릭일등급loves811서월(曙月)알라븅★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숨기 RSS | 자주가는카페 추가 카페 탈퇴▶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스크랩]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31~40)|　　　　펌인기소설 작은별소녀 | 조회 3087 | 06.06.06 23:40 http://cafe.daum.net/boyhamr/5M8v/659 ＊──────────────────────────────＊ （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 31. 약 3교시 수업이 시작될 무렵 쯤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의상과 화려한 화장으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진 소녀가 A- 1반에 들어온 것은. 국어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교실 뒷문이 드르르륵 열리며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가 성큼성큼 뛰어왔다. 화려한 의상과 붉은빛 톤의 컬러로 화장한 소녀의 모습은 화사함의 극치였다. “시연아아아~!!!!” “헤헤, 내가 그렇게 좋은거야? 혜원?” “이제 안 아픈거지? 난 너가 아픈지도 몰랐단 말이야.” “괜찮아, 나. 이제 되게 많이 건강해졌어. 헤헤헷.” 시연이 혜원의 예쁘게 다듬어진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춤연습에, 노래연습에 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나마 통통했던 젖살이 다 빠져버린 혜원이 시연의 몸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 거려주었다. “이젠 아프지마. 내 인생의 빛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야.” 모든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너무 힘들었을 때. 상상외의 배신감에 할말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었을 때. 암흑속에서 갈길을 잃었을 때. 그때 빛이 되준 건 너니까... 시연아. 그니까 앞으로는 아프지마. 종례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인 기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 수련회 간다는 사실, 모두 알죠?” 시연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여환쪽으로 훼까닥 목이 돌아갔다. 여환은 시연의 이런 반응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근소근 말해주었다. “도쿄로 가기로 했던거 알지? 시험 끝나고 3주뒤에 간다고 했었잖아.” “에에. 여환아, 너도 가는 거지?” “글쎄...” 여환의 눈이 깊게 가라앉으며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시연은 그런 여환의 뺨을 손으로 감싸안았다. 여환의 볼이 살짝 발그레 해졌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비밀이 없는 거야.” “그런건 어디서 주워들은 건데.” “혜원이한테! 그니까 빨리 말해엣!! 말 안하면 주욱어~!!” 여환은 자신의 볼을 꽈악 감싼 시연의 손을 잡아 떼어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니까 말 안해도 되겠다.” “에... 그런게 어딨어!” “여??는걸.” 시연은 그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방안에서의 키스..., 입술이 닿기 바로 전 그는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악마같지만, 도도해보이는 미소. “치이.” 시연은 입술을 빼꼼히 내밀고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기현을 쳐다보았다. 기현은 프린트한 예쁜 묶음 종이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컬러로 예쁘게 프린트된 묶음 종이에는 필요한 준비물, 장소, 그 곳의 특징 등 세부적인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이쁘다. 중학교 때는 흑백이었는데.” 시연은 묶음 종이의 앞 뒤를 돌려 보며 이쁘다고 연신 중얼댔다. 여환은 그런 시연의 모습에 피식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여환아, 너도 가는 거지? 응? 너 안가면 나도 안 갈꺼다아.” “휴우. 그럴까봐 신청은 했어.” “와아아.” 시연은 활짝 웃으며 여환의 팔에 기대었다. 기뻐하는 시연을 여환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시연아, 오늘 시간 괜찮아?” 여환이 이끌은 곳은 무덤 세개가 나란히 있는, 어찌보면 음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 앞에는 푸른 물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강가가 있었고, 길을 따라 쭈욱 가면 부모 잃은 아이들의 유일한 쉼터, 고아원도 있었다. “무덤만 보면 으스스 했는데, 주위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붉그스름한 노을이 비추고, 투명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한 강가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며, 고아원 앞 마당에서는 꼬마 아이들이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한 평생을 이 곳에도 보내도 행복할까?” “음, 나라면 행복할 것 같아. 귀여운 아이들도 있고, 푸른 강가도 있고, 너무 아름다운 걸?” “그랬으면 좋겠다.” 여환이 그렇게 읊조리며 무덤 앞에 앉았다. 무덤을 쓰다듬으며 슬픈 눈으로, 슬픈 웃음으로 무덤과 마주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사랑하는 가족들...” 시연은 여환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니? “무...슨 말이야, 여환아?” “너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듯이 나도 있더라고. 하하하.” 여환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덤을 더욱 쓰다듬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우리 아버지는 민대원 국회의원이라고 알아? 그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는 주위의 더러운 비리따위에는 눈조차 안 돌리시는 분이었어. 그런 것을 철저히 배척하고 싶어하셨던 분이지. 그렇기에 우리 아버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봐. 그렇잖아? 종이에 흰 물감을 칠해놔도 검정 물감 한번 칠하면 금새 흰색은 사라져버리지. 세상은 그런거야. 이 시대에선 깨끗함, 순백 이 따위것은 존재하지 않아.” 가시 팍팍 돋힌 여환의 말에 시연은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던 여환 같지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의 첫인상처럼 굉장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단지 추억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아름다운 그 날을 그들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의 날로 만들어버렸어. 조작된 사고였음에도 불구 진실은 철저히 묻혀버렸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는 큰 아버지네에서 지내게 ?獰?. 나를 양아들로 삼아줬어. 그리고 내가 민대원 국회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묻혀버렸고, 나는 그의 친아들이 되어 살아왔어. 그런데 더 웃긴건, 큰 아버지는 나를 너무 살갑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진 않는다는거야. 단지 내 앞에 있는 거액의 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지. 난 그때 너무 어렸어. 그래서 큰 아버지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고, 그 유산을 모두 큰 아버지것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었지. 그때 형이 살아있었더라면...” 여환은 떨리는 손으로 무덤을 더욱 세게 쓰다듬다가 끌어안아버렸다. 여환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세고에는 나처럼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 돈도 많고, 머리도 좋지만 그만큼 순수함은 없지. 세상의 더러움을 이미 알아버린 고등학생들... 후훗, 악순환의 연속이야. 세상의 더러움을 알고 있는 이들이 깨끗하게 사려면 또 얼마나 깨끗히 살수 있겠나? 자신이 살아남기위해 똑같이 그들처럼 더럽게 살아갈테지. 그럼 그들의 자식들은 또 다시 그렇게 살테고... 하하하. 망할 수 밖에 없는 더러운 세상이지.” 시연은 절규하듯 외치는 여환을 보며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살지 않았다. 항상 행복했고, 따스한 부모님 밑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지내왔다. 자신이 복받았다고 생각했던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시연은 자신의 따스한 품으로 여환의 차갑고 상처받은 마음을 꽈악 끌어안았다. 더이상 아프지 말아요.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아... “이 세상의 더러움. 까짓거 깨끗하게 빨면 되잖아.” “...뭐?” “여환아, 더러운건 까짓거 빨면 되. 더러운 걸레를 깨끗히 만드는 방법은 깨끗히 세탁하는 거야. 더러운 세상? 깨끗히 빨면 깨끗해 질걸?” “시연..” “아파하지마.” 시연의 흑색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았다. 반짝이는 두 눈에서는 마치 환한 빛이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32. 여환과 헤어지고, 집에 도착한 시연. 시연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계시는 성환에게 달려가 포옥 안겼다. 성환은 기분 좋은 듯 웃어보이며 시연을 꽈악 안아주었다. 이 냄새가 미치도록 그리웠었다. 아빠에게서 나는 부드러운 냄새. 엄마에게서 나는 달콤한 냄새. 오빠에게서 나는 아기 냄새. “아빠.” “그래.” “인간으로써 살아간다는게 쉽지만은 않은것 같아요. 하지만요, 나... 정말 열심히 살거예요. 친구들한테도 용기와 힘을 줄 꺼고, 언제나 당당하고 강할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우리 시연이가 누구 딸인데.” “아빠, 아빠 회사는 오빠가 물려받겠죠?” 성환은 시연을 잠시 떼어내며 시선을 마주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성환은 짐짓 냉정한 표정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네가 물려받고 싶은 게야?” 성환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의 회사를 탐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럼?” “단지 내 세상을 한번 창조해보고 싶을 뿐야.” “네 세상?” “네. 내 세상, 나만의 곳. 푸히힛.” 성환은 의아한 눈빛으로 시연을 쳐다보았지만, 시연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연이의 세상. 시연이만의 곳. 원하고 있다니,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수술 성공 이후, 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시연은 욕심이 생기고 있는것 같았다.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 뛰어난 사업가 성환과 뛰어난 디자이너 혜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그런 욕심조차 없다면 그들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연...” 하지만 딸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여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자라온 시연이, 어른들의 세계. 즉 더러운 비리들로 가득찬 세계를 배우고, 발을 들여놓게 된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밝게 웃을 수 있을까? 그 더러움에 질식하여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성환이었다. “비행기 공포증...” 침대에 누운 시연은 혼란스러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최근들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 좋지 않은 것들을. 돈을 위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을 두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받고 누워 계시는 엄마를 두고.. . 자신에겐 너무도 소중한 친구들이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시연은 가슴이 아프고,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도와주고 싶었다.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다. 다행히 혜란이 혜원을 높이 평가하는 덕에 혜원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여환과 연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자신의 모든 힘을 보태서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힘이란 것은 아주 미약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힘을 가지고 싶다. “하아.” 여환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하는 여환이 떠올랐다. 큰 눈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너무도 힘들어하는 여환이 떠올랐다. 자신에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 여환이 그렇게 아파하고 있었다. 단지 놀러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가족들끼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아무런 걱정도 없이, 전혀 앞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지 못 한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공포증. 그것도 모른 체 자신은 같이 가자고 조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힘든데도, 아픈데도, 기억하기 싫은 데도 자신때문에... “하아. 세상이 이렇게 힘든건줄 정말 몰랐어.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냥 편안히 살아가는 줄 알았다고, 정말...” 시연은 눈을 꼬옥 감아버렸다. 이 세상과의 교류를 차단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힘든 밤이 지났다. “다녀오겠습니다아!!” 시연은 운동화를 꾸겨신으며 마구 뛰어나갔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터라,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연아, 조심히 다녀오렴.” 성환이 신문을 접으며 시연에게 소리쳤다. 혜란은 그런 성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었다. 성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혜란에게 물었다. “또 잠이 오는가 보오? 잠꾸러기 아줌마.” “흥, 왠만하면 아가씨로 해줘요. 예전에는 아가씨로 해주더니.. 흐윽, 저 울거예요.” 예전의 푼수끼가 다시 되살아나는 혜란이었다. “세입!” 공황에는 아직 많은 학생들이 남아있었다. 윤세고의 자랑스러운 교복을 예쁘게 착용한 윤세고 학생들이었다. 시연은 흘러내린 가방을 제대로 고쳐메며 A -1 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환의 옆에 섰다. 여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약간 파랗게 질렸다고나 할까? 시연은 여환의 손을 꽈악 잡아주었다. 느껴졌다. 여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환의 표정에는 미소는 없었다. 그녀를 바라볼때마다 짓던 그 부드러운 미소는 여환의 얼굴에서 행적을 감춘지 오래였다. “여환아.” “으, 응.” 시연은 여환의 얼굴을 따스한 손길로 매만지며 말했다. “이럴수록 더 강해져야 되는 거야.” “그래...”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너도 더 강해져야 하고, 상대가 비열하면 너는 그 비열을 가볍게 꺾어줄 수 있을 정도로 더욱 강해지는 거야.” 시연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여환의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맞잡은 두 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팍에는 명찰이 곱게 달려있었다. '김선우.' 33. 그녀는 빛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여자였다. 처음엔 단지 동경의 상대의 동생일 뿐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존재였다. 점점 그녀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나는 경악을 할때도 있었고 행복했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바보'였다. 강성환의 딸이라고 치기엔 너무 멍청했다. 바보같이 헤헤 웃기만 하고, 덜렁거리기도 엄청 잘하는 데다가, 전교 꼴찌까지 당당히 했다. 하지만 강다연과 그 무언가가 닮아있었다. 닮은 그 무엇이 뭐라고 딱히 콕 찝어낼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느낌, 이미지 같은 거랄까? 사람 보는 눈이 어렸을 때 부터 뛰어났던 나였기에 그녀는 결코 더이상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그녀에게 부쩍 많은 시선을 주게 되었다. 그래, 아마도 그녀의 눈물을 본 뒤 부터일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내 마음을 심하게 동요시켰고, 처음으로 슬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징징 우는 모습이 짜증났기만 했었는데, 그녀의 울음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너무도 애달펐다. 감싸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동경의 대상인 강다연은 시연을 항상 주시했다. 시연을 어떤 바보같은 짓을 하던, 언제나 변함없는 부드러운 미소로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또한 민여환이라는 녀석 또한 시연의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강다연, 민여환. 1,3학년의 거물급이 아닌가.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다니는 힘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있은 뒤로 그녀는 윤세고 학생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것 같다는 의심을 받으며 재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더이상 그녀를 학교에서 만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강시연이 짤렸데.” “하긴 점수를 너무 못 보긴 했잖아?” 재잘되며 대화를 나누는 여학생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긴 앞머리는 이제 시야까지 가려대었다. 피식 웃었다. 언제 앞머리가 이렇게 길었더라... 내가 너무 세상에 무심했던 걸까. “그래서 남자애들이 그 난리였구나?” “그러게. 하긴 걔가 좀 이뻤어? 인기 엄청 많았잖아.” “주단비 걔도 이쁘지 않아?” “걘 왠지 표독스럽게 생겨서 별로야.” “강시연은?” “걘 순~하게 생겼잖아. 왠지 모르게 말을 걸고 싶달까?” 그래. 강시연은 주단비와 다르다. 강시연은 순수함을 가진 빛을 가진 여자다. 주단비와는 달라. 그래. 강시연은 그런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왠지 모르게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그것도 S급 아님 A급의 사람들만. 재잘되는 저 여학생의 이름이 뭐였더라. 신하나였던가? 신하나. 나와 동갑이었지, 아마도.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지, 후후. 정말 대단하네요. 강시연이라는 여자는. 공부는 못 하더라도 그 능력만으로도 윤세고 학생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한데 말입니다. “보고 싶다.”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잡념을 털어내고는 강다연을 주시했다. 검붉은 머리카락과 귀공자 같은 이미지의 동경의 대상.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 세상을 뒤엎을 정도의 뛰어남과 권력을 가진 남자. 그에겐 뛰어난 능력도 있었고, 권력 또한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그래서 동경했다. 그래서 닮고 싶었다. 그를 뛰어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처음엔 노력만 하면 그를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닮기에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렇게 뛰어난 상대였다. “하아.” 