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憎] written by hyaijl -prologue- 모든 것은 다 너때문이야...네가 내 눈속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아니...네가 나를 향해 웃어주기만 했어도...단지 그 미소를 보여주기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 잔인해지진 않았을 거야... 증오한다... 나를 이렇게 벼랑끝까지 몰아붙인 너를...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수 있는가의 산증인이 되버린 나를.... 너의 눈길을 받는 인간들을....네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을.... 증오한다. 널 가질수 없을 바에는..차라리 내가 널 망쳐버리겠어. 아무도 널 가질수 없게.... 누군가 널 바라본다면 그 눈알을 빼버리겠어... 다시는 널 볼수 없게.... 누군가 너를 입에 담는다면 그 혀를 뽑아버리겠어... 다시는 너의 이름을 부를수 없게... 누군가 널 가지려한다면.... 다시는 널 느낄수 없게 갈가리 찢어버리겠어.... 이건 경고야..... 널 죽일거야... 너를 얻지 못할 바에는... 널 빼앗기기전에 내손으로 널 죽이겠어.... 차라리 죽는게 나을 정도로... 살갗이 산채로 입을 벌리고 썩어버린 더러운 피를 온몸에서 다 짜내듯이... 이런 고통을 주는 너를...... 증오한다. 죽여서라도 널 남이 갖게 하진 않아.... 이건....경고야...... # # # 1999. x.x 이젠...더이상은 없어... 오직 파멸의 나락만이 있을뿐.... 더 이상의 행복은.....이젠 없어........ 날 구할수 없다면 차라리 날 떠나게 해줘...... "빌어먹을!! 너 언제까지 이럴건데!!!!" 초인종을 한참을 눌러도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생각을 않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결국은 경비실로 급하게 뛰어내려가 보조키를 얻어 열쇠구멍에 꽂아넣는 그의 손길은..마음속의 불안을 반영하듯 가늘게 떨렸다. 몇번을 구멍을 벗어나는 키를 꽉 틀어잡고 다시 시도한 끝에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미처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성급히 안으로 튀어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 끝에 확끼쳐오는 시큼하고 퀴퀴한 술내음들...피부를 후덥지근하게 덮쳐오는 텁텁한 공기... 이리저리 발 끝에 채이는....두 번다시 이전의 용도대로 쓰지못할 물건들....온통 난장판이 된 집안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나 그의 눈은 그 어딘가에 있을 모습을 찾아 헤메었다. 학교운동장만큼 드넓은 거실을 스쳐 지나가던 그의 눈이 방문들로 향하려 하다가 잠시 지나쳤던 테라스의 반쯤 열린 유리문으로 다시 돌려졌다. 부서진 파편들과 바닥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술병들을 피해가며 테라스로 다가간 그는 잠시 밀려오는 현기증에 눈을 감아야했다. 지독스런 저주맞을 운명....차라리 만나질 않았다면... 그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았다면.... 그 독기품은 눈동자에 마음을 뺐기지 않았다면.... "이 개쉐이--!! 너 자꾸 이렇게 속 썩일래?!! 이런다고 뭐가 나아져?!!" 애처로운 마음을 혹시라도 들킬까...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온 울음을 억누르며 입술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어쩔수 없는 그에 대한 원망...자신때문이 아닌...다른이에 대한 갈망때문에 망가져버린...그에 대한 원망... "일어나봐! 어우~대체....얼마나 또 퍼먹은거야?!! 한동안 괜찮더만 또 시작이냐?!" 혹시라도 떨릴까봐...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들키게 될까봐 ....과장된 손짓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끌어 당겼다. 힘없이 쳐져있는 윤기를 잃어버린 붉은머리카락...더 이상 창백할수 없을만큼 헬쓱하니 꺼칠한 얼굴...온몸에서 풍기는 술내음으로도 없애지 못한...청아한 그만의 체리빛 향기... "죽어-! 차라리 목매달고 죽어버려 이 새끼야!!!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손목을 긋든지 한강물에 빠지든지 그냥 차라리 콱 죽어버려!! 니가 이런다고 알아줄 것 같아?! 칼들고 지랄발광을 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을 놈이야!! 배떼기에 칼을 꽂든 모가지를 날려버리든 그놈 앞에 가서 죽으란 말야!!!!!!!! 이 씨팔놈아!!!!!!!!" 상처받은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입밖으로 흘러나오는 차라리 서글프게까지 들리는 그만의 독설....그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아무도 들을수 없는 그만의 방식.... 죽은 듯이 늘어져 버린 가느다란 긴 몸이...그의 손길에 너무나도 힘없이 끌려왔다. 넝마주이마냥 힘주는대로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안타까운 그만의 사랑..... "씨팔....더이상....어쩔수 없단 말이야!!!!!! 않된다는걸 알잖아....네가 더 잘 알잖아!!!!!!!.....흐윽! 이 개쉐이야!!...흑...우욱...." 왜 나를 봐주지 않느냐고...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거냐고...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감춰진 그만의 사랑방식.... 입술밖으로 비져나와버린.... 그에 대한 원망 때문에 터져나온 울음소리....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줘 거세게 흔들어대자 그에 따라 흔들거리는...눈을 아프게 하는 그만의 체리빛... "욱...흐윽....이...씨발놈아!!....언제쯤 되야 정신차릴거야...... 하늘이 무너진대도 않된단 말야!!!!!!! 너따윈 까맣게 잊고 있을거라고!!!! 흐흑....너같은건....." 멍하니 벌려진 꺼칠하니 각질이 일어난 입술...촉촉히 젖어 있던 선홍빛 채송화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메마른 고목나무마냥 시들어져버린...아찔한 유혹의 향기를 품어내던 채송화는....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되살릴수 있는 사람은...오직 단 한명.... 그의 체리빛을 되찾아줄 사람은....이세상에 오직...단 한명..... 자신이 아닌.... 그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ㅕ...줘......"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이땅의 수백만 여성들을 매혹시키던 그 아름다운 음성은...그의 체리빛이 바래지면서 같이 죽어버렸다... 혹시라도 죽은게 아닐까....시체마냥 죽은 듯 늘어져 있던 그가 아직은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 "제기랄....윽...우욱...흑....제..기랄....으흐흐흑.....이 개쉐이야...." 옷자락을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꽉 부여잡고 매달려 있던 몸이....그대로 허물어져버렸다..그의 위로 몸을 둥글게 웅크려...애타는 마음을 끌어모으며....그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애절한 고백을 외마디 비명처럼 질러댔다. 사랑해.... 사랑한단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잖아... 들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잖아.... 하나.....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시끄러운 소음속에서도.... 경적이 울려대는 거리에서도... 분간해 낼수 있는 목소리... 그의 속삭임... 비수를 꽂아대는 단 한마디.... 이미...심장에서 흘러나올 피는 더 이상 없었다... ".....날.....죽여...줘........혁아......" -1- # # # 運命의 始作 since 1996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했어..... 되돌릴수만 있다면 결코 그렇게 놔두질 않았을거야.... 하지만.....이 저주받을 운명은 결국 이렇게 될줄 알았어...... "방금.....뭐라고....." 칠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국을 뜬 숟가락을 든채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우혁이 보였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아니 그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칠현의 아미에 살짝 금이 갔다. "들은 그대로야" 시체마냥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우혁을 억지로 잡아 끌어 식탁에 앉혀놓고 깨작거리며 먹는둥마는둥 하는 그에게 갑자기 던진 칠현의 말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하나 우혁을 쇼크로 몰아넣은 말을 한 당사자는 별거아니라는 듯이 이미 고개를 숙여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숟가락이 조심스레 내려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양손이 식탁위에 올려졌다. 흘러내린 앞머리너머로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모아 쥐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뜻이야...." "식사부터 해." "대답해...그게 무슨 뜻인지" "........." 칠현은 음식을 입안으로 가져가 씹으면서도 뭘 씹고있는 지조차 몰랐다. 식탁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진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칠현의 입안이 소태마냥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칠혀.." "전화가 왔었어" ".....?!" 칠현은 우혁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고 있었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 그 깊디깊은 검푸른 눈빛을 마주 쳐다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그는 우혁의 의문을 몇가지 풀어주었다. "1시간 전쯤. 널 다시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라고 했어" "......그....가.....?" "그래" "............왜?" 숨을 죽인채 조심스레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한 존재에 대한 껄끄러움에 칠현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알고싶으면 직접 물어보시지 그래? 나도 궁금하니깐" 칠현의 차가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우혁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칠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지금 우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완벽한 아몬드 모양의 검푸른 신비가 유난히 빛을 발할 것이란 것을. 꽃봉오리가 붉게 개화하여 미미하게 떨릴 것이란 것을. 불신의 빛이 가득하던 투명한 얼굴에 차츰 생기가 피어오르리란 것을. 칠현은 눈으로 그 모든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그래서 칠현은 그를 외면한채 무슨 맛인지도 모를 음식들을 입에 넣고 씹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맞은편에서 미동도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칠현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짜증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냅킨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그의 사소한 손짓 하나에도 계속 따라붙는 검푸른 눈동자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싫었다. 그런 모든 것을 다 아는듯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가. "나와 같은 학교로 수속 밟을거야. 네가 나보다 1살이 많다해도 같은 학년으로....물론 반도 당연히 나와 같겠지" 내리깔린 속눈썹사이로 그의 주먹진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칠현은 냅킨을 식탁위에 던져놓고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채 움직임이 없는 그의 백금빛 머리카락을 힐끔 내려다보며 칠현은 입을 열었다. "학교에 간다해서 특별히 바뀌는건 없어. 네 행동반경에 학교라는 공간이 더 연장되었을 뿐이지. 쿡. 인형에게 이렇게 자유까지 주다니 인정많은 주인이야. 않그래?" 브라인드를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따가운 아침햇살에 유난히도 반짝거리던 금실같은 머리카락이 움찔 떨렸다. 가려진 금실속에 붉은 입술이 하얗게 질릴정도로 세게 베어물고 있는 그를 놔두고 칠현은 돌아섰다. 할필요조차 없는 그런 말을 하는건 본래 칠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나 그순간은 왜그런지 그를 상처입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었다. 또한 그가 절대 잊어서는 않되는 것을 다시한번 깨우쳐준다는 경고의 의미도 되었다. 그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2- # # # 이런다고 뭐가 나아질거라곤 애초에 기대치도 않았어... 단지...단지...이렇게 해서라도 너에 대한 갈망을 억제할수 있다면..... "하악...아~!!!!" 여인의 쉴새없이 내지르는 신음소리와 가쁜 호흡소리가 방안을 진동시켰다. 어둑어둑한 방안은 퇴폐적일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방안이 어둡긴 하나 두꺼운 커튼 틈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 한가운데 위치한 침대 위에는 지금 알몸의 남녀가 한몸인양 뒤엉켜 있었다. 침대가 요란스럽게 들썩거릴 정도로 정신없이 침대위를 뒹구는 이 한쌍을 유심히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수 있었다. 방안을 가득 메운 신음소리와 헐떡대는 호흡소리는...단 한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내의 밑에 깔려 양팔과 다리로 그의 몸에 바짝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는 여인의 것이었다. '이 계집은 너무 시끄럽군...'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의 목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여자의 팔이 짜증스러워진 그는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사내가 떨어지려한다는 것을 알아챈 여인이 팔과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여인의 다리가 바짝 조여지자 사내의 짙은 눈썹이 순식간에 확 휘어졌다. 사내의 짜증섞인 찌푸려진 눈이 여인의 얼굴로 향해졌다. 그가 침대위에서 파트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본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 비단같은 감촉의 살결... 조막만한 얼굴에 오밀조밀 균형잡힌 이목구비... 피보다 더 진한 붉은 입술... 가느다란 팔과 다리.... 흰 얼굴에 그늘을 만드는 기다란 속눈썹.... 몇시간전에 물들인 금빛 긴 생머리카락.... 사내의 눈썹이 한순간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하아....더." 잠시 주춤하던 사내의 움직임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갑자기 격렬해지자 여인은 그대로 숨이 넘어가는게 아닐까 걱정될정도로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아~.제발!.....지..지금..." 사내의 격렬한 움직임에 같이 따라 열심히 몸을 들썩이며 호응하던 여인이 절정으로 치달아갈 때.... 거의 정상에 도달하려던 바로 그 순간에...갑작스레 사내가 몸을 확 일으켜 여인에게서 떨어졌다. "다...당신!!...제발...어서...흐윽....." 충족되지 못한 욕구불만에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다시 남자의 몸을 다급히 끌어당기려 했다. 욕정으로 붉게 충혈된 눈에서 주루룩 눈물이 흐르며 눈에 띌 정도로 살빛이 하얀 그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가냘픈 몸에 비해 어색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사내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가자 이를 눈치챈 여인이 도발시키듯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사내를 향해 나머지 한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막 그의 목덜미를 휘감으려 할 때...그녀는 나즈막히 울리는 목소리에 그대로 동작을 멈춰야 했다. "나가..." 여인의 얼굴에 이해할수 없다는 빛이 떠오르며...잠시 머뭇거리다가...다시 사내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나 그것은 여인의 아주 큰 실수였다. 사내의 눈은 여인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냉정했다. 그 눈동자는 방금전까지 침대위에서 여자와 알몸으로 뒹굴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정도로 차가웠다. "아이...뭐야 대체...자기만 즐기고...흐응....조금만 더..." 여인이 팔을 벌려 막 사내의 어깨에 걸치려 할 때였다. "컥!!!!!!!!!"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뜨여지더니 순식간에 눈빛이 공포로 변해버렸다. 여인의 겁에 질린 눈에....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더 이상의 접근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목을 움켜쥔 팔을 뻗쳐 자신에게서 멀찌감치 떼어낸 사내의 입술이 비틀리는 것이 보였다. 여인의 가냘픈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서서히 힘이 가해졌다. 여인의 온몸을 고문하던 그 섹시한 입술이...입술에의 키스는 절대 허용치 않던 그 야속한 입술이....살짝 벌려졌다. "나가라고 했을텐데...." 여인이 공포에 질려 온몸을 학질걸린 사람마냥 떨어대기 시작했다. 이미 여인에게서 욕정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인은 사내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침대위에 뒹굴던 상대방의 눈을 이제야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사내의 눈빛은.... .....지옥..그 자체였다. -3- # # # 부탁이야.... 날 자유롭게 해줘..... 날 그만....놓아줘.... 난.....다만....날고 싶을 뿐이야....... 제복을 입은 기사가 차문을 열었으나 칠현은 앞유리창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썬팅된 그너머로 풍경이 불투명했지만 칠현은 앞에 시선을 고정한채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기사는 열린 차문을 잡은채 옆에 서 있었고 차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담장넘어 무리지어 지나치는 초등학생들의 활발한 음성들이 차안까지 밀려들어왔다. "너하기에 달렸어" "........." 침묵을 깬 칠현의 나즉한 음성이 우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옆좌석에 앉아 있는 우혁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줍짢은 네 행동때문에 멀쩡한 인간들 병신만들 소지는 아예 만들지 말란 얘기야" 조각같은 칠현의 옆모습을 쳐다보던 우혁의 눈빛이 어둡게 일렁거렸다. 칠현의 말이 무슨뜻인지 우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만도 어쩔수 없이 들뜬마음에 설레였던 기분이 급강하로 추락해버렸다. 우혁은 안그래도 붉디붉은 입술에 피가 베일정도로 꽉 깨물었다. "네 뒤치다꺼리 해주기도 이젠 지쳤어. 병신되서 실려나가는 놈들 보는것도 마찬가지고" "......알..아.." 차를 타고 오는동안 내색은 않해도 숨기지 못했던 그의 밝은 기운이 순식간에 어두워짐을 칠현은 생생히 느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로. "쿡. 안다고? 솔직히 이정도로 양보해줬다는 것만도 충분히 놀라워. 어쩌면 네가 도발하기만을 기다리는건지도 모르지. 또 피의 향연을 벌일 준비를 하는지도.." "그만둬! 제발....그만..." 우혁이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남빛 교복상의를 걸친 그의 마른등이 파르르 떨렸다. 앞으로 향해졌던 칠현의 눈동자가 귀를 꽉 틀어막은채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는 우혁에게로 돌려졌다. "그런다고 이제까지 일어난 일이 원래대로 되돌아가진 않아" "..........어떻게 해야해?....이이상....어떻게....." 들려진 흰 얼굴이 어느새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머리칼 때문에 유난히도 흰 얼굴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검푸르던 눈동자가 갈색렌즈를 끼여 브라운빛으로 더욱더 어둡게 침잠해 있었다. 살짝 벌려져 떨리고 있는 입술은 상처가 나 핏물이 베어있어 안그래도 붉은 입술을 유독 강조시켰다. 백금빛 화사함을 어두운 암흑으로 물들이면 조금은 나아질까. 심해 같던 신비로움이 가을의 빛을 띄게 되면 조금은 나아질까. 저 붉디붉은 꽃봉오리를 하얀색으로 칠해버리면 조금은 나아질까. '약해빠진....' 칠현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저런 모습의 우혁은 원래도 그랬지만 나이를 헛먹은 것 같았다. 칠현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고 눈을 돌려버렸다. 열려진 차문밖으로 교복바지로 감싸인 긴 다리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거야?" 칠현이 밖으로 나가 몸을 돌렸다. 우혁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다시 학교에 가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전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이이상...아무 생각도.... 우혁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천천히 가죽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4- # # # 너와 나의 만남은 필연이야.... 제발....부정하지마... 내게 기대도록 해.... 내가 널....지켜줄께.... "쳇. 일찍도 나오시는군." 창가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빈정거렸다. 워낙 조용한 교실이라서 나직한 중얼거림이었지만 문 끝에 앉은 학생들에게까지 들렸다. 그러자 새삼스러울것도 없건만 몇몇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디밀어 창문너머를 내다본다. 아무 제지도 없이 교문안으로 당당히 들어와 운동장옆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차체가 유난히 햇살에 번쩍거렸다. 이시간은 이미 모든 학생들이 등교해서 자율학습을 하는 시간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닌데 배알이 꼴리긴 꼴리나 보다. 매일같이 이렇게 한두명은 돌아가면서 비꼬는걸 보면 말이다. 자습시간임에도 담임이 없는틈을 타서 책상위에 엎드려 있던 재원의 입매가 비틀렸다. 졸음으로 반쯤 내리깔린 재원의 눈까풀이 서서히 눈을 덮으려 할 때였다. "어? 저자식은 또 누구야?" 호기심많은 고등학생들이라 그런지 별거 아닌일에도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창가로 합류해 다닥다닥 붙어서 밖을 내다본다. 재원의 졸린 눈동자가 그모습들을 담은채 그대로 꿈나라로 가려했지만 시끌법적한 소리에 잠이 도로 깨버렸다. "쟤 여자아냐?!!!" "미친쉐이...우리학교가 남녀공학이냐?!" "아~이새꺄! 말이 그렇다는거지!!" "우와...좇나 하얘. 눈에 확띄네?" "전학생인가? 저 재섭는 새끼랑 같이 오는데?" "쳇...또 같은 부륜가?" 말투는 험해도 웬지 모르게 들뜬 것 같은 애들의 얘기소리가 재원의 귀로 파고든다. 지루하기 짝이없는 학교생활에 전학생이란 존재는 아주 좋은 소재꺼리였다. 또한 그 전학생이 뭔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더욱더.. '하얗다고? 뭐가.... 하얗다는...음..졸.려.......' 잠시 잠이 깼던 재원은 결국 그대로 책상에 엎드린채 꿈나라로 직행해 버렸다. 칠현은 지금 자신에게 총만 준다면 아마도 모두다 쏴 갈겨버릴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 그에겐 총이 없었다. 대신 칠현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힐끗 돌아보았다. 칠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거리며 얼굴을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나잇살 먹은 인간들도 이모양이니...칠현의 살기어린 눈빛이 점차 짜증스럽게 바뀌었다. 이런 일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귀찮았다. 교감의 전학생에 대한 훈화를 정말 열심히도 듣고 있는 우혁의 얼굴엔 진지함이 가득했다. 아마도 개교이래 이렇게 충실하게 훈화말을 듣는 전학생은 다신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장우혁...네가 야기시킨 상황을 한번 돌아보시지' 1교시 시작종이 쳤는데도 머뭇거리다가 아쉬운 빛이 역력한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서는 선생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칠현은 말했다. "교감선생님. 이제 수업 들어가야겠는데요" 열심히 듣는 우혁에게 신이 났는지 이것저것 늘어놓던 교감선생이 딱 말을 멈추었다. 마주 앉아 있던 우혁이 민망해질정도로 그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다시 붉어졌다. 하나 칠현의 얼굴은 무감각하기만할뿐이었다. "아.....흐흠......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럼..." "우혁이는 저희반으로 같이 갈겁니다." 막나가는 칠현의 행동에도 교감선생이나 주변에 있던 다른 선생들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칠현의 태도에 붉게 얼굴이 상기된 우혁은 그의 팔에 끌려 일어났다. 원래 전학생은 그반의 담임이 인계를 해야 하는데도 칠현은 그런 것은 철저히 무시했다. 팔뚝을 움켜잡고 있는 칠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우혁은 뭐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교감을 향해 인사를 하려했다. 하나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칠현의 손에 끌려 뒷걸음치며 교무실을 나서야했다. "안칠현! 이게 무슨 짓이야!" 큰소리한번 낸적 없는 우혁이 화난 몸짓으로 칠현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칠현은 아무 잘못한게 없다는 듯 무심하기만했다. 우혁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그런 행동을...어떻게..선생님들한테....." "얼굴펴. 니 얼굴에 흠이라도 하나 생기면 피보는건 나니까" "칠현아! 지금 그런 얘기.." "그만둬! 장우혁!!" 칠현이 교무실벽에 우혁을 세게 밀어붙였다. 세게 밀쳐지는 바람에 우혁의 바싹 말라 도드라진 등뼈가 벽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순간 눈물이 찔끔 날정도로 등이 아파왔지만 우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칠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노한 듯 칠현의 눈동자가 침잠해 들었다. "장.우.혁......" 우혁의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을 쏘아보는 칠현의 눈동자가 원인모를 빛으로 번뜩거렸다. "더이상 날 긁지마....원하는건 뭐든 얻을수 있다해서.... 나한테까지 명령할 권한준건 아냐...." "칠현.." "그만! 얘기는 이걸로 끝이야. 순탄하게 학교생활하고 싶다면.... 내가 하는대로 가만이 있는게 너한테도 좋을거야" 우혁의 양팔을 부여잡고 있던 칠현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가 서서히 풀렸다. 안그래도 흰얼굴이 유난히도 짙은 검은머리칼 때문에 더욱더 새하앴다. 그덕분에 남자치곤 꽤나 짙은 분홍빛의 입술이 이젠 요사스러울정도로 짙붉었다. 살짝벌려져 있는 우혁의 입술에 잠시 시선을 멈췄던 칠현은 휙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칠현의 뒷모습을 우혁은 한참동안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벽에 부딪혔던 등과 칠현이 잡았던 팔부근이 저리듯 아파왔다. 우혁은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칠현의 모습이 복도끝부분에 다다랐을때야 우혁은 급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5- # # # 내 감정이 어떤지 나는 모르겠어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내 심장은 오직 널 향해서만 뛴다는 것뿐..... 재원은 교탁앞에 서 있는 수학선생에게 향했던 시선을 창가 맨 뒷자리로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흘끔거리며 그 자리를 주시 하고 있는 시선들은 의외로 많았다. 재원의 시선이 다시 그 자리에서 조금 위쪽으로 이동했다. 볼때마다 그렇지만 정말 딱딱할정도로 등을 꽂꽂이 세우고 수업을 받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문과수석 안칠현. 공부에 관해선 타의추종을 불허할정도로 두뇌가 비상한 놈. 재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을 형으로 두고 있다는 오만해보일정도로 차가운 놈. 또한 무식할정도로 타인에 배타적인 삭막한 놈. 그런 놈이....데리고 온 녀석....... 재원의 시선이 그등에서 뒤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한순간 눈이 부신 것처럼 재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햇빛의 역광 때문에 더더욱 하얘서 빛이 그주위를 맴돌아 한꺼풀 휘광에 싸여있는 듯 마치 투명인간 같아 보이는 한 학생이 보였다. 장우혁..... 이름만 달랑 알렸을뿐... 으레 전학생에게 따르기 마련인 선생의 소갯말이라던가 자기소개같은 절차는 아예 생략되어버렸다. 단지 안칠현과 함께 같이 와서 그와 뭔가 연관이 있는 사이란 것밖엔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그것도 추측일뿐... 하지만 재원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런 자잘자잘한 것은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눈앞에 있는 모습과 이름 석자만 알면 되는 것이다. 재원의 뚫어질듯한 시선을 먼저 알아챈 것은 그가 시선을 주고 있던 장우혁이 아니라 그앞의 안칠현이었다. 재원은 뭔가 강렬한 기운이 살갗에 느껴지자 시선을 돌리다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칠현과 눈이 마주쳤다. 곧게 뻗어내린 콧날과 굳게 닫혀 있는 입술. 전체적으로 조각같은 느낌을 갖게 할정도로 잘생긴 얼굴. 하나 재원이 보고 있는 것은 칠현의 무감각한 눈이었다. 블랙홀처럼 너무 깊어 그 속을 알수 없는 눈동자... 그 눈동자가 한치의 미동도 없이 재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원은 입가에 씩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장우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칠현의 시선이 불타오르듯 금새 따가워지는 것을 재원은 생생히 느낄수 있었다. '쿡..저새끼...너무 솔직하잖아?' 재원은 갑자기 흥미가 일었다.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안칠현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장우혁때문일 것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칠현과 옆분단 뒤쪽에 앉아 있는 재원 사이에 일기 시작한 미묘한 기운을 정작 그 당사자인 우혁은 모르고 있는게 분명했다. 수학선생이 내준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둔하군...' 재원이 피식 웃었다. 칠현과 무슨 사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안칠현의 약점이 노출되버린 것이다. 재원은 별로 상관없었다. 안칠현과 장우혁이 어떤 사이든 재원은 자신이 결심한 것은 결코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재원은 칠현이 노려보던지 말던지 장우혁을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때까지도 재원을 주시하고 있던 칠현의 눈빛이 한순간 무섭게 빛을 발했다. 그는 재원이 고개를 돌리기전에 먼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칠판으로 향하고 있는 무표정한 눈빛과는 달리 샤프를 쥐고 있는 칠현의 손은 힘이 들어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재..원.......제길....' [자작] 愛憎 -6- -6- # # # 제발...날 놓아줘... 난 이제....지쳤어....더이상은.... 너와 나의 인연은 악연일 뿐이었어..... "하아 - 그만... " 가녀린 미성(美聲)이 가쁜 숨소리를 타고 흘러들자 머리카락을 휘감고 있는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손 밑으로 가냘픈 떨림이 느껴졌지만 심한 반항의 몸짓에 지친듯 이젠 저항마저 수그러들었다. 잠깐 간격을 둔 사이 향기로운 숨결을 가쁘게 토해내는 입술로 다시 격하게 입술이 부딪혔지만 굳게 닫힘으로 인해 이미 맛본 달콤함을 잠시라도 놓칠 수 없었던지 부드럽게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흡!" 아픔으로 인해 저절로 벌려진 입술 틈을 놓칠새라 그의 혀가 입안으로 급히 파고 들어갔다. 거침없이 쳐들어온 뜨거운 혀가 온통 입안을 헤집어놓자 우혁은 그 아찔할정도의 격렬함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지금 우혁은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엔 일방적으로 당하던 상태에서 저항도 심하게 해보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저항의 몸짓을 멈추고 있었고, 더군다나 이젠 생각할 여력같은 것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혀와 얽혀들어가는 그의 뜨거운 입술과 혀만이 느껴질뿐이었다. 입안 구석구석 입천장의 홈 하나하나, 양쪽 볼과 혀밑에 숨어 있는 연약한 속살, 가지런한 치아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샅샅이 탐험하며 훑다가 보드라운 혀를 휘감아 세차게 빨아당기더니 살짜기 입술을 떼어내 턱밑으로 흘러내린 타액으로 혀를 미끌어뜨리며 천천히 목덜미 쪽으로 이동하자 화장실 벽에 손목이 결박된채 기대어져 서 있던 우혁의 몸이 심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손에 의해 단추가 거의 다 끌러져 앞섶이 다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눈처럼 새하얀 속살이 내비쳤다. 어깨에 간신히 걸쳐진 셔츠밑으로 파고든 차가운 손가락이 허리에 놓여지자 순간 우혁이 가는 떨림을 일으켰지만 그에 아랑곳않고 한손으로 우혁의 양손목을 단단히 결박해놓은채 나머지 한손으로는 옷이 벗겨져 싸늘한 내부 기온에 얼어붙어버린 속살에 마치 열을 지펴주려듯 거의 마찰에 가까운 애무를 하다가 조금씩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꼈는지 다시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는 지긋이 등허리를 눌러가며 아주 느릿하게 훑어내렸고 여전히 얼굴위를 배회하던 그의 입술이 날카로운 턱선을 가지런히 따라훑다가 살짝 벌려져 우혁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 짓눌려 있던 몸이 흠칫 떨며 비틀리다가 다시 저항하려하자 순간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집중적으로 우혁의 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귓볼로 입술을 갖다대는 순간 이번에는 확실하게 떨림을 일으키는 우혁을 느끼자 더욱 확신해 손목을 부여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귓볼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아...아-!" 귓볼을 깨물며 핥다가 귓속으로 혀를 밀어 붙이고는 촉촉히 적시자 강하게 부여잡고 있는 손과 짓누르고 있는 몸을 통해 심하게 떨림을 일으키면서도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가는 몸의 열기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었다. "..그 그만...하아.." 한참을 귀와 목덜미 뒤를 전전하며 애무하던 그의 입술이 다시 입술을 덮쳐오자 우혁은 저도모르게 자연스레 입을 벌려, 맞아들인 뜨거운 혀와 뒤엉켜 사정없이 빨아당기며 한참을 격렬히 서로를 탐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하아...." 수그려진 그의 이마가 우혁에게 맞닿은 채로 둘다 연신 가쁜숨을 토해내며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피부위로 생생히 느끼며 화장실벽에 밀착해 기대서 있었다. 우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상태였지만 붙잡고 있던 그의 몸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해 벽에 기대 설수 있었다. 양팔을 우혁의 겨드랑이 밑으로 밀어넣고 다리에 힘이 풀려 늘어지려는 몸을 일으켜 세워 바짝 끌어안자 목덜미에 와닿는 가쁜 숨결이 그의 몸에 화인을 남기듯 뜨겁게 느껴졌다. 한팔로 우혁의 등을 감싸 축 늘어져버린 가냘픈 몸을 자신에게 기대게 한 그는 신음소리만큼이나 자극적으로 들리는, 끊어질듯 말듯한 우혁의 가쁜 호흡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미 옷을 입고 있다기 보다는 간신히 몸을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한 우혁의 흐트러진 모습과는 달리 그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단정했다. 다만 그의 입술을 타고 새어나오는 불규칙한 숨소리와 우혁의 맨가슴에 거칠게 와닿는 교복상의의 들석거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한팔로 우혁의 등을 휘감은 상태로 맨 허리에 놓여져있던 그의 가는 손가락이 앞쪽으로 이동하자 벨트의 은버클을 여는 소리가 찰칵하며 조용한 화장실 내부를 요란하게 울렸고 순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우혁이 다시 긴장하며 몸을 세우려 했으나 밀착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보통 힘으론 않되는 일이었다. 우혁의 등을 감싸고 있던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며 가는 몸을 더욱 바짝 끌어당겨 안자 서로의 목덜미와 귓볼로 생생한 상대방의 숨결이 뜨겁게 느껴질 때 우혁은 혼미한 와중에도 그의 손이 바지지퍼를 내리고 순식간에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느꼈다. "이..이젠 그만둬...대체....학!" 잔뜩 쉬어버린 음성을 내뱉으며 그를 밀어내려던 우혁이 순간 숨을 격하게 들이키며 바짝 몸을 굳혔다. 바지앞섶으로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 우혁의 허벅지 안쪽 보드라운 살을 쓰다듬다가 속옷 위로 올라와 않그래도 예민한 그 부근을 마치 금이라도 긋듯 쭉 미끌어뜨렸기 때문이다. "하아...그...그만..해..." 옷감의 보드라움과 함께 개미가 뼈속을 기어가는 듯한 이상야릇한 감각에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바짝 세운 검지손가락의 손톱으로 속옷위를 긁듯이 움직여가며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를 하며 자극을 가하던 그가 점차 가빠지는 우혁의 숨소리를 듣더니 만질듯 말듯 거의 갖다대지를 않고 마치 애태우는 듯이 가볍게 놀리던 손가락에 갑자기 힘을 주어 거세게 움켜쥐더니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악!!...으....응....." 바짝 경직되버린 우혁이 한순간 숨막히는 신음을 토해내고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타고 주루룩 미끄러졌지만 떠받치고 있던 팔 때문에 미끄러지던 몸은 고스란이 그에게 온체중을 다 실어버렸다. "...이런.....겨우 이정도 가지고....." 나즈막히 큭큭하며 낮은 웃음소리를 귓속에 토해내자 훅하고 끼쳐오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우혁이 몸을 떨었다. 팔을 뻗어 변기 뚜껑을 내린 후 우혁의 늘어지는 몸을 그 위에 앉히고는 앞으로 쏟아질 듯 기대져오는 그를 한동안 가만히 안고 있다가 빠른 손짓으로 미처 우혁이 어쩌기도 전에 그의 옷을 한꺼번에 끌어내리자 완전히 바깥 공기에 노출되버린 속살에 느껴지는 차가움에 혼미해졌던 정신을 서서히 되찾은 우혁이 다시 찰칵거리는 소음에 눈을 들었다. 흐릿한 눈동자 위로 벨트버클을 풀고 바지지퍼를 내리는 긴 손가락이 확대되어 들어왔고 벨트가 풀리자 그대로 아래로 흘러내려버리는 교복바지 속으로 맨다리와 속옷이 드러나는 순간 새파랗게 질려버린 우혁은 그의 손이 다시 속옷위로 올라가자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했다. "무...무슨..짓을 하려는 거야...!!" 충격으로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인해 전달하려는 의사를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우혁을 보며 피식 웃더니 다시 우혁을 밀쳐 변기로 앉히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대로 끝내자는 거야?" "무슨..!! 난 그럴 생각이..." "...기분좋게 해줄게..." "시...싫어!! 놔!!!" 귓볼을 가볍게 문채 속삭이는 음성에 우혁의 몸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그의 가슴을 밀치며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힘에 눌려 몸을 채 일으키지도 못했다. 우혁의 상체를 자신의 몸으로 누른채 무릎뒤를 잡아 어깨에 걸쳐 놓으려하자 순간 우혁이 심하게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그만둬...제발....장난은 그만..." "..이게 장난으로 보여?" 떨리는 턱끝을 잡아 자신과 마주보게 한 그의 눈빛이 욕망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분노때문이었는지 순간적으로 붉은기가 스쳐지나가며 거세게 타올랐다. 그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한 우혁의 물기를 머금은 눈이 사정없이 떨리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이 벌어지자 순간 그대로 다시 입술을 격하게 밀어붙였다. "하아...." 다시금 입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혀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던 우혁은 그가 어깨에 걸쳐놓은 자신의 허벅다리 밑으로 손을 밀어넣어 서서히 들어올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그와의 키스에 완전히 넋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아랫도리가 마비될 정도의 엄청난 고통에 그대로 온몸이 경직되버리고 말았다. "아악!!!!!!!!!..흑...읍-!" 미처 어쩌기도 전에 터져나와버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그의 입술이 급히 삼켜 허공에 그대로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바짝 경직되버린 우혁의 몸은 마치 통나무라도 된것처럼 뻣뻣하기 그지없었고 이런 상태에서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그대로 깊이 파고 들었다가는 끔찍한 고통에 우혁이 견뎌내지 못할거라는건 불을 보듯 훤했다. "이런 바보! 몸에서 힘을 빼!!" 더 이상 비명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입술로 봉쇄하고 있던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몸을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이런 어중간한 상태로 있어봤자 둘다 고통만 더욱 가중될 것이기에 괴롭더라도 이대로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하나 갈수록 더 심하게 떨며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우혁을 보던 그의 눈빛에 순간 단호한 빛이 떠오르더니 경련을 일으키는 우혁의 몸을 꽉 부여잡고 더이상 머뭇거림없이 그대로 거칠게 파고들어갔다. 순간 연한 생살을 난도질하듯 발기발기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무차별적으로 우혁의 몸속을 헤집어놨고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힘에 눌려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우혁의 입속에서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 소리는 바깥으로 채 퍼지지 못한채 그의 입속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몸을 반쯤 세운 자세에서의 섹스란 결코 쉬운게 아니었음에도 꽤 능수능란하게 우혁의 몸속 깊숙히 파고들어가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우혁의 다리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입술밑으로 끊임없이 신음성을 토해내는 우혁을 느꼈지만 입술을 뗀다거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청소시간인데다 이런 외따로 떨어진 화장실로 들어올 사람은 없다곤 해도 잘못하면 비명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더욱 그의 쾌감을 고조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었고 또한 지금 이 모습을 안칠현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얄궂은 생각이 불현듯이 들자 그는 걷잡을수 없이 밀려드는 잔인한 쾌락에 전율을 느껴야 했다. 여전히 우혁의 입술에서 입을 떼지 않은채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나갔다. 마치 파도를 헤쳐나가는 듯 리듬을 타고 앞뒤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지만 우혁은 그가 움직일때마다 고통을 느끼는 듯 흠칫흠칫 떨기만 할뿐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 입술을 살며시 떼어내자 순간 우혁이 격하게 숨을 토해내며 흐느낌섞인 신음을 연신 흘려냈다. "하아...하아....흑.....으...아...파....흑...." "...조..금.만...........참..아...." "아파....흐윽.....아...." 온몸을 쥐어짜는듯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감에 그가 간신히 소리를 내어 속삭였지만 우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연신 눈물을 흘리며 이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새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하아...흑.....아윽......그...그마..." 우혁의 목덜미에 기대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고 그의 몸이 세게 부딪혀 올때마다 뒤로 제껴진 우혁의 머리가 화장실벽에 사정없이 찧었다. "하....아......아읏-!!!"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과 마치 화형을 당하는 듯한 뜨거움 그리고 간간히 전율을 일게 하는 짜릿한 이상야릇한 느낌에 우혁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의 몸놀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격렬해지더니 막바지를 향해 치달려갔다. "윽..!!!" 미처 억제치 못한 환희의 신음성이 토해지며 땀방울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튕겨져나가 사방으로 흘어졌다. 바짝 굳어버린 그의 몸이 파정을 한 뒤 그대로 우혁의 몸 위로 쓰러지듯 축 늘어진 후에도 가슴살갗에 와닿는 뜨거운 숨결은 한참동안 계속됐다. "하악... 하아.. 하아..." 완전히 탈진해버린 우혁은 변기에 몸을 실은채 뒤로 널부러진 상태로 그대로 있었고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그는 화장실 벽뒤로 완전히 목을 꺾은채 축 늘어져버린 우혁을 힘없이 쳐다보다가 풀려버린 다리를 변기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선 후 발목에 걸쳐있는 옷을 입으면서도 우혁에게서 눈을 떼질 않았다. 가냘픈 목이 마치 부러지기라도 한것처럼 들리지도 못한채 뒤로 완전히 꺽여져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온통 땀으로 끈끈하게 젖어 있는 얼굴과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뒤섞여 헝클어져 있었으며 연신 가쁜숨을 토해내는 붉은 입술은 반쯤 벌려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거리는 가슴은 어깨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셔츠 틈으로 땀으로 번들거리며 그 흰 살갗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등뒤로 거의 다 벗겨져 내린 셔츠만 걸친채 난잡해 보일수도 있는 자세로 앉아 있음에도 크림빛 나신은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킬정도로 아름다웠다. 둘다 가쁜 숨을 연신 토해내며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버클을 채우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리고 뭔가를 쫙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이 다 빠져버린 우혁은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상식마저 들지 않고 있었다. 하나 자신의 하체에 와닿는 뭔가 부드러운 감촉에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들자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변기 아래 머리를 숙이고 휴지로 부드럽게 자신의 하체를 닦고 있는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골반 밑쪽을 팔로 휘감아 말라서 여자보다도 더 가벼운 몸을 약간 들어올린 채로 다시 꼼꼼히 정성스럽게 닦다가 뭔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힘겹게 쳐다보고 있는 우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보다도 더 땀에 흠뻑 젖은채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눈가를 가리곤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우혁의 눈은 떨리듯 흔들리며 심한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키스로 촉촉히 젖어있던 입술이 어느새 수분이 다 말랐는지 바짝 메말라 굳게 닫혀 있다가 분홍빛 혀끝이 살짝 나와 아랫입술을 훔치더니 뭔가를 말하려는 듯 미세하게 떨림을 보이는 것을 보며 그는 천천히 머리를 수그렸다. 시선이 마주치며 우혁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설마하는 두려움에 흑빛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한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잡고 있던 허벅지 사이를 더욱 세게 벌렸다. "무슨...뭘하려는...하악!!!!!" 그가 하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다가 예민한 살갗에 와닿는 뜨거운 입술에 순간 숨막히는 신음을 토해야했다. 그의 입술이 휘어지며 묘한 색기를 발하던 눈빛을 바라봤을 때부터 우혁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해야 했다. "..응.....흐읏.....그....그만.....웃...." 차라리 조금전의 살갗을 찢는듯한 고통이 오히려 더 반가울 정도로 그의 입술과 혀는 우혁에게 고문에 가까운 쾌감을 주고 있었다. "아윽....제발......." 발끝까지 전기가 짜르르 흐르는 듯한, 아니 벌레가 뼈속을 파먹고 있는 듯한 아찔한 전율이 온몸을 헤집으며 우혁을 떨게 했고 갈곳을 찾지 못해 허공으로 내뻗치던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닿자 세게 잡아당겼지만 이미 손아귀에서 힘이 다 빠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하악!!! 아윽!!! 그...그마안.....아읏!!!!!" 가는 몸을 활처럼 휘며 경련을 일으키던 우혁은 차라리 죽는게 낫다 싶을 정도로 온몸을 뒤흔들어 놓는 쾌감에 비명을 내지르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으로 막아놓아도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는 화장실 안을 가득채우며 귀를 멍멍하게 했다. "아윽!!!! 아앗!!!! 제바..알....하아악!!!!!!" 입술과 혀를 이용해 쉴새없이 우혁을 몰아붙여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자 오무리지 못하게 힘을 줘 잡고 있던 허벅다리를 놓으니 순간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뒷처리를 다시 깔끔히 한후 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한 듯이 흠뻑 젖어버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쓸어 넘기며 열에 들뜬 얼굴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가락이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듯 시원하게 느껴졌다. 않그래도 흰 우혁의 얼굴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창백할정도로 질려 있었고 감겨내린 얇은 눈까풀이 경련을 일으키자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 정도로 긴 속눈썹이 덩달아 흔들렸다. 한시라도 열어놓지 않으면 숨을 못쉴 것처럼 심하게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붉은 입술이 격렬한 키스로 인해 부풀어올라 있었고 고통에서인지 쾌락에서인지 모를 눈물이 연신 눈꼬리를 타고 흘러 귓볼을 적시자 그는 입술을 내려뜨려 물기젖은 긴 속눈썹과 눈까풀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보드랍고 촉촉하게 그를 건드리는 입술로 인해 나른한 피곤을 느끼던 우혁은 하체에 느껴지던 통증이 마비가 됐는지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있었지만 살짝살짝 와닿는 입술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눈물과 땀으로 흥건히 젖어든 얼굴 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물기를 닦아주듯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뽀얀 이마위의 병아리털같은 솜털들 위를 내리눌러가며 땀방울을 흡수하던 그의 입술이 쭉뻗은 콧등을 타고 내려왔다. 작은 콧등과 콧망울에 입술을 부비며 살짜기 입안에 머금어도 보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삼킬것처럼 베어물어보기도 하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곤 해도 그 입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명한 핏빛꽃망울인듯 서서히 접근해 위의 꽃잎도 머금어보고 아랫꽃잎도 살짜기 깨물어보며 굳게 닫힌 성문틈을 혀로 살짝 살짝 건드려보기도 한다. 방금전까지 강제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탐하던 그 입술인가 의심이 갈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에 우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조금 벌렸고 간신히 허락된 성역에라도 들어가는 듯 조심스럽게 들어선 말캉말캉한 혀가 잠자고 있는 우혁의 혀를 톡톡 건드리며 호응해주길 요청했다. 우혁의 입술이 더 벌어지며 그의 혀에 휘감겨 서로 타액을 주고받으며 얽혀드는 순간 그 달콤함과 촉촉함에 정신이 나른해져왔다. -7- # # # 이렇게 될수밖엔 없었을까.... 피해갈수 있을수도 있었을텐데... 우린...왜 이렇게 만나야 했을까..... 우혁은 자신의 몸을 조심스레 부축해 일으켜 세운 그의 몸에 기대선채 그가 옷을 입혀주는대로 가만히 아기처럼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완전한 탈진상태로 모든 것을 다 잊은채 오직 자신의 얼굴에 와닿는 그의 입술과 부드럽게 아기를 달래주듯 온몸을 구석구석 쓰다듬는 그의 손길만을 감미롭게 느끼던 우혁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벨소리에 순간 흠칫했다. 그 벨소리가 청소시간을 마치는 종소리란 것을 우혁이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체육관에 딸린 화장실에서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애에게 끌려들어와 처음보는 사이임에도 깊은 관계를 맺어버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매달린채 쾌락에 젖어 연신 신음을 흘려대며 몸부림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순간 우혁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다시 붉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우혁의 감정변화를 못느낄 그가 아니었다. 또한 그의 혼란한 심정까지도 그는 알수 있었다. 우혁을 가슴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등뒤로 감은 팔에 힘을 준 그는 자신의 몸을 밀어내는 우혁을 느끼며 순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가슴위로 양손을 올린채 밀쳐내던 우혁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왜.....이런...." "왜 너와 섹스를 했냐고?" 차마 묻지를 못하고 주저하듯 망설이던 우혁과는 달리 그는 노골적으로 직설적인 말을 했다. 순간 우혁의 몸이 그대로 경직되며 그의 가슴위에 올려진 주먹이 세게 그를 밀쳤다. 치욕과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혼합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폭발할것만 같은 우혁이 격하게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우혁보다 월등히 키도 크고 몸도 좋은 그의 힘에 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우혁의 허리에 걸쳐놓았던 양손에 바짝 힘을 주어 자신의 몸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몸에 바짝 닿게되자 우혁이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다. "날 느껴." 너무나도 조용한 음성에 우혁은 몸부림을 멈췄다. 저도모르게 고개를 든 우혁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와 눈길이 마주쳤다. 너무도 강렬한 눈빛에 견디지 못한 우혁이 고개를 돌리려하자 그가 한손으로 우혁의 턱을 잡고 돌리지못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곤 나머지 한손으로 우혁의 작은 엉덩이를 잡아당겨 바짝 자신의 하체에 밀착시켰다. 순간 혼돈과 분노로 얼룩졌던 우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상기되며 어쩔줄 몰라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나 우혁의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손도...히프를 휘감고 있던 손도 전혀 미동을 않은채 더더욱 자신쪽으로 잡아당겨졌다. 바늘하나 들어갈 틈도없이 밀착되버린 하체를 통해 다시금 노골적으로 흥분되 있는 그의 욕망을 생생히 느껴버린 우혁은 차마 그가 이런식으로 표현할줄을 몰랐던지라 어쩔줄 모르며 당황했다. "놔.....놓아..줘...." "왜....더럽니? 창피해?" 비웃는듯한 그의 음성에 발끈한 우혁이 고개를 숙이지 못해 내리깔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본순간 다시금 후회해야했다. 강렬하게 찌를 듯 우혁을 쏘아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욕망으로 검게 변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우혁은 차마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감았다. 그의 손에 잡힌 우혁의 턱이 파르르 떨림을 일으켰다. "어..어쩌자는거야....우린...오늘 첨 만났잖아....난...이름도...." "이재원이야. 내이름은. 넌 장우혁이고. 그리고 난 이런저런거 따지지 않아. 내가 원하면 어떤것도 날 막을순 없어. 그런 가식적인 행동따윈 하지 않아. 적어도 난 내 감정, 내 욕망에 충실해. 이게 잘못된거니?" 바늘로 찌르는 듯 날카로워진 이재원이란 이름을 가진 그의 목소리에 우혁은 몸을 떨기만 할뿐이었다. 재원의 비상식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혁은 재원보다는 자신이 오히려 더 이해가 않갔다. 어떻게 처음 본 남자에게 강하게 반항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관계를 맺을수 있단 말인가. 또한 저도 모르게 흥분해버려 쾌락에 젖어 여자마냥 교성을 질러대다니. 재원이 입술로 계속 막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체육관 복도까지 우혁의 열에 달뜬 신음소리가 울려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섹스를 통해서 이런 쾌감을 얻을수 있다는것조차 몰랐었다. 또한 단 한번의 관계로 이렇게 미칠듯한 쾌감을 느껴본 적은 결단코 절대로 없었다. 그와의 잠자리에서조차도..... 순간 우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지며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수가....내가 어떻게.....' 재원은 뭔가 이상해지는 우혁의 반응에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약간 느슨히 해 그에게서 몸을 약간 떼어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우혁을 내려다본 재원은 공포로 잔뜩 질려서 얼어붙은 우혁을 보고 순간 얼굴을 굳혔다. '뭐야....장우혁....이렇게 겁에 질릴정도로.....싫었단 말이야?' 재원의 차갑게 변하던 표정에 뭔가 단호한 결심의 빛이 떠오르더니 순간 재원은 조금전 아쉬움속에서도 우혁이 추울까봐 꼭꼭 잘 입혀줬던 그의 옷을 빠른속도로 다시 벗겨내기 시작했다. "뭐..! 무슨 짓이야! 그만둬!" "가만 있어!!!" 저항하는 우혁의 몸을 짓누르며 재원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단추가 잘 열리지 않자 분노로 조급해진 재원의 손가락 힘에 걸려 우드득 단추들이 뜯겨나가버렸다. 한순간 놀라 멍해져버렸던 우혁은 잊고 있던 일을 자각해버린 이상 두 번다시 이런 일이 발생해선 않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하게 발버둥치는 우혁의 몸 때문에 원하는대로 우혁을 통제하지 못한 재원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우혁을 양팔을 부여잡고 벽으로 세게 밀쳐버렸다. "헉!" 벽에 세게 부딪힌 우혁이 숨막힌 신음성을 토해냈지만 재원은 결코 그를 짓누르고 있던 힘을 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로 황급히 얼굴을 갖다대던 재원은 순간 멈칫하며 그대로 멈춰야 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한채 미세하게 떨고만 있는 우혁의 두눈은 공포와 번뇌가 뒤섞여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뜻밖의 반응에 재원이 멈칫한 사이 우혁의 입술이 벌어졌다. 살짝 벌려진 붉디붉은 꽃봉오리같은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난 오늘.....엄청난 실수를....했어....." 떠듬떠듬 떼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재원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일그러졌지만 다음에 이어진 우혁의 울음섞인 숨가쁜 말에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난....난.......하아..처음으로.....느껴버렸어..... 처음만난...주제에....해서는 않될 일을....해버렸어....." 우혁의 반응을 오해하고 분노하고 있던 재원의 노기가 순식간에 사르륵 녹아버리며 재원은 그대로 우혁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포근히 감싸안았다. 우혁의 촉촉히 젖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재원의 눈빛이 다시금 부드럽게 풀려버렸다.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가며 기분이 뒤바껴버린 재원은 짜릿할정도로 환희에 가득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게 처음 봤을 때부터 순식간에 온정신을 빼앗길정도로 갈구했던 상대방으로부터 남자가 들을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방금전에 들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아무리 자신만만하고 능숙한 사내라도 연인을 만족시킬수 있을까 하는 의심에 불안하기 짝이없는 첫관계에서... 게다가 이전엔 결코 쾌감을 얻은 경험이 없다던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즐거웠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된 남자라면 제정신을 유지 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래서 재원은 오럴섹스까지 할정도의 대담함은 어딘가로 내팽겨쳤는지 그 한마디에 의외로 수줍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인채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며 우혁을 감싸안고 있는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연신 우혁의 허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그를 달래고자했다. 그리곤 자신의 목덜미를 축축하게 적셔오는 우혁의 눈물을 느끼며 재원은 그의 귓볼을 살짜기 깨물며 귓속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재원의 날카롭던 음성이 느슨하게 풀려 허스키하게 들려왔다. "그건 실수가 아냐. 우혁아. 너와 나사이에 일어난 일은..... 제발.....더러운짓이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줘. 우린 서로 솔직했을 뿐이야... 사실 이런곳에서 너와 첫관계를 맺고 싶진 않았지만....널 일주일전에 처음 봤을 때부터 난 심한 갈증에 시달려야했어....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와 같이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만....미안...우혁아..놀랐다면 사과할게. 나와함께 같이 가자. 우혁아. 내가 널...." "아니야!!" 재원의 팔에 안겨 부드러운 그의 음성에 취해 있던 우혁은 다시금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한 영상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재원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재원은 그를 놔주지 않고 더욱 힘을 주어 그를 품에 안았다. "부정하지마. 이건 언젠간 일어날 순리였을 뿐이야" "흑...으윽...그래선...않돼.....난.....난......" "알아. 너한테 내가 처음이 아니란거. 이전에 너한테 누가 있었건.. 또 네가 누굴 사랑했던 난 아무상관없어. 날 이용해도 좋아. 내가 너에게 즐거움을 줄수 있다면.....내몸을 이용해도 돼... 너만 내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만약 안칠현을 걱정하는거라면 염려하지마. 나역시...." 우혁의 저항에 약간 딱딱하지만 여전히 부드럽게 속삭이는 재원의 음성에 서서히 몸에서 힘을 빼고 있던 우혁은 '안칠현'이란 단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런 우혁의 반응에 재원이 안타까워 뭐라 말하려했지만 우혁이 더 빨랐다. 이제 우혁의 목소리는 이이상 침착할수 없을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넌....아무것도 몰라....내가 실수했다는 것은......" ".....우혁아?" ".......내가....실수라고 한 것은....만약에.... 네가....날.....가졌다는 사실을...알게되면.... 넌.....넌......결코....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거야...." 다시 공포에 젖어드는 우혁의 표정에 누군지도 모를 그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재원은 우혁의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혁이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누가 알게되면 그렇다는거야?!!" 다시금 버럭 고함을 지르는 재원의 성난 눈빛에 시선을 맞추는 우혁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유난히 빛을 발해 반짝거렸다. 그 때문에 우혁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던 재원이 어느결에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굳게 닫혀 있던 붉은 꽃봉오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자 재원은 그뒤에 나올말에 웬지 모를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리고 재원은 우혁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귀에 익은 하나의 이름에 그대로 차갑게 굳어버렸다. "난.....안칠현의 형인.....안승호의.......애인이야....." -8- # # # 난 분명코 저주받은 운명임에 틀림없다고 느껴왔어. 어느것이든 나의 선택이란 있을수 없었어. 난 이미 시작부터 어긋났던 거야.... 그의 어머니는 바다건너에서 왔다고 한다. 낯선 이국에 대한 호기심에.... 책으로만 전해지던 동양의 신비에 끌려... 금발머리 푸른눈동자 백설처럼 하얀피부의 소녀는 무엇에 홀린듯이 이땅으로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비로운 이국의 풍취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어쩔수 없이 이루어진 운명적인 만남.... 피부가 틀리다 해도... 눈동자빛이 다르다 해도... 언어가 틀리다 해도...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 이둘의 사랑을 시기라도 한 듯..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파국이 그들에게 너무나 빨리 닥쳐왔다. 소녀를 매혹시켰던 이국의 청년.... 그 청년이 차사고로 혼수상태가 되던날.... 소녀는 아무도 아는이 없는 낯선 타국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와주길 애타게 기다리며... 소녀를 그대로 빼닮은 허약한 아기를 낳고 있었다. 몸이 약해 목숨을 걸고 낳아야 했던 둘만의 아기.... 결국 사랑하는 이가 어찌 됐는지도 모른채... 와주지 않는 그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다가..... 낯선 타국...아무도 아는이 없는 쓸쓸한 곳에서... 소녀는 꺼질 듯 움켜쥐고 있던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남겨진 것은 어미 대신 생명을 얻은... 너무나도 가냘프고 허약해서 살기 힘들거라던... 눈보다도 더 희디희던 아기.... 어미의 그것보다 유난히도 더 밝은 보송보송한 백색에 가까운 금빛머리칼... 맥이 없어 -빽 울음을 터뜨려 태어났다는 신고식도 못한채... 파랗게 질린채 숨도 제대로 못쉬어서 인큐베이터속에 줄이 주렁주렁달린 호흡기를 끼고 있어야 했던 아기... 꼭 감겨져 있는 눈까풀이 힘겹게 들리고 드러난 눈망울은... 어미의 것과는 틀린.... 까맣디 까만....검푸른 신비.... 보이지도 않을 그 눈망울이 빤히 바라볼 때 어느누가 감히 그앞에서 오욕칠정을 느낄수 있겠는가..... 시퍼렇게 죽어 있던 입술이.. 본래의 색이었을 장미빛을 조금이나마 되찾았을때.... 아기는 소문을 듣고 간절히 그를 원하는 어느 부호의 집으로 보내졌다. 아기의 신비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그 깨끗한 투명함이... 차마 함부로 아무곳에나 아기를 보낼수 없게 했다. 보내는 사람도.... 아기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기가 오래 살거라곤 기대치도 않았다. 그만큼 아기는 오늘내일 할만큼 약하디 약했다. 그 아기가 만약 살아 있다면... 정말...하늘의 축복으로 아기가 건강해졌다면.... 그 아기는 태양을 닮은 머리카락을 지닌.... 18세의 아름다운 남자아이로 성장했으리라..... 그 아기가 살아 있다면..... -9- # # # 단한순간도 널 놓을순 없어. 널 놓는 순간은 내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일 뿐이야. 하지만 결코 혼자 남겨두지 않아. 마지막까지 넌 나와 함께할 테니까. "그래서....?" 방안을 울리는 나즈막한 음성은 그사람의 기분을 가늠하기 곤란할정도로 감정이 베어있지 않았다.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내가 올림피아드경시대회에 출전하러 잠시 나갔던 사이에 선생이 물품정리를 시켰던 모양이라고 했잖아!" 또 한명의 목소리는 계속되는 추궁에 지친 듯 짜증이 베어 있었다. 하지만 그역시도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약간은 조심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가죽쇼파에 기댄채 들고 있는 와인잔의 핏빛액체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지친표정이 역력한 칠현이 앉아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칠현은 그가 들여다보는 것이 와인인지 와인잔인지 아니면 그위에 떠올라 있을 그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건지 분간이 않갔다. 하지만 저렇게 범인이라면 결코 눈치챌수 없는 숨막히는 기운을 내뿜는 현재 그의 기분이 근래들어 최악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칠현은 이럴때의 그의 신경을 건드려봤자 득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저조한 기분에 자신도 한몫 일조한 점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칠현의 자격지심때문이었다. "젠장. 그만 좀 화내. 누구 숨막혀 죽는꼴 보고 싶어? 형이 그러니깐 쟤가 더 그러잖아!" "뭐라고?" 승호의 말투가 송곳같이 날카롭게 파고들자 - 타인이 듣기엔 그냥 평범한 음성으로 들리겠지만 - 칠현은 아차했다. 건드려선 않될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칠현은 와인잔에서 시선을 들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 타인이 보기엔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 승호의 눈을 슬며시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꼭 그렇다구 했나? 형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했을 뿐이야. 쟤 기분 수시로 바뀌는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이었어?" 칠현의 말에 승호는 한순간 정말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감정에 의심을 가져보는 것은 평소의 그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어쩌면 자신이 칠현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하지만 승호의 예민한 신경은 무언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분명 겉모습은 학교에 가기 전이나 학교에 가게된 후나 변함이 없었음에도 무언가 우혁에게서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갑자기 다르게 느껴지는 우혁의 변화와 관련있는 시간은 칠현이 유일하게 놓쳐버린 1달전의 그 시간과 뭔가 연관이 있다고 승호의 예감은 말하고 있었다. "청소시간에 물품정리를 했다고?" 다시금 되풀이되는 승호의 질문에 칠현이 울컥하며 퉁명스레 외쳤다. "그래! 어쒸! 몇번을 물어!! 체육관에서 물품정리 했대잖아!!!!" 순간 승호의 눈빛이 확 변해버렸다. 승호만큼이나 민감한 체질인 칠현은 갑작스레 변화된 공기의 흐름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이젠 어느 누가 보더라도 안승호의 모습은 마치 킬러가 살인목표를 앞에 두고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고 있는 듯이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뭐야.....?" 살기어린 눈으로 쏘아보는 승호의 눈빛은 동생을 보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마치 마음내키는대로 죽고 살릴수 있는 사냥감을 앞에 둔 재규어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이전에 딱 한차례 이런 모습의 승호를 본적이 있는 칠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체육관?" "뭐? 무슨......헉!!"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칠현이 순간 숨을 급히 들이켰다. 분명 자신은 우혁이 청소시간에 물품정리를 했다고만 말했지 그 장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과 같이 교실에서 했는지... 아니면 따로 다른 장소로 나뉘어져 청소를 했는지...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칠현은 우혁이 체육관 물품청소를 했다는 얘기를 흘려 들었었고 그의 머릿속에 내장되 있다가 잊고 있던 그 얘기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칠현의 등뒤로 소름이 오싹 돋으며 식은땀이 베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잊고 있었어....하지만 그렇게 신경곤두세울 것 없어. 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안칠현.....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너무나도 조용한 음성은 방금전 살기어린 눈빛을 띄고 있던 사람에게서 나온 목소린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분명히 승호의 기분은 밑바닥을 기고 있음에 틀림 없었기에 칠현은 어물거리며 슬쩍 넘어간다는건 바랄수도 없다는걸 알고 있었다. "젠장! 난 뭐 아무 대책도 않세우고 갤 혼자 놔두고 간줄 알아?! 나한테도 방법이 있으니깐 제발좀 의심 좀 고만해!" "의심....이라고?" "그래! 형이 이러는거 우혁이가 알아봐! 또 우혁이 말라 비틀어지는 꼴 보고 싶어?!!" 분명 안승호를 이렇게 조급하게 만드는 것도 장우혁이었고 이런 안승호를 누를수 있는 것도 장우혁이었다. 1달 가까운 외국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우혁이에게 뭔가 변화가 있다고 느낀 승호가 추궁 끝에 알아낸 칠현의 눈에서 벗어났던 그 시간 때문에 이렇게 승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진 것이다. 하나 또한 이런 승호의 기분이 '장우혁이 싫어 한다'라는 말이면 바로 해결된다는 것 또한 칠현은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우혁 때문에 이렇게 난리법썩을 피우면서도 또한 우혁 때문에 이대로 끝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승호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입에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서재를 나서는 승호의 뒷모습에 칠현은 안도의 한숨을 소리없이 내쉬었다. "우혁이한테 가게?" ".....그래.." "잘텐데....뭐하러?" "......안칠현. 참견이 지나쳐 너" 서재문을 반쯤 열던 승호의 몸이 멈칫하며 동작을 정지시키자 칠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알았어!! 그놈의 성질하고는. 우혁이 요즘 잘 못자니깐 깨울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그럴 생각도 없어!" 오늘 처음으로 약간 톤이 올라간 음성으로 말하며 문을 소리나게 쾅 닫아버리는 승호의 모습에 칠현은 큭큭거리며 웃어버렸다. 조금전의 긴장됐던 기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장우혁에 대해선 어쩜 저리 눈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하는지 칠현은 피식 웃음이 세어나왔다. 1달전에 유일하게 칠현의 눈에서 2시간 정도 우혁이 벗어났긴 했지만 그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체육관의 청소담당은 5명이 배정되었으니 승호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칠현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칠현이 경시대회에서 돌아와 교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우혁을 데리고 왔을때까진 별 의심이 없었다. 다음날 자신이 없었을 때 대청소가 끼여 있었고 체육관으로 우혁이 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엇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나 그 5명의 명단에 이재원이란 이름이 끼여 있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된 칠현은 못내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우혁을 처음봤을때의 재원의 시선은 결코 기분좋은 눈빛이 아니었다. 다만 칠현이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은 우혁에게 별다른 점도 없었고 - 승호는 틀리다고 주장하지만 - 우혁에게 관심을 보이던 첫날을 제외하곤 이재원이 우혁을 두 번다시 쳐다보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남몰래 그를 주시하고 있던 칠현은 그가 우혁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마침내 확신을 내렸다.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혁에게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다.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이전보다는 잠을 푹 못잔다는게 유일한 변화라면 변화일까.. 승호가 의심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지금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우혁을 볼수는 없었을 것이다. 칠현은 과거의 그 진절머리나는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때의 일은 더 이상 머릿속에 남겨 두고 싶지도 않았다. -10- # # # 널 살릴수도...죽일수도 없는 것은.... 오직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져버린 바보...... -똑똑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던 사내가 멈칫 문앞에서 멈춰섰다. 열린 방문틈으로 빛한점 없이 컴컴한 방안풍경이 비췄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잠시 어둠에 익숙해질때까지 가만이 서 있던 그는 이내 사물을 분간해 낼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방안의 주인이 앉아있으리라 짐작되는 책상앞까지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높은 등받이의 의자팔걸이에 놓인 그의 팔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치는 움직임은 웬지모르게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던가..." 약간 잠겨든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지만 방안이 워낙 조용해 충분히 들을수 있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저택쪽으로는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만들어놨습니다" "........" "저택 반경 2km 내로 높은 담장이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담장 안팎에는 사람도 물어죽일수 있게 훈련된 도사견들과 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잠시 말을 멈춘 사내는 자신이 보고 왔던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다시 설명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정문을 통과한 후의 일입니다. 정문에서 저택까지의 2km 정도의 공간에 나무 한그루조차 심어있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역시....머리가 좋은 놈이군" "교활한 놈이지요. 오직 자동차로밖에 이동을 못하게 만들어놨습니다" 팔걸이를 두들기는 사내의 손짓이 조금 조급해졌다. "저택내부에는 그 세사람과 안승호의 심복인 에릭밖엔 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고용인들뿐 만 아니라 경호원들까지도 저택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아마도....'그' 때문인 듯 싶습니다." "음...." 사내가 나즈막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그의 팔이 구부러지며 손가락을 깍지꼈는지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군.....결국....." "네. 시도하려한다면 그날만이 기회입니다. 그또한 수월치는 않습니다만 학교에서조차 여의치 않으니 기회는 그때밖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어쩌고 있나" "........"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계속 그 상태란 말인가?" "......네. 학교에만 갖다오시면....." 사내의 손이 의자를 내리쳤다. "바보같은 놈! 하필이면 왜 그런 아이란 말인가....." ".........." "원하기만 하면 품에 안길 여자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쯧쯧.....한심한 녀석....." "하지만.....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입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던가......" "예. 지난 2주간 관찰한 결과 틀림없습니다" "....못난 녀석....그 얼어붙은 마음을 열어준 사람이... 그래...여자도 아니고 겨우 어린 소년이란 말인가... 자네가 보기엔....그래 그 소년이 어때 보이던가... 그 냉정하기 짝이 없는 안승호와...... 그 아이가 그렇게 마음을 뺏길만한 구석이 있던가?"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연약해 보이는 소년이었습니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허어-! 자네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지 못하겠군. 그렇단 말인가..." "도련님의 마음은 진심인 듯 했습니다" "걱정말게......내가 뭐란다고 들을 애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네. 결국.....어쩔수 없군" "......결정하셨습니까?" "그래야겠지. 더 이상 그아이가 망가지는 모습은 볼수가 없군. 안승호 그놈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곤 해도 이쪽과 연관을 짓지는 못할테니까" "하지만.....소문에 듣기엔....그...소년에 관한한은.....안승호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계야. 강한자가 빼앗는 것은 죄가 않되는 세상이지" "도련님께는...." "일이 다 해결될때까지는 알리지 않는게 좋겠지. 그 소년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걸 알게되면 가만있지 않을테니깐" "네. 알겠습니다" "적어도 1주일 이내에 모든 준비를 맞춰야 한다는걸 명심하게" "네. 맡겨주십시요" 등뒤로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두컴컴한 방안에 홀로 남은 사내는 나즉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승호....이것으로 완전히 갈라지는건가...네놈이 혹시라도 알게된다 하더라도....경거망동 하지 말기를 바랄뿐이야.....가엾은 그애를 위해선...무슨 짓이든 할수 있으니까.' 딸깍거리며 열리는 문소리에 승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혹시라도 깊게 잠을 자지 못하는 우혁이 깼을까 귀를 기울여 방안의 동정을 살피던 승호는 조그맣게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침대옆에 켜놓은 스탠드의 불빛에 의지해 몸을 움직이는 승호의 모습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침대가로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승호는 널찍한 침대위 시트속에 폭 파묻힌채 잠들어 있는 우혁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 때문에 항상 스탠드의 불을 켜놓아서 이렇게 우혁이 잠이 들었을때도 그의 얼굴을 훤히 볼수가 있었다. 학교에 가는 바람에 물들인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위로 흘러내려 눈위를 가리고 있었다. 처음 그 아름다운 금발을 가려버려서 얼마나 칠현에게 화를 냈던가...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염색을 한 것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도 불안한데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내보낸다면 아마도 승호는 전혀 아무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혁을 위해서도 그래선 않된다는걸 알기에 그를 학교에 보낼 결심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혁이 집밖에 나가 있다는 걸 생각할때면 승호는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진정이 되질 않았다. 우혁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승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긴 속눈썹은 한치의 미동도없이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고 붉은 입술은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계속 옹알거리며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훤한 대낮에 보면 창백할정도로 투명한 하얀 살빛이 어둑어둑한 불빛에 반사되어 따스한 크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로 정교하게 만든 인형같아서 만지면 깨질까봐 차마 건드릴수조차 없었다. 잠시 우혁의 잠든모습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뚫어지게 응시하던 승호는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예기치 못했던 비상사태가 일어나 외국으로 갔다오는 바람에 벌써 1달이 넘게 우혁과 잠자리는커녕 제대로 그를 안아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우혁이 않그런척해도 뭔가 그를 꺼리는 듯한 기색이 무의식중에 드러날때도 있어 승호는 내심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옆에 있는 우혁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승호는 마음속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떨쳐낼수 있었다. 