힘없는 하루가 또 다시 흘렀다. 온 몸에 힘도 없고,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목표는 너무 높고, 옆에 격려해 줄 사람도 없다. 혼자라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힘없이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남학생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정확히 그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것은 뒷문이 드르륵 열린 뒤 부터였다. 나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앞머리 때문에 시야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뒷문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예전보다 더욱 흰 얼굴에 그나마 있었던 살들이 쪼옥 빠져, 더욱 아름다워진 시연이었다. 그리고 내성적인지 자리에만 앉아서 책만 읽던..., 누구라더라. 김연희였던가? 그 둘은 아이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아름답다.” 나는 메마른 입술을 촉촉히 적시며 그녀를 계속 주시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당신은. 사모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랑까지 바라진 않습니다. 저는 혼자 바라보고, 혼자 사랑하는것에 익숙하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에게 이 마음을 전하는 것 조차 안될까요? 당신의 사랑에 방해가 될 까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 다면 바라만 보겠습니다. 그런데 민여환이라는 녀석이 부럽네요. 당신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어서 부럽습니다. 외전 : 김선우가 말하다. The end. 34. 곱디 고은 색상의 고급 교복을 착용한 윤세고 "A"반 학생들은 기현의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비행기에 올랐다. 시연은 오랜만에 비행기에 타는 지라 기쁨이 얼굴에 가득했다. 허나 자신 옆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그를 보니 가슴이 절로 아파왔다. “난 너의 아픔을 잘 몰라.” 시연의 말에 여환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연의 깊고, 탈색된듯한 흑색 눈동자가 시선을 떼지 못 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딱히 형용할 순 없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 “뭘?” 여환이 나지막히 대꾸했다. 그의 대답에 시연이, 활짝 핀 꽃보다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 한 공주님과 왕자님이 살았습니다.”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한 그녀의 말에 여환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여환이 무슨 말이냐며 입을 떼려던 찰라, 그녀의 입에서 또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왕자님에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 “공주님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왕자님의 상처를 치료해줄 자신이 없었거든요.” “...시연.” “그래서!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공주님은, 왕자님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순 없어도 따스하게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품어줄 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환은 안 넘어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흑색 눈동자가 미칠듯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의 향이 더욱 가까이서 느껴졌다. 촉. 그녀의 눈동자가 100배는 확대되어 보인 것 같았다. 그녀의 향기가 숨막힐 듯 다가오더니 후각을 마비시켜버렸다. 온통 그녀의 향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흑색 눈동자만이 비춰질 뿐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붉은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석류보다 더욱 붉고, 초콜릿보다 더욱 달콤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그의 뇌는 순간 마비되어버렸다. 그날밤의 키스보다, 지금 그녀의 짧은 입맞춤이 더욱 달콤하고 설레었다. “시, 시연.” “나의 하나뿐인 사랑, 나의 하나뿐인 남자, 나의 하나뿐인 왕자님이시여. 이제 그 상처는 저의 손길에 맡기시고, 그만 저에게 기대시옵소서.”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활곡선을 띄었다. 아름답다. 미치도록 아름답다. 힘껏 안아 내것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여환의 메마른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의 사랑, 시연.” “왕자님은 상처를 이제 공주님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공주님은 있는 힘껏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었습니다.” “...” “왕자님의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빠른 회복력을 보이며 낫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평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시연이 씨익 웃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여환이 입을 열었다. “서로만을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그 둘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사랑이 시작되었는지조차 서로는 모른다. 아니, 둘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사랑의 운명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둘의 모습은 아기천사들의 축복이라도 받은 냥 아름다웠지만, 한 사람의 질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해 한 여자. 다갈색 굵은 웨이브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웠다. 허나, 시연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시연을 순백의 장미에 비유한다면, 그녀는 붉은 장미에 비유해야 할것이다. 시연에게는 순수함과, 순백함, 천진난만함이 있다면 그녀에게는 섹시함, 도도함, 그리고 남자를 부리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다. “가, 감히.” “단비야, 너가 중간에 낀거라고.” “뭣?” “시연과 여환은 원래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넌 그때 다연선배께 관심이 있었고.” “그까짓 건 상관없어!!” “하,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한 후부터는 그도 나를 좋아해야되! 그걸 방해하는 저 년이 잘 못 된거야. 지까짓게 이젠 다연선배를 넘어 여환까지!” 승은은 단비의 눈이 잔인함과 질투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까지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비행기에서 내린 연희는 계속 안절부절이었다. 시연이 연희의 팔을 잡으며 생긋 웃으며 연희에게 물음을 던졌다. “연희야, 아까부터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연희는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꾸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인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길 바랬다.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온 수련회에서 결단코 그런일이 생길리 없었다. 그녀는 자꾸 마음 어디서부턴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잊으려 오버하며 웃고, 즐겼다. 그리고 문화탐방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시연과 연희는 다행히 붙었다. 아니, 정확히 1학년은 1학년끼리 한 방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더욱 세세하게 파고들자면, 숙소에는 시연과 연희의 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35. 연희와 시연은 대충 씻고 나서는 2층 침대에 누웠다. 기숙사는 넓은 편이었고 2층 침대 5개로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연희와 시연은 5개의 침대 중 하나를 위아래로 차지하고는 바닥에 앉아 로션을 바르며 수다를 떨었다. “시연아, 뭔가 수상하지 않아?” “뭐가?” “주단비 패거리 말야. 아직까지 안 들어온다는게 말이 되?” “흠. 몰라, 몰라. 이런건 걔네가 알아서 해야지!!! 난 아임 슬리핑, 매우 졸리다고.” 시연은 로션을 대충 가방에 집어넣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연희는 아랫층 침대에 그냥 누워버리는 시연을 보고는 시연의 배를 간지럼 피우며 일어나라고 외쳤다. “아, 내가 아래할래~!!” “싫어, 싫어. 나 벌써 잠들었어.” “웃기신다, 진짜. 빨리 안 비켜? 안 비킨다 이거지, 강시연. 죽을래에~~!!” 그렇게 한창을 장난치며 떠들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주단비 패거리겠거니 해서 시선도 안 주고, 계속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두 분 이리 좀 나오시죠.” 빨간 모자. 가이드 겸 조교로 따라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시연과 연희를 노려보고 있었고, 뒤에선 많은 숫자의 주단비 패거리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시연과 연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이시죠?” 연희가 대충 옷을 매만지고는,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상대가 윤세고 학생들인지라, 조교도 매섭게 몰아치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여자 A- 1반 학생들이 사용하는 301호에서 지갑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한번 뒤돌아보고는, 다시 조교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범인을 저희로 지목하셨다는 겁니까?” “이 나머지 학생들은 다 같이 벌을 받느라고 방안에 들어오지조차 못 했죠. 그럼 용의자로 지목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당신과 당신 뿐입니다.” “하, 어이가 없군요. 누구의 지갑이 사라졌는데요?” “내것.” 연희는 매서운 눈빛으로 ‘내것.’이라고 외친 상대를 노려보았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억양으로 당당하게 내것이라고 외친 이는, 분명 주단비였다. 주단비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올리고는 마치 윗사람이 하수대하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희는 앞이 깜깜했다. 정말 용의자로 지목 될 만한 사람은 시연과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외쳐줄 사람도 없었다. 완전히 적수에게 둘러싸인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마냥 가만히 있으면 분명 끌려가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일단 지갑 도난 사건이라는 것은 도둑질을 했다는 거니까. 그리고 지갑을 내노라고 하겠지. 그럼 그땐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앞길이 막막해 뒤를 돌아보니 시연이 살짝 일어나고 있었다. 연희는 시연의 눈동자가 오늘처럼 반짝였던 날은 없을 것 같았다. 시연의 흑색 맑은 눈동자가 한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석류빛 입술이 점점 말아올라가고 있었다. 연희로서는 이런 시연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가 용의자라는 증거있나요?” “그런것은 아니지만 앞뒤상황을...” “증거도 없는데, 앞뒤상황을 따져보니 너희들밖에 죄지을 사람이 없구나. 너희가 좀 끌려가줘야겠다. 이건가요? 어이가 없군요.” “무, 뭐?” 교관은 쪼그마한 계집애가 기어오르는 것이 참기 힘들만큼 화가 났다. 희고 고운 얼굴에 크고 살짝 처진 눈이 너무 순하고 천진난만한 이미지였다.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직 17살밖에 안된것이 저리 아름다우면, 점점 성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르렀을 땐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아. 하지만 이건 이거고, 자신의 본부는 교관이었다. 아무리 학생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냥 물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짐짓 냉랭한 목소리로 벌하려 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 하며 기어오른다. 그렇다고 또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니 무작정 혼을 낼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저 학생의 지갑이 사라졌다구요?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 그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사라졌으니 우리 탓이다? 어이가 없군요. 그럼 지갑에 돈은 얼마나 들어있었는데요? 지갑을 어느 곳에 넣어두었었는데요? 정확히 몇시에서 몇시사이에 도난당한 건데요?” “음... 그, 그건.” “훗. 저 학생들이 말하길 자신은 가방을 놓고 나갔다가 벌을 받느라 기숙사에 한번도 들어오지 못 했다고 말했습니다. 틀립니까, 교관님?” 시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주위에 꽃이 피어오르는 것마냥 향긋한 웃음이었다. 연희는 시연의 미소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연의 미소는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화를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같았다. “그렇담 저들은 방에 들어온 적 조차 없으니 결단코 도난 할래야 할 수가 없군요?” “그렇지!” “그렇담 저 도난당한 여학생은 자기 지갑이 사라졌는지, 가방에 들어있는지 어찌압니까?” “아!” 교관은 아무생각없이 시연의 말을 듣다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 그렇다! 한번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지갑이 어떻게 사라진줄 알지? 겉모양새는 그럴싸하더니 자세히 생각해보니 완전히 모순된 말을 짓껄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이놈!” 교관은 얼굴이 욹그락붉그락 해져서는 주단비 패거리를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주단비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시연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결정타. 화가 난 상태의 교관을 시연이 낭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었다. “교관님?” “음?” “이래도 제가 용의자 같으시다면 같이 따라오신 지도부 선생님께 이렇게 여쭤보세요. 소지품 검사시 적어놨던 명렬표를 한번 볼 수 있겠냐구요. 과연 지갑이 있었을까요?” 주단비 패거리는 그대로 다시 끌려나갔다. 나가면서 시연을 한번 흘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와! 시연아, 짱이다.” “별로..., 저들이 너무 멍청했던 거지.” 시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그대로 아랫층 침대에 몸을 맡기고 쿨쿨 먼저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어어어!! 아랫층은 내꺼라니깐, 강시연 미워~!!!!!” 그렇게 한밤의 지갑도난사건은 막을 내렸다. 36. “수련회 나름대로 재밌었어, 그렇지?” “응.” “여환아, 오늘따라 힘이 없어보여.” “아, 아냐. 그냥 잠을 좀 덜 자서...” 수련회를 다녀오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시연은 집에서 이것저것 수련회가서 못 먹은 음식들을 마구 밀어넣으며 배를 채우고, 혜원과 밤늦게까지 비디오를 보며 깔깔 대며 웃으며 즐겁게 보냈는데 여환은 그게 아닌가보다. 오히려 수련회때가 지금 보다 얼굴이 더 환했다. 지금은 못 자고 못 먹고, 근심 걱정으로 똘똘 뭉친애 같아보였다. 시연은 여환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거야?”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연의 말에 여환이 미세하게나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여환이 아프거나 힘들어할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누구?” 학교가 끝이 날 무렵, 집에 가고 있던 미라는 (1편 참고) 낯선 여자가 자신을 가로막자 깜짝 놀래었다. 다갈색 웨이브진 머리에 도도하게 생긴 여자와, 검은색 올빽한 머리에 깔끔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 둘이었다. “길게 할 말이 있어. 잠시 대화 좀 나눌까?” 셋은 가까운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미라는 오렌지 쥬스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말이 뭔데?” “나를 좀 도와줘.” 미라는 상대편 여자의 말에 깜짝 놀래었다. 처음 보는데 도와달라니? 더구나 저렇게 당당하고 도도한 자세로. 마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처음 봤지만 사람을 다루는데 굉장히 능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를 아시나요?” ＊ 주단비는 수련회때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강시연같은 꼴통쯤은 이 정도로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는 성급한 판단 아래 일을 대충 꾸며낸대도 잘못이 있었지만 강시연이 이렇게 잘 빠져나올 줄은 몰랐다. 더구나 명백한 상황 판단까지 해내 자신을 엿먹이다니! 처음 주단비는 일을 꾸밀때 강시연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희가 자꾸 마음에 걸리었다. 김연희. 못사는 달동네 계집애지만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상대는 아니었다. 김연희가 모든 일을 간단하게 풀어낼까봐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입을 떡 벌리고는 한 마디도 못 하자 기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런데 강시연! 그 눈꼴시린 계집애가 일을 풀어내버리다니! 그것도 생글생글 미소를 잘도 지으며. “엿 먹여야되! 똑같이!!” 그렇게 승은과 시연의 과거를 조사하던 중, 시연이 미라라는 여자애와 친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생긴건 별 볼일 없지만 똑똑한 모범생에다가, 시연을 많이 챙겨주었다는 사실을 확보하고는 씨익 미소지었다. 이 세상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아무리 강하고 질긴 우정이라 한들 돈 조금 먹여주면 알아서 자기쪽으로 굴러오게 되있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돈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그 미라라는 여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저보고 같이 강시연을 무너뜨리자는 겁니까?” “친한 사이라는 건 충분히 알아. 하지만 그 계집애, 너가 봐도 눈꼴 시리잖아? 가진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말이야.” 가진게 없다니. 시연의 부모님은 엄청난 사업가에, 패션 디자이너였다. 시연의 가정사를 다 알만큼 시연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놀러간 적도 있었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넓디 넓은 집과, 많은 가정부들. 엄청난 사업가,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항상 다정한 부모님. 그리고 똑똑하고 잘생긴 오빠. 그 정도가 가진게 없다니. 그럼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저 여자는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구나. “도와주지 않겠나?” “하지만..”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원하는 거... 없어요.” 단비의 눈이 휭둥그레졌다. 없다고? 원하는게? “난 그냥 무너뜨리고 싶을 뿐이예요. 나의 하나뿐인 사랑을 빼앗아버린 그녀가 미치도록 싫을 뿐이죠. 단지 무너뜨릴 힘이 없었을 뿐이예요. 천상의 美를 가지고 있는 그녀인지라, 친한 사이로 남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아서...” “하! 잘 되었군. 뒷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해주지. 크게 한 건 해봐. 강시연 그 계집애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 시연은 여환과 헤어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 근처에 어떤 여자가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분명...!! “미라야?!!” “아, 시연아.” 미라가 그 어느때보다 농도짙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다가왔다. 시연은 오랜만에 보는 미라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나 언니같은 다정한 친구였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한번도 보지 못 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잘 지냈어? 응? 응? 응?” 시연은 미라의 팔을 잡고 빙빙 돌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절친한 친구를 보니 기쁠 수 밖에 없었다. “응. 그럼. 시연이 너도 잘 지냈지?” “당연하지~~” “좋은 고등학교 가더니 교복도 세련되고 예쁘네?” “헤헤, 미라는 뭘 입어도 이뻐.” “고마워. 시연아, 나 오랜만에 너희 집 가도 되?”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며 시연이 먼저 집으로 냉큼 들어갔다. 미라의 웃음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철저하게 무너뜨려라.” 37. “다녀왔습니다아.”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아빠는요?” “사모님과 쇼핑에 가셨습니다.” “아아~” 시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고개를 끄떡 하고는 미라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정부가 시연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쥬스 올려다 드릴까요?” “네에~!!” 가정부는 시연의 밝은 목소리에 방긋 웃었다. 가정부. 솔직히 창피하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아이를 갖고, 실력없고 능력없는 남편과 살게 ?榮?. 그래서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아이의 생계를 유지시킬 수 없었다. 결국 택한 것이 가정부라는 직업이었다. 공부도 별로 못 하고, 가진것도 없는 자신을 많은 돈을 주며 일을 시켜줄 사람은 없었다. 가정부를 하려고 해도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지 몰랐던 그녀는 남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사모님, 즉 시연의 어머니를 만났다. 힘없이 가정부를 하겠다는 프린트된 몇 장의 종이, 돈이 많이 들어 별로 얼마 되지도 않은 양의 종이를 골목길에 붙이며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움과 왠지 모를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15년전 시연의 어머니는 더욱 아름다웠다. 곱디 고운 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 그리고 몸 전체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기품.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리집 가정부가 되는 건 어때요?” 아무 생각없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힘들었다. 평소 살던 집과는 몇 십배는 될 정도로 크고 거대했고, 이것 저것 조심히 다뤄야할 물건들이 넘치고 넘쳤다. 실수로 하나만 깨뜨려도 바로 짤리고 엄청난 양의 빚을 져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땐 상담을 요청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않나요?” 사모님은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내면까지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모님은 자식을 위해 다정함을 숨겼다. 자식에게 너무 다정하면, 아이들이 삐뚤어나갈 수도 있었다. 보통 집이 잘 살다보면 아이들이 제멋대로 지가 잘난줄 알아 삐뚤어 나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쓴 웃음을 머금고 그녀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런면에서 역시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역시 대한민국 패션계의 자존심이라는 혜란 다웠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선택을. 시연 아가씨와 다연 도련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둘이 세상을 얼마나 진동시킬 지를.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시연아,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미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시연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항상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웠던 미라였기에 그러려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혼자서 중학교 때 앨범을 뒤적거리며 깔깔 웃었다. 미라는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와서는 시연의 아버지, 성환이 사용하는 서재로 들어갔다. 시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환의 회사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역시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성환의 서재였다. 미라는 손을 빨리 놀려 성환의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중요하고 더 치명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성환의 회사를 한 방에 무너뜨릴! 미라의 이마에 작은 땀들이 송글송글 맺혔다. 미라가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해도 회사일까지 잘 알순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중요해보이는 것을 찾아내야 했기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1초가 1시간 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심장이 뛰고 맥박이 뛴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숨이 다 턱턱 막힐 정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젠장.” 그녀의 입에서 작은 욕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완벽히 서류 찾기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방문 사이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없었다. “어머머...” 청소하기 위해 물수건을 들고, 성환의 서재에 들어온 가정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연이 데려온, 자기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미라가 성환의 서재를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부는 거친 숨을 가까스로 조용히 내쉬며 2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리고는 깔깔대며 앨범을 보고 있는 시연을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시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가정부를 쳐다보다가 서재안을 보라는 듯 제스쳐를 취하는 가정부때문에 살짝 열린 틈새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과, 뒷통수를 망치로 세게 가격당한 듯한 정신적 충격을 얻었다. 이런 걸 보고 일종의 배신감이라고 하겠지. “지금...미라가 무얼 하는 거죠?” “일명 스파이 짓이라고도 하겠죠.” 가정부는 공부는 못 했지만, 15년동안 그들을 보필하면서 어느정도의 눈치와 상황파악에 능해졌다. 그렇기에 미라가 지금 장난으로 아무 생각없이 뒤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라.” 시연은 눈에 고이는 눈물을 쓰윽 닦아내고는 거칠게 방문을 열어제꼈다. 미라가 휘둥그레 진 눈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 미라의 눈에 시연의 얼굴이 비춰졌다. 시연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화나 보이지도,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너무 냉정해 졌다는 것이다. 싸늘한 표정에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갔다. 그래, 이 표정. 연희라면 알 것이다. 시연이 화났을때 나타나는 저 표정. 무표정에 입꼬리만 살짝 말려올라가는 저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 “나는 한번 화나면 돌아버려.” “..시, 시연..” “나는 한번 배신한 친구는 친구로 안봐.” “....그, 그게..” 쫙. 거칠은 마찰음과 함께 미라의 얼굴이 돌아갔다. 미라는 한 손으로 맞은 뺨을 잡고는 눈물을 뚝둑 흘리며 시연을 쳐다보았다. “정말 실망했다.” 시연이 그렇게 서재를 나갔다. 미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재에 주저앉았다. 시연의 눈에 마지막으로 스친 실망감과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왠지모르게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38. 시연은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숨돌릴 틈도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는 방문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시연의 순수함과 선함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에 맑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눈이 점점 충혈되 붉어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닐거야. 내 친구 미라가 그럴리 없잖아, 그럴리 없어... 그래, 단순히 가정부 아주머니께서 오해한 것일 뿐야. 그래, 그럴거야. 그래, 그런걸꺼야. 분명이 나한테 맞은 뺨을 부여잡고 내 방문을 거칠게 두들기며 메가펀치를 하기위해 난리칠거야. 그래, 미라는 분명히... 흐흐흑.. .분명히 그럴...흐흑...거야....그럴거라구...흐흐흑...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흐흐흐흑...” 시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할만큼 안타까워보였다. 말은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중얼거리고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벌써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미라는 자신을 배신하고, 성환의 자료를 빼돌릴려고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미라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라는 자신에게 친구이자, 언니였다. 실수투성이에 장난꾸러기인 자기를 항상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미라. 미라였기에 믿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기뻤다. “미라야, 얼른 올라와. 그래서 방문을 마구 두들겨. 날 얼마든지 때려도 되니까, 그래도 되니까 어서 나를 찾아오라구... 아니라구 변명하라구, 왜 때렸냐고 원망하라고. 왜 의심했냐구 소리치라구... 제바알!!!!!!!” 시연의 절규는 1층까지 들릴 정도였다. 시연에게 맞아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주저앉아 있는 한 소녀를, 가정부는 가엾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순간 가슴이 찢어질듯, 심장이 갈기갈기 분해되듯 너무 아팠다. 시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 미웠다. 내겐 없는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시연이.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이들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시연이 너무 부러웠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듯 한껏 활짝 펴있는 시연이 너무 얄미웠다. “아니었나?..” 미라는 혼란스러운 심정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책상을 짚고 겨우겨우 일어나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자신 앞에 서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정부였다. “누굴 그 따위 눈으로 보는거죠?” 힘이 다 빠진, 맥아리없는 목소리였지만 왠지 날카로움이 묻어있었다. 가정부는 싱긋 웃으면서, 마치 자신의 손녀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듯한 억양으로 말을 시작했다. “지우개가 왜 존재하는 지 알아요?” “하, 제가 어린애입니까? 비켜요, 나가고 싶으니까.” 어디서든 이 더러운 느낌을 정화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려면 빨리 이 집을 벗어나야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헛소리나 하는 가정부를 지나쳐가려고 했다. 그러나 가정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지우개는 지우라고 있는 거죠.” “하.” “사람들은 지우개를 별것아닌 존재로 생각하죠, 별 볼일 없는 존재.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죠. 지우개는 지워주는 거예요. 실수를, 그리고 연필이 남긴 상처를...” “인격을 부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데 전 별로 그 따위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우개는 지우개일 뿐이죠. 도대체 왜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며, 상처니 뭐니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비켜요, 전 당신처럼 한가하지 않아요!” 미라가 가정부를 휙 밀치고 서재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으로 다가섰다. 미라의 손이 문고리에 닿아 열려는 순간 가정부의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처는 가슴에 오래 남겨져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진해지는 겁니다.” “하-.” 미라는 콧웃음을 치며 나가려고 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들 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상처를 방치해두면 그 위에 딱정이가 생기고, 그 뒤엔 흉터로 남아버리죠. 결코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는 듯 사라질 순 없어요. 지우개가 필요할 것 같군요, 당신에겐.” “무..뭐요?” “어서 시연아가씨 가슴에 남긴 상처를 지워주세요. 기회는 이제 한 번뿐입니다, 미라아가씨.” 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정부는 그런 미라를 엄마만큼이나 따스한 미소로 맞이했다. ＊ “어떻게 ?獰??” “잘 ?楹た?, 미라씨?” 단비와 승은이 미라가 카페안으로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미라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늘씬한 다리를 꼬으며 쥬스를 한모금 쪼옥 들이켰다. “어떻게 ?楹캑歐??” “당연히 잘 ?瑩?.” “어디 봐봐, 그 계집애를 무너뜨릴 방법이 뭔데? 응?” 미라가 한 서류를 당당하게 단비와 승은에게 내밀었다. 승은이 의아한 눈빛으로 미라를 쳐다보며 그 서류를 받아들였다. “시연이의 아버지는 강성환, 어머니는 정혜란이죠. 정말 뛰어난 사업가에, 뛰어난 패션디자이너죠.” 그 말에 단비와 승은이 눈이 동그래졌다. 달동네 계집애였는줄 알았더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강성환씨의 서류입니다. 분명히 중요한 걸 테죠, 이거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승은과 단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단비는 흰 봉투를 미라에게 쭈욱 내밀더니, 승은과 카페를 나가버렸다. 미라는 봉투 안을 들여다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만원짜리 지폐가 엄청난 장수로 들어있었다. 39. 미라는 싱긋 웃으며 만원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때 미라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아깝지 않아?” “별로.” 미라는 자신의 옆에 앉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정을 배신할 뻔 했던 값치고는 너무 싸다. “이게 바로 강시연을 무너뜨릴수 있는 최후의 한 수라 이거지?” “그렇다잖아. 근데 단비야, 정말 이래도 될까?” “흥, 그까짓 년만 밟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이건 시연만 무너뜨리는게 아니라, 아예 그 집안 자체를 무너뜨리는 거야!” “상관없어. 아빠도 좋아하실껄? 강시연의 아버지가 강성환, 아버지는 그를 제일 경계하시니까 말이야.” 주단비가 싱긋 웃어보였다. 언제나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하고 해달라는 것은 모든지 다 들어주었던 아버지. 하지만 회사 사람들만 오면, 얼굴이 딱딱히 굳어서는 항상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원인이 거의 강성환, 그 때문이라고! 최고의 사업가지만, 주변 사업가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 “같이 무너뜨려 버리는 거야.” 잔인한 계획을 세우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 승은과 단비 앞에, 어느 남학생이 스쳐지나갔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에, 약간은 섹시함과 반항아 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환!” 단비가 꾸밈없는 듯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여환을 불렀다. 정말 이때만큼은 순수하고 맑아보였다. 여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 안녕.” 이름도 정확히 기억이 날듯 말듯 하지만, 어쨌든 학교 친구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단비는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작게 지으며 여환에게 사뿐 사뿐, 나비가 날아가듯 다가갔다. “아?” “이렇게 밖에서 만난것도 인연인데..., 커피 한잔 같이 마시지 않을래? 내가 요즘 이것저것 고민할 게 너무 많아서...”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단비가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렇기에 무작정 거절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아..., 으응.” “와, 고마워.” 단비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은 채, 기쁘다는 듯 작은 환호성을 지으며 상큼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승은은 그런 단비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단비에게 대들어봤자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분명 같이 가도 욕먹을 것이다. “아, 쟤는 왜?” 여환이 그냥 가버리는 승은의 뒷모습을 보고 외치는데, 단비가 그런 여환의 팔을 확 낚아채 살짝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감싸쥐고는, 근처 카페로 이끌었다. “오렌지쥬스 두 잔요.” 여환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한없이 청순하고 다소곳한 여학생에게 호감을 얻었다. 물론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성품도 맑고 깨끗해 보이니, 시연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여??