우혁을 만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승호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저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는 붉디붉은 입술의 달콤함을 맛보고 싶었다. 실크보다 더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며 그의 몸속깊이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그의 몸을 꽉 부둥켜안고 그 가녀린 몸의 떨림을 생생히 느끼고 싶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를 마시고 싶었다. 무정한 말밖에 하지 않는 저 입술사이로 고통으로 부르짖는 비명소리를...헐떡이며 내뱉는 신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억제하며 승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우혁에게 하루라도 빨리 섹스의 즐거움을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우혁은 고통밖엔 느끼질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승호는 우혁과의 잠자리에서 극치의 쾌감을 느끼면서도 좌절감과 안타까움, 상처받은 자존심까지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우혁이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참다참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혁을 괴롭히게 될 때는 승호 또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갈수록 승호가 우혁을 안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 게 되었다. 그게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는 일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지금이순간도 승호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급히 방을 나서는 것이다. -11- # # # 제발.... 이대로 눈이 보이지 않을수만 있다면.... 보지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네 모습을 볼수 없을텐데.. 제발... 이대로 귀가 들리지 않을수 있다면..... 소음속에서도 뚜렷이 들리는 네 향긋한 숨소리를 들을 수 없을텐데.... 제발... 이대로 숨을 쉬지 않을수 있다면..... 온몸으로 널 향해 부르짖는 나를 느끼지 않아도 될텐데..... 제발.... 널 잊으란 말을 듣느니.... 차라리 네 무정한 손길로 부디 자비롭게 내 숨통을 끊어줘....... 제발..... 종례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여기저기서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음으로 가득찼다. 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기대선채 가방을 챙기는 우혁을 내려다볼때 옆쪽에서 거칠게 의자가 밀쳐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칠현의 아미가 살풋 찌푸려졌다. '이재원....' 전날부터 그의 뇌리속에 계속해서 맴돌던 의구심에 오늘 학교에 와서 우혁과 재원을 관찰해본 결과 칠현은 상당히 기분이 껄쩍지근 해졌다. 책상줄 사이의 통로 하나를 경계로 팔을 반정도만 뻗쳐도 손이 닫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우혁과 재원은 겉보기엔 별다른 점을 발견할수 없었다. 하지만 칠현은 그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달동안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하나하나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수업중에는 둘다 칠판과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휴식시간이 되면 이재원은 자리에 붙어 앉아 있질 않았다. 또한 실수로라도 서로 고개를 상대방쪽으로 마주 돌리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 물건을 떨어뜨려 상대방쪽으로 굴러가더라도 시선조차 주질 않는 것이다. 재원은 몰라도 우혁의 성격으로 봐선 저절로 손을 뻗어 줏어줄수도 있을텐데도 전혀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우혁이나 재원은 않그런척 해도 칠현은 둘중의 누구 하나가 교실을 나가게 되면 남은 사람은 안도하는 기색을 뚜렷이 느낄수 있었다. 어떻게 1달동안 이둘사이의 이는 긴장감을 알아채질 못했단 말인가? 설마 정말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칠현은 가방을 어깨에 걸쳐매고 교실문을 빠져나가는 이재원의 기다란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아는 이재원은 모범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나가는 날라리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나 평범하다는 표현은 사실 맞지 않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키와 바싹 마른 몸매, 어딘지 우혁과 비슷해 보일정도로 창백한 얼굴과 쌍가풀없는 날카로운 눈매는 주의해 보지 않더라도 모델 뺨칠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는 걸 알수 있었다. 단지 이재원은 그런쪽으론 무신경했는지 잘 꾸미지도 않았고 또래의 남자애들처럼 머리나 복장에 신경을 쓰는 편도 아니어서 잘 보지 않으면 사실은 남자치곤 선이 고운 외모가 많이 가려져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모습 말고도 이재원이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증거는 꽤 여럿 있었다. 언젠가 칠현이 하교길에 우연히 보게된 교복을 벗은 이재원은 폭주족들과 함께 어울려 바이크를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헬멧을 벗어 들고 있었기는 해도 동료가 이재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로 재원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낯설었다. 또 그날 알게 된 사실 중의 한가지는 어쩌면 이재원 또한 자신과 비슷한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재력과 권력이 넘쳐나는 집안출신. 그 증거는 주변의 폭주족들이 타고 있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재원의 바이크였다. 자동차나 바이크에 꽤 관심이 많은편인 승호때문에 칠현도 어느 정도는 그 종류를 알아보는 편이었다. 그래서 재원이 타고 있는 바이크가 싯가로 거의 억단위에 가까운 국내 몇 개 없는 것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재원은 전혀 그런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범한 학생. 틔지도 않고 틜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그냥 시키는대로 학생의 본분에만 충실하는 학생. 그것이 이재원의 모습이었다. 하나 칠현은 이재원의 다른 모습을 이미 보아버렸기 때문에 평범해 보이는 그런 모습들에 괜히 신경이 쓰였었다. 게다가 학교주변의 주먹패거리들을 눌러버릴만큼의 주먹을 갖고 있으면서도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그 수십명의 폭주족들 속에 있던 이재원은 그 무리를 이끄는 '짱'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이상하게도 학교내 폭력써클과는 결코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시비붙일 일도 만들지 않았다. 그런 이재원의 모습은 칠현에게 그가 자신을 숨기려 한다는걸 알게 해주었다. '이재원....왜 하필 너냐..' 이미 문틈으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는 재원의 뒷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있는양 칠현은 계속해서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하나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서는 우혁 때문에 칠현은 잠시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앞장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알게 모르게 날이갈수록 헬쓱해지는 우혁을 상기하며 칠현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이런기분.....불길해....왜 이렇게.....마음이 불안하지? 꼭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빠른 걸음으로 교문에 가까워지던 칠현과 우혁의 귀에 도로쪽에서 무언가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칠현과 역시 마찬가지로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우혁이 고개를 동시에 들고 전면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10여대 정도의 오토바이 에 타고 있는 폭주족들과 막 어떤 녀석의 뒤에 올라타는 교복차림의 재원의 모습이었다. 교문을 빠져나가던 학생들이 모두 멈춰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었고 칠현과 우혁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둘씩 오토바이들이 요란한 소음을 일으키며 출발했고 마지막 오토바이가 떠나려 할 때 순간 재원이 흘끔 교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주위에 똑같은 교복차림에 비슷비슷한 모습들의 학생들이 널려 있었음에도 재원의 시선이 정확하게 우혁에게 꽂힌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오토바이에 타는 재원의 모습에 당황한 우혁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고 재원의 눈길이 우혁에게로 향해 있다는걸 알아챈 사람은 역시 그 범위내에 있던 안칠현이었다. 하지만 재원역시 우혁의 옆에 서 있는 칠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지 눈길을 외면하는 우혁의 모습을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재원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얼굴을 돌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재원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마지막 오토바이까지 요란하게 떠나버리자 구경하고 서 있던 학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며 교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칠현과 우혁은 그 자리에 멈춰선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각자 다른 의미로 당황해하던 두 사람은 기다리고 서 있던 경호원들이 가까이 다가왔을때야 비로소 발을 뗄수 있었다. -12- # # # 절대로 잊지 말아줘.... 나와의 시간들을.....없었던 것처럼 할순 없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테니까..... "야..뭔일 있냐?" ".......뭐가-" 어느새 교복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재원이 비스듬이 쇼파에 기대며 맥주병을 입에 갖다댔다. 고개를 젖히고 꿀꺽꿀꺽 쉬지 않고 들이키는 그의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가며 목젖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벌써 몇병이나 마셨는데도 갈증난 사람마냥 술을 퍼붓는 재원의 모습에 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너 학교에 애들이 바이크 타고 오는거 싫어했잖아" ".......항상 똑같으란 법은 없어" "그건 그렇지.." 빈 맥주병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재원은 다시 따지않은 새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라운지로 나가 지세상을 만난양 몸을 흔들어대던 녀석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민우와 재원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혀 제대로 의사전달이 되지 않자 연신 팔을 휘둘러대며 이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않그래도 쿵쾅거리는 음악소리 때문에 흥분되있던 민우는 재원을 흘끗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무슨 일인진 몰라도 한바탕 흔들면 풀려" "........됐어" 두 번은 말하지 않는 재원의 성격을 잘 아는 민우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춤추는 사람들 틈속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말시키던 민우가 사라지자 술을 들이키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탁자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술병들이 어느새 거의 다 비어져 빈병들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잠시라도 잊을수 있을까 하여 쉴새없이 술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어도 머릿속은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지는 느낌에 재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술을 마시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모든걸 다 잊을수 있다고.... 그런 거짓말을 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때려눕히고 싶었다. 밤마다 꿈속에서 그를 괴롭히는 그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을 침투해오자 재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를뿐이었다. 벌써 1달이 넘었음에도 마치 어제...아니 방금전에 일어난 일인양 재원은 그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해낼수 있었다. 달콤하고 격정적이던 입맞춤.... 바르르 떨리던 가느다란 몸.... 그대로 녹아내릴것만 같은 부드러운 감촉... 어쩔줄 몰라 그에게 매달려 울던 가녀린 신음소리..... 학교에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재원에겐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도 더 이상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것은 재원을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강제로 갖고자 한다면 그날 체육관에서처럼 그를 가질수 있다. 안칠현의 눈을 속이기란 재원에겐 식은죽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재원의 집안에는 아름답고 부유한 여자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재원보다 연상의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도 키가 훌쩍하니 큰 미소년인 재원에게 일찌감치 눈독을 들였다. 중학생때 이미 첫경험을 가져버렸을 정도로 재원에게 달라붙는 여자들은 많았고 재원에게 셀수도 없을만큼의 성적 테크닉들을 가르쳐준 것도 모두 연상의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재원은 더 이상 사랑이 없는 오직 섹스만을 위한 섹스엔 질려버린 상태였고 또한 자신이 남자를 안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적도 없었다. 재원이 우혁을 가진 것은 집안파티에 왔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여대생과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벌인 섹스뒤로 거의 2년만의 일이었다. 우혁을 처음본 순간부터 재원은 그에게 온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하나 안칠현이 상당히 방해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재원은 우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결코 표현해내진 않았다. 오히려 더 무심한척 관심없는 척 그에게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그런차에 우혁이 전학온 1주일 후에 마침내 그와 둘이서만 있게 되자 재원은 급한 마음에 강제로 화장실에서 그를 가져버린 것이다. 그런 일은 그에게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다급하고 애절할만큼 갈구했던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말은 않했지만 우혁만큼이나 재원역시 생애 처음으로 극치의 오르가즘을 맛보았다. 사랑을 나누다가 죽고싶을정도로 고통스런 쾌감을 얻을수도 있다는 것을 재원은 그때 처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이전의 재원이었다면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상대방의 기분은 고려치 않고 섹스를 즐겼겠지만 그때의 재원은 자신의 만족보다는 우혁에게 보다 큰 쾌감을 주는데 더 열심이었다. 우혁의 몸이 쾌락에 젖어 가늘게 떨릴때마다 재원이 느끼는 쾌감역시 배로 증폭되었다. 하지만 재원은 그후에 자신을 거부하는 우혁 때문에 그를 놓아줄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섹스만을 위했다면 재원은 결코 우혁을 놔주지 않고 이후에도 얼마든지 그의 육체를 강제로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를 영원히 소유할수 없다는걸 재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얻고 싶었다. 그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받아들여주기를... 더 이상 그가 자신을 외면하지 말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벌써 1달이 넘도록 우혁은 그와 시선조차 마주치질 않았다. 가끔가다 마주치더라도 차갑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은 재원의 심장을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날의 일을 후회라도 하는듯.....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떠올리기 싫다는 듯.... 아니 그런 일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우혁의 모습에 재원은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재원은 고개를 젖혀 숨한번 쉬지 않고 들이키던 맥주병을 입에서 떼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병을 그대로 탁자위로 내던졌다. 빈 맥주병이 탁자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으로 깨졌으나 워낙 주변이 시끄러운지라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질 않았다. 그는 탁자위로 쓰러지듯 고개를 파묻었다.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대로 그냥 지내느니 차라리 우혁이 자신을 증오하게 되더라도 그를 완전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하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방해물을 제거해야 했다. - 난......안승호의....애인이야....... 몸서리쳐지도록 차갑게 내뱉던 그의 목소리.... 그 어떤 말이라도 그것만큼 재원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말은 없을 것이다. - 그를.......사랑하는.....거야? 설마하면서도 묻지 않을수 없었던 것은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명백한 질투심..... -대답해! 사랑하냐고!!!!! -........그래... 웅크린 팔에 파묻고 있던 재원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래......사랑해.... 차라리 묻지 말아야 했다. 결코 들어선 않될 말이었다. 자신을 차갑게 외면하며 지나치는 우혁을 낚아채어 품안에 으스러지게 안지 못한것도..... 그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 우혁을 잡아채 숨막히도록 키스를 퍼붓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는것도... 우혁의 그 말...... 안승호를......사랑한다는 그 말때문이었다. 탁자에 엎드려 있던 재원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우혁이 이렇게 자신에게 큰 존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지금 이순간조차도 당장 우혁을 보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처럼 괴로웠다. 그래서 재원은 우혁의 얼음같은 모습에 매일 가슴한 켠에 시커멓에 멍이 들면서도 학교에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엔 다시금 이렇게 술로 괴로움을 달래는 것이다. 하지만 술을 마셔도 마셔도 결코 가시지 않는 것은 바라봐주지 않는 그에 대한 서러움... 이제서야 겨우 찾게된 영혼의 반쪽... 엎드려 있는 재원의 팔뚝에 희미하게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혀.....윽......." -13- # # # 내 감정을 난 알지 못해.... 난 그렇게 길들여져왔어.... 나를 원한다해도.....난 믿을수 없어..... 영원할거라는 맹세가 얼마나 쉽게 깨질수 있는지... 그말이 진부할정도로 얼마나 쓸모없는건지... 너무나도 잘 아니깐...... 난 아무도 믿지 않아..... 우혁은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해결할수 있을지 좀처럼 생각해낼수가 없었다. 하나 오전부터 우혁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새달이 시작되면서 짝을 바꾸라는 담임의 말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었다. 추첨을 통해 짝을 결정한다는 말을 들을때도 새로운 짝에 대해 아무 느낌도 갖질 않았었다. 하지만 뽑아낸 쪽지속에 적힌 번호를 찾아 이동했을 때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한순간 우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마지막 음악수업을 음악선생이 급한일로 조퇴를 하게되자 교실에 그대로 남게된 학생들은 학주의 지도하에 조용히 자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혁은 서서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로 손을 갖다대며 지긋이 눌렀다. 옆에 앉아 있는 그와 혹시라도 몸이 닿게 될까 우혁은 의자를 바짝 옆으로 붙여 몸을 멀찌감치 떼어놓고 있었다. 하나 하루동안 몇차례나 책을 펴다가 손가락이 부딪히기도 하고 떨어뜨린 볼펜을 줍다가 어깨나 허벅다리가 맞부딪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혁은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것처럼 흠칫하며 황급히 몸을 떼었다. 하나 둘사이의 긴장감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기만 할뿐이었다. 우혁은 어서 빨리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숨막히는 긴장감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것은 1분1초가 고통이었다. 책을 펴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우혁의 눈에는 아무글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뭔가 쓱-하는 소리와 함께 우혁쪽으로 넘어왔다. 펼쳐져 있는 쪽지를 밀은 흰 손가락이 우혁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우혁의 눈앞에는 급하게 휘갈겨쓴 듯한 글씨가 위에 써있는 흰 쪽지가 있었다.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아보았지만 이미 늦어 우혁의 머릿속엔 쪽지의 글씨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 방과후에 남아. 할 얘기가 있어. 도로 눈을 뜬 우혁은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쪽지를 뒤집어 뭐라 휘갈기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재원쪽으로 쪽지를 밀쳐냈다. 그가 쪽지를 들어올리는 듯 팔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잠시 그 상태로 멈춰있던 팔이 내려지더니 다시 뭔가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다시 우혁쪽으로 넘겨진 쪽지위에는 단 한문장이었다. - 나오지 않는다면 안승호를 찾아가겠어. 순간 우혁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휘둥그렇게 뜨여진 우혁의 눈이 쪽지위로 박힌채 떼어질 줄을 몰랐다. 우혁은 자신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정도로 쇼크를 받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심상치않음을 느낀 재원이 우혁의 팔을 잡자 순간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버렸다. 의자가 거칠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우혁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뛰쳐나가버리자 놀란 선생과 학생들이 일제히 재원쪽을 쳐다보았다. 재원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선생님. 제짝이 속이 않좋아서 그런 것 같은데 제가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칠현의 모습이 재원의 시야에 들어왔으나 재원의 눈은 교탁앞에 앉아 있는 학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학주의 허락으로 재원은 천천히 교실을 나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우혁이 갔음직한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생각없이 교실을 뛰쳐나온 우혁은 화장실로 들어가 게수대에 찬물을 틀고 그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수업중이라 화장실안은 조용했고 우혁이 틀어놓은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물에 흠뻑 젖어버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지만 우혁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거세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차디찼다. 물줄기가 얼굴과 목덜미로 흘러내려 교복까지 젖어들었다. 숨을 멈추고 차가운 물세례를 받고 있던 우혁은 피부가 파랗게 질릴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가만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우혁은 마침내 숨이 막혔는지 물살아래서 빠져나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손을 위로 올려 꼭지를 잠갔다. "하아....하아.......하...." 세수대에 양팔을 짚고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우혁은 머리와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젖혀 흠뻑젖은 얼굴의 물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훔치고는 잠시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후...." 그리고 호흡을 고르느라 입에 대고 있던 양손을 떼며 눈을 뜬순간 우혁의 얼굴은 차갑게 그대로 경직되버리고 말았다. -14- # # # 받아들여야 한다면.....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다해도... 너와의 시간들을 부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죽는 그 순간까지.... 운명을 거슬러서라도....결코.....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버린 듯한 기분이 되버린 우혁은 미동도 않고 앞의 거울을 뚫어져라 노려만 보았다. 눈앞의 거울에 우혁의 뒤에 팔짱을 낀채 벽에 기대서서 우혁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우혁은 거울속의 재원을 발견한순간 물기어린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나 이미 우혁의 눈빛은 마음속의 동요를 반영하듯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재원 역시 마찬가지로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우혁의 얼굴을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들이 실처럼 얼굴에 들러붙어 계속해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긴 속눈썹에 매달렸던 작은 물방울이 눈썹을 깜박거릴때마다 하나 둘 아롱지며 떨어져내렸다. 푸른기가 맴도는 검은빛의 신비로움은 물기에 젖어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얀 이빨로 짓깨물고 있는 촉촉히 젖은 입술이 파아랗게 질리며 떨리고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교복속으로 파고들어가 상의에 짙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비에 젖어 가느다랗게 떨림을 일으키는 한떨기 수선화 같은 우혁의 모습은 애처로움과 동시에 묘한 요기로움을 발하고 있었다. 은은한 청순함과 그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직 성숙지 못한 요염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찔할정도로 순식간에 그에게 미혹당하게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짙붉은 입술이 열리며 천천히 흘러나온 음성은 가냘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심해와 같은 어두운 눈빛을 보며 재원은 자신의 눈도 저렇게 보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자신한테 왜 이러느냐고 묻고 있다. 그 차가운 가면밑에 숨겨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싸늘한 눈속에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떨림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아니면...내입으로 직접 듣기를 원하는 거야?" 차가운 조소를 담은 듯한 재원의 말에 발끈한 우혁이 몸을 홱 돌렸다. 하나 곧 우혁은 뭔가에 부딪히며 거칠게 그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속에 갇히고말았다. 그 짧은 순간에 어느새 우혁의 뒤로 바짝 다가섰던 재원의 가슴팍에 안기게 된 꼴이 된 우혁이 손으로 밀었지만 재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네멋대로 굴어도 될정도로 내가 그렇게 우스- 흡!!!!!!" 화난 우혁의 외침이 허공으로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우혁의 입안으로 파고든 재원의 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우혁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려는 듯 재원의 키스는 숨막히도록 절박했다. "하악-!! 이..이것놔!!! 그만...!!!!!" 머리를 흔들며 재원의 입술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우혁의 뒷머리를 꽉 잡고 있는 재원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우혁이 주먹으로 재원의 등을 계속 치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를 부둥켜안고 있는 재원의 힘은 만만치가 않았다. "헉! 하아~하아-!!!" 잠시 떼어진 입술틈으로 호흡곤란을 일으킨 우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 짧은 시간도 아까운 듯 다시금 쉴새없이 몰아붙여오는 뜨거운 입술에 차츰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재원을 밀쳐내던 우혁의 팔이 어느결에 재원의 목덜미에 둘러지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우혁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재원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온통 거친 호흡소리와 서로의 입술과 혀가 맞부딪히는 음란한 소음으로 가득찼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갈구하듯 격렬하게 키스를 주고받던 둘의 입술이 잠시 떼어졌다. "하악- 학!! 하아..하아..." 산소가 부족한 듯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가쁜 숨을 내뱉는 우혁만큼이나 재원 역시 숨이 막혀 제대로 호흡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우혁의 몸을 바짝 끌어안고 있는 재원의 팔도.... 재원의 목덜미에 둘러져 있는 우혁의 팔도 풀릴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자신의 목덜미에 와닿는 우혁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호흡을 고르던 재원은 순간 우혁의 팔을 세게 부여잡고 그를 잡아끌었다. -15- # # # 운명이란건 거부할수 없는건가.... 사람이란 존재는 하늘이 정해주는대로 그렇게 놀아나야하는 건가..... 할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 나라는 존재를 아예 없애 버리고 싶다. 그렇게 될줄 알았다면..... 난......널 사랑하지 않았을텐데..... 1층 홀을 뒤덮고 있는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웃음소리가 허공을 타고 우혁의 침실까지 흘러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앞에 있는 것이 익숙지 못한 우혁은 잠시 두통을 핑계로 그 자리를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침대에 반쯤 엎드린채 실제로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우혁은 상당히 많이 지쳐보였다. 재계의 차기 실력자인 안승호의 25번째 생일을 맞아 내노라하는 집안들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축하파티를 하는 자리에 우혁은 내키지 않아도 참석해야 했다. 아침부터 조용하던 집안에 임시로 고용된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안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미는걸 보고 우혁은 그제서야 오늘이 승호의 생일이란걸 알게 되었다. 칠현과 우혁이 오후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때는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했고 한창 파티분위기가 절정에 무르익던 중이었다. 고인이 된 SM그룹 회장 장성혁의 외아들 장우혁이 안승호의 후견하에 있다는건 다 아는 일이었지만 그속에 담긴 뒷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우혁의 외모는 단연코 사람들의 찬사의 대상이 되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모두들 유별나게 호기심어린 관심을 기울였다. 우혁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머리카락과 눈빛이 바뀐데 지나친 관심을 보이며 친한척 그의 주위에서 맴돌며 재밌지도 않은 얘기로 그의 관심을 끌려 했다. 우혁을 이전에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든 우혁을 처음본 사람이든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은 뒤늦게 나타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내색은 않해도 우혁의 옆에 서서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던 승호의 기분이 갈수록 저조해지는걸 알아챈 우혁은 슬며시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자 승호는 우혁이 2층으로 올라가는걸 허락했고 우혁은 칠현이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는걸 거절하고 혼자 방에 들어온 것이다. 우혁은 침대에 완전히 엎드린채 몸에서 힘을 뺐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속에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을 발견하는건 이젠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우혁은 그런 사람들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더러운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고상한척하는 인간들의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된 모습은 우혁에게 역겨울정도로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그애는 달랐어....' 침대시트를 틀어쥐는 우혁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두 번의 만남뿐이었지만 그 두 번 다 평소의 우혁이었다면.....아니 보통사람이라면 결코 하지않을... 제정신을 갖고선 도저히 할수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왜 재원과 같이 있게되면 쉽사리 이성을 잃게 되는지 우혁은 알수가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인지 의심이 갈정도로 우혁의 머리속은 온갖 상념으로 뒤엉켜 버렸다. 시트를 구기듯이 움켜쥐는 우혁의 손이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호흡이 저도모르게 가빠져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심장이 정직하게 반응을 일으키는걸 느끼며 우혁의 눈빛이 뿌연 안개에 뒤덮인 듯이 서서히 멍해지기 시작했다. -16- # # #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어.... 이런게 미친거라면.... 난 미쳐버렸어... 그러니....널 놓는 일은 결코 없을거야.... 날 잊게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테니까.... 갑작스런 재원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는 우혁은 아랑곳않고 재원이 그를 이끌고 향하는 곳은 수업이 없어 텅비어 있는 음악실이었다. 긴복도를 뛰어오느라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날뛰는 심장을 누르며 우혁은 뭔가에 홀린 듯 재원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던 열쇠를 떼어내 음악실문을 열고 우혁을 안으로 밀어넣은 재원은 급히 문을 닫고 문을 잠가버렸다. 약간 어두컴컴한 음악실 안은 커다란 피아노와 긴 의자들만 나란히 있을뿐 텅비어 있어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열쇠를 피아노위에 내려놓으며 재원의 눈은 우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 우혁은 입술을 짓깨물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우혁은 자신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우혁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 그가 알지못하는 ..안다해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재원을 원하는 감정이 급박하게 돌출되어 나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나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재원의 발자국소리가 음악실안을 울리자 우혁은 까닭모를 두려움에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 도로 문으로 향하려했다. 하나 우혁이 미처 문으로 향하기도 전에 팔을 붙들려버린 그의 몸이 잡아당기는 힘에 끌려 휘청거리다가 재원의 품안에 완전히 갇혀버리고 말았다. 재원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우혁의 젖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몸을 더욱 세게 부둥켜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위에 입술을 부비며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그의 얼굴로 부드럽게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이마부터 시작해 감겨 있는 눈까풀위로 살짝 내려앉았다가 귓볼을 살짜기 힘주어 깨물어보고 턱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다시 눈위로 입술을 갖다댔다. 우혁의 긴속눈썹의 떨림을 피부위로 느끼며 그자리에 서있기도 힘들어진 재원은 나무로 만든 교단위에 그를 천천히 눕혔다. 강하게 반항할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혁은 의외로 몸에서 힘을 뺀채 고분고분 재원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재원은 우혁의 붉은 입술위로 입술을 포개며 그의 달콤함을 한껏 들이마셨다. 여전히 입술은 우혁의 얼굴과 입술, 목덜미를 쉴새없이 오고가며 애무했고 재원의 손은 부지런히 우혁의 셔츠단추를 하나하나 끄르기 시작했다. 옷을 벗기는 순간 움찔하며 긴장하는 우혁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달래며 재원의 손은 바쁘게 남은 옷들을 벗겨내었다. 마지막 속옷까지 다 벗겨낸 우혁의 백옥같이 하얀 나신은 손대기가 두려울 정도로 재원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욱더 아름다운 미의 극치였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옷을 벗었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옷을 부리나케 벗어버린 재원이 천천히 우혁의 나신위로 몸을 겹쳤다. 순간 우혁과 재원은 전신에 와닿는 상대방의 매끄러운 감촉에 몸서리칠정도로 쾌감어린 전율을 느껴야 했다. 자신의 몸위로 올라와 짓누르는 재원의 무게에 잠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우혁은 재원이 바닥에 팔을 뻗어 상체를 지탱해 일으키자 그제야 호흡을 가다듬을수 있었다. 재원이 우혁에게 무게를 덜하기 위해 상체를 떼어내긴 했어도 허리아랫부분은 한치의 틈도 없이 바짝 밀착되어 있었다. 이미 극도로 팽창된 재원을 온몸으로 느낀 우혁은 저절로 가빠지는 숨을 어쩌지 못하며 그의 목에 가느다란 팔을 휘감았다. 재원의 터질듯한 욕망을 느낀 이상 그가 오래 시간을 끌지 않을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혁 역시 재원과 다를바없이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 과연 재원은 우혁의 짐작대로 이미 고통스러울 정도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우혁의 가느다란 종아리를 잡아 가슴위로 바짝 치켜든 재원은 상체를 구부려 그의 귀에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미안- 조금만 참아" 우혁이 미처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재원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강하게 움직여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우혁은 척추가 마비되는듯한 고통에 미처 억제치 못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악 - !!" 하체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속에서도 우혁은 비명을 삼키며 입술을 피가나듯 깨물었다. 재원의 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것처럼 우혁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흐윽......윽...." 우혁의 몸속으로 깊디깊게 파고들던 재원은 숨을 몰아쉬며 우혁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경련을 일으키며 한없이 떨리는 그의 가느다란 몸을 바짝 안은 재원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참지마....소리질러도 돼. 방음벽이 되있으니까..... 날위해....소리....질러줘..." 그 말과 함께 다시 허리를 밀어붙이는 재원의 움직임에 우혁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악.. 아! 아..파..... 싫어... 아읏!!......아...아파!!!" 우혁의 등과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바짝 그를 잡아당기며 귓가에 와 부딪히는 우혁의 신음소리는 재원을 더욱 흥분시켰다. 나무로 짜서 만든 교단이 강하게 부딪혀오는 두 육체의 힘을 이기지 못해 삐그덕 거리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한팔로 우혁의 허리를 휘감고 한팔로 몸을 지탱한채 거세게 우혁의 몸에 와 맞부딪히는 재원의 몸놀림에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하앗!!........그마안......아....제..발......그만....해....아윽!!" 음악실안은 덜그럭거리는 나무의 소리, 살갗끼리 부딪히는 마찰음.. 음란한 신음소리와 거친 호흡소리가 뒤섞여 하나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전에 맺었던 그때의 경험과는 비교도 않될정도로 쉴새없이 몰아붙이는 재원의 격렬함으로 인해 우혁은 열에 들떠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하악-! 하아......아읏......으..응..." 재원의 몸은 어떻게 하면 우혁에게 쾌감을 줄수 있는지 연구라도 한것처럼 우혁을 숨막히는 열락의 세계로 끝도없이 인도해가고 있었다. 온몸을 저며드는듯한 생소한 감각을 참지못해 우혁의 아미가 고통스러운 듯 살풋 찡그려졌다. "아..아아!! 그...그만...아...읏... 아악-!!" 우혁의 땀에 젖은 등이 활처럼 거세게 휘어지며 먼저 절정에 도달했다.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며 정상을 향해 치달려가던 재원도 그제서야 어느 한순간 숨을 멈추며 그대로 몸을 굳혔다. "헉-!!." 우혁의 좁은 몸속을 터뜨려버릴것처럼 부풀어오르며 파정의 순간이 급박하게 지나자 재원은 그대로 우혁의 몸위로 탈진한 듯 엎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차가운 공기가 열에 달아오른 나신을 식혀주며 땀이 마르기 시작하자 혼미해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전희고 뭐고 아예 생략해버리고 시작부터 우혁의 몸속으로 들어가버린 재원은 우혁의 몸위에서 헐떡이면서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의 땀에 젖어 미끌거리는 몸을 힘주어 끌어 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입밖으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억제치 못했던 우혁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역시 가쁜숨을 몰아쉬며 재원의 팔안에 안겨 있었다. 쾌락의 여운이 여전히 몸속에 맴돌며 남은채로 기분좋은 피로감이 밀려왔지만 둘다 잠에 빠지지는 않았다. 한순간의 열풍이 지나가고 땀이 식어 싸늘해지는 몸이 자각한 사실은 다시 현실과 맞부딪혀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원은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며 일어나려는 우혁을 제지하지 않고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둘다 한순간에 열정을 다 소진한 듯 지친상태로 말없이 옷을 줏어들었다. 조용한 음악실안에 서로 옷을 입는 소리만이 부스럭거리며 들려왔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놀려 땀이 식어 차가워지는 몸위에 옷을 걸쳐입은 우혁은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하겠는 듯 재원을 돌아보지 않고 마이를 손에 움켜 쥔채 다급히 음악실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나 마음만 그럴뿐 어느새 옷을 다입고 우혁을 바라보고 있던 재원에 의해 다시 가로막혀야했다. 문손잡이에 손을 댄채로 서 있는 우혁의 등뒤로 재원이 그를 감싸안았다. 재원의 턱이 우혁의 젖은 머리카락위에 올려지며 다시 긴장하는 우혁에 아랑곳않고 재원은 더욱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너 때문에... 미치는줄 알았어..." "........!" 웅얼거리듯 머리위에서 울리는 재원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감에 우혁은 한순간 당황을 금치못했다. 이런 감정에 익숙지 못한 우혁이 자신의 가슴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려 했다. 그런 우혁의 손을 잡아채 아예 깍지를 낀 재원이 그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묻었다. "잠시만.....이대로 있어....부탁이야..." 한숨을 내쉬듯 나즉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은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면이 있었다. 우혁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에서 조금씩 힘을 빼며 천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등뒤로 자신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재원의 가슴팍은 넓어서 무척 편안했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기분좋을만큼 따뜻하다는 것을 우혁은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재원의 팔에도 더 이상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끼고 있는 그의 손도 차가운 우혁에게 온기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따..뜻......해......' 우혁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을 일으키며 천천히 내리깔렸다. 잠겨진 음악실문앞에 서로의 체온과 호흡을 나누며 둘은 그대로 굳은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17- # # #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거야.... 이미 거슬러버린 운명따윈 아무렇지 않다해도.... 단지 내스스로를 참아낼수 없을 뿐이야..... 그러니......이제 우리 그만두자...... 날 위해서도......더이상 널 망치기전에...... 오후에 일어났던 재원과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려버린 우혁이 눈을 질끈 감으며 시트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이미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혼란스런 영상들만 지나칠 뿐이었다. 이전의 자신은 승호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비록 승호와의 관계가 고통스럽다고는 해도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끼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재원과는 비교도 않되는 시간을 우혁은 승호와 같이 보냈다. 승호의 곁에서 우혁은 성장한거나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우혁은 승호에게서 결코 편안함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그가 주변에 있으면 공기부터가 틀려지는걸 피부로 따갑게 느끼게 된다. 하나 재원의 품에 폭 안겨 있으면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승호와 같이 있으면 온몸이 긴장되고 불편하지만 재원과 같이 있으면 서서히 마음이 진정이 됐다. 아무말도 없이 그렇게 재원의 팔에 안겨 있다가 그를 뿌리치고 돌아온 교실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칠현만이 있을뿐이었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도....아이들이 하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정도로 둘은 서로에게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책상에 걸터앉아 자신을 쏘아보는 칠현에게 우혁은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보지않아도 잔뜩 헝클어졌을게 뻔한 젖은 머리카락... 밑에 깔려 엉망으로 구겨졌을 셔츠와 교복마이등을 걸치고 있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 그 모든 것을 훑어보는 칠현의 눈빛은 거의 살기에 가까웠다. 하나 의외로 우혁이 그런 칠현에게 별 반응을 보이질 않고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자 칠현의 눈썹이 치켜올라 가다가 막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재원을 보았다. 우혁의 모습과 별 다를바 없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칠현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재원은 복도를 오는동안 텅빈 교실들을 이미 보았었는지 교실안에 칠현과 우혁밖에 없는데도 그리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우혁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재원의 모습에 칠현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재원이 들어서자마자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칠현은 우혁의 팔을 잡아 끌고 재원의 곁을 지나쳐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등뒤로 재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칠현에게 질질 끌려 가다시피 하는 우혁도...분노로 온몸을 떨며 잡고 있는 우혁의 팔만 부러져라 틀어잡고 있는 칠현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도 둘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차가 진입로로 들어서면서부터 정원에 가득차 있는 자가용들과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저택의 유리창에 비추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오늘은 안승호의 25번째 생일이었던 것이다. '왜 네가....낯설지가 않는거지? 어째서.....날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거야.....왜....어째서...' 우혁은 머리를 다시 베게에 파묻어버렸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빈틈을 보이면 파고들어오는 한 사람의 영상은 더더욱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루내내 재원 때문에 긴장감에 시달리다가 다시 예기치 못한 일까지 일어났고 또 승호의 생일파티로 사람들앞에 있어야 했던 지루함까지 겹쳐 이제서야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특히나 베게에 머리를 기대자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그제서야 알게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온몸이 욱신거릴정도로 자신을 녹초로 만들어버린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재원의 흔적 때문에 우혁은 기분좋은 나른함과 피로함에 눈을 감았다. 하나 바로 잠에 빠져들지 못한건 갑작스럽게 들려온 희미한 소음때문이었다. 처음엔 잘못 들은줄 알았는데 다시 뭔가가 달그락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우혁은 고개를 들고 방안을 살펴보았다. 하나 아무 이상도 없었고 복도앞에는 경호원들이 깔려 있을게 뻔했다. 2층에서 특히 우혁의 방으로 연결되는 모든 통로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게끔 알게모르게 통제되고 있었다. 그러니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한은 우혁의 방으로 아무도 들어올수가 없었다. 귀를 기울이며 잠시 숨을 멈추고 기다렸지만 더 이상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조금전에 들렸던 소리도 피곤으로 인한 환청인가 할 정도로 방안팎은 고요했다. '바람소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혁이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이 잘 닫히지 않았나 하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방안의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테라스로 우혁이 나가자 정원에서 서성대던 경호원들이 긴장하며 위를 쳐다보았다. 하나 우혁은 그런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군데군데 가로등만 밝혀놓은 황량하기 짝이없는 대지를 둘러보았다. 밑에 서있던 경호원들이 무전기로 어디다가 연락하는지 자신을 계속 쳐다보며 뭐라고 하는게 얼핏 보였지만 우혁은 모른체 가만히 찬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얇은 블라우스 한 장밖에 걸치지 않은 우혁은 몸이 싸늘해지자 그제서야 방안으로 들어서며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막 뒤돌아 서려다 갑자기 뒤에서 그의 몸을 확 잡아끌어 안는 몸짓에 놀라 미처 소리지를 틈도 없이 약간 눅눅한 헝겊같은 것이 입에 대어지면서 포르말린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순간 우혁은 한가지를 생각하며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또 납치인가....' 축 늘어진채 바닥으로 허물어지려는 우혁의 몸을 소리 나지 않게 안아든 사내는 우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음을 확인했다. 방안에는 우혁을 안고 있는 사내와 또 한사내 그리고 천장에 한명이 더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반쯤 내려져 있었고 그 부분에 난 구멍을 통해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잡고 있던 밧줄을 내려보냈다. 우혁의 몸과 자신의 몸을 밧줄로 동여맨 남자는 기계에 의해 움직여지는 듯 일정한 속도로 끌어올려졌다. 둘의 모습이 완전히 구멍속으로 사라지자 다시 내려진 밧줄에 남은 한명이 몸을 묶고 위로 올라갔다. 사내들의 동작은 이런일을 많이 해본 듯 능숙하고 신속했다. 방안에 있는 사람은 이젠 아무도 없었고 구멍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가 밧줄을 잡아 올리고는 샹들리에를 끌어올렸다. 무거운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약간 끼긱하는 소음이 나자 순간 사내들이 숨을 죽이며 방문을 주시했다. 하나 문밖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내들은 한숨도 내쉬지 않고 다시 샹들리에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샹들리에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천장에 부착되며 구멍을 완전히 메꿔버리자 방안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천장위에선 발걸음소리조차 나질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방안은 조용했다. 바뀐 것은 단하나..... 이방의 주인만은 깜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18- # # #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하늘이 정해준대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그것은 이미 시작된 비극의 종말이었을뿐..... 칠현은 저택 문앞에 서서 사람들을 마중하는 승호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칠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움직여대는 경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않그런척 해도 한 대 한 대 차가 빠져나갈때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초조함이 갈수록 커지는게 눈에 보였다. 자정이 가깝도록 계속되던 파티가 거의 막을 내리려 할 때 승호에게 한 경호원이 다가와 뭐라 속삭일때까지만 해도 승호는 정말로 자신의 생일파티를 즐기는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후에도 승호는 파티장을 떠나지 않았고 지금 이순간에도 사람들을 정중하게 배웅하며 호스트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지만 칠현은 지금 그가 미치기 일보직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호원이 승호에게 뭔가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칠현은 별것 아닌 일일거라 생각하다가 승호의 표정이 누가보더라도 알아챌정도로 정말 한순간에 싹 바뀌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사람들 몰래 2층으로 올라가봤던 것이다. 승호가 그정도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정도라면 우혁에 대한 일밖엔 없었다. 또한 재원과의 일에 대해서도 우혁과 어차피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칠현은 다짜고짜 우혁의 방으로 향했지만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경호원들과 활짝 열려진 방문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즉시 예감했다. 방안으로 뛰어든 칠현을 반기는 것은 주인을 잃어버린 텅빈 방 뿐이었다.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우혁과 필시 납치한게 분명한 범인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칠현과 경호원들의 결론은 파티에 온 내부사람에 의해 벌어진 소행이란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깜쪽같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우혁을 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티손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움직여 사람들을 살피고 혹시라도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나 감시카메라로 살펴 보았지만 의심가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승호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은 안승호가 특별히 고르고 고른 이름만 대도 다 알만한 사회각계 각층의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손님들이 타고온 자가용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자 칠현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차뒷트렁크를 조사해 볼수도 없었다. 그만큼 오늘 파티에 온 사람들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안승호라도 함부로 대할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승호가 가장 신경을 썼던 사람이 기사가 몰고온 롤스로이스 앞에 서서 승호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하- 오늘 정말 즐거웠네" 승호의 차가운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띄어졌다. "지루하지 않으셨나 걱정입니다. 바쁘실텐데 직접 오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회장님" 이회장이라 불린 키가 크고 몸이 마른축에 속하는 40대 정도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하! 자네집에 이런 기회에 한번 와보지 언제 와보겠나? 나중에 시간나면 자리한번 만듦세" "영광입니다. 이회장님. 조심해 가십시오" 승호가 목례를 하자 이회장이 기분좋은 미소를 띄며 차에 탔다. 그러자 주위에 둘러서 있던 이회장의 경호원들도 대기된 차에 나눠서 타며 출발했다. 그뒤로 나머지 손님들까지 다 떠나버리자 남은 것은 저택사람들 뿐이었다. 손님들을 다 배웅하고 저택안으로 들어가는 승호는 겉보기엔 너무나도 침착해보였다. 하나 칠현은 그 너무나도 멀쩡해보이는 승호의 모습이 더 걱정스러웠다. 텅비어버린 저택홀에선 장식을 떼어내고 식기들을 치우며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임시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뚜벅뚜벅 홀 중앙까지 걸어들어가는 승호의 뒤로 칠현과 경호원들의 우두머리인 에릭이 따라가고 있었다. 테이블위에 올려져 있던 따지도 않은 샴페인을 뜯어낸 승호는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않고 샴페인을 물들이키듯이 들이마시는 집주인을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이 눈이 휘둥그래져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 이런 상류층의 대형파티 같은 곳에 많이 오고간 경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말고도 안승호를 다른 곳에서 몇번 본적도 있었다. 칼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소문난 안승호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인지라 다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힐끔거리며 승호를 쳐다보고 있는 고용인들을 내보내려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샴페인을 거의 반이상 들이마신 승호가 갑자기 병에서 입을 떼더니 그의 앞에 서 있는 에릭을 향해 병을 내던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놀라 소리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칠현이 미처 승호를 제지하기도 전에.. 이미 병은 에릭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날라가고 있었다. 에릭은 병이 날라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머리에 맞았고 약간 비껴나갔기는 했지만 병이 깨지면서 찍혔는지 피와 샴페인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꺄악 - !!!!" 그것을 본 고용인들 중 몇몇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하나 오히려 당사자인 에릭은 고개를 약간 숙인채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승호의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에릭의 깨진 머리는 쳐다보지도 않은채 승호는 다시 병을 따서 들이키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린 홀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고 오직 승호가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칠현은 승호가 제정신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이성을 잃을줄은 몰랐다. 새로 개발했던 신제품을 라이벌회사에서 훔쳐내 먼저 출시했던 과거의 그 언젠가에서조차도 승호는 결코 단한순간도 냉정을 잃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 직후에 그 제품보다 더 기술이 보완된 제품을 바로 출시해 냄으로써 라이벌 회사의 주식을 곤두박질치게 만든게 바로 안승호였다. 그런 안승호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이성을 잃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형 -!!'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나간다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할지 짐작하고도 남은 칠현은 그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정도였다. 고용인들을 다른 방으로 다 내보내며 입막음을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칠현이 승호가 다시 병을 에릭에게 내던지기 전에 그에게 다가가려할때였다. 갑자기 승호의 너무나도 조용한 목소리가 홀에 울려퍼졌다. 너무도 낮은 음성이어서 듣는 사람이 한순간 섬칫할 정도였다. "찾아내. 누구 소행인지. 무슨 목적인지. 무사히 데려오기 전까진 내앞에 나타나지도 마. 그아이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났다면 네 목숨은 끝이다. 그때까진....유보해두겠어" 침착한 목소리에 놀란 칠현이 쳐다보자 어느새 진정이 됐는지 평소의 승호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나 그것은 겉보기만 그렇다는걸 칠현도 에릭도 잘 알고 있었다. 장우혁이 안승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그들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를 되찾지 못하는 한 안승호가 언제 어느때 폭주할지 모른다는 걸 너무나도 뼈저리게 자각하고 만 것이다. 피로 온 얼굴이 젖어 끔찍하게까지 보이는 에릭은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않은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분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사장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승호는 마치 그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더 이상 그에게 아무말 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방금전에 그렇게 흥분했던 그와 동일인물인가 싶을정도로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에릭과 칠현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어서 우혁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을. -19- # # # 이렇게 빠져들줄은 정말 몰랐어.... 감당해낼수도 없을만큼 무모한 감정소모따윈....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전의 내 삶은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을정도로.... 오직 너와 함께한 시간들만이 나를 채워줄테니까.....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부른 것 같았지만 칠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교실문을 나서려했다. 하나 몇발자국 떼기도 전에 잡혀버린 팔뚝을 잡아끄는 손아귀의 힘은 칠현의 미간을 잔뜩 찌푸려지게 만들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셌다. 조급한 마음에 짜증이 돋아 뒤돌아본 순간 하루내내 자신을 따라붙던..... 찌를듯한 시선의 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거 놔" ".....얘기 좀 하자" "팔 놔 -! 이재원!!" "잠깐이면 돼" 문앞쪽에 서서 하교하려는 아이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는것도 못느끼는지 둘은 누가 더 차가운 표정을 짓나 내기라도 하는듯 살벌한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둘사이에 이는 분위기에 짓눌려 비키란 소리도 못하는 학생들이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가고 어느새 텅빈 교실에는 재원과 칠현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 잡혀 있는 팔이 차츰 저려오려할 때 팔이 자유로워지는 느낌과 동시에 교실문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 거친동작으로 문을 닫고 뒤돌아서는 재원의 눈빛은 이상할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새끼......뭐야....' 칠현도 누구못지않게 만만치않은 성격을 지녔지만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재원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은 예사로 가벼이 넘길만한게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재원의 눈빛에 압도되었던 칠현이 그런 자신에게 어이없어할 때 재원이 목에 매어져 있는 넥타이로 손을 갖다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고 셔츠의 윗단추를 끌러내는 행동은 어느 누구나 할수 있는 것이지만 재원의 그런 단순한 몸짓은 칠현을 점점 긴장시키고 있었다. 왜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이렇게 움찔해야하는지 아직도 감을 못잡고 있는 칠현이 몸속을 휘도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켜-! 이재원!!" "............" "야!!! 너.." ".............사정이 있어서 못나왔다라......" "........뭐?!!!" 나즈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칠현은 순간 머리가죽이 통째로 벗겨지는듯한 엄청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내질러야했다. 하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정도로 머리살이 타는듯한 느낌에 놀랄틈도 없이 곧바로 딱딱한것에 얼굴이 심하게 처박히며 무언가에 의해 내리짓눌렸다. 눈깜빡할사이에 너무나도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라 칠현은 잠시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마비되었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며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로 있다는걸 안 순간 칠현이 치욕과 분노를 참지 못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씹새꺄-!!! 이거 않놔!!!!!!!!!" 하나 억센 손아귀에 틀어잡힌 머리카락이 그대로 뽑혀질 듯이 거세게 당겨지는 것 뿐만 아니라 칠현이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하자 책상위에 납작하게 내리눌려져 있는 얼굴에 점점 더 큰 압력만 가해질 뿐이었다. ".이재원!!!!!!! 이 - 썅!!!!!!!!" "조용히해" "개새끼 -!!! 이거 않 풀어?!!!!!!" -콰직!! 갑자기 등판위로 가해진 압력은 마치 수십톤의 무게가 척추를 짓누르는듯 뼈가 부서진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엄청났다. "크윽 -!! 이....이재...큭..." "아가리 닥치라고 했어. 안.칠.현"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에 숨도 제대로 못쉴정도로 압박을 받은 칠현이 몸부림을 쳤지만 그힘을 벗어날수는 없었다. 한손은 칠현의 머리칼을 잡아채 책상에 짓누르고 나머지 한팔로 그의 등판위를 내리찍어 그위로 상체를 구부린 재원이 위로 드러나있는 오른쪽 귀에 조용히 말했다. "으윽....." "좋아......안칠현. 한가지 묻겠어" 분노로 붉게 상기되었던 칠현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질리며 그위로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귀에 들려온 재원의 목소리는 감정이 있는 사람의 것이라곤 생각할수도 없을만큼 기계적인 음성이였기 때문이다.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얼음같은 싸늘함에 칠현의 심장이 그대로 싸하게 식어버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재원에게 다른 모습이 있을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런 모습일줄은 꿈에도 상상조차 못한 칠현은 계속되는 고통과 호흡곤란을 일으킬정도의 압박감...생애 처음 당해보는 치욕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온몸을 떨고만 있었다. "....... 어딨지?" "뭐라고?!" 그런 온갖 감정이 혼합되어 정신이 없는데다 워낙 재원의 목소리가 낮아서 제대로 듣지 못한건 분명 칠현의 실수였다. 뭐라 물었는지도 모르니 제때 답을 못하자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가락이 뒤로 당겨지며 머리끝에 다시 통증이 가해졌지만 그후에 닥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쾅!!!!!!!!! "아악 - !!!!!!!!" 뒤로 거칠게 제껴지기가 무섭게 다시 책상에 거세게 내리박힌 칠현의 머리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재원의 얼굴은 소름이 오싹 돋을정도로 무심하기만 했다. "크흑....대..대체.....왜 이러는거야..." 않그러고 싶어도 이미 재원의 폭력에 질려버린 칠현의 목소리는 한풀꺽여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우혁 어딨냐고 물었어" 그리고 이번엔 바로 정확하게 귀에 꽂혀 들어오는 재원의 음성은 순간 칠현의 모든 동작을 정지시켰다. 이마위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눈으로 들어오자 따가움에 제대로 눈도 못뜬 칠현이 다시금 머리위 로 압력이 세어지는듯하자 다급하게 외쳤다. "말했잖아!!!! 집안사정이라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처음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재원의 음성은 마치 속삭이는 듯이 너무도 낮아 감정의 변화를 느낄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속마음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태평스레 평정을 지키고 있는게 아니었다. 아침에 칠현이 혼자 등교했을 때부터.... 사정이 있어 우혁이 못나왔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재원의 속은 몇번이나 뒤집혀 끓어오르는 내화(耐火)를 억지로 참느라 부글부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루종일 머릿속을 지배하는 온갖 불길한 상상 끝에 재원은 어제 학교에서 벌어진일로 분명 우혁에게 탈이 난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미 재원에겐 우혁과 자신의 관계가 밝혀지게 되면 어떤 결과가 미칠것이란 생각따윈 하지도 않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없는 우혁의 행방을 아는것만이 그에겐 가장 중요할 뿐이었다. 비록 이렇게 재원에게 처참하게 당하고는 있다해도 칠현역시 보통의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재원이 왜 이런짓을 하는지....그의 몇마디 말만으로 그제야 알아챈 칠현은 공포로 가득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파괴적인 살기로 뒤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그런 말을 할수 있었던 것도... 분명 칠현의 두뇌가 비상한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말이 끼칠 영향까지 짐작할수 있었던 건 칠현이 우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너무나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해. 우혁이 지금.." "네가 더 잘 알잖아?" ".......뭐....?" "싫어서 않나온거야" 등뒤에 맞닿아 있는 신체가 빠르게 경직되는걸 느낀 칠현의 피로 흠뻑 젖은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던 상태가 서서히 깨어지며 머리칼을 움켜쥔 손아귀와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상체에서 미미하나마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칠현의 피로 물들어 시뻘개진 오른쪽 눈이 재원의 얼굴을 찾아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칠현의 터져 짓물러진 입술끝자락에 차가운 미소가 떠오르며 무섭도록 창백해진 그 얼굴에 확인사살을 가했다. "다시말해줘...이재원?......니 그 잘난...그 얼굴.... ...꼴보기 싫어서 않나왔다고 했어!!" -20- # # # 운명이란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건가... 어긋났다 하더라도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었다면.... 나의 운명이 저주란게 증명되는 것밖엔..... -대체 무슨 일이지? 왜 저들이.... -조용히해. 그들에 대한 얘기는 금지란거 몰라? -그러니깐 하는소리 아냐. 않봤으면 모르지만 그들이 왜 여기에... -쉿! 누가 온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란거 몰라? 뭔가를 소근거리던 경호원 둘이 재원이 지나치자 입을 다물고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재원은 지겹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굳게 닫혀 있는 서재문 앞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지나칠때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고용인들이 인사를 했지만 재원은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아무 반응도 없이 걷기만 할뿐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약간 비틀거리는 모습과 몸에서 확 끼치는 술내음에 다들 인상을 약간씩 찌푸렸다. 나가서 살고 있는 그가 가끔가다 이회장의 호출로 저택내에 올 때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온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서재 앞에 서 있던 이회장의 경호원중 한명이 다가오는 재원을 보고 무전기로 안에다 연락을 했다. "도련님 오셨습니다" 약간 풀린 눈으로 문을 열어주는 경호원의 옆을 지나치면서 재원은 아무 의미없는 웃음을 피식 지었다. 넓은 방안으로 들어선 재원은 망설임없이 중앙에 놓여있는 쇼파로 다가가 털석 주저앉았다. 방안은 알맞은 정도로 밝았고 숨소리까지 들릴정도로 조용했다. 쇼파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으니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는 듯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잠시 방안은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뿐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니...."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재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런 재원의 태도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듯 이회장은 오히려 초췌해 보이는 재원의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회장이 손을 뻗어 잠깐 않본새에 꺼칠하니 헬쓱해진 재원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제야 재원이 흠칫하며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말없이 재원의 무심한 눈이 자신을 여전히 바라보지도 않자 이회장은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손을 슬며시 거두었다. 하나뿐인 아들이면서도 이렇게 사이가 틀어진데에는 이회장의 탓이 크다는걸 그 자신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지 하교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는 재원을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이회장이 보낸 경호원들의 연락을 통해 그는 재원이 술에 취해 들어올거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허공에 머물고 있는 공허해 보이는 눈빛을 보며 이회장은 뭔가를 얘기하려다 그냥 그만두었다. 이회장은 다시금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네 방에 가서 쉬렴.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재원은 망설이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읏...."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니 술기운이 확 돌았는지 재원이 비틀거리며 쇼파등받이를 움켜잡았다. 이회장이 그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오려하자 그것을 눈치챈 재원이 빙글빙글 도는걸 간신히 참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를 나섰다. 등뒤로 이회장의 낮은 한숨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했지만 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문을 나서 자신의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중에도 이제서야 술기운이 도는지 머리가 어찔어찔해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뻔했다. "빌어먹을.... 젠장- !!" 험한 말을 내뱉으며 부축해주려는 경호원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 계단손잡이를 잡고 올라와 방까지 다다른 재원은 미처 주변에 눈에 띄지 않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재원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었지만 결코 그앞에 나서거나 그를 제지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원이 그들이 주시하던 방문을 열고 휘청거리면서 들어서자 그제서야 그들의 몸에 어려 있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 것은 닫힌 문에 의해 외부와 단절된 방안이 너무나도 고요했기 때문이다. 불을 켜놓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안은 테라스와 연결된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으로 간신히 사물을 분간할수 있을 정도였지만 술에 취한 재원의 눈엔 그저 어둠밖엔 보이지 않았다. 더듬더듬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탁자모서리에 부딪히기도 하고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기도 하면서 간신히 침대까지 다가갔다. "윽....제기~랄......" 재원이 조금만 더 술에 취했더라면 그대로 침대위로 쓰려져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재원이 조금만 더 술에 덜 취했더라면 방안에 들어선 순간 자신의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다는걸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하나 침대에 몸을 싣고 시트를 잡아채려던 재원은 뭔가에 의해 짓눌려 시트가 끌려오지 않자 포기하고는 짜증난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앞을 가득채워오는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하얌.... 옆으로 돌려진 재원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21- # # # 이게 기회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 이기심에 스스로를 갉아먹는다해도.... 두 번째란 결코 없다는걸 잘 아니까.... 죽인다해도 널 놔주지 않을거다..... 그러니 각오해..... 넋이 되서라도 끝까지 쫓아갈테니까.... "......." 재원은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에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정말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재원은 그렇게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술에 너무취해 환상이 보이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려던 재원의 입매가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으음...." 눈앞의 하얀천사가 입술새로 나즉한 신음을 내며 몸을 조금 움찔거리다가 다시 멈춘다. 이제 재원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가 과연 실제의 그인지....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건지... 왜 자신의 침대위에 누워서 자고 있는건지... 재원은 순식간에 취기가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뭐..야....." 너무나도 큰 충격에 머리가 점차 깨어나기 시작한 재원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벌떡 일으켜 방안을 가로질렀다. 이미 그의 움직임은 취한사람이라곤 볼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방안의 불을 켠 재원이 차마 뒤돌아서서 확인해보질 못하고 그대로 스위치에 손을 댄채 가만히 서 있었다. 하나 뒤돌아보지 않아도 아까는 들리지도 않았던 그의 조용한 숨소리가 어느 소리보다도 더 민감하게 재원의 귀를 찔러왔다. "하...하아-" 뛰지도 않았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한것마냥 저절로 가빠지는 숨결에 위로 손을 올려 가슴을 움켜쥐며 재원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자신의 침대위에 분명 사람임에 분명한 누군가가 시트속에 파묻혀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원의 심장은 이미 통제불능일 정도로 심하게 들쑥날쑥 드날뛰고 있는 중이었다. 침대로 다시 걸어오는 재원의 몸동작은 아까와는 비교도 않될정도로 조심조심 소리나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누워 있는 옆까지 다가온 재원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서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늘거리는 흰색 실크블라우스를 입은 그의 몸은 시트로 가려져 있어 가는 윤곽만 드러나 있었다. 그의 머리부터 시트에 가려져 있는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던 재원은 우선 외양적으로 아무 상처하나 없다는것과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인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곤 한순간에 몸에서 긴장이 풀려버린 재원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하-!....이런....바보같은 일이....하아... 제...제길...이런 어처구니없는....