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렌지 쥬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말하고는 가버리는 종업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단비였다. 정말 단비의 모습은 아까와는 상상도 못할만큼 정반대였다. “고민이 뭔데?” 여환이 단비를 쭈욱 응시하며 물어왔다. 단비는 작은 한숨을 살포시 내쉬고는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괴롭히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널 괴롭힌다고?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이유없이 괴롭혀. 내가 많이 싫나봐. 사실 내가 그렇게 애들하고 잘 친해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니잖아?” 단비가 무릎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했다. 여환은 그런 단비의 모습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넌 많이 착해보이는데, 왜 너를 괴롭히는 건지 몰라?” “응, 모르겠어. 난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인데...” “그니까 넌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데, 그 여학생은 무시하고 널 괴롭힌다?” “으응...” “나쁜 애네. 어느 학교 학생인데?” “우...리 학교.” “그래? 이름이 뭔데, 그냥 말해봐.” 그의 물음에 단비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여환이 그런 단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 토닥여주고는 오렌지쥬스를 한 모금 쪼옥 마셨다. “시연과 친하게 지내면 다 해결될거야. 그 녀석은 엉뚱하고 어이없고, 가끔 너무 바보같긴 해도 이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법을 가장 잘 아는 녀석이거든.” 여환이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단비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준뒤 카페를 벗어났다. 남겨진 단비가 오렌지쥬스 컵을 세게 꽈악 쥐며 중얼거렸다. “또 강시연이군.” 집에 도착한 단비는, 승은이 가져간 서류를 건내받아 아버지가 퇴근하시기만을 기다렸다. 와인을 사들고 집에 오신 아버지에게, 단비는 포옥 안겼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오늘따라 왜 이리 반겨주십니까?” “아버지! 저기 아버지께 드릴 서류가 하나 있어요.” “뭔데?” 단비는 아버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그 서류봉투를 튿어내어 안을 드려다 보며 말했다. “이게 뭔데?” “강시연..., 아니아니 강성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료!” 단비의 말에 단비의 아버지이 동그래졌다. 말도 안되. 라는 생각만이 가득 돌았다. “저, 정말이냐?” “네! 제가 아는 애가 직접 강성환네 집에 들어가서 빼내온 자료예요.” “하!” 아버지가 떨리는 손놀림으로 봉투 안에의 서류들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여름빛축제. . . . . “그래! 강성환, 그 녀석이 여름맞이 축제를 한다했어! 하하하. 이것만 있으면 내가 먼저 그 축제를 터트릴 수 있겠구나. 그 녀석들은 이 자료가 없어 급히 다시 만들테고, 나는 여유롭게 이 자료로 축제를..!! 하하하하하하!!!!” 40. “아, 정말 왜 이러세요.” 갓 익은 싱싱한 레몬처럼 노오란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굉장히 핸섬하게 생긴 남자가 그 소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소녀에게는 능글맞고 추잡해 보였다. “아, 혜원씨 정말 왜 이래? 커피 한 잔 마시자는데. 선배로써 이런저런 충고도 해줄겸 말이야.” “전 싫다니까요?” “정말 혜원씨 이상하네. 선배 말이 말같지가 않아? 내가 뭐 더러운 생각을 품고 있는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젠 선배라는 계급까지 들먹이며 대놓고 찝쩍거린다. 노오란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에, 곱고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한껏 머금은 그녀는, 시연의 친구 정혜원이었다. “어쨌든 매니저 오빠도 사적인 만남은 금지하라고 했어요. 조금있으면 또 방송들어가야 해요, 좀 비켜주시죠?” 혜원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손을 뻗어 슬쩍 혜원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알거 다 알 사람들끼리 왜 이래?” “이거 치워요, 제가 뭘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혜원이 거칠게 그 남자의 손을 떨쳐내며,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연예계에 진출한지 얼마 안되서 모르나보군? 연예계는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아가야.” 남자가 혜원의 윤기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쓰윽 넘겨주며 말했다. 눈동자는 욕망으로 가득차 풀려있었고,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와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혜원은 이런 끈적끈적한 시선을 바로 코 앞에서 받아본 적은 없던 터라 순간 겁을 먹고 말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그는 혜원의 약해진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혜원의 보드라운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닿을듯 말듯하게 쓸어내렸다. 혜원은 숨이 턱턱 막힘과 불쾌함에 쓰러질 것 같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그의 이름은 정현성. 잘생기고 매너있는 태도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많은 소녀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고 있는, 지금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인기 가수였다. 외모면 외모, 체격이면 체격, 실력이면 실력.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는 그였다. 그는 원래 색욕에 찌든 사람이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돈이 없어 여자들에게 많이 차였던 그는 일단 돈부터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탤런트로 캐스팅을 받았으나, 그가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다는 것을 알아챈 기획사에서는 그를 가수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결과 기획사의 예상대로 그는 한순간에 톱스타가 되어버렸다. 상대적으로 탤런트들에 비해 외모가 떨어졌던 가요계에 등장한, 잘생기고 실력까지 빵빵한 정현성은 인기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뚜벅뚜벅.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혜원에게 다가갔다. 이미 거미줄에 걸린 먹이였다. 조급해하고 급히 일을 처리할 필요 없었다. “제, 제발요...”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서,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바르르 떨고 있는 소녀를 주시했다. 큰 눈과 갸름한 얼굴, 가녀리면서도 S라인이 잘 살아있는 소녀. 얼굴은 앳되지만 몸으로만 본다면 성숙했다. 그에게 몸을 받치는 여자들은 많았다.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톱스타인 그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몸을 내줄 수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가 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는 혜원의 뺨을 또 한번 쓰다듬었다. 가요프로그램 무대에서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 붉은 입술이 애타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혜원의 턱을 잡고 살짝 올렸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탕. “뭐야?” 현성이 신경질적이게 소리쳤다. 혜원은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문쪽으로 무조건 내달렸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기만을 바라며. “남의 여자한테 손을 댈때는 기억해야 될 게 있다.”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분노는 몸을 살짝 떨리게 할 만큼 대단했다. 혜원은 떨리는 눈으로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자를 올려다보았다. 검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고, 큰 눈에 분노를 가득 담고 자신을 농락하려했던 자를 매섭게 노려보는 그는... 너무도 사랑하는 다연이었다. “오, 오빠...” “뭔지 아나?” “혜원이 니 여자라는 거냐?” “혜원? 누가 그 더러운 입에서 성스러운 그녀의 이름을 나오게 하래.” “무, 뭐뭐?” 현성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자를 응시했다. 그는 정말 분노로 가득 찬 듯 했다. 그는 자신과는 달랐다. 자신은 현재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졌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아름답고 기품있었다. “감히 니...니따위것이!” “질문에나 대답해.” “내가 그따위것을 어떻게 알아?!!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지나 알아?!!! ” “십중팔구 미친놈이겠지.” “뭐야?!!!! 가, 감히 이 정현성님에게!!!! 이런 무례한!!!!!” “죽거나. 뒈지게 처맞거나. 남의 여자를 건들때 기억해야되는 건 바로 이거다. 어떤거 선택할래, 이 골빈 새끼야?” 혜원은 다연의 강한 모습은 처음이였기에 깜짝 놀랐다. 다연은 정말 그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한 대 칠듯이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이 미친새끼가 돌았나!!” 현성이 먼저 다연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혜원은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다연은 분명 싸움을 못 할것이 분명했다. 퍽. 드디어 마찰음이 들려왔다. 혜원은 눈을 살짝 떴다. 그 순간 놀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죽거나, 뒈지게 처맞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쓰러져있는 것은 다연이 아니라 현성이었다. 그는 가는 피줄기를 매달고서 쓰러져있었다. 다연은 천천히 그의 근처로 다가가 배를 발로 꾸욱 눌렀다. “나는 설득과 타협을 좋아한다. 하지만 너같은 걸레같은 새끼들한텐 말로 안해. 그게 이 세상에 법칙이고, 너같은 새끼들한테도 가장 잘 들어먹는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다연은 냉소적인 웃음을 달고서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현성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어 한 마디라도 뱉으면 피가 한 웅큼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 여자 한번만 더 건들면.” 꿀꺽. “그땐 진짜 뒈지게 처맞는다. 몰랐기 때문에 한번만 봐줬을 뿐이야.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 건들면, 진짜 눈이 뒤집히는 걸 느끼게 해주지.” 그렇게 말한 다연은 혜원의 가는 손목을 꽉 쥐고는 대기실에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현성은 피를 쏟아내며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 하얗고 가는 손에서 나오는 파워는 상상 이상이었다. “쿨럭. 괜히 건들었군, 젠장.” 혜원은 다연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가, 다연이 멈추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헥헥 거렸다. 다연은 그런 혜원을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품에 안았다. 혜원은 다연의 품에 안겨 숨을 몰아쉬었다. “혜원아.” “응, 오빠?” “저런 새끼들이 자꾸 엉겨붙으면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경비실에서 보고 깜짝 놀랐잖아.” “겨, 경비실?” “대기실에 CCTV달려있는 거 몰랐구나.” “그럼 경비아저씨는 내가 당하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야? 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혜원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다연에게 말했다. 그러자 다연이 안타깝다는 듯 혜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말했다. “원래... 이 세상이 돈에 따라 좌지우지 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하아...” “걱정마, 이제부턴 오빠가 지켜줄꺼니까. 이런일 없게 할테니까, 겁먹지마. 넌 당당하게, 자신있게 노래를 불러.” “오빠.” 다연이 천천히 입술을 혜원에게 가져갔다. 혜원의 입술과 다연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출처 :♥｀-^)／소설만땅넷ⓥ＼(＇-＾♥ 원문보기▶ 글쓴이 : 개장형아(완결) 댓글 24 인쇄 | 스크랩(33)▼ 여진Sz 1빠당~~ 재밌어요 왜 답글이 없지? 06.06.07 15:18 답글 사냥나간꽃돼지 재미있어요~ 06.06.10 16:38 답글 はた。 재미있어요 ㅇㅂㅇ 06.06.17 17:13 답글 소설에ㅁ ㅣ 친 뇬 재미있어용ㅇㅁㅇ ㅋ 06.06.17 20:48 답글 파란나라 꺄~ >㉦< 다연이 너무 멋있어.. ㅋㅋ 06.06.25 11:31 답글 코코샤넬 퍼가용~ 06.07.08 08:46 답글 테디베어 퍼갈게여 06.07.13 17:28 답글 검은펜♥ ^^ 06.07.18 22:34 답글 꺄르릉콤팅이♡ 잼있어요 > 0<~~~~~~~ㅋ 07.01.14 23:55 답글 나만사랑해줄래 스크랩.. 07.01.28 12:34 답글 天血[리듬] 경비실에서 뽀뽀 하는거 다 보겠다 ㅡㅡ 07.02.04 18:54 답글 시류사랑 다연이 멋있다 여환이보다 다연이 더 멋있는것 같아요///^^/// 07.02.16 18:54 답글 새싹 이거 분명 소설나라♥나아름다운소설중에 있던건데 거기서 읽었는데 ^ㅁ^ 이름하여 ㅁㅁ님의 하이개그여었씀당..♥ 07.03.11 00:55 답글 유숙이 퍼 갈께요~>_< 07.06.23 09:09 답글 류비아 ㅇㅅㅇ 08.06.25 14:25 답글 달콤한-Girl 단비 4가지 없네 08.11.25 16:59 답글 월햐소설 재밋어요 ㅎㅎ 09.10.25 18:00 답글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회원은댓글을 쓸수 없습니다.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윗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41~完) 2006.06.06 ▼아랫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21~30) 2006.06.06 ▲top 음식 (공개) 카페지기 서로몬 회원수31,416 방문수371 프로필 ▼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정회원 메일 11 쪽지 0 내가 쓴 글 내글 반응 카페 글쓰기 카페 전체 메뉴▲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19) 노을뱅이<나>gpfus너굴사율미니민이응, 안녕?은빛바다데구루루구룽우웅곰린민하울착한사람송연경체리홀릭일등급loves811서월(曙月)알라븅★절대무적싸이코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숨기 RSS | 자주가는카페 추가 카페 탈퇴▶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스크랩]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41~完)|　　　　펌인기소설 작은별소녀 | 조회 3273 | 06.06.06 23:40 http://cafe.daum.net/boyhamr/5M8v/660 ＊──────────────────────────────＊ （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 41. “어, 둘이 같이 들어오네?” 가정부가 만드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낼름낼름 집어먹던 시연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살짝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기좋게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다연과 혜원의 모습에, 시연은 씨익 미소 지었다. “뭐야, 둘이 키스라도 한거야? 입술이 빨갛네.” 시연은 혜원의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붉은것 같아, 아무생각없이 말을 내뱉었다. 툭 내뱉고는 다시 반찬 하나를 냉큼 집어넣어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는데, 혜원과 다연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연은 둘의 그 모습에 귀엽다고 생각하며, 가정부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가정부도 시연과 다연, 혜원을 번갈아보며 행복함이 가득찬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연과 혜원이 허둥지둥 2층으로 올라갔을 무렵, 시연은 여전히 반찬을 씹어먹고 있었다. 시연의 앞에 오렌지쥬스가 담긴 컵을 내밀며, 가정부가 은근한 투로 물어왔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아가씨?” “뭘요?” “무얼 물어보는지 아시고 계시잖습니까.” 시연은 반찬을 집어먹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오렌지쥬스를 한모금 쪼옥 들이켰다. 시원스럽게 넘어간 오렌지쥬스. 시연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악동같은 미소였다. “저와 제 친구의 사이를 이간질했던 사람입니다. 간단히 처리한다면, 강시연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아가씨.” 가정부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시연은 가정부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가정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아가씨 답습니다.” 침대에 누운 시연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물론 서류는 자신이 꼼꼼히 손을 보아 넘기긴 했지만, 아버지가 미리 계획해두신 프로젝트보다는 한참이나 떨어질게 분명하다. 주단비의 아버지인 주동찬이 확실히 속아넘어가긴 할지 고민되었다. 시연은 전화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드러운 클래식의 끝과 함께 한 여성의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이니?” “헤헤, 응! 미라야!” ＊ “어머니.” 여환은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어머니"라는 말을 내뱉었다. 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를때에도 이렇게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정도로 여환의 모습은, 고양이 앞에서의 쥐처럼 아둥바둥 해보였다. “누가 네 어머니라는 거지? 내가 분명 어머니란 소리 입밖에 내밀지 말라고 했을텐데!!” 정이 메말라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도끼눈으로 여환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여환은 입술을 꾸욱 깨물며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이젠 혼자 설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지만, 유독 어머니, 즉 큰어머니 앞에만 서면 꼼짝 할 수 없는 여환이었다. 항상 자신을 볼때면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벌레보다 못 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여자. 그것이 여환의 머릿속에 새겨져있는 큰어머니였다. “여보, 그만하시오.” “정말 지긋지긋해요, 여보. 저 따위녀석을 왜 우리집안에 들인거죠!” “어쩔 수 없었잖소. 저 녀석.. 흠, 앞에 떨어져있는 유산이 얼만데.” “그래도 그렇지. 하아, 저 녀석만 보면 그 계집년이 떠올라서 짜증난다구요!” 여환의 입술이 흰 이에 의해 세게 꾸욱 눌렸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탁 하고 터져 피가 솟구칠 것 같았다. 자신이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말하는 계집년은 여환의 진짜 어머니를 뜻하는 것이었다. 인자한 인상에 젊고 아름다운 외모와, 고운 품성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화가계의 일인자라 불리어지며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올라가겠습니다.”