하-" 재원의 바로 앞에 그의 잠든 얼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 조금 벌려져 색색- 하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진 그의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기를 보는듯했다. 눈아래 그늘을 만들 정도로 길게 늘어져있는 숱많은 연갈색 속눈썹과 숨을 내쉬다가 몇번씩 아기가 옹알이를 하듯 입술을 약간 오무려 뭐라 웅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하아.....하....하하......... .........................................장.....우..혁...." 재원의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있는 그사람은 꿈에서조차도 재원을 괴롭히던 우혁이었다. 너무나도 자신이 보기 싫어서 오늘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던 바로 그 우혁이었다. 이곳에 오기 바로 전까지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술을 들이퍼붓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안칠현......큭...큭....." 쥐새끼같은 안칠현에게 보기좋게 한방 먹었다는 생각에 평소의 재원이었다면 그가 어디있든지 뒤쫓아가 반쯤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테지만 이제 그따위 사소한건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눈앞에 보이는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우혁만이 그의 모든 집중의 대상일 뿐이었다. 우혁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지를...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난 재원은 어느 정도 짐작할수 있었다.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고 그 이유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재원이 머리가 나쁜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원이 그토록 혐오하던 돈과 힘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빌어먹을 논리가 다시 이루어낸 결과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시금 자신의 아버지란 인간에 대해 회의와 경멸감에 몸을 떨면서도 재원의 사고는 이순간 어쩔수 없이 이기적인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 우혁을 발견했을때의 충격과 분노는 온데간데 없이 어느결에 사라져버리고 지금 재원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우혁이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다는 것뿐이었다. ".........우...혁........" 우혁의 감긴 눈위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재원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그의 피부를 마치 처음 만져보는 듯 재원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펴 가만가만 쓰다듬어 보았다. 짙은 검은머리색과는 구분될 정도로 엷은 갈색톤의 눈썹을 손톱밑의 살끝으로 살금살금 쓸어보기도 하다가 조각처럼 정교한 인중위를 슬쩍 건드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재원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고 하염없이 잠든 우혁을 바라보며 그의 얼굴위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 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 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우혁아... 차마 입밖으로 내지못하고 마음속으로 쉴새없이 우혁의 이름을 외쳐부르며... 한참을 그렇게 우혁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것처럼 불안한 마음에 계속 매만지기만 하던 재원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실었다. 우혁이 깰까봐 재원의 몸은 바짝 긴장된채 살금살금 우혁의 몸 가까이로 누운채 움직였다. 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재원은 다시 조심스레 우혁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하나 우혁은 깊게 잠이 들었는지 조금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쪽팔을 침대밑으로 넣어 우혁의 겨드랑이밑을 파고들어가 그의 등을 끌어안은 재원의 다른 한팔이 다시 우혁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후.... 서로 마주본채 완전히 끌어안은 자세로 밀착되어서야 재원은 만족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팔에 머리를 댄채 색색거리며 숨을 내뱉는 우혁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기같은 모습이 못견딜정도로 사랑스러워 재원은 뽀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며 가볍게 부볐다. 다시 베게로 머리를 눕힌 재원의 시선은 우혁을 향한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나 여전히 몸속에 남아있는 알콜기운과 너무나 갑작스레 당하게 된 충격.. 그리고 감당할수 없을 만큼 커다란 기쁨에 녹초가 된 재원은 그제서야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결국 어느결에 잠에 빠지고 말았다. -22- # # # 널 보면 마음이 아파.... 널 거부할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 아니 차라리 몰랐더라면 모든걸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좀더 행복할수 있었을까...... 정말....그랬을까...... 20여일전 쯤 SM기획의 안승호사장의 생일파티에 갔다온 이회장에 의해 저질러졌던 그 사건은 몇몇 입무거운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을만큼 주의깊게 행해진 일이었다. 워낙 저택내부가 큰 이유도 있었지만 들락거리는 사람들이나 머무는 사람들 역시 많았기 때문에 이전엔 않보이던 어느누가 갑자기 보인다고해서 그것을 그리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저택안의 고용인들은 재원의 방안에 머물고 있는 눈부시게 하얀 금발의 미소년에 대해선 단순히 재원의 친구만으로 알뿐 그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다만 그방안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그 소년이 가끔가다 테라스 밖으로 나와 정원을 쳐다보는 모습을 운좋게 볼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투명한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그가 안으로 들어갈때까지 숨죽이고 바라보다가 동료들에게 과장스럽게 떠드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식사를 갖다주는 여자들이 방문틈으로 슬쩍 들여다본 그 소년의 모습은 항상 침대에서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기 쉽상이어서 보기만큼이나 허약한 그 소년의 몸이 쉽사리 완쾌가 되지 않는것에 다들 염려스러워했다. 1년에 잘해봐야 몇번 들릴락말락하던 재원이 요 근래들어 학교에서 곧장 저택으로 오는것도 모두 그 소년때문이란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또한 원인이야 어쨌든 저택내로 다시 들어온 재원으로 인해 이회장의 얼굴에서 자주 웃음을 볼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모두들 나름대로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재원이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후에는 그 소년의 가끔가다 보이던 모습도 훔쳐볼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그 눈부시게 하얀 소년의 존재는 차츰 저택내의 사람들에게 이회장의 존재와는 다른 의미로 신비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어?.......저기...." "왜 그래?....아-!!" 막 3층계단을 올라오던 경호원 중 한 명이 놀란 표정으로 어느 한곳을 쳐다보자 옆에 서 있던 경호원도 같이 시선을 보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몇몇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자한번 본적이 없었던지라 두 사람은 이렇게 눈앞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 얘기속의 소년의 실물에 저도 모르게 넋이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또한 소년에 대한 얘기가 전혀 과장되지 않은 것이란 것을..아니 오히려 그를 표현한것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소년의 몸에 걸쳐져 있는 옷 또한 소년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최고급소재로 주문해 만든 하얀색 실내복이었다. 하나 너무나도 가냘퍼 보이는 소년의 외소한 체격이 그 옷으로 인해 더 두드러져 보여 어딘가 병자같이 보이는 것이 하나의 결점이었다. 그렇게 소문속의 소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취해 있던 두 사람은 방문을 빠져나와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이 복도를 따라 걸어오다 그들이 서있는곳 근처에서 비틀거리며 벽을 짚을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머리가 자각을 하기도 전에 휘청거리는 소년의 옆으로 부리나케 다가가 그를 부축한 두사람은 가까이서 본 소년의 모습에 현기증까지 느낄정도였다. 한국인같지 않은 눈처럼 하얀 피부.. 또한 혼혈일지도 모를 증거인 외국인중에서도 드물다는 백색이 섞인듯한 금빛머리카락.... 깊은 심해를 닮은듯한 검청색의 신비로움... 하얀피부위에 붉은 꽃술이 벤 듯 유난히 눈에 띄는 빨간 입술...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뚜렷한 윤곽선과 섬세한 턱선... 부축해 일으키는 경호원의 팔이 다 휘감기고도 남을정도로 가느다란 허리와 어깨... 그의 몸에 맴돌고 있는 이름을 알길없는 은은하고 매혹적인 향기에 두사람은 취한 눈빛을 띌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비슷하기 마련이어서 젊은 연령의 이 두사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소년의 몸을 부축해 일으키고나서도 그를 붙잡고 있는 경호원은 팔을 뗄생각도 하질 않았다. 여전히 소년의 허리와 어깨를 부여잡은채로 있던 경호원과 나머지 한사람이 저절로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디....정원에 나가시겠습니까?" 방안에만 있던...그것도 가끔가다 보인 모습이래봤자 정원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다던 그 소년이 갑자기 방밖으로 나오자 둘은 당황해서 그런 질문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나 고개를 아주 미미하게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둘은 자신들의 어림짐작이 맞자 기쁜 미소를 띄우며 그를 부축해 같이 걸어갔다. 경호원의 팔에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한 소년을 발견한 사람들은 저마다 눈이 휘둥그래진채 자신이 할일도 잊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년이 예의 그 소문속의 그라는 것을 시간이 조금 흐른후에야 깨달은 사람들이 숨죽인 탄성을 발하며 소년에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하나 곧 그런 숨도 못쉴정도로 경외스러운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터져나온 허공을 찢는 고함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며 제정신을 차려야했다. "무슨 짓들이야-!!" 할 일도 잊은채 제자리에 멈춰서 있던 사람들과 막 1층홀로 내려서려던 소년의 양옆에서 조심스레 그를 부축하고 있던 경호원들은 고함소리가 들려온곳으로 놀란 시선을 던졌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오는지 교복차림의 재원이 들고있던 가방을 내팽겨치고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홀을 가로질러왔다. 그 모습이 흡사 먹이를 앞에둔 맹수의 모습같이 사나워 사람들은 감히 그에게 인사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게다가 그가 시선을 박고 있는 소년의 옆에 서있던 경호원 두명은 소년을 부축하고 있던 팔을 풀지도 못한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한걸음에 빠른속도로 계단까지 다가온 재원은 미처 경호원들이 팔을 풀기도 전에 소년의 몸을 낚아채 팔위로 들어올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는것처럼 너무나도 쉽사리 소년의 가는 몸을 안아든 재원이 노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은채 두 경호원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아픈 애를 여기까지 데리고 나오다니!!" "아!! 죄...죄송 - " "젠장... 이렇게 얇은 차림으로..." 지금 시기는 4월 중순쯤이어서 봄바람조차 그닥 많이 불지 않는때였고 집안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정도로 온도가 알맞았다. 하나 재원의 말이 괜히 유난떠는게 아니란걸 잘 아는 경호원들은 아차하며 서로 마주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소년의 무릎뒤와 등뒤로 팔을 감아 소년의 몸을 끌어안고 분노로 잔뜩 상기된 재원이 다시 뭐라고 소리지르려다 갑자기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재원이 나타났을때부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소년이 재원의 팔에 안긴채 가만히있다가 그가 경호원들에게 고함을 지르자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그 소년이 재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았고 조용히 듣고 있던 재원이 잠시 주저하다가 마지못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재원의 지시로 급히 갖고온 따뜻한 양모로 지은 숄로 안고 있는 소년을 내려서 몸을 휘감아 꼭꼭 싸맨 재원이 다시 그의 몸을 안아들었다. 소년의 파리하게 여윈듯한 얼굴이 다소 지친 듯 재원의 목덜미에 기대어졌다. 재원은 조심스레 그를 다시한번 추스려 안고는 정원과 연결되 있는 테라스로 나갔다. 경호원이 열어준 테라스문을 통과해 정원으로 나간 재원은 이국적인 꽃내음이 물씬 풍겨나오는 화단근처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말도 않하다가 어깨에 기대어져있는 우혁의 머리에 이마를 살짝 갖다대었다. "......눈떠봐......." 하나 우혁에게선 아무말도 들려오지 않았고 재원은 목덜미에 와닿는 우혁의 규칙적인 숨결에 그가 잠이 들었다는걸 금방 알아챘다. 이렇게 우혁은 아주 잠깐사이라도 쉽게 잠에 빠질정도로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후...." 그가 깰까봐 재원은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고 사람들이 허약한 우혁을 안타까이 바라보는것도 느끼지 못할정도로 우혁의 몸상태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 자신의 방에 도착할때까지도 마음을 놓지를 못하던 재원이 지나칠정도로 덥혀진 방안의 침대위에 살그머니 우혁을 내려놓았다. 양모숄에 휩싸인데다 시트몇장으로 우혁의 몸을 꼭꼭 싸매덮어주자 우혁의 파랗게 질린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23- # # # 사랑해...... 사랑한단 말조차 할수 없을 정도로.... 널 사랑해..... 알아줘....잊지 말아줘.....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새파랗던 우혁의 얼굴에 핏기가 돌자 재원의 굳어 있던 얼굴에도 조금씩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나마도 처음보다 많이 나아진 것을 생각하면 재원은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져왔다. 설마 우혁이 마취제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거라곤 꿈에도 몰랐었다. 다음날 눈을 뜬 재원이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우혁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가 저녁때까지도 여전히 그가 눈을 뜰 생각도 않하자 그제서야 심각함을 깨닫고 주치의를 부르고 했지만 조치를 늦게 취해 하마터면 우혁은 심각한 상태까지 갈 뻔했었다. 하룻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의 마취제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우혁에겐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수면제를 복용한 것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때 그런 이상함을 빨리 깨닫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이래저래 이회장에 대해 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폭팔해 온집안을 한바탕 들쑤셔놨던 기억은 아무리 무신경한 재원이라도 입맛이 씁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게 재원의 살기어린 분노로 인해 줄곧 매달려 있던 의료진들의 노력덕인지....... 아니면 우혁이 그대로 눈을 않뜨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한순간에 섬칫하게 만들만큼 전신에서 지옥같은 냉기를 뿜어대는 재원을 혼수상태의 우혁이 느낀 덕인지...... 그도 아니면 자연스레 깨어날 때가 되어서 깨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후 간신히 눈을 뜬 우혁은 후유증인지 아무리 방안 온도를 덥혀놔도 추위를 무척 탔고 먹는 족족 다 게워내었다. 단 몇일사이에 그래서 우혁의 모습은 처참할정도로 허약해진 것이다. 깨어난 후에도 반쯤 실신상태였다가 기력이 조금씩 회복되자 점차 정신을 차린 우혁은 완전히 달라진 주변환경과 낯설은 사람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다 조금씩 기억이 난 듯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하나 곧 눈에 들어온 낯익은 재원의 모습에 크게 놀랐던 반응도 잠시뿐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이 그렇게 납치된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거부반응을 일으키진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해서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걱정할거야..... 그 말만 했을뿐 우혁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재원이 옆에 있거나해도 이전만큼 쌀쌀맞게 대하지도 않았다. 물론 우혁의 이런 의외의 반응들은 다 그의 몸상태가 순전히 정상이 아닌 증거라서 오히려 걱정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이때가 우혁이 자신을 자연스레 받아들일지도 모를 두 번 다시 없을 좋은 기회라는 것도 재원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차가운 우혁의 체온을 높여주기 위해 방안온도를 있는대로 높여놔도 여전히 추위를 타자 곧바로 선택한 해결방안은 이래저래 재원이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것들 중 어쩌면 그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것일수도 있었다. 바로 잠을 잘때는 재원이나 우혁 둘 다 알몸으로 껴안고 자는 방법이었다. 재원의 따뜻하다못해 뜨겁기까지한 몸의 체온이 우혁에게 고스란히 전달되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며 재원을 거부하던 우혁도 이젠 그의 따뜻하고 넓은 품안으로 파고들어 폭 안겨서 자야 잠에 푹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재원이 정말로 음흉한 생각만으로 선택했든, 아니면 진짜 효과를 볼것이라 생각하고 선택했든간에 이 원시적인 방법은 의외로 약같은 것보다 오히려 더 효과를 봐서 우혁은 점차 나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사실 어쩌면 재원에겐 끔찍할정도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워낙 우혁이 아파보여 도무지 딴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이 뜨거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몸에 와닿는 우혁의 몸은 얼음처럼 냉랭해서 재원은 쉴새없이 우혁의 몸을 쓰다듬고 부비며 그의 체온을 높여주느라 녹초가 다 되어서야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다. 재원은 눈을 꼭 감고 잠에 빠진 우혁을 바라보다 그의 백금빛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었다. 처음에 재원은 그것조차 후유증인줄만 알았었다. 하나 약 때문에 염색약이 빠지면서 원래의 머리카락색이 드러난거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재원은 그즉시 우혁의 머리카락에서 검은색을 다 빼버렸던 것이다. 숨겨졌다가 드러난 눈부실정도로 황홀한 백금빛.... 검은 머리칼의 우혁에게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백금빛 머리카락의 우혁의 모습은 재원에게 큰 충격을 안길정도로 엄청난 쇼크였다. 설마 우혁이 한국인이 아닐거라는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얼굴 윤곽이 동양계라 해도 유난히 흰 피부 뿐만 아니라 금빛머리칼은 확실히 동양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치의가 제거한 우혁의 눈에 끼워져 있던 칼라렌즈를 발견한 재원은 그의 눈빛이 무슨색일지 궁금해 미칠듯한 호기심까지 겹쳐 하루빨리 우혁이 눈을 뜨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에 연갈색 속눈썹이 느릿느릿 들려지며 드러난....... 검은 물빛의 고요한 신비..... 빛에 반짝일 때 설핏 보이는 오묘한 청록빛과의 조화.... 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우혁의 눈과 금실같은 머리칼은 너무나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에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우혁의 모습은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까마귀에 불과할 정도로.... 그렇게 달라진 우혁의 모습은 재원에게 큰 쇼크를 주었다. 동시에 재원은 우혁에 대한 독점욕이 이젠 극에 달해 그가 다른사람의 눈에 띄는것조차 싫을 정도였다. 하나 재원은 학교에는 항상 가야했고 학교내에서도 집에 있는 우혁만 생각하느라 이전만큼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계속해서 나오지 않는 우혁에 대해 칠현은 자기 성격만큼이나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다시 외국으로 급하게 떠날 일이 있어서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고... 그 말을 할 때 자신을 쳐다보며 말하던 칠현의 눈빛이 신경을 자극시켰지만 재원은 이럴 때 자신의 반응이 어때야한다는 것 또한 잘 알정도로 두뇌회전이 빨랐다. 그래서 재원은 지난번 자신을 갖고논 칠현에게 자기가 당했던 만큼은 되갚을 생각으로 그를 붙잡고 한 몇일간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물론 힘으로는 재원을 당해내지 못하는 칠현은 계속해서 그에게 잔인한 말만 해댔고.... 분명 재원이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것은 덧난데 소금을 뿌리는게 아니라 아예 염산을 들이붓는 행위였을테지만.... 일이 어떻게 된건지 안 이상 칠현의 그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우스운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 모른척 시치미를 뚝 떼고 칠현을 만족시킬만한 표정을 애써 떠올리고자하는 재원도 사실은 악랄한 구석이 아주 많았다. 재원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능청스레 연기를 할수 있을줄은 몰랐는지라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멈추진 않았다. 칠현은 나름대로 자기가 재원을 괴롭히며 상처입히고 있다 믿고 있었고.... 재원은 재원대로 그를 가끔 두들겨주는 동시에 - 물론 분노했을때와 지금같이 반장난스런 기분으로 하는 행동엔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 칠현이 그렇게 믿게끔 놔두면서 병주고 약주는 꼴인지라..... 사악하기로 치면 칠현은 재원의 적수가 않되는 것이지만 어차피 둘다 엉망으로 망가진건 피차일반이었다. 그렇게 이래저래 여러가지로 즐거운 기분이어서 한바탕 크게 웃고 싶은걸 간신히 참으며 재원은 그렇게도 가기 싫어했던 저택으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자 했고.... 그렇게 학교에 갔다오면 자신의 침대위에 누워서 잠에 빠진 모습밖엔 많이 보여주질 않는 우혁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할나위없이 행복해했다. 잠든 우혁을 내려다보는 재원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이렇게 쉽사리 웃음을 지을수 있게 될 줄은 이전엔 정말 몰랐었다. 하지만 바라보기만해도 저절로 마음이 흐뭇해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바보스럽다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우혁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이재원은 이재원이 아닌 상태가 되버린다. 우혁이 자신에게 그렇게 적대적이지도.. 또한 그렇다고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것도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것만으로도 재원은 꽤 만족하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단순히 안고 자는것뿐이지만 우혁의 몸을 껴안고 잠에 드는 시간이 너무 짧은게 서운할정도로 재원은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이젠 그렇게 재원이 몸으로 덥혀줘야 할정도로 몸이 허약하지도..또 몸의 체온이 그다지 낮은것도 아니었지만 재원은 거리낌없이 침대위로 올라올땐 옷을 다 벗고 우혁의 옷까지 찬찬히 다 벗긴 다음에 그를 꼭 품에 안고 잠에 드는 것이다. 하나 이전만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해도 갈수록 그게 어려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우혁의 몸이 조금씩 온기를 되찾아 가자 딱딱할정도로 차가움밖에 느껴지지 않던 몸에서 실크같은 감촉까지 같이 느껴지게 되자 재원은 차츰 갈증이 커져만갔다. 언젠가 한번은 자기도 모르게 열이 올라버린 재원이 알몸으로 껴안고 있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아무리 낯짝두꺼운 그임에도 그순간엔 어쩔줄몰라 당황을 금치못했다. 하나 우혁은 잠시 몸을 움찔거릴뿐 재원의 몸을 밀쳐내진 않고 그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줬다. 하지만 결국 재원은 다시 일어나 찬물을 한바탕 뒤집어써서야 겨우 열을 식혔고 조금 몸의 기온이 올라가자 다시 우혁을 껴안고 잠에 들수 있었다. 그때 얼핏 본 우혁의 발그레해졌던 얼굴을 상기하며 재원은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고 말았다. 그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올정도로 기분이 묘하게 뜨는 것이다. 그는 잠이든 우혁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가만히 자조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그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머리뒤로 손깍지를 낀채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 .................정말 한심하다.............' -24- # # # 현세에선 맺어지지 못할 인연이라서..... 사랑하니까.....너무나 사랑해서....... 연인을 위해 스스로 떠난다..... .........그런 사치스런 감정따윈 난 몰라.......... 죽으면 썩어버릴 육신의 한계따위로... 날 저지할순 없어..... 난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긋나버린 운명이라해도..... ...........기대해도 좋아.......... 죽인다해도 널 놓진 않을거라는 걸........ 너에 대한 갈증만 더 커질뿐이니까....... 턱을 괴고 유리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재원이 문득 뭔가 이상한 느낌에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힐끔 돌렸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손바닥을 내밀어 좌우로 흔들어대던 민우가 멈칫하더니 얼빠진 미소를 흘리며 손을 슬며시 도로 회수한다. "......뭐야?" 아까부터 자꾸 자신을 빤하게 쳐다만보는 민우의 시선에 애차 신경이 거슬렸던 재원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 재원의 냉정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민우는 뭐가 그리 이상한지 고개만 계속 갸웃거릴뿐이었다. "이렇게 볼땐 또 이재원이 맞는데~?" "......돌리지마" 결코 억양을 올리지 않는 재원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미건조해서 대체 그속에서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짐작도 할수 없을만큼 감정이 베어있지 않았다. "흐음...거참~거참....희안한 일일세~" 계속 무슨 말인지 빙빙 돌리면서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자신을 비스듬히 건네다보는 민우의 능청에 재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뭐.냐.고" 무미건조하던 억양이 세어진걸 느꼈으면서도 민우는 계속 딴소리만 해댔다. "어쒸~ 여기 왜 이렇게 시원해? 벌써부터 에어콘 돌리나? 돈이 남아도나보지? "............" 이젠 아예 아무말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을 피부로 따갑게 느낀 민우가 슬쩍 딴청을 피우려다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아-알았어! 짜식이~! 누구 송장치울일 있나. .......너 말야.... 요즘 뭔일 있냐?" "............" 뜬금없는 질문에도 재원이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민우는 손가락 두개를 자신의 입가 양쪽에 갖다대며 위로 살을 쭉 밀어올렸다. "방금전에 너 얼마나 소름끼친 표정을 지었는지 아냐? 미친놈마냥 피식거리며 이렇게 웃지를 않나..... 눈빛은 꼭 썩은 동태마냥 풀렸지를 않나~" ".......흠" "흐음? 뭐가~ 흠~이야 짜식아! 어쒸! 내팔뚝 봐라. 아직도 소름돋아 있네. 않그러던 놈이 그래봐. 내심정 알걸?.........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내 술만 쳐먹더니........ 연락도 없어 그냥 죽었나 했드만. 게다가 이 바쁜 엉아가 만나주니깐 정신을 어따 팽게쳐놓고 딴짓만 하고말야" 계속 말을 돌리며 무슨 일인가 짜증나게 하더니 별 시덥잖은 일로 다 귀찮게 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원은 앞에 놓인 콜라잔을 들어 기갈든 사람마냥 한번에 반이상을 들이켰다. 5월초순의 주말오후는 이젠 완연하게 따뜻해진 햇살만큼이나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세워져 지나치지도 그렇다고 뒤떨어지지도 않게 감각적으로 꾸며진 까페안엔 의외로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나른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빠른 최신유행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탁! 유리로된 테이블위로 소리나게 내려진 유리컵의 표면에 차가운 기온차로 알알이 베어있다 미끄러운 외관을 타고 쭉 흘러내리는 작은 이슬방울들의 움직임을 따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재원에게 참다못한 민우가 막 뭐라고 말을 하려할때였다. "제목이 뭐지?" "뭐?!" 말할 찬스만 노리고 있다가 갑자기 끼여든 재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미처 알아듣지 못한 민우가 반문을 토했지만 재원은 그말만 내뱉고 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아쒸~! 저거 병이야 병-! 새꺄~너-!!!" "......전망좋은 집 좀 알아봐" "뭐라고?!!!" 어느 누구든지 간만에 불러내선 한참을 말도없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밑도끝도없이 알아들을수 없는 엉뚱한 말들만 툭 내뱉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사람앞에서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바로 민우가 지금 딱 그 모양새였던 것이다. 하나 쟈켓을 집어들고 미련없이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는 재원의 뒷모습엔 내 볼일 다봤으니 이만 찢어지자란 뜻이 분명히 베어있었다. "어~어어? 재원아?!.... 야! 야임마~! 이재원! 야 이씹새꺄-!!! 도대체 왜 불러낸거야-!!!!!!!!!" 황당함에 넋을 놓고 있다가 주위사람들이야 쳐다보거나 말거나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민우를 끝까지 돌아보지도 않고 까페문을 열고 휘적휘적 나가버리는 재원의 행동은, 아무리 막역한 친구사이라도 펄펄뛰며 화를 내고도 남을만큼 충분히 기분나쁜 그런것이었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민우는 곧 그려려니 하고 이내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아직도 따가운 주변사람들의 눈총따윈 느껴지지도 않는지, 태연히 자기앞에 놓인 콜라를 다먹고도 모자라 재원이 마시다 남긴 콜라잔으로 손을 뻗어 한입에 다 털어넣은 민우는 같이 딸려들어온 얼음덩어리를 와그작~ 와그작 소리내어 깨물어 씹었다. Rrrrrrrrrrr~ Rrrrr..... -하암~여보세.... -나와. 앞이야. 찰칵- 뚜뚜뚜뚜뚜뚜.... -뭐....뭐야........이재원?!! 코팅된 유리창 너머로..... 이주변에 있던 젊은층의 부러운 타겟이 되었던 한눈에 확 들어오는 바이크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헬맷을 쓰는 재원의 기다란 몸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난히 긴 늘씬한 다리가 찰싹 달라붙는 블랙진에 감싸여 맵시있게 쭉 뻗어 지상위에 힘있게 내리박혀 있었다. 그옆을 지나치던, 공장에서 막바로 찍어낸 듯한 똑같은 긴머리, 똑같은 화장, 비슷한 옷차림의 여자 둘이 멈칫 멈춰서며 재원쪽을 연신 흘끔대다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호들갑스레 킥킥대는게 눈에 띄였다. "빌어먹을 자식....." 그런쪽으론 아예 무신경해서 그렇지.... 신경써서 꾸미기만 하면 잘나가는 모델 뺨칠정도로 곱상한 외모와 늘씬하게 뻗은 몸매를 지녔는지라... 처음 재원이 카페에 들어왔을때부터 계속해서 이쪽을 흘끔거리며 주시하는 시선들이 꽤 많았다는걸 민우는 애시당초 알고 있었다. 요란한 시동음과 함께 빠른속도로 사라져버리는 재원의 바이크가 않보일때까지 계속 그 모습을 뒤쫓아가던 민우는 고개를 다시 돌려 유리컵에 남아있는 얼음조각들을 마저 입안에 넣고 소리내어 계속해서 깨물어 씹었다. ".....전망좋은 집?..........죽일놈..........." -25- # # #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에..... 이렇게 맹목적이 될줄은 정말 몰랐어... 이성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치도 않았던 것처럼.... 두려울정도로.. 사람을 무모하게 만든다는걸........ 5월의 푸르름을 간직한채 잘 정돈되어 있는 넓찍한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박힌, 길 대용으로 쓰이는 평평하게 깎아놓은 육각형의 돌위를.... 바지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시선을 내리깐채 하나하나 일일이 밟아가면서 걷고 있는 재원의 기분은 그다지 썩 좋은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나게 기분 나쁠만한 일도 없는것이, 아예 발을 들여놓기도 싫어하던 이 저택내에 한달이 넘도록 아주 오랜기간 머물고 있음에도...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한공간에서 같이 숨을 쉬는것조차도 싫을 정도로 증오해왔던 무시할 수 없는 한사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전만큼은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정도로 오히려 마음이 꽤 너그러워져 있다는게 재원의 요즘 변화된 심경상태였다. 하나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있을 의향은 결코 없는것 또한 사실인지라..... 재원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단지 우혁의 몸상태가 많이 양호해졌다고는 해도... 선천적으로 허약체인 우혁의 회복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갖추기 전에는 차라리 그동안만이라도 우혁이 이곳에 머무는게 더 낫다는 것을 재원은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은 비워두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던 오피스텔도 두사람이 사는데는 지장이 없을만큼.... 아니 지나칠정도로 크고 편리한 것은 틀림없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수 있었지만....... .......................문제는 주변환경이었다. 대략 한달정도의 기간이 모든 것을 알기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해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정도는 대강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있을만큼의 시간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모든 집중의 대상과 관련있는 것이라면 두말할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주일에 단 한번.... 이렇게 하루종일 같이 있을수 있는 주말오후를 포기해가면서까지 급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급박한 일이라해도 재원에게 있어 우혁과의 시간보다 더 우선시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화 한통화면 간단히 끝낼수도 있었던 일을... 집앞까지 찾아가서 부탁 -재원은 당연히 자신이 그랬다고 여기고 있었다- 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절실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재원은 그 절실치도 않은 일을 오늘 했다. 마치 깡패가 건들거리는 듯한 불량스런 자세로 홀을 느릿하게 가로지르는 재원의 모습에선 그의 심기가 지금 뭔가에 꽤 뒤틀려 있다는게 표면으로 확연히 드러나있었다. 하지만 융단바닥을 꾹꾹 힘주어 내리눌러가며 발걸음을 떼놓을 때마다 재원은 속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애써 시간들여 가라앉히려는 중이었고....... 그래서 평소라면 관심조차 갖지도 않았을 일에 유달리 흥미를 보인건지도 몰랐다. "어제 오전에 들어온다던 사람이 여직껏 소식이 없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홀 중앙의 계단에 막 발을 올려놓으려던 재원을 순간 멈칫하게 할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집안내부를 울리는 목청높은 소리가 하나 있었다.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 대체 어떻게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오랜기간 비워져 있는 안주인을 대신해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총괄해서 이끌어가는 것은... 주인인 이회장이 아니라 재원을 핏덩이때부터 길러온 나이지긋한 그의 유모였다. 재원이 그나마 빗나가지 않고 이정도로 멈출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녀의 덕이 컸다. 워낙 수많은 사람들을 부리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흐른 세월동안 그녀가 얻은 것은..... 중세시대의 마녀를 연상케할정도로 바싹 마른 몸과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목청이었다. 실제로도 아랫사람들이 그녀를 뒤에서 얘기할 땐 '마녀' 라고 부른다는걸 재원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검은 옷으로만 휘감긴 말라 비틀어진 그 자그마한 몸 어느곳에 그렇게 사람들을 휘어잡는 힘이 있는지 재원은 아주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가 일들 보세요! 쯧쯧- 요즘 젊은것들은 대체..." 계단에 멈춰선채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확실히 평상시의 그와는 다른 이상한 점이 많았다. 또한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방금전에 들었던 별 이득도 없는 얘기들을 애써 되떠올리고 있는 것 역시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일터였다. 하나 3층 복도를 여전히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걸으며 되도록 시간을 늦추려던 그의 귓속으로 여지없이 파고든 것은..... ~왜 네게 말을 못해~~ 이젠 다신 그대를 볼수 없다고~~ 민우와 만났던 조용한 까페에서조차도 한번쯤 흘러나왔을 정도로 요즘 온거리를 뒤덮고 있는 이젠 꽤나 익숙해진 그 멜로디는........ 재원의 냉정하던 얼굴표정에 미미한 변화를 일으키며 그렇게 하루종일 애써 소득도 없는 쓸데없는 짓들을 함으로써 참고 참고 또 참아왔던 것을..... 삽시간에 완전히 무산시켜버리고 말았다. "........제길." 또한 방금전에 우연찮게 들었던........ 잠깐이나마 재원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름모를 한 고용인에 대한 시시껄렁한 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까마득히 잊혀진 것은 두말할나위도 없었다. -26- # # # 미치도록 渴望하던 것을...... 쉽사리 얻을거라곤 기대치도 않았던 것을..... 어쩌면 영원히 얻지 못할거라 여겼던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땐......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었다...... 시간이 흐르는게 무서울정도로. 재원은 자신의 속이 좁다고 여겼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자신이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일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다해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재원은 자신을 비교적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지금 재원을 갈수록 저조하게 만드는 생소하기 짝이없는 기분의 정체는.......... 심술궂은 감정까지 동반한.... 명백한 질투심이었다. 처음 이 우습지도 않은 일의 발단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침대에만 누워 있는 우혁에게 한 경호원이 호의로 건네준 음악 CD 한 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혁에게 있어 음악은........ 그것도 클래식이나 오페라에 심취해있는 상류층에선 얼굴팔아먹는 딴따라로 취급하는 대중가요란 것은.... 그가 많이 접해보지 못한 매우 이질적인 분야였다. 하지만 우혁 역시 젊은이다운 빠른 적응력으로 곧 이 낯설지만 매력적인 장르에 쉽사리 빠져들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관심을 모은 것은..... '靈魂'이란 곡으로 데뷔한지 한 달도 않되어 무서운 속도로 인기를 휘몰아가고 있는 .....한 솔로가수였다. 거의 하루종일 한정된 공간에서 대부분 침대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우혁의 몸이 회복되어 기력을 되찾을수록 그가 점차 지루해할거라는걸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이런저런 일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 우혁이 불현듯이 뭔가에 흥미를 보였다면........ 재원도 마찬가지로 흡족해 해야함이 마땅했다. 더군다나 우혁의 몸상태가 호전되어감에 따라 아직은 서로 애써 떠올리려하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엔 부딪혀야할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점들로 미루어볼 때..... 우혁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게끔 쉽사리 빠져들만한 무언가의 필요성을 재원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처음엔 그 역시 호의적인 감정이었던건 사실이었다. 그것이 음악소리든 말소리든 원체 성격상 귓가에서 뭔가 조잡하게 앵앵거리며 울리는걸 참지 못하는 재원이었지만, 우혁이 하루종일 그 가수의 음악을 틀어놓고 볼륨을 끝까지 올려서 듣는다 해도 참고 같이 들어줄 의향이 있었을 정도로..... 또한 우혁이 이전까진 방안의 장식품이나 다름없이 자리만 덩그러니 차지하던 TV를 켤때까지만해도..... 재원의 심정은 분명히 그랬었다. 하지만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리기만해도 여기저기 빼놓지 않고 방송화면에 꼭 등장하고 있는 어느 한사람의 모습에 유독 눈을 반짝이는 우혁의 모습을 보면서도 기분이 좋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원이 유별하게 싫은 티를 낸다든지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마도 우혁은 재원이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의 기분이 별로 않좋다는걸 혹시 눈치챘다해도 그 원인조차도 알지 못할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우혁이 무신경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읽히게 할만큼 재원이 자신을 무방비한 상태로 내버려두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반나절가량을 일부러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며 쓸데없는 일로 시간낭비까지 했던 것이고... 하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우혁과 같이 있을수 있는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지라..... 지금도 마찬가지로 일광욕실 앞에 멈춰 서서 귓속으로 쉴새없이 밀려드는 그 가수의 파워풀한 목소리를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며 참아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곡의 음이 낮아지며 서서히 사라지더니 오랫동안 다음 곡이 나오지 않는걸로 보아 아마도 끝까지 돌려진 모양이었다. '이따위 감정이라니....' 눈에 띌정도로 경직돼 있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뒤이어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는 불투명유리로된 일광욕실문에 손을 대고 천천히 밀었다. 문이 반쯤 열리면서 황금빛 채광으로 가득찬 안쪽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 재원의 몸은 말그대로 석상같이 그자리에 뿌리박혀 버리고 말았다. -27- # # # 그를 소유하고 있다해도.....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갈구(渴求)하게 만들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의심에 괴로워하고 상처입힌 것은.... 사랑이란 순수한 감정보다는... 파괴적인 獨占慾에 더 가깝다는걸....... 아직 어렸던 그때는 알지 못했다... 재원의 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채광이 잘드는 일광욕실에서 음악을 듣다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사르륵 잠에 빠져드는것은 요즘 우혁의 반복된 오후 일상이었다. 지금도 역시 전신에 내리쬐이는 햇살아래 흔들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우혁은, 따가운 햇빛에 가끔가다 살짝살짝 눈살을 찌푸리거나 콧등을 귀엽게 찡끗거리기는 해도 반쯤 잠에 빠져든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하나 완전히 잠이 든 것이 아니라 반쯤은 의식이 남아 있었는지라, 고요하던 방안에 누군가 들어와 사부작사부작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정도는 알아챌수 있었다. 하지만 잠기운이 쉴새없이 몰려와 마침 몸이 바닷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듯이 나른하고 무거워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귀찮은 마음에 우혁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멈추더니 한순간 머리 위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누군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면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풀렸던 우혁의 신경이 서서히 예민해지려고 할때.... 갑자기 허공에서 숨죽인 탄성이 발해지며, 빛에 반사되어 투명한 은빛에 가까워보일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평소의 우혁이었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매만지도록 결코 허용치 않았겠지만 지금 그는 막 잠에 빠져들려던 상태였는데다.......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마치 엄마의 그것인양 너무나도 부드럽고 감각적이었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그 누군가에 대한 불쾌감이 조금씩 사라지며 우혁의 기분은 다시 나른해져가고 있었다. 금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머리카락속에 살며시 파고든 손가락틈 사이로 몇번이나 들어올려진 머리칼을 사르르 흘려버리면서도,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듯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기때문에 살포시 와닿는 손길에 그냥 모른채 하고 가만히 있던 우혁이었지만 그 손의 감촉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얼굴 위로 느껴지는 순간....... 밀려들던 우혁의 잠기운은 한순간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햇빛을 오랫동안 받아 따뜻해진 살갗 위로 약간은 싸늘한 손가락이 내려와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꽤 오랫동안 얼굴에 와닿는 따가운 시선에 우혁은 도저히 눈을 뜰 엄두도 내질 못했고... 상대방은 그런 그가 잠이 푹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멈추었던 손가락을 서서히 조심스레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살짝 터치를 하는 정도로 가벼웠던 것이 우혁이 깨지 않을거라 확신했는지 갑자기 대범해졌다. 이젠 완연히 애무에 가까운 농도로 얼굴의 윤곽을 쓰다듬으며 매만지는 손길에 우혁은 매순간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갑자기 눈을 뜰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우혁은 내심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타인의 손길에 무방비하게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마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손바닥이 뺨을 가만히 감싸쥐며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더니 내리감긴 눈까풀의 얇은 살갗을 더듬다가 위로 휘어진 기다란 속눈썹을 슬며시 건드리며 끝부분을 위로 톡~톡 쳐올리는게 느껴졌다. 순간 우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을 일으켰지만 상대방은 미처 발견을 못했는지 계속해서 우혁의 얼굴 위를 탐험해가고 있었다. 곧은 콧대위로 손가락을 쭉 미끄러뜨리는 듯 하다가 인중 위에서 그대로 멈춰버린게 꽤 오래간다 싶더니 입술이 바싹 마를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우혁은 하마터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일뻔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천천히 입술위로 느껴지는 감촉에 순간 우혁의 몸은 그대로 경직되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조심스럽던 상대방은 이젠 우혁이 깨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는지 그의 입술을 매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손끝으로 눌러가며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더듬던 손가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슬그머니 그 경계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하자..... 더 이상 참지못한 우혁이 바들바들 가늘게 몸을 떨며 눈을 뜨려 할때, 갑자기 코끝으로 사향냄새가 확 끼쳐들며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와닿았다고 느낀 순간...... "꺄악~!!! 엄마얏-!!!!!!!!" 세찬 바람이 일어나며 뭔가가 확 끌려가는듯 하더니 쿵- 하며 요란스레 바닥이 울릴 정도로 중량감 있는 무언가가 내팽게쳐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새된 여자의 비명소리가 허공에 높게 울려퍼졌다. 순간 느닷없는 웬 여자의 비명소리에 놀라버린 우혁이 눈을 번쩍 떴고, 자신의 눈앞에 펄쳐져있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온몸이 충격으로 굳어졌던 것도 잠시, 창백할정도로 흰 얼굴위에 붉은기가 스쳐지나가며 급격하게 분노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28- # # # 그를 사랑하는덴 아무 이유도 필요없었다.... 순식간에 정신없이 휘몰아쳐든 감정에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기도 전에..... 이미 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던걸까................. 재원은 자신의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행태에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져버리고 말았다. 정원을 쉽게 내려다볼수 있게 테라스유리문 앞쪽에 놓여져 있는 흔들의자엔 분명 우혁이 앉아 있었고 잠이 든 듯 팔걸이 아래로 그의 오른팔이 축 늘어진채 힘없이 내리뜨려져 있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시간인지라 보통 이맘때쯤 일광욕실로 들어오면 여지없이 잠이 든 우혁의 모습은, 오로지 빛으로만 이뤄진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투명한 휘광에 휩싸여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의 전신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날씨가 흐려 햇빛이 않나온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가 갑자기 구름사이로 숨어들어서 그런것도 아니었다. 바로 우혁의 몸위로 상체를 수그려 빛을 차단한채 문이 열린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그의 얼굴을 탐하고 있는 그 어느 누군가 때문이었다. 재원은 잠시간 자신이 뭔가 착시(錯視)를 일으킨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않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 분명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고 여전히 그것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던 정신이 깨어나며 그것을 자각한 순간... 더욱이 그 누군가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수그려지며 흘려내린 머리카락이 우혁의 얼굴을 뒤덮는걸 본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던 재원의 신경이 뚝- 하고 그대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우혁은 자신의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일광욕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한 여자와 대짜로 뻗은 그여자의 몸을 한쪽무릎으로 짓눌러 그녀의 양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틀어잡고 내려다보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멀리서보면 오해하기 쉽상인 야릇한 포즈였지만 가까이 서있는 우혁의 눈엔 새하얗게 질려버린 여자의 얼굴만이 확대되어 들어올 뿐이었다. "그만둬-!! 그게 무슨짓이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미처 깨닫기 전에 그런말이 터져나와버린 것은 여성에 대한 우혁의 고정관념에 가까운 인식때문이었다. 性을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든... 사시사철 잔병을 앓지 않는때가 없을정도로 곯곯거리며 약해빠졌든..... 차가운 겉모습과 대비될정도의 유약한 성격을 지녔든지간에..... 어찌됐든 우혁은 남자임엔 분명했고.... 남자가 약한 여자를 때린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야만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서 비키지 못해?!!" 재원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할정도로 하얗게 뜨자, 순간 우혁은 얼굴을 붉힐 정도로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간만에 터져나온 우혁의 날카로운 외침에 고개를 든 재원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조금씩 이상야릇한 표정이 떠오른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리쬐이는 광채에 머리칼이 가느다란 금실처럼 한올 한올 반짝이며 하늘거리고 있었고..... 화가 나자 흰 피부와 대비돼 유난히 도드라진 붉게 상기된 얼굴 위로..... 폐부를 찌를 듯이 날카로워진 검은 눈동자속에 숨은 청록빛이 냉기를 품어 유독 빛을 발하고 있었고... 고혹적인 붉은 입술 사이로 가시를 품고 새어나온...... .....................도발적인.......................... ..........................그.......목소리........................ -29- # # # 사랑스러워서...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에.... 포근히 아껴주고 감싸주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상처밖에 주지 않을수 없었던 건..... 아직은 어렸던 이유 때문인걸까..... 4월초쯤부터 5월까지 대략 1달 정도의 기간사이에 세인들의 관심을 끈 여러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또는 그냥 쉽게 넘겨버리고 말, 별 흥미도 못 끌 그런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일들도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각계각층의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재물을 훔쳐가지 않는 도둑이 침입했다든지..... 급한 일로 채용했던 고용인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몇일만에 사라져 버린다던지..... 일가친척 하나없이 그집안에 매여있던 홀홀단신의 고용인이 어느날 쥐도새도 모르게 없어졌다던지...... 이런일이 발생했던 집안에서조차도 별로 요란스럽지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몇가지 해프닝들이 일어났었지만..... 그냥 우습게 넘길만한 일로 인식되며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나 대략 이 사십여명에 해당되는 인사들이...... 재력과 명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부유계층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었지만..... 아무도 그 해프닝들의 밑바탕에 전제된 숨겨진 점은 결코 발견해내지 못했다. 이 사십여명의 인사들의 이름과..... 한달 전쯤 어느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던 사람들의 명단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우혁은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슬그머니 맞은편을 건너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쇼파등에 기대어 팔짱을 낀채 눈을 감고 있는 재원은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 한참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런 재원을 흘끔거리며 계속해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 우혁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망설여지는지 내내 초조해보였다. "해" 땀이 날정도로 오랫동안 손을 쥐었다 풀었다하며 우유부단한 자신을 속으로 질타하던 우혁은 갑작스레 들려온 저음에 깜짝놀라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할 말 있는거 아니었어?" 재원은 진작부터 우혁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눈치채고 있었고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지금같아선 우혁의 말을 참고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고 이런 일을 그냥 웃으며 넘길 정도로 재원은 마음이 그렇게 너그러운 편이 못됐다. "너무....심했어" 말을 걸기가 무서울정도로 굳게 다물려 있던 재원의 입에서 먼저 말문이 터지자 잠시 주저하던 우혁은 저녁내내 참아왔던 얘기를 기어코 꺼냈다. "너무한거 없어" 그럴꺼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듣게되니 이미 뒤틀려있던 심사가 더한층 꼬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흔들림없이 정면으로 직시하며 말을 받아치는 재원의 차가운 어투에 우혁도 같이 쏘아붙였다. "가장이라잖아!! 도와주진 못할망정 어떻게.." "거짓말이야" 너무나 인정머리없이 쌀쌀맞게 자르는 말에 발끈한 우혁이 않해도 될 말까지 덧붙인건..... 조금씩 가라앉으려던 불씨에 기름을 끼얹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버린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겨우 그깟일로!" "..........겨우....그깟일?" 원체 재원의 음성에 냉기가 돌긴했지만 이정도까진 아니었다. 얼음짱처럼 싸늘해진 목소리에 움찔한 우혁이 미처 어쩌기도 전에, 관절이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원은 그 자리에 우뚝 선채 우혁을 내려다보았다. ".....장우혁" -멈춰. "장우혁. 고개들어" -그만해. "너.....원래 그런놈이었어?" -이재원. 그만해! "무....무슨 뜻이야?" "원래부터 그랬냐고" -그만해. 됐어! 이재원!! "그게....무슨" "당하는대로 내주는 그런 놈이었냐고!!" -30- # # # 깊숙이 과거속에 파묻어뒀던 기억들을.... 헤쳐내지 않을수 없었던건.... 속으로만 곪아버린 상처를 터뜨려... 새로운 시작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낡아버린 사진의 겉표면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이회장의 얼굴엔 뭔가를 애써 기억해내려는 듯 아련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낡은 사진 속에는 비스듬이 마주 쳐다보며 웃는, 한눈에도 서로 사랑하는게 티가 날 정도로 밝게 빛나는 한쌍의 젊은 연인이 찍혀 있었다. 추억을 회상하느라 이회장의 얼굴에 떠올라있던 아련한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뒤바뀌려할 때, 그의 앞에 서있던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회장님" 순간 이회장의 얼굴에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 말을 들어온 지도 벌써 수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말대로 포기할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이 감정이 집착인지 아니면 죄책감인지는 알수가 없었지만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수 없을거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재원이 이 일을 얼마나 발작적으로 싫어하는지...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져 버렸던 원인이 바로 이것이란걸 알면서도.... 사진을 한참동안 내려다 보고만 있던 이회장은 결국 다시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남자는 그대로 조용히 물러갔다. 이제 다음번에 남자가 올때까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기대감과 두려움에 목을 매야할지... 이회장은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모아쥔 양손에 가만히 이마를 갖다대곤 자신을 붙들어매는 과거의 상념속으로 다시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촤악!! 고개가 돌아간 채 흰 피부위로 삽시간에 벌건기가 번지고 있는 재원의 얼굴은 그 강도로 보아 상당히 따가울텐데도 놀라울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주체못할 정도로 온몸을 푸들푸들 떨면서도 재원 앞에 버티고 서있던 우혁은 순식간에 눈앞에 가득 차오르는 물기로 인해 시야가 뿌옇게 변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나 채 문 앞까지 당도하기도 전에 팔을 낚아채여 격하게 뒤에서 끌어안는 몸짓에 우혁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놔!! 이 개자식아!!! 이것 놓으란 말야!!!" 비명에 가까운 울음 섞인 외침 속엔...... 오랜 기간 속으로만 삭히고 또 삭혀왔던 그 모든 울분과 고통이 한꺼번에 베어있는 듯, 듣는 사람까지 그 아픔을 느끼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너무나도 처절했다. "놔!!!!" 그래서 우혁의 발악에 가까운 몸짓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재원의 팔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갈수록 더욱 세게 조여들기만 할 뿐이었다. "놓으란 말야!!....윽.....놔.....놓...으.....흑..." 않그래도 정상이 아닌 몸상태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은데다 지나친 감정소모까지 겹쳐 우혁의 몸은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버렸다. 숨도 제대로 못쉴 정도로 울부짖으며 발악에 가깝게 몸부림치던 정도가 점차 약해진다 싶더니 우혁의 몸이 그대로 팔안에서 축 늘어져버렸다. 순간 재원의 다리에서도 힘이 풀려버려 둘의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흐흑....윽....니가......니가 뭘....알아......흐윽..." 상처받은 8살짜리 꼬마아이마냥 눈위에 양손을 대고 연신 훔치면서 멈추려해도, 봇물터진 둑인 듯 쉴새없이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우혁은 더욱더 서러웠다. 무엇이 그렇게도 속에서 북받쳐 올랐는지.... 왜 한순간 재원의 그 말에 반박을 못했는지..... 우혁은 계속해서 울고.......또 울었다. 진저리를 쳐가며 숨이 막혀 꺽꺽대면서도 지치지도 않는지 한참을 서럽게 울던 우혁이 조금은 진정이 되가는 듯 숨죽여 흐느끼기만했다. "끅.....흐윽..." 흠칫흠칫 몸을 떨며 낮게 흐느끼는 우혁의 가냘픈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고 바짝 끌어당겨 품안에 안고 있는 재원의 얼굴에서 평정심따위는 이미 그 흔적조차 찾아볼수도 없었다. 상처받은 암청빛 눈망울이 이슬로 반짝이는걸 봤을때부터.. 아니 한순간의 질투를 억누르지 못하고 내뱉어버린 저주받을 말에 새파랗게 질려가던 얼굴을 봤을때부터..... "괜찮아. 쉬이...괜찮아" 조일 듯이 강하게 둘려진 팔로 간간히 경련을 일으키는 바싹 마른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속삭였다. 혓바닥을 도려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독설어린..... 충동적으로 터져나와버린 되담을 수 없는 말은 어쩔수 없다쳐도..... 이대로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밖엔 없던 재원의 가슴속을 한순간 싸늘하게 식혀버린 것은...... '안승호.....너......설마.......' 소설게시판 -------------------------------------------------------------------------------- [퍼옴/밀크] 愛憎..31 일자 2000/5/9 22:28 조회 27 추천 1 작성자 sexycat(이민혜) 번호 546 홈페이지 -31- # # # 영원히 속에만 담고 있을거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너무나도 어렸던 하얀 새를..... 산산조각으로 파괴되버린 어린 새를.... 지상에 붙들어 매놓기 위해.... 굳건했던 맹세를 어길 수밖에 없었을 때..... 피를 토할 듯한 極痛보다 더 나를 지배했던건..... ...........어린 새에 대한 극렬한 所有慾이었다. -승호형아~ 학교 갔다와? 꺄하하~간지러워~!! -우와아~ 그럼 승호형이 아빠 담으로 제일 세? -있잖아아~ 혁이느은~ 승호형이 아빠 담으로 제일 좋아!! 어어? 칠현이두 좋아해애~ 진짜야아!!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듯한 짜랑짜랑한 꼬마아이의 음성은 집무실 가죽쇼파에 거의 반 눕다시피 앉아서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는 승호의 얼굴위로 간만에 미소를 떠올리게했다. 그동안의 심기를 반영하듯 바싹 메마른 꺼칠한 얼굴과 움푹 꺼져버린 눈두덩은 않그래도 차가웠던 승호의 얼굴을 더욱 삭막하게 했다. -이뿌다아~..추운가봐...불쌍해....내가 델구 갈래....응~응? -형아....저...저 할아버지.....왜 저러고 있어?....으응? 형아? ....거...거지?... 흑.....불쌍해.....흑.....어..어떻해애... 품안에 고이고이 간직해 키워왔던.... 세상의 추악함과 혼탁함에 물들지 않은.... 이 세상엔 단 하나밖에 없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시릴 정도로 하얀....나만의....어린새.... -으흐흑.....승호형....아빠가....윽...나...나....이제...어떻..해.... -그럼....형이 내 후견인이 되는거야? 나...딴데가지 않아도....되는거야? 나....다 클때까지.... 형이랑 칠현이랑.....같이 살수 있는거야?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울먹이다가.. 계속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하며.... 두눈 가득 물기를 머금은 채 파아랗게 웃음 짓던..... 여리디 여린 내 어린 새.... -하아.....나.....않...아파.....승호...형....하아..... 그러니까.....울..지마....이런거.....금방...나아....... 너무나도 약해서.... 이대로 소멸(消滅)되는게 아닐까 두려울정도로... 가냘펐던 내 어린 하얀 새..... -형!! 혁이가.......우혁이가 없어졌어!!!! -죄송합니다.....아직 소식이..... -사장님! 찾았습니다!! 저기...그런데...... 중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주말오후.... 임원회의 때문에 남아야 했던 칠현이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내 어린 새는..... ..............이틀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차갑던 기온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붙어버린 심장... 1분1초....흐르는게 끔찍할정도로 피가 마르던 시간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뻔했던 극도의 불안감... 찾았다는 에릭의 말에 미친 듯이 달려갔던... 잠겨진 학교 체육관 부품실..... 얼음보다 더 차디찬 창고바닥에..... 갈기갈기 찢겨진 교복 더미 속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하얀 몸뚱아리.....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손목을 결박해놓은 밧줄에 베어있던 굳어버린 핏물과..... 그것보다 더 많은 피와...... 추악한 情慾의 흔적들로 더럽혀진...... 슬프도록 가냘프던.......창백한 나신(裸身)....... 더러운 짐승들에게 능욕(凌辱)당한..... 파괴되버린.......내 하얀 새...... 승호의 감겨졌던 눈이 번쩍 뜨여지며 핏발이 곤두선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수로 2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사건은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산채로 살을 저미고 심장을 으스러뜨리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지.... 얼마나 자신을 애타게 불렀을지.... 그때 승호는 그 사건과 관련되었던 인간들을 살아생전에는 결코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마실수 없게끔 만들어버렸다. 한번에 생명을 끊어 준다는건 차라리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밀폐된 공간에 처박혀 서서히 돌아버리게끔... 스스로 미쳐 날뛰어 목을 매고 손목을 긋지 않을수 없게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리게끔....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승호에겐 충분한 힘이 있었고, 또 아무 거리낌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승호는 무자비했다. -........죽게.....내버려둬......제발.... 이렇게.....살고싶진 않아...... 보름만에 간신히 깨어난 내 어린 새는..... 더 이상 내게 미소지어 주지 않았다. 날 살아 숨쉬게하는 산소나 마찬가지였던 청량한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취할 듯 향기로운 숨소리를 뿜어내던 장밋빛 입술은 굳게 닫혀버렸으며... 웃을 때면 보석보다도 더 반짝이던 청록빛은 빛을 잃고 암흑저편으로 까마득히 숨어버렸다. 눈을 뜨고 있어도 더 이상 살아 숨쉬지 않는... ..........죽어버린 내 어린 하얀 새. -.....시...싫어..흐흑....무서..워.....흑....하..하지마-!!!! 그래서.......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새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더러운 세상을 떨쳐버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자신만큼이나 순결한 이상을 찾아 떠나가지 않도록.... 그 날개를 부러뜨리고 어린 새를 강제로 품었을 때..... 이미 안승호는 죽어버린거나 다름없었다. -Rrrrrrrr.... 그러니 반드시 찾아낸다. -Rrrrrrrrr.... 찾아서 내가 당한 고통만큼 되돌려주겠다. -Rrrrrrrrrr.... 내 어린 새를 빼앗아가려는 인간들은..... 승호의 핏발선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아물새도 없이 얼마나 물어뜯겼는지 생살이 뻘겋게 헤집어져있던 입술가로 핏물이 베어나왔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수많은 전화기 중.. 유독 빨간 불이 깜빡거리는 전화기에 시선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말 따위론 표현 못할 정도로 끔찍했던 고통의 시간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Rrrr.. "나야" 절대 용서치 않겠다. "사장님........에릭입니다" -32- # # # 표현하기 전에 그 마음을 어떻게 아는가.....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말이... 진실일거라 어떻게 믿는가.... 믿을 수 있는건 단 한가지.... 끊임없이 肉身을 섞어 확인하는 것 뿐.... .........내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 갈고리마냥 휘어져 침대시트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들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뒤로 젖혀질때마다 드러나는 하얗디 하얀 목선의 섬세함.... 움찔거리며 허리가 튕겨 오를때마다 몸을 적시고 있는 땀방울들이 허공으로 떨쳐진다. 가빠지는 호흡사이로 간간이 내뱉어지는 억눌린 듯한 신음소리는 듣는 사람을 못내 자극시키는 면이 있었다. "...하....아...." 입 밖으로 새어나온 신음섞인 숨소리가 자신의 귀에 유독 크게 들려오자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소리를 죽이려 한다. 하나 다시금 저절로 벌어져버리는 입술 틈으로 새어나오는 단발마적인 신음소리..... "....으...응..." 억제코자 해도 전신을 헤집어놓는 전율어린 감각에 땀으로 흥건히 젖은 몸이 활처럼 휘며 경련을 일으키다 결국 울음섞인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나왔다. "...읏........그...만.....흑......" 오열하다 기진(氣盡)해버린 우혁을 안아 일으켜 침대 위에 눕힐때만 해도 이럴려던 의도가 아니었다. 하나 달래던 손길이 언제부터 끈적한 애무로 뒤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순간 당장 그를 가지지 못한다면 자신이 미칠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새하얀 시트 위에 웅크리고 엎드려..... 그것보다 더 하얀 얼굴을 눈물로 흠뻑 적신 채 미세한 떨림을 일으키는 애처로울정도로 가냘픈 우혁의 모습은.... 재원에게 인간의 이성따위론 도저히 꺼뜨릴수 없는, 불같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우혁의 몸이 아직은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던지... 심신이 전부 탈진할 정도로 충격받은 상태라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던지..... 하는 것은 재원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린지 이미 오래였다. 오직 열에 들떠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몸에 와닿는 녹아내릴 듯한 살갗의 감촉과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지만 애끓는 신음소리만을 민감하게 느끼며 반응할 뿐이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등허리의 마른 곡선을 쓸어내리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은 애가 탈정도로 느릿느릿했다. 아기피부같이 보드라운 살결 위를 지긋이 눌러가며 땀방울을 훑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홀쭉한 아랫배를 스치듯이 거쳐 그 밑으로 내려갔다. "핫-" 허벅지 안쪽 맞닿는 보드라운 살로 깊숙이 파고드는 손길에 우혁이 격하게 숨을 들이키며 몸을 비틀었다. 하나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붙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갈수록 점점 그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전율어린 쾌감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우혁이 몸을 뒤척이며 피하려했지만 마치 몸이 천근이라도 된 양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흐윽.....그...만..ㅎ..." 전신을 꿰뚫듯이 관통하며 치달리는 쾌감에 어쩔줄 몰라 흐느끼던 우혁이 혼미한 와중에도 자신의 종아리를 잡아 위로 들어올리는 재원을 느꼈다. "..시.....싫어-!!!!" 몽롱해졌던 눈빛이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채 간간이 경련을 일으키는 우혁의 모습에 재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겁에 질려 초점이 흐릿한 눈망울에 시선을 맞추는 재원의 얼굴에는 그이상은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진지함만이 가득했다. "싫다는 건 하지 않아....널 다치게 하지 않을거야" 지독히도 낮은, 하나 채 가라앉히지 못한 욕망이 묻어나와 약간은 허스키한 울림을 띄는 음성은 두려움에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을 서서히 가라앉힐 정도로 믿을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암흑으로 채워졌던 눈동자에 청록빛이 조금씩 되살아나며 초점이 돌아오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재원의 까만 눈에 우혁은 순간 당황했다. "아...." 축축히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훤히 드러난 이마위에 송글송글 베어나온 땀방울을 흡수시키듯이 입술로 부비다가 관자놀이를 거쳐 귓볼을 살짝 깨물며 재원이 나즈막히 속삭였다. "아프게 하지 않을거야....겁내지마.." 조급한 마음에 약간은 거칠었던 손길이 부드럽게 풀리며 얼굴 위의 라인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바라보는 재원의 눈빛은 열정적이면서도 너무나 따뜻해보여 우혁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고개를 돌릴수조차 없을 정도로 뚫어질듯이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에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상식으론 도저히 용납이 않되는 일방적인 첫 관계때부터... 원인불명의 납치로 인해 새로이 이어진 인연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이순간까지도.... 재원의 손이 스칠때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性이란 것에 새로이 눈뜨기 시작해 제대로 거부조차 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귀에도 낯설게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쾌락에 들떠 흐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재원의 눈동자 속에 그대로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다. 우혁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미쳤어.....어떻게 이런 짓을.....어떻게....' 내리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을 일으키며 격렬한 키스로 인해 쉽사리 부풀어오른 붉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는 우혁의 땀에 젖은 얼굴은 혼란스런 심경이 표면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하나 감긴 눈까풀 위에 내려와 앉는 잠자리 날개짓 보다 더 가벼운 입술에 뒤이어, 깨물려진 입술을 매끈히 할짝이며 촉촉히 적시는 혀의 감촉은 우혁을 더 이상 오래 생각하게 놔두지 않았다. 다리에서 떨어져 위로 거슬러온 손길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버린 어깨선을 쓰다듬어 내리며 가벼이 어루만졌다. 하체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연신 등과 어깨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애무하는 손길에 우혁의 경직된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섬세한 턱선을 따라 내려오던 입술이 점점 밑으로 움직여 우아한 라인을 이루는 긴 목선을 훑어 내렸다. 간지럽히듯이 목덜미에 살짝살짝 와닿던 입술의 감촉이 어느순간 갑자기 거세졌다. 도드라진 쇄골에 입술을 찍어누르다가 곧게 뻗은 가느다란 흰 목덜미를 한껏 베어물며 입안으로 깊숙히 빨아들였다. "아-" 우혁의 몸이 뒤틀리며 피하려 했지만 재원은 그의 양어깨를 잡아 시트위로 고정시킨채 순식간에 발갛게 변해버린 목덜미 의 자국 위로 다시 입술을 내리눌렀다. 발육왕성한 성장기때의 남자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빈약한 가슴위로 미끄러져내려와 자그맣고 귀여운 연분홍 꽃봉오리를 입안에 머금었다. "아앗-!" 혀로 휘감으며 할짝거리다가 이빨로 살짜기 깨물어 보고는 예민하게 반응을 살피다가 입안으로 그대로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이 거세게 흡입했다. "아으....그...그만해....하악-!" 너무나도 에로틱하고 자극적인 감각에 거의 반이상 정신이 혼미해져버린 우혁은 재원이 자신의 무릎 뒤로 손을 밀어넣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흐릿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아...싫.." 벌려진 입술틈으로 격렬하게 파고들며 머릿속까지 헝클어뜨릴정도로 입안을 거칠게 헤집어놓는 혀의 움직임에 우혁은 재원의 의도대로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체로 밀려드는 뜨거움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뒤따른 엄청난 극통(極痛). "하..아악-!!!!!!!!!!" 우혁의 고개가 뒤로 한껏 젖혀지며 살을 찢어놓는 아픔을 참지못해 찡그려진 얼굴이 완전히 창백하게 탈색되어 버렸다. 우혁의 몸안으로 깊숙이 파고든 재원은 거칠어진 호흡을 힘겹게 고르며 통증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혀주려는 듯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우혁을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흐....으윽...."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입술로 부드럽게 닦으며 긴 속눈썹에 매달려 있는 이슬방울들을 혀로 살짝 핥아냈다. ".....나를 봐"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짓깨물고는 얼굴을 시트속에 반쯤 파묻은채 고통을 하염없이 참아내던 우혁은 귓가에 와 부딪히는 잔뜩 가라앉은 음성에 간신히 눈을 떠 바라보았다. 구부린 팔로 상체를 지탱한채 우혁의 몸을 덮다시피 내려다 보고 있는 재원의 얼굴엔 그 냉정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목소리만큼이나 간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단한번도 그와같은 재원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는지라 우혁은 쉴새없이 밀려드는 통증을 한순간 잊을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시선을 피하려는 우혁의 얼굴을 잡아 머리밑으로 손을 넣어 고정시키며 재원은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땀에 흠뻑 젖어 색이 더 짙어진 백금빛 머리카락... 눈이 시릴정도로 하얀 이마 아래 머리색보다 짙은 연갈색 눈썹...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깜빡거리는 긴 속눈썹에 감싸인 물빛의 고요함 속에 숨어 있는 어두운 청록빛.... 새하얀 이로 짓깨물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 벌려놓고 장밋빛 꽃봉오리만큼이나 더 향긋한 꽃내음을 품어내는 순결하면서도 유혹적인 붉디붉은 입술... 내 것이다..... 모든 것이....다 내 것이다.... 그 누구도 더 이상은 건드리지 못해.... 몸도 마음도....다 내 것으로 만들겠다.... 입술에 고정되어 꿰뚫을 듯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우혁이 분홍빛 혀를 조금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다가 순간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재원의 눈빛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마치 도발을 한 대가를 치루라고 하는 듯이 숨 쉴 틈도 없이 격렬하게 키스를 퍼붓던 재원은, 속에서 미친 듯이 드날뛰는 욕구를 간당간당한 자제력으로 간신히 억눌러 붙들어매놓고 참아보려했지만 결국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완전히 그대로 놓아버렸다. "하악!! 아....으윽..." 숨이 턱턱 막힐정도로 거세게 와 부딪히는 재원의 몸짓에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할정도로 고통밖에 느끼지 못하던 우혁이 아픔을 참지못해 재원의 목덜미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며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하나 거의 이성을 놓아버린 재원은 아프지도 않는지 우혁의 몸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기라도 할것처럼 갈수록 더 거센 속도로 깊디깊이 파고들뿐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고통의 순간이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우혁의 몸속에서 서서히 이상야릇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아....아....읏.." 고통을 참으려 재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우혁이 차츰차츰 커지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쉴새없이 몰아쳐오는 짜릿한 쾌감에 자기도 모르게 재원의 등을 손톱 끝으로 할퀴었다. 어깨를 물은것보다 할퀸 것이 더 아팠는지 조금 정신을 차린 재원이 고개를 들었고, 열에 들떠 혼미한 시야로 들어온 우혁을 본 순간..... "....헉...." 미칠듯한 쾌감에 온몸을 뒤틀며 경련을 일으키던 우혁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선정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채.... 또한 그런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재원의 눈빛이 이젠 빛 한점없이 완전히 블랙홀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린 것도 모른채.... 