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발언에, 여환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여환의 큰 어머니는 그런 여환을 비웃으며 말했다. “꼴에 자기 엄마라고 욕하는 꼴은 못 보는 군? 못난 주제에.” “휴, 나는 고민이라오.” “뭐가요?” “우리 아들 성현이가 회사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여환이 저 놈이 맏이인데다가 실력이라도 없으면 또 모를까, 그 유명한 윤세고에서 당당히 1등까지 하고 있지 않소. 성현이에게 회사를 넘기면 분명 많은 의혹들이 꼬리를 물을텐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여환은 화가 치솟아올라, 모든 물건을 깨부시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이 모두 일그러지고 박살이 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데 왜 세상은 끄떡없단 말인가. “으...” 여환은 이 집에서 살기가 싫었다. 너무 괴롭고 힘이 들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게 고통 그 자체였다. 물론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내색하진 않았지만... 여환은 침대에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시연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그려졌다. 여환의 입술이 활곡선을 띄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연...” 세상에 빛을 뿌리는 녀석. 세상을 밝게 만들줄 아는 녀석. 세상에서 제일 예쁜 녀석.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만든 녀석.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만든 녀석. 항상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만든 녀석. 너무... 사랑스러운 녀석. “사랑한다, 강시연.” 여환의 큰 아버지의 근심어린 얼굴에, 큰 어머니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처럼 만들면 되겠네.” “뭐라했소, 여보?” 잘못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 귀까지 후비며 되묻는 그. 중년의 여성의 얼굴에 그려져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져가고 있었다. “깨끗히 없애버리라고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42. “얼굴이 까칠해.” 시연이 여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환은 그런 시연의 하얀 손을 꽈악 잡았다. 작기만한 그 하얀 손은 뜨거운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여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연을 아무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나...” “응. 응. 왜 그래, 여환아. 어제, 오늘 무슨 일 있는 것 같아.”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 “....”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애. 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고, 형이 보고 싶어... 시연아, 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미치겠어.” 시연은 여환의 슬픔이 가득한 얼굴에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말없이 손을 들어 여환의 가슴 정가운데에 손을 올렸다. 심장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얍!” 시연의 귀여운 장난에 여환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시연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여환을 올려다보며, 말없이 여환에게 안기었다. 여환도 팔을 들어 시연을 꽈악 끌어안았다. 시연을 안고 있는 것 뿐인데도, 거칠게 뛰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시연이 여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달팽이관을 타고 들어오는 시연의 달콤한 목소리와, 온 몸에서 전해져오는 시연의 따뜻한 체온과, 콧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시연의 향긋한 냄새에 여환은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시연을 살짝 밀쳐내고는 고개를 두어번 흔들어내고는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크흠. 우리 집안 일이야.” “말....해 줄 수 없어?” 여환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거절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시연은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밝게 미소지었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날은 주단비는 한번도 시연을 째려보지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 뒤면 무너질게 뻔했다. 괜히 나서서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그리 들지 않았다. 주단비는 도도하게 머리를 휘날리며, 아이들에게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승은은 그런 주단비 옆에서 시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단비의 친구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환의 명예를 실추시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강성환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거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일이 단지 치기오른 여고생의 질투때문이라니. 승은은 단비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시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시연의 팔을 잡고 교실밖으로 이끌었다. 시연은 말없이 승은에게 팔을 잡힌 채 순순히 따라나갔다. “저기..강시연.”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시연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승은을 쳐다보았다. 이런 시연의 모습은 예전처럼 순수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가시를 숨킨 고슴도치같았다. 순수함속에 감춰진 냉정함. 승은은 아무것도 모른채 웃고 있는 시연을 보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승은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친구의 잘못된 한번의 실수로, 남의 인생을 망쳐놓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친구로써 막아야 한다. “너희 아빠가 계획하시는 여름빛축제 말이야.” “응, 그게 뭐?” 시연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승은은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애를 시켜서 너희 아빠 서류를 빼돌렸어! 정말정말 미안해! 너희 아빠의 명예가 실추될 지도 모르니까, 여름축제 진행을 니가 막아줘.” 승은은 시연의 시선을 자꾸 피하며 말했다. 따귀 한대 맞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자신이 시연이었다면, 한대 물씬 패주고 싶을 것 같았다. “괜찮아.” “그래, 날 실컷 때.... 으응? 무, 뭐라고?” “괜찮다구.” 시연이 승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승은은 자신의 눈이 착각한 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여전히 똑같았다. 시연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그려져있었고, 그녀의 특이한 흑색 눈동자는, 저 하늘의 별보다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승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결에, 자기도 모르게. “벌은 달게 받는 거라고 전해주진 않겠니?” “버, 벌?”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 착한 너한테까지 불똥이 튀겨선 안되니까.” 승은은 시연이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연은 승은의 손을 한번 꽈악 쥐었다가 풀며 생긋 미소 지었다. “일주일 뒤의 파티가...” “...” “모든 사람들의 기대속에 열리기를.” “...” “죄를 지은 사람은...” “...” “모든 사람들의 비난으로 벌을 받기를.” 승은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시연은 알고 있었다. 단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리고 이미 대처한 뒤였다. 시연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축제를. 주단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 받기를. “하아...” 생각처럼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이 세상을 알아.” “뭐?” “순수하고, 바보같이 착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버텨나가기 힘들지. 수술받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야. 나,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그러니까 니가 말려. 니 친구가 벌이는 일들 눈에 뻔히 보이니까.” 시연은 그 말을 끝으로 훽 돌아서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승은만이 복도에 남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학교가 끝이 나고, 시연과 여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둘의 방향이 엇갈리는 지점에 도착했고, 여환은 시연을 데려다주기 위해 시연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시연이 여환의 등을 떠밀었다. “?獰?. 표정도 안 좋아보이는데, 집에 가서 푹 쉬어.” “아, 시연..”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집에 가서 푹 쉬구요, 내일 꼭 데려다 주세요. 알았죠?” 여환은 시연의 애교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과 헤어진 여환은 표정이 싸악 굳어있었다. 그나마 시연과 함께 있어 참을 수 있었는데, 시연과 헤어지고 나니 가슴이 턱턱 막혀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고통은 여환에겐 익숙하리만큼 자주 그랬기에 여환은 가방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이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작위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검은 차에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새까맣고 창문안은 들여다보이지도 않은데다가, 번호판도 없었다. 뭔가 수상했다. 여환은 걸음을 재촉하여 벽쪽으로 기댔다. 그러나 그 차는 목표가 여환이었는지 벽쪽으로 돌진했다. 여환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차에 치이기 직전 떠오른 것은, 자신을 날카롭게 쳐다보는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였다. 여환의 눈이 꽈악 감겨졌다. 긴 속눈썹이 눈을 모두 덮어버렸다. 칠흙같이 검던 눈동자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다. 여환의 머릿속에 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연...” 잘 있어, 시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세진 않지만, 자신의 몸의 무게를 걸어 그 반동으로 여환을 밀쳐냈는지 여환의 몸은 길거리 중앙으로 튕겨져나갔다. 여환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여환의 눈앞에는 주저앉아있는 한 여학생이 비춰졌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여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면 분명히 차와 벽에 짓눌렸을 게 분명했다. 차는 벽과 약 2~3cm의 거리를 남겨둔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여환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비명을 지르는 여학생을 뚫여져라 쳐다보았다. “잘 있으라니까... 여기까지 쫓아오냐.” 여환은 눈물을 흘러뜨리며 피식 미소지었다. 그 여학생은 시연이었다. 차에 타고 있을 사람들은 아무말없이 차를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시연이 벌떡 일어나 차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로 직진할 줄 알았던 차는 그대로 멈춰있었다. 여환이라면 또 모를까, 상대가 시연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치고 지나가라는 지시는 없었을테니, 그냥 내리세요. 난 절대 이 앞에서 안 비킬거니까.” 시연이 창문을 세차게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듯, 양 팔을 옆으로 쫘악 벌린 채 그 자리에 고대로 서있었다. 작은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약 5분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결국 차안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3명이 내렸다. 빳빳하게 다려진 검은 양복에, 검은 선그라스가 인상적인 남자들이었다. “역시 나를 죽이라는 지시는 없었나 보군요.” 그 남자들은 아무 대답없었다. 선그라스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시연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연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요.” “....” “여환을 죽이라고 시킨 자가 누구냐구요!!! 당장 말하지 못 해요?” “훗, 조그만 년이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소리를 지르는 구나.” 셋 중에서 대장처럼 보이던 남자가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손을 들어 한번 까딱이자 나머지 둘은 차에 올랐다. 남자는 선그라스를 벗어 양복주머니에 넣고는, 시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린 계집애가 겁을 상실했구나.” “네, 저 상실했어요. 하지만 더 상실한건 당신네들이죠. 멀쩡한 사람을 대낮에 차로 치려고 하다니요.” “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걸 시킨 사람을 말해달라구요!!! 아저씨도 생각이 있잖아요. 이거 옳바르지 않다는거, 범죄라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러세요?” “나는 돈을 받고, 명령을 받들뿐이다. 그게 내 일이니까.” 시연은 남자를 노려보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는 끝까지 누군지 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조심하는게 좋을거다, 겁을 상실한 얼굴만 반반한 계집애야.” 그렇게 남자는 차에 올랐고, 차는 후진을 해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버렸다. 시연은 분한 표정으로 그 차가 눈앞에서 사라질때까지 노려보다가 여환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여환을 부축해 일으켰다. 여환은 시연에게 기대었다. 시연은 팔을 들어 여환을 꽈악 안아주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아서 뛰어왔는데...” “...시연아.” “....응. 응. 여환아.” “아마도 큰 어머니 짓 같아.” 여환의 말에 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연은 여환을 밀쳐내어 여환과 시선을 마추며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 유산때문에 널 거뒀다는?” “그래.” 여환은 힘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놀라며 여환을 쳐다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 했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때까지 같이 산 정도 있는데. “시연아, 나 너무 힘들다. 남자는 태어나서 3번만 우는거래서 나 안 우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돈 때문에 우리 가족을 해치려 했다해도, 잠깐의 위기의식과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여, 여환...” “너라도 없었다면 나 정말 죽고 싶었을 것 같아. 나, 너무 힘들다.. 모든걸 그대로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43. “이게 무슨 짓이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고 화려한 집에, 언성을 높이고 있는 두 여자가 보인다. 약간은 독기를 머금은 듯 하지만 왠지모르게 인자할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중년여성과, 큰 눈이 살짝 쳐져 순진해보이고 하나하나 뜯어봐도 오목조목 이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시연과 여환의 큰 어머니였다. “여환이 친구인가보네요?” 여환의 큰 어머니는 약간의 비웃음과 함께 생긋 웃으며 시연에게 물어왔다. 시연은 지지않고 받아쳤다. “네, 절친한 친구사이죠. 아주머니께선 여환이와 어떤 관계신가요?” “호호,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시연의 앞에서는 '어머니'란 말을 아무렇지않게 턱턱 내뱉는 그녀였다. 여환은 시연을 말리고 싶었지만, 시연은 절대 용서하지 못 한다는 표정으로 여환의 만류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지지않고 여환의 큰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한채 따박따박 밀어붙였다. “아하, 그러세요. 정말 아리따우시네요.” “호호, 아가씨두 만만치않을걸요. 금방이라도 봉우리를 터트릴 것 처럼.” “과찬이세요. 그런데 말이예요, 제가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칭찬속에 얽혀있는 신경전. 시연의 예의바른 물음에 큰 어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며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치 않은 계집애였다. 여환의 친구라면 윤세고 학생일꺼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니.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따박따박 자신을 몰아붙인다. “요즘은 엄마가 아들을 죽이기도 하나보더라구요.” 시연의 그 말이 툭 내뱉어짐과 동시에, 여환과 큰 어머니의 인상이 확 굳어버렸다. 시연의 미소의 농도가 점점 짙어져가고 있었다. 시연은 그 둘의 반응은 애초부터 관심없었다는 듯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정말 그런 엄마들은 감방 한번 가야되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중죄인데, 더구나 자기 뱃속에서 낳은 아이를 죽이려하다니요. 정말 몹쓸 인간이죠?” 시연이 몹쓸 인간이란 말에 강조를 주며 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큰 어머니의 입가가 바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 알고 있구나. 뻔뻔하고 역겨운 계집애!” “뻔뻔한것도 당신이고, 역겨운 것도 당신이예요. 함부로 입 놀리지 마세요. 그따위 말 다 들어줄 정도로 나 착한 사람 못 되니까.” 여환은 시연의 냉정하고 냉랭한 모습에 깜짝 놀랬다. 자신이 이때까지 봐왔던 시연의 모습은, 조금은 바보같아도 순수하고 다정한 여자였다. 이렇게 냉정하고 냉랭한 모습은 보긴 커녕,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시, 시연.” “뭐라고 짓걸이는 거야, 이 계집년이!!!!” “내가 계집년이면, 나보다 더 못 한 당신은 뭔가요. 개새끼?” 큰 어머니의 입과 눈가가 바르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가 가득찬 눈으로 시연을 노려보며, 시연의 뺨이라도 때릴 생각이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시연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시연은 그 손조차도 허용할 마음이 없는지 손을 잡아서는 꽉 쥐었다. 세진 않지만, 힘줄을 눌렀기때문에 큰 어머니는 고통스러웠다. “으읏. 이거 안 놔?! 놓지 못 해, 이 미친 계집이!” “그럼 당신은 미친 개새끼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듣습니까?” 시연은 여전히 예의있는 말투를 고집했다. 형식상 예의는 있었다. 너무 날카로울 뿐이지.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물론 당신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당신은 당신의 친 아들에게만큼은 다정하고 한없이 따뜻한 어머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어린 여환에게 선택권조차 주지않고 여환을 기르기로 했습니다. 물론 돈 때문이었어도 당신과 당신 남편이 선택한 것이라구요. 여환이 거절하고 싶어도 당신이 거절 못 하게 했고, 당신네들이 억지로 끌고 온거라고요!” “그래서 어쩌라는 게야?” “돈 많잖아. 여환이 앞으로 되있던 유산 전액 물어주고, 기자들 불러요.” “뭐?” “돈이 문제입니까?” 시연의 질문에 큰 어머니는 쥬스 한 모금을 쭈욱 들이키더니 화를 삭히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환을 한번 힐끗 째려보고는 다시 시연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니, 돈 때문은 아니지. 그때는 우리도 가난했고, 무엇보다 저 새끼 엄마라는 년이 마음에 안 든거 뿐이니까.” “그럼 기자들 불르는게 마음에 안든다는 소리신가요?” 시연이 희고 얇은 다리를 휙 꼬았다. 시연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윗 사람이 아랫사람 다루듯한 태도로 대화를 진행했다. 큰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여환의 친구라는 저 여자애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은 아직 없어 노련하지 못 해,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이진 못 해도 아랫사람들을 다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 큰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기자를 불러서 뭘 할 생각이지?” “간단해요. 여환이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주면 되요. 그 쪽도 좋고, 우리 쪽에서도 좋은 방법이죠.” “니 쪽에선 그렇다 쳐도, 내 입장에서 좋을 건 뭐지?” “당신네들은 끝까지 착하고 선량한 큰 아버지, 큰 어머니로 사람들의 인식에 남을테니까요. 기자들에게 유산을 대신 맡아줬다 다시 돌려주는 것처럼 말하고, 여환을 친 자식이 아니라고 밝히면 여환이 상처받을 까봐 이때까지 말 안 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쪽 좋고 우리 좋고 아닌가요?” 큰 어머니는 경악했다. 저 조그맣고 예쁘장하게만 생긴 계집애가 머리가 저런식으로 돌아가다니. 여환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짐을 꾸려서는 내려왔다. 당분간 시연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연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여환 또한 따라나가려고 신발을 신으려 하는데 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까지의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아니라, 친 아들인 성현을 대할 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결코... 너가 싫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예?” “너를 보면 미현이 떠올랐어.” 미현.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요?” “그래. 미현은... 미현은...” 그녀의 큰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여환으로써는 처음보는 큰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미현은 정말 뛰어난 여자였다. 공부도 잘 했고, 그림도 아주 잘 그렸지. 얼굴도 정말 예뻐서 많은 남자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온 몸에서 기품이 철철 넘쳐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 대상이었어. 그것까지만 해도 좋았어. 그건 아니? 미현과 내가 단짝친구였다는 사실을.” 여환은 큰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되. 엄마를 죽인 사람이 엄마와 단짝 친구였다니! “마, 말도 안되...” “우린 서로를 너무 사랑했고, 너무 아꼈다. 그래서 항상 서로를 위했어. 하지만 우리 둘의 길이 한 길로 이어질줄 누가 알았겠니? 네 엄마가 화가의 길만 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같은 상황까지 처하진 않았을 거야. 난 죽어라 노력해도 미현의 발의 때만큼도 하지 못 했어. 미현의 미술에 대한 천부적인 능력은... 노력으로도 극복이 안되더라.” 마침내 큰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맑은 눈물이었다. 이때까지의 독기가 가득 차, 더럽고 검은 것이 아니라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한 눈물이었다. “너를 보면 미현이 떠올랐어. 네 눈은 미현의 눈과 너무 많이 닮았거든. 물론 돈 때문에 너희 가족을 죽이려고 했지만, 나도 처음엔 많이 말렸어. 네 큰 아버지도 말야. 하지만 그들의 신념은 굳건했고, 결국 꺾이지 않았어. 우리가 꺾였어. 미술회에서 미현이 완벽하게 승을 했고, 나는 패했지. 그게 내 마음이 흔들린 결정적 이유였을 거야. 몇날 며칠을 술로 지새우다가, 결국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지. 그리고..., 조작된 사고를 터트렸어. 계획대로 그 둘이 죽었지만, 그리고 그 둘의 자식인 네 형도 죽었지만 너가 살아남은 거야. 완전히 몰살시키려 했는데, 네가... 우리의 계획을 넌 그 좋은 머리로 다 알아채버렸고, 너는 눈에 가시로 밖에 보이질 않았어.” “큰...어머니...” “그 어린 네가 뭐 그리 잘못한게 있다고... 하하하. 어딜 가서든 떳떳하거라. 넌 미현의 아이이니까.” 처음으로 웃어주었다. 처음으로 정말 다정하게 말 걸어주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나 심심해죽는 줄 알았잖아.” 시연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여환의 품에 포옥 안기었다. 여환도 시연을 꽈악 안아주었다. 결국 엉켜서, 그 무엇으로도 풀어지지 않던 실타래를 시연이 풀어주었다. 시연이가. 너무도 사랑하는 강시연이라는 이 여자아이가. “고마워.” “응?” “고마워, 그냥 고마워. 다.” 고마워, 알게 해줘서. 큰 어머니, 큰 아버지가 처음부터 우리 가족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게 아니라는걸 알려줘서. 큰 어머니가 날 미워하지만은 않았다는 거. 큰 어머니가 우리 엄마를 너무 사랑했었다는 거. 알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 시연아. “어서 가자!” 둘의 발이 한걸음 한걸음 내디어졌다.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시작되었다. 둘의 발걸음이. 여환이 갑작스레 시연의 집으로 쳐들어왔는데도 나무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혜원과 다연도, 성환과 혜란도, 가정부마저도 여환이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한없이 따뜻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진짜 가족처럼 따뜻하게. 정말 정말 따뜻하게. 여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여환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말을 물어봤다. “왜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세요?” 그 물음에 모든 이들이 피식 웃었다. 여환의 물음이 귀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성환이 제법 무게를 주며 말했다. “우리 사위니까 그렇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화목한 집이었다. 여환에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화기애애함이 가득한 집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이. 너무 행복했다. 44. 여름축제는 급속도로 진행해나갔다. 여름축제라는 것이 여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이 슬쩍 나타날때쯤 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급히 준비중에 들어가 있었다. 성환은 자신의 밑에서 열심히 뛰어주는 직원들이 고마웠다. 그 정도 능력을 가졌으면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부릴만도 하건만, 그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고마워 하는 사장 강성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고 배신하지 않는 자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는 항상 퇴직금도 다른 회사에 비해 1.5배에서 2배까지 더 얹어주었고, 그 누구보다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장이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권력자였지만,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에겐 한없이 다정한 "대장"이었던 것이다. “흠.” 성환은 J그룹, 즉 주동찬의 회사에서 온 서류를 읽어내려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에는 자신의 그룹인 K그룹이 여는 여름축제에서 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자신도 여름축제를 열테니 서로 경쟁해보자는 것이었다. 성환은 낮은 한숨을 한번 더 내쉬었다. 이 작자가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것일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버지, 왜요?” 시연이 사과를 아삭 아삭 씹어먹으며 물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성환의 입으로 향해있었다. 모두들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J그룹이 우리 축제 근처에서 똑같이 여름축제를 벌이겠다는 군.” “완전히 따라하는 거네요?” 혜원이 기분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란다. J그룹의 사장인 주동찬이라는 인물은 꽤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그 자는 완벽한 무언가를 손에 쥐어야만 일을 벌이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다는 뜻은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성환이 고민된다는 듯 살짝 인상을 굳히며 말하자, 모두들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성환이 걱정할 정도라면, 꽤 큰 일일텐데 싶어서였다. 그때 시연이 생긋 웃으며 성환의 옆에 앉아서 성환의 팔에 안기며 말했다. “아빠 아빠 아빠!” “그래, 시연아.” “여름축제 말이예요~. 그거에 대해서 저랑 내기해요!” “내기?” “네.” 시연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성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의 흑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성환은 시연의 행동에 피식 웃음지으며 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히힛. 그니까요 내기는 간단합니다. 완전하게 이기느냐, 지느냐죠.” “무슨 말이냐?” “아빠는 지금 걱정하시고 계신거잖아요. 그럼 그만큼 J그룹이 완벽하게 준비했을 것 같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그러니까요! 아버지는 비슷비슷하게 끝나거나, J그룹이 이기는데 거시구요. 저는 아버지가 완벽하게 이기는데 걸게요.” 시연이 "완벽하게"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성환은 몸을 소파에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기 조건은?” “소원 하나 들어주기요.” “네 소원은 뭔데?” “아직은 안되요. 승패가 확실해지면요!” 시연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연이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는 가족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시연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뭘 사주세요, 뭐 이런것들이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름축제의 준비가 끝이났다. 많은 기자들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준비만 되어있는 세트를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다. “네, 저는 지금 대한민국 최고라는 K그룹이 준비한 여름빛축제 세트장에 와 있습니다. 여느 축제와 그리 별다를 것은 없어보입니다만, 철저하게 준비된 세트장만 봐도 안전에는 힘껏 힘을 썼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여름빛축제는 오늘밤 7시에 이 곳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될 것을 예상하며, 현장에서 한다은이었습니다.” “네, 저는 지금 현재 빠른 속도를 보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K그룹을 따라잡고 있는 J그룹이 준비한 여름축제 세트장에 와있습니다. K그룹의 여름빛축제 세트장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K그룹과 약간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만, 세트장으로만 따진다면 J그룹이 약간 앞서는 것 같기도 합니다. J그룹 역시 오늘밤 7시에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장에서 김현선이었습니다.” TV에서는 K그룹과 J그룹의 여름축제에 대해서 방송하느라 난리였다. 둘의 축제가 약간 비슷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시간에 시작된다는 것은 상상외의 충격이었다. 축제가 비슷하다면 조금이라도 멋있는 곳으로 몰릴것이고, J그룹 쪽이 조금 더 화려했다. 더구나 가까운 거리라고 하니, 한 쪽에 있던 관객들이 다른 쪽으로 대거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같은 시간에 시작된 다는 것은 명백한 대결 신청이었다. 이곳에서 사장으로서의 자존심을 건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성환은 축제 세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는 아버지가 완벽하게 이기는데 걸게요. 예전같았으면 자신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시연은 다르다. 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로, 날카롭고 가끔의 폭행이 사라지고 나서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따지는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래, 시연. 내가 질리 없잖나. 하하하.” 성환은 싱긋 웃었다. 자신의 것들을 조금 따라해서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한들, 근본적인 것은 자신에게 있었다. J그룹 쪽은 준비가 허술한데다가, 지금 준비한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들을 카피했을까봐 걱정했던 성환은 함박 미소를 지었다. “시연이 소원을 결국 들어줘야겠군.” 45. K그룹과 J그룹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거의 동등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J그룹은 J그룹에 관련된 사람들이 거의 2/3을 차지한다는 것이고 K그룹은 유명인사가 1/2, 국민들이 1/2로 비례하다는 점이었다. J그룹은 일단 화려했다. 많은 조명들로 아름답게 밤하늘을 비추었고, 많은 가수들을 불러 흥을 돋구었다. 그리고 음식들을 나누어주어, 출출함을 채워주었다. 그에 반면 K그룹은 평범했다. 색색 조명들로 꾸미지도 않았고, 가수는 오지도 않았다. 성환이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K그룹을 믿고, 강성환을 믿고 이 축제에 참석한 관객은 후회가 살짝 되었다. 주동찬이 K그룹이 부진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씨익 미소지을때 였다. “연설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축제를 만끽해봅시다.” 그 순간 성환을 비추고 있던 단 하나의 조명이 탁 꺼져버렸다. 7시였지만 약간 어두웠기에, 관객들은 의자에 앉아 우왕자왕 하였다. 그때였다. 색색의 많은 조명들이 한 순간에 켜지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색색별의 조명들은 하늘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한없이 비추어나갔고, 무대 양 옆에서 폭죽이 펑펑 하고 터져나갔다. 관객들은 하늘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색채에 황홀함을 느꼈다. 그때 조명이 다시 탁 하고 꺼져버렸다. 폭죽도 언제 터졌다는 듯 터지질 않았고, 한 순간 침묵에 감돌았다. 약 2분이 흘렀을까, 관객들이 웅성웅성 거릴 때 쯤 다시 조명이 켜졌다. 아까 성환을 비추고 있던 하나의 조명이 홀로 하늘을 비추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선녀가 내려오듯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가 헬기에서 굳건하게 지면으로 매달아놓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관객들은 이 광경에 넋을 놓았다. 여자는 연보라빛에서 연분홍빛이 감도는 너풀거리는 비단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정말 선녀마냥 가녀리고 아름다운 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단 한순간에 빼앗아버렸다. 그 여자의 노오란 머리카락은 조명이 아슬아슬하게 비추며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났고, 흰 밀가루보다 더욱 희고 고운 피부는 조명 아래에서 살짝 살짝 비추어졌다. 관객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귀했으며 색스러웠다. “아름답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사다리에서 반쯤 내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허공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줄 사다리는 헬기의 움직임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그 곳에 매달린 냥, 두 손을 꽉 쥐고 긴장했다. 꽉 쥔 두 손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한, 웃음을 머금고는 여유롭게 헬기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실크처럼 그녀의 몸은 바람의 행로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헬기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들의 머리위를 지나갔다. 그때 그녀의 손에서 부드러운 종이조각들이 나풀나풀 날리었다. 관객들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머리위에는 선녀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자가 떠있고, 그 여자의 손에서 그 어떤 꽃향기보다 좋은 향을 내뿜는 종이조각들이 떨어져나왔다. 종이조각들은 바람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자신들의 몸에 부대껴왔고, 홀로 켜져있던 조명들은 다시 하나하나 빛을 내며 여자의 행보를 더욱 빛내었다. 그렇게 여름축제는 끝이 났다. “히힛, 내가 이겼다!” 시연은 양 팔을 번쩍 들어 만세부르듯 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떤 뉴스에서도 K그룹이 졌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관객들은 처음 느껴보는 황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색다른 경험에 모두 K그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소원을 말해보거라.” 성환이 미소지으며 시연에게 물었다. 모두들 시연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연의 석류빛 붉그스름한 입술이 살짝 열렸다. 흰 이가 보이고, 붉은 혀가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아닌,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사를 주세요.” 한 순간의 적막. 모두들 입을 열지 못 했다. 시연의 말은 모두들 경악에 빠뜨렸다. 성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K그룹을 달란 말이냐. 예전 내가 물었을 땐,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K그룹이 아니라 M그룹을 주세요.” “M그룹? 난 그런데는 모른다만.” 성환의 말에 시연이 씨익 웃었다. 매력적인 흰 치아가 고르게 나타났다. “민여환의 회사를 세워달라구요.” 