촉촉히 젖은 입술을 벌려 가쁜 숨을 다급히 몰아쉬다가 다시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폭팔해 터져버리는게 아닐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드날뛰며 쿵쾅대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재원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우혁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서로의 심장이 뛰는걸 느낄수 있을정도로 바짝 밀착된채 땀으로 흥건히 젖은 살갗에 와닿는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생생히 느끼다가 재원이 다시 천천히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며 우혁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이를.....보는 일은 없을거야.." "....하아...아...." "......오직 너한테....걸기로 했으니까..." "...흐윽.....아.......아읏-!!" "...맹세 따윈 하지 않아.....그럴 필요도 없어.." "아......으흑.......윽......제....제발...." "그러니까.....그러니까.....너도...나만 바라봐 줘..." "하아.....아윽...아--아--아악-!!!" 비애(悲哀)의 눈물을 흘려내던 암청빛은... 쾌락(快樂)의 눈물로 젖어들고... 애절(哀絶)한 울음을 토해내던 장밋빛은... 음란(淫亂)한 신음성을 내뿜는다... 그렇게..... 폭풍처럼 닥쳐온 감정의 소용돌이에 운명적으로 휘말려버린.... 미성숙한 心身을 가진... 아직 어린 두 戀人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어느 한 사람의 비감(悲感)어린 고통도... 까마득히 모른채.....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33- # # # 내 생애 최대의 오점(汚點)은... 널 잃었던 그 시간들... 그대로 놔두진 않을 거다.... 네 몸에 새겨진 흔적 따위....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넌 내 것이다..... 잊지마 넌 나만의 것이야..... "으음....?!" 뭔가 섬뜩한 기운에 눈을 뜬 칠현은 아직 잠에 취해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무엇 때문에 깊히 들었던 잠이 깨버렸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은지 싸늘하게 덮쳐오는 차가운 밤공기로 인해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돋자 시트를 잡아당겨 얼굴 위까지 덮었다. 하나 얼마 않되어 칠현은 도로 시트를 걷고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저택 내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면 다 깨우고도 남을 정도로 뭔가를 연속으로 때려 부수는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파괴음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젠장......shit-!!!" 눈위로 흘러내린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의 쥐어뜯듯이 거칠게 쓸어넘기며 칠현은 가운을 걸칠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칠현이 계단을 서너 개씩 건너뛰며 내려가는 동안에도 온 집안을 울려대는 끔찍한 소음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1층 홀에 다다른 칠현의 시야 가득 들어오는 집안 풍경은 그 짧은 동안 어떻게 그렇게도 황폐해질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할 정도로 완전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숴진 정체불명의 파편들 한가운데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손에 걸리는 족족 집어던지고 때려부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안승호-!! 미쳐도 곱게 미쳐-!!!!" 일일이 피할 새도 없이 얇은 슬리퍼 바닥 아래로 조각난 유리파편들의 날카로운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며 칠현은 승호에게로 달려들었다.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아 뒤로 내던지며 휘청이는 승호의 몸을 부여잡고 쇼파가 있는 쪽으로 그를 잡아끄는 칠현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바둥거리며 휘청대는 그의 몸에 딸려 하마터면 유리조각투성이인 바닥으로 같이 쓰러질뻔한 칠현이 간신히 승호를 잡아끌어 쇼파위로 내팽게쳤다. "헉..헉......씨팔....헉...." 바닥으로 털썩 내리주저앉으며 세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거칠게 숨만 몰아쉬던 칠현이 뒤의 쇼파 위에 널부러져 있는 승호를 돌아보지도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기다리란 말야-!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안승호가 이따위로 너절한 인간이었어?!!! 그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목이 터져라 바락바락 악을 쓰는 칠현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주먹을 틀어쥐고 분을 이기지 못해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는 칠현의 모습은 등뒤에 널브러져 인기척도 내지 않는 승호보다도 오히려 더 불안정했다. "찾고 있는 중이잖아-!! 왜 조금 더 못참아-!! 왜 이따위 짓이냐고-!!! 대체 왜-!!!!" 아무 의미없는 고함을 질러대는 칠현의 눈이 뿌옇게 흐려지며 서서히 물기로 젖어들어갔다. 그렇게도 냉철하고 이성적이던 안승호도 결국은 보통인간과 별 다를바 없음이 판명되고 말았다. 너무도 침착해 오히려 불안했던 승호는 우혁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 채 일주일도 않되었을 때부터 급격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후론 간발적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여러차례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일 정도로 완전 엉망진창이 되버리고 말았다. "제발 이제 그만해...그만하라구-!!!! 그만해...그만.....윽....." 자신의 단 하나뿐인 친혈육이자.... 어렸을때부터 우상이나 다름없던 형.... 다정다감하고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던... 가장이나 다름없던 우리들의 맏형...... 그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안승호의 친동생이란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하나 그 옛날..... 우혁이 납치되었던 그날 이후로...... 다정하고 믿음직하던 형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그의 행방을 찾아 헤맸던 승호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섬뜩해 질정도로 광기어린 편집증(偏執症)적인 곳이 있었다. 또한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 사건의 주범들이 꽤 알아주는 집안의 망나니들이란 것을 안 후부터.... 승호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집안들까지 파멸시키는데 생사를 건 것처럼 전념을 다했고 마침내 뜻을 이뤄냈다. 그 과정 중에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지만 승호는 그런 일로 자신의 결심을 흔들리게 놔두지 않았고 또 실제로 눈하나 깜빡하지도 않았다. 겉표면으로야 여러 기업인수와 합병건에 관련된 사건들이었을뿐이지 실제로 그 원인에 해당되는 세세한 속사정을 알리없는 세간의 사람들에 의해... 이후로 안승호는 고인이 된 장성혁 회장보다도 더 탁월하고 천부적인 사업가로 재계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지만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대명사가 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버린 승호의 25번째 생일날 이후..... 승호 뿐만 아니라 이젠 입시생인 칠현의 생활 역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버리고 말았다. 파티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명단. 오직 그것만이 유일하게 매달려볼 실마리일뿐... 그날밤 이후로 모습도 보이지 않는 에릭에게서도 역시 우혁을 찾았다는 연락은 없었다. 고함칠 기운도 이젠 없는지 욕설만 계속 주절거리며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던 칠현이 몸을 반쯤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말로 설명을 못할 정도로 피폐해진 승호의 창백한 얼굴 위에는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질 않았다. 허공에 틀어박혀 있는 미동조차 없는 눈동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칠현은 잔뜩 핏물이 말라붙어 꺼칠해진 그의 입술이 움찔하며 떨림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칠현의 귀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낮에는 너무나도 태연히 회사일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밤만 되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술에 취해 거의 발작에 가까운 난동을 부리던 승호에게서 그날 이래 처음으로 의미모를 말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형!! 뭐라고 했어!!!" 무슨 말이든 간에 집에만 오면 벙어리마냥 꾹 다물고만 있던 입을 열었다는 것에 놀란 나머지 칠현은 승호의 어깨를 부여잡고 세차게 흔들며 소리쳤다. "..........ㄴ....다......" "뭐?! 크게 말해!! 형! 승호형!!" 승호의 입술에 바짝 귀를 갖다대며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외쳐대던 칠현이 어느 한순간 승호의 몸을 흔들던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양쪽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칠현의 손가락이 갈고리마냥 살속으로 파고 들어갔지만 승호는 아무 느낌도 없는지 눈썹 하나 찌푸리지도 않았다. 황폐할 정도로 메말라보이던 승호의 눈빛에 차츰차츰 묘한 생기가 떠오르는 걸 바라보며 칠현은 방금전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겨야했다. '.....죽...인..다니......누구...를.......??!!!!!!!........ ..............설마.........찾은 거야......형?!!!!!' -34- # # # 왜 하필이면 너와 나였을까..... 누구도 답해 줄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왜 하필이면....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두사람이어야 했을까....... "....핫...!" 갑작스런 한기 때문에 잠이 설 깬 우혁은 덮쳐오는 오한에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잠결에도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다가 부드럽고 온기를 지닌 무언가가 와닿자 그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감촉이 부드러운 그 무언가에 완전 밀착되어 몸이 금새 따뜻해지자 그제야 만족한 듯 나즉히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에 빠지려던 우혁은 순간 자신이 파고든 것이 재원의 가슴팍이란걸 그제야 깨닫고는 순식간에 잠기운이 싹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숨을 멈추고 자신의 머리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우혁은 슬며시 눈을 들어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잠들어 있는 재원을 올려다보았다. 혼혈인 자신에 버금갈 정도로 흰 재원의 얼굴 위로 어둑어둑한 불빛이 반사되어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었다. 깨어있을땐 조금은 차가워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잠이 든 지금은 너무나도 여려보여 의외로 상처받기 쉬워보이는 모습이었다. 재원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혁이 별 생각없이 시선을 내려뜨리다가 순간 그의 벗은 상체를 보고는 당황해 어쩔줄 몰라하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재원에게 파고들기 이전부터 이미 자신의 몸이 거의 재원에게 안긴 자세로 알몸으로 뒤엉켜있던 상태였다는것을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은 우혁의 얼굴이 어느순간 급속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재원의 알몸을 본 것이 처음도 아니었고 이렇게 같이 끌어안고 잠이 든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혁은 재원이 자고 있어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절로 감사해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재원의 벗은 몸을 본 순간 절정에 다다르자마자 그대로 잠에 곯아 떨어졌을 정도로 둘 다 완전히 녹초가 되버렸던 간밤의 뜨겁고도 격정적이었던 기억을 떠올려버렸던 것이다. 화끈거리며 달아오른 자신의 뺨을 누가 볼새라 손으로 감싸쥐며 열을 식히던 우혁은 급속도로 빨라진 심장박동 소리가 밖으로까지 새어나갈 것만 같아 걱정될 정도였다. '......뭐....뭐야.....여자..같이.....' 눈안 가득 들어오는 재원의 나신 때문에 계속 연상되는 간밤의 기억때문에 당혹스러워하며 눈 둘 곳을 몰라하던 우혁이 입술을 깨물며 그런 자신을 탓하다가 문득 재원의 등 뒤쪽에 켜져 있는 등불에 시선을 멈췄다. 불빛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우혁의 버릇을 안 후부터는 불을 켜놓고 자기 시작한 재원도 한동안은 쉽게 잠을 이루질 못했지만 곧 불빛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일일이 자신에게 맞추려 애쓰며 표현은 않해도 불편하지 않게 알게 모르게 신경 쓴다는 것을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왼팔은 자신의 머리를 받친채 옆으로 뻗어있었고 오른팔은 등허리에 걸쳐진채 두 쌍의 다리가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자세로 자신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재원의 얼굴을 다시 조심스레 올려다보던 우혁은 나즉히 한숨을 내쉬며 재원의 팔을 살짝 밀치곤 엉켜있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빼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혁이 일어나자 침대가 약간 출렁거렸지만 인기척에 민감한 재원은 그때까지도 의외로 깨어나질 않았다. 간밤의 일 때문에도 그렇지만 사실 재원도 그동안 우혁을 돌보느라 많이 지친 상태였던 것이다. 누워 있을때는 몰랐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타박상이라도 입은 듯 욱씬거리며 다리를 들어 올릴때마다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꽤 통증이 밀려왔지만 우혁은 용케 신음 한번 내뱉지 않고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잔뜩 구겨진 시트 한장을 들어올려 알몸에 휘감은 우혁은 잠시 재원을 내려다보았다. 침대가에 서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재원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우혁은 그가 잠에 푹 빠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테라스 창가로 다가갔다. "아아..."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이 정원의 모든것을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여놓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우거져 있는 작은 숲과 넓은 잔디밭.. 밤공기에 실려 코끝으로 날아드는 향긋한 내음을 지닌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고풍스런 프랑스식 창문앞에 서서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환상적인 정원의 야경에 넋을 놓고 있던 우혁은 자신이 살아왔던, 황폐하게 변해버린 저택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엔 여기와 별다를바 없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안전함과 기능적인 점밖엔 배려되지 않은 곳. 승호형..... 대비된 정원 풍경때문에 갑자기 떠올려버린 안승호에 대한 생각에 우혁은 순간 바늘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하아...." 가슴을 움켜쥐며 심장을 찔러대는 듯한 아픔을 가라앉히려해도 쉽게 나아지질 않고 갈수록 그 강도가 세졌다. 우혁은 설마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이곳에 머문지도 어느새 1달을 훨씬 넘어 서고 있었다. 분명 장우혁이란 인간은 안승호란 존재에게 이래서는 않되었고 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에게 자신의 행방을 알릴 엄두도 나질 않았다. 또한 재원에게 언젠가 한번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그답지 않게 답변을 회피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납치를 당했는지, 누가 납치를 했는지.. 또 하필이면 왜 이곳에 재원이 있는지를 우혁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곳이 재원의 집이라는 것과 재원과 관련된 누군가가 자신을 납치했다는 것밖에 우혁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납치한건지는 몰라도 지금으로 봐선 납치를 당했다는게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도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을 데려다놓고 승호에게 무슨 협박을 가하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긴했지만 도저히 그런쪽으론 연상이 않될 정도로 이곳의 분위기는 여유롭고 편안했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친절했고 그를 귀빈처럼 세심히 대해줬다. 그러니 승호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우혁은 숨막힐정도로 자신을 규제하는 승호의 보호 아래서 벗어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그일로 우혁은 한바탕 곤욕을 치루고 있긴 했지만 대신에 우혁에겐 주체못할 정도의 자유로움이 주어진 것이다. 또 썰렁할정도로 크기만한 승호의 저택과는 달리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혼미함 속에서도 창문 너머 밖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쾌활한 웃음소리.... 복도 밖에서 돌아다니며 굳이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경쾌한 발자국 소리들..... 소곤거리며 지나치는 가지각색의 감정 깃든 목소리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있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점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다 해도 우혁이 깨어 있을땐 어김없이 귓속으로 밀려드는 외부의 여러 혼합된 소리들은 자신이 혼자만 있는게 아니란걸 알게해줘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줬다. 그래서 우혁은 차일피일 승호에 대한 생각을 미뤄둔채 애써 그일을 자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상태로 지낼수만은 없다는걸 우혁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혁의 몸상태가 날이 갈수록 점차 호전되고 있는 지금으로선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조금만 더 뒤로 연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엔, 인정할 수 없는 숨겨진 속내까지 포함되어 있다는걸 그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을 바라보는 우혁의 눈빛이 승호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인해 우울한 빛으로 물들며 금새 차오른 물기로 습윤(濕潤)해져버렸다. '승호형.........나.......어떻해야 해....... ........모르겠어......나도....내 마음을....모르겠어... 하지만......더이상 내가.....형 곁에 있어서는.... ....않된다는 것만은......나도 알아.......... .........칠현이도.........다....나 때문인걸......... .........형..........승호형...........내 말 들려......?' -35- # # # 어떻해야 좋을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끌어안고 싶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예감했나 보다..... 신경을 갉아먹는 이 불안감의 정체가...... 네가 돌아오기까지.... 아주.....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고였음을...... 벽의 한 면 전체가 유리로 된 넓찍한 사무실은 그 방 주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썰렁할 정도로 장식이 배제되어 있었고 하다못해 그 흔한 화분 하나 놓여있지 않을 정도로 오직 사무적인 편리함과 기능적인 면만이 강조되어 있었다. 유리너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지상이 까마득히 멀어 도로 위의 자동차들이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방은 고층빌딩의 거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유리벽 앞에 서서 시야 가득 들어오는 빌딩숲 너머로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사내는 아마도 이 방의 주인인 듯했다. 말쑥한 검은 정장 차림으로 팔짱을 낀채 미동도 없이 고개를 약간 젖히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엔 범인이 함부로 범접치 못할 위압감이라고 해도 좋을 그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뒤에 몇 발자국 떨어져 서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에릭은 꽤 오랫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 내심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승호의 생일 파티 이후로 에릭은 자신의 치욕적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거의 내버려 두다시피 했던 자신의 조직을 이용해야했다. 승호의 밑으로 들어가기 전의 에릭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뒷세계에선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는데다가 스스로도 작은 조직까지 거느리고 있던 일종의 조직폭력배 두목이었다. 하나 라이벌 조직과 거의 전쟁이라도 해도 좋을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지면서 과실로 상대두목을 죽이는 불상사가 일어나면서 경찰과 복수를 하려는 패에게 쫓겨 이리저리 몸을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피행각을 벌이던 중 승호에게 구원을 받아 몸을 은신하게 되었고 차츰 그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게 되어 지금은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버렸던 것이다. 제일 믿음직한 수하에게 맡겨두었던 조직의 체계적인 정보망을 이용해 우선 1차 대상자로 파티 참석자 본인을 타겟으로 삼았고 거기서 실패하면 그 다음엔 파티참석자와 같이 동행했던 파트너들과 그날 고용됐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당장 우혁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먼저 가장 쉽게 그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파티를 자주 여는 상류층이다보니 그런 것이 있을때마다 그때그때 인력을 충당하는 것을 노려 고용인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대략 1달동안 그렇게 조직의 수하들을 그 타겟들의 집안으로 도둑이나 임시고용인 등으로 가장시켜 집안내부를 살펴보게해 우혁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었다. 또한 여건이 않될 경우엔 그 집안의 고용인을 납치라도 해서 알아내려 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나 솔직히 에릭은 이 단계에서 우혁을 찾아낼 것이라곤 그리 기대도 하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납치를 해갔을 정도라면 아예 작정을 하고 실행한 것일테니 집안에 숨겨놨다 해도 쉽사리 남의 눈에 띄게 놔두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집 한집 지나칠때마다 그 어디에도 우혁의 흔적은 찾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마지막 타겟의 집이었던, 그것도 의심조차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가망성도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사람의 집에 들어갔던 한 수하에 의해.... 결국 우혁을 납치했던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실을 알아낸 후 에릭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컸고 이것을 어떻게 승호에게 알려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승호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물론 사실을 알았다해도 당장 찾아갈 정도로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란건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장우혁이란 한 존재에 대한 안승호의 감정이 어떤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에릭으로서는 행방을 안 후 벌써 1주일이 넘도록 이렇다할 여타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승호에게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태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모습에는 솔직히 놀랍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삼 그 냉정함에 소름돋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나 그것은 단지 에릭의 착각에 불과했다. 지금 이순간도 승호의 전신은 들끓어오르는 살기와 울분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벽 너머로 고정되어 있는 눈빛이 슬쩍 닿기만해도 베어질처럼 칼날같이 곤두서 있다는것도..... 내부의 심화(心火)를 이기지 못해 짓깨물고 있는, 이미 헤질대로 헤졌던 아랫입술이 다시 찢겨져 베어나온 비릿한 핏물을 입안으로 삼키고 있다는것도.... 팔짱을 끼고 있던 양손가락들이 간질환자마냥 경련을 일으키자 뼛속까지 파고 들어갈 듯이 팔뚝을 점점 거세게 움켜쥐고 있다는 것도..... 조금이라도 입을 떼기만 하면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올 것만 같아 차라리 아예 아무 말도 않하고 있다는 것도..... 승호의 뒷모습밖에 볼수 없는 에릭으로선 당연히 알수 없는 일이었고 또 웬만한 인간이 아니라면 절대 그 심리를 파악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안승호의 포커페이스는 유명했다. 한참동안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던 승호가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오랜 침묵 끝에 흘러나온 승호의 음성은 평상시의 그것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네?! 아...아직.. 곧 알아내겠습니다." 오랫동안 굳게 다물려만 있던 승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지극히 침착하고 조용한 평소의 음정 그대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그속에 깃들어 있는 불분명한 그 무언가에 오싹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그 말만 내뱉고 또 한참을 말이 없는 승호의 강인해 보이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릭은 웬지 그 모습에서 고독함이 느껴지는 듯 하자 입밖으로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론 우혁이 어디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 게다가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에릭도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다행스러워 했지만...... 뒤이은 말을 들었을땐 에릭은 순간 땅밑으로 완전히 꺼져 들어가 버리는 것만 같은 쇼크를 받고 말았다. -저....형님... -뭐야. 우선은 안전하게 계시다는거 아냐. -예. 그거는 그런데....저.... -뭔데 그렇게 더듬어? 내 성질 몰라? -아 저.....형님. 확실치는 않지만.... -.......무슨 일이야... -....저...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그...저.... -빨리 말해!!! -그...그 이회장 아들이...그분...그러니깐.... ...저....우혁님을 대하는게... 보통감정이 아닌듯.. -뭐라고?!!!! 물론 겨우 이틀밖에 그 집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 수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다 믿을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 말을 한 놈이 평소에도 예사 눈치를 가진게 아니라는데 있었다. 그걸 잘 아는 에릭은 그래서 그 얘기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치부하고 웃어 넘길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회장이 대체 뭐가 아쉬워 승호와의 친분까지 포기해가면서 우혁을 납치해갔고 또 아직까지도 우혁을 납치해 간것에 대해 아무 대가나 요구도 없었던 점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에릭은 더더욱 그 얘길 그대로 흘려 넘길수가 없었다. 그러니......그냥 헛소리라고 무시할 것만은 아니었고.... 혼자 가만히 속에만 담고 있기엔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넘길만큼 단순한게 아니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지나칠정도로 고요한 승호의 모습을 보니 에릭은 오히려 물밀듯이 밀려드는 불안감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버렸다. "...에릭.." 주먹쥔 손가락의 손톱끝이 살속으로 파고들어가는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있던 에릭의 귓속으로 나즈막한 승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고개를 번쩍 든 에릭의 눈에 변함없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이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승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승호의 말을 기다리는 에릭에게 들려온 것은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은 목소리였다. "....해줘야 할 일이 있다." -36- # # # 놓쳐버렸던 한때의 그 시간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그 시간이..... 이런 결말을 주게 될 줄.... 그때는 정녕 몰랐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운명에 휘말려 버리게된.... 내 소중한 이 들..... 학교에서 이제 돌아오는지 현관문을 막 들어서던 교복차림의 재원은 밖으로 나오려던 누군가와 어깨를 심하게 맞부딪히는 바람에 그 반동에 의해 뒤로 약간 주춤하며 물러서야했다. 어깨끼리 부딪힐때 느낀 상대방의 단단한 몸에 실려있던 힘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재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치려했다. 하나 부딪히는 순간부터 걸음을 멈춘 채 옆을 지나치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계속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재원도 흘끗 눈을 돌려 상대방을 쳐다봤다. 짧게 컷트친 단정한 스포츠형 머리에 꽤 미남형의 얼굴에다가 양복으로 감싸여 늘씬해 보였지만 아까 부딪혔을 때 느낀 바로는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돌덩이같이 단단한 몸이었다. 워낙 회사일이나 친분관계로 들락거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었고 또 지금까지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본 사람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재원이 돌아보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의 시선은 유별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무감각해 보이면서도 날카로운 재원의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해지자 그 남자는 잠시 교복을 입은 재원의 전신을 빠르게 한번 훑어보더니 곧 시선을 돌려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하나 재원이 그 짧은 한순간에 그에게서 느낀 것은 분명 적대감이었다. "도련님!" 윗층과 연결된 계단의 중간 쯤을 올라가던 재원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 것은 다름아닌 그의 유모였다. 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대충 흔들며 인사로 대신하고는 계속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하나 다시 그 자리에 도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님이 부르십니다" 재원의 아미에 선이 그어지며 방금 전까지만해도 무심하던 얼굴 위로 짜증난 기색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한쪽 어깨에 걸쳐매고 있던 가방을 확 잡아채어 밑으로 내려잡는 재원의 몸짓엔 그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중에 간다고 하세요. 유모" 하루라도 빨리 우혁의 몸이 건강해지는대로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새삼 다짐하며 재원은 멈춰 섰던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화원을 지나쳐 왔기 때문에 우혁이 정원에 나가지 않은 것은 확실했고 들어올때 올려다본 자신의 침실 테라스 창문이 닫혀 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금쯤은 일광욕실에 있을거라 생각하며 재원은 계단을 몇 개씩 건너 뛰며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나선형으로 꺾인 2층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간 재원이 막 3층 계단에 발을 놓으려할 때 귓가로 파고든 유모답지 않은 조용한 음성은, 순간 재원의 표정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친구분의 일이라고 하면 알거라 하셨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내려놓으며 책상 위를 톡톡 손가락으로 치면서 뭔가를 고심하던 이회장은 갑자기 벌컥하고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서재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재원의 전신에 베어있는 희미한 초조감을 확인한 순간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원이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감정을 내비쳤던게 대체 언제적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그가 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체 그 속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도통 들여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내진 않는다 하더라도 최근들어 재원의 심경에 어떤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이회장도 확연히 느낄수 있었다. 재원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게 누구라는걸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때문에 요즘들어 이회장은 온갖 어지러운 상념에 시달려야했다. 재원의 감정이 한때의 치기어린 젊은 혈기로 인해 간단히 흘려 넘길 수 있는... 소위 다른 부유층 개망나니들이 밥먹듯이 해대는 한낱 시시껄렁한 불장난 따위가 아님을 이회장도 이제는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부터 재원이 그럴것이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느끼게 되고보니 이회장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차츰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대인관계에 냉소적이던 재원이 자신을 완전히 흐트러뜨릴 정도로 목을 매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을 심복의 입을 통해 전해들었을 때 이회장은 거의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었다. 애초에 재원에 대해선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내버려두다시피 하고 있던 이회장은 혹시라도 그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되찾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뒤 않가리고 안승호에게서 그 소년을 빼앗아 왔던 것이다. 하나 아직까지 이회장은 그 소년을 단 한번도 가까이서 제대로 본적도 없었고, 또 일부러 찾아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안승호의 생일 파티장에 뒤늦게 내려왔던 두 소년 중 어느 쪽이 재원이 마음을 빼앗긴 상대인지도 모를 정도로 이회장은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서서 그쪽으론 아예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았었다. 물론 처음엔 대체 어떻길래 안승호뿐만 아니라 재원까지도 성별의 한계를 떠나서 그렇게 빠져들 수가 있는지 그 존재에 대해 호기심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일로 인해 재원이 자신에게 또 얼마나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 그가 말은 않해도 이회장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납치해온 그 소년에 대한 것을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고 특히나 재원과 있을때는 무의식으로라도 그 소년에 대한 언급은 절대 하지를 않았다. 이회장의 솔직한 심정으론 자신의 뒤를 이을 단하나뿐인 후계자가 남의 소유였던, 그것도 男性에게 빠져있다는 사실이... 더군다나 재원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 한때의 유희꺼리가 아님이 확실해진 이상 결코 좋은 감정만 가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재원에게 이렇게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 존재에 대해 불쾌감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 소년에 대한 일이 아니었다면 재원이 교복차림 그대로 들어올만큼 자신의 호출에 이렇게 금방 올리도 없다는걸 자각하며 이회장은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우혁의 일이라니." 이또한 마찬가지로 둘이 있게될땐 주로 이회장이 말을 하는 편이었고 재원은 거의 입을 다문채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분간도 않갔었는데 오늘은 서재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선 거기 앉아라" "아니요. 서서 듣겠습니다" 단박에 거절하는 재원의 음성에 깃든, 이젠 숨기지도 않는 뚜렷한 초조감에 이회장은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화려한 문양이 겉표면에 새겨진 사각의 초대장같아 보이는 것을 재원에게 건네줬다. "안승호가 사람을 보냈구나" 초대장을 펼쳐보던 재원은 순간 자신과 조금전 현관에서 부딪혔던 그 사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했던 원인불명의 적대감까지도. "......알아버렸군" 가까이 있는 이회장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즉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재원의 시선이 초대장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일 저녁식사에 초대했단다" 초대장에 쓰여있는 이회장의 이름 옆에 박혀있는 '이재원'이란 석자에 고정되어 있던 재원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팔꿈치를 책상위에 올려 놓고 깍지껴 모은 손등에 천천히 턱을 갖다대면서 재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동안 올려다보던 이회장이 넌지시 의사를 물었다. "네 의향은 어떠냐. 거절해도 상관은..." 초대장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드는 재원의 가라앉은 눈빛에서 한순간 베일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칼날같은 날카로움을 발견한순간 이회장은 그대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저런 눈빛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만큼이나 강한 재원의 승부욕에 불이 붙었을 때란걸 잘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럴 때 재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해선 않된다는 것도. 그리고 재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회장이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 되돌아왔다. "...가도록 하죠. 저도...안승호를 보고 싶습니다" -37- # # # 차가운 가면에 숨겨진 은밀한 비밀..... 솔직할 수 없는 오염된 군상(群像)들... 거짓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미소를 띄운 채 상대를 파멸시킬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은 견뎌내지 못할 세상.... 그래서....투명한 흰 빛을 갈망하는지도..... 한눈에도 특급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롭기보다는 고급스러움에 중점을 맞춰서 꾸며진 장중한 암갈색톤의 실내에는 조용한 선곡으로 잔잔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그랜드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고기를 썰며 접시와 맞부딪히는 나이프 소리와 가끔가다 빈 잔에 와인을 따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지극히 조용했다. 클럽 회원제로 운영되는 최고급 레스토랑 linfe의 내부는 정가운데의 한 좌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테이블이 텅 비어 있었다. 안팎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서서 리시버를 귀에 꽂고 검은 양복 안저고리에 손을 댄 채로 린페의 정중앙과 밖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경호원들의 존재로 미루어 볼때 오늘 이 자리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와있음을 짐작케 했다. 한쪽 옆에 떨어져 서서 잔이 빌때마다 와인을 채워주는 와인담당뿐만 아니라 테이블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정중한 자세로 서있는 린페의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다들 상류층 고객들을 오랫동안 상대해온 능숙한 배테랑급들이었지만 오늘따라 다들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루 저녁식사를 위해 통째로 린페를 빌린 안승호란 존재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맞은편에 앉아서 지금 막 와인잔을 입에 갖다대는 사람은 경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자신의 영역인 재계(財界)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두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일진그룹의 이재석 회장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상류층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는 파파라치들의 눈을 잘도 피해다녀, 호기심을 유발시키며 무성한 헛소문만 난무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후계자까지도 동반해서 나온 자리인만큼 더욱 조심스러워 했다. 이회장은 재원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오려 결심했는지 그 의중(意中)을 가늠해 볼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의 입장에서도 이 자리는 상당히 껄끄럽고 심기 불편한 자리였다. 우선 대외적으로 명망높은 이재석 회장이 스스로의 이름에 먹칠을 해버린거나 다름없는 '납치'건에 대해 그 피해자인 동시에 이미 진상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것도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당사자와 마주 대하고 앉아서 만찬을 즐기며 환담을 나눈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자리엔 납치를 벌이게 된 동기나 다름없는 재원까지 나와서 같이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안승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원을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회장도 대기업의 총수(總帥)인만큼 웬만한 사람의 심리는 그 표정만 봐도 읽을 줄 안다고 나름대로 자부해 왔지만 안승호에겐 그것도 별무소용이 없었다. 혹시나 재원의 일을 아직은 모른다해도 곧 알아내는건 시간문제라고 여겼지만 이회장은 그가 초대장에 재원의 이름까지 올린 것을 되새기며 이미 알아냈을 가망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리가 상당히 껄끄럽고 복잡 미묘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사실 이회장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승부사다운 기질은 지금과 같이 서로 각자의 속마음을 숨긴채로 상대방을 가늠하고 있는 흥미진진한 상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고 해야 옳은 편이었다. '......연적(戀敵).....관계라 이건가.....저 얼음 덩어리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못견디게 궁금하군' 단 한시도 떼어지지 않는 수십 쌍의 따가운 시선들을 온몸에 집중포화로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씹어 삼키며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칠현은 이렇게 딱딱하고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먹다간 도로 체하겠다고 연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물잔에 손을 뻗다가 힐끗 자신의 맞은편을 건너다보았다. 살코기를 은빛 포크로 찍어 올려 막 입가로 가져가는 재원의 무덤덤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가 이회장의 뒤를 따라 들어왔을 때는 미처 알아보질 못하고 딴 사람인줄로만 알았었다. 하나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제서야 그가 이재원임을 알아본 칠현은 말로 표현을 못할정도로 크게 놀람과 동시에, 승호에게 억지로 끌려나온 이 자리가 아주 끔찍하고 난감한 시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자존심이 강한 칠현은 재원에게 당했던 치욕적인 기억들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고 지금까지 이정도로 자신을 함부로 막 대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던지라 재원에 대한 앙금이 속에 그대로 쌓여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칠현은 일부러라도 재원을 모른척 했고 재원도 마찬가지 심정이였는지 칠현을 보고도 이러타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채 둘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행세하는 중이었다. 평소 즐겨입던 캐쥬얼한 복장이 아니라 라인이 딱 떨어지는 광택섞인 회색 줄무늬 정장에 은빛 실크 넥타이까지 단정히 맨 재원의 모습은 학교에서 봐왔던 '평범한' 이재원과는 완전 딴판인 그야말로 귀티가 흐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일진그룹의 후계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아주 익숙한 듯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이는 재원의 모습은 지금까지 칠현이 보아왔던 여러가지 모습의 이재원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변신이었다. '의외잖아?......이런건 못견딜 타입으로 봤는데?' 칠현 자신도 이런 분위기를 참고 견딘다는게 고역에 가까울정도로 힘들었는데 오히려 거칠지만 그래도 자유로움이 온몸에 베어있던 재원이 더 이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자 의아해했던 것이다. 긴 손가락을 뻗쳐 느긋하게 와인잔을 들어올려 마시는 모습을 눈썹 아래로 흘끔 바라보다가 재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칠현은 마시고 있던 물을 급히 삼키다가 하마터면 사래가 걸릴 뻔했다. 하나 재원의 눈은 의외로 당황해하는 칠현을 스치듯이 그냥 거쳐 와인을 입안으로 흘려 넣으며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 보는 거야?' 재원은 자신의 정면에 앉아 있던 칠현이 물을 들이키면서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다는걸 눈치챘지만 모른체하며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는 고기를 입안으로 넣고 묵묵히 씹고만 있었다. 둘 다 학교에서 교복을 입은 모습밖엔 보질 못했기 때문에 오늘같이 이렇게 사복, 그것도 만찬을 위한 정장차림인 칠현의 성숙해보이는 모습은 재원도 처음 보는 것인지라 칠현만큼이나 그도 어색한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칠현과는 달리 재원은 그가 분명 자기 형과 동행해 이 자리에 나올거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린페에 들어와서 안승호의 옆에 자리잡고 있던 칠현의 모습을 발견했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다. 하나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회장의 뒤를 따라 천천히 들어서는 자신을 본 순간 헬쓱하게 낯빛이 변하던 칠현을 상기하며 재원은 그가 이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나왔다는걸 즉시 간파해냈다. '.........내 예상이 빗나갔군' 칠현의 어깨 너머쯤의 공간에 시선을 두고 있던 재원은 마시던 와인잔 너머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전날 자신과 부딪혔던 사내가 보이자 입가를 비틀며 곧 시선을 돌렸다. 재원은 본래는 분명 이보다 더 향긋했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지금은 쓴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와인을 입안에 넣고 혀로 굴리며 여전히 물컵을 입에 대고 있는 칠현에게 시선을 주는 척하다가 넌지시 그 옆쪽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재원의 나른해 보이던 눈동자 위로 베일듯한 한기(寒氣)가 스쳐지나갔다. 와인잔을 거머쥐고 있던 손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잔잔하던 붉은 수면이 일렁거렸지만 재원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안......승..호.!!!' -38- # # # 날 바라봐 주지 않았을 때.... 나라는 존재를 알아주기를 바랬었다.... 내 존재를 깨닫기 시작했을 때..... 조금 더 나를 봐주길 바랬었다.... 내게로 향해진 시선을 느꼈을 때..... .........난.....미칠 듯이 갈망했다......... .....오직 나만의 소유가 되길........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여다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뗀 우혁은 트레이를 밀면서 방안으로 들어오는 왜소한 체격에 검정계통의 옷을 입은 40대의 중년여인을 본 순간 이상한 표정을 띄우며 앉아 있던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원의 유모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 작달막한 여인은 우혁이 이 집안에서 재원외에 가장 많이 접하는 사람이었다. 우혁이 미음이나 죽외의 음식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고 나서, 처음으로 먹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입이 짧다는걸 알게된 재원은 자신이 학교에 간 이후에는 그녀를 시켜 우혁에게 억지로라도 음식을 다 먹이게끔 감시 아닌 감시를 맡겼다. 그리고 재원의 선택은 너무나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자~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먹어야 해요!! 그렇게 여자보다 더 비리비리하게 생겨서야 어디 밤일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남자는 그저 힘이 좋아야 자기 여편네한테 구박 않듣는다니까!!! 먹는게 부실하니 그렇게 계속 곯곯거리지!!!!!! 그런 몸으로 어느 세월에 장가가서 새색시를 안고 문지방이나 건너가겠어요?!!!! 복상사(腹上死) 않하면 다행이지!!!!!! 자~! 나중에 나처럼 한 불쌍한 여자 괜히 청상과부 만들지 말고 어서 접시를 싹 비워요!!!!!!"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숨도 쉬지 않고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엄청난 성량(聲量)에 우혁은 변명으로 내내 생각해두고 있던 '속이 않좋다'란 말은 입밖으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도로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벌써 한 두번 들은 타박도 아닌건만 복도밖까지 새나갈 정도로 온 방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그녀의 말을 들을때마다 우혁은 매번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를만큼 당혹스러워 어쩔줄 몰라했다. 언젠가 재원과 같이 있을 때 이 말을 처음 들은 재원이 황급히 얼굴을 돌렸지만 우혁은 간간히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몸을 보고 그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걸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난감하고 창피했던 기억만 떠올리면 우혁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이어질 식사시간에 비하면 이런 구박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때 우혁은 이때까지 그가 접해봤던 사람들과는 완전 딴판인 그 커다란 목청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가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줄로만 알았었다. 그때의 놀랐던 기억 때문에 간신히 넘어가지도 않는 음식들을 억지로 다 삼키고나자 그후부턴 조금만 음식을 남기려해도 온갖 낯뜨거운 말로 구박을 다 받아야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그리 먹는걸 즐기지 않던 우혁에게 그야말로 마지못해 먹던 식사시간이 이제는 귀찮은걸 넘어서서 아주 곤욕스런 시간이 되버렸다. 트레이 위에 놓여있던 접시의 은빛뚜껑을 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그야말로 재원에게 들은 그녀의 별명인 '마녀'의 미소와 똑같아 보인다는 생각에 우혁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다가 앞에 떡하니 차려진, 일명 남자들의 정기를 살려준다는 보양식(保養食)들을 질린 눈으로 휘이 둘러보고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먹다가......죽을지도 몰라..' 처음 린페에 들어서면서 테이블가에 느긋하게 서있던 안승호를 멀찍이서 봤을때부터 지금 이순간까지도 재원은 마음속의 동요를 억제하느라 엄청난 노력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승호란 이름이 이회장만큼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재계에서 꽤 알아주는 기업가 집안의 후계자들이라면 젊은 나이로 자신의 아버지뻘과 같은 동류급에 속할 정도로 일찌감치 정상에 오른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부친의 입이나 주위사람들을 통해 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재원도 그와 같은 케이스로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은 단한번도 없었지만 안승호란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재벌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꽤 이름을 알아주는 기업체 4개를 겨우 2년이란 짧은 기간만에 SM에 합병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이 바로 안승호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만행에도 불구하고, 비록 안승호가 냉혈한 취급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쟁쟁한 기업가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본보기로 삼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그 어느 분야보다도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인륜도 과감히 무시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닌 종족이 바로 기업가란 계층이었고 안승호가 인정받는 이유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기업들간의 두뇌 플레이와 뒷세계와의 결탁, 그리고 공권력에 대한 사전로비까지 삼박자가 일치하면서 실행된 '합병'이란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단 무자비한 게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그가 바로 게임의 승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을 가진 기업가들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안승호란 인간에 대해 입에 올리기 마련이었고, 비교를 당하는 승호 나이뻘의 세대들은 안승호란 존재에 대해 외경(畏敬) 혹은 경원(敬遠)시하는 극과 극을 달리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혁이 처음 안승호란 이름을 꺼냈을때 웬만한 일에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 재원도 그때만큼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때의 기억은 지금 재원이 받고있는 충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재원은 이회장의 얘기를 경청(敬聽)하면서 간혹가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는 승호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물론 교내에서 제일 미남 축에 드는 칠현과 친형제이니 그 생김새가 어떨거라는걸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얘기로만 듣던 안승호와 실물로 본 눈앞의 안승호와의 갭을 재원은 하나로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예삿 인물이 아닐거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는 상당히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사업가를 연상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아하게 포장된 겉모습에서 발산되는...... ..........저렇게 위험할 정도의 강렬함이라니!! 재원이 승호의 첫 인상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바로 그 자체의 압도적인 존재감(存在感)이었다. 외모로만 친다면 칠현이 오히려 더 잘생겼다고 해야 맞는 말일테지만 그 옆에 앉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칠현의 존재감이 희미해질 정도로 안승호란 남자에게서 발산되는 기(氣)는 절대적(絶對的)이었다. 어느 누구든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 웬만큼 범상치 않고서는 눈길조차 끌지 못할 정도로 안승호는 사람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재원이 순간적이나마 안승호의 기에 압도되었던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깨닫게 된 한가지 사실 때문에 그의 기분은 급속도로 저조해져버렸다. 바로 오늘 안승호가 입고 나온 정장색이 하필이면 암청빛이라는 것이 재원의 신경을 자극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재원은 승호가 애용하는 물품의 거의 대부분이 암청빛이거나 그런 계열이라는 것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겨냥해 의도적으로 저런 색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듣기 좋은 나즈막한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원은 조건반사적으로 승호에게 향하려던 시선을 억누르려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재원은 그가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은 단 한순간도 웃고 있지 않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25세란 나이가 의심이 갈 정도의 동안(童顔)에 떠올라 있는 뭔가 미스매치인 듯한 싸늘한 표정, 신뢰감을 주는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 작은 손짓 하나에도 자연스레 베어 있는 고상함, 그리 눈에 띄게 큰 체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커다랗게 느껴지는 내재된 강인함, 그리고...... 재원은 안승호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와인잔을 거머쥐고 있는 재원의 손가락이 잔을 그대로 깨뜨려버리기라도 할 듯이 더욱 거세졌다. 천천히 와인잔을 들어올려 간신히 한모금 넘기면서 재원은 오직 하나밖엔 머리 속에 떠올리질 못하고 있었다. 우혁과 그대로 굳어 돌이 되버리고 싶었던 환희의 순간에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결코 단 한번도 잊을 수 없었던..... 재원의 심장을 무자비할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 들었던..... 독비(毒匕)보다 더 치명적인 우혁의 차가운 목소리..... ...........난............안승호의.........애인이야........ ...................그래..............사랑해................. -39- # # # 생애 처음 느껴버린 치욕스런 패배감..... 자존심을 무너뜨린 좁힐 수 없는 격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 하나 다른 건 필요 없어.... 敗北感 따위로.....自尊心 따위로..... 멈추려했다면 시작도 않했을 테니까... 원하는 건 단 하나.... 그것만은 절대 넘길 수 없어. 승호는 재원의 날카로운 시선을 진작에 느끼고 있었지만 그쪽으로 우연이라도 시선을 돌린다거나 낯빛을 바꾸는 어리석은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표정을 여지없이 탐색하고 있는 능구렁이같은 이회장에게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애초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승호가 상대하려던 사람은 자신과 비교하면 까마득한 애송이에 불과한 재원이 아닌 바로 이회장이었다. 승호 뿐만 아니라 이회장도 칠현과 재원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기 때문에 둘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그것도 같은 반이라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승호는 재원이 이전부터 칠현과 우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걸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진 않았었다. 하나 우혁과 관계된 얘기라면 승호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결코 그냥 어물쩍 넘기지 않아왔고 그래서 우혁에게 '보통이상의 감정'을 가진 것 같다는 이회장의 아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도 할겸 해서 만찬에 같이 초대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지 성장한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일진의 차기(次期) 회장감의 진면목을 파악해보려던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 동행해 나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의외로 이 자리에 같이 나타난 것이다. 무시하고 있었다면 거짓말일테지만 사실 이정도까지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는 존재일 줄은 승호도 몰랐다. 재원을 처음 본 순간부터 승호의 기분도 그와 별다를바 없이 갈수록 저조해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쯧.......어린애 하나 가지고....이게 무슨 꼴이냐... ......확실치도 않은 말로...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하나 간혹가다 이렇게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이회장의 아들을 보면 그 확실치 않다는 것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다만 연회장이나 리셉션같은 자리에서 주제도 모르고 그에게 은근히 시비를 거는, 제 잘난 맛에 흥청대는 젊은 쓰레기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에 재원의 적대감이 어디에 해당되는지 분간을 제대로 못해내고 있을 뿐이었지만 승호는 곧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이회장이 숨겨 놓는 이유를 알겠군...... 저 나이에 저 정도라면......현이보다 한 수 위다...' 천적끼리는 자신의 유일한 적수를 알아보기 마련이었다. 하나 이때까지만 해도 승호는 키만 멀대같이 큰 창백한 낯빛의 이 어린 애송이가 이후에 자신을 크게 위협할 천적(天敵)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 승호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라고는 아예 의심치도 않았던 이회장이 뜬금없이 왜 우혁을 납치해 갔냐하는 문제였지... 납치해간 우혁을 보고 나서 보통 감정이 아닌 것 같다는 눈앞의 애송이따위는 별로 크게 개념치 않았던 것이다. '......이유없이 이런 짓을 할 인간이 아니다. 또한 소득도 없는 일이라면 더더욱. 내가 알아내리란 것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시하고 단행했다면........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아이를 데려간 이유가 내 약점을 쥐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쯤은 뭔가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그런 것도 없다. 대신 알아낸 것이라고는 확실치도 않은 한가지뿐. 내 기억으로 이회장 아들이 그 아이를 이전에 보지 못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제외되어야 하는데....... 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불쾌감이 들지...?' 술에 만취해 있는 상태가 아닌 평소의 승호였다면 좀더 머리회전이 빨리 돌아가 이맘때쯤이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어야 했다. 하나 승호는 칠현과 재원과의 관계는 아예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한달이 넘도록 우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겉보기엔 않그래보여도 이미 침착함을 상당히 많이 잃은 상태였다. '.......대체....무슨 꿍꿍이속이냐. 이회장..!!!' 테이블에 앉아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기교를 부려놓은 정식만찬요리를 감미(甘味)하는 네 사람의 심중엔 제각각 나름대로의 상념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겉보기엔 다들 이 시간을 즐기는 듯 여유로와 보이는 느긋한 모습들이었다. 사적인 얘기는 배제한채 승호와 이런저런 사업얘기를 나누며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런 분위기를 능숙하게 이끌어가던 이회장이 문득 묵묵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 칠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동생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인물이군. 형만한 아우 없다지만 자네 형제는 둘다 여자들의 애간장을 태울 정도로 정말 잘생겼어.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이회장의 모습에 얼떨결에 화제거리가 된 칠현은 뭐라 할말이 없어 그냥 담담히 침묵을 지켰고 대신 승호가 정중한 미소를 띄우며 화답을 했다. "이회장님께도 저렇게 출중한 자제분이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마음이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우연인 듯 이회장의 옆으로 흘끗 시선을 돌리던 승호는 갈증이 나는지 연신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재원의 무심한 눈빛이 순간 차갑게 빛을 발하는걸 발견했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안사장님이야말로.......재계(財界)의 기린아(麒麟兒) 아닙니까?.....명성이 아주....자자하더군요" 바보가 아니라면 재원의 말이 칭찬의 뜻으로 하는게 아니란 걸 누구나 다 알터였다. 칠현과 마찬가지로 시간 내내 조용히 침묵만 지키던 재원의 느릿하면서도 냉소적인 말투에 금새 눈꼬리를 치켜뜨는 칠현과는 달리 모욕을 당한 그 당사자인 승호는 표정하나 바뀌지도 않고 있었다. '........역시.......그쪽인가....?' 하나 아직은 모른다는 생각에 승호는 더 두고보기로 결심하고 입가에 지은 미소만큼이나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과찬입니다. 아버님에 비하면 저는 아직도 까마득한 후배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꼬임에 대해 도로 맞받아치는 의미심장한 승호의 말에도 재원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승호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서로 막상막하일 정도로 감정이 베어있지 않은, 서로의 얼음같이 투명한 눈동자를 잠시간 바라보던 두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곧 시선을 돌려버렸다. 하나 그 짧은 마주침으로 두사람이 동시에 깨달아야 했던 것은 상대방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과 똑같은 동류(同類)라는 것이었다. '....저게.....고등학생의.....눈빛이라고...?' 재원과 눈이 정면으로 맞부딪힌 순간 승호는 말그대로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 눈빛에 한순간 가슴이 뜨끔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 자신이 너무 그를 쉽게 보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는......절대 놓지 않을거다...' 재원은 그가 자신의 의지로 버린게 아니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남자라는 것을 눈이 마주친 순간 알게 되었다. 안승호에게 우혁이란 존재가 어느 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기 때문에 재원은 어금니를 지긋이 악물며 밖으로 불거져 나오려는 살기를 억눌러야했다.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며 느긋해하던 두 남자의 심기는 몇초의 짧은 순간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회장은 재원에게 응수한 승호의 대답이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닌지라 와인을 음미하며 이젠 눈에 확연히 보이는 두남자의 신경전을 여유있게 관찰했다. 한 사람은 나름대로 감탄해마지 않아 왔던 기대되는 후기지수이자 후일 재원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임에 틀림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고... 다른 한사람은 오늘 이 자리를 있게한 근본원인이자 두통거리이면서도 결코 포기할수 없는, 일진을 이끌어야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하나 이일이 자신의 손에서 이미 벗어났음을 인지한 이회장은 더 이상 관여치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일을 벌려놓은 것은 이회장이었지만 재원이 안승호와 그 소년과의 사이에 누군가 끼여드는 것을 더 이상은 용납지 않을 것이란 것을 방금전에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전혀 예상 밖으로 자신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안승호의 기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재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오늘의 소득이라면 소득인지라 이회장은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가자 이회장이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으며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맛이 훌륭하군. 분위기도 좋고. 자네 생일때도 아주 좋은 솜씨를 지닌 사람을 불렀던 것 같던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먹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관여치않으려 마음먹고 있던 이회장이었지만 그는 안승호가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거란 생각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칠현은 갑자기 한순간에 싸늘해지는 듯한 분위기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테이블보 밑에 놓여져 있던 승호의 한손이 꽉 움켜쥐여졌지만 그는 결코 냉정을 잃지 않았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그때 소홀한 점이 없었나 염려스러워 이렇게 다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겸손한 말일세. 아주 즐거웠었네. 오늘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이렇게 훤칠하고 멋있는 청년들과 시간을 보내니 한 10년은 더 젊어진 듯한 기분이네. 미(美)와 젊음이란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마련이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하는 이회장을 보며 승호의 눈에 스산한 뭔가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최근 이회장님께 좋은 일이 생겨서 더 그러신 것 같습니다. 이회장님의 컬렉션에 아주 귀한 것이 더해졌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얻으신 물건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예기치못한 직설적인 승호의 반격에 이회장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람이 스쳐지나갔고, 침묵만 지키고 있던 재원의 눈빛이 더한층 날카롭게 변했다. 하나 칠현만은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진상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라 급속도로 전환된 분위기에 내내 어리둥절해 할뿐이었다. 승호의 반격에 한순간 주춤하긴 했어도 이회장 역시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일세. 정말....보기드문 것이었네. 원주인에게 고마울 정도로 아주 잘 관리한 것 같더군."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질 정도로 그말은 승호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그는 추호도 평정을 잃지는 않았다. 이제는 재원이 내놓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알았지만 승호는 그쪽으론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하나 그만한 물건이라면 원주인이 다시 되사려 하지 않겠습니까?......내놓은게 이상하군요." 이회장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며 태연스레 말하는 승호의 모습에 순간 전율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그역시 이런 일엔 잔뼈가 굵었는지라 감정을 드러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글쎄.......보석은 그것의 가치를 잘 아는 주인에게 머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아마도.....원주인도 잘 다루는.....방법이 있을겁니다" 뭔가 묘한 뉘앙스를 띄우면서 지금까지 시선을 무시하고 있던 재원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승호의 행동은 분명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재원의 무심하던 가면이 깨지며 푸른기가 돌 정도로 흰 얼굴 위에 한순간이었지만 드러나버린 감정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승호의 눈빛이 차갑게 일렁거렸다. 식사를 잘 마치고 왜 느닷없이 보석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던 칠현이 심상치않은 좌중의 분위기 를 예민하게 느끼며 뭔가를 유심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순간 안색이 싹 뒤바껴 버리고 말았다. "원석을 갈아서......그 보석의 진가를 발하게 한 사람은.... ...........분명 그 원주인일테니까요..." 와인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다가 천천히 입가에 갖다대며 흘러나온 승호의 결정타에 이회장은 순간 옆에서 재원이 이를 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재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곧 들려온 예의 침착한 목소리에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뒤돌아서서 몇발자국 걷던 재원이 가까이 서있던 웨이터에게 뭔가를 묻고는 곧장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들고있던 와인잔 너머로 흘끗 바라보다가 핏빛액체로 떨궈진 승호의 눈빛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아이.....때문이었군' -40- # # # 두터운 껍질 속에 고요히 잠들었던.... 상처받고 짓밟힌 하얀 새 하나..... 얼어붙은 死心에 생기를 담아주려....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한 성역(聖域)을..... 그 견고함을 부숴뜨려 하얀 새를 각성(覺性)케하니... ......잃었던 날개를 달고.... .....하얀 새는....비상(飛上)할 준비를 한다. 테라스 돌난간에 기대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석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어둠이 내리깔린 정원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우혁은 조금전의 일을 생각하고는 눈꼬리가 가늘게 접히며 입술 틈을 비집고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넘어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다 먹고나서 잘했다고 박수까지 받은 우혁은 말 않듣는다고 매일 꾸중만 듣던 꼬마악동이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리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었다. 무대포적인 억척스러움을 대할 때마다 가슴 저 밑에서 따스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고 또 웬지 그런 그녀가 칠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느낌이......그런걸까...?' 금새 우혁의 얼굴에 침울한 빛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손이 목 부근으로 올라가 뭔가를 더듬으려다가 다시 아래로 힘없이 내리뜨려졌다. "....바보같이.....거기 놔뒀으면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버릇이란게 이런건가 싶어 우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는 마음대로 거동해도 될 정도로 몸이 다 나은 상태였지만 아직도 재원은 우혁이 아파보였는지 많이 움직이는걸 꺼려하고 있었다. "......바보.." 어제 저녁에도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하는 자신을 안아들고 내려가려하는 바람에 여자 취급하냐며 화를 냈던 기억을 되새기며 우혁은 조금은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재원과 같이 있는 동안 우혁은 자신이 이렇게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화를 잘냈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면 으례 자신에게 더 놀라버리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더 즐기고 부추기는 듯한 재원에게 더욱 발끈해 요즘 들어 계속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혁은 자신의 생김새만 보고 예쁜 인형이나 깨지기 쉬운 유리조각 취급밖에 않한다던지, 혹은 아주 기이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사람들의 눈초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성장한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질 못했지만 금발에 백설(白雪)보다 더 하얀 조막만한 얼굴위로, 갖다 붙여놓은게 아닌가 의심이 들만큼 긴 속눈썹을 깜빡일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심해(深海)가 스며있는 검은 눈동자를 말똥말똥 뜬 채로 한입 물면 단물이 베어나올 듯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빤히 쳐다보는 꼬마아이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직접 만져보거나 안아보지 않고는 못베겨 했었다. 친형제나 다름없던 승호와 칠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가 구분않갈 정도로 똑같은 반응들을 보여왔었다. 하나 재원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대해온 모습이라고는 웬지 신경을 묘하게 자극시키는 의미모를 눈빛과 간혹가다 내뱉는 말이라곤 부드러움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을수 없는 냉소적이고 비웃는 듯한 말투이기 쉽상이어서 우혁은 무시하려해도 이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파에 앉아 다리를 위로 올려 끌어안으며 몸을 동그마니 웅크린 우혁은 무슨 중요한 약속이 있는 듯 하교하자마자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바삐 집을 나가던 재원을 떠올렸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모습에 너무 놀란 나머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막 방을 나서려던 재원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걸 보고도 미처 알아채질 못했었다. -.......먼저 도발한건 너야.. 입가를 비틀며 자조적(自嘲的)으로 툭 내뱉고는 위험스럽게 다가오던 모습에 설마 했지만, 미처 피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목덜미를 낚아채어 입술을 덮치던 기억에 우혁은 갑자기 입술이 얼얼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자 순간 얼굴을 붉히며 손등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 "....멍청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않될 정도로, 우혁은 자신을 쉴새없이 곤혹스럽게하는 재원뿐만 아니라 그런 그에게 정말 여자라도 된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일일이 반응해버리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도발(挑發)이라니..." 자신의 性을 망각하기라도 했는지 여자들에게나 쓸 말만 골라 하는 재원에게 화가 치밀면서도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안고 키스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게 되었는지 그런 자신이 더 어이가 없어, 우혁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스스로를 책망(責望)하면서도 이내 또다시 재원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옆에 재원이 있을 때는 오히려 아무 생각도 않드는데 이상하게도 혼자만 있게 되면 그의 생각을 자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혁은 식사시간 내내 입을 다물지 않는 그의 유모 덕분에 듣고 싶지 않아도 재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때문에 우혁은 아주 사사로운 것 하나까지 거의 다 그녀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한가지 한가지를 알게 될때마다 믿을수 없게도 재원이 점점 더 가깝게 여겨지는 것이다. 모친을 아주 어렸을 때 잃었고 부자간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나가 살고 있다는것, 속도감 있는 것을 즐기는 스피드광이며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은 아니라는것, 번잡한 것을 싫어하고 말수가 기이할 정도로 없다는 것과 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말하는건 버릇이라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같이 작은 동물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 재원을 접해보면서 느낀 것과 많이 일치를 하는 편이라 대부분은 수긍이 갔지만 정말 의외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아예 않하기 때문에 볼 기회는 거의 없다며 혹시 그가 해보라고 하면 할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부추겼지만 우혁은 재원에게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내색해 본적이 없었다. 유모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의심스러웠고 웬지 자신이 그에 대한 것을 몰래 캐고 있는 듯한 자격지심이 들어 괜히 오해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정말......돌았나봐...." 이때까지 특별히 흥미를 갖고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만큼 드물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지루해 귓가로 흘려 듣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일이 태반사였기 때문에 우혁은 자신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데는 도가 터 있었다. 하지만 친형제나 다름없는 칠현을, 더더군다나 결코 잊어선 않되는 승호에 대한 것들을 한켠으로 밀어놓을 정도로 머릿속을 채워버리는 재원에 대해 우혁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보충 수업전까지만해도 정해지지 않았던 느닷없는 대청소 시간에 교실이 아닌 따로 배정받은 체육관으로 몇 명의 아이들에게 이끌려 갈때만해도 우혁은 단지 경시대회에 나간 칠현이 시험을 잘 치고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나 대걸래를 빨러 들어갔다가 뒤에서 누군가에게 무지막지하게 잡아채여 화장실 빈칸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 우혁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한 공포에 휩싸여 거의 패닉상태에 가까워져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쉴 정도로 겁에 질려 발광하며 몸부림치던 자신을 짓눌러 꼼짝못하게 했던 것은 그때와 똑같았지만 단지 그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내리누른 입술로 울부짖는 비명소리를 죽이며 미친듯이 떨어대며 내뻗치는 팔다리에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그렇게 한참을 그상태로 있던 것은.... ..................분명 폭력과는 틀린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그 차이를 느꼈던지 몸부림이 차츰 수그러들자 가만히 댄 채로 비명을 막고만 있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며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드러난 것은... 우혁은 손으로 질끈 감은 눈위를 가리며 아직도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듯한 그때의 기억들을 지우려 했다. 비록 칠현에게 자주성(自主性)도 없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심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견고하게 보호 받아왔던 우혁의 잔잔한 일상은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보호막이나 다름없던 승호가 자신의 스물 다섯번째 생일을 사흘 앞두고 외국출장에서 되돌아 왔을때는 이미 걷잡을수 없는 상태가 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답습(踏襲)인 듯 납치까지 또 당하게 돼었다. 재원이 답변을 회피하긴 했지만 우혁은 이후에 자신을 납치해 온 사람이 바로 재원의 아버지란 것을, 또 그 아버지란 분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 하필이면 자신을 납치했는지 우혁은 도무지 이해가 않되어 혹시 승호와 사업적으로 적대관계(敵對關係)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우혁에게 규제를 가한다던지 행동에 제약을 주는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과하다 싶을 만큼의 대우를 받고있어 혼란만 더욱 가중될 뿐이었다. 하나 이유야 어쨌든 이런저런 간섭도 통제도 없었던걸 자각하면 우혁은 지금까지 이렇게 무사태평으로 앉아만 있어서는 않되었다. 이곳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나간다해도 아무도 자신을 제지하지 못할거라는 것을 우혁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게다가 이젠 몸이 완전히 건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어두운 밤인데다가 항상 집안팎에 깔려있던 경호원들의 태반이 나가있었고 학교를 갖다오면 단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던 재원마저도 지금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때가 아니라면 자신은 두 번 다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 몸을 일으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이성은 말하고 있었지만... 고민하거나 선택해야할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지금....." 비록 퉁명스럽고 가끔가다 잔인할정도로 상처주는 말을 하지만 오히려 승호보다도 더 일일이 세세하게 챙겨주는 칠현이 걱정하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무엇보다도 자신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않되는 가장 큰 이유인.... 집안의 家長이며 兄이며..........戀人.....이기도 한......승호가 자신이 없어진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차마 상상조차 할수도 없을만큼 두렵고 걱정되면서도..... "......그 눈빛이...생각나는 거야...." 처연하게 숙여진 하얀 목덜미 아래로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 내리며 이내 촉촉히 젖어드는 우혁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우혁은 다리를 감싸안은 팔에 힘을 주며 무거워진 고개를 무릎 위로 파묻고는 오랫동안 그대로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야 했다. -41- # # # 책임질수 없는 감정의 늪에 빠져드는건....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여겼었다.....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지를... 난 철이 들기 훨씬 이전부터.... 뼈저리게 깨달아야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는 세면대를 양팔로 부여잡은채 상체를 구부리고 선 재원이 잔뜩 억눌린 톤으로 중얼대다 고개를 들었다. 전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재원은 그대로 거울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위해 경련을 일으키는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꽉 틀어쥐어야했다. ".........큭..." 연약한 속살이 찢겨 앙다문 입술 밖으로 실보다 가는 핏줄기가 스물거리며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며 물기 한점 없는 매끄러운 세면대 앞면을 틀어잡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와는 천지차이로 무심함은 이미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였다. 안승호가 자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건 자신에게로 시선이 돌려지기 이전부터 이미 알아챘지만 재원은 그가 그런 의도였든 아니든 이미 치욕적인 반응을 보여버렸다. "제기랄-!!!!" 자신에 대한 분노와 모멸감(侮蔑感)때문에 재원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거울 옆의 대리석 벽을 그대로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몸이 휘청일 정도로 주먹에 힘을 실어 벽을 친 재원의 허리가 반쯤 앞으로 꺽여졌다. 안승호가 '잘 다루는 방법'이라고 했을 때 순간 재원은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뒤엉켜있는 두사람의 정사장면을 연상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 버렸던.... 전신에 나있는 털 하나 하나를 쭈뼛 곤두세울 정도로 소름끼칠만큼 자극적이고 도발적이던 수줍은 몸태를.... 참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며 가는 몸을 활처럼 휘어 자신을 애써 받아들이려던 모습을...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을 한껏 벌릴 때마다 희열에 차 내지르던 색정(色情)적인 신음소리를..... "......윽..." 핏물이 튀며 뼈가 으깨지는 듯한 고통보다도 재원은 그 말에 그런 난잡(亂雜)한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우혁을 더럽힌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넌 정말 최저다...이재원..." 안승호가 우혁과 동침(同寢)을 하는 사이였다는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단 한번도, 실수로라도 그런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구태여 그 사실을 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안승호와 처음 만난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해버린 자신에게.... 그리고 결코 그 누구도 보아선 않될 그 모습을 자신보다 이미 먼저 겪었을 안승호에게.... 재원은 주체못할만큼 짙은 살의(殺意)를 느껴야했다. 벽을 주먹으로 친 자세 그대로 전신을 분노로 떨고있던 재원은 한참 만에야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을 간신히 끌어모을 수 있었다. "....머저리같은 자식.." 끝나지 않았다는 걸 재원은 계속 상기하며 이상황에서 더 흐트러졌다가는 안승호에게 완벽하게 지는 꼴밖엔 되지 않는다는걸 애써 자각하며 분노를 억눌러야했다. 한동안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세면대에 물을 트는 재원의 잇따른 동작에선 방금 전까지 이성을 잃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좔좔거리며 흘러내리는 물줄기아래 살갗이 터진 오른손을 밀어넣어 휩쓸려 내려가는 핏물을 바라보는 재원의 눈빛은 완연히 냉정을 되찾아 차분해져 있었다. 흐르는 물줄기에 지나칠 정도로 오래 손을 갖다대고 있던 재원은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섞여 딸깍거리는 소음이 나자 순간 풀어놓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어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이재원.." 문이 닫히며 예상과는 다른 좀더 높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원은 물살아래 허옇게 흐늘거리는 얇은 껍질에서 시선을 들어 전면 거울에 비치는 칠현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거울을 통해 칠현과 시선을 주고받던 재원이 돌아서서 세면대에 몸을 기대섰다. ".......할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말이.....잘도 입밖으로 나오는구나" 재원의 한쪽 눈썹이 묻는 듯 약간 치켜올라갔다. ".....용건이 뭐야?" "........어딨어..." 격해지는 감정을 자제하며 간신히 침착한 어조를 유지하는 그의 모습을 관찰하듯이 훑어내리던 재원의 얼굴위로 알겠다는듯 희미한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쯤 알아챌까 궁금했지." "이...씹새끼가-!!!" 조소어린 말투에 울컥해 냉정을 지키려던 결심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칠현이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리며 앞뒤 않가리고 재원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니가 감히.....날 갖고 놀아? 처음부터 계획했던 거냐? 어? ........비열한 새끼....그래놓고....뭐?......잘도 시치미를 떼...?" 그동안 자신이 철저하게 속은데 대한 분을 참지 못해 목소리까지 떨려나올 정도로 격분한 칠현에게 멱살을 잡힌채로 재원은 아무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네 아버지가 형을 흔들려고 널 이용해 접근한 거냐..... 아니면 네놈이 네 아버지 힘을 빌려 일을 저지른거냐... 말해봐!! 개자식아!!!" "..........." "말해!!! 이새끼야!!! 어딨어!!!!" 무심한 표정으로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모습에 칠현이 더욱 치를 떨며 멱살을 움켜쥔 손을 세게 조이려했다. 하나 그때까지 묵묵히 가만히 있던 재원이 먼저 칠현의 손목을 움켜잡고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윽!!! 이...이거놔!!!" 재원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더 세게 틀어잡으며 튀어나온 손목뼈를 짓누르는 바람에 뼛속까지 저릴 정도로 심한 압박감을 받자 칠현이 아픔을 참지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놔!!! 이새끼야!!!" "......겁먹은 거야....칠현군?" 양손목이 결박된 상태로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어버린 칠현이 나즉하게 속삭이는 음성에 이를 갈며 벗어나려 했지만 재원은 더 이상 그와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었다. 거만할 정도로 나른하던 분위기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순간적으로 뒤바뀐 것을 피부로 따갑게 느끼며 칠현은 손목을 점점 파고드는 재원의 악력(握力)에 하마터면 비명을 흘릴 뻔했다. 재원은 거머쥐고 있던 칠현의 양 손목을 앞으로 바짝 잡아당겨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눈을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왜 네가 온거냐.." ".....뭐?" 왜 재원이 하는 말은 항상 듣는 순간엔 이해를 못하겠는지 스스로도 바보처럼 느껴져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칠현은 다시 반문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되돌아온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급하지 않은가 보지?" "대체....무슨 헛소리야 개자식아!!" "....네 잘난 형." 음절마다 딱딱 끊어 말하며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손목을 갑작스레 놔버리는 행동에 한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칠현이 그말의 진의(眞意)를 알아내려 했지만 재원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너 설마...형을?!!" 한참을 침묵만 지키던 칠현이 불신의 빛을 띄운채 의심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이제야 알아들었냐는 듯 한심한 빛을 띄던 얼굴 위로 짜증에 가까운 권태감이 떠올랐다. ".........할 얘기가 없었나 보군" "이재원. 너 대체....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별로. 기대 이하라는 것밖엔" 조소도 차가움도 아닌 지루함으로 가득한 재원의 말에 칠현은 그 거만할정도로 무감각한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싶어 주먹이 떨릴 정도였지만 억지로 냉정을 가장했다. "이 문제는....이대로 덮어둘 수도 있어" "..........." "그러니 당장 돌려보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재원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며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라고?!! 이자식이 정말!!!" 칠현이 허공을 가르며 주먹을 뻗쳤지만 채 얼굴에 닿기도 전에 재원의 손바닥에 가로막혀야 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치며 재원이 중얼거렸다. ".......않된다니까. 범생이." "빌어먹을!!!!" 자존심을 철저하게 깔아 뭉개버리는 재원의 비웃음에 칠현은 위험수치에 다다를만큼 이성을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조금 늦게 반응해야 했던 것은 실상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가서 전해. 내 앞에서 직접 데려가라고." 더이상 장난치지 말자는 듯 표정을 굳히며 천천히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재원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독기(毒氣)에..... 뇌까린 말의 의미보다 그 음성에 깃든 소름돋는 잔인함에... 반격할 말도 잊고 완전히 얼어붙은 칠현은 문이 여닫기는 소리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42- # # # 세상을 얼려버릴 듯한 냉기를 지녔으면서도.... 불타는 듯한 뜨거움을 그 속에 품고 있어..... 그 열기에 휘말려버리게 되는 순간.... 자신을 망각하게 되버린다....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그 뜨거운 열정(熱情)이....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증오(憎惡)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민우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비스듬히 거꾸로 세워서 단 한번도 입을 떼지않고 술을 들이키면서도 눈은 어느 한곳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수대의 싸이키 조명이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요즘 유행하는 강력한 사운드의 댄스곡이 그리 넓지 않은 실내벽에 부딪혀 그대로 완전히 부숴버리기라도 할것처럼 쿵쿵거리며 울려댔고 강렬한 비트에 맞춰 민우의 심장박동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음악소리를 타고 간간히 터져나오는 여자들의 새된 환호성에 민우의 짙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며 이마에 깊은 골이 패이기 시작했다. "....확실히...이상해" 음악소리와 환호성, 여기저기 쌍쌍이 붙어앉아 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음탕한 소리까지 혼합된 광란의 난장판 속에서도 민우의 시선은 단 한시도 스테이지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십대들이 판치는 이 근방에서 가장 물이 좋은 곳으로 이름난 이 클럽은 민우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취하러. 바이크를 몰지 않을 때는 아예 문을 닫아걸고 주로 패거리들의 아지트로도 많이 사용되는 이곳으로 정장차림의 재원이 불쑥 찾아온 것은 대략 2시간 전쯤이었다. 재원과 중학교 동창인 민우가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성격의 그와 그래도 별 탈없이 이제까지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올 수 있었던건 민우의 털털한 성격탓도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서로 비슷한 환경 때문이었다. 부동산 재벌을 부친으로 두고 있는 민우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이혼해, 벼락졸부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아버지와 자식을 내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에게 환멸감을 느껴 공부는 뒷전이고 밖으로만 싸돌아 다니며 방황의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는 무리들끼리 모여 하나의 패를 이루게 되었는데 칠현이 예전에 거리에서 한번 보았다던 그 폭주족 패거리의 짱은 짐작과는 달리 재원이 아닌 바로 민우였던 것이다. -저새끼 유명하잖냐. 사람 깔보는거. 중3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고 나서도 학교생활에 아예 관심이 없었는지라 재원을 잘 알지 못했던 민우는 나이답지 않게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냉소적인 그의 분위기가 비위상할 정도로 신경에 거슬렸다. -소문에 제신고 짱이 저씹새랑 한판 붙었다던데? 중학생인 그들에게도 유명한, 이 지역 일대의 폭력 써클을 거의 통합할 정도로 환상적인 실력을 가졌다는 제신고 짱이 일개 이름도 없는 중학생과 맞짱떴다는 소문은 듣도보도 못한 일인지라 민우는 코웃음을 치며 한귀로 흘려 넘겨버렸다. 그리고 민우가 잊고 있던 그 말을 되떠올리게 만든 것은 새학기가 시작된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싸우자는 거냐? 패거리 중 내내 벼르고만 있던 몇명이 괜시리 시비를 걸자 짜증섞인 한숨과 함께 딱잘라 말하는 그 음성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유치하고 허접 쓰레기같은 짓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민우까지도 홱 돌아버리게 만들 정도로 거만했다. -.......적당히 하지 않을테니 각오해. 혼자서 다수와 상대하면서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아 더 잔인하게 느껴지던 내재된 폭력성(暴力性)과 도저히 중학생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눈에도 벌써 자신들과는 차원이 틀린 스피디한 몸놀림은 가히 소름끼칠 정도로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웠다. -.......벌써 쓰러지면 않돼지. 건드린 대가를 확실하게 받아내겠다는 듯 대부분이 상대에게서 튄 피로 뒤범벅인채 뼈를 분질러놓는 동작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이 깔끔하고 정확해 민우는 자신의 눈앞에서 자행되고 있는 처참한 광경의 엑스트라들이 자기 패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그에게 매혹돼 버리고 말았다. -........네가 하는 것을 봐서. 그리고 말그대로 이미 싸울 의지가 사라져버린 민우는 손목 하나를 대가로 이재원의 영역(領域) 내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오는 재원과는 달리 민우는 결석일이 출석일보다도 더 많을 정도로 아예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고 폭력써클을 이뤄 패끼리 싸움박질이나 일삼는 불량학생의 전형적인 케이스였지만 그런 그도 재원과 있을 때는 상당히 자신을 수그리는 편이었다. 그건 민우가 재원보다 뒤떨어질만큼 약해서도 아니었고 그를 자신의 유일한 친구로 인정해서도 아니었다. 재원 자신은 모를테지만 가끔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그의 기질(氣質) 때문이었다. 느릿한 곡으로 바뀌더니 갑자기 몇 배는 더 커진 듯한 환호성과 요란한 휘파람 소리에 눈을 든 민우의 눈썹이 어느 순간 확 치켜올라갔다. 스테이지의 한복판에는 한 여자와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서 춤을 추고 있는, 지금까지 모든 소음의 주요인(主要因)이었던 재원이 있었다. -........흐느적대는건 질색이야 본래 그다지 춤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또 간혹 어쩌다 춘다해도 마지못해 몸을 흔들뿐이지 비오듯이 땀을 흘리면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이제껏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지라 크게 놀라워하던 민우도 재원이 그렇게 춤을 잘추는 줄을 몰랐기 때문에 경악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나 곡이 벌써 몇 번이나 바꼈어도 멈추지 않고 춤을 추는 재원을 평소 지독히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짓눌려 그나마 대가 센 몇몇 여자애를 제외하곤 감히 접근조차 제대로 못해봤던 여자애들이 빙 둘러싼 채 기성(奇聲)을 질러대다가 몇몇이 가까이 다가가 한데 뒤섞여 춤을 춰댈 때부터,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그대로 가만히 놔두고 있는 재원을 보면서 민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시끄러우니까 꺼져. 여자들에게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사귀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 재원은 매번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애들을 거의 짓밟는 수준으로 무시하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전혀 그답지 않은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미예 좋겠네~?!! 소원 성취했으니~!!" "어머어머 웬일이니~?!! 저 기집애 지금까지 완전 내숭깐거잖아?" 일부러 다 들으라는 듯 부러움반 질투반으로 뒤범벅이 된 여자애들의 호들갑섞인 음성이 아니더라도 민우는 이미 그 '미예'란 여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재원에게 달라붙어 같이 블루스를 추는 여자가 가끔가다 마음 내킬때만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재원에게 감히 다가오진 못하고 항상 근처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는 통에 그에게도 꽤 눈에 익은 '미예'라는걸 알아본 순간 민우의 눈가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네 이름......이재원...맞지?" 각선미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리에선 웬지 어울리지 않아 보일 정도로 청순한 티가 남아 있는, 화장조차 하지 않은 갸름한 얼굴에 긴 생머리의 여자애가 땀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얇은 실크셔츠 위로 주저하듯 손가락을 올려놓다가 거부도 제지의 몸짓도 없자 새삼 용기를 얻었는지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애무하듯 미끄러뜨려도 재원은 아무 느낌도 없는 듯 무반응(無反應)이었다. "내가 보고 있다는거 알았니?" 축축히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져 있는 재원의 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댄채로 춤을 추며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애에게 향해져 있으면서도 뭔가 딴 생각에 사로잡힌듯 초점이 제대로 맞춰져 있지 않았지만 '미예'란 이름의 여자애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무슨 일 있는거 같아 보여..." 가끔가다 오더라도 특유의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인데다 민우와 단 둘이서만 술을 마시는 모습이나 새로이 끼인 여자애들이 뭘 모르고 괜히 접근을 시도해 보다가 무참하게 깨지는 광경을 놓치지 않고 봐왔었기 때문에 단 한번이라도 자신을 돌아본다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것은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하나 별 기대도 않고 친구들에게 이끌려 들어왔다가 근 1달이 넘도록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는지 내내 보이지 않던 재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심장이 진정이 않될 정도로 흥분해 잘 마시지 않던 술까지 몇잔 마셔버렸다. 게다가 내내 술만 들이키던 재원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스테이지 위로 올라선 후부터 클럽은 완전히 광란과 열광의 도가니로 뒤바껴 버리고 말았다. 애초부터 가만히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모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현란한 춤 실력을 발휘하는 재원의 흐트러진 모습은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만큼 빈틈없던 원모습보다 미예를 더 도취시켜 버렸고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술기운을 빌어 그대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다. "말 좀 해봐.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천천히 가슴과 어깨 위로 미끄러지던 손길이 목에 걸려있는 거의 다 풀려진 넥타이끈을 양손으로 잡아 천천히 당기며 재원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내려오게 하던 그녀의 눈빛이 청순해 보이는 얼굴과는 대조적일 정도로 약간 도발적인 빛을 띄었을 때였다. "난 미..ㅇ...악!!!!!!!" 갑자기 그녀의 머리가 뒤로 확 제껴지면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손에 느슨하게 쥐고있던 넥타이 끈을 그대로 놓치며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거칠게 쓰러져 버렸고 갑작스런 일을 당한 엄청난 쇼크와 머리끝으로 가해지는 고통에 내내 새된 비명을 질러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성난 외침이 음악소리를 뚫고 허공을 갈랐다. "씨팔!!! 음악꺼-!!!!!!!!!!" 민우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자마자 음악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바닥에 거의 반쯤 자빠지다시피 쓰러져 누군가의 손에 머리칼이 잡힌채 고개만 쳐들려있던 미예는 자신의 수치스런 자세와 허공에서 들린 음성에 자신이 누구에게 이런 일을 당했는지를 "씨팔!!! 음악꺼-!!!!!!!!!!" 민우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자마자 음악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바닥에 거의 반쯤 자빠지다시피 쓰러져 누군가의 손에 머리칼이 잡힌채 고개만 쳐들려있던 미예는 자신의 수치스런 자세와 허공에서 들린 음성에 자신이 누구에게 이런 일을 당했는지를 그제야 깨닫고는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러버리고 말았다.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듯이 이미 눈물이 한가득 차오른 눈을 돌려 사방을 쳐다보았지만 다들 멀찍이 떨어져서서 사태를 주시하고만 있을뿐 쥐죽은 듯이 살벌한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도 민우의 과격한 행동에 뭐라 하지를 못했고 또 아예 끼여들 생각도 않하는 듯 했다. 입이 상당히 거칠긴해도 다른 '짱'들과는 달리 그다지 규칙이나 형식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패거리들을 자유스럽게 풀어놔주며 다혈질인만큼 상당히 기분파인 편이었지만 민우가 저렇게 정색을 하고 성질을 낼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미예는 전신을 푸들푸들 떨며 머리카락이 조금 느슨하게 당겨오는 듯 하자 수치스럽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거의 허공을 향해 젖혀졌던 고개를 앞으로 숙이다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서러움에 그만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와줘.....흑...흑.......난....잘못한게 없어...." 청순한 인상의 예쁜 여자애가 잔뜩 겁에 질려 새파래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본 남자라면, 그것도 혈기왕성한 10대의 남자라면 그걸 단박에 거절한다거나 모른체 할 수 있을 정도로 야박하거나 무정한 남자애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 애처롭게 흐느끼며 재원을 애타게 올려다 보던 그녀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에 조금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분명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의 눈을 본 순간 그대로 경직되 버리고 말았다. ..........죽어버린 눈이었다. 결코 살아 숨쉬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완벽하게 정지된 눈. 비난도, 경멸도, 조소도, 동정도, 관심도....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무감각한 그 정지된 사안(死顔)을 본 순간 그녀는 온몸이 싸느랗게 식을 정도로 심장이 얼어붙고 말았다. '.....사람의 눈빛이.....아냐....?' 주체못할 정도로 화가난 민우는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반쯤 가려져 있는 땀으로 흥건한 얼굴과 그녀의 손에 의해 끌러진 듯 단추가 다 열린채 젖어서 찰싹 달라붙어 상체의 윤곽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얇은 셔츠에 시선을 주며 눈썹을 잔뜩 찌푸리다가 벌려진 그 틈새로 거의 다 드러난, 땀으로 번들거리는 가슴의 굴곡에 눈이 멈추는 순간 그때까지도 가만히 움켜쥐고만 있던 머리채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순간 지금 상황도 잊을 정도로 심한 쇼크에 넋을 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입에서 다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꺄악!!!! 아, 아파!!!!!" "썅-!!! 뭐? 없어? 잘못한게 없다고?! 저걸 보고도 그딴 말이 나와? 여가 포르노 찍는데냐?!!! 어?!! 이거 막굴러 먹은년 아냐?!!!" 여자에게 험악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민우의 차가운 눈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가 천천히 스테이지를 벗어나는 재원을 쏘아보고 있었다. 재원이 몸을 돌려 내려가는 순간 민우가 그녀의 머리채를 뒤로 확 꺽어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를 악문 음성으로 차갑게 내뱉었다. "개같은 갈보년......한번만 더 눈에 띄면.....가랑이를 찢어발겨 창부짓도 못하게 해줄테니......알아서 기어"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고 있기라도 한 듯 머리채를 확 뿌리치고는 나동그러진채 연속으로 받은 심한 쇼크로 인해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그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서는 민우의 표정은 살기어린 악독함이 아닌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민우가 더 이상 아무 짓도 않하고 내려가 버리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며 꺼버렸던 음악의 볼륨을 서서히 높이자 다시 제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재원에게 다가가는 동안 민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능한한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사람을 눈 아래로 놓고 보는 듯한 재원의 거만할 정도의 무심함을 마음에 들어했다. 다혈질인 민우로서는 좀체로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재원이 충격적일만큼 경이로운 존재였고 그 무거운 존재감이 흔들린다는건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게 민우의 눈에 보였다. -.......취하면.......조금은 덜 괴로울까....? 굳이 오늘만이 아니더라도 재원은 분명 뭔가 말못할 고민에 내내 휩싸여 있었고 그것이 집안이나 학교문제따위가 아니란 것은 이런 쪽으로 잔머리를 잘 굴리지 못하는 민우도 쉽게 알아챌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이렇게 그 무언가 때문에 냉정함을 잃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지라 민우는 갈수록 기분이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난데없이 불러내선 '전망좋은 집'을 알아 보라고까지 하질 않았는가. 재원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 민우는 원체도 그렇지 않을까 미리 예상은 했었지만 그 한번의 방문만으로도 그가 뭔가를 자잘하게 꾸민다거나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는 타입이 절대 아니란 것을 쉽게 간파해냈다. 그런데 갑자기 '전망좋은' 집이라니? 민우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고 그 무언가에 의해 재원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하고는 치솟는 불쾌감을 숨기기 위해 한번 더 깊게 심호흡을 해야했다. "좀 작작마셔! 왜 않하던 짓까지 하고 지랄이냐?!" 민우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술만 들이키는 재원의 앞에 털썩 앉으며 민우는 미뤄왔던 얘기를 끄집어냈다. "이새꺄!! 집 알아보라며?!!" 감겨있던 눈이 천천히 뜨여지며 자신에게로 향하자 민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셔츠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던지자 쇳소리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날라오는 은빛물체를 재원이 용케 잡아채 펴보니 몇 개의 열쇠였다. 열쇠를 내려다보던 재원이 이게 뭐냐는 듯 민우를 응시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갑자기 집이 새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거기 꼰대가 사놓고 한번도 않들여다 본데야. 땅이 필요했던 거라서 집은 좀 지랄같지만......전망은 죽이거든. 거기 외엔 생각나는 데가 없더라. 맘에 않들면 다른 곳을 구해보던지" 한참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열쇠를 응시하며 계속 만지작거리던 재원이 가늘게 좁혀진 눈을 잠시한번 감았다 뜨더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새 맥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야 진짜.....너 무슨 일이야? 왜 이러는 건데?" 술병을 잡는 손목을 저지하며 민우가 석연찮은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재원은 아무 대꾸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기갈든 사람마냥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춤추기 이전부터도 술을 꽤 많이 들이마셨던대다가 지금 마셔대는 량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민우가 보기엔 재원은 이미 상당히 취해있는 상태였다. "얌마....야!! 그만 마셔 짜식아!!" 이젠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양이 더 많을 정도였지만 재원은 병이 비기가 무섭게 다시 새 병으로 손을 뻗었다. 피부가 흰 사람은 취하면 더 하얘지는지 어둑어둑한 실내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주시하던 민우에게 그의 그런 행동은 뭔가를 꺼려하거나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술에 걸신들렸나!!! 너 죽으려고 작정했냐?!!!" "........." "어어? 계속 씹을거냐 너?! 야...!" "입닥쳐-!!" 잔뜩 쉰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맥주병을 그대로 깨뜨려버릴 듯이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재원의 거친 행동에 민우는 한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까....깜짝이야.!! 뭐, ....뭐야 너..." 술에 취했다 해도 지금까지 단한번도 언성을 높여본 적이 없었던 재원이 지금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사랑해......... 또다시 들려오는 환청에 재원은 테이블 위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상체를 확 구부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거세게 부여잡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괜찮다고 한건 바로 너였어..... 강요하지 않겠다고......네 입으로 그런 주제에.... 그런데.....왜......새삼스럽게..... 왜 이제와서.....그 말을 다시 떠올리는 거냐..... 다시 술병을 잡으려 내뻗친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걸 알아챈 순간 재원의 얼굴 근육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분명 자신이 먼저 도발을 건 것이지만 안승호는 자신의 치기어린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무서울 정도로 냉정을 유지했다. 그만큼 오늘 저녁 내내 침착을 잃고 있었던건 안승호가 아니라 주도권(主導權)을 쥐고 있던 재원이었단 뜻이었다. 안승호. 그런 남자였단 말이지..... "........웃기지도 않는군.." "...재원아?" "........그렇게.....자신있다 이건가...?" 술에 취한채 음울한 목소리로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뇌까리는 재원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민우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불길함을 느껴야했다. -.............사랑해........ 민우가 걱정하는 것만큼 완전히 맛이 간 건 아닌지라 재원은 술을 들이키는 와중에도 자신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걸 계속 자각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해......... 하나 술기운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혈관 밖으로 뛰쳐나가버릴 듯이 분노로 들끓어오르는 피 때문인지 열에 휩싸인 듯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자신을 계속해서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는 저 음성의 주인인, 취하면 잠시라도 잊을수 있을까 했지만 미치지않는 한은 결코 잊지 못할 우혁을 떠올린 순간, 그리고 자신이 이런 상태로 돌아가 우혁을 봤을 때를 떠올린 순간, 재원은 삽시간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냉각(冷却)되버리는 듯한 착각을 받아야했다. "나도 모르겠다~ 에잇!!" 앞에 놓인 병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들어 막 입에 대려던 민우는 갑자기 자신의 병을 낚아채가는 손 하나에 놀라 앞을 보니 뺏아간 술병을 손에 쥔 채로 다른 손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는 재원이 보였다. "뭐야! 이새꺄!! 왜 내것까지.." ".....넌......취하면 않돼....." "뭐? 이건 또 웬 헛소리야?!" "......날 끝까지....책임져야 하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재원이 술에 취해 않하던 주정까지 부리나 싶어 하루밤새 재원으로 인해 하도 놀랄 일들만 당했는지라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 민우가 기가차다는 표정으로 막 뭐라 하려할 때였다. ".....날 못 막아서....." 현기증이 나서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참느라 그랬는지 한참을 있다가 손에 묻고 있던 고개가 조금씩 들리며 드러난 재원의 투명한 동공은 민우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텅 빈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미친 짓을 하게 하면....." 천천히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지독히도 낮은 음성은 민우에게 분명 사신의 것이 저럴 거란 생각을 들게 할정도로 까닭모를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민우는 술에 취한 재원이 헛소리를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 둘다..... 죽는거다" -43- # # # 한순간의 착오로 불러일으킨 결과가... 손에 쥐면 잡힐 듯 다가왔던 것을.... 되돌리게 했다는 걸 알지못한 것은....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마도.......알았다면......... .............난 그대로 미쳐버렸을테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벗은 상의와 넥타이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 손목의 다이아 커프스단추를 막 끌러내려던 승호는 노크도 없이 요란하게 문을 열어제끼며 들이닥치자마자 다짜고짜 무섭게 다그치는 칠현을 단지 흘끗 돌아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도 없이 흰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내는 승호의 가면을 덧씌워놓은 듯한 얼굴을 노려보는 칠현의 눈동자에는 심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왜 내게 미리 말을 않해줬어?!! 오늘 난 완전히 바보에다 멍청이가 되버리고 말았어!!" ".............무슨 소리냐 대체.." 않그래도 심기가 언짢았던 승호가 짜증난 듯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칠현의 분노로 붉게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먹을 틀어쥔채 이를 악물고 있는 칠현의 모습은 평소 그가 보아왔던 오만할정도로 차가운 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날 바보로 알아? 왜 그 인간이 우혁이를 납치해갔는지 말을 않해줬냔 말야! 그러고도 그런 인간하고 마주앉아서 웃으면서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 쓸데없는 말만 하다가 그냥 이대로 돌아온건 또 뭔데?! 하!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일진의 이재석 회장과 SM의 안승호 사장이 보석수집에 미친 놈들인줄 알겠던데? 형 제정신이야?!!" 칠현의 말에 잠시 흠칫하던 승호는 더이상 들어줄 마음이 없는 듯 그에게서 몸을 돌려 옷들을 마저 다 벗고는 가운에 손을 뻗었다. 애초에 칠현을 데려갈 마음은 없었지만 초대에 대한 답변이 왔을 때 이회장 아들도 참석한다는 말에 그 나이 또래인 칠현을 동반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우혁을 되찾아오기 전까진 알릴 생각이 없었는데 몇마디 대화와 상황만으로 거기까지 잘도 유추해냈구나 싶어 자신이 그동안 동생을 너무 과소평가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병신같지. 그래... 형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도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다니. 웬 만찬인가 했어. 그럴 정신이 어딨다고" 아무 반응도 없는 승호의 모습에 제풀에 지쳐버린 칠현이 침대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맥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푸른계열의 가운을 몸에 걸치고 허리끈을 졸라매는 승호의 유유자적한 일련의 동작들을 지켜보던 칠현은 그 태평스런 모습에 답답함을 금치 못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직접 찾아가지 않는거야?! 어째서 이대로 그냥 돌아왔어?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우혁이를 계속 저 상태로 방치해 두겠다 이거야?! 이건 엄연히 범죄란 말이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었다면 찾은날 바로 갔을거다. 넌 이회장이 그렇게 만만한 인간인줄 아느냐?" 울분을 터뜨리는 음성을 대꾸없이 듣고만 있던 승호가 조금 전과는 다른 싸늘한 눈초리로 칠현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칠현은 자신을 쏘아보는 냉정한 눈빛과 침착하고 조용한 그 목소리가 평소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라는걸 안 순간 지금까지 내내 자기 혼자 흥분하고 있었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거야...... 장우혁에게 미친 안승호와 얘기하고 있는게 맞아...? 단 한사람 때문에........수십, 수백가구의 죄없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앉게 만든 사람 맞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 안승호 맞아?......언제부터 그렇게 몸을 사리게 됐지?" "........그만해라" 가라앉은 음성으로 잔뜩 비꼬는 칠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짐작하고도 남은 승호가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묘한 눈빛을 번뜩이는 칠현의 모습은 분명 승호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잔인한 심리가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왜.....이젠 대용품(代用品)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나보지?" 자신의 말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눈으로 뚜렷이 확인한 칠현의 얼굴위로 차가운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얼마나 비슷한게 걸려들었길래 저렇게 나몰라라 내팽겨쳐둘 수가 있어? 나도 한번 보고싶..!!" -콰장창!!! 챙그랑!!! 옆에 있던 장식장 유리문을 빠르게 뻗친 주먹으로 요란하게 깨뜨리며 고개를 숙이느라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눈동자가 극도(極度)의 노기(怒氣)를 참지 못해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그만 하라고 했어. 안칠현" 한순간 전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를 악물고 내뱉는 음산(陰散)한 음성과 찢겨진 살갗으로 핏물이 흘러내려 금새 붉게 물드는 왼손을 보면서도 칠현은 여느 때처럼 그만둔다거나 물러서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방금 전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아무리 자신이 친동생이라해도 안승호의 치부(恥部)를 건드린다는 것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걸 잘 알면서도 칠현은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서 데려오란 말야. 내 앞에서 아무리 냉정한척 해도 우스울뿐이니까. 차라리 술에 취해 발광하며 울부짖는 안승호가 장우혁에겐 더 어울려" "......넌..." "............." "...그만두자.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치가 않아." 승호가 칠현의 옆으로 다가와 분노로 경직된 어깨를 한번 지긋이 누르며 툭 치고는 조용히 지나쳤다. 좀체로 가라앉지 않는 편두통 때문에 저절로 미간에 골이 패이며 뜨거운 물에 들어가 피로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승호의 몸짓이 빨라졌다. 하나 칠현의 옆을 지나쳐 욕실로 향하려던 승호의 몸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그대로 우뚝 멈춰 서버렸다. "그럼 그 빌어먹을 개자식하고 계속 같이 있게 놔두겠단 말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치를 떠는듯한 성난 외침이 허공을 꿰뚫며 날카롭게 터져나오자 방안의 모든 것이 한순간 정지된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서있던 승호가 느릿한 동작으로 천천히 돌아서자 순간 칠현은 말그대로 온몸의 피란 피는 다 빨려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싸늘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네가 말한 그.......빌어먹을 개자식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냐.......?"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승호의 모습에 이미 내뱉어버린 자신의 실수에 혀를 깨물고 있던 칠현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승호가 더 빨랐다. 칠현의 팔을 잡아채어 바짝 잡아끌어당긴 승호가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뭔가를 찾으려는듯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는 사이였구나" 속삭이는 듯한 조용한 음성과는 달리 움켜쥔 칠현의 팔을 놔주는 승호의 얼굴은 덧씌워놓았던 가면이 다각적(多角的)으로 깨뜨려지는 것처럼 마음 속에 담겨져 있던 충격, 허탈, 노여움 등의 온갖 심경(心鏡)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올라 승호의 얼굴에 그대로 정착된 것은.... "납치해간 그아이를 보고나서....놈이 그런 반응을 보이나 했더니 .......납치를 하기 전부터........이미 알던 사이였다? ...........네가 놈을 알고........놈이 그 아이를 알았다면......... ....................학교군.........같은 학교였구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이회장 아들놈이..... ...........그 아이가 간......그 학교 학생이였다 이거냐....? ..............그리고......그 보통감정이 아닌 것 같다는 건...... .....................학교에서 이미 생겼던 것이겠지.........? ..........큭....큭.....원인(原因)과 결과(結果)가 뒤집힌 거였군.....?" 왼쪽 손을 움켜쥐자 유리조각들이 박혀 들어 찢긴 살갗 위로 멈췄던 핏물이 다시 새어나오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시켰지만 승호는 마치 고통을 즐기려는 듯 더더욱 세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질린 눈으로 보고 있던 칠현이 이런 숨막힐듯한 상황 중에도 문득 생각난 것은 승호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떻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나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건 분명.......극도의 쾌감(快感)이었다. 육욕(肉慾)을 채웠을 때의 만족감과는 차원이 틀린.... 동물들에게 표정이 있다면 잡아놓은 짐승을 앞에 놓고 죽기직전까지 공포에 시달리게끔 잔인하게 괴롭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는 야수의 표정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무너뜨리고 싶을만큼 인정할만한 상대가 생겼을 때의 특유의 표정. 그리고 돌려진 승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 순간 칠현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나한테 또 뭘 숨기고 있는지 말해주시지. 안칠현군" -44- # # # 처음부터 애초에 이성이란 존재치도 않았어. 냉정한 눈빛 속에 깃든 그 슬픔을 보지 못했다면... 가슴저미는듯한 애절한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면... 그러니 각오해 끝까지 같이 갈테니까. "...도대체.......어디 있는거야...."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을 내뱉으며 이곳저곳의 문들을 거칠게 열어제꼈다가 다시 소리나게 닫으며 지나치는 사람은 분명 재원이었다. 한군데 한군데 지나칠 때마다 이미 예전에 내팽겨쳐버린 냉정함에다 분노섞인 조급함까지 겹쳐 재원의 모습은 그 형편없는 몰골만큼이나 더 살벌해 보였다. -....세상에.....맙소사....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일거라는건 굳이 거울로 확인해보지 않아도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또 활발하게 새로운 아침을 맞고 있던 저택 내로 들어서면서 부딪힌 사람들이 내뱉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감탄사와 지금도 자신이 지나칠 때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의 경악에 가득 찬 얼굴을 보면 충분히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알콜 중독자마냥 온몸에 베어있는 찌들은 술내음과 그대로 쓰러져 자는 바람에 엉망으로 구겨지고 얼룩진 옷차림에다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 핏발이 곤두서 피곤해보이는 눈과 숙취로 헤쓱해 보이는 꺼칠한 안색은 거리의 부랑아 저리 나가라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새꺄!! 데려다 준다니까!!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다가 클럽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던 재원은 새벽에 깨자마자 옆에서 자고 있다가 덩달아 같이 깬 민우가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했을때는 이미 사람들이 꽤나 분주히 오가는 시간이었고 재원도 학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하나 재원을 반겨준건 밤새 사람이 잠들었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구김 한점 없이 싸늘한 침대시트 뿐이었고 방안의 테라스에도, 욕실에도, 요즘 들어 자주 가는 정원의 화원이나 각층마다 있는 일광욕실에도 우혁의 모습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도 않들 정도로 침착함을 잃어버린 재원은 속을 매섭게 할켜대는 숙취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3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혹시..." 잊고 있던 뭔가가 떠올랐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원이 멈춰 섰던 발걸음을 돌려서 급하게 향하는 곳은 저택 내에서 동쪽에 위치한, 가장 끝으로 연결된 통로였다. 사면이 창문 하나 없이 막힌 벽으로 출입문을 제외하면 완전 밀폐되어 있었지만 높은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중천에 뜬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며 환하게 비추는 이곳은 드넓은 저택 내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그리 많이 닿지 않는 곳 중의 하나였다. 사방 벽면을 따라 발디딜틈 없이 쭉 늘어선 온갖 기화요초 (琪花瑤草)들의 향긋한 내음과 습한 공기가 뒤섞여 있는 이곳은 호화 주택에 가면 한 개쯤 있기 마련인 실내 풀장의 일종이지만 직사각형으로 길게 쭉 뻗은 일반 수영장과는 달리 그리 넓지는 않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양이라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커다란 욕탕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거기다가 뭔가 퇴폐적인 느낌까지 들게 할 정도로 사치스럽게 꾸며진 내장재(內裝材)까지 더해져 그런 기분이 더 강하게 들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콜롬비아산 에메랄드에 가까운 내부의 색감으로 인해 마치 산호초가 무성한 심해(深海)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절로 들게 하는 곳이었다. 하나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거의 사시사철 텅 비어있기 마련인 한적하고 외떨어진 이곳에 따뜻한 물이 다시 가득 채워진 것은 몇 일 전의 일이었다. 찰랑.... 찰랑.... 백옥(白玉)같이 매끈하게 뻗은 하얀 팔로 거의 목까지 차오르는 옥빛의 깊은 수면을 유유히 가르며 마치 무게가 없는 깃털이라도 된 양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 사람임에 분명했음에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재원의 눈에는 사람이 아닌 듯 싶었다.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도 모를 만큼 눈을 감은 채 생각에 깊게 잠긴 듯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살을 헤치며 걷고있는 모습은 지어낸 신화 속의 님프의 모델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결(高潔)하고 아름다웠다. 세속(世俗)에 더럽혀진 미천한 인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걸 알아채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고아(高雅)한 그 모습에 재원은 이미 진작에 제 기능을 잃어버린 심장을 더욱 세게 짓누르며 자신의 기척을 죽였다. 물에 젖어 있음에도 천장의 빛에 반사되어 한올 한올 더 선명한 백금발, 지긋이 내리 감겨있는 기다란 속눈썹과 곧게 뻗어내린 날카로운 콧날, 한걸음 떼놓을 때마다 숨을 토해내느라 조그맣게 벌려지는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붉은 입술과 섬세한 턱선에 이어지는 목선의 유려(流麗)함, 물살을 가르며 들어 올려질때마다 살짝살짝 수면 위로 드러나는 가느다란 흰 팔과 물밑에 숨겨져 있어 흐릿하게 보여지는 호리호리한 실루엣은 신비로울 정도로 매혹적(魅惑的)이었다. 우혁은 기척없이 안으로 들어온 재원이 문 입구에 멈춰선채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떨어진 몸의 근력(筋力)을 서서히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무리도 않가는 방법이라는 주치의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지만 기분 좋을만큼 적당한 온도의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보면 몸과 마음이 한결 차분해져서 머리를 지끈거리게하는 여러 가지 고민들을 천천히 사색(思索)해 볼수 있어서 우혁은 요근래 종종 이곳에 머물러 있다 가곤 했다. "......하아..." 간밤부터 그를 괴롭히고 있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입밖으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로 인해 눈앞의 사물이 아롱져 뿌옇게 흐리자 몇번 눈을 깜빡거려 물기를 떨궈낸 우혁은 따뜻하던 수온(水溫)이 조금 떨어진 듯하자 자신이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었음을 깨달았다. 쇼파에 웅크리고 있던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는지 싸늘하게 텅 비어 있는 침실을 둘러보던 우혁은 재원이 없다는 사실을 안순간 느껴버린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감정에 지레 겁을 먹고 그만 도망치듯 이곳으로 숨어버렸다. 거의 나체나 다름없이 수영복만 걸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픈 마음은 결코 없었기에 항상 재원이 학교에 가고 나면 안심하고 오곤하던 이곳에 우혁이 있다는걸 아는 사람들은 함부로 들락거려서 방해를 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괜찮을까...?" 물이 흔들리는건지 아니면 자신의 눈이 흔들리는건지 착각이 들정도로 그 자리에 멈춰선채 오랫동안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우혁이 다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밖으로 나가려는지 힘없이 몸을 돌려 물가로 향하려 할때였다. -첨벙!! 뭔가가 물 속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우혁이 급히 몸을 돌렸지만 충격으로 크게 일렁거리는 수면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밑으로 시선을 내렸을땐 이미 빠른 속도로 근접해 다가온 그 무언가가 자신의 다리를 휘감아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헉!!" 사람의 팔임에 분명한 것이 휘감은 다리를 무서운 힘으로 당기자 채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짤막한 경호성(驚號聲)을 터뜨리며 물속으로 끌려 내려간 우혁이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다리를 조이고 있는 팔은 아예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놔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풀장 바닥으로 더 거세게 잡아끄는 힘에 우혁은 한순간 누군가 장난을 치는게 아니라 아예 자신을 죽이려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더욱 숨이 막혀 오는데다 머리칼이 시야를 가려 누군지 확인할 수도 없자 우혁은 차츰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45- # # # 처음부터 그 눈빛에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어... 상처를 입고 웅크리고 있는 듯한 야수의 눈빛을... 나와 다르면서도 어딘가 비슷해 보이던 그 눈빛을.... 놓지 말아줘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게 날 붙들어줘. "푸학!!!...컥!!!.....학....하악!!" 목이 졸리듯이 숨막혀하며 발버둥을 쳐 벗어나려던 힘도 차츰 사라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까지 다다라 그대로 축 늘어지려던 우혁은 갑자기 다리를 조이고 있던 팔이 거슬러 올라와 허리를 휘감자마자 다시 무서운 속도로 수면 위로 치솟아 올리는 바람에 급박하게 들이닥친 산소에 제대로 숨을 못쉬어 헐떡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악....하....하아...!!"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의 상체에 매달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아......하아....." 그리고 수면에 떠오른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놓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재원임을 알아본 순간 우혁은 안도해서 한시름 놓은게 아니라 방금 전에 죽을까봐 겁에 질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치솟는 분노에 그 화살을 재원에게로 돌렸다. "무슨 짓이야!! 그렇게 날 놀리고 싶어?!! 날 갖고 노니까...!!!" 자신을 지금까지 내내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인데다가 이렇게 또다시 자신이 남들보다 유약(柔弱)하다는 것을 매번 확인시켜 주는 재원에게 화를 참지 못해 그답지 않게 앙칼진 음성으로 외치던 우혁은 순간 자신의 맨살갛에 와닿는 재원의 젖은 몸이 상반신만 벗은게 아니라 아예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할말을 잊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뭐...." 한참을 충격으로 경직돼 있던 우혁은 밀착해 있던 재원의 살갗이 손밑으로 갑자기 뜨겁게 느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했다. "나갈거야....놔!"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재원의 몸을 밀치려던 우혁이 손에 와닿는 매끄러운 감촉에 다시 흠칫하며 뒤로 빼려했지만 재원이 먼저 손을 잡아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위에서 지긋이 눌러 떼지 못하게 했다. 우혁은 물 속에서도 뜨겁게 느껴지는 살갗 밑으로 자신과 별 다를바없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낀 순간 어쩔줄 몰라 당황해했다. "......놔.......놔줘....." 가만히 우혁의 손을 놔주며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넘기자 드러난 재원의 눈빛은 흑요석(黑曜石)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한 팔로만 휘감고 있던 우혁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에게로 바짝 밀착시키는 재원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널 보는 것 만으로도......이렇게 뜨거워져" "........이러지마..." 물속에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몸에 와닿는 달아올라 있는 재원의 몸과 그에 못지 않게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속삭이는 음성은 우혁을 점점 숨막히게 만들었다. 맨몸으로 닿는 것보다 물에 젖은 매끄러운 살갛끼리 부딪히는 감촉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관능적인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 강렬한 눈빛에 우혁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려 하자 재원이 턱을 쥐어 자신에게로 들어올렸다.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을 쓸어넘기며 훤히 드러난 우혁의 얼굴을 가만히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쥔 재원은 찬찬히 그위를 훑어보았다. 물기에 젖어 유난히 반짝거리는 청록빛 반점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재원은 시선을 견디지 못해 수줍게 떨리던 긴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깔리며 푸른빛을 반쯤 가려버리자 시선을 다시 그 밑으로 내렸다. 곧게 뻗은 콧등을 지나 조각같은 인중밑에 촉촉히 이슬을 머금고 있는 붉은 꽃망울이 재원의 시선이 닿는게 느껴졌는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살짝 벌어졌다. 한참동안 우혁의 입술을 바라만 보고 있던 재원이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을 가만가만 더듬었다. "........하지마...." 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못해 손을 뻗어 만지면 조금은 나을까 했지만 손가락에 와닿는 연한 살갗의 촉촉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자 갈증만 오히려 더 커질 뿐이었고 그런 것만으로 참아내기엔 피가 너무 뜨거웠다.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고 있는 재원의 손 끝에 온 신경이 다 쏠려 있던 우혁은 갑작스레 자신의 다리를 휘감아버리는 팔에 채 놀랄틈도 없이 물속에 담겨 있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우혁을 올려놓고 지면에 팔을 짚어 물 속에서 빠져 나오는 재원의 나신에서 후두둑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럽게 풀장내부를 울렸다. 따뜻한 물속에만 있다가 갑자기 바깥 공기에 노출된데다가 누워 있는 대리석 바닥의 한기(寒氣)까지 더해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워낙 몸에 진이 다빠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늘게 몸만 떨던 우혁은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을 못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나 갑자기 요란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고개를 들다가 물 속에서 나오는 재원을 보고는 그만 기겁을 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나마 수영복 하나라도 달랑 입은 자신과는 달리 재원은 아예 알몸인지라 눈둘 곳을 몰라하다가 이대로 축 늘어져 있을 수만은 없어 바둥거리며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우혁은 그대로 재원의 몸에 짓눌려 다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바닥위로 도로 눕혀진 우혁의 몸 양옆에 팔을 짚고서 몸으로 덮다시피 수그린채 내려다보는 재원의 몸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우혁의 젖은 몸위로 점점이 번져나갔다. 얼굴에 와닿는 시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칼날같이 날카롭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대로 입술을 덮쳐 깊숙히 파고들어 우혁의 혀를 휘감아 빨아당기며 격렬하게 탐하는 혀의 능수능란한 움직임에 우혁은 무방비한 상태로 그의 침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아...하아....." 한참동안 입술을 탐하다가 천천히 떼어내며 갑작스런 격렬한 키스에 그만 멍해진 듯 흐릿하게 풀려버린 우혁의 눈빛과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가쁜 숨을 몰아쉬는 촉촉히 젖은 붉은 입술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는 재원의 얼굴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단지 계속해서 우혁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씩 정신을 차리자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발갛게 물들어버린 우혁이 자신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듯 쳐다보는 재원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외면하려 했지만 도로 얼굴을 잡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자 굳게 닫혀 있던 재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널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 ".......네가 아니면 않돼" 한참을 침묵만 지키다 천천히 흘러나온, 목이 메인 듯 잔뜩 가라앉은 음성에는 뼛속까지 깊숙히 베어있는 재원의 감정이 스며들어있었다.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정난 수컷이라도 된것처럼 하루 종일 열에 들떠 있을 때도 있어" "....어째서......난....남자야...여자가 아니란 말야..."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내뱉는 性的인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 이순간을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은 우혁이 재원에게서 다시 벗어나려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이 그를 더욱 도발시켜 점점 더 흥분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말 하는건....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입술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다시 예의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듯 하자 그동안 계속 경고를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의 처지도 잊을 정도로 발끈해버린 우혁이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뭐라 하려할 때였다. 갑자기 재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희미한 조소(嘲笑)가 순식간에 씻은듯이 가시며 우혁의 젖은 머리칼을 그대로 거칠게 움켜쥐더니 뚫어지게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난 '남자'따위를 안고 싶은게 아냐. 여자같은 남자를 안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장우혁'이란 한 인간을 안고 싶은 거란 말야. 그 차이를 모르겠어?" 으르렁거리는 듯이 낮게 속삭이는 재원의 얼굴이 평소의 느슨한 표정과는 달리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어 우혁은 낯설은 그의 모습에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하나 재원은 더 이상 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지 움켜잡은 머리칼을 더욱 거세게 쥐며 굳게 닫혀 있는 입술로 뜨거운 혀를 강제로 밀어 넣어 샅샅이 입 안을 헤집어 놓았다. 양 볼과 입천장, 혀밑의 부드러운 속살과 흰 치아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샅샅이 훑어가던 그의 혀가 수그러들어 자꾸만 뒤로 빠지려 하는 우혁의 혀를 놓칠새라 휘감고는 세차게 빨아당겼다. 달콤함도 부드러움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치 벌이라도 주는듯이 오직 키스라는 행위 자체에만 열중하는 재원의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우혁은 혀가 뽑혀 나가는 듯한 아픔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한참을 격렬하게 놀려지던 혀의 움직임이 차츰 수그러들더니 입 속을 거칠게 헤집고 다니던 혀가 밖으로 나와 키스로 금새 부풀어오른 작으면서도 도톰한 붉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이빨로 윗입술을 깨물다가 아랫 입술을 살짜기 깨물며 다시금 혀로 매끈히 핥으니 붉은 입술이 더욱 붉어지며 촉촉히 젖어들었다. "하아....하아...하..." 입술이 떼어지자 그제서야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다 내뱉는 듯이 가쁜 숨을 연신 토해내느라 벌려진 붉디 붉은 입술 사이로 희고 가지런한 치아와 그 사이에 자리한 작고 촉촉한 분홍빛 혀를 바라보던 재원은 다시 입술을 격하게 밀어붙였다. "....아....그..만....." 이이상 우혁이 숨을 참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야 입술을 떼어낸 재원은 턱밑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려 목덜미를 베어 물고는 붉게 피가 몰릴 정도로 살을 깊숙히 빨아당기다가 천천히 밑으로 이동했다. 입술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칠 때마다 우혁의 몸 위로 낙인(烙印)같은 붉은 자욱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매끄러운 가슴 위를 배회하며 끊임없이 희롱하던 재원의 뜨거운 혀와 입술이 수줍은 연분홍 꽃봉오리를 휘감았다. 혀로 살그머니 핥다가 입술에 머금고 아플 정도로 세게 흡입하면서 그것도 성이 안찼는지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앗!!" 불꽃같이 뜨거운 입술과 혀가 가슴과 옆구리, 겨드랑이, 허리 사이를 쉴새없이 오르내리며 배회하고 있을 동안 그의 손은 우혁의 마른 등줄기를 아주 느릿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도드라진 뼈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가냘픈 그의 몸과 웬만한 여인보다도 더 마른, 한 팔에 감길 정도로 가는 허리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었다. 목덜미와 가슴을 배회하던 입술이 점점 밑으로 다시 내려가려 하자 우혁이 흠칫하며 피하려했지만 재원은 붙잡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재원의 손과 입술이 몸위를 스치며 어루만질때마다 화염에라도 닿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열에 들뜬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우혁은 자신의 쇄골에 깊숙히 낙인을 찍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내는 재원의 눈빛이 전혀 흥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아...."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짓누르고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는 재원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던 우혁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을 본 순간 흐리멍텅했던 정신이 번쩍 들며 달아 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무슨....말이야....."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은 뼛속까지 시릴정도로 냉랭해서 재원의 손길에 순식간에 함락되어 열에 들떠 신음을 내뱉던 자신의 모습과, 지금까지 재원에게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기분에 급속도로 비참해진 우혁이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하자 순간 재원이 우혁의 하체로 손을 내리뜨렸다. ".......네가 원하는게........이런건가?" "앗!!! 아.....아!! 그...그만해!!!" 순식간에 수영복 안으로 침투하는 차가운 손길에 우혁이 펄쩍 뛸 듯이 놀라 움찔하며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뒤틀었지만 재원은 놔주지 않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혁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는 재원의 눈빛은 잔인해 보일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아.....읏....그만해....그만!!!" "........그러니 말해. 원하는게 뭔지." 전혀 부드럽지 않은, 애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거칠은 손놀림에 우혁이 심하게 몸을 떨며 뒤척였지만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재원의 얼굴은 차가운 가면을 씌워 놓은 듯 변화가 없었다. ".......말해" "......읏......그만...해.....왜.....이러는.....하악!!" 숨막히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뒤로 격하게 젖혀지며 경련을 일으키는 우혁의 가느다란 목선에 시선을 박으며 재원이 잔뜩 이를 악문 음성으로 다시 내뱉었다. ".......말해.....어서..." "......하아....읏........대체....흐윽...흑...." 온몸을 발기발기 찢어놓는 듯한 고통과 그보다 더 큰 미칠듯한 쾌감에 우혁이 몸부림을 치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재원은 그런 우혁의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거의 살인적(殺人的)인 인내력(忍耐力)을 발휘하고 있었다. 7 "......말해...네가 원하는게 뭔지." "......제발.....하.....아......흑.....읏!!! 아....아윽!!!" 활처럼 몸을 휘며 허공으로 내뻗쳐진 우혁의 손이 자신에게 닿을뻔하자 재원이 격하게 숨을 들이키며 이미 시커멓게 변해 버린 눈으로 우혁을 노려보며 거의 이를 가는 듯한 음성으로 거칠게 내뱉었다. "......말해!! 대체 원하는게 뭐야!!!" 가슴을 심하게 들먹거리며 눈물로 흥건히 젖은 눈을 들어 재원의 바짝 경직된 얼굴을 쳐다보는 우혁의 입술이 떨림을 일으켰다. 우혁을 몰아붙이다가 오히려 자신이 더 한계에 다다라 새하얗게 질려버린 재원이 입술을 거의 물어뜯다시피 짓깨물어 베어나온 비릿한 핏물을 삼키고 있을때 가늘게 떨리기만 하던 우혁의 입술에서 흐느낌 섞인 음성이 새어나왔다. "......바보같이........뭘....듣길....원하는 거야....... ..........날......이렇게까지.......비참하게 만들어야 해......? .......내가..........내.....형까지......배신하게 만들어놓고........ ..........사랑한다고........생각했는데.........그랬는데......... .......내 입에서.......꼭.......그말까지.........하악!!!" 그대로 격하게 입술을 덮쳐 미친 듯이 우혁의 입술을 탐하며 거의 피부를 잡아뜯다시피 급박하게 온몸을 휘돌아다니며 거칠게 애무하는 손길에 우혁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못하고 가는 팔을 들어 재원에게 매달렸다. 어느결에 발가벗겨진 하반신으로 내려온 재원의 떨리는 손이 다리를 들어올리다가 우혁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눈을 지긋이 감은채 희미하게 떨고만 있는 그의 모습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몸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학-!!!!!!!" 재원의 목덜미에 둘려진 우혁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쉴새없이 몰아붙이는 재원의 몸놀림에 고통은 금새 견딜수 없을만큼 짜릿한 쾌락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아악!!......흐윽......아!!" ".........각..오해......" 물기로 흠뻑 젖어든 가느다란 등허리를 활처럼 휘며 온몸을 꿰뚫는 쾌감어린 전율에 흐느끼다가 다시 몸을 뒤트는 우혁을 바라보는 재원의 욕망으로 어두워진 눈빛이 조금전과는 다른 의미로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악! 아....읏.......아악!!" ".......죽어...도.......않...놔...줄테니......" 거친 숨소리와 서로의 몸이 부딪히는 소리, 자지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교성이 한데 뒤섞여 밀폐된 공간을 휘돌며 공명 (共鳴)하다가 서로의 귓속으로 되돌아와 자극적으로 파고들어 더욱 흥분을 가중시켰다. "...흐윽.....아...아......흑....아읏!!" "....그말....평생.....책임지게....해주겠어...." 팔에 힘이 빠져 목덜미에 매달려 있다가 스르르 풀려내리는 가는 몸을 그대로 놓칠새라 바짝 잡아 끌어안으며 더욱 거센 속도로 깊숙히 파고들다가 교묘한 동작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핏빛 입술을 벌려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내지르며 흐느끼는, 눈물로 흠뻑 젖은채 창백하게 질려버린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재원은 잔인할정도로 우혁의 몸을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아-악!!.....하....아흑.....윽....흑...." "......두고 보는게 좋을거야....기대해도 좋아" -46- # # # 얼음같은 싸늘함으로 가슴시린 사랑을...... 불꽃같은 뜨거움으로 불사르는 사랑을...... 배려와 인내와 숭고함의 넘치는 사랑을..... 갈망과 정열과 소유함의 목마른 사랑을..... 이해와 안식과 용서함의 부드러운 사랑을... 증오와 복수와 잔인함의 무자비한 사랑을... -삐익! 비서실과 연결된 폰의 벨이 울리자 턱을 괸채로 내려다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이회장이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니 그즉시 기계적이고 차분한 느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회장님. SM그룹 안승호 사장님의 전화입니다> 순간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이회장의 시선이 인터폰으로 향했다. 한국의 유수한 몇몇 그룹들이 참여해 합작으로 진행중인 사업기획안의 순차적(順次的)인 진행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중에 합작그룹들 가운데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에게서 연락이 오다니 우연치곤 대단한 우연이라고 이회장은 생각하다가 벽에 붙은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젯 저녁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되었던 순간을 흐지부지 흐트려버렸던 재원의 잠시간의 부재(不在)로 인해 우려와는 달리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별 말이 없던 안승호가 이렇게 다늦게 전화를 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던 이회장은 비서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걸 그제야 깨닫고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연결해" <네. 회장님. 2번 전화입니다> 깊은 해저(海底)로 침잠(沈潛)해 들어가는듯이 몸이 무겁다는 것을 의식이 깨어나기 이전부터 느끼고 있던 우혁은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이마에 살짝 내려와 앉았다가 다시 뺨에 와닿자 그 시원한 감촉에 달아오른 얼굴을 더욱 가까이 밀착시켜 부비려다가 맞닿아있는 손바닥이 움찔하자 천천히 눈을 떴다. 몇번 파르르 떨리다가 힘겹게 밀려 올라가는 긴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던 재원의 약간 경직되 있는 얼굴이 흐릿한 시야로 들어오자 우혁은 두세번 눈을 깜빡이다가 초점이 제대로 잡히며 사물이 눈에 익은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괜찮아..?" 체력의 한계로 인해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황까지 다다랐으면서도 재원은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 쉴새없이 우혁의 몸을 몰아붙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정도로 우혁을 가지고 또 가져도 결코 만족치 못하던 재원은 이미 진이 다 빠져 녹초가 되어버린 우혁이 자꾸 힘없이 뒤로 허물어지려하자 그의 몸을 추스려 계속해서 다시 그를 안으려 했다. ".....생각나..? 갑자기 의식을 잃어서..." 그러다 어느결에 그만 우혁이 혼절(昏絶)해 버렸다는걸 알아채고는 재원은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에 심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옆에 비치(備置)된 큰 타올로 우혁의 새파랗게 질려버린 젖은 몸을 감싸 안아들고는 역시 타올로 만든 가운만 걸친채 온 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신의 방으로 부리나케 올라가는 재원의 모습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도....정신을 못차렸어..." 주치의가 다녀간 후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우혁의 창백한 모습을 단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켜보던 재원은 그를 이지경까지 처하게한 것에 자책(自責)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스스로의 욕구를 조절하지 못할만큼 이성을 잃었었다는 것에 더 큰 쇼크를 받았다. 또한 만일 자신이 전날 술에 취한 그 상태로 돌아왔었다면 어찌 됐을지를 상상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 소름이 돋치며 아찔함에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까지 쭉 흐를 정도였다. "........괜..찮아...?" 의식을 차린후 눈을 뜬채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그의 모습에 자못 불안해진 재원이 조바심을 억누르며 물었지만 우혁은 가만히 입술을 굳게 닫은채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무섭게 다그치며 잔인할 정도로 괴롭히던 그 사람과 과연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갈정도로 평상시의 무심함이 아닌 초조와 근심이 베어있는 눈빛으로 자신을 살펴보는 재원의 긴장된 모습에 우혁은 복잡한 심경(心鏡)이 더더욱 심란해져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목..." 한참을 침묵만 지키던 우혁의 입술이 열리며 꺼질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분홍빛 혀를 살짝 내밀어 바싹 바른 입술을 핥는 것을 본 재원은 그가 목말라 한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신의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떼면서 침대 옆의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크리스탈 주전자를 들어 글라스에 물을 따르는 재원의 동작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아가며 힘없이 바라보던 우혁은 그가 자신의 머리 뒤를 받치고 반쯤 일으켜 세우자 물컵을 직접 입에 대주려는 줄 알고 사양하려했다. 하나 한손으로 우혁의 머리를 받치고는 컵을 들어 자신의 입에 물을 머금자마자 미처 어쩌기도 전에 그대로 벌려진 입술을 덮쳐 물을 흘려 넣어주는 행동에 당황한 우혁이 머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재원의 손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시원한 액체를 고스란히 그대로 받아 마셔야했다. ".......콜록...." 꿀꺽거리며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이렇게 자극적으로 들릴줄은 몰랐는지라 더욱 당황한 우혁이 물이 다 넘어가자 얕은 기침을 뱉어내며 입술을 떼려했다. 하나 우혁의 뒷머리를 꽉 부여잡고 입안에 머금고 있던 여분의 물까지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넘겨주고 나자 재원은 그제야 입술을 떼내고 우혁을 푹신한 베게에 도로 눕혀 놓았다. 그때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뜬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우혁의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할 정도로 귀여워보여 잔뜩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되살아난 재원은 우혁이 고개를 돌려 피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에 묻은 이슬방울을 혀와 입술로 살며시 닦아내고는 이빨을 세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번엔 자신의 입술에 묻어있는 물기를 혀로 천천히 핥다가 짖궂게 말했다. "......물맛 어때?" 자신이 가끔씩 짖궂은 말을 던질 때마다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놓는 것처럼 어쩜 저렇게도 마음속의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솔직하게 얼굴 위로 표현을 해놓는지 볼때마다 신기해 재원은 열과는 다른 의미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또 날..." 