그 누구보다 여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환은 시연의 팔을 꽈악 잡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시연, 무슨 말이야.” 그러나 시연은 여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시연은 성환의 낮게 가라앉은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분명 소원 한가지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이상 미소가 그려져있지 않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얼굴 그 어느 부위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철처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환의 회사라...” “세워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연이 당차게 말을 내뱉었다. 성환의 굳은 얼굴이 활짝 펴지며 호탕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뇌수술을 받고 나더니 정말 당차졌구나, 시연. 그래, 세워주마. 난 너희에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경영수업을 받지도 않았고, 하수를 다루는 방법도 모른다. 그럼에도 진행하겠느냐?” 그 질문에 시연은 물끄러미 여환을 쳐다보았다. 여환은 대답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되었다. 회사를 갖는다..., 전혀 상상해보지 못 한 일이었다. 시연의 시선과 여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시연은 웃어보였다. 붉은 입술이 고운 활곡선을 띄며. 여환의 심장이 두근 거렸다. 그녀의 웃음에. “네, 할 수 있습니다.” 여환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감은 있었다. 이 여자와 함께라면 모든지... 그렇게 여환과 시연의 회사, M그룹의 탄생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K그룹을 넘나들 M그룹의 탄생은 이렇게 작은 내기조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6. “혜원 부탁이 있어.” 갑자기 한밤중에 방에 찾아와서는 부탁이 있다고 말하는 시연의 태도에, 혜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많은 방송스케쥴과, 오늘밤에 있었던 여름빛축제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사다리에 붙어있느라, 온몸이 긴장상태에 빠졌었기 때문에 저려왔기 때문에 몸 컨디션은 너무 안 좋았지만. 시연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 그게 혜원의 작은 보답의 방법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해주고,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유일한 친구였기에 모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게 혜원의 마음이었다. “뭔데? 모든 들어줄게. 근데 친구끼리 부탁이 어딨냐? 헤헷.” 혜원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원은 예전보다 정말 아름다워졌다. 매일 피부관리를 받더니 피부도 탱글탱글해졌고, 눈도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코도 오똑해지고, 오목조목 너무 아름다워진 혜원이었다. “웃지마, 질투나. 씽.” 시연이 토라진 척 하며 말하자, 혜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혜원은 마음속으로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순백의 장미를 닮은 시연이 더 아름답다고. “내 부탁은...” ＊＊ 여환은 한밤중에 자신의 방을 찾아와 건내주고간 책 뭉치에 깜짝 놀랐다. 이걸 저 가녀린 팔로 어떻게 들고왔나 싶을 정도로 많은 책이었다. 약 5cm의 폭에 400쪽씩 되는 책을 무려 8권이나 가져온 것이다. 맨처음 그녀가 발로 방을 찰 때는 뭔가 일이 있나 싶어 냉큼 문을 열었는데, 자는 척 할껄 하는 생각과 함께 후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녀의 팔에 아슬아슬 걸쳐있는 책들을 모두 받아 책상에 올렸다. 여환은 시연의 팔을 살짝 살짝 힘을 주어 주물러주었다. 혹시나 멍이 들거나, 저리진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고 보면, 시연과 여환이 이 집에서 제일 닭살이었다. 시연은 여환이 주물러주자, 아픔을 호소했다. 역시나 팔이 뭉쳐있고, 뻘겋게 부어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아픔이 사라지자 시연은 여환에게 기대며 말했다. “일주일 안에 이 책 다 읽고, 깨우쳐야 해. 내 부탁이니까 해줄꺼지?” 경영책이었다. 그만큼 여환의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될 테지만, 그만큼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책들이었다. 하지만 여환은 용기를 내었다. 시연의 부탁이라면, 그게 뭐든 끝까지 도울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시연은 시연을 위해서가 아닌 나, 민여환을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응. 반드시 깨우칠게, 일주일안에.” 자신이 딛고 일어설 발판이 되주려는 것이다. 시연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자신들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을 땐, 길 한복판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 모르는 사람뿐이었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도 가식으로 가득 찬 행동들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못 믿고,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는데 이렇게 따스한 사람들을 만나니... 너무 행복했다. “아빠도, 엄마도, 형도... 시연의 가족과 만났더라면 더욱 행복했을 텐데.” ＊＊ “새벽부터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이준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졸리다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흰 티셔츠가 한 쪽으로 몰리며 쇄골이 드러났다. 여느 여자들이었다면 그의 섹시함에 반했겠지만, 시연은 별 감흥을 못 느꼈다. 사랑하는 그가 아닌 이상 그녀는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시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흰 원피스를 입은 시연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예뻤다. 이준은 피식 웃으며 시연의 팔을 훽 낚아채 소파에 앉혔다. 그 작고 귀엽기만 하던 꼬마공주님이 언제 이렇게 성숙한 소녀가 되었을 까. 금방이라도 이 꽃은 봉우리를 터트릴 것 처럼 아름다웠다. 봉우리를 터트리지도 않았으면서 꽃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정말 뛰어난 미모의 여자이다. 이준은 시연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연, 여자가 남자집에 함부로 오는 건.” 이준이 시연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잡아먹어주세요. 이런 뜻이야. 그것도 새벽에...” 이준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장난스레 말했다. “장난치지마, 오빠.” 시연은 이준의 손을 살짝 떨쳐내며 이준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이준은 무섭다는 듯 오바액션을 취해보였고, 시연은 함박 미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다정하고 편안한 오빠였다. “그런데 왜 찾아온거야? 부탁이라니.” “졸업할 학생들과, 지금 나와 나이가 동등한 사람들 말이야. 어차피 대학 안갈게 분명하잖아?” “그렇지. 좋은 회사에 캐스팅 받고 회사에 다닐테지?” “그래서 말인데..” 시연이 가능해? 라는 뜻이 강렬하게 담겨있는 눈으로 이준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를 않자 이준이 피식 웃으며 먼저 선수쳤다. “뭔데, 다 들어줄게요. 꼬마공주님.” ＊＊ 연희는 갑자기 부탁이라는 단어를 쓰는 시연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친구끼리 부탁이란 말이 어딨어?” “그래도...” 시연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연희는 시연을 살짝 밀쳐내며 토라진 척 했다. 시연은 그런 연희의 손에 딸기사탕을 쥐어주었다. “읏. 딸기사탕 지긋지긋해~” “맛있기만 하거든!!” 시연이 입안에 있던 사탕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연희는 그런 시연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교실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근데 뭘 부탁한다는 건데?” ＊＊ 선우는 시연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흥분되어 미칠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아무감정 없고, 자신에게 다가오는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쳐가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심장이 떨리고 설레었다. 그녀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이더라도, 그 길로 향하며 자신을 한번쯤은 그 고운 눈에 담아줄테니까.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욕심같은거 많이 안 갖을 거니까. “선우오빠.” 선우의 표정이 급격이 굳어졌다. 시연은 자신에게 일이 있어 자신에게 찾아온 것 이었다. 시연은 선우의 굳어진 표정에 의아해했지만, 선우에게 할 말이 있다며 복도로 나갔다. 선우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조심스럽게 시연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할 말 있어?” 시연은 앞머리에 가득 가려진 선우의 얼굴이 마땅찮았는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본론은 이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선우는 자신에게 부탁이 있다는 시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시연은 간절한 눈빛으로 선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들어...주실 수 있죠? 그렇죠, 오빠? 우리 같이 점심먹은 인연도 있는데~~ 응응응?” 시연이 애교부리듯 칭얼대며 말하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시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싸~ 하고는 기뻐하였다. 선우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시연은 교실에 들어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랬다가 고개만 돌려 선우와 시선을 맞추고는 지나가는 투로 말을 툭 내뱉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오빠도 앞머리 깔끔하게 자르면 멋있을 텐데.” ＊＊ 미라는 늘씬한 다리를 훽 꼬며, 오렌지쥬스를 한모금 쪼옥 들이켰다. 그러고는 앞에 앉아서는 부탁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연은 대답이 없는 미라때문에 더욱 긴장해서는 조마조마 하고 있었다. 한번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미라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그때 미라의 희고 길쭉한 손이 시연의 머리위로 닿았다. “바보야. 누가 친구한테 부탁한다고 하래?” “미...라야.” “모든 다 말해. 우리 시연이 일이라면 두 손 걷어부치고 도와줄텡께. 앙~?” 47.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년이라는 시간은 그닥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변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부탁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에게 말을 하고 다니던 시연은, 3년동안 한번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모두의 기억속에서 시연의 부탁은 점점 기억속에 파묻혀가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저 진짜 이젠 일 해야된다니까요? 이젠 엄마, 아빠한테 전화걸려오면 죄송해죽겠다구요!” 윤세고 3학년, 2학년층에서 가장 뛰어났던 6명이 교장선생님인 이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3학년들은 졸업한지 2년동안, 2학년은 졸업한지 1년동안 아무일도 못 하고 백수처럼 놀고있었다. 최고의 명문고라는 윤세고에서 대활약을 했던 그들이니만큼 이준의 "3년만 놀자."라는 제안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더 어이없는 것은 이준이었다. 그날 혜원은 이준에게, “뛰어난 학생 몇명만 아무회사에 가지 못 하게 잡아주세요. 제가 졸업할때 까지만요.” 라는 얼토당토 말도 안되는 부탁을 했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이준은 그들에게 욕까지 먹어가면서 그들을 아무 회사도 가지 못 하게 끄끝내 막아내었다. “하아, 시연이 이 녀석. 오늘이다, 니가 졸업하는 날이...” ＊＊ 시연은 방송국으로 찾아갔다. 졸업날 방송스케쥴로 인해 학교에 오지 못한 혜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대기실에 앉아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혜원은 갑작스러운 시연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이 밝아지며 매우 기뻐했다. “시연!” 혜원은 현재 대한민국..., 아니아니, 아시아 최고의 여가수였다. 뛰어난 가창력에, 뛰어난 외모와 뒷소문없는 깔끔한 여가수. 게다가 청순하고 가녀리면서도, 섹시하며 도도했고, 착한 일에 모든 앞장섰던 혜원이었기에 모든 "착하고 능력있는 여가수"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게다가 예전보다 훨씬 예뻐져서는, 우아함이 온 몸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혜란의 철저한 교육 아래에서 말이다. 혜원은 시연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물었다. “방송국에는 왠일이야?” “3년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 “3년전? 니가 한 말이 한 두개야? 어떻게 다 기억해~” “부탁들어주겠다고 했었잖아.” 혜원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래졌다. 예전 여름빛축제가 끝이난 그날,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했던 시연이 아니던가. 혜원은 미소를 지으며 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장난기가 가득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근데 이제서야 하는거야? 유효기간 지났어~ 저리가~” “헤헷, 들어줄거지?” 그 말에 혜원이 살짝 시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푸훗. 모든지.” “우리 M그룹 전속 모델이 되줘.” 혜원은 시연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 동시에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전속 모델이 되어달라는 것은, 자신이 간단하게 오케이 하기에도 곤란할 뿐더러, 댓가없이 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분명 매니저오빠가 반대할게 분명했다. “이건 내가 마음대로...” “네 매니저랑은 이야기가 끝났어. 너만 동의한다면 괜찮다고 하시던걸?” “정말?” 시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연은 혜원에게 오기전, 혜원의 매니저부터 만났다. 그에게 혜원이 M그룹의 전속모델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니저는 M그룹은 듣도보도 못한 곳이기 때문에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시연은 그를 설득했다. 매니저는 사람보는 눈이 뛰어나야만 잘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매니저는 혜원을 보고 바로 선택했다. 혜원의 매니저는 사람 볼 줄 아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자였다. 혜원의 매니저는 시연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었다. “해줄거지?” “물론이지.” “오늘 니 생일이잖아.” “그랬나..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우리 집 근처 카페 알지? 거기로 와. 저녁 8시까지.” “선물? 우와아, 기대할거다.” “얼마든지.” 시연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쭐해하더니 대기실에서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혜원은 급하게 소리쳤다. 시연이 끝까지 같이 있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가, 같이 가면 안되? 벌써 가게?” “대한민국 최고 여가수님께서 왜 이러신데요? 저 바빠요~” 시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시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혜원은 손을 흔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시연이 대기실을 나가자 많은 여가수들과 남가수들이 혜원에게 몰려들었다. “저 여자 누구야? 무진장 이쁘다.” “연예인보다 더 이쁜 것 같애. 어쩜 저리 이쁘니? 고친거 같진 않은데.” 시연의 외모는 3년전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졌다. 순수하고 어려보이지만은 않았다. 꽃은 절정기에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시연은 절정기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꾸미고 가꾸지 않음에도 아름다웠다. 하늘이 보살피고 있는 것처럼. ＊＊ “연희야!” 시연은 카페에 미리 나와 앉아있는 연희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연희 또한 손을 들어 시연에게 크게 흔들어주었다. 둘은 정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혜원을 대할 때는 편안함이 느껴지지만, 연희를 대할 때는 뭔가가 통함이 느껴졌다. 시연에게 있어 혜원과 연희는 없어선 안될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연희야, 기억하지?” “무얼 말야?” “3년전에 내가 하기로 했던 부탁말이야. 들어주기로 했던거.” “3년전... 아아~? 그거? 말해, 뭔데. 뭐길래 3년이나 질질 끈거야?” 시연이 싱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연희도 따라서 웃었다. 시연은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연희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김연희씨가 저희 M그룹에서 일해주시길 바랍니다.” “으응?” “부탁합니다. 당신같은 인재가 필요해요.”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연은 사무적인 어조로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설마 이런것을 부탁할 줄이야... “하, 하지만 난 많이 부족해.” “너라면 충분해.”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해볼 맘도 생기긴 하지만..” “훗. 부탁으로 하는 거니까 일당은 없다아?” “그, 그런게 어딨어!”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 했던 연희는, 어느 회사든 돈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찾기 위해 갖은 자료를 다 모아서 수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연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해주길 바란다는 맘에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나 사실을 다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시연에게 못내 서러움을 느꼈다. 그러자 시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달치 월급으로 저 분을 줄게.” 연희는 시연의 뜻밖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카페 안으로 한 중년여성이 들어오고 있었다. 인자하고 다정해보이는 여성이었다. 연희의 눈에서 맺혔던 눈물이 떨어졌다. 투명함이 아름다운 눈물이었다. “어, 엄마...” ＊＊ 선우는 시연의 말을 기억했다. 그녀는 자신이 졸업할 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졸업할 때 쯔음, apple 와주세요. 우리 집 근처 카페예요. 6시쯤요.” 선우는 그 말을 기억하고 현재 카페로 와있었다. 30분이나 일찍 왔다. 1년동안 꾸욱 참았던 그리움을 드디어 해소시킬 수 있다니. “아, 오빠!” 