또다시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 발끈했지만 갑자기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에 우혁은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무방비하게 재원에게 자신의 손을 맡겨야 했다. 가늘고 길어 더욱 우아해 보이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천천히 갖다대고는 경애(敬愛)와 연모(戀慕)의 감정을 담아 지긋이 누르면서 우혁의 얼굴을 쳐다보는 재원의 눈빛은 호수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 한없이 여리기만한 우혁을 미칠듯한 질투로 인해 이성을 잃고 괴롭혔던 것을 생각하니 재원은 그 원인이나 다름없는 안승호에게, 그리고 마치 심술궂은 아이가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을 타인이 건들지 못하게 고약한 심보로 아예 망가뜨려 버리는 것과 별 다를바 없는, 유치하면서도 또한 소름돋힐만큼 잔인한 짓을 해버린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끓어오르려는 노기(怒氣)를 참으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준 상처를 보듬어주고픈 심정에 자꾸 움츠려드려는 우혁의 손가락을 더욱 세게 쥐며 입안에 머금은채로 혀로 핥다가 간지럽히듯 살짝살짝 건드리며 할짝였다. 자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손가락 살끝과 연분홍 손톱 위를 입술에 살짝 물고 촉촉한 혀로 휘감으며 살그머니 핥다가 입술을 오무려 좀더 강하게 빨아당기는 그 모습이 느껴지는 감촉만큼이나 위험스러울 정도로 자극적이고 도발적이어서 우혁은 다시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돌아가며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손가락을 혀와 입술로 촉촉히 적시다가 살짝 이빨로 깨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혁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던 재원이 마지막으로 손등에 입술을 지긋이 누른 상태로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떼어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극적인 입술과 혀의 감촉에 취한 듯이 나른해져있는 우혁의 얼굴을 한참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던 재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자신의 시선을 놔주지 않은채 심각해 보일 정도로 진지하게 바뀐 재원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던 우혁의 귀로 나즈막하게 잠긴듯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말해줄 수 있어..? 너와...그사람" 누르고 있던 버튼을 떼자마자 수화기를 드는 이회장의 입가에 대외용(對外用)인 사무적인 미소가 습관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여지없이 귓속으로 밀려드는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이회장님. 늦은 시각에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천만에. 않그래도 내일쯤 자네와 통화하려던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돼었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이번에 그 K&G-project 때문에 해외에 파견해야할 각 회사 대표단을 의논해야 하는데......정기총회때 어차피 얘기가 나올테지만 난 자네가 그 대표단을 이끌어줬으면 좋겠네. 기간은 좀 오래 걸릴테지만 한국을 오가면서 자네같은 인재가 일을 추진해 준다면 다들 안심하고 맡길수 있을테니 말일세. 자네 의향은 어떤가?" <...............> 끊어진게 아닌가 의심이 들정도로 한참동안 아무 말도, 인기척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자 이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려할때였다. <어제까지만해도 전혀 그런 언질(言質)을 주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당황을 금치 못하겠군요. 그 일에 전 부적격합니다. 우선 제 나이 때문에도 그렇지만, 저보다 더 유능한 분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그런데.......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결국 짐작대로 안승호가 말하려던 용건이 그거였나 싶어 이회장은 화제를 돌리려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음성엔 변화가 없었다. "물론이네. 어제 그렇게 대접을 잘 받고도 인사를 제대로 않한게 아닌가 걱정.." <네. 제대로 않하셨지요> 무례하게 자신의 말을 중도에 끊으며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가 처음과 다를바 없는 침착한 톤이었기 때문에 이회장은 한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나 바로 다음순간 자신이 착각을 한게 아니라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안 이회장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가 그정도로 예우(禮遇)를 했으면 그쪽에서도 뭔가 답례가 있어야 했던게 아닙니까? 그런데.......이제보니 그 대표단을 이끄는 실무자(實務者)가 답례였나 보군요> ".........자네....?!!" "......무슨......"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는 우혁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거머쥐고는 경계하듯 불안감에 흔들리며 급속도로 어두워진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재원이 다시 나즈막히 속삭였다. ".....추궁하자는게 아냐. 단지 쓸데없는 오해를 하기 싫을 뿐이지. 이런 일로 널 상처 입히기도 싫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우혁은 지금까지 거의 냉정을 잃지 않던 재원이 왜 오늘따라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다시피한채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대강은 짐작할 수가 되었다. 수차례 자신을 품으면서도 만족치 못하고 갈수록 더 난폭하게 굴며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였던 이유가 이거였던가 싶어 우혁은 그동안 자신만 그랬던게 아니라 재원 역시 혼란스럽고 괴로워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비록 서로의 감정을 어느정도 서로 확인을 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후일이라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고 파탄적 (破綻的)일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재원은 우혁이 괴로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하나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참을 망설이는 우혁의 모습이 금새 꺼져버릴 듯한 촛불처럼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흔들려 보여 재원은 그 말을 꺼낸 자신을 질책하며 더이상 우혁이 그것에 신경쓰지 못하게끔 고개를 수그려 새하얀 이마에 입술을 갖다대며 자신이 한말을 잊게하려 했다. 병아리 털처럼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있는 이마의 경계선을 입술로 부비다가 향긋하고 달콤한 내음이 나는 우혁의 백금빛 머리칼을 입에 물어보고는 천천히 이마를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려 내려왔다. 살짝 찌푸려져 있는 미간에 입술을 누르며 펴주려는 듯 부드럽게 혀로 핥더니 반쯤 내리깔린 얇은 눈까풀위로 다시 입술을 내리뜨려 눈동자가 움직이는 감촉을 생생히 느끼다가 긴 속눈썹을 혀로 건드렸다. 입에 물릴 정도로 기다란 속눈썹을 잠시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재원이 천천히 입술을 벌려 한번 물어보다가 혀를 내밀어 아래서 위로 마치 여자들이 마스카라를 칠하는 듯이 쓸어올리며 핥아보았다. 곧게 뻗은 콧날을 쭉 타고 지긋이 눌러가며 내려오다가 다시 관자놀이를 타고 실크같은 피부를 달래듯 쓸어내리던 입술이 보드라운 귓볼로 옮겨져 살포시 물었다. 보들보들한 귓볼을 혓바닥으로 건드리다가 이빨로 살짝 가볍게 깨물었을때 흠칫 몸이 떨리며 얕게 내뱉어지는 희미한 신음소리에 자극을 받은 재원이 그대로 귓바퀴로 올라가 입술에 머금고는 혀로 할짝이다가 밀어넣은 혀로 귓속을 촉촉히 적시며 간지럽혔다. ".......그...만........얘기를...." 갑작스런 애무에 움찔하며 시트 속으로 파묻히려던 우혁이 귓속으로 뜨거운 숨결이 토해지며 민감한 곳을 자극받는 바람에 바짝 긴장해버리자 재원이 진정시키려는듯 목덜미로 손을 뻗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턱에 살짝 키스하다가 볼을 따라 올라오며 다시 입술을 지긋이 누른채 재원이 웅얼거리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불편하면 않해도 돼.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니....말하게 해줘...." 뭔가를 결심한 듯 작지만 단호한 음성에 관자놀이로 입술을 갖다대던 재원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우혁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망설이던 그의 마음이 확고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제게 뭔가를 요구하시려 그랬던 거라면 아마도 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겁니다. 제 대부님과 회장님 집안의 과거의 교분(交分)을 생각했다면 말이지요> "............." <아직까지는 제가 후견해야할 책임이 있는 아이입니다. 법적으로 제 밑에 있는 것에 전혀 하자(瑕疵)가 없지요. 그아이가 아직 미성년이라는 것을 모르시진 않으실텐데요?> 음정의 고저(高低)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이 베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인해 이회장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사무적인 미소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내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후견인은 아마도 내가 되었을 걸세. 자네보다야 여러모로 내가 더 낫지 않나?" <....아니지요. 전대 회장님이 살아 계셨대도 대부님은 그 아이를 제게 맡기셨을 겁니다. 설마........잊으신건 아니실테지요? 이미 전대 회장님과 대부님의 친분관계가 이십여년 전쯤 깨어진 사이라는걸..> "그건...!!" <게다가.....세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 <고명하신 일진의 이재석 회장님이 하나뿐인 자신의 후계자에게 납치까지 벌여가면서....사람을 '선물' 해주었다는걸 알면 말이지요?> "......!!!!!!....." ".....그렇게.....자폐증(自閉症)에 빠졌던 날 끌어내준게......승호형이었어.... 그후로도.....꽤 오랫동안....아파야 했기 때문에...또...형이....만류해서... 학교에 못가고 집에서 공부해야 했고....그러다가...널.....만난거야.." 고개를 푹 숙인채 시트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자꾸만 사그라들려는 용기를 간신히 추스려가며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떠듬거리며 얘기하던 우혁은 사이드 테이블 옆에 놓인 쇼파에 앉아 자신의 말이 끝나도 한참을 침묵만 지키고 있는, 숨소리조차 나지않는 재원 쪽을 감히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실망했다 해도, 자신을 더럽게 여긴다해도 어쩔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우혁은 내내 시트자락을 쥐고 있던 축축하게 땀이 베인 손을 내려다보며 떨지 않으려고 힘을 꽉 주었다. 그가 더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며 실망하지 않을 자신있다고 계속 자신에게 종용(慫慂)시켰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파오자 순식간에 차오른 물기로 인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바보..같이....' 아무말 없이 쇼파에 앉아만 있던 재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이 나자 등뒤에 재원이 받쳐준 쿠션에 기대어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우혁이 순간 눈에 띌 정도로 움찔하며 긴장했지만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로 자리에 앉는 듯 하자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계속되는 침묵에 더이상의 긴장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바싹 타버릴 지경에 다다른 우혁이 주저하다가 흐릿한 눈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하나 쇼파 팔걸이에 한쪽 팔꿈치를 댄채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려버린채 광대뼈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는 전신에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재원의 모습을 본순간 우혁은 흠칫하며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듣지 않는게....더 나았어..." 괜찮다고 우혁은 내내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원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게되자 갑자기 왈칵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금새 차올라 그렁그렁해진 눈을 깜빡였다. 눈밑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있던 눈물이 방울져 맺혀있던 그상태로 영롱하게 반짝이면서 순식간에 뺨 위로 또르륵 굴러 떨어져버렸다. '..........아...파.....' 가운 위로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며 더 이상 재원에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더욱 고개를 숙이며 주저하다가 손을 들어 몰래 눈물을 훔치려던 우혁은 다음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라면 그자리에서 죽였을거야" 과장(過狀)도, 자만(自慢)도 그렇다고 의지(意志)도 아닌 그야말로 말그대로 충분히 그렇게하고도 남을 거라는 것을 감히 의심조차 하지못할 정도로 잔뜩 짓눌렸다가 간신히 내뱉는듯한 조용한 음성이, 하나 듣는 사람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독기(毒氣)가 서려있는 음성이 재원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뭐..." 천천히 눈위를 가렸던 손을 뗀 재원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말에 놀란 나머지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우혁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항상....우는 모습밖에...보지 못하는구나..." 무심함이 깨져버린 재원의 눈빛은 마치 풍랑(風浪)이라도 만난 듯 온갖 감정들로 뒤섞여 거세게 소용돌이치면서 애처로운 우혁의 모습을 담은채로 쉴새없이 흔들렸다. 하나 얼마안가 서서히 흔들림이 멈추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급기야 동공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항상....우는 모습밖에...보지 못하는구나..." 무심함이 깨져버린 재원의 눈빛은 마치 풍랑(風浪)이라도 만난 듯 온갖 감정들로 뒤섞여 거세게 소용돌이치면서 애처로운 우혁의 모습을 담은채로 쉴새없이 흔들렸다. 하나 얼마안가 서서히 흔들림이 멈추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급기야 동공이 투명해 보일 정도로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재원은 말을 채 못하고 이를 악물다가 고개를 돌려 우혁을 외면했다. 한참동안 희미하게 전신을 떨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재원은 그대로 견고한 등나무로 만들어진 팔걸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난 항상 널 울리고만 있어!" 순간 재원의 흰뼈가 드러나보일 정도로 찢겨졌던 오른손의 상처가 방금 전의 충격으로 다시 피가 터져나와 금새 손등을 시뻘겋게 적시다가 손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피....피가..!" 그제서야 재원의 상처를 발견한 우혁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침대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켜 다시 팔걸이를 내리치려는 재원의 팔을 그대로 붙들었다. "하지마-!!" 자신의 팔을 붙잡고 주체못할 정도로 몸을 떨며 비명에 가깝게 울음섞인 음성으로 외치는 우혁의 모습에 내리치려던 팔을 든채로 한참을 재원이 가만히 있자 상처가 터져 피로 뒤범벅이 된 손을 눈물로 흠뻑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우혁이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으로 가만히 입술을 갖다댔다. "....그러지마.." 비릿한 핏물 위로 눈물을 떨구며 우혁이 재원의 상처난 손등에 입술을 댄채 속삭이자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던 재원이 우혁의 허리를 휘감아 당기더니 그대로 품안에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아...!" 재원의 무릎위로 쓰러지다시피 포개져 그에게 안긴 우혁은 자신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 재원의 머리를 머뭇거리다가 양팔로 살며시 감싸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몸을 떨기만 할 뿐이었다. 재원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희미하게 떨리는 우혁의 가는 몸을 영원히 놔주지 않으려는 듯이 등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강하게 조여 숨이 막힐 정도로 바짝 끌어안았다가 다시 천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갈려면.....지금...가....." 우혁의 목덜미에 대고 있던 고개를 드는 재원의 눈빛이 미칠듯한 분노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심적인 고통,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 뒤덮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우혁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뒤섞여 빛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에게......가도록..해" 도저히 소리로는 않나오는 것을 억지로 버텨가며 간신히 억눌린 음성으로 토할 듯이 내뱉는 재원의 모습은 그 한마디 만으로도 이미 새하얗게 질려버려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감고 있는 우혁의 팔을 잡아 내리며 이를 악물었다. ".....나처럼....상처만 주는 인간보다는...차라리...." "......그렇게....하고 싶어...?" 귓속으로 밀려드는 우혁의 촉촉히 젖은 듯한 음성에 재원은 더이상 견딜수가 없는지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며 그를 외면했다. 하나 주위에 은은히 베어있는, 현기증을 일으킬만큼 달콤하고 향긋하면서도 사람의 정신을 한순간에 혼미하게 하는 마혹적(魔惑的)인 체향(體香)이 갑자기 한꺼번에 와락 밀려드는 순간, 그리고 그 체향(體香)을 어쩌기도 전에 그대로 자신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목덜미를 감싸안는 가녀린 팔의 촉감을 느낀 순간, 재원은 그대로 경직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달콤하고 유혹적인 戀人의 목소리..... ".......아무 말도 하지말고....날.......잡...아.....헉.." 그답지 않게 간신히 용기를 끌어 모아 재원의 몸에 매달리던 우혁은 잔뜩 경직해 굳어 있다가 그대로 자신을 으스러뜨릴 듯이 끌어안는 재원의 팔 힘에 한순간 숨통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읏..." 우혁의 새하얀 목덜미를 마치 흡혈귀가 물어뜯듯이 그대로 덮쳐 거세게 입안에 빨아당겨 순식간에 벌건 자욱을 만들어버린 재원이 우혁의 가는 몸을 팔로 칭칭 휘감고는 더욱 거세게 조였다. "....하아..." 숨도 못쉴만큼 갑갑하게 조여대는 재원의 팔안에서 그의 몸 위로 쏠리듯이 불안정한 자세로 올라가 있던 우혁이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냈지만 재원은 점점 더 바짝 조여 안을 뿐이었다. "....아.......아윽!!" 흐트러진 가운 새에 숨겨져 있는 우혁의 가슴을 찾아 가운을 헤쳐 급하게 파고들며 입술을 내려뜨려 거칠게 연한 핑크빛 꽃봉오리를 베어물고는 세차게 흡입하자 우혁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숨막히는 신음성을 토해냈다. 헐거워진 가운을 등뒤로 거칠게 벗겨 내리며 이미 붉은 자욱으로 가득한, 눈앞에 드러난 백옥같이 매끄러운 상반신에 입술을 짓눌러 연약한 피부에 다시 낙인(烙印)을 찍기 시작했다. ".....하아.......윽......그....그만...." 우혁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대로 어깨 위 연한 살에 이빨을 날카롭게 박던 재원이 잔뜩 쉬어버린 지독한 저음으로 뇌까리며 어두워진 눈빛을 차갑게 번뜩였다. "....후회하지마...놔달라고 애원해도...이젠...늦었어.." 수화기를 쥐고 있던 이회장의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려갔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넨 그렇게 못해. 자네까지 말려들게 뻔한데도?"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시죠? 저보다도 회장님이 더 저를 잘 아시나 보군요> -그 소년에 관한 한은......안승호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이회장의 뇌리속에 그언젠가 듣고도 무시해버렸던 심복의 말이 갑자기 되떠올랐다. 그는 설마하면서도 자신이 이전만큼 확실하게 장담할 수가 없다는걸 깨닫는 순간 하마터면 신음을 내뱉을뻔 했다. "과연.....자네 말을 믿어줄까?" <믿고 않믿고는 상관없습니다. 하나 사람들의 심리는 그런게 아니지요. 이런 가쉽 하나가 터지면 다른 루머들과 결부되어 더욱 큰스캔들이 터지기 마련이지요. 왜 일진그룹의 후계자는 단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살까...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하고 한번쯤 의심을 해보기 마련이지요. 그다음 순서는 귀찮은 벌레들이 꼬여들겠지요. ....이런 혼란을 원하시는 겁니까?> "......내게 이러고도 자네가 무사할거라 생각하나?" <.......전 회장님께서 충분히 심사숙고 하실거라 생각합니다. 회사와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를 지킬것인지.....아니면 회장님께 별 가치도 없는 것을 위해 타격을 감수할 것인지....> 지금 이자리에 안승호가 있었다면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죽일수 있을 정도로 이회장의 눈빛에 지독히도 냉랭한 살기가 떠올랐다. "......자넨....역시 교활해. 감탄을 금치를 못하겠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더이상 시간끈다는건 낭비겠지요. 내일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도 없이 끊어져버린 수화기를 든 채 이회장은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려대도 내려놓지 못하고 한참을 그상태로 있어야했다. 자신이 이정도로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몰렸다는 것도 믿을수 없었지만 재원을 떠올린 순간 이회장은 안승호가 그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 우선 순위에 놓았는지를 착각해버린 자신의 실수로 인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자 차라리 않하느니만 못한 짓을 했다는데 내내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어야했다. -47- # # # 너무나 아름다워 차라리 슬퍼보이던 그 모습을.... 뼛속까지 파고들어 잊혀지지 않는 그 모습을..... 보지를 않았다면, 아니 아예 만나지를 않았다면..... 쓰레기같던 내 인생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부지면적을 자랑하는 이씨집안의 본가(本家)는 오로지 그 가문에 선택받은 특정한 사람들만이 드나들거나 머무름을 허락받았고 경호원들과 감시카메라, 경비견들에 의해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요새(要塞)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나 말이 요새이지 중앙부에 자리잡은 외국영화에나 나옴직한 거대한 3층짜리 석조건축물뿐만 아니라 몇 개의 테니스 코트나 실외 수영장같은 것은 기본이었고, 주차장을 가득 메우는 외제차나 고급승용차들의 주인들이 들락거릴때마다 사용할수 있도록 만들어진 각종 편리한 부대시설(附帶施設)들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 실상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활기차고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 모든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대로 부(副)와 영화(英貨)를 누려온 집안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온집안 구석구석, 하다못해 일하는 고용인들에게까지 자연스레 베어있는 근엄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이곳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위압적으로 다가와 괜시리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키는 면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꽤나 많이 끄는 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는 첨탑(尖塔)모양의 거대한 유리건축물이었다. 수십 대의 스프링 쿨러가 작동되고 있는 넓게 뻗은 잔디밭의 한켠에 세워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다각형의 몸통에 삼각원형뿔이 지붕으로 붙어 있는 특이한 모양의 이 건물은 철근 골격에 불투명 유리조각을 짜맞춰 지어진 것이었다. 불투명 유리라 비록 밖에서 보면 내부가 흐릿해 보이지만, 덮개가 반쯤 열린 채로 있는 지붕 꼭대기 위로 높게 솟은 열대야자수의 푸른 잎새로 보아 그곳이 일종의 식물관같은 곳이란 것을 짐작케했다.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내부에는 온통 이름모를 진귀한 모양의 꽃들과 화초들, 거대한 열대수들로 뒤섞여 있어 향이 짙은 듯 하면서도 신선한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고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고 넓었는지라 일반 식물관처럼 후덥지근하거나 습한 느낌을 그다지 받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쾌적한 적정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식물관이나 별다를 것 없는 이 거대한 화원의 한가운데쯤에 위치한, 오색찬란한 비단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커다란 연못가에는 나무등걸로 만든, 차양이 처진 탁자와 의자들이 비치되어 있어 여유롭게 쉬면서 세속(世俗)과 동떨어진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했다. 오후 네다섯시 경쯤 습관처럼 찾아드는 우혁을 위해 항상 이 주변은 조용히 비워져 있기 마련이었고, 고적(孤寂)한 분위기에 취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보면 어떤 때는 나른함을 이기지 못해 잠에 빠져들 때도 있어, 그럴때면 어느 결에 침대로 옮겨져 있기 쉽상이었다. 하나 요 몇 일간은 혼자만 오는게 아니라 수다스런 동행까지 있어 우혁은 사색에 빠질 여유같은 것은 엄두도 내질 못하는 형편이었다. 오늘도 여느때처럼 우혁은 작은 호수라고 해도 좋을만한 크기의 연못을 오른편에 둔채 재원의 유모와 마주앉아 한담(閑談)을 나누는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이 저택 내에서 우혁은 이상할 정도로 항상 일정하게 접하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과만 마주쳐 왔다. 물론 그것은 그가 거의 한정된 공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회장의 별도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 없는 그로서는 재원 다음으로 많이 접촉하는 그의 유모와 같이 보내는 한때의 시간이 의외로 무척이나 즐거운 편에 해당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해했지만 그 화통한 성격만큼이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녀의 소탈함 덕에 상당히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 우혁도 조금 편안한 심정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고 그런 감정의 발로(發露)는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모정(母情)에 대한 그리움때문이기도 했다. 이제는 우혁과 꽤나 친밀해진 사이가 된 재원의 유모는 등나무 탁자를 사이로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우혁의 모습을 그가 눈치채지 않게끔 주의하며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긴 잔에 꽂혀 있는 스트로에 갖다댄 입술을 살짝 오무려 오렌지쥬스를 조금씩 빨아올려 마시고 있는 그 모습은 재원보다 1살 많은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아무리 혼혈이라 해도 남자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지나친 감이 있는, 푸른 실핏줄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희고 약한 피부도 그렇지만 스트로를 살짝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마디도 잘 않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손가락 끝에 달린 연한 살구빛의 손톱 하나 하나까지도 마치 인형의 그것인양 그 모양과 색감이 너무나 섬세하고 정교했다. 조막만한 얼굴을 살포시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백금빛의 머리카락 하나만으로도 이미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할 만큼 화사했지만, 머리칼에 가려졌다가 살짝 살짝 드러나는 귀여운 귓볼은 무척 연해보여 한번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였고, 볼 위로 늘어뜨려진 연갈색의 속눈썹은 웬만한 여자들의 것보다 더 길어 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하나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확 끄는 것은 눈이 시릴정도로 투명한 피부 위에 상처라도 난 듯 핏방울이 맺힌 듯한 입술이었다. 작지만 유연한 선을 그려 완벽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도톰한 입술은 상당히 붉어 그대로 꽉 베어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달콤해 보이면서도 또한 묘하게 유혹적(誘惑的)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굳이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보는 내내 '세상에~!' 란 감탄사를 속으로 연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 그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섬세하고 우아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한번 눈을 주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지를 못하게 했다. 게다가 재원보다는 작아도 키는 어느 정도 큰 편에 속했음에도 너무 말라서 빈약해 보이는 몸은 다른 것은 배제하더라도 그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로는 절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안타까운 심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꽤 많이 나아졌지. 저 정도면...' 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입술을 귀엽게 오무려 목을 축일 만큼만 쥬스를 빨아 마시고 있는 우혁의 모습은 평소 그를 휘감고 있던 처연(悽然)한 분위기가 아닌, 무척 평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마치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듯 그 모습을 한참동안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고아(高雅)하게 뻗은 목선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다가 우혁이 약간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흰 옷깃이 젖혀지며 가려져 있다가 드러난 쇄골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도드라져 나온 쇄골의 우아(優雅)함과 절묘(絶妙)함에 절로 감탄하는 것도 잠시, 옷깃에 가려졌다가 순간이었지만 살짝 드러나 버린...... 약간 붉그스름한 동그란 자욱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말로는 형언(形言)못할 만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저러니.....정신을 못차릴 수 밖에...'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혁과 재원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란 것을 진작부터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재원을 갓난아이때부터 키워왔던 유모라는 탓도 컸지만 둘만 있으면 공기부터가 틀려진다는걸 확연히 느낄수 있을 정도로 피부를 따끔거리게하는 두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는 결코 同性 친구간에는 조성되지 않는 것이었고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異性 혹은 애인 사이에서나 표출될 법한 性的 긴장감의 전형적인 그것이었다. 하나 그렇게 대충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 제대로 안는 모습이라던지 하다못해 간단한 스킨쉽을 하는 것도 본적이 없었고, 볼때마다 둘다 서로를 거의 외면하다시피하는 통에 상당히 아리송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가 두사람의 관계를 확신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열흘 전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바빴던데다 급구(急求)했던 고용인들 중 한명이 그 전전날 온다던 약속을 않지키는 바람에 분주한 고용인들을 닥달할 여유도 없이 그녀까지 일손을 거들어야 했었다. 3층 재원의 침실을 맡고 있던 담당 계집애는 더 일손이 급한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녀가 직접 방안을 정돈하다가 침대시트를 새 것으로 갈려고 했을 때였다. 잔뜩 구겨져 엉망으로 흐트러진 눅눅한 시트 위에 묻어있던, 희미한 얼룩들과 드문드문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검붉은 자국들은 굳이 결혼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눈치껏 알아볼 수 있는, 육체관계가 있었을 경우에만 볼 수 있는 질탕한 쾌락(快樂)의 흔적(痕迹)들이었다. -예? 아니요.. 시트는 매일 아침 꼬박꼬박 갈았는데....왜요? 담당 계집애의 눈치로 보아 결코 그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듯했기에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아예 자신이 재원의 침실 정돈을 맡기로 작정했다. 두 사람이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진작부터 알아왔던 것이지만 추측이 사실로 판명되자 그때부터 그녀는 더 이상 우혁을 남처럼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처음엔 재원이 철없던 시절 방탕했던 그때처럼 우혁 역시 그런 상대로, 혹은 도착적(倒錯的)인 성취향(性趣向)를 가진 특권층의 개망나니들처럼 단지 그를 색다른 상대로만 보는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었지만 그런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곧 알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또 어디서 왔는지조차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혁 하나로 인해 재원이 본가로 돌아왔다는 것을, 또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만 미미하나마 재원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확연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거칠고 난폭하게 반항하던 시절이 차라리 그리울 정도로, 바싹 메말라 감정이란 것은 아예 갖고 있지 않는 듯한 재원의 삭막하고도 무미건조한 모습에 말은 않해도 이회장만큼이나 그녀 역시 오랜기간 속을 끓이고 애태워야했고 그런 와중에 나타난 것이 바로 우혁이란 존재였다. 그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경우 보통 혐오감을 가지고 도저히 그런 행위를 용납지 못했을 테지만 그녀만은 달랐다. 물론 둘의 사이를 내심 짐작만 하고 있다가 사실임을 알게 됐을 때 무척 놀라고 당황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우혁으로 인해 재원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둘의 관계가 잘되기만을 빌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모른척하면서 완전히 방관하지도 그렇다고 쉽사리 관여하지도 않는 제삼자의 관대한 눈으로 이 불안정하기만한 어린 두 戀人을 내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또 그녀의 바람대로 비록 우혁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재원의 분위기가 최근들어 상당히 부드러워졌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우연히 타이밍이 잘 맞으면 화원이나 일광욕실에서 잠이든 우혁을 품에 안아들고 침실로 걸어가는 재원을 목격할 때도 있어 그 모습을 숨어서 몰래 훔쳐본 적도 있었다. -.....우혁아.... 젖은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잠든 우혁을 부르며 한참을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수그려 금빛 머리칼에 천천히 입술을 묻으며 눈을 감는 재원의 옆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부드럽고 평온(平穩)해 보여, 보고 있던 그녀 자신이 마치 고백이라도 받은 양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을 정도였다. 하나 그렇게 재원뿐만이 아니더라도 앞에 앉아 있는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우혁의 모습은 누구라도 한번 보면 그대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性이란 것에 그리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 그렇게 너무나 매혹적(魅惑的)이었다. 외모만으로 따지자면 세상에는 우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것은 단순히 생김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늙으면 사라져버릴 한낱 겉모습 때문만이 아닌... 그 내면에 깃들여져 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아함과 결코 때묻지 않은 순수(純粹)함 때문에 더 그 고귀함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 했고 그랬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우혁에게 쉽게 매혹되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 제 얼굴에.....뭐가.. 묻었어요....?" 불현듯이 귓가로 들려오는 조심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기 얼굴에 슬며시 손을 갖다대며 쳐다보고 있는 우혁의 모습에 자신이 완전히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는 내심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분위기가 뭐랄까.....상당히 묘해서.... .......비에 젖은 듯한.....파란 물빛의 石竹이 연상될 정도로... 그렇게 가녀리고 청초(淸楚)하고.....웬지.....슬퍼 보인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여서......" 웬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우혁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당황해 어쩔줄 몰라하자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아주 소중하고 귀한 마음으로 보살펴 키워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 우혁군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고와보여요. 그러니....우리 도련님이 저렇게 넋이 완전히 나가버렸지~쯧쯧.." 한순간 숙연(肅然)해질 정도로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급속도로 분위기를 전환시켜버리는 그녀의 장난기 서린 짖궂은 말투에 우혁은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주체 못할정도로 화끈거리는 뺨을 차마 손을 올려 가리지도 못해, 당혹감에 이대로 땅속으로 꺼져버리고만 싶은 심정이 되버렸다. 뭔가를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장난삼아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않갔지만, 우혁의 소심한 성격으로는 그 말만으로도 이렇게 눈에 훤히 보일정도로 정직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더구나 바로 어제..... 제정신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는...... 재원과 자신의 모습까지 덩달아 떠오르는 바람에 우혁의 얼굴은 말그대로 화염(火焰)에 휩싸인 듯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해... 분명 잠결에도 귓가에 따뜻한 숨결을 토해내며 나즈막하게 뭐라고 속삭이는 재원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자신은 알몸인채 쿠션과 시트 더미속에 파묻혀 있었고 별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벌써 정오를 훨씬 넘어서서 해가 중천에 뜬 훤한 대낮이었다. 누군가 들어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볼까봐 자꾸 늘어지려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녀 때문에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놀랐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우혁은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며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우혁의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입가에 자꾸 떠오르려는 웃음을 혀를 깨물어 참으며 은근히 그를 놀리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많이 닮아있었다. 그야말로 토마토 인간이란게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옷에 가려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드러난 흰 피부가 완전히 발그스름하게 변해버린 우혁을 넌지시 건너다보는 그녀의 눈과 입가에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미소가 잔뜩 어려있었다. "자~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다...!! 작년 생일파티 얘기를 했던가요? 늦게까지 당사자가 나타나질 않아서 아주 난감한 날이었는데 않온게 아니라 어디서 벌써 술에 취해가지고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서는.....덥다고 그대로 옷을 훌훌 벗고.... 아, 그 왜 .... 우혁군이 요즘 아침마다 간다는.... 동쪽 풀장 있죠? 거기에서....음? 더워요?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지?" '동.쪽.풀.장'이란 단어에 양쪽 뺨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불꽃같이 달아올라버린 우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크게 당황했는지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며 입술을 깨물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려 얼굴을 가리려했다. 그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고 양쪽 입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가며 능글맞은 웃음으로 한가득한 유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게 소심하고 내성적(內省的)인 우혁으로서는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불행이라 해야할지.... "하여간에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거기서 수영을 했는데.... 아 글쎄~ 파티에 온 여자애들 몇몇이 호기심에 이문~저문 열어보다가.... 하필이면 마침 그때 물밖으로 빠져나오는 벌거숭이 하나를 보고는 기절초풍해서... 아니, 괜찮아요?!! 온몸이 다 빨개졌잖아요~!!! 아니?!!! 이런, 이런~열까지-?!!! 정말 어디가 또 아픈거 아니예요~?!!!! -48- # # # 확인하기 두려운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될까... 속절없이 밀려드는 초조함과...... 공포에 가까웠던 불안감은....... .......과연......기우(杞憂)에 불과했던 것일까...... ".....후....." 책상 앞에 앉아 모아쥔 양손에 이마를 기댄채 눈을 감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승호는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얇은 정장쟈켓을 잡아채어 팔에 걸고 집무실을 막 나서려던 승호는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다가 뭔가 잊고있던 것을 떠올린 듯 다시 되돌아섰다.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보드라운 천에 싸인 무언가를 끄집어내 들어올려서 싸맨 것을 헤쳐 그 속에 든 물체를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승호는 그대로 손에 쥐고 나가려다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다시 머뭇거리더니 도로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SM 그룹 본사 빌딩 앞에 세워놓은 벤츠 차체에 기대서 있던 에릭은 주시하고 있던 회전문이 돌아가며 허리를 숙이고 쭉 도열해 있는 제복차림의 경비원들을 뒤로 한채 승호가 걸어 나오자 피고 있던 몇 개피째인지도 모를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끄고는 차문을 열어 그가 타기를 기다렸다. "......가자" 뒷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탄 에릭의 귀로 평소와는 뭔가 다른 듯한, 약간 잠긴 듯하면서도 다소 음정이 메마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능숙하게 핸들을 돌려 회사의 진입로를 매끄럽게 빠져나와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혼잡한 차량의 행렬에 합류하던 에릭은 빽미러를 통해 가죽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승호를 흘끗 쳐다보았다. 목적지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릭은 자신이 가야할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곤한 듯 눈을 붙이고 있는 승호를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갔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차라리 늦었으면 늦었지 결코 빠른 것이 아니었지만 얽키고 설킨 여러 문제들로 인해 더 오래 걸리리라 예상했었는데 이제라도 그가 결단을 내렸다는 것에 에릭은 내심 안도해하는 중이었다. -...그 자식이....그날.....그 속에 끼어 있었어... 희미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외부(外部)와 완벽하게 차단된, 적막감(寂寞感)이 감돌 정도로 조용한 차안에서 눈을 감은채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승호의 냉정한 얼굴 위로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보는건데.....안아 주지도 않는거야? 1달이란 기간보다 더 오래 걸렸어야 할 시간을 단축하고 또 단축시켜 하루가 1년처럼 느껴지던 기나긴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정(日政)이 험했기에 데려가지도 못하고 그리워 애만 태워야했던 그 모습을 봤을 때의 벅찼던 기쁨도 잠시, 감정을 그리 잘 표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예 시선조차 마주치려하지 않는 어린 戀人의 모습에 지끈거리며 가슴을 옥죄어오던 실망감을 승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즈음 다시 우울증(憂鬱症)이 도지려는 듯 마냥 불안정해 보이기만 하던 모습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려니 도저히 발길이 떼어지지 않아 몇번이나 돌아서려했지만 워낙 사안(事案)이 급했던지라 비행기에 오르던 그 순간까지도 마음을 결정치 못하던 승호는 결국 고심(苦心) 끝에 우혁이 그토록이나 가고 싶어하던 학교에 보낼 결심을 하게 되었다. 워낙 몸이 약했기에 어차피 학교를 다녔어도 출석일을 채우기가 힘들 정도여서 유능한 가정교사들을 구해 이미 진작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놓은 상태였는데다 실상 따지자면 대학에 입학해야 할 나이였다. 하나 표현은 않해도 칠현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매번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습을 결코 잊지 않았기에 조금이라도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승호는 칠현의 학교로 연락을 해 우혁이 아무 문제없이 다닐수 있게끔 미리 손을 썼었다. 그때문에 자신이 돌아왔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오히려 더 울적해 보이는 모습에 승호는 어떻게 해줘야할지 몰라 조금씩 불안해지던 중이었다. -.....그렇게 둘이....교실을 나가고 나서..... 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뇌리 속에 틀어박혀 단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도저히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던 칠현의 목소리가 환청같이 다시 들려오자 승호의 내리감긴 얇은 눈까풀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노기(怒氣)를 참으려는 듯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날....하필이면 자신의 스물다섯번째 생일파티가 열리던 날 평소보다 늦는 것에 초조해하다가 파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시점이었던, 날이 다 저물 즈음에야 학교에서 돌아와 번잡한 홀로 들어서던 어딘가 지친듯해 보이는 우혁의 모습을 그는 근심스런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미안해...형.....생일인데....나....머리가 아파서.... 꺼질 듯 애처로운 목소리로 두통을 호소하며 파티장을 벗어나 계단을 올라가는 연인의 가냘픈 뒷모습이 금새라도 허물어질 듯이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워보여 승호는 도저히 시선을 떼질 못했었다. 당장이라도 뒤쫓아 올라가 괜찮은지 확인해보고픈 충동을 자제하며 애초에 달갑지 않았던 파티 주최자이자 생일을 맞는 주인공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밀려드는 불안감을 억누르려 했지만 결국 그 원인불명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버렸고 그후 과거의 악몽은 다시 시작되어 버렸다. 승호는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어느새 식은땀이 베어 흥건히 젖은 손바닥을 거머쥐며 그대로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또다시 뇌리를 엄습(掩襲)해 드는 초조한 불안감과 신경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미칠듯한 의구심(疑懼心)에 승호는 표정을 굳히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의심치 말자......혁이를 보면....다 사라질거야....' 마지막 보충수업인 영어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을 때, 시간내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이 몇 분 간격으로 시계를 흘끗거리며 하루종일 수업에 집중을 못하는 것 같던 칠현은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옆에 앉은 짝이 그런 그를 가끔가다 의아한 듯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손목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던 칠현은 볼펜 뒤를 이빨 끝으로 살짝 깨물다가 슬며시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문가쪽에 시선을 던졌다. 왼손에 턱을 괸채로 비스듬이 책을 내려다보며 볼펜을 움직여 휘갈기듯이 말을 받아 적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겉보기엔 여느때와 별다를바 없어 보이는, 특유의 나른하고도 무심한 분위기였다. 그 옆에 앉은 녀석이 뭐라고 하니 쓰고 있던 책을 슬쩍 옆으로 밀쳐서 보여주는 모습은 지극히 이상할 것 하나없는 보통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한데..?' 밖에서야 어떻든 학교에만 오면 역시나 변함없이 '평범함'으로 되돌아가 튀지도 않고 튈려고 노력도 않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저그런 고3학생의 모습으로, 전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재원의 저런 모습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본 모습들을 몇차례 겪어보아야 했던 칠현에게 번번이 소름돋는 전율(戰慄)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특별히 눈여겨 보았던건 아니었지만 지각한번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다음날 아예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던 것때문에 칠현은 어제하루 괜시리 원인모를 조바심에 속을 끓여야했다. -.....전해....직접 데려가라고. 그건 그 전날 자신이 보아버린 재원의 무자비해보일 정도로 싸늘했던 마지막 그 모습 때문에 심적으로 불안해서 더욱 그렇기도 했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고함치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날리는 놈들과 마주치는게 오히려 더 낫겠다는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직접 당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모습이 형용할 수도 없을만큼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사실을 결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렇지 않을까 예상은 했었어도 역시나 평소와 전혀 다를바없이 '보통의 학생'으로 되돌아가버린 재원을 보고 칠현은 웬지모를 허탈함과 동시에 심한 혼란을 느껴야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잖아?' 칠현의 얼굴에 재차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오르며 시선을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재원쪽으로 향하기를 몇차례 반복했을때 마지막 수업이 끝나는 벨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하게 귀를 자극시켰다. 아직 영어선생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흐느적거리며 풀어져있던 교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급속도로 전환되어 혼잡한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책걸상이 거칠게 밀쳐지는 소리와 여기저기 목청높여 부르는 상소리들, 벌써 진작에 챙겨둔 가방을 들고 뛰쳐나가는 학생들도 있는가 하면 복도 밖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다른 반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까지 더해 교실 안팎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버리고 말았다. 반 아이들의 태반이 거의 다 나갔을 때쯤에야 책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느릿하게 가방에 넣으며 머뭇대다가 다시 재원 쪽을 흘끔 돌아보던 칠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 마침 고개를 돌리던 재원과 그대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헛-' 당황해 흠칫하는 칠현과는 달리 약간 눈썹만 치켜올릴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려버리는 재원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자약해 보여 칠현은 하루 내내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정말 사실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한순간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녀석이 모를 리가 없을텐데...?' 자신이 왜 이런 말도 않되는 일로 쓸데없는 고민(苦悶)을 해야 하는지 칠현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재원에게 더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은 결코 한순간의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이미 도가 지나친 것들이었고 그렇다면 저렇게 너무나도 태연해보일 정도로 멀쩡하게 이 자리에 나와 있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하나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훤칠한 뒷모습을 본순간, 칠현은 미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전에 내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것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외치고 말았다. "이재원-!!!" 교실 문을 막 빠져나가려던 재원의 몸이 멈칫하더니 망설임 하나없이 그대로 반쯤 돌아선채 칠현을 바라보았지만 그 얼굴은 너무나도 無心 바로 그자체여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칠현은 막상 충동적으로 불러놓고 나서야 자신이 왜그랬던가 싶어 아차했지만 멈춰 서는 재원의 모습에 이미 늦었음을 깨닫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탐색(探索)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한참을 침묵만 지키던 칠현이 땀이 베인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막 뭐라 하려할 때, 신경을 묘하게 긁는 느릿한 저음이 교실의 적막을 깨뜨려버렸다. ".......이봐, 너" ".........." ".......나한테 관심있어?" "....뭐??!!" 직접 눈앞에서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방금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의심치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재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시껄렁한 소리를 들은 칠현이 할 말도 잊고 눈만 커다랗게 뜨자 재원이 입가를 비틀며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낀채 교실 벽에 기대섰다. ".......아니면 왜 불러 세워놓고 말도 없이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거냐. 그것도 하루 내내. 심심하신가... 칠현군?" 가끔가다 '칠현군?' 이라고 할 때 억양을 약간 높이는 그 말투가 단순한 놀림이나 빈정거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칠현은 그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를때면 주체 못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말들이 어쩜 그렇게도 사람의 속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을 수가 있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당장 그것보다는 재원이 자신의 시선을 알아챘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는 것에 칠현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라 거친 음성으로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너야말로 그렇게 여유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 그러는 거냐는 듯이, 아니면 어린애가 심심해서 같이 놀아달라고 투정(妬情)부리는걸 지켜보기라도 하는듯이, 그도 아니면 한마리의 다루기 힘든 앙칼진 고양이를 보기라도 하는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며 나른하게 쳐다보는 눈길이 보는 사람의 신경을 한순간에 거슬려버릴 정도로 너무나 거만해 보여, 칠현은 자신이 정말 말도 않돼는 짓을 하고 있다는걸 스스로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쌍심지를 돋구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랬어, 이재원. 개처럼 붙어 앉아 지키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왜, 혁이가 않받아줘? 아예 상대도 않되니까 미리부터 포기하나 보지?" -49- # # # 하나가 아닌.....다른 또 하나의 마음.... 드러난 얼굴과.....가면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얼굴..... 절대 그 누구에게도 용인(容認)되지 못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감정임을 알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자신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조차 그 마음을 모르는데...... "몸이 허약해서 다른 엄마들처럼 도련님과 많이 놀아주지도, 돌봐주지도 못하셨지만, 참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지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운채 즐거웠던 한때를 얘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추억에 젖어 아련해지는걸 바라보면서, 우혁은 이전부터도 계속 느껴왔던 것이지만 그녀가 무척이나 재원을 사랑하고 있다는걸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그 모습뿐만 아니라 단편적이나마 추억(追憶)까지도 갖고 있는데다 친모(親母) 못지않게 사랑해주는 유모까지 있는 재원에게 우혁은 서글픔에 가까운 부러움을 느껴야 했다. "....참 예뻤어요. 그때 사진 한번 볼래요? 지금이야 저렇게 무뚝뚝하고 멋대가리 하나없고, 미운 행동만 골라하지만 어렸을땐 정말 귀여웠는데.." "아, 아뇨. 전..." "기다려봐요. 내 얼른 갔다올테니.." 당황한 우혁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벌써 몸을 일으켜 부리나케 화원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들었던 손을 도로 내리고 말았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우거진 열대수림(熱帶樹林) 사이로 사라져버리자 혼자 남겨진 우혁은 갑자기 적막해진 분위기가 낯설었던지 둥글게 패인 등의자에 몸을 웅크리며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하게 지금까지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그다지 많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우혁은 그래도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한번쯤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故人)이 된 양부(養父)의 말에 의하면 우혁이 그녀의 생김새나 체질을 상당히 많이 닮았다고는 하지만 그당시만해도 아직 어렸을 때이니 다 큰 지금에 와서도 자신이 모친을 닮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주 소중하게....보살펴..... 환청(幻聽)처럼 마음속에서 울려대는 그녀의 말은 우혁에게 잠시나마 잊고자 했고, 또 잊을 수 있었던 것을 다시 되떠올리게 만들었다. 부자(父子)간이라기보다는 조손(祖孫)지간이라고 봐야 옳을 정도로 나이차가 심했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까지도 우혁을 친부 못지않게 사랑해주셨던 양부에다가, 그의 死後 빈자리를 메꿔주고도 남을만큼 쥘면 꺼질새라 불면 날아갈새라 정말 너무나도 자신을 사랑해줬던 또 한사람을 생각하니 우혁은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아끼고 사랑하는....마음이.... 예전같았다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그에 대해 주체못할만큼의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그리고 깊이 존경하는 마음과 신뢰어린 따뜻한 사랑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 우혁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상쇄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죄책감(罪責感)밖엔 느끼질 못하고 있었다. '....형..'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우혁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죄어들자 갑갑함을 참지못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연못가로 다가갔다. 평면이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것들만 골라놓은 듯 커다란 수석들이 빙 둘러쳐져 지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연못은 수면 위로 돌조각 하나 하나마다 정교한 문양을 각인(刻印)해 놓은 석교(石橋)가 가로지르고 있어 상당히 운치있어 보이는 곳이었다. 연못가에 놓여 있는 바위들 중 한곳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수그려 밑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투명한 푸르른 물 속에서 헤엄쳐다니는 비단잉어들을 들여다보던 우혁은 수면 위에 떠올라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그대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흐트려놔버렸다. "....보기 싫어.." 수면 위로 비춰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승호와 재원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해 우혁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흔들어 물살을 헤쳐놓았다. 검은 바위에 비스듬히 옆으로 걸터 앉아 상체를 수면으로 약간 수그린채 오른손을 담궈서 잔잔한 물살을 살며시 헤치고 있는 우혁의 가녀린 뒷모습은 한적(閑寂)한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척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 승호형....' 애써 잊고자 해도 다시금 떠오르는 그 모습에 어느 결에 손가락을 흔드는 것도 잊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우혁의 눈시울이 붉그스름하게 변하며 금새 촉촉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어들어 흐릿해진 눈망울이 향한 푸른 수면 위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강인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의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보고싶어...." 우혁은 앞으로 언젠가는 닥치게 될 일이 두려워 회피하고 싶으면서도, 그시기가 되도록이면 하루라도 더 미뤄지기를 바라면서도, 가슴이 미어져 울고 싶을만큼 그가 그립고 보고파서 차라리 이대로 어디론가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행동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현실도피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또한 결코 두번다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사람에게 정말 이래서는 않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나약함을, 우유부단함을 경멸하고 또 경멸했음에도....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거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음에도...... ............우혁은 미치도록 승호가 보고 싶었다. -바스락... 수그러진 어깨를 가늘게 떨며 눈에 가득 차오른 투명한 물기로 인해 흐릿해진 수면위의 잔상을 바라보던 우혁은 그때까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희미한 인기척과 함께 수면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비춰지자 얼른 손을 들어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눈에 뭐가 들어가서...이제 오.." 눈물을 닦은 것을 변명하듯 얼버무리며 몸을 돌리던 우혁의 입가에 애써 떠오르려던 미소가 그상태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된 듯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우혁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을거라곤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마치 허상(虛想)이라도 보는 듯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한 사람의 모습을 담은채 한참을 그렇게 정지되어만 있던 우혁의 암청빛 눈망울이 어느 순간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대로 습윤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뺨 위로 진주방울같은 눈물이 굴러떨어져 내리는 감촉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 상태로 멍하니 서있던 우혁이 한참이나 떨기만 하던 입술을, 눈물이 흘러들어 마치 이슬에 적셔진 장미꽃 봉오리같이 촉촉히 젖어든 입술을 간신히 열어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리워도 차마 소리내어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을..... "......승.....호...형...." -50- # # # 원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었다... 단지......원하는게 없었을 뿐... 한순간이면 스쳐지나가버릴 것에 연연해.... 애타하는 마음따윈 갖고 있지도 않았다... 생애 처음 갖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원하니 가질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하나.....미칠듯한 所有慾과 불타는 獨占慾에.. 나만이 아닌 소중한 이까지 망가짐을 알았을 때.... ......난.......조금더 성숙(成熟)해지길 바래야만 했다. 저택 내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다 잠이 든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드문드문 창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들은 꽤 여기저기 있었다. 하나 몇점의 불빛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어둠의 장막이 내리깔려 낮의 모습과는 다른, 마치 하나의 거대한 괴물처럼 보이는 건물을 잔디밭의 한켠에 멀찍이 떨어져 서서 한참을 올려다 보던 재원은 나즉한 한숨과 함께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왼쪽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주머니 속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손에 뭔가를 쥐고는 가방을 옆으로 내던지며 그대로 무너지듯 서있던 자리에 털썩 소리내어 주저앉았다. 작은 풀벌레, 밤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레 울려댔지만 사람의 기척이라곤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부러 가로등 불빛이 거의 비춰들지 않는 부근에 있었기에 재원의 그런 모습은 어둠에 가려 희끄무레한 윤곽밖에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그가 나타나기 전부터 내내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숨은 시선은 꽤 많이 있었고 재원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담배곽만을 내려다보던 재원은 부스럭거리며 겉껍질을 벗겨내더니 한 개를 꺼내 입에 물며 지퍼라이터를 켰다. 칙-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 불빛에 반사되어 붉게 일렁이는, 약간 굳은 표정이 잠시 비춰졌지만 금새 다시 어둠에 가려져 버렸고 희미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비스듬히 기울어져 허공으로 올라가다 뿌옇게 흩어지던 담배 연기가 스르르 점점 밑으로 내려간다 싶더니 그다음부터는 아예 거의 납작한 바닥에서부터 수직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그대로 아예 그자리에 누워버린 재원은 잔디밭에 한쪽 팔베게를 한 채 담배를 피며 그날따라 달빛도 없어 유난히도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후우~...." 폐부(肺腑) 저 밑바닥에서부터 깊숙이 내뱉는 듯한 짙은 한숨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던 재원은 누운 채로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교생이 된 이후로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던지라 너무 간만에 피는 것이어서 그런지 처음엔 약간 쿨럭이며 조금 익숙지 않은 듯 했지만 서너 개피째 쯤부터는 피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잔디밭에 누운 채로 담배 연기를 폐속까지 깊숙이 빨아들이며 끝의 필터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광경을 가늘게 뜬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재원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나른하고 느긋해 보였다. 단정히 매고 있던 교복 넥타이는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절반 가량 단추가 끌러져 펼쳐진 셔츠 틈새로 드러난, 어둠 속에서 히끄무레하게 보이는 맨 가슴이 담배 연기를 들이내쉴 때마다 아주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결국....." 절반 가량 피다말은 담배를 그대로 바닥 위에 꾹 짓눌러 비벼 끄며 재원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할 뿐이었다. -...날......잡..아... 화열지옥(火熱地獄)같은 사막의 오지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듯이... 暗黑같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줄 하나의 光明을 발견한듯이... 온몸을 산채로 찢어 발기는 듯한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火刑을 당하듯이 온몸을 불태우던 극심한 괴로움 속에서도...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해주었던.....그 목소리.. 비록 단 한번뿐이었지만, 비록 단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그 떨리던 목소리에서 재원이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과욕(過慾)이고 자만(自慢)일까.... 하지만 재원은 그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 확인했을 때부터 지금 바로 이 순간까지도 재원은 자신의 심정이 어떤건지 도통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결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속이고픈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기분이 들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아니, 너무나 담담한 자신에게 스스로가 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직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한쪽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재원이 뒷말을 흐리며 한참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벌떡 일어나 가방을 낚아채고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은.. 모르지." 사브작거리며 풀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시원한 소리만큼이나 성큼성큼 넓었던 보폭(步幅)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 간격이 점차 줄어든다 싶더니 저택의 현관문 앞에 다다를 때쯤에는 아예 우뚝 멈춰서 버렸다. 재원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는 철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융단이 깔려있어 발소리를 흡수시키는, 은은한 실내등이 밝혀있는 계단 위를 한개 한개 천천히 밟아 올라가면서 재원은 무슨 생각이든 좋으니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것을 떠올리고자했지만 머릿속은 연관된 그 상황으로 다시 치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무슨 대단한 반응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저렇게 철저하게 무덤덤한 표정을 보여줄 줄은 정말 몰랐는지라 칠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지아니 당황하고 말았다. 벽에 기대선 채 미동한점 없는 재원의 창백한 얼굴은 밀랍인형이라도 된것처럼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분명 '개처럼-'과 '상대도 않돼-' 라는 말로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게 분명한 자존심을 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눈썹하나 까딱않고 있다가 천천히 벽에서 몸을 떼어내는 모습을 칠현은 당혹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섰던 몸을 세우며 약간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도발에 대한 반응을 끝낸 재원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잠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칠현이 시선을 견디지 못할 때쯤되서야 평소와 다를바 없는 음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야?" "이거 왜 이래? 시치미 떼도 할 수 없지만, 이재원답지 않아" 칠현은 미미한 흔들림조차 없이 전혀 동요가 없는 재원의 눈빛을 보고 이미 그가 적어도 자신이 알고있는 것만큼은 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 자신에게 한 재원의 말뜻이 그게 아니었음을 곧 알게된 칠현은 예기치 못했던 그 말에 허를 찔려 그만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거지?" "..........뭐?" "......방해할지도 모르는데.. 왜 일부러 알려주는 거냐" ".....!!!!!...." ".....뭐, 좋아. 어쨌거나... 고맙다고 해야겠지, 칠현군?" 다시 예의 그 빈정댈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꼬리에 드리우며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보인 재원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이재원-!!!" 실책(失策)을 깨닫자마자 받은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칠현의 성난 외침이 예민해진 귓속을 찔러왔지만 이번엔 재원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든간에, 뭘 말하려 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은 이미 어젯 밤부터 알던 것이었다. -내일 안승호가 찾아 올거다... 내내 흐느끼다 지쳐 잠든 우혁을 끌어안은 채로 계속해서 쉴 것을 강요하는 육신의 피곤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할만큼 바짝 곤두서버린 신경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재원은 한밤중에 느닷없이 서재로부터 걸려온, 내부선(內部線)을 타고 흘러나온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텅 빈 복도를 지나쳐 시멘트 계단을 하나하나 천천히 밟아 내려가는 재원의 다리에 힘이 잔뜩 베이기 시작했다. 칠현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의지력(意志力) 덕이었다. 하나 괜찮을 리 없었다. 아니 단순히 괜찮고 않괜찮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내내 수업 도중 뛰쳐나가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서 숨겨버리던지, 그도 아니면 안승호와 직접 대적해서 양자택일(兩者擇一)하게 하고싶은 충동(衝動)을 억누르느라 재원은 매번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안승호가 우혁과 지금 단 둘이만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역류(逆流)하며 들끓어올랐지만 재원은 한순간의 혈기(血氣)를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알기에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둘의 만남을 방해할 수도 있었으나 재원은 혀를 깨물며 인내(忍耐)하는 중이었다. -....중3 때......집단... ....... .성... ...폭행을....당했..었....어.... 그 몸 그 어디에, 그런 모진 고통을 감내(堪耐)할 힘이 있다고 그렇게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끔찍한 짓을 당했어야 했는지 재원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후로... 모든게....다.... ..변하기 시작했어.... 안승호의 처신(處身)을, 그 소행을 결코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만큼은 재원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런 경우였다 해도 과연 그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란 장담은 감히 할 수 없었고 차라리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진 않으리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 그 이후에 안승호가 저지른 짓까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절대적인 믿음을 배신해버린 그를, 그 행위를 재원은 참아낼 수 없었고 그 찢어죽일 짐승들에 대한 갈곳 잃은 증오(憎惡)의 화살은 안승호라는 확실한 표적(標的)에게로 돌려지고 말았다. 하나 그 지옥같은 순간을 넘어 간신히 이성의 끝자락을 붙잡았을 때 절실히 깨달아야만 했던 것은.... 자신 역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해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그 더러운 짐승들과 또한 경멸해마지 않는 안승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짓들만 골라 해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건지는.... 네가 결정하도록 해라. 가는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우혁을 앞에 둔 채로... 파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한 하얀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잠꼬대를 하는지 벌려진 입술새로 뭐라 웅얼거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결에 자신을 찾는 듯 텅 빈 옆자리로 손을 뻗어 더듬는걸 보면서도.... 엎드린 자세로 얼굴을 자신 쪽으로 향한채 가벼운 몸부림에 시트가 흘러내려 백옥같이 미끈한, 눈이 시릴정도로 새하얀 등허리가 훤히 드러나는걸 보면서도..... 추웠는지 시트 속으로 계속 파고들어가 아기처럼 몸을 잔뜩 웅크려 시트자락을 꼭 부여잡고는 그제야 만족한 듯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색색거리며 잠에 깊게 빠져드는걸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숨죽여 바라보면서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불안감을 다 날려버릴 수 있도록 그대로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싶은 것을 극도로 자제하며 재원은 쇼파에 앉은채 하룻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그럼에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내내 극심한 고통과 번민(煩悶)에 시달리며 고뇌(苦惱)하고 또 고뇌해야 했고, 새벽 먼동이 틀 때쯤 재원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재원은 우혁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차라리 미리 말해서 알고있는 상태라면 우혁이 나름대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서 현명히 대처할 수 있다는걸 잘 알면서도 재원은 방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잠든 우혁을 깨우지 않은채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바로 그 순간이 들이닥쳤을 때에야 비로소 우혁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혁의 얘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아마도 재원은 분명코 그런 위험한 결정은 내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정신이 나가지 않는 한은 아예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테지만,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여실히 깨달아야만 했고, 재원은 더이상 자신의 욕심과 만족만을 위해 우혁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잔인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가했던, 고의성 짙은 상처와 고통만으로도 이미 우혁의 여린 마음은 아물틈도 없이 여러 번 찢겨져 생채기가 났을 것임에 틀림없었고 뒤늦게 그것을 통감(痛鑑)한 재원은 결국 그와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재원이 그런 결단(決斷)을 내렸다는 것이, 겨우 단하룻밤 새에 그만큼 그가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재원의 그 결정이 우혁을 이대로 포기하겠다는 의사(意思)를 표명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포기와는 다른, 별개의 문제였다. 혹시라도 우혁이 선택을 달리한다 해도 재원은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혹여 만약 그렇게 해야할 상황이 닥친다 하더라도 살아 생전에 자신의 의지(意志)로 그렇게 될 일은 결코 없을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또한 그 상태로 가만히 지켜보며 그대로 놔두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단지 그것은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의미일 뿐이지 그것이 '장우혁'이라는 존재를 아예 몰랐던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안승호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적수(敵手)와 직접적으로 부딪혀야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라고 재원은 조금은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비워두었던 오피스텔에나 가볼까하며 교문을 빠져 나가던 재원은 바지 호주머니에 밀어넣은 손밑으로 묵직하고 약간 싸늘한 뭔가가 만져져 건드려보니 짤깍거리며 부딪히는 쇳소리에,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는 서서히 노을이 지는 하늘을 멈춰 서서 바라보다가 민우에게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저택 내 모든 사람들이 다 잠든,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돌아온.... 밤의 신비(神秘)따위는 애초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숨통을 조일 듯이 숨막히게 덮쳐오는 정적감(靜寂感)에 휩싸여... 블랙홀처럼 짙은 어둠이 내리깔려 거대한 괴물체나 다름없이..... 오만(傲慢)의 상징(象徵)인양 크기만 커다란, 차갑디 차가운 벽돌 더미 그 속, 그 어딘가에.... 천상(天上)의 빛으로 가득한 곳에서만 지내야 할...... 결코 불행해선 않될, 청백(淸白)의 美를 가진 이를... 심장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이를 품고 있는 그 어딘가에선...... .....이미 잠들었을 이를 무정한 戀人대신 포근히 감싸줘야 할..... .............불빛 한점..... 비춰져 있지 않았다. -.......어둠을.....견뎌내기 힘들어.... 재원은 암흑 속에서 불빛이 하나라도 없다면 우혁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그것은 직접 겪어본 사실이었다.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이유를 몰라 단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서 그런 것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번 그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지금 저 불꺼진 방안에 우혁이 있다면 이렇게 쥐죽은듯 저택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방문 앞에 멈춰서서 손잡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재원의 마음속은 아니란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하는 짤막한 기대감마저 내던져 버릴 수는 없었다. -...날......잡...아.... 그 희박한 희망(希望)마저 없었다면, 절박할 정도로 그것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담담할 수 없다는걸 잘 알기에 재원은 그래서 더욱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미 잔뜩 굳어버린,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얼굴 근육이 이번엔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재원은 아닌척해도 결국은 어쩔수 없는 상태로 들어섰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씁쓰레한 미소를 띄웠다. ".....뭐하자는 거야. 너..." 하루내내 애써 태평한 척 한주제에 최후의 순간에 와서야 마주치기 두려워서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조적(自嘲的)으로 뇌까리던 재원은 그대로 문 손잡이를 돌려 어둠에 묻힌 방안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런 날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성질 더러운' 범생이란 호칭이 그대로 딱 들어맞듯, 별종인 그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전형적인 범생科들이나 죽치고 앉아 있는 학교 도서관의 대열(隊列)에 같이 동참하고픈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칠현은 그래서도 더욱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두려운 건가..? 설마-' 도서관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접착제라도 붙인 듯 등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볼펜을 까딱거리며 두툼한 서적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누군가'와 맞닥뜨릴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성깔있는 안칠현이 아닌, 문과수석이란 타이틀을 절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지극히 차갑고 이지적이며 냉정해 보였다. 그 주변에 널려있는 범생과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런 모습 역시 학구열(學究熱)에 마냥 불타오르는 것처럼 비춰졌지만 실상 칠현의 머릿 속에 글자 따위는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방해할지도 모르는데...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만약 이재원이 정말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거라면, 아까 교실에서 자신이 저지른 짓은 그야말로 그를 거들어준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왜 일부러 알려주는.. 칠현조차도 자신이 왜 그랬던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하나 결단코 말이나 글 따위로는 도저히 설명 못할,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된 충동심리에 의해 돌발된 그 상황에서 혹시라도 이재원이 그 무언가를 눈치챈 거라면...... '신경과민이야-!' 쥐고 있던 볼펜 대를 그대로 부러뜨려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가락에 거세게 힘을 주던 칠현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뒤늦게 깨닫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 자식이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가 대체 뭘까...' 이재원이 그 사실을 그전에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그건 더이상 중요치가 않았다. 대체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한번 파헤쳐 보고 싶은 충동이 들지않을 수 없을 정도로 형인 안승호에 버금가는 무표정한 그 얼굴은 칠현의 말에도 경악스러울 만큼의 냉정함을 유지했다. 지금까지 겪어 보아왔던 이재원은 그 말에 결코 그와 같은 반응을 보여줘선 않되었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긋해 해서도 않되었다. '그런데.....그랬단 말이야.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게 있지나 않나 곰곰히 헤아려보던 칠현은 얼마안가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며 짜증섞인 한숨을 희미하게 내쉬었다. 입시생임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했던 우혁의 납치(拉致)와 점점 평정을 잃어가는 승호때문에 이래저래 이중삼중으로 속을 끓여야 했는데다 그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돋구는 재원과의 신경전(神經戰) 때문에 하도 골머리를 썩혀 꽤나 많이 심신(心身)이 지쳐있던 상태였다. 차가운 인상을 더 냉정하게 만드는 가는 은테 안경을 벗어들고서 눈가를 세게 주무르던 칠현이 하루종일 그렇게 보고도 닳지나 않았는지 의심스러울만큼 들여다본 시계로 다시 흘낏 시선을 내렸다. '지금쯤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끝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오기로라도 버티면서 자리에 붙어 앉아 있던 학생들이 밤 11시가 훨씬 넘어서자 그제야 하나둘 늘어진 몸을 비틀며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즈음 칠현도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운동장에 대기해 있던 리무진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을까. 설마... 아니, 그럴리 없어!'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아니 아예 고려치도 않았던 상황을 불현듯이 떠올려버린 칠현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손에 식은땀이 절로 베어들 정도였다. 그동안 아예 행방을 모르고 있었을 때는 어떻게 버텨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않될 정도로 진상(眞想)을 안 이후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침착함은 거의 무너진 상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칠현은 냉정을 잃고 있었다. '혁이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해' 하나 불안한 심리(心理)에 너무나도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신체적 반응에 칠현은 허벅지에 축축히 젖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조바심을 없애려고 휙휙 빠르게 스쳐지나치는 밤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운전에 몰두하고 있는 앞의 기사에게 한마디만 한다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칠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때까지는, 그 모습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까지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고 아무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오늘따라 하교길이 평소보다 배는 더 오래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들다가 마침내 평평한 잔디밭이 쫙 펼쳐져 있는, 황량하게 넓기만 한 대지 (大地)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향하는 진입로로 들어섰을 때, 꽤 오랜 기간 단 한번도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던 방의 창문으로 훤한 불빛이 비추이고 있는걸 발견한 순간, 칠현은 갑자기 송곳으로 심장을 쑤시는 듯한 격렬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교복셔츠를 움켜쥐어야 했다. '윽....' 하지만 오히려 통증만 더 심해지는 격렬한 심장의 반응에 하마터면 입술 새를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올 뻔하자 칠현은 아랫입술을 이빨로 꾹 눌러 깨물며 자신의 감정을 죽이려 했다. '안칠현. 참아...' 하나 그런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사가 문을 열어 주는 그 잠시간도 기다리지 못해 벌써 차 밖을 뛰쳐나가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는 칠현의 뒷모습에선 굳이 말로 표현 않해도 지금 그의 심경(心鏡)이 어떻다는 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혁아... 혁아.....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형이 그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자신이 이런 반응을 보여선 않된다는 것도.... 칠현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우혁아-!!!!!" -51- # # # 希望과 切望이 교차되는 夜 암흑(暗黑)속에 잠긴, 어두컴컴한 침실로 복도의 불빛에 의지해 몇발자국 들어가던 재원은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그대로 굳은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서버리고 말았다. 어두운 방 안쪽으로 재원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놓고 있는, 열어놓은 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복도의 실내등(室內燈) 빛에 비춰진, 한정된 공간 내의 사물들이 그게 무엇인지 분간해 낼 수 있을 정도로만 흐릿하게 그 윤곽(輪郭)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방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니 방문을 열던 그 순간부터 재원은 침실 안의 풍경(風景)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침실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아예 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뿌리처럼 박혀버렸는지 융단바닥을 밟고 서있는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굳은 채로 한참을 미동(微動)도 없이, 또한 어느 순간부터 아예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던 재원의 몸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급기야는 전신에 경련(痙攣)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참만에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경련이 약간 수그러들며 가라앉는 듯하자 팔만 뒤로 돌려 방문을 서서히 미는 재원의 손가락은 수전증(手顫症)환자마냥 여전히 가는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은 처음처럼 앞을 향한채 서있는 자세 그대로였고, 뒤로 뻗쳐 문에 대고 있는 손에만 힘을 주어 아주 천천히, 마치 그 문을 닫는 일에 사활(死活)이라도 걸렸다는 듯이 정성스럽게 시간들여 아주 느릿느릿하게 문을 닫던 재원은 방문이 딸깍거리는 소음과 함께 완전히 닫히자 그대로 무너지듯 문에 털썩 기대서고 말았다. ".........하..." 방문 하나 닫는 일이 그렇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잠시간에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린 듯, 소생(所生)시킬 미약한 여분의 힘도 아예 남아있지 않다는 듯, 멈췄던 경련이 다시 재발 (再發)하며 다리가 풀린 듯 한순간 휘청이다가, 정지시켰던 호흡을 내쉬려 애쓰며 간신히 떨리는 한숨을 한모금 내뱉은 재원이 더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는지 등을 대고 기대서 있던 문을 타고 주루룩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큭...큭...." 무릎을 세워 벌린 자세로 상체를 잔뜩 수그려 고개를 밑으로 숙인채 한참을 너무나도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맥빠진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짓던 재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지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다. 문을 여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心的인 동요(動搖)가 드러나지 않고 아예 감정조차 베어있지 않았던 무감각한 눈동자 위로 한순간이지만 어둠 속에서도 휘번뜩거리며 날카롭게 빛났을 정도로 무언가 의미모를 짙은 눈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곧 어느 한 지점으로 돌려져 뿌리박힌 듯 그대로 고정되었다. 방문이 열리던 바로 그 순간에 재원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난, 복도 불빛이 밀려 들어옴에도 방안에서 아주 흐릿하게 비춰지던, 방문이 서서히 닫히면서부터 점점 더 뚜렷하게 확실해지던, 어두컴컴한 방안을 밝혀주는 光明이라도 되는 것처럼, 닫겨진 문 틈바구니를 비집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곳은..... 구태여 숨죽이면서까지 듣지 않더라도 방문을 여는 순간부터 방안의 정적을 깨뜨리는, 물소리가 스며 나오고 있는.....욕실이었다. 침대 맡에 놓여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나무 팔걸이에 양팔을 걸치고, 몸에서 완전히 힘을 뺀채 의자에 몸을 싣고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승호의 얼굴 위로는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허공을 향해 있는 시선은 초점이 제대로 맞춰져 있지 않아 눈빛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 -.....승호야....부탁한다.....그....가엾은....것을.......남겨..두고...가려니.... -....미..안...하구나.....아직...어린 너한테.....이런....무...거운...짐을...... 안승호란 한 인간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던, 어느 누구든지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 어디 한군데 모난 곳 없이 인자하고 자상하며 포용력(包容力) 넓은 성품을 지녔던, 특히나 대대로 안씨집안과 유대감(紐帶感)이 돈독했던 친우(親友)이자 어린 두 안씨형제의 대부(代父)인 동시에 사사로이는 우혁의 하나뿐인 친부나 다름없던 故 장성혁 회장의 임종(臨終)직전의 그 마지막 유언(遺言)을 승호는 지금 이순간 되떠올리고 있었다. -회사의 경영권(經營權)과 지분(持分)은 안승호군에게, 그밖에 전국 각지에 걸쳐져 있는 SM 그룹 산하소속의 부지(敷地)나 건물을 제외한 모든 재화(財貨)는 장우혁군이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장성혁 회장의 장례식(葬禮式) 직후에 장씨문중(張氏門衆)의 친족(親族) 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개되었던 유언장(遺言狀)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한순간에 충격의 도가니에 몰아 넣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파행적(跛行的)이었다.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지내다가 늙그막에 양자(養子)로 얻어 금이야 옥이야 키워왔던 우혁에게 상당히 많은 유산을 상속할거라는 것은 이미 진작부터 다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내심이야 어떻든 그래도 다들 지각(知覺)있는 사람들인지라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을 리 없었다. 하나 혈분관계(血分關係)도 아닌, 장씨도 아닌 안씨 姓을 가진 사람에게 대대로 장씨가문이 이끌어온 회사의 경영권을, 그것도 유산의 주핵심(主核心)인 장회장의 지분(持分)까지 상속했다는 것은 회사가 완전히 타인(他人)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라, 친족들만이 아니라 그때까지도 장회장 死後의 상실감(喪失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승호까지도 망연자실(茫然自失), 아연실색(啞然失色)해야했다. -장회장은 살아 생전에 항상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었지. 승호군이 경영을 하게되면 회사가 더 번창(繁昌)할거라고 말이야. 믿고 맡겨놓으면 안심하고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랬었네. 더이상의 진행이 않될 정도로 흥분한 장씨가문의 친족들로 인해 실내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버렸고 결국 유언장공개를 주재하던 변호사의 재량하 (才量下)에 그대로 막을 내려버렸지만 오히려 당사자인 승호가 상속의 부당함을 제기했을 때 장회장의 막역지우(莫逆知友)이기도 한 나이 지긋한 변호사가 한 말은 한순간에 승호의 결심을 돌려놓게 할 정도로 그렇게 진심어린 것이었다. 그당시 승호의 나이는 고작 20세로 겨우 성년이 되었을 때였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천성적으로 차분한 성격이었기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와 같은 돌발사태(突發事態)에도 침착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하나 그리 오랜 삶을 산 것도 아니건만, 아니 실상 이제 겨우 25세라는 파릇파릇한 나이의 젊은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겪어야 했던 온갖 고난과 역경을 되새기니 새삼 물밀듯이 밀려드는 회한(悔恨)에, 자신이 그동안 많이 지쳐있었음을 깨달은 승호는 사후에도 자신의 정신적 지주(支柱)였던 장회장에 대한 속절없는 그리움에 목이 메어 저절로 눈시울을 붉혀야했다. -자네에게 한가지, 막중한 책임(責任)이 또 있네. 허공에 고정되 있던 승호의 눈빛이 다시 아스라해지며 반쯤 내리 깔린, 검푸른기가 맴도는 눈까풀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장회장의 법정후계자이자 양자인 우혁군이 22세가 되는 그 날까지 자네를 후견인(後見人)인 동시에 유산관리인(遺産管理人)으로 지목한게 바로 그것이네. 이후로 자네의 모든 우선사항은 그 아이의 행복이어야 하며, 만일 이를 어길시엔 자네의 유산상속자격은 그날로 박탈당할 걸세. 하지만 장회장은 굳이 이런 법적절차나 규제(規制)가 아니더라도 자네가 그 아이를 잘 보살펴 줄거라며 아주 마음 든든해했었지. 단지 자네에게 이런 권리를 주는게 그 아이를 돌보는데 더 도움이 될거라 여겨서 미리 이런 조치를 취해놨던 것뿐일세. 의자 나무팔걸이 위에 힘없이 걸쳐져 있던, 깡마른 손가락들에 간헐적으로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떨림을 억제하려 팔걸이를 애써 꽉 부여잡으려 했으나 이미 힘이 풀려 제멋대로 늘어진 손가락들은 심신(心身)의 조절능력(操切能力)을 거의 모두 상실해 버린 주인의 통제(統制)를 벗어나고 있었다. -예쁘지? 이제 2살이란다. 네가 현이처럼 돌봐줘야 할 동생이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가 무릎 위에서 장난치며 놀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던, 나이 지긋하신 대부님 댁에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방문했을 때 그의 곁에는 못보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혁아. 승호형이야. 이런, 우리 강아지. 또 부끄러워서 그러는구나? 뒤에 서서 대부님의 종아리를 양 손으로 꽉 부여잡고 숨어 있다가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더니 승호가 자신을 쳐다보자 또 부끄러워 뒤로 얼른 숨어 버리던 아이. 그 짧은 순간, 어린 승호는 자신이 천사를 봤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묘한 백금빛의 머리칼을 지닌, 백설(白雪)처럼 하얀 얼굴 위로 어두운 청록빛의 반점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에, 앵두같은 조그만 입술로 손가락을 물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숨어버린 그 모습은..... 날개만 않달았지 분명 그림책에서 봤던 천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아 혁아. 승호형한테 인사해야지? 종아리를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 어깨를 잡고 앞으로 살짝 밀어주자 아직도 부끄러워 쭈삣거리면서도, 걷고 있다는게 희안할 정도로 자그마한 발로 아장아장거리며 걸어와 무릎을 꿇어 키를 낮춘 자신의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던 암청빛 눈망울의 아이를 처음 본 그날은... -....스..응....오....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간지러울 정도로 연신 만지작거리며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어눌한 발음으로 처음 불렀던 그날은... 8살의 어린 승호에게는 까닭모를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천사가 현실에 살아 있었다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아...아팟!!......으......으......우아앙..!!! 몸이 너무 허약해서 거의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도 기분이 좋았던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린 승호를 발견하고는 잘 걷지도 못하던 걸음을 빨리해 걸어오다 그만 바닥 위로 철푸덕 엎어지던 하얀 천사. -.....승오엉아.....우...우지마아......으....우아아아앙!!!!....엉아 우지마아!!!! 넘어지기가 무섭게 품에 안아 일으키며 부드러운 털 융단이 깔렸음에도 워낙 여린 살갗이라 금새 시커멓게 멍이 든 무릎을 보고 괜히 서러워 우는 자신보다 더 새파랗게 질려버려 부들부들 떨다가 눈물을 떨궈내는 승호의 얼굴이 아픈 무릎보다 더 서글프고 아파보여 한참을 빽빽 울던 7살짜리 하얀 천사. - 승호 형아랑 칠현이랑 이제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거야? 잠도 같이 자고 먹을 때도 같이 먹고 그렇게? 정마알? 꺄하하~ 신난다아~!!! 사업차 미국으로 가시는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고 학교 문제를 핑계로 오랜 투쟁(鬪爭) 끝에 칠현이와 단둘이 한국에 남기로 한 18세의 승호에게 투쟁의 원인이었던 12살짜리 하얀 천사는 너무나 순수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승호형아아~!!!! 혁이가 뽀뽀해 줄께~!!! 으응? 왜그래애~?!! 혁이 기쁘게 해주면 아빠한테두 맨날 해주는 건데.......시.....싫어....?! 그럴려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내비친 격렬한 거부반응(拒否反應)에, 오직 자신이 총애(寵愛)하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내려주는 은총(恩寵)을 거부당했다는 것이, 게다가 그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건 뭐든지 다 해주던 바로 그 승호가 거부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지 충격받은 표정과 함께 순식간에 물기 차오르던 암청빛 눈망울을 본 순간, 붉은 입술을 삐죽대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는 모습을 본 순간, 승호는 또 한번 자신을 죽여야 했다. -승호형아 미워!! 혁이 이젠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팔을 벌리기가 무섭게 와락 그 가냘픈 몸을 던져 목덜미에 매달리며 잔뜩 경직된 뺨에다 그 붉은 입술을 살짝 갖다대고 연신 부비며 뾰로퉁하게 말하다가 금새 암청빛 눈망울을 기쁨으로 반짝거리며 까르르 웃던 하얀 천사는 자신의 순수한 선물이 승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채 그렇게 마냥 행복해했다. 나의 하얀 천사... 나의 하얀 어린 새.... 나의 우혁... 그리고....... 나만의......꿈속의 戀人.... 그렇게 끝내야 했었다. 꿈속에서의 戀人만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眞品을 갈망하면서도 代用品만으로 만족하며 끝내야 했었다. 이뤄지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추악한 욕심에 고통받으면서도, 미치지 않는 한은 내 손으로 하얀 천사를 더럽힐 일은 없을거라 여겼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승호의 감겨진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울기나 해봤는지 기억도 않날 정도로 그의 25세 짧은 생애동안 울었던 기억은 우혁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거의 없다고 해야 옳았지만, 지금 승호의 감정은 조절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상태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감촉따위는, 아니 자신이 지금 울고 있다는 자각(自覺)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대부님.... 대부님은 실수하신 거예요.... 저한테 그 아이를 맡겨서는 않되는 거였어요... 제 속에 숨겨졌던 더럽고 추악한 마음을 대부님이 아셨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대부님......전 말이죠......회사따윈.....아무래도 좋았어요... 다만 그 아이를 제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이, 오직 내게만 그런 권리가 생겼다는 것이..... 그 사실이 내내 믿기지가 않아 바보같이 혼자서 몰래 살을 꼬집어 본 적도 있었어요... 그 아이가 나날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루하루가 꿈같이 행복했어도.... ..............전........항상 불안(不安)에 시달려야 했어요..... 22세까지라는....그 한정된 기한이......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저를 압박시켰어요... 그때가 되면......날 버리지 않을까.......내게서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누군가 그 아이를 빼앗아가지 않을까........항상.....그랬었어요.... 그런데..........그런데 말이죠.........대부님.......그게........현실이 되버렸어요...... -.....승..호...형......하아......아.........나도......사....랑...해.... 그 사랑의 의미(意味)가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난 애써 부정하려 했었다. 그 의미만으로도 난 만족하려 했었고 스스로를 자제해야만 했었다. 하나 미칠듯한 욕구(慾求)에 난 다시 代用品에 손을 뻗어야 했었고 그럼에도 그따위론 꺼뜨리지 못할 타는 듯한 고통에 점점 메말라가야 했다. -.......승호형....... 승호의 물기로 흥건한 충혈된 눈이 천천히 돌려져 방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 문을 열고 우혁이 자신을 부르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다 악몽(惡夢)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줄 것만 같았다. -쾅!!! "우혁아-!!!!!!" 악몽(惡夢)은 현실(現實)이었다. 나의 하얀 천사는 이젠 두 번 다시 저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린 戀人은 이젠 두 번 다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방문을 거칠게 열며 뛰쳐 들어오는 칠현의 모습에 승호는 눈을 감으며 내내 쉴새없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에 온 얼굴을 적셔야 했다. 나의 하얀 어린 새는.......성조(成鳥)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52- # # # 그 역시 사랑이었다고..... 열정적(熱情的)이진 않았다해도.... 불같이 뜨겁게 타오르진 않았다해도....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이유는 그것이겠지요..... 그 또한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겠지요... 영원히 그러지 못하겠지요... 그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저를... 숭고(崇高)한 진정(眞情)을 배신해 버린 저를......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上] 땀이 진득하니 베일 정도로 오랫동안, 손가락 열 개를 연신 쥐었다 풀었다 반복하며 불 밝힌 방 안을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내내 서성거리던 재원이 벌써 골백번도 더 봤음직한 벽시계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뻐꾸기가 나와 한 번 울었던게 꽤 오래 전이었음을 상기하며 시계의 시침(時針)이 숫자 2 위에 놓여지기 직전임을 재삼 확인한 재원은 긴장으로 약간 뻣뻣해진 손가락을 힘주어 다시 한번 세게 거머쥐었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욕실 앞까지 다가가 문 손잡이를 잡으려다가 그런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막판에 깨닫고는 이내 쓴웃음을 머금으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렇게 한게 벌써 수차례나 되풀이되고 있음을 자각한 재원은 결국 근처에 놓여 있던 의자에 처박히듯 자신의 몸을 그대로 앉혀버렸다. 딱딱한 의자 등에 몸을 기대며 오른 발목을 왼 허벅지 위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놓은채 약간 다리를 흔들다가 팔을 올려놓은 마호가니 빛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톡톡 건드리며 하릴없이 방안을 한번 휘이 둘러보는 재원의 모습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 들뜬 듯 하면서도 내심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회백색(灰白色)의 가라앉은 톤으로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풍기는, 평면적이 웬만한 서민층 아파트보다 더 넓어 보이는 내실(內室)에는 욕실뿐만이 아니라 드레스룸과 응접세트까지 갖춰져 있어 흡사 호텔의 스위트룸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강했지만 그럼에도 침실 안의 정경이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것은 저택의 여타 다른 방들과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간결하고 소탈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함이나 번잡스러움은 경기일으킬 정도로 질색하는 재원의 성격대로 방안은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것 몇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삭막할 정도로 장식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나마 조금 사치를 부린 것이래봤자 살구빛 계열의 화사한 커튼과 벽에 부착된 고가(高價)의 그림 두어점 등으로 실내장식을 끝낸 침실의 풍경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것 없이 똑같았건만 지금에 와서야 자신의 방 어디에 뭐가 놓여 있는지를 알았을 정도로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것엔 무관심했던 재원의 눈에 새삼스럽게 모든게 다 달라보이는 이유는 이 공간에 분명 자신의 체취(體臭)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 향그럽고 달콤한 체향(體香)까지 은은하게 베어있기 때문인 듯했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마치 난초(蘭蕉)의 그것처럼 청초하고 싱그러운 그 향을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듯 한껏 숨을 들이키다가 다소 경직되있던 몸의 근육에서 조금씩 힘을 풀며 공기의 흐름에 전신을 내맡기고 있던 재원은 그렇게 해서라도 애써 마음 속의 조바심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나 그런 노력도 잠시뿐, 어느새 신경조직을 이루고 있는 세포란 세포는 하나로 모아져 마치 곤충의 더듬이마냥 잔뜩 곤두선 채 다시금 굳게 닫혀 있는 욕실 안의 동정(動靜)으로 쏠려가고 있었다.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샤워 물줄기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재원은 내내 애써 가라앉히려 했던 야릇한 흥분이 다시 온몸을 휘맴돌며 혈관 속을 무섭게 치달리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다가 손가락으로 심장부근을 툭 건드리며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나즉하게 중얼거렸다. "......이봐, 진정해" 손가락이 셔츠 위를 스칠 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불룩한 담배곽이 손에 걸리자 초조감을 억누르려고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문채 라이터를 켜서 막 불을 붙이려던 재원이 순간 멈칫하며 그대로 동작을 정지시키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빼내었다. ".....잊고 있었군" 우혁의 기관지가 담배 연기같은 혼탁한 공기는 오래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약하다는데 불현듯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잡고 있던 담배 끝으로 테이블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톡톡 두드리며 다시 시계로 힐끗 시선을 주던 재원의 반듯한 이마에 조금 흠이 패어졌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평소 우혁이 한번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려면 상당히 오래 걸릴 정도로, 혹시 결벽증(潔癖症)이 아닌가 의심이 들만큼 씻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을 재원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잰 시간만도 벌써 2시간은 족히 넘어서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시간이 꼭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씻은 적은 없었다는 것을 되새기며 그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깔끔함과 청결함이 새삼스러운 듯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다가 피곤함으로 약간 뻣뻣해진 목고개를 젖혀 손으로 주무르던 재원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나른한 미소가 어느 순간 그대로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이....병신같은..!!" 씹어뱉듯이 잔뜩 이를 악문 음성으로 험악하게 부르짖으며 순식간에 표정이 일그러진 재원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거칠게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 고개를 젖히느라 자연스레 위로 향해진 시선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휘황찬란하게 밝혀진 불빛에 멎는 순간, 분명 자신이 켜놓았음에 틀림없는 그 불빛을 본 순간,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이상한 점을 그제서야 발견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욕실로 달려가는 그 잠시간의 짧은 동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칠 듯한 불안감에 분노로 치를 떨며 그동안 내내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재원의 신경은 순식간에 뒤헝클어지고 말았다. 샹들리에의 불빛에 시선이 멎었을 때, 우혁이 있었음에도 왜 방 불이 켜져있지 않았는가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아예 그것을 고려치도 않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재원은 우혁이 일부러 방 불을 끄고 욕실로 들어갔을 리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굳이 방안의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시간대에 욕실로 들어간거라면 우혁은 지금 몇시간째 저 안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속이 메쓱거릴 정도로 급박하게 밀려드는 극도의 불안감에 순식간에 낯빛이 헤쓱해진 재원이 욕실문 손잡이를 돌리면서 그대로 몸을 부딪혔다. "우혁아!!!"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예상외로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열려 버려서 세차게 문에 가 부딪히던 재원의 몸이 가속도가 붙어 달려들던 그대로 미처 멈출새도없이 욕실 안으로 빨려들듯 튀어 들어갔고, 동시에 그가 온몸으로 느낀 것은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게 내려가버린 싸늘한 내부온도였다. 그리고 재원의 거세게 흔들리는, 커다랗게 뜨여진 눈 안 가득 들어온 것은.... 마치 폭포수처럼 세차게 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샤워 물줄기 아래 흠뻑 젖어 몸에 철썩 들러붙어 있는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물이 흥건한 차디찬 바닥에 주저앉아 옆에 놓여있는 커다란 욕조에 반쯤 몸을 걸친채 힘없이 늘어진 자세로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몸에 부딪혀오는 물방울들을 사방으로 튕겨 내어 분산시키고 있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냘픈 戀人의 뒷모습이었다. "...........우...혁..." 욕조에 팔을 걸쳐 바닥으로 비스듬히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시켜 놓은채 시체마냥 축 늘어져 미동도 않는 우혁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얗게 텅 비어버린 재원이 마치 천근인양 그 자리에 붙박히듯 무거워진 다리를 간신히 이끌어 그에게 다가서다가 자신의 몸에 와닿는 물줄기에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뭐...." 눈깜빡할새에 전신이 흠뻑 젖어버렸지만 재원은 아예 피하려는 의사도 없는듯 잔뜩 경직된 채로 고스란히 온몸에 세찬 물세례를 맞으며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 ".....설마.....여태껏....." 드넓은 욕실 내부가 마치 차가운 빙굴(氷窟)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냉랭한 한기(寒氣)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뼛속까지 시릴만큼 차가운 물을, 이 짧은 동안에도 드러난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세찬 압력으로 내리퍼붓는 이 얼음같은 물줄기를 우혁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맞고 있었다는 생각에 재원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우...혁아..."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않고 있는, 물에 젖은 옷이 달라붙어 확연히 드러난 바싹 말라 뼈가 도드라져 나온 등줄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재원이 그대로 허물어지듯 물로 흥건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심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갖다 대다가 순간 차가운 송장을 만진 것처럼 싸늘하게 내려가버린 체온에 흠칫해 서둘러 우혁의 몸을 상체로 덮다시피하며 안으려할 때였다. "..................지.....마....." 너무나 큰 충격에 샤워기를 잠글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가 고스란히 물줄기를 맞으며 우혁의 몸 위를 가리고 있던 재원이 세차게 떨어지는 요란한 물소리를 뚫고 끊어질 듯 가녀린 음성이 여지없이 귓속을 파고들자 순간 밀려드는 안도감에 현기증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 너.." 전혀 미동조차 없어 기절한 줄만 알았던 우혁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더니 욕조너머로 걸쳐져 있던 팔에 힘을 줘 간신히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키며 자신의 허리와 겨드랑이 밑을 잡고 있던 재원의 손을 떨궈내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채 달라붙은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보랏빛이 맴돌 정도로 푸르죽죽하게 얼어붙은 입술과 새파랗게 질려 핏기라곤 하나도 없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물기젖은 얼굴을 본 순간 우혁이 기절하지 않았다는데 잠시나마 안도의 기색을 보이고 있던 재원의 표정이 다시 심각하게 바뀌었다. ".......대체 어떻게 된거야. 어서.." 하나 재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안아 일으키기 위해 다시 갖다대려던 자신의 손을 조금 전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될만큼 확실한 거부의 몸짓으로 강하게 뿌리치며 자신을 아예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 우혁의 싸느다랗게 굳은 옆모습을 봤던 것이다. 흡사 마치 처음 만났던 그때 당시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 모습은 재원의 심장을 한순간에 충분히 얼어붙게 만들수 있을만큼 그렇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차디찼다. ".......건......드....리지...마...." 추위로 잔뜩 얼어 혀가 잘 않굴려지는지 떠듬떠듬 불분명한 발음이긴 했으나 의사전달은 확실히 하려는 듯 냉랭한 음성과 함께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자신에게로 향한 우혁을 본 순간 재원의 얼굴은 그이상 굳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경직되버리고 말았다. 물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백금발 사이로 드러난 것은.... 자신에게 안기며 열정에 들떠 있던 戀人의 것이 아닌, 분명코 단순히 물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까지 섞여들어 흠뻑 젖은채로, 혈관 속의 피를 순식간에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하게 식은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것은...... .......지독한 냉기(冷氣)가 서려 베일 듯 날카로워진 암청빛 눈동자였다. 칠현의 뇌리(腦裏)에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분명 자신이 뭔가 착각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방금 전에 본 것은, 아니 지금 이 순간도 보고 있는 눈앞의 광경(光景)은 분명 착각이어야 했고, 현실이 아니라 너무 늦은 시각이라 피곤한 나머지 잠시간의 착시현상(錯視現像)으로 인해 생긴 것이어야만 했다. 불밝혀진 이 방안에 분명코 있을거라 여겼던 그 주인의 부재여부(不在與否)를 떠나서, 25세의 건장한 사내가, 자신의 형이, SM 그룹의 사장이, 아니 피도 눈물도 없다는 냉혈한(冷血漢)의 대명사(代名詞)라는 그 안승호가 멍하니 풀린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 착시현상에 의해 일어난 환상임에 틀림없었다. "......형...?" 방문을 열고 뛰쳐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굳은듯이 우뚝 멈춰 서 있던 칠현이 흔들의자에 몸을 싣고는 눈을 감은채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시고 있는 승호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 간신히 소리내어 불러 봤지만 묵묵무답(默默無答), 철저한 무반응(無反應)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가슴에 통증이 일정도로 비정상적으로 드날뛰는 심장의 울림을 생생히 느끼며 칠현은 자신이 뛰쳐 들어왔던 그 순간만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 아예 미동도 않고 있는 승호에게서 잠시 눈을 돌려, 문을 여는 순간에 아니 승호의 눈물을 보는 순간에 이미 한눈에 파악해버린, 하나 머릿속으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이 사태(事態)를 다시 재확인하려는 의도인 듯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분명 이 방의 주인이 예쁜 소녀일 것이라 추측하며 자신의 예측(豫測)을 확신할 정도로, 온통 밝고 화사한 톤의 가구와 로코코 양식의 베르사유 궁전에 갖다 놓으면 딱 어울릴 듯한 하늘거리는 수겹의 베일이 늘어져 있는 사각기둥의 푹신한 침대,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과 셀수도 없을만큼 여기저기 널려있는 쿠션들로 방주인만큼이나 아름답게 꾸며진 넓찍한 실내를 둘러보는 칠현의 모습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듯 약간 멍해보였다. 하나 두 번 세 번 아니 수십 번을 둘러보고 또 둘러본다해도 이 곳에 보이지 않는 방주인의 모습이 갑자기 불쑥 생겨날 리가 없었다. 단지 이곳엔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는, 심신(心身)이 마비되버린 두 남자만이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있는 이 공간을 초라한 모습으로 대신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않간거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도저히 지면바닥을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진 칠현이 들고 있던 가방을 힘없이 떨어뜨리며 한순간 몸을 휘청대다가 침대 맡으로 다가가 쓰러지듯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로 나즉히 중얼거렸다. "그렇지? ....아직 않간거지?" 분명코 그래야 한다는 듯이,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길은 그것 밖에 없다는 듯이, 그 외의 어떤 말로도 자신을 용납시킬수 없다는 듯이, 칠현은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 옛날 우혁이 보름간이나 깨어나지 못했던 그당시의 기억 이후로는 칠현의 뇌리에 남아있지 않은 눈물로 흥건한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친 순간, 아니 그때 당시보다도 더 심하게, 흡사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무방비 (無防備)한 상태가 되버린 그 눈빛을 본순간, 칠현의 얼어붙어 마비된 정신이 한순간에 금이 쩍가며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다. "말해봐!! 아직 우혁이한테 않갔지?!! 그렇지?!!!"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칠현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승호의 물기젖은 눈빛은 거의 회색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대답해!!! 승호형!! 않간거지?!!!" 한참을 흐릿한 눈빛으로 칠현을 바라만 보고있던 승호의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미세한 떨림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잔뜩 쉬어버린 음성을 흘려내었다. "....그렇게도....붙들어.....매놓으려고......" 한참만에야 새어나온 말이 동문서답(東問西答)식으로 완전히 엉뚱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칠현은 숨까지 죽일 정도로 바짝 온몸을 긴장시킨채 자신에게로 향해진 승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개까지....부러뜨렸는데....." 분명 그 눈동자에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심한 안개가 끼인 듯이 뿌옇게 흐릿한 그 눈빛은 자신을 넘어 다른 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칠현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않되게.......길들였었는데....." 처음 말을 배우는 아기라도 된 것처럼 천천히 떠듬거리며 한마디 한마디 나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내뱉는 승호의 모습은 마치 유체이탈 (遺體離脫)이라도 한 듯 육신(肉身)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정신만은 딴 곳에 가 있는듯 그렇게 비현실적(非現實的)으로 보였다. ".......결국.....날아가 버렸어....." 의자 팔걸이 위에 걸쳐져 있는 승호의 양쪽 손가락들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칠현이 그런 그의 모습을 더 이상은 참고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그대로 몸을 일으켜 승호의 어깨를 부여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거야!!!! 형!!!! 말 좀 해봐!!!!" 손아귀에 잡혀 힘없이 흔들리는, 분명 오늘 아침 회사에 입고 갔던 차림 그대로임에 분명한 얇은 정장자켓 밑으로 느껴지는 바싹 도드라진 어깨뼈의 감촉(感觸)에 칠현은 그렇게도 강인해 보였던 형이 이렇게 작고 마른 사람이었나 싶어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해왔던 절대불변(絶對不變)의 진리(眞理)가 한순간에 깨져버린 듯한 심적 충격과 밀려드는 허탈함에 전신의 맥(脈)이 다 풀려버리고 말았다. 안승호의 정신세계를 밑바탕부터 이루고 있는 원천(源泉)인 동시에 비록 이제는 이상(理想)과 어긋나 버렸다해도 그가 삶의 표본(標本)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 故 장성혁 회장이었다면 칠현에겐 친형인 승호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존재가, 그 믿음이 완전히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허물어져버린 지금 칠현이 받고 있는 충격은 우혁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어떻게 된....일이냐고?.....큭...." 이젠 눈물샘에서 더 이상 흘려낼 눈물도 없는 듯 이내 말라버린 승호의 눈빛이 공허한 빛으로 물들더니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어떻게 된 일이라..." 약간 쉰듯한 음성으로 나즉하게 중얼거리며 차츰 차츰 삭막할 정도로 메마른 표정이 떠오르는 승호의 얼굴을 보던 칠현은 그가 어느 결에 잃었던 이성(理性)을 다시금 되찾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칠현의 짐작대로, 무서울 정도의 정신력(精神力)을 발휘해 진흙탕 밑바닥까지 떨어져 걸레마냥 내팽게쳐졌던 이성을 한순간에 추스려 버린 승호는 마치 내가 언제 허물어졌었냐는 듯이 그렇게 다시 냉철한 안승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범인(凡人)이라면 극에서 극으로 치달리는 이런 심리상태(心理狀態)의 변화를 이뤄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일테지만 안승호란 인간은 그 범인의 범주(範疇)에는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던 양손가락을 꽉 거머쥐며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정리하는 듯한 승호의 얼굴은 가면을 덧씌워놓은 듯 소름끼칠 정도로 감정이 배제된 평상시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칠현은 지긋이 감겨있던 눈이 천천히 뜨여지며 자신을 정면으로 직시해오는 얼음같이 투명한 눈빛에 승호가 완전히 자신을 되찾았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늦었다. 그만 가서 자라" "............형....." 팔걸이를 짚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승호에게서 방금 전의 금새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위태해 보이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지만 대신 그 언젠가 에릭이 느꼈던, 강인한 통제력(統制力)으로도 감출 수 없는 메마른 고독감(孤獨感)이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이만 쉬어야겠다" 천천히 몸을 돌려 방안을 가로지르는 승호의 뒷모습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그 고독한 분위기에 칠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열려있던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中-I] "...하아....하아..."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시도(始賭) 끝에 간신히 욕조에 팔을 짚고 파들파들 심하게 전신을 떨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우혁을 바라보면서도,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반복적인 시행 내내 반쯤 몸을 세우다가 바닥으로 이내 힘없이 허물어지며 내리주저앉던 우혁을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또한 실패의 연속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킨 우혁이 비틀대며 다시 쓰러질뻔하다가 벽을 짚으며 몸을 기댄채 새파랗게 얼어버린 입술을 열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재원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여전히 샤워기 아래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빙하(氷河)같이 차가운 물세례를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이미 흠뻑 젖어버린 몸의 체온을 급강하시킬 정도로 꽤나 오랫동안 물줄기를 맞고 있으면서도, 재원은 마치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꿈쩍도 하지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 그런 재원의 모습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아니 아예 그라는 존재를 느끼지도 못하는 듯 완전히 무시해버린 채로 전신을 떨며 몇 차례 휘청거리던 우혁이 벽을 짚고 간신히 지탱시켜놓은 몸을 이끌어 두어 발자국 걸음을 떼어 놓았지만 얼마 안가 그대로 다시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놔" 뒤돌아보지도 않은채 그대로 팔만 뻗쳐 옆을 지나치는 우혁의 팔뚝을 거머쥐어 그의 몸을 붙들은 재원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놔" 팔을 조여드는 악력(握力)이 보통이 아니었음에도 우혁은 눈썹하나 찌푸리지 않고 새파랗게 굳은 얼굴이 흡사 말그대로 완전히 눈뜬 얼음 인형의 형체(形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원과 마찬가지로 아예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채 손을 뿌리치기 위해 잡힌 팔을 비틀며 빼내려했다. "..놔" "....왜 이러는거야" 뭔가를 억제하고 있는 듯, 잔뜩 억눌린 지독한 저음이 요란한 물소리를 뚫고 귀속을 찔러왔지만 우혁은 음정(音程)의 고저(高低)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목소리로 마치 자동기계마냥 아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반복적인 단어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놔" "......대답해" 평소와 별다를바 없이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지극히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음성 밑에 깔린 잔뜩 억제된 정체불명의 그 무언가는 분명코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으면 한순간에 폭팔해버릴 듯이 잔인할 정도로 위험스런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기운(氣運)은 인간의 잠재력(潛在力) 속에 포함되 있는 잔인한 폭력성(暴力成)일 수도 있었고, 혹여 그것이 만일 戀人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라면 욕구불만(欲求不滿)에 비례해 사디즘에 가까운 파괴적(破壞的)인 성욕(性慾)일 수도 있었지만 재원의 경우에는 그렇게 단순명료(單純明瞭)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기운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놔!!!" 그리고 그 위험한 기운을 자극시킨 촉매제(觸媒劑)가 되버린, 얼음인형같은 상태가 깨지며 터져나온 우혁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그대로 잡고 있는 가냘픈 팔의 뼈를 완전히 으깨버리기라도 할듯이 우악스럽게 틀어쥐며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거칠게 샤워기 밑으로 잡아 끌어당기게 만들었다. "헉!!!"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끌려온 우혁이 다시금 얼굴 위로 세차게 내리퍼붓는 얼음짱같은 물세례를 받으며 균형을 잃고 휘청대다가 미처 어쩌기도 전에 그대로 자신의 허리를 바짝 조여 휘감는 재원의 몸짓에 이성을 잃고 그대로 팔을 들어 그를 내리치려 했지만 그것은 그나마 자제력(自制力)을 발휘해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던 재원을 완전히 도발시킨 행위밖엔 되지 않았다. "ㄴ..흡!!!!" 그리고 그 도발의 대가로 우혁은 후려치려던 팔을 금새 억센 손아귀에 붙들려 꼼짝도 하지 못하는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벌려진 입술로 그 틈을 놓칠새라 그대로 입술을 밀어붙여 격하게 파고드는 뜨거운 혀를 무방비한 상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재원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손목을 있는 힘껏 비틀어댔지만 우혁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팔도, 손목을 무섭게 틀어잡고 있는 손가락도, 숨도 쉬지 못할만큼 키스가 점점 난폭할정도로 격렬해지며 깊어지는 것과 비례해 갈수록 더욱 세게 조여들 뿐이었다. 하나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바짝 조여들던 손가락들이 쉴새없이 비틀어대던 손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힘이 빠진듯 축 늘어지자 조금씩 조임이 느슨해졌고, 차가운 물줄기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후끈 달아오른 바짝 밀착된 단단한 가슴을 주먹으로 연신 치던 나머지 한 손이 입 속을 헤집어 놓는 농후한 혀의 움직임에 어느새 반쯤 풀어헤쳐진 셔츠자락을 움켜쥐며 더 이상의 저항을 하지 않자 재원의 경직되있던 근육이 빠른 속도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이 지금 누구와 키스하고 있는지를 새삼 자각한 듯, 분노로 거칠기만 했던 입술과 혀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면서 수그러든채 뒤로 자꾸 움츠러들려는 혀를 찾아내 조심스럽게 휘감고 빨아당기며 반응을 살피다가 조금씩 호응해 오는 듯하자 다시금 감미롭게 뒤섞여 달콤한 타액을 주고받았다. 갈구(渴求)하듯 서로의 입술을 격렬하게 탐하며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계속 있을 수 있다는 듯이 잠시 떼기가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금 상대방의 입술을 찾아 한참을 그렇게 무아지경(無我之境)에 가까운 상태로 서로에게 몰입해 있다가 쉴새없이 얼굴 위로 쏟아져내리는 차디찬 물세례에 지금 어디에서 키스하고 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는지 샤워기 밑을 빠져나와 그대로 벽에 우혁의 몸을 밀치고는 키스로 인해 장밋빛을 되찾은 촉촉히 젖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다시금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며 혀를 밀어넣었다. 또한 어느결에 손목의 결박상태가 풀려버려 잡고 있던 그 손이 흠뻑 젖어든 셔츠 밑으로 파고들어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뼈가 도드라진 등줄기에 열을 지펴주려는 듯 애타게 매만지며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동시에, 가는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거세게 휘감고 있던 팔의 조임 역시 이내 자연스럽게 풀리며 그대로 옷 속으로 깊숙히 침투해 역시 싸늘한 감촉밖엔 느껴지지 않는 자그마한 둔부를 살포시 감싸 애무하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몸을 녹여주려 했다. 가슴부근에 올려져 셔츠자락을 쥐고 있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애무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마치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놓치지 않으려는듯 축축한 옷감을 잔뜩 구기며 더욱 세게 움켜쥐려다가 어느 순간 흠칫 경련을 일으키더니 무슨 일인지 조금씩 도로 힘을 빼며 후끈 달아올라 뜨거워져 있는, 풀어헤쳐진 셔츠 틈으로 드러난 맨가슴의 살갗 위로 가만히 차가운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하아....하...." 숨막혀하는 연인의 숨을 내쉬게 하기 위해 잠시 떼어낸 입술을 그대로 목덜미로 내리뜨려 입안으로 빨아들이듯 차가운 물기를 흡수시키다가 셔츠 깃을 젖혀 어깨선을 쓸어내리며 달아올라 절로 가빠진 숨결을 토해내던 그때, 재원의 키스와 애무에 완전히 깊이 빠져든 줄만 알았던 우혁이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몸부림을 치며 바짝 밀착해 있는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쳐버렸다. 조금전의 심상치 않았던 우혁의 모습과 반응에도 불구하고 어느 결에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듯 오직 몸에 와닿는 잔뜩 얼어붙은 연인의 싸늘한 체온을 올려주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재원이 갑작스런 뜻밖의 상황에 몸의 균형을 잃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대로 황급히 욕실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문턱을 넘어서 방안으로 들어가 몇 발자국 떼놓기도 전에 다시금 허리를 휘감아오는 팔뚝의 강인한 힘에 몸이 그대로 한바퀴 돌려지고 말았다. "놔!!!!!" 뒤에서 뻗쳐온 팔이 허리를 낚아채며 순식간에 몸이 돌려지는 동시에 우혁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그대로 재원을 후려쳤다. -촤악!!! 방금전까지 서로를 갈구하며 키스를 나눈 사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악에 받쳐 휘두른 물기 젖은 손은 요란한 격타음(擊打音)에 걸맞게 상당히 위력(威力)을 발휘해 순식간에 재원의 창백한 얼굴 위로 붉은 손자국을 만들며 그나마도 잘못 빗나가며 맞았는지 옆으로 돌아간 경직된 입가를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거만한 자존심 덩어리가 그 언젠가의 것까지 포함해 벌써 두 차례나 뺨을 얻어 맞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건만 고스란히 뺨을 내준 것은 그의 팔에 안겨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이 애처로울 정도로 가냘픈 인간이, 가녀리고 아름답지만 가시를 잔뜩 품고 있어 소유하고 있다해도 절대 마음놓을 수 없는 이 꺽기 힘든 얼음꽃이, 그의 숨통을 죌수 있는 권리를 가진, 유일하게 '戀人'이란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오직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의 심장이기 때문이었다. 휘감고 있는 허리를 놔주지 않은채 이제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는 시도는 아예 하지도 않고 다만 분을 이기지 못해 씨근거리는 숨소리만 내뱉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원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지더니 더한층 냉랭해진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우혁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가 약간 쉰듯한 음성으로 나즉히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놔" 마치 도장이라도 찍어 놓은 듯 흰 피부 위로 뚜렷이 박혀버린 벌건 손자국과 터진 입술의 피만은 아닌듯한, 금새 멎을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가느다란 핏물이 입가를 타고 나와 턱밑으로 흘러내려 물기젖은 교복셔츠로 붉은 물감을 들이듯 한방울 한방울 떨어질때마다 삽시간에 번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우혁의 차가운 암청빛 눈동자 위로 한순간 미진한 흔들림이 스치듯 지나갔다. 또한 약간의 시간차가 있긴 했으나 역시나 싸늘한 목소리로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지만 순간적이나마 드러나버린 그 미묘한 차이를 재원은 전혀 눈치채질 못했다. 하룻밤 차이로 수줍지만 열정적인 연인에서, 아니 방금전까지만 해도 눈뜨고 꿈꾼게 아니라면 분명 자신을 갈망했음에 틀림없었음에도 순식간에 지독한 한기(寒氣)를 내뿜고 있는 모습으로 뒤바껴버린 품안의 얼음꽃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평소의 조소섞인 나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암청빛 눈망울처럼 냉기(冷氣)를 발하는 것도 아닌, 솔직히 지금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차분하고 고요히 가라앉은 흑요석(黑曜石)같은 눈빛이었다. 하나 그 지나칠 정도의 정적감(靜寂感)어린 눈빛 속에 숨어 있는 것이 태풍 (颱風)의 핵(核)과 같은 의미의 고요함이란 것을, 그 억제된 감정이 방금 전 욕실 안에서와 비슷해 보이긴해도 사실은 그 상황과는 비교도 않될 정도로 극한(極限)의 위험에 다다라 있는 상태라는 것을 우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안승호를 본 것만으로....이렇게 흔들리는 건가? 한참만의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보기라도 할듯이 뚫어져라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고요한 눈빛만큼이나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낮은 음성을 듣는 순간, 또한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우혁의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이 한순간에 흐트러지고 말았다. "......너....설마...." ".....왜 따라가지 않은 거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삽시간에 창백한 얼굴 위로 번져가는 충격(衝擊)과 혼란(混亂)의 소용돌이를 놓치지 않고 목격하고 있는 두 눈동자는 변함없이 호수처럼 지극히 잔잔했다. 또한 연이어 쉴 틈을 주지 않고 충격타를 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반드시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어야겠다는 의도인지 지금 이 상황에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그 음성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의해서 듣지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여전히 지독한 저음이었다. ".....대답해. 왜 그를.." "그걸 알아 뭐하게? 너한테 그런게 중요해?" 지금까지 내내 반벙어리마냥 아니 입력된 코드만 되풀이해서 반복하는 자동 기계인양 음성마저 차가운 금속성(金屬聲)의 톤으로 싸늘하게 내뱉던 와중에 이시간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한순간에 싸하게 식어버리게 만드는 그 말은, 더군다나 이후의 말들은 차라리 아예 않듣는게 더 나을거라는 것을, 지금 중지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게 할정도로, 그 달콤한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재원의 기억으론 처음 들어보는 것임에 틀림없는 잔뜩 비꼬인 음성이었다. ".......뭐라고?" "넌 내몸만 필요한거 아니었어?" 자신의 눈이 먼게 아니라면 찌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암청빛 눈동자 위로 떠오른 것이 거의 경멸(輕蔑)에 가까운 빛이란 것을, 자신의 귀가 잘못된게 아니라면 그 붉은 입술에서 나온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느낌까지 받게 할 정도인, 말 속에 숨겨진 의미 따위는 머리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비웃는 그 음성 그대로, 그 눈빛과 그 말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아챈 순간 더 이상 창백해질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버린 재원은 몇 초전의 그 암시가 착각이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강력한 자가보존(自家保存)이 발휘되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던 것임을 그순간 깨닫게 되었다. [中-II] 쏴아아... 쏴아아... 소나기처럼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흐리멍텅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번쩍 들정도로 얼음처럼 차디찬 물을 맞으며 전면의 거울에 팔을 짚고 선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나의 나신은, 다소 마른듯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수영선수처럼 미끈하게 뻗은 균형잡힌 단단한 몸매와 탄력적으로 적당하게 솟은 근육으로 잘 짜여져 있어, 20대 청년의 싱그러운 젊음과 異性에게 자석같은 강력한 흡착력(吸着力)을 발휘하는 남성적인 美로 가득차 있었다. 고작 의복의 착용여부 하나에 따라 이다지도 느낌이 확 달라질 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평소 마치 청교도인같이 금욕적(禁慾的)이고 엄격할 정도로 절제되있던 딱딱한 정장차림의 모습과는 달리, 의복 밑에 숨어 있다가 드러난 물기젖은 나신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 야성(野性)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만큼 위험스러울 정도로 자극적인 매력을 과시함으로써 야누스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교계(社交界)의 상류층(上流層) 여성들,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있어 SM그룹 사장인 안승호란 남자는, 노회한 사업가들에게도 인정받는 가장 촉망받는 기업인이라는 사실과 젊은 나이에 벌써 대기업의 총수(總帥) 라는 점, 그리고 보기 드물만큼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는데서 항상 주목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말고도 다른 의미에서 은밀한 관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냉혈한(冷血漢)이란 명성(名聲)에 걸맞게 마주칠때마다 정중하지만 냉정한 모습밖엔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직 20대 청년이라는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차가운 성격을 지녔다는 이미 사실로 입증된 소문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육감(肉感)과 본능(本能)으로 차가운 겉모습 밑에 숨어있는 그 이중적인 모습을 이내 간파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 자신은 그것이 수줍은 연심(聯心)이든 아니면 간부(姦婦)의 음란한 탕심(蕩心)이든 그 어느쪽에 해당되든간에 그런 식의 관심은 달갑지 않아하며 철저히 무시해버릴테지만, 여자라면 내심 한번쯤은 연인으로 꿈꿔보고 싶을만큼 안승호란 남자는 그렇게 위험하고 비밀스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사실 재원이 린페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안승호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던 것도, 또한 그처럼 철벽같이 단단하고 고래등 심줄같이 질겨 무심하기 짝이없던 신경이 계속해서 적신호(赤信號)를 일으키며 바짝 곤두서 있었던 것도, 더더군다나 그 이후로 재원의 이성을 완전히 날라가버리게 만들어버렸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비록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니 설사 안다해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테지만, 속된 말로 수컷의 자존심을 건드릴 정도로 그가 자신과 동류(同類)에 해당될만큼 냉철하고 우아하게 포장된 겉모습 밑에 숨겨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재원의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겨우 단 한문장의 여파(餘派)가 드넓은 내실의 온도를 한순간에 뒤바꿔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불길한 적막감(寂寞感)에 휩싸여 있던 방안의 싸느다랗게 냉각(冷却)된 분위기 속에서, 한참만에야 정적(靜寂)을 깨뜨리며 흘러나온 잘못듣지나 않았나 재확인하려는 의도의 반문(反問)은 바짝 귀를 갖다대고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거의 속삭이는 음성이었다. "넌 내 몸만 필요한거 아니었냐고! 처음부터 그랬잖아?! 대체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아는게 뭐냐고!! 단지 몸뚱아리 하나밖에 더 있어?!!" 오한(惡寒)과 분노(忿怒)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표독스런 음성으로 친철하게도 그 반문에 두 번이나 같은 말을 온몸으로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무섭도록 창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칼날같은 시선으로 노려보는 물기젖은 암청빛 눈망울은 잔인함이 깃들여진 냉기(冷氣)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굳이 일부러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될정도로 허리를 휘감고 조이던 팔뚝의 힘이 느슨하게 풀려버리자 우혁은 자신의 몸에 손이 닿는 것도 싫다는 듯 매몰차게 뿌리치며 그 힘도 이기지 못해 몇 번 휘청이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팔을 뻗쳐도 않닿을 정도의 사정거리(射程距離)로 몇발짝 물러섰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에 대해 아는 거라곤...........네 몸밖에 없어" 스스로도 천박한 말을 하는 자신을 내심으론 씁쓸하게 여기는 듯 반쯤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붉은 입술을 짓깨물고는 잠시간 말을 멈췄다가 다시금 정면으로 직시하며 도발해오는 눈앞의 얼음꽃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채, 처음의 반문을 제외하곤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는 재원의 경직된 입매는 아교로 붙여놓은 듯 굳게 닫혀 열릴 줄을 몰랐다. "그런데 왜 따라가지 않고 남았냐고? 듣고 싶어? 말해줘?" 색으로 만들어볼 시도(始賭)는 아예 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오묘한 빛깔인 백금빛 머리카락도, 블랙재규어의 털처럼 까맣디 까만 검은 머리카락도, 흠뻑 젖어 얼굴 위로 달라붙은 채 뺨 위로 입술 새로 목덜미로 쉼없이 물방울들을 떨궈내며 이미 젖어버린 옷을 계속해서 적시고 있었다. "네 몸이 필요했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그렇게 만들어줄... 몸 하나가 필요했어" 심해(深海)의 푸르름과 깊음을 간직한 암청빛 눈망울도, 흑요석(黑曜石)의 반투명(半透明)함처럼 속내를 알길 없이 고요히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도, 한순간에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방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초침소리까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서로에게서 시선(視線)을 떼지 않은채 그대로 모든 것을 멈춰버렸다. "형을 사랑하지만.......쉽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필요했어. 네가 처음에 그랬잖아? ....네 몸을 이용해도 좋다고" 젖은 옷감이 들러붙어 마른 듯하면서도 강인한 윤곽을 드러내는, 와닿는 감촉만큼이나 단단하고 미끈해 보이는 물기젖은 가슴의 굴곡이, 반이상 단추가 끌러진 셔츠 틈새로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대담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흠칫하며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리는 암청빛 눈동자와는 달리, 아찔할만큼 유혹적인 단내를 풍기며 그 향기만큼이나 도발적인 음성으로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짙붉은 입술로 시선을 박아버린 검은 눈동자에는 한치의 미동조차 없이 그렇게 완벽한 고요함만이 정지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뼛속까지 한기가 베어서인지 아니면 찬물을 끼얹은 듯 계속되는 방안의 정적(靜寂)때문인지 심한 오한(惡寒)이 밀려드는 듯 전신을 세차게 떨면서 무의식적으로 젖혀진 셔츠의 앞자락을 끌어모아 움켜쥐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미미하게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고요함이, 연속되는 잔인한 말에도 흔들림이 없던 그 고요함이 어느 순간 거울이 부서지듯, 정지상태가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결단코 자신이 그래놓은게 아님이 분명한, 반쯤 끌러진 셔츠에 매달려 있어야 할 단추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실밥만 남은채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한 검은 눈동자 위로 한순간 살기(殺氣)라고 해도 좋을, 베일듯한 한기(寒氣)가 떠오르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며 다시금 완벽한 고요함을 되찾아버렸다. "........다시 말해봐" 심한 말에도 불구하고 미미한 타격(打擊)조차 입히지 못했는지 전혀 흔들림이 없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과 역시 평소와 다를바없는 조용한 음성에 이미 반쯤 이성을 잃었던 우혁은 울컥한 나머지 더 한층 냉랭해진 음성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대신 필요하다고 했어!" "................그래?" 어떤 반응(反應)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니 어떤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말을 의도했든지간에 들러붙은 백금발로 인해 한층 더 헤쓱해 보이는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버린 충격(衝擊)의 강도(强度)로 보아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필요했다고..." 잔인하다는 표현은 오히려 너그러울 정도로 이미 찢겨진 심장에 발톱을 박아 사정없이 쥐어짜버리듯이 지독하게 표독스런 말에 대해 되돌아 온 것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그렇게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것도 아니었고 상처입은 야수처럼 살벌하게 위험한 것도 아닌, 지극히도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무심한 목소리였다. "........대신이라..." 하나 억양의 고저를 느낄수 없는 음성과는 달리, 신체까진 완벽하게 제어할수 없었는지 가만히 내리뜨려져 있다가 어느 결에 주먹 쥐어진 손가락에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흰색 교복셔츠의 긴 소매가 팔꿈치 위까지 걷혀져 훤히 드러나 있던 팔뚝의 근육 위로 시퍼런 힘줄이 불끈 솟아 올라 있었다. ".......내 몸이.....그 놈 대신이라 이거군" 엉성하나마 간밤에 자신이 매줬음에 틀림없는, 또 한차례 휘몰아쳐온 열풍(熱風)이 숨가쁘게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견한, 무리하게 계속된 충격으로 인해 살갗이 헤져 흰뼈까지 드러나 손대기도 두려울 정도로 핏물에 흥건히 젖은 손을 붙들고 지혈시키려 애쓰며 그 끔찍한 상처에 내내 울먹이며 매줬던 오른 손등의 붕대 위로 시선이 멎는 순간, 냉기(冷氣)만이 가득했던 암청빛 눈동자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단 말이지" 늦은 시각이라 사람을 부를 수도 없어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핏물을 닦아내고 소독제와 약을 바르며 치료같지도 않은 치료를 하는 동안, 능숙지 못한 손길로 인해 더욱 심하게 쓰라렸을텐데도 아무 통증도 없는듯 신음 한번 내뱉지 않은채 오히려 당사자보다 더 아파하며 치료내내 흐느끼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키스해오던 손과 입술의 감미로운 유혹(誘惑)을 뿌리치며 눈물로 흐릿한 눈과 떨리는 손으로 매느라 시간이 꽤 지체된 후에야 간신히 다 묶을 수 있었던 그 붕대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던 암청빛 눈망울이 계속해서 연상되는 그 동안의 기억들로 인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랬었군" 거세게 움켜쥔 주먹으로 인해 상처가 당겨 다시 터져버렸는지 지금은 흥건히 젖어버린 흰 붕대위로 점점이 붉은 얼룩이 베어나오다가 삽시간에 빠른 속도로 범위가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로 응시하던, 어느새 차가움은 씻은 듯이 가셔버린 암청빛 눈망울이 핏물이 번져나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습윤하게 젖어들었지만 혀끝을 아플만큼 깨물고 속눈썹을 연신 깜빡거리며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럼 남아준 보답을 해줘야겠군" 숙여진 이마 위로 물기젖어 들러붙어 있던, 너무나 짙어 푸른빛이 맴돌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떨림을 일으키며 물방울들을 불규칙한 간격으로 쉴새없이 떨궈내었고, 변함없이 무심한 음성을 내뱉으며 어느새 멈춰서 말라있다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조금씩 씻겨내려가던, 물에 희석되어 색이 옅어진 핏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단아한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이 더러운 몸뚱이가 필요하시다는데...." 말의 의미와는 전혀 않어울리게 사랑을 나누며 연인에게 밀어(蜜語)를 속삭이듯이 위험할 정도로 관능적(官能的)인 느낌을 주는, 나즉하고 허스키한 어조(語調)로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게 말하는 그 음성은 우혁이 결코 이전엔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당연히....만족시켜 드려야겠지" 지금과 같이 험악한 상황만 아니라면 듣는 사람의 얼굴이 절로 붉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말로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心腸搏動)을 배는 빠르게 올려놓으며 흥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또한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이 아무리 차가운 피라해도 삽시간에 탁탁 튀며 끓어오르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을 짙게 풍겨내는 그 나른한 저음이 내뱉은 말은 사랑 따위의 감정은 배제된 오직 섹스파트너에 대한 성욕(性慾)밖엔 드러나 있지 않은, 아직 미성년인 고등학생의 것이라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도 욕정적(欲情的)인 느낌 그 자체였다. ".........그렇지. ......그게.....내 의무겠지" 하나 약간의 간격차를 두고 흘러나온 여전히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자조어린 그 음성은, 性的 긴장감으로 위험하게 달아오른 공기를 삽시간에 냉각시켜 버리고도 남을만큼 한기(寒氣)어린 싸늘함으로 뒤바껴버리고 말았다. "........안그래, ...장우혁?" 사람의 이름하나 부르는 것조차도 그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와닿는 의미와 느낌이 틀리듯이, 재원에게 있어 '佑赫'이란 이름은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을 만큼 함부로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의미가 아니었다. 자주 불러본 기억은 없다해도 매번 그 이름을 부를때의 미묘한 머뭇거림과 다소 어색한 부드러움, 또한 부르는 그 자신이나 듣는 당사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해도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감정을 표현하곤 했던 이전과는 달리, 姓까지 붙인 그 이름 석자를 거의 억지로 토해내듯이 이를 악물고 내뱉는 그 모습과 숙였던 고개를 들며 가닥가닥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 새로 반쯤 드러난 가라앉은 그 눈빛은 우혁이 지금까지 봐왔던 이재원이 아니었다. 아마도 안승호의 실물(實物)을 보기 이전이었다면 그 말이 남자의 자존심을 갈가리 찢어놓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도까지 재원을 자극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하나 재원이 전날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를 다만 단편적인 것밖엔 알지 못하고 있었던 우혁으로서는, 자신의 그 말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그 거만한 자존심(自尊心)에 그 어떤 걸로도 회생시킬수 없을만큼 끔찍한 타격 (打擊)을 가했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최종적(最終的)인 반응(反應)으로 지금 재원이 온몸으로 표출해내고 있는 그것은..... ........이미 단순한 분노나 차가움, 살기(殺氣) 따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피부의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오랫동안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달라붙은 앞 머리칼 틈으로 보이는 승호의 눈빛은 조금 전과같이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에일 정도로 짙은 슬픔과 고통이 깊숙히 베어, 비온 하늘처럼 그렇게 잔뜩 흐려져 있었다. 주먹 쥔채로 거울을 짚고 있는 왼손에 감겨진 붕대가 이미 흠씬 젖어들어,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갈가리 찢겨져 아물지 않은 상처로 물기가 스며들어가 심한 통증을 유발시켰지만, 승호가 느끼고 있는 심적고통(心的苦痛)에 비하면 금새 사라질 그런 단순한 육신(肉身)의 아픔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용품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나보지? 칠현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든지간에 입에 담기조차 치욕스러운 그 말의 의미에 화를 내는 것보다도, 승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온몸을 난도질해 버리고 싶은 자학적(自虐的)인 충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언젠가의 연회장(宴會場)에서 드문 색임에도 우혁과 상당히 비슷한 머리색을 발견하고는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길을 주던 승호의 모습에서, 정말 여자의 육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는건지 어떻게 잘도 알아채고는 어처구니없게도 몇몇은 머리색까지 금발로 물들인 채로, 눈에 뻔히 들여다보임에도 대부분 우연한 만남으로 가장한채 시치미를 떼면서 그에게 접근해오는 대담한 여자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로 꽤나 많았다. -...