시연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치렁치렁 길던 앞머리를 깔끔하게 자른 단정하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었다. 예상대로 선우의 외모는 정말 수려했다. 멋있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쪽이 가까울 정도로, 선이 곱고 여성스러웠다. “정말 예쁘다, 푸훗.” 시연의 말에 선우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멋있다는 말도 아니고, 예쁘다는 말을 듣다니. “그런데 부탁이 뭔데?” “저희 M그룹에서 일해주세요.” “뭐?” “오빠같은 인재가 필요해요. 오빠, 부탁 들어주실 꺼죠?” 시연이 선우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우는 그런 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픈 것이 선우의 마음이었다. 선우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여환과 시연이 운영하는 회사를 다녀, 그 둘의 사랑에 가슴이 아파질 테지만. 그래도 시연의 부탁이면 들어줄거고, 그래도 시연이 잘 될 수 있다면 뭐든 할거고, 그래도 시연의 힘이 될 수 있다면 힘이 되주고 싶으니까. 선우의 힘없는 미소가 여유로운 초저녁 바람과 함께 어우러졌다. 모든 여성의 넋을 잃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이제 오는 게야, 꼬마공주님?” 인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턱턱 박혀있었다. 7시가 되서야 찾아오다니!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들에게 자신이 욕을 얻어먹은데 얼만데! “앗, 너는 시연?” 모두들 시연을 알아보았다.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었던 것인데다가, 예쁘고 고운 얼굴로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가. “예. 강시연이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선배님들.” “하핫, 위대라. 듣기 좋은데? 근데 너가 우리를 취직 못 하게 만든거야?” 하나가 방긋 웃으며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배님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쁜 후배.” “예쁘장한 후배.” “그럼 저를 믿으십니까?” “글쎄.” “그거야 모르지.” “그럼 앞으로 저를 믿어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시연의 마지막 말에 웅성이던 이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믿어보아라. 단순한 말이지만 큰 의미가 담겨져있는 말이었다. 한 명이 고개를 살짝 꺾어 시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를 보고 믿으라는 거냐?” “선배님은 사람 보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까?” “...” “사회인으로써 사람 보는 눈, 즉 판단하고 그릇을 재는 눈은 아주 필요합니다.” “그걸 모르는 이가 어딨단 말이야?” “그런데도 저를 믿지 못 하십니까?” 시연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릇을 재는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못 알아보느냐? 이 말은 큰 의미를 갖는 말이었다. 스스로가 자신의 그릇이 크다고 말하고 있었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 조그만게 맹랑하네.” “그래야만 위대하신 선배님들을 저희 회사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요. 맹랑하다는 소리를 듣고서, 선배님들같은 인재를 저희 회사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 심한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판단은 시연을 믿기로 하였다. 시연의 반짝이는 흑색눈은 절로 믿음을 가게 하였고, 그녀의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말들은 믿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 “힘들지.” 시연이 여환의 등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여환의 따스한 체온이 등을 타고 전해져왔다. “조금.” “이제 조금있으면 우리 회사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세워질거야. 난 최고의 회사로 키우고 싶어. 너와 나의 회사이니까.” “그건 나도 동감해. 우리의 회사이니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거야. 그렇게 만들고 싶고,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여환...” “나는 너를 만나서 행복하단게 어떤 거였는지 깨달았어. 오랫동안 그 감정을 잊고 살아서, 행복감이란 게 뭐였는지 생각도 안 났었어. 죽을 때까지 그런 감정 기억 못 해낼줄 알았어. 너로 인해서 나 너무 행복해, 지금.” 여환은 너무 기뻤다. 시연으로 인해서 큰 어머니, 아버지와 화해도 했다. 기자회견 당일날, 큰 어머니는 자신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여환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늘에 계시는 부모님과 형도 괜찮다고 하실 것 같았다. 큰 어머니, 아버지는 M그룹을 적극 지원할 거라고 하셨다. “시연아, 사랑해.” “나도.” “정말 많이...” ＊＊ “시연이 얘는 왜 안오는거야. 8시까지 오라고 해놓구선. 치.” 정각 8시가 되었다. 매일 약속시간에 미리 나와있던 시연이 와있질 않자 뭔가 허전했다. 정각 8시가 되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갔다. 혜원은 그 점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모자를 더욱 꾸욱 눌러쓸 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카페가 정전된듯 불이 탁 꺼져버렸다. 혜원이 당황하며 일어나려 할때쯔음, 노오란 빛을 뿜는 초가 보였다. 초의 끝부분이 푸욱 들어가있는 생일 케?揚? 보였다. 그리고 작은 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두 남녀가 보였다. “어, 엄마.... 아, 아빠....” 도망나간 엄마와, 알콜 중독자 아빠였다. 엄마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알콜 중독자였던 아빠는, 그 병을 고치었는지 전혀 술기운같은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아빠는 너무 멋져보였다. “마, 말도 안되..” “3년전에 한 여자아이가 찾아왔었다. 흑색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지. 그 여자아이를 보니 너가 떠올랐다. 혹시나 네 친구가 했더니 정말 네 친구 더구나. 네가 그렇게 예쁘고 똘망똘망한 친구를 사겼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지만, 술에 쩔어있는 내 모습때문에 너가 욕을 먹을까 걱정되었다. 그때 그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하더구나. "딸을 사랑하신다면 딸에게 힘이 되주셔야죠."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그 뒤로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어. 당장 네 어미를 찾아갔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 말이 뭐 그리 대단한 말이라고..., 그런데 가슴이 찌릿했다. 그 여자아이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혜원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시연일 것이다. 흑색 머리카락에 흰 피부, 흑색 눈동자에 붉은 입술. “흐흐흐흑....” 시연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 평생동안 두고두고 갚을 것이다. 사랑하는 내 친구. 사랑하는 내 친구... 내 친구.. 48. M그룹이 드디어 사람들 앞에 그 거대함을 드러냈다. 모든 방송국 기자들은 M그룹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취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한 이유는 너무나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속모델이 그 유명한 정혜원이라니. 사람들은 이 작은 그룹이 이토록 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고, 그 만큼 많은 시선이 향했다. 게다가 사장이 20살밖에 안된 젊은 청년이라는 점에서도 경악했다. “우리 회사는 아직 많이 작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이라는 K그룹과 동등한 위치에 슬 것을 ” 그 말은 모두를 경악에 밀어넣었다. 그의 말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멋모르게 덤벼드는 듯한 느낌보다는 예언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M그룹의 사장인 민여환은 지나치지도, 모자란 인간도 아니었다. 자신을 부추겨세우더라도 도를 아는 사람이었고, 너무 겸손떨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식없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M그룹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혜원이 전속모델로써 광고를 함으로서 사람들은 더욱 많이 M그룹에 대해 알아갔고, 인재들로만 똘똘 뭉쳐진 M그룹은 금새 작은 그룹들을 제쳐냈다. 서비스 정신 또한 투철한대다가 무턱대고 굽히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이 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M그룹의 물건을 선호했다. 그들의 당당함에 반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물건이 싼값에 팔린다면 자존심이 상해 더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자신들의 물건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구나.” 성환은 말없이 M그룹에 대해 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작은 그룹 M그룹. 그러나 그들의 위력은 만만치 않다. 라는 말이 중심내용인 듯 싶었다. “역시 내 딸이고, 내 사윗감 답구나.”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전혀 아쉬움 없어보였다. 전혀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딸의 능력에, 딸이 사랑하는 자의 능력에 오히려 반한듯 싶었다. “이런. 이러다가 나까지 M그룹에게 말려들겠는걸.” 성환은 말없이 그렇게 웃었다. 기뻤다. 하긴 자기 자식이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있겠는가. “다연이 올 시간이군.” 해외로 경영수업을 받으러 간 다연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성환은 자신의 맏아들이 얼마나 성장했을 지 궁금했다. 자신의 기대치만큼만 성장했기를. 그렇게 성환이 갖가지 생각을 할 동안 혜란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혜란은 지금 웃음이 절로 나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 또한 어머니였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는. 때론 너무 냉정하여 다연과 시연의 가슴을 아프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 냉정했던 것일뿐. ＊＊ 돌아온 다연은 시연과 여환의 능력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빠른 시간안에 너무 많은 것을 이뤄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도 빠르게 이뤄냈다. 이럴수록 기반이 무너지기 쉽다, 조심하거라. 시연아.” 그는 시연을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으로 볼 뿐이었다. 그들의 실력이 자신보다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생이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 오빠. 내가 누구 동생인데요.” 시연이 다연의 품에 포옥 안기었다. 오빠의 따스한 품은 여환과는 달랐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진 않았지만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빠인가 보다. 다연은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토록 어리기만 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판단이 안될 지경이었다. 너무 자랑스러웠다. 대견했다. “역시 내 동생 답다.” ＊＊ 단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실패를 하셨고, 자신 또한 주저앉았다. 분명 미라가 배신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비의 마음속엔 이미 독기가 사라진 뒤였다. 단비는 보았다. 선녀같이 아름다운 소녀의 너풀거림과, 사람들의 환호를.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죽어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받지 못 할 것이라고. “하아...” 그때 여환이 다가왔다. 단비는 갑자기 나타난 여환의 모습에 깜짝 놀래었다. M그룹이라는 현재 급속도로 떠오르고 있는 회사의 사장자리에 털썩 앉은 자가 아니던가. 이젠 넘보기에도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그였다. “여환.” “아직도 그 여자애가 괴롭혀?” 그 말에 단비가 힘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절로 흔들었다. 그런 단비의 모습에 여환이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이 너무 잘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애가 한 두명 있기 마련이야.” 그래서 시연을 그렇게 질투하고 시기했구나. “하지만 그들에게 이겨내면 결국 정상에 서기 마련이지.” 그래, 그래서 시연은 지금 정상에 섰지. “너도 그럴 수 있을거야.” “내..가?” “너는 주단비야.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 “..아니야, 난...” “모든 사람들에게 미모뿐만이 아니라 품성으로도 인정받길 원해.” 그렇게 말하고 여환은 돌아섰다. 여환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단비가 시연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 지를 말이다. 하지만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의 무슨 일이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다그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훗날 하게 되었다. 주단비는 얼굴뿐만 아니라 품성이 곱고, 올곧은 20대 당당한 여성으로써 J그룹의 명예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 “미라야, 난 니 도움이 필요해.” “엄마가 아프셔. 미국에 가서 수술을 해야 한데.” “하, 정말? 얼마나 아프시길래!!” “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다 나으실꺼야. 난 그곳에서 사려고 해. 엄마는 그 곳에서 수술을 받고 요양지에서 머무르셔야 하는데 항상 내가 같이 있어줘야 하잖아. 어차피 그래야하는거 미국이 더 편할 듯 싶어.” “미라야, 난 그것도 모르고 부탁만 해서 미안해..”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직접적으로 도와주진 못 해도 멀리서 항상 응원할게.” 시연은 미라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미라는 말없이 시연을 꽈악 안아주었다. 시연을 그렇게 미라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향기에 마음을 놓고 곤히 잠이 드는 것처럼.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 두 쌍이 있었습니다. 간혹 질투와 시샘을 받기도 했지만, 너무도 아름다워서였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달빛의 축복을 받으며 입맞춤을 하려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들이 모인곳은 윤세고등학교라고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 였습니다. 세상을 너무 잘 아는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랑에 메마른 아이들이기도 했죠. 경쟁과 갈등속에서만 살아가던 그 들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빛을 머금은 여자였지요. 그 여자의 모습에 윤세고는 더욱 아름다워졌어요. 그 여자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했어요. 사랑하는 이와 모든 곤경을 겪어냈지요. 훗날 이런 전설이 남았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윤세고로 가라.” 천재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아기들이 모인곳. 사랑과 꿈이 함께 어우러진 곳. 바로 이곳은 윤세고등학교 였습니다. 윤세고등학교完 출처 :♥｀-^)／소설만땅넷ⓥ＼(＇-＾♥ 원문보기▶ 글쓴이 : 개장형아(완결) 댓글 131 인쇄 | 스크랩(32)▼ 왜싫으냐? 크크 언제나 읽어도 잼있는윤세고^^ ㅋ 07.08.31 21:56 답글 작은고백 퍼펙트 하군요 .. 후후 , 저도 윤세고의 학생들이 부러워지네요.. 현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할수있는 윤세고같은 고등학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후훗, 07.09.27 20:56 답글 보람가글이 이거 재밋네요 07.09.28 23:12 답글 은비령。 진짜 윤세고등학교같은 학교가 있으면 좋을것 같아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윤세고로 가라!<너무 멋져~ 07.10.16 19:52 답글 곰돌씌a 우아~! 만약 진짜 윤세고등학교가 있으면 나는 들어가지도 못할거다.. 07.10.21 13:29 답글 파란☆하늘 너무 재미있어요 ㅋㅋㅋ 잘읽었어요!!! 므흣! ㅋㅋ 07.11.24 14:49 답글 『단호박 성민♡』 하나도 안 지루 했어요..,ㅋㅋ 그래서 처음부터끝까지 싹봤는데... 넘넘넘 재미있어었요.ㅜㅜ 07.12.01 18:41 답글 아빠쟤흙먹어 최고 07.12.15 14:57 답글 바겐세일러문 꺄악 너무 잼써여! 08.01.17 23:41 답글 111111 너무 잼써여 08.01.25 18:18 답글 썩소ㄱ-소녀 너무 재밌어요최고예요 08.02.01 23:24 답글 야옹이짱 정말 재미있게 잘 봤어요. 첨엔 그냥.... 그랬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드네요. 정말 글을 잘쓰세요. 즐감했습니다. ㅋㅋ 08.02.02 14:48 답글 오늘은웃자 조금 허무맹랑한 얘기지만 잼있게 봤어요.. 08.02.14 21:09 답글 류비아 잼있었어요~~ㅇㅅㅇ 08.02.27 18:26 답글 남장을사랑해 와 ㅆㅆ 멋있엉 ㅋㅋ ㅋㅋ ㅋ 08.03.30 14:24 답글 cute2elf 너무 잘쓰셨어요>ㅁ< 그리고 중간에 질리지도 않아요~!! 08.04.08 21:49 답글 0109212... 멋잇다 . - 08.04.13 19:47 답글 자뻑 곤쥬 완벽해요........bbbbb 08.04.16 02:33 답글 『 묘(猫_)』 윤세고는 아무나 못가잖아어떻게 가라는 건지..... 쩝..;;아이큐 160넘어야 가는데.... 08.07.21 18:09 답글 검은깃털 으으, 정말 감동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08.08.01 03:07 답글 검은깃털 으으, 정말 감동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08.08.01 03:07 답글 ∑룬 아리셀 어떻게 이렇게 글을잘 쓰실수가 있지?ㅜㅜ 감동했어요! 스크랩해가두 될까요!?!?ㅜㅜ 08.08.02 19:24 답글 상큼c 재미있었어요 08.08.04 19:28 답글 소중한나예요 진짜 감동 햇어요.. 다 읽고 나니까 여운이...... 후아.. 정말 대단해요!!! 08.08.06 18:34 답글 몽미ㅋㅋ 잘쓰네 08.08.10 17:06 답글 간지행님★ 굳굳굳!!!완젼감동임.ㅠㅜ 08.08.17 23:24 답글 바보래요 잼있어용~~~~~~♡♡♡♡♡♡♡♡♡♡♡♡♡♡♡♡♡♡♡♡♡♡♡♡♡♡♡♡♡♡♡♡♡♡♡♡♡♡♡♡♡♡♡♡♡♡♡♡♡♡♡♡♡♡♡♡♡♡♡♡♡♡♡♡♡♡♡♡♡♡♡♡♡♡♡♡♡♡♡♡♡♡♡♡♡♡♡♡♡♡♡♡♡♡♡♡♡♡♡♡♡♡♡♡♡♡♡♡ 08.10.01 15:28 답글 얌얌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네요! 08.10.14 21:28 답글 곰린 정말 감동적이에요 ㅠㅠㅠ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았어요! 08.11.30 17:45 답글 묘인 재미있는 스토리네요. 09.02.08 20:17 답글 월햐소설 지루하지않게 잘보았어요 작가님 잘쓰셧네 ^^ 09.10.25 18:43 답글 ◀이전 1 2 3 다음▶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회원은댓글을 쓸수 없습니다. 등록 텍스티콘 0 / 300자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윗글 | ◆검은색소녀◆ <0-10> 2006.08.21 ▼아랫글 | [반하늘][[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31~40) 2006.06.06 ▲top 서비스 약관/정책 | 권리침해신고 | 카페 신고 | 이용약관 | 카페 고객센터 | 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