아이~ 않해줄거예요..?.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접근해오는 사교계(社交界)의 정숙한 가면을 뒤집어쓴 방탕한 여인들은 욕구불만(欲求不滿)이 거의 극에 달했을때야만 한번쯤 있을까말까한 하룻밤 상대들이었지만 대용이란 이름도 갖다 붙이기 더러운, 아무 의미없는 잠자리에서조차도 그는 파트너와 실수로라도 키스를 나누는 짓따위는 하지않을만큼 지금까지 단 한번도 냉정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승호가 잠자리에서 파트너들과 키스를 하지 않는 것은 어느새 불문율(不文律)이 되버렸지만, 그것은 쓸데없이 여자들을 애태우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그가 키스라는 행위(行爲)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아......형...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지독한 절제력(節制力)으로 인해 격렬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해도 좋을만큼 지극히 잔잔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에 불과했지만 우혁과 감미로운 키스를 주고 받을때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마치 아기에게 해주는 것 같은 그런 단순한 키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승호를 아찔할만큼 황홀하게 해주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 가냘픈 몸을 품에 안은 채로 마치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붉은 입술의 감촉(感觸)을 생생히 느끼며 그 달콤함을 들이 마실때면, 그런 키스만으로도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볼때면, 그대로 그 자리에 눕혀놓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매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지옥같은 인내력(忍耐力)을 발휘해야만 했었다. 드물긴해도 간혹가다 그 소심한 성격으로 무척이나 용기를 내어 자신의 목덜미에 매달려 수줍게 호응해줄때면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기대감(期待感)으로 희망에 부풀기도 했었다. -........형........흑.......미....안......해.........흐흑....흑..... 거울에 팔을 짚고 수그린채로 있던 강인한 어깨근육이 물결치듯 쉴새없이 경련을 일으키다가 그 파동(波動)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직 나이가 어려 몸이 성숙지를 못한데다 너무 가냘프고 허약해서 또한 너무나도 수줍은 성격 때문에 성에 관심을 갖기 힘들어서 그런거라고, 게다가 형으로만 생각해온 자신을 갑자기 연인으로 대하는게 힘들어서 그런거라고, 단지 그런 이유때문이라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었다. 또한 너무나 그때의 충격이 컸기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는게 결코 쉽지만은 않을거라고 어느정도 미리 짐작하고 있었기에, 초조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인내심을 갖고 스스로를 자제하며 기다리려 했었다. 극도의 억제력(抑制力)으로도 견뎌내지 못할만큼 달아올라 있는 상태라해도 추호도 이성을 잃지않고 최대한 배려(配慮)를 해가며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안으려할때마다, 겁에 질려 잔뜩 경직된 채로 그래도 애써 자신을 받아들이려 노력해보지만 결국 매번 한계에 부딪히며 그대로 끝나야했다. 그럴때면 그 자신이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승호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해 달래는 것도 소용없이 내내 흐느끼다가 결국 참담함을 이기지 못해 몸이 견뎌내지 못할정도로 쉴새없이 애절(哀切)하게 울기만해서, 그 모습이 너무나 가녀리고 애처로워 금새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아 극도로 불안해진 승호는 밀려드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계속해서 애간장만 태워야했다. -.......날....동정해서..... 주먹쥐어진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그대로 뼈를 으스러뜨릴듯이 하얗게 질린 뼈마디가 거세게 거울 위로 짓눌려지며 상처난 손등에까지 무리한 압박(壓迫)이 가해졌다.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조차 많이 해주지 못했을만큼, 또한 조급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굴면 겁에 질릴거라는 것을 잘 알기에 스스로를 억제하며 감정표현을 자제해 왔다해도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거라 생각해왔었다. 키스나 애무를 할 때마다 바짝 경직된채 자꾸 움츠러만 드는 이유가 단지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을 형으로만 보아왔었기 때문에, 연인으로 보는게 쉽지만은 않아서 그런거라고,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설마 우혁이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 줄은, 그런 말도 않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대체.....어떻게......" 뼛속까지 시릴만큼 차가운 물로도 식히지 못할 불같은 고통에 시달리던 승호가 잔뜩 쉬어버린 맥빠진 음성으로 힘없이 중얼거리면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전면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전라(全裸)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물에 흠뻑 젖은채로 전신에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며 피부가 얼어 새파랗게 질려버린 자신의 모습을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승호의 얼굴이 차츰차츰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머리를 세게 처박고는 주먹을 휘둘러 거울을 내리쳤다. "어떻게....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내가 널 어떻게..!!!!" 계속해서 거울을 후려치는 소리도, 거울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바닥으로 떨어지며 부숴지는 소리도, 극심한 고통이 절절이 베어있는 피를 토하는 듯한 고함소리도, 강인한 정신력(精神力)으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와버린 비참한 흐느낌 소리도 세차게 쏟아져내리는 물줄기소리에 뒤덮여 완벽히 흡수된 상태로 욕실안을 가득 메운채 그렇게 처절하게 울리고 있었다. [下-I] "싫어!! 놔!!!!"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냉각된 방안의 기류(氣流)를 다시금 삽시간에 뒤바꿔버리는 심상치 않은 기운(氣運)에 흠칫한 우혁이 본능적(本能的)으로 위험(危險)을 감지하고 피하려 했지만 몸을 채 다 돌리기도 전에 뻗쳐온 팔에 잡혀 반항해볼 틈도 없이 정말 말그대로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 침대 위로 사정없이 내팽게쳐지고만 것도, 심한 현기증(眩氣症)에 비틀대면서도 황급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나려했지만 갈고리처럼 억센 손아귀에 발목을 잡혀 거칠게 잡아끄는 힘에 그대로 딸려가 다시 침대 위로 힘없이 나동그라진 것도, 않그래도 전신에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데다 몇 번의 실랑이로 인해 거의 탈진상태(脫盡狀態)가 되버려 제멋대로 나동그라진 몸을 미처 가누기도 전에 그대로 재원의 무릎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버린 것도,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딜 가려는거야. 원하는걸 해주겠다는데" 힘이라곤 하나도 없이 뼈없는 연체동물(軟體動物)마냥 흐느적거리며 축축 늘어지려는 팔다리를 간간이 내뻗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는 가느다란 몸을 양 무릎으로 조일 듯이 꽉 고정시켜 놓은채,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던 이미 반쯤 풀어헤쳐진 셔츠단추를 하나하나 천천히 끄르며, 발버둥치는 우혁을 내려다보고 있는 재원의 얼굴은 음색(音色)이 없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섬뜩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저리 않비켜?!! 비키란 말야!!!" 벗은 셔츠를 그대로 내던지며 연이어 벨트의 버클을 끌러내는 행동에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린 우혁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몸을 비틀어대도 꼼짝도 못하자, 안간힘을 쓰며 다시 심하게 몸부림을 쳐봤지만 짓누르고 있는 몸은 흡사 단단한 돌덩이라도 된 듯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고 순식간에 알몸이 된 재원이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손을 뻗어 속살이 비칠 정도로 흠씬 젖은 셔츠를 거칠게 거머쥐었다. "싫어!!! 하지마!!!" 일일이 끌러내려는 생각 따위는 아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듯, 젖은 옷감을 우악스럽게 틀어잡고 양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기자 않그래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던 단추들이 압력(壓力)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떨어지며 허공으로 튕겨 날아가버렸다. 연결된 봉제선의 실밥까지 그대로 우두둑 튿어지며 단 한번에 옷 하나를 완전히 걸레조각같이 만들어 버린 재원이 그런 그의 거친 행동에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한순간 얼어붙었다가 조금전보다 더 거세게 발버둥치며 벗어나려는 우혁을 너무나 간단히 제압(制壓)하며 몇 번의 손짓으로 삽시간에 나머지 옷들을 다 벗겨내버렸다. 눈앞에 훤히 드러난,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는지 아니면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저항(抵抗)을 포기해버린 듯이 몸부림을 멈추고 잔뜩 구겨진 시트위로 이내 힘없이 늘어져버린 나신을, 눈을 감고 있어도 피부가 따끔거릴정도로 강렬한 시선(視線)이 느껴질만큼, 자신의 무릎사이에 끼여 축 늘어진 나신을 수치심(羞恥心)을 일게 할정도로 꽤나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점점 밑으로 시선을 내리뜨리던 재원이 자조어린 듯이 입가를 비틀며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즉히 중얼거렸다. ".......현란하군, .....그자식 눈뒤집힌 꼴을 봤어야 하는건데" 백설(白雪)처럼 하얀 천 위에 꽃수라도 놓은 듯, 시릴 정도로 하얀 피부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두드러져 보이는 붉은 자욱들이 낙인(烙印)처럼 빼곡하게 찍혀있는, 누워 있는 시트보다도 더 하얘서 투명할정도로 맑게 빛나는 눈앞의 물기젖은 나신은 너무나 애처로울 정도로 가냘퍼서 더욱 순결하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결함위로 붉은 꽃물을 들인듯한 선명한 낙인(烙印)들까지 더해지니 너무나도 선정적(煽情的)으로 보였다. "이 나쁜 자식!!!!!" "....그 표정이 일그러지는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면.." 수치(羞恥)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버린 우혁이 노여움으로 인해 한층 더 짙어진 암청빛 눈망울로 재원을 노려보며 전신을 파들파들 떨다가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표정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거만한 낯짝을 후려갈기려 했지만, 팔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억센 손에 붙들려 머리 위로 짓눌린 채 옴짝달싹도 못하자 분을 이기지 못해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가 또다시 고스란히 잡혀 재원의 한 손에 양 손목이 결박된 상태로 시트 위에 고정되 버리고 말았다. "놔!! 이 나쁜 자식아!!! 놔!!!" ".......이 순간이 더 즐겁겠지.." 상황만 달랐다면, 물기가 흥건히 남아 있어 매끄러운 감촉에다 촉촉히 젖어 약간 비릿하면서도 신선한 살내음까지 물씬 풍기는 알몸끼리 맞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관능적(官能的)인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절로 달아올랐을테지만 지금같이 심하게 몸부림을 쳐댈때마다 물기젖은 맨 살갗들이 쉴새없이 부딪히며 매끄럽게 마찰을 일으킴에도 두 사람 모두 쾌감같은건 느껴지지도 않는지 전혀 흥분한 기색(氣色)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다만 분을 참지 못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계속해서 들려올 뿐이었다. "이것 놔!! 저리...!!!" 성난 외침을 그대로 막아버리며 입안으로 들어온 혀의 움직임은 놀랍게도 거칠고 난폭할거란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부드럽고 섬세해서 예기치 못한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우혁이 몸부림을 치는 것도 잊을 정도로, 그렇게 달콤하고 애태우는 듯한 키스가 끊임없이 계속되자 그 부드러움이 어느새 전이(轉移)가 됐는지 분노로 바짝 경직되 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결에 손목과 몸을 조이던 결박이 풀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오직 입안을 샅샅이 헤메다가 자신의 혀와 뒤엉켜 빨아당기는 혀의 달콤함과 격렬함에 온신경이 쏠려 있다가 몸위를 덮으며 묵직하게 짓눌러오는 무게와 매끄러운 살갗의 감촉을 그제야 깨닫고는 다시 잔뜩 긴장하며 짓누르고 있는 몸을 밀치려했다. 하나 이를 알아챈 재원이 더욱 농도짙게 입술과 혀를 놀리며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지긋이 눌러가면서 부드럽게 애무하는 바람에 어느새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져 그대로 목덜미에 팔을 둘러 끌어안다가 손가락에 와닿는 젖은 머리칼을 휘감아 당겼다. 달콤한 키스가 끊임없이 지속되며 더욱 깊어질수록 간간히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목덜미에 감은 가느다란 팔에 더욱 힘을 줘 강인한 어깨에 매달리면서 저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진 우혁은,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상대방을 그렇게 키스에 열중하게 만들수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로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재원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내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저히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하아.......하아...." 욕실안에서와 같은 그런 격렬함은 없었지만 그에 버금갈정도로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촉촉한 키스와 그 사이사이 쉬지않고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는 부드러운 손길로 인해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잊을 정도로 열에 들떠 정신이 흐릿해진 우혁은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내리뜨려 실크같은 피부를 쓸어가며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재원의 얼굴 위로 한순간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도 전혀 알아채질 못했다. "......그..만........뭐?! 뭐하는 거야!! 하..아앗!!!" 온몸을 쓰다듬으며 키스하는 손길과 입술의 감촉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은 어느새 거의 다 잊어버릴 정도로, 몸이 흐느적거리며 기분이 나른해지려할때 어느 순간 갑자기 예민한 살갗에 와닿는 숨결에 놀라 정신을 차린 우혁이 재원이 뭘하려 하는지를 뒤늦게 알아채고는 새파랗게 질려 발버둥쳐 벗어나려했다. "....싫.......읏......그만해!! 하악!!" 하나 평소때도 우혁에겐 조금 버거웠던 무게가 지금같이 거의 녹초상태(綠草狀態)에선 갑절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리인지라 그대로 짓눌려 꼼짝도 못한채 무방비하게 재원의 입술과 혀에 농락(籠絡)당하며 순식간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전신의 혈관을 꿰뚫으며 치달리는 전율어린 쾌감에 입술을 짓깨물며 참으려해도 이내 숨막히는 신음성을 토해내야 했다. ".....아......읏...아...아윽!! 그만...그만해!!!" 처음 화장실에서의 그 순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단한번도 이런 식으로 한 적은 없었는데 그건 그럴려고 하기도 전에 그때의 경험만으로도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우혁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며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만.......아......아읏!!!! 놔!!! ......제..발...읏.....그만......제발 놔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잔뜩 힘이 들어가 걷어찰 듯이 뻗치며 경련을 일으키는 우혁의 다리를 꽉 틀어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 놓은 것과, 갈수록 더 격렬하고 집요하게 놀려지는 입술과 혀의 애무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벗어나려다가 다시 전율하며 경련을 일으키는 하얀 나신의 떨림, 끊어질 듯 하면서도 쉼없이 예민해진 귓속으로 파고드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한, 애끓는 듯한 신음소리와 마침내 한계에 다다라 절규에 가까운 울음섞인 애원소리를 놓치지 않고 생생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이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쾌락을 주려는 목적보다는 잔인하게 괴롭혀주고 싶은 복수심리(復讐心理)가 더 크게 작용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참지마" ".......윽...제.....발....그..만........아....아악!!!!" 시트자락을 움켜쥔 손가락에 마비가 올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가 빳빳하게 경직된채 미칠듯한 쾌감과 불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땀으로 흥건히 젖은 등허리를 활처럼 휘며 경련을 일으키다 다시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봤지만 내내 일정한 정도로 가해지던 자극(刺戟)이 갑자기 더욱 거세지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한 우혁이 비명을 내지르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진이 다 빠져 그대로 시트 위로 축 늘어져버렸다. 차라리 생살을 찢어놓는 고통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이성으론 견뎌내지 못할 쾌감에 몸부림치며 쉴새없이 신음소리를 내뱉다가 결국 참지 못한 순간, 본능에 충실한 육체(肉體)는 충족된 욕구(欲求)에 그순간은 만족했을지 몰라도,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가는 정신은 스스럼없이 쾌락에 져버린 나약한 육신에 대해 심한 모멸감(侮蔑感)을 느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미칠듯한 쾌감을 안겨주며 사정없이 몰아붙인 그 당사자는 정작 숨결하나 흐트러져있지 않다는 것을 완전히 이성을 되찾아버린 정신이 민감하게 느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밀려드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해 그 주인을 심한 낭패감(狼狽感)과 자괴감(自愧感)에 빠뜨리고 말았다. ".....윽...........흑.......이.......나....쁜...." "........왜, 그 놈은 이렇게 않해주나? .....설마...그럴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몸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짓깨문채 수치심에 그대로 터질것만 같은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던 우혁은 다시 위로 거슬러와 자신의 귓속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게 속삭이는, 마치 은밀한 비밀얘기라도 하는듯이 귀에다 바짝 입술을 갖다 대고 달콤할 정도로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대로 완전히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뭐....?" "......너도 즐겼을텐데? .....그 놈이 해주는건 다해줄테니 말만하라고.. ........사양치않고 봉사해줄테니"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만큼 지독하게 상스럽고 모욕적인 말을 들어버린 우혁은 이상황과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키스와 애무, 그리고 방금전의 그 행위(行爲)가 전부 의도적(意圖的)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놀아나버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완전히 시체처럼 헤쓱하게 질려버린 우혁이 치욕감(恥辱感)을 이기지 못해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그대로 재원을 치려했지만 이전처럼 억센 손아귀에 결박되어 다시 머리위로 고정되버렸고 몸부림쳐 피할새도 없이 어느결에 다시 재원의 무릎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 더러운..!!!! 이 나쁜 자식!!!!!!" ".......네가 먼저 시작했어" 모욕감과 분노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려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느라 쉴새없이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신 터져나오는 여자의 비명(悲鳴)에 가까운 울음섞인 외침과는 달리, 간간히 그에 호응해 들려오는 것은, 그와는 상반될 정도로 지극히도 침착하고 냉정한 톤의 저음(低音)이었다. "놔!! 이 나쁜 자식아!!!" ".........아예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하나 조용하다고는 해도 방안의 기류(氣流)를 한번에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정도로 그 음성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이제 겨우 고 3이 된 소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절대 범인(凡人)의 그것이 아니란 걸 깨닫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한순간에 사람의 심기(心氣)를 제압해버리는 점이 있었다. "놔!!! 놓으란 말야!!!!" ".....시작은 네가 했으니" 듣고 싶지 않아도 귓속으로 여지없이 파고드는 그 저음(低音)의 톤이 한 번씩 들려올때마다 갈수록 점점 더 지독하게 가라앉다가 드디어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 일렁이는 위험한 기운의 정도(定度)는 갈수록 점점 더 가중되는 것을 극도로 곤두선 신경과 예민해진 감각(感覺)으로 생생히 느끼던 우혁이, 그 기운이 급속도로 배가(倍加)되는듯 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여전히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일부러 내내 피해왔던 흑요석(黑曜石)처럼 검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순간, 아니 이제는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 눈을 바라본 순간, 그대로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안색(顔色)이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끝내는건 내가 한다" 우혁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것은 평소 그가 보아왔던 웬지 놀리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의미모를 빛이 곁들여진 조소(嘲笑)섞인 나른함도 아니었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열에 들떠있던 환희(歡喜)의 순간에도 어느만큼 적정한도(適定限度)의 냉정(冷情)은 유지하고 있던 열기(熱氣)섞인 격렬함도 아닌, 섬뜩할 정도로 무감각(無感覺)하게 정지된 눈동자였다. "......그러니....장난은 이제 그만두자고" [下-II] 어린 시절 내내 짖궂은 놀림의 주원인(主原因)이었던, 베일이 걷혀져 있는 사각기둥의 침대 모서리 끝에 걸터앉아 기둥하나에 몸을 기댄채로, 반쯤 열려진 방문으로 시선을 둔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칠현의 모습은 방금 전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승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 계집애 아냐!!!....우..으....으아앙!!! 승오엉아아!!! 현이가아.... 사실은 대부님이 선택한 것들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심술궂은 마음에 완전히 계집애 취향이라고 생긴대로 논다며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놀림감이 되어, 울음보를 터트리게 만드는 걸로 시작해 형에게 혼나는 걸로 끝마무리를 짓곤 했던 어린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장식하는 그 놀림의 대상들은, 굳이 방안을 둘러보며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기저리 널려 있어 잊고 있던 추억(追憶)을 다시금 회상(回想)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애들이........끅.......나.......녹색눈알 가진......흑.....도..깨비래........ 칠현은 7살, 우혁은 8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 입학식 당일날도 아파서 가지 못하고 몇일 후나 되서야 처음으로 등교하게 된 날, 기대감에 들떠 있던 그 모습이 하교때가 되서 교실로 찾아가보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짐작도 않갈 정도로, 얼굴은 눈물콧물로 뒤범벅이었고 쉴새없이 눈물을 흘려내는 암청빛 눈망울은 잔뜩 충혈되어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나이는 1살 더 많은 주제에 오히려 자신이 더 나이가 많은 듯한 착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울보에다 몸도 약해 짖궂게 놀려도 반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승호형에게 맨날 일르기만 하는 바보였지만, 가끔가다 자신이 형같이 잘 돌봐줘야 한다고, 오히려 자신이 못 울려서 안달인 악동(惡童)인 주제에 그런 기특한 생각을 간혹가다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여려보이기만하던 우혁이었다. -.....난.....왜 머리랑 눈이.......검은색이 아냐...? 자신의 칙칙한 검은 머리칼과는 다른, 태양처럼 밝은 머리칼이 또한 자신의 까만 눈과는 비교도 않될정도로 맑고 투명한, 초록물감을 들인듯한 눈동자가 속으로는 너무나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심술맞게 계집애같이 생겼다고 놀려댔던 그 모습이 자신이 아닌 딴 놈들이 울려서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자, 꼬마칠현은 오직 자신만이 놀리고 울릴 권리가 있는 것을 감히 건드렸다는 심정에 주체 못할정도로 분기탱천(憤氣　天)하고 말았다. 동시에 7살짜리 어린 칠현은, 어린 마음에도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는 심하게 상처받아 살갗이 벌개질 정도로 연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빈 교실에 쪼그리고 앉은채 퉁퉁 부은 눈으로 처량맞게 울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신을 보고는 서러움에 울먹울먹대는 8살짜리 우혁을 마치 자기가 형인것처럼 달래주면서 앞으로는 절대 울리지 않겠다고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었다. -현아아!! 같이 가아!!! 으...으..아앙!!!! 현아아!!!! 뜬금없이 왜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다 그대로 자신을 놔두고 가버릴 것만같자 얼굴에 열꽃이 필 정도로 빽빽 울면서도 갈수록 더 빨라지기만 하는 걸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넘어질 뻔하면서도 약한 다리로 쫓아오려 애쓰는 금발머리 꼬마의 모습이 떠오르자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과거 속을 헤매고 있던 칠현의 입술 틈을 비집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혁에게 그때 당시의 기억은 남아있지도 않을테지만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하루의 일과가 자기를 놀리는 걸로 시작해 울리고 못살게 구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느끼는 것만 같던 그 꼬마악동이 왜 몇일동안 내내 잠잠하기만 하다가 갑자기 심술이 한꺼번에 폭팔해버렸는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단 하루 갔다오고 나서 몸져누워버려 한동안 앓기만하다가, 겁내면서 가기 싫어하는걸 억지로 끌고와서는 혹시나 또 놀림을 당하고 있는게 아닐까싶어 물어뜯을 기세로 단단히 벼르고 찾아가본 교실에서, 몇일 사이에 어떻게도 그렇게 달라질수가 있는지 언제 놀리고 언제 운 사이냐 싶게 머리칼이랑 얼굴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고만고만한 애들한테 둘러싸인 채로, 수줍어 볼을 사과같이 빨갛게 물들인채 암청빛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활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순간, 칠현은 앞으로는 절대 울리지 않고 잘 돌봐주겠다고 다짐했던 맹세따위는 아득한 기억저편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악동기질이 다분하던 칠현도 한가지 사건으로 인해 한바탕 곤욕을 치뤄야했던 후로는 더이상 우혁을 놀리거나 장난치지 않게 되었는데, 아직은 대부님이 생존해 계시던, 같은 학교로 진학해 반까지 한반이 되었던 중학교 1학년 초반 무렵쯤이었을때였다. -승호혀엉~ 나 이제 않아프단 말야! 칠현이도 같이 가잖아! 소풍한번 제때 가본적 없어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대부님과 형이 않된다고 극구 반대해도 울며불며 밥도 않먹는 통에 결국 포기하고 극기훈련에 보내게 되었는데, 웬일로 않하던 생떼까지 부려가며 고집스레 따라나선 주제에 준비운동이랍시고 고작 뜀박질 몇 번한걸로 다 죽어가는 그 모습이 교관이 보기에도 너무나 한심했던지 결국 훈련마저 빼줘버렸다. -않울면 돼잖아! 자꾸 그러면 나 화낼거야! 기껏 생각해서 만류해줬더니 않그래도 낮의 일로 창피해하다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여겼는지 다시 고집을 피워 그날 밤 담력훈련에 따라나섰지만, 처음 호기있게 큰소리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내팽게쳤는지 금새 잔뜩 겁에 질린채로 자신의 뒤에 바짝 서서 총총걸음으로 따라오는 그 모습에, 다시금 장난기가 발동한 칠현은 그자신도 조금은 으시시한 무덤가 옆을 지나치게 되자 우혁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숨어버리고 말았다. -칠현아, 어딨어....흑....나....무서워.....현아....... 않그래도 원체 지독한 겁보인데다 그나마 옆에 있어 조금은 안도하게 해줬던 자신마저 갑자기 없어져버리자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채 울먹이며 자신을 찾는 그 모습이, 그순간엔 어찌나 웃겨 보이던지 숨어서 보는내내 소리죽여 웃던 칠현은 얼마안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청색증(靑色症)에 가까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린채 자신을 찾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제대로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모습에 그제야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칠현이 숨어있던 곳에서 막 나가려할때였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나자 않그래도 공포심(恐怖心)이 거의 극에 달해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우혁이 그 소리에 바짝 신경이 곤두서 있다가 하필이면 바로그때 갑자기 뭔가가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버려 경기일으킬정도로 놀란 나머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다 결국은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혁을 들춰업고 부리나케 산을 내려와 결국 근방의 병원으로 실려간 후에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우혁의 옆에서, 칠현은 후회와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채 뜬눈으로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다. -......네게 정말 실망했다. 뭐가 그리도 걱정이 되었는지 다음날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가 이내 소식을 듣고는 병실에 누워있는 우혁의 모습을 보고 일의 진상(眞想)을 알게된 승호는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침묵만 지키다가, 그런 심상치 않은 모습에 조바심을 치던 칠현의 심장을 한순간에 얼려버리고도 남을정도로, 조용하지만 싸늘한 음성으로 그 말 한마디만 내뱉고는 그대로 입을 굳게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 아무리 심한 장난질을 쳐도 그냥 가볍게 혼나는 것에만 그쳤을뿐, 미국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잘 돌봐주며 항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모습밖엔 본 적이 없어 성질(性質)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줄만 알았던 그 형이, 유순(柔順)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는 말이 정말 맞는건지 한순간에 지독히도 차갑게 돌변해버리자 칠현은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괜찮니, 혁아? 침대기둥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있던 칠현의 고개가 그대로 밑으로 숙여졌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원래 승호의 성격이 무척 다정다감한지라 몸이 너무 허약해 제대로 나가 놀지도 못하는게 안쓰러워서 동생처럼 잘 대해 주는거라고, 굳이 승호만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혁에게 그렇게 잘해줬기 때문에 평소에도 그냥 그렇게 생각해왔었지 그것을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그것에 대해 일부러 생각해 본적도 없었을 정도로 그렇게 지극히 당연한 일로만 여겨왔었다. 하나 정말 찬바람이 불 정도로 싸늘해진 승호의 모습에서, 자신이 옆에 있다는 것도 어느새 잊은듯, 잠에서 깨어난 우혁이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채 가만히 지켜보던 그 모습에서, 한동안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다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그제야 승호를 발견한 우혁에게 잔뜩 쉰 음성으로 속삭이듯이 말하던 그 모습에서, 식은땀이 나 이마에 달라붙은 몇가닥의 백금발을 조금 머뭇거리다 손가락을 뻗쳐 한올 한올 가만히 쓸어 올려주던 그 모습에서, 칠현은 그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기운(氣運)을 감지해야만 했다. 원체 그나이 또래보다 조숙(早熟)하고 지나칠 정도로 영민(英敏)했던 칠현이 그 모습과 그 분위기에서 느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형이 우혁을 자신과 같은, 그런 어린 동생으로서만 보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른 상대나 찾아보시죠. 대학초년생이면 미팅도 하고 MT다 동아리다 술자리다해서 어울려 다니느라 바쁜게 지극히 정상인데 고리타분하게 책만 들여다보고 있거나 병석에 누우신 대부님을 보좌해 회사일을 처리하며, 특별한 친분관계도 즐기는 취미생활도 하다못해 술담배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지루할 정도로 균일한 일상(日常)만 반복하는 승호의 모습은 대체 무엇에서 즐거움을 얻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칠현 자신이 보기에도 지독할만큼 엄격하게 절제된 것이었다. 그 자신은 결코 알려주지 않았을게 뻔한, 여자들에게서 걸려온 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전화를 받으며 두 번 다시 걸 엄두도 내지 못할만큼 경멸에 가까운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하면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끊는게 아닌가 의심이 들정도로 받자마자 그대로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그 모습은,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던 승호의 모습이 아니어서 그때까지도 확실치않고 내내 미심쩍어하기만 했던 의심(疑心)을 다시금 확고하게 해주었다. -..........형한테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니? 그 언젠가 속마음을 숨긴채 넌지시 묻는 자신의 물음에 그냥 피식 웃다가, 옆의 쇼파에 누워 얘기를 듣고 있던 우혁도 궁금한 듯이 같은 질문을 하자 잠시간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음성이 약간 가라앉은 톤이라는 것과, 답변이 아닌 또다른 질문이 뭘 의미하는건지도 모른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쓸쓸한 눈빛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칠현은 이후에 일어날 일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우습지도 않게 자신의 예상 그대로, 바로 그 다음날부터 볼때마다 얼굴이 바뀌는, 한눈에도 연상이란 것을 알수있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의 여자들이 끌고 온 자가용을 탄 채 집을 나서서 밤늦게 들어오거나 않하던 외박까지 가끔 하기 시작한 승호의 몸에 희미하게 베인 술내음과 향수냄새에서, 애써 않그런 척하며 특히 우혁의 앞에서는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질 않았지만 점점 메말라가는 듯한 그 모습에서, 칠현은 우혁에 대한 승호의 감정이 어떤 류의 것인지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네 짐작대로다... 그 끔찍한 사건 이후 겉모습만 그대로이지 인간의 본질(本質)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듯한 승호의 모습에서, 심신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듯 그렇게 전형적인 자폐증(自閉症) 환자가 되버린 우혁을 조금이라도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에 사활(死活)을 건듯한 모습에서, 점점 심해져만 가는 자폐증에다 자꾸만 망각 (妄覺)의 늪에 빠지는 듯 서서히 퇴행(退行)해가는 우혁의 기억(記憶)을 되돌려 놓을 방법으로 선택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충격요법(衝擊療法)에서.... 칠현은 의심(疑心)과 추측(推測)만이 아닌 확고한 믿음으로, 자신의 형이 우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시체처럼 헤쓱해진 승호에게 이미 답변을 알고 있는, 쓸데없는 추궁 끝에 그 감정이 무엇이란 것을 드디어 결국은 확인해버린 칠현은 그순간 배신감(背信感)에 가까운 허탈함이라고해도 좋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安堵感)이라고해도 좋은, 그렇게 그자신도 뭐라 확실하게 정의내릴수 없는 그런 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칠현도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나자 친형제나 다름없는 우혁와 승호의 관계를, 아니 사람들에게 절대 인정받지도 축복받지도 못할, 당당히 드러내놓고 하지도 못할 그런 사랑을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형이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쉽지만은 않았었다. 하지만 형이 얼마나 오랜기간 우혁을 사랑해왔는지를, 그 감정의 정도가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간절하고 절박하다는 것을, 아니 어느 누구든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이라 통칭하는 단순한 연애감정 (戀愛感情)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마음이 얼마나 지고지순(地高至純)한 것인지를 결국은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우혁이 형을 연인으로 받아들인 것을, 겉으로야 어떻든 속으로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워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힘없이 밑으로 떨궈져 있던 칠현의 검은 머리칼이 전신에 일어나는 희미한 파동(波動)에 의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조금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평안했던 나날들이 언제부터 한순간에 헝클어진건지, 언제부터 이렇게 어긋나버린건지 칠현의 명석한 두뇌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이곳에 우혁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도 너무나 잘알고 있었지만, 그의 정지되버린 사고(思考)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아예 거부하고 있었다. 18년이란 긴 시간을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한데 부대끼며 커오는 동안 칠현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니 오히려 연인사이였던 승호보다도 더 우혁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장우혁'이란 한 인간의 심성(心性)과 본질(本質)을 뼛속까지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해 왔었다. 하나 차라리 자신이 아프면 아팠지 남에게 상처하나 주지 못하는 그 여린 우혁이,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끼칠거라는걸 잘 알고 있을텐데도 이런 짓을 했다는 것에, 또한 그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으론 도저히 상상치도 못할 일을 저지른게 분명한 이 눈앞의 결과는..... 이젠 어느정도 평정을 되찾아버린 승호보다도 오히려 칠현에게 더 패닉상태에 가까운 충격을 안겨주고 말았다. ".............사....랑...하는거니....?" 지금까지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장난이었다는 것을 입증(立證)이라도 하려는 듯이, 잡고 있던 손목뼈를 그대로 부러뜨릴듯이 더욱 거세게 틀어쥐며 시트 위로 내리누르고, 몸을 고정시켜 놓고 있던 양 무릎에 더해진 힘은 한순간 숨이 턱 막힐정도로 허리와 늑골(肋骨)에 심한 압력(壓力)을 가하며 무지막지한 기세로 죄어들게 했다. 그렇게 아예 저항(抵抗)의 소지(所持)를 완전히 없애버린 후, 연속으로 받은 心的인 충격(衝擊)과 육체에 가해진 무리한 압박(壓迫)으로 인해 소리내어 비명도 못지를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버린,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창백한 얼굴을 덮고 있던 젖은 백금빛 머리카락을 거친 손길로 움켜쥐며, 그대로 굳게 닫혀 있는 붉은 입술로 사납게 입술을 부딪혀갔지만 이를 앙다물고 벌리지 않자 무감동(無感動)하게 식어버린 눈빛에 한순간 냉기가 스쳐지나갔다. "......입벌려" 사람이 아예 달라져버린 듯이 삽시간에 뒤바껴버린 재원의 살벌한 행동에 않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더한층 헤쓱해지며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때껏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어조가 내뱉은 명령(命令)에, 연이은 타격으로 심하게 상처받아 흑빛으로 변해버린 눈망울이 금새 물기로 젖어들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얼른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 했다. 아무리 먼저 잔인하고 표독스런 말로 그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打擊)을 가했다해도 마음 깊숙히 담고 있던 그 상대에게, 그것도 생애 처음 진심으로 원한 상대에게 하는 것이라고는 이미 도가 지나쳤을 정도로, 방금 전 의도적(意圖的)이었던 그 모습뿐만 아니라 우혁에게 보여줬던 이전의 모습들까지도 다 거짓이 아니었나하는 의심(疑心)이 들지 않을 수 없을만큼, 지금 재원이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하나같이 다 우혁같이 여린 마음의 소유자(所有者)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만큼 그렇게 냉혹할 정도로 무자비(無慈悲)하기 짝이 없었다. 극도로 곤두선 신경(神經)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는 것처럼, 분명 그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공기가 험악해지고 있었지만, 평소의 그 여린 성격은 대체 어디다 내버렸는지, 창백하게 굳은 우혁의 얼굴 위로 한순간 단호한 빛이 떠오르다가 입술이 하얗게 질릴정도로 더욱 세게 짓깨물며, 약간 습윤히 젖어든 눈을 들어 재원을 직시(直視)하는 것으로 그 명령에 응수(應酬)했다. 냉정(冷情)을 잃지않아 오히려 더 광폭(狂暴)해 보이는 행동을 할 때부터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우혁의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상처받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부터 시작해 이후의 표정변화 (表情變化)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내 은밀히 관찰하고 있던 재원의 무감각(無感覺)한 표정 위로 한순간 의외라는 듯 놀람의 빛이 떠올랐지만 우혁이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금새 사그라들고 말았다. ".......상황파악도 못하는 바보군" 도발하듯 정면으로 직시해오던 단호한 눈빛이 그 말을 듣자 한순간에 흐트러지며 이내 발끈한 나머지 창백한 얼굴 위로 붉은기가 스쳐 지나면서 반격하려했지만, 험악함이 약간 누그러진 듯한 빈정대는 음성에도 불구하고 장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는듯 두번째 경고(警告)는 아예 하지도 않고 머리칼을 틀어쥐고 있던 오른손을 그대로 내리뜨려 연약하기 그지없는 턱뼈를 손가락만으로 짓눌러 압력을 가하는 재원의 눈빛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냉정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잘도 날 대용으로 이용하셨겠다..." "....아..윽!!!"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힐 정도의 아픔으로 인해 새된 비명과 함께 오기 (傲氣)로라도 꼭 다물려있던 입술이 저절로 벌려지는 순간, 틈을 놓칠새라 그대로 입술을 덮치며 밀어넣은 혀로 거칠게 입안을 헤집어놓다가 이내 목덜미로 옮겨 묻어있는 차가운 물기를 간지럽히듯이 혀로 훑어내려가며 부드럽게 닦아주는가 싶더니 내가 언제 부드러웠냐 싶게 살을 베어물고는 아플정도로 세차게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하아....아...아파.....아읏!" 단 한번만으로도 살갗 위에 피멍이 들 정도의 강한 흡입(吸入)에 아파서 비명을 지른 것도 잠시, 흡사 고양이가 자기 털을 목욕하는 것처럼, 몸에 맺혀있는 물기를 훑듯이 혀로 닦아가며 점점 내려가다 가슴 위를 애무하듯 간지럽히던 재원이 짓눌려 있는 몸의 떨림을 느꼈는지 다시금 세게 입술을 짓눌러 빨아들이는 바람에 강하게 자극을 가하는 뜨거운 입술과 혀의 감촉으로 인해 전신을 치달리는 야릇한 감각을 참지 못한 우혁이 다시 잡힌 손목을 연신 비틀며 빠져나가려 애썼다. "아...읏.. 놔!!........윽....이것....놔!!..하......악!!" 하나 턱을 잡고 있던 차가운 손가락이 순식간에 하체로 내려가 허벅지 안쪽 연한 살을 배회하며 쓰다듬는 순간, 위험(危險)을 감지하고 온몸을 바짝 경직시키며 벗어나려하기도 전에 그대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온 손가락에 아랫도리를 잡혀 또다시 희롱(戱弄)당하기 시작했다. "..읏!!!...나쁜자식!!...아......아윽!!! 놔!!!!" 열에 들떠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가 분노와 모욕감으로 싸늘하게 식어버렸던 전신을 다시금 한순간에 달아오르게 만들 정도로 재원의 애무는, 게다가 붕대 의 그 꺼칠한 감촉까지 곁들여진 손길은 이상야릇하면서도 미칠듯한 쾌감(快感)을 안겨주었지만, 워낙 심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데다 완전히 장난감 취급하는 행동으로 인해 쾌락 때문이 아니라 분노로 검게 짙어진 눈을 들어올리던 우혁은, 어느새 가슴에 댄 입술을 떼고 농도짙은 애무에 따라 변하는 표정을 감상이라도 하는듯이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수치심(羞恥心)이 한꺼번에 폭팔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질듯한 분노로 되려 힘이 생겼는지 발악에 가깝게 몸부림을 치며 저항(抵抗)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재원에겐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이 나쁜 자식!!!! 아...아읏!!! 죽어버려!!!!!" "......자존심따윈 버려" 아무리 대단한 자존심(自尊心)의 소유자라 해도 단 한번에 시궁창으로 처박아 짓뭉개버릴 수 있을 정도로 조소(嘲笑)어린 느릿한 저음(低音)의 여운(餘韻)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대로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이내 다시금 입안을 유린(蹂躪)하는 동시에 아랫도리를 쉴새없이 농락(籠絡) 하던 손을 그대로 매끄러운 살갗 위로 미끄러뜨려 한번 스쳐 지나갈때마다 흰 피부가 벌겋게 물들 정도로 거친 애무를 하면서, 약한 피부 위에 다시 새로운 낙인(烙印)을 찍듯 뚜렷한 손자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도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을 전해주었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주인만큼이나 잔인한 입술이 베푼 키스는 오직 치욕(恥辱)과 고통(苦痛)밖엔 주지 않아, 역시 그 주인만큼이나 달콤하지만 연약하기 짝이 없는 또 하나의 입술을 삽시간에 부풀어오르게 만들며 상처를 내어 핏물까지 베어 나오게 만들었고, 전신(全身)을 애무하는 손길은 우악스럽기 짝이 없어 연약한 피부 위에 찍힌 벌건 자욱들을 금새 푸른기가 도는 멍으로 바꾸고 말았다. 입술을 떼내기 이전부터 혀 끝에 느껴지던 비릿한 피맛으로 상처가 났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고의적(故意的)인 듯 더욱 세게 입술을 짓눌러 난폭한 키스를 멈추지 않던 재원이 한참만에야 입술을 떼어내 심하게 부풀어오른 붉은입술 위에 난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병주고 약주는 것처럼 혀를 내밀어 핏물을 닦아주었다. "하악...하아.....나..쁜....윽......" 하나 결코 좋은 의도(意圖)가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도 눈치챌 수 있을만큼, 가쁜 숨을 토해내는 입술에서 혀를 떼내지 않고 계속해서 할짝거리던 재원이 잔인하게도 따가운 상처를 일부러 덧내려는 듯 이빨로 간간히 깨물어대다가 다시 세게 입술을 짓눌러 연약한 살갗을 자극시키며 더욱 난폭하게 혀를 놀리면서도 내내 눈앞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입 속을 샅샅이 훑어가던 혀가 움츠러드려는 혀를 휘감아 거칠게 빨아당길 때마다, 가지런히 내리뜨려져 있던 기다란 속눈썹이 흠칫거리며 떨리더니 입술 위의 상처에 자극(刺戟)이 더해져가는 것과 비례해 점점 간헐적으로 심하게 떨리면서 결국은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순간,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 묘한 빛을 발하더니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벅지를 지긋이 눌러가며 애무하던 손을 시트 밑으로 밀어넣어 마치 치한이 여자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듯이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둔부를 그대로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순간 눈물이 맺혀있던 속눈썹이 그대로 번쩍 들려지며 분노와 수치심에 이젠 빛은 찾아볼 수도 없는 눈망울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시선을 떼질 않는건지 눈을 감고 있어도 따갑게 느껴왔던, 내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노려봤다. 하나 움켜쥔 것도 모자라 그야말로 욕실에서 얼은 몸을 녹여주려는 의도로 어루만졌던 것과는 차원이 틀린 치욕스런 그 손길과, 입안을 거칠게 헤집어 놓는 혀와 입술의 움직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음흉함도 조소도 경멸도 아닌 여전히 변함없는 그 눈빛의 무심함을 발견한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눈물을 흘리며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떼내지도 못하고 밑에 짓눌린 채 거칠게 유린(蹂躪)당하던 입술이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울먹거리듯이 심하게 움찔거리는 것을 와닿는 감촉으로 생생히 느끼는 순간, 재원은 그제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짙붉게 충혈된 입술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내며 헤쓱하게 질려버린, 땀과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연한 귓볼을 물으며 여전히 조소섞인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그 기세는 대체 어디 갔어.......음? 장우혁군" "....하아....하아.......나...쁜...흑.........윽.." 그야말로 더러운 창부(娼婦) 취급이나 다름없는 지독하게 모욕적(侮辱的)인 언사(言辭)에 대한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뒤이어 가해진 폭력(暴力) 이나 다름없는 거친 애무와 난폭한 키스로 인한 心的인 충격도 더할나위없이 컸지만, 그것보다도 우혁은 고의적(故意的)으로 수치와 고통을 가하려는 의도 (意圖)로밖엔 볼 수 없는 재원의 잔인한 행동들에 더 심한 상처를 받고 말았다. ".......흑.....흐흑........윽..." "........겨우 이정도로 울다니........한심하군" 쉴새없이 연속으로 받은 너무나 큰 충격에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해버려, 그나마 오기로 버티고 있다가 끝내 심신이 아예 탈진되버린 우혁은 고개를 돌려 위로 쳐들려진 자신의 팔과 시트 사이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는 상처난 입술을 다시 짓깨물며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 애썼지만, 이내 입술 틈을 비집고 흐느낌이 새어 나와버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며 연신 흐느끼느라, 허공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지금까지의 조소어린 저음이 아니라 목이 졸린듯 심하게 잠겨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질 못했다. 흐느낌을 죽이려고 깨물려 있는 피맺힌 붉은 입술과 눈꼬리를 타고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시트까지 적시는 것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재원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한순간 뭐라 표현못할 이상야릇한 빛이 떠오르더니 무슨 생각인지 움켜쥐고 있던 양 손목을 놔주고는 가느다란 허리를 아예 으스러뜨릴려던 의도가 아니었나 싶을만큼 갈수록 더욱 거세게 죄어대고있던 무릎을 떼어내 그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방비(無防備)한 상태로 흐느끼며 엎드려 있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하얀... 아니 이제는 흰색보다 더 많은 부위를 차지하는 울긋불긋한 자욱들로 인해 더 애처로워 보이는 나신을 침대 옆에 선 채 내내 응시하며 검은 실크가운을 걸치던, 엉망으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있는 재원의 삭막할 정도로 굳은 얼굴에서, 희미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올때마다 무감각한 표정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다소 지친 듯한 기색(氣色)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다. "...윽........흐.윽......." 감각(感覺)이 마비될 정도로 옥죄던 손목의 결박(結縛)이 풀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만큼 옴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없어지자 우혁은 이내 시트 위로 엎드린 채 팔에 얼굴을 묻고는 그래도 한가닥 남은 자존심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울음을 참으려하던 중에, 옆으로 비켜난 재원이 몸을 일으키는지 한순간 침대가 출렁이다가 흔들림이 멈추자 온 신경 (神經)은 어쩔수 없이 침대 옆에 서 있는 그의 동정(動靜)에 쏠리고 말았다. 옷을 입는지 천 스치는 소리와 함께 굳이 눈을 들어 확인해 보지않아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을만큼, 자존심이고 뭐고 그대로 일어나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덮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혀를 깨물고 있어야 할만큼, 꽤 오랫동안 전신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바람에 않그래도 예민했던 신경이 바짝 곤두서버린 우혁은 한순간 우는 것도 잊을 정도로 다시 온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말았지만, 아무말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방안을 가로지르는 기척과 함께 문을 여닫는 소리를 끝으로 방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긴장으로 곧추세워져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나 급속도로 밀려드는 정적감과 좋은 의도로 짓눌려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기를 느끼지 못하게 해주었던 몸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땀이 식어가는 맨몸이 느끼는 싸늘함, 그토록 잔인한 짓을 했으면서도 위로나 사과의 한마디도 없이 무정하게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나가버리자 내팽겨쳐졌다는 초라함과 지금까지 당한 수모(受侮)에다 완전히 재원의 손에 놀아나버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애시당초 이 모든 일이 일어났던 원인제공 (原因提供)을 한사람은 자신이라는 것도 어느새 잊어버릴 정도로, 새삼 밀려드는 수치심과 그것보다 더 큰 서러움이 북받쳐오른 우혁은 땀이 식어 싸늘해진 팔을 감싸쥐며 울먹이다가 결국 간신히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애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흐흑.....나..쁜....자식.......윽......흑........." 남들은 잠에 푹 곯아 떨어져 있을 새벽 3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잔인한 행동에 걸맞게 끝까지 무정하게 자신을 내팽게치고 나갔다고 연인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아니 실상 그 자신이 들으면 열뻗칠 정도로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는, 엎드려서 울어대는 연인을 달래주는건 고사하고 훤히 드러난 나신을 시트로 덮어줘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는 재원이, 한번 흘러나올 때마다 심장을 찔러대는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내 침실 밖을 나와 향한 곳은..... 이 집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집안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때껏 단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1층의 부엌이었다. "......제기랄.."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는 꼴인데다 특히 이날 밤은 우혁과 비교도 않될 정도로 지옥같은 시간을 버티느라 이미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 재원이, 움직일때마다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완전히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대충 짐작으로 찾아 들어간 부엌에서, 귀찮은 소지를 만들까봐 아예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컴컴한 내부를 더듬거리며 헤매다, 튀어나온 의자모서리에 허벅다리를 거세게 부딪힌 순간 자동적으로 험한 말을 내뱉으며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도대체....뭐가 뭔지..." 어느 정도 어둠이 눈에 익자 냉장고치고는 지나치게 커보이는 기구(機具)의 문을 열고 한참을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찾던 것을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름도 모르고 용도(用度)도 모르는 대충 흐릿하게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온갖 주방기구들을 둘러보며 짜증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재원은 진작에 이런 것에 신경을 썼었다면 벌써 침실에 올라가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을 하자마자 지금 침실에 우혁이 혼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더욱더 초조해졌다. "......이건가?" "..도련님?!" 그중 하나를 가까이 다가가 막 자세히 들여다 보려할 때 갑자기 환하게 켜진 불 때문에 반사적(反射的)으로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리던 재원은 이 순간엔 전혀 반갑지 않은, 아니 사실 불을 켜지 않았던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었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속으로 신음을 삼키고는 천천히 팔을 내리며 뒤돌아섰다. "......유모.."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아, 아니?!!" 뒤돌아선 재원은 벽의 스위치에 손을 댄 채로 부엌 입구에 서서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놀랍게도 검은색이 아닌 분홍빛 잠옷과 가운을 걸친 유모의 자그마한 모습을 보고는 입가에 다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눈 위로 흘러내려와 있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다가, 여전히 입을 벌린채 꼼짝도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얼빠진 듯한 그 모습에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 왜.." "....아주.....파란만장한....밤이었나 보군요" 잠시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던 재원의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 위로 한순간 희미한 붉은 기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유모는 자신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으면서도 우혁이라면 몰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재원에게서 그런 반응(反應)을 이끌어낼줄은 정말 몰랐는지라 않그래도 내심 놀라고 있던 중에 더욱더 경악(驚愕)하고 말았다. 부엌과 가까운 곳에 침실이 있는 그녀는 잠귀도 원체 밝은 편이지만 새벽 잠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 눈을 뜬채로 가만히 누워 있다가 분명코 경호원이 아님에 분명한,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기미를 알아채고는 방을 나왔다가 부엌쪽에 인기척이 나서 와본 것이지만 설마 그게 재원일거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녀의 기억(記憶)이 잘못된게 아니라면 이 장소에서 재원의 모습을 본 건 분명 처음있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지금 재원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분명 아기때 빼고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던 무척이나 싫어하는 우유가 담겨있는 병이었고, 더더군다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재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온동네 광고를 해도 좋을만큼, 지금까지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갈 정도로 그렇게 뚜렷한 흔적(痕迹)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下-III] "자, ....이게 전자렌지고.....이 데우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 소리가 날때까지 기다리면 돼죠" 제빵용 소형 오븐기 앞에 서서 분명 통째로 넣고 데우려던 의도(意圖)가 분명했던 재원에게서 우유병을 뺏어 컵에 따라 붓고 전자렌지에 넣어 버튼을 누르는 연속동작을 하기까지 그 짧은 동안, 전혀 예상밖의 것에 관심(觀心)을 두는 재원에게 의문(疑問)조차 표하지 않고 세심히 가르쳐주는 유모의 마음 속엔 '이런 날이 올줄이야!!!'라는, 뒤로 무수한 느낌표를 매단 문장 밖엔 떠올라 있지 않았고 얼굴에는 그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해놓은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내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잠은 않자고.....웬 우유예요?" 비록 돌아선 순간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고는 해도 '파란만장한 밤'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또한 얼간이처럼 그 말을 그대로 입증시켜주는 반응 (反應)을 해버린 후부터, 않그래도 눈썰미가 날카로운데 아예 온몸의 경각심 (警覺心)을 키운채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재원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혹시 우혁군이 잠을 못 이루.." "유모" 동일한 방식(方式)으로는 전혀 먹혀들지가 않는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날 화원에서 우혁을 짖궂게 놀렸던 때와는 완전 딴판으로, 얼굴에 진지한 표정(表情)을 띄운 채 농담기없는 음성으로 막 얘기를 꺼내려했지만, 아직 시작도 않했는데 무슨 말을 할건지 벌써 눈치챘는지 아예 초반부터 끊어버리는 그것은, 비록 두음절짜리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평소의 느릿한 말투가 아닌 심상치 않을 정도로 잠긴 음성이어서 분명 경고성(警告聲) 어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맙소사...저런 목소리라니....' 심상치 않은 경고조(警告調)에도 불구하고 실상 재원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던 유모의 얼굴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도리어 간신히 참아왔던 웃음이 다시 터지려는 듯 억지로 참는 기색(氣色)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정말 살다보니 이런 모습도 다 보네' 현재 재원의 모습은 그다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니 사실 이전의 재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심성(心性)은 삭막하고 무미건조하기는 해도 그가 지금 얼마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테지만, 중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술담배는 기본에 외박(外泊)은 밥먹듯이 해댔고, 밖에서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짐작도 않갈 정도로 상처도 않난 몸에 온통 피칠갑을 한채, 술내음과 짙은 향수내에 찌들어 저택 내에 맨정신으로 들어온 적이 거의 없을정도로, 이회장조차도 더이상 손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난폭하고 방탕(放蕩)한 나날의 연속이었었다. '그 모습이 이젠 까마득해지다니....' 그래도 학교에는 꼬박꼬박 가는 것 같긴 했지만, 걸려오는 전화마다 술에 취해 여자문제로 시비가 붙어 술집내 기물(器物)을 파손하거나 사사건건 폭력배와 싸워 난동(亂動)을 부리거나 패싸움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있다는 소식, 게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손대면 거의 아작을 내버려 반병신을 만들어놓는 바람에, 몰지각한 사람의 경우엔 어떻게 재원의 내력(來歷)을 알아내고는 한몫 잡아보려는 심보로 탐욕스럽게 거한 배상(賠償)을 요구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 의도적으로 그랬던게 분명해...' 그런 것은 오히려 이쪽에서 더 반가울 정도로 쉽게 해결지을 수 있는 경우였으나 형사처벌(刑事處罰)까지 갈정도로 심각했던 경우도 한두번이 아닌지라 결국에는 이회장이 힘을 써야하는 상황까지 닥친때도 있었지만 이때껏 처벌을 받은 경우는 단한번도 없었고 그런 결과가 날수록 재원의 심성(心性)은 더더욱 삐뚫어져만 갔다. 더구나 그런 것들 이외에도 바이크를 몰다가 사고를 내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사람 피말리는 가장 최악(最惡)의 소식이 올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몰래 뒤따라 다니던 경호원들에게서, 일진그룹 계열의 호텔 지배인들에게서 술에 취해 호텔 룸이나 여자집으로 같이 들어간 후에 걸려오는, 애차 보고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연락 등등, 한마디로 말해 고등학생이 되기 이전까지만해도 주말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반항아(反抗兒)의 모습을 혹시 모델로 삼은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그야말로 그 모습 그 행동 그대로를 한단계 레벨업시켜서 골고루 재현(再現)시켜 보여줬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감정이라도 있었지....'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경계선(境界線)을 넘어설 때 이회장의 추상(秋霜)같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저택을 아예 나가버린 재원은, 사람들이 한동안 적응(適應)이 않될정도로 또 한차례 자신을 급변화시켰는데, 말그대로 너무나도 평범한 학생 그대로의 모습으로 술담배도 거의 하지 않고 여자문제나 싸움조차 하지 않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 특히 이회장과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바래왔던 모습으로 돌변했지만, 곧 얼마안가 두사람은 차라리 이전의 모습이 더 나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지 않으면 않되었다. '무조건 회장님 탓만 할 수는 없지만.....' 겉모습은 너무나도 순화(純化)되어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지만 애초에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그런 반항적(反抗的)이고 퇴폐적(頹廢的)인 삶에 염증(厭症)을 느껴버린 재원이 스스로 선택한 그 돌변한 모습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같은 감정표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고 원래도 입이 무거운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적은 말수가 더욱 없어져 아예 입을 다물고 산다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걸 깨달아서 그런게 분명해....' 이전의 거칠고 난폭하게 반항하거나 향락(享樂)에 젖어있던 그 모습이 그래도 그나마 살아있는 생기(生氣)가 느껴졌다면, 돌변한 후 우혁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모습은 흡사 인생의 말년(末年)에 다다른 노년층(老年層)이나 삶을 살아가는 보람같은건 느끼지도 못하는 염세론자(厭世論者)가 연상될 정도로 그렇게 삭막하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제 짝이란게 있기는 있나봐...' 햇수를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딱 그 상태로 여전히 변함없는 그 모습에 이회장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녀조차도 거의 포기(抛棄)에 가까운 절망적(絶望的)인 심정(心情)으로 하루하루를 한숨 속에서 지내왔었다. 하나 그런 차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우혁이란 존재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어느 것에도 그닥 관심을 두지않던 재원이 미약하나마 변화하기 시작한 이유를 재빠르게 눈치챈 심복들에 의해 결국 이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랬기에 비밀스런 정보망(情報網)을 통해 우혁과 승호가 단순히 후견(厚絹), 피후견인의 관계가 아니라 연인사이라는 것을 알게된 이회장이, 이일로 인해 재원이 자신을 또 얼마나 경멸할 것인지를 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국은 고심(苦心) 끝에 납치(拉致)라는 극단적(極端的)인 수단 (手段)까지 발휘해야 했던 것이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그녀는 혹시나 이회장이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 진노(震怒)하거나 방해를 놓을까봐 내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도, 재원의 변화를 본 이상 두사람의 관계가 순조로이 진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이 정도일 줄이야' 그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진작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아니 우혁이야 어쨌든 재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둘 사이의 분위기나 직접적으로 확인한 그 흔적(痕迹)때문이 아니라 재원이 우혁과 한 침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난 다음부터였다. -.....이유..? 이유따윈 없어. 한창 파티가 진행 중일때 보란듯이 여자들과 침실이 있는 위층으로 갈때조차도 자신의 침대로 데려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무정할 정도로 바로 쫓아내버리기 일쑤여서 여태껏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다, 원래 아주 어린 꼬마시절부터 유모인 자신과도 같이 자려하지 않던 그인지라 체질상(體質狀) 성격상(性格狀) 어느 누군가를 옆에 두고 잠을 잔다는 것은 이전의 재원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는데 이젠 예외가 생긴 것이다. '완전히 무신경한 줄만 알았는데, 이제야 18살다운 모습을 보여주다니....' 간혹가다 강압(强壓)에 못이겨 집안파티나 행사에 참석하게 될때면 이회장에게 반항(反抗)이라도 하는 듯이,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않고 자기보다도 훨씬 연상 (年上)의 여자들과 달라붙어 눈살을 절로 찌푸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니 중학생이라는 나이를 의심치 않을 수 없을정도로 문란한 모습을 보일때조차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보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일부러 더 난잡한 행동을 하던 그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가버리고, 겨우 몇마디 의미심장한 말로 얼굴까지 붉히는 재원의 모습은 솔직히 유모에겐 아직도 충격이었다. '흐음, 이런 묘한 기분이 될 줄은...' 누구에게 갖다 줄건지는 추측이고 짐작이고 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확실한, 그 자신은 입에 대지도 않는 우유를 그것도 따뜻하게 데워서 갖다주려고 내내 어두운 부엌을 서성거리며 주방기구들을 둘러보던 재원의 모습은, 게다가 그 방법까지 알아두려고 하는 그 모습은 그녀에게 충격적이긴 했지만, 결국 사랑 앞에선 그 냉심(冷心)도 무심(無心)도 별수없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허탈한 심정(心情)이긴해도 한편으론 무척이나 다행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정말 어른이 다 됐네. 세월한번 참....' 특유의 무심하고 나른한 분위기로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속눈썹을 반쯤 내리깐채 간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리대 앞에 팔짱을 낀채 기대서 있는 재원의 모습은, 교복이나 평상복을 입고 있을 때는 상당히 마른 체격(體格) 인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얇은 가운 위로 드러난 몸의 윤곽과 넓은 어깨가 이젠 확연히 성숙한, 남자다운 골격(骨格)을 하고 있어 새삼 그의 나이를 실감케 해주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아, 혹시 그 일때문인가....... 어쨌든.....으음, 설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160이 않되는 그녀가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를 휘감고 있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검은 실크가운은 창백한 피부를 약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단점(短點)이 있기는 했지만 미끈하게 잘 닦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어, 전신에 자연스레 베어있는 무심함과 간혹가다 드러내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거칠은 성상(性狀), 날카로우면서도 사람을 묘하게 자극시키는 그 눈빛까지 곁들여져 평소라면 흑표범처럼 상당히 위험스러워 보였겠지만 사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재원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아무래도...휘어잡히는 추센거 같잖아?' 왜 헝클어졌는지는 솔직히 별로 의문스럽지도 않은, 뒤죽박죽 엉망으로 흐트러진채 방금 샤워라도 했는지 축축히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어지러이 흘러 내려와 눈위를 가리고 있었고, 반쯤 내리깔린 눈까풀은 한눈에도 피곤이 절절 베어 있어 바로 꿈나라로 직행(直行)하지 않는게 더 이상해보일 정도였고, 결정적인 것은 흰 피부라 그런지 유독 도드라진 왼뺨에, 분명 손으로 맞은게 분명한 붉은 자욱과, 그 자욱을 보면 왜 터졌는지 이해가 가는 피가 말라붙어 있는 입술, 뺨을 맞아 피가 날 정도로 터지게 된 그 근본원인이 아닐까 한번 추측해볼 정도로 입술이 약간 부풀어올라 있는데다, 팔짱을 끼고 있는 오른손은 또 언제 다쳤는지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여자들이 오히려 끌려다니는 편이었지....' 재원의 하룻밤 상대들은 그보다도 연상(年上)의 주로 여대생들로 주체못할 정도의 돈과 시간을 가진, 거의 대부분이 부유하고 향락을 즐기는 쾌락주의자(快樂主義者)들이었는데 이회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원 자신이 스스로 내치지 않는한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관계에서조차도 주도권(主導權)은 재원이 쥐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시끄럽다고 했어.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얼마안가 내침을 당하는 여자들이 자신보다 연하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압적(威壓的)인 분위기에 눌려 감히 덤비지는 못하고 울분(鬱憤)만 터뜨리거나 히스테리를 부려 소리라도 지르는 날이면, 그런 정도임에도 시끄러운 것은 절대 참지 못하는, 여자라고 봐준다는 식은 먹혀들리 없는 그의 매서운 손이 가차없이 귀싸대기로 올라가 매번 피를 보기 마련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재원의 모습은 분명 뺨까지 맞은게 분명함에도 우혁에겐 손도 대지 않았을거란 것을, 아니 그 장면이 아예 눈에 훤히 보이듯이 대충 짐작이 가서 그녀는 내심 혀를 끌끌 차고 있는 중이었다. -......괜찮으니깐 놔둬요.. 게다가 재원에게서 우유병을 빼앗아 들때 잡고 있던 오른손에 감겨있는, 베어나온 피가 서서히 말라붙어가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붕대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다시 새것으로 갈아주려했지만, 그자신도 깨우쳐주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는지 잠시 내려다보다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채 한층 더 낮아진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그 붕대를 매준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그녀는 그 순간부터 내내 혀를 차랴, 웃음을 참으랴, 재원에게 들키지 않으려 신경쓰랴 상당한 노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혁군하고 싸우..." "...유모" 몇 번의 낮은 신호음(信號音)이 나자 다 데워진 우유를 얼른 받침대에 받쳐 꺼내들던 그녀가 짐짓 의문스러운 듯 가벼운 어조로 넌지시 물으려했지만 다시금 말을 중도에 끊어버리는, 하나 아까와는 비교도 않될만큼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에 순간 흠칫하며 재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낮에....." 전자렌지의 신호음이 울린 것도, 유모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방금 전의 자세 그대로 여전히 바닥만 응시한채 혼잣말처럼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답지 않게 뭔가 말하길 주저하는 듯하던 재원의 입매가 어느 순간 씁쓸한 듯 자조적(自嘲的)으로 비틀리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손으로 그대로 팔뚝을 거세게 움켜쥐다가 이내 조리대에 기대섰던 몸을 떼어냈다. "........주무세요" ".........우혁군... 손님 말인가요?" 우유컵을 받아들고 미리 꺼내놓은 브랜디를 몇방울 떨어뜨린 후에 이내 돌아서는 재원의 이젠 확연히 지쳐보이는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갈등(葛藤) 끝에 머뭇거리다가 던진 말은, 막 부엌 입구를 나서 어두운 복도로 들어서던 기다란 신형(身形)을 그대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세워버리고 말았다. -53- # # #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차라리 잊고 있었던게 더 나을뻔했던 기억을..... 그 기나긴 세월을 부정하면서까지...... 하나를 외면하며 선택했던 또 하나를... 괴롭히고 상처입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장 쓰러지지 않는게 더 이상할 정도로 정신적(精神的)으로나 육체적 (肉體的)으로나 이미 한계(限界)에 다다라 무척 지치고 피곤한 상태 였지만, 되도록 컵에서 우유 한방울 흘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3층까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온 재원이, 방문 앞에 멈춰서서 다소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잠시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확실해' 반쯤 열린 문틈으로 들어서다 도로 제자리에 멈춰선 재원은 이렇게 하루 사이에 심장(心腸)에 계속 무리를 주다가는 분명 성치 않을거란, 그다지 우습지도 않은 기분임에도 아니 근래들어 이렇게 최악(最惡)인 적은 처음일 정도로 요 몇일새 내내 컨디션이 계속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덥잖고 어이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정말 한순간에 심장이 멎는듯한 착각이 들었다가 심박수가 원상태로 서서히 복구되는 중이었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연속적(連續的)인 사건(事件)들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만큼 지옥같은 시간이었음엔 틀림없었지만, 또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조차 부정하고 싶은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이 꿈은 아닐진데, 그 증거(證據)인 어지러이 흐트러져 잔뜩 구겨진 침대시트는 그대로였으나 그 위에 있어야 할 인영(人影)은 보이질 않고 있었다. '.......확실히 이 바보가...' 비록 추측(推測)에 불과하긴 했으나, 이변(異變)이 없는한 분명 그 이유가 분명할 한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우치는 바람에 더 험악한 상황(狀況)까지 갈뻔했던 일을 그 정도 선에서 멈췄던 것이긴 하나, 이후에 우혁이 모른체 해주길 원한다 해도 이번 일은 그냥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有耶無耶) 대충 넘긴다거나 단적(端的)으로 쉽사리 해결날 일이 아니었고, 이 불미스런 사건이 아직도 여전히 불안정한 두 사람의 관계에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미지수(未知數)였지만, 실상 지금 재원에게 이순간 최우선(最優先) 과제(課題)는 되돌릴 수도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그 일이 아니었다. '.....오늘...작정을 했군' 두 사람 모두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던 그 상황을 일시적(一時的)이나마 종료 (終了)시켰던 바로 그때, 스스로를 자제할 여력(餘力)이 있을때 재빨리 침대를 벗어난 재원은, 비록 무신경하고 무심한 성격을 가졌다해도 그또한 별수없는 남자인지라 연인에 의해 자존심을 다친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흐느껴 울고 있는 우혁을 내려다보며 심하게 다그쳐서라도 진실(眞實)을, 속마음을 알고 싶은 충동(衝動)이 한순간 거세게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결단력(決斷力)이 남다른 그에겐, 이 일로 당장 우혁을 추궁해 자신의 추측이 맞는가를 확인해 본다던지, 그의 진심(眞心)을 캐묻는다던지, 이런 일이 벌어진 근본원인(根本原因)을 따진다던지 하는, 이런 상황에선 분별력(分別力) 없는 바보도 않할 짓인, 그런 일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감당해내지도 못할거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재원이 우선적으로 신경쓰고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의도적(意圖的)이었든 아니었든 그가 우혁의 싸늘하게 식은 몸을 덥혀준 꼴이 되긴했지만 그래도 몇시간이나 찬물을 맞아 뼛속까지 깊이 베어있는 한기(寒氣)를 최대한 누그러뜨리는 일과 자신도 한몫해버린 우혁의 쇼크상태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켜주려면 어떻게든 빨리 재워야한다는 사실이었다. 서서히 이성을 되찾으며 급속도로 머리가 차가워진 이후, 그런 우혁의 상태를 내내 상기하고 있었기에, 빨리 그 상황을 종결(終結)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든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방법인, 견딜수 없을때까지 수치심(羞恥心)을 최대한으로 자극시켜 우혁이 스스로 먼저 포기(抛棄)를 하게끔 만들려했던 것이다. '.......바보 짓을 한 주제에....' 그랬기에 어떻게하면 수치심을 극도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한게 아닐까 싶을만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집어넣은 말과 행동으로 인해, 실상은 그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 가해자(加害者)의 역할을 떠맡아버린 재원과, 또한 그에 걸맞게 예상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끌어내려던 반응을 그대로 교과서처럼 고스란히 보여준, 먼저 표독스런 말로 상처를 입히던 가해자에서 어느결에 모욕과 수치심에 서러워 눈물 흘리는 피해자(避害者) 역할이 되버린 우혁, 이렇게 재원의 의도대로 진행된 공동합작(共同合作)으로 인해, 우혁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 되지않고 완전히 결과가 어긋나버린 상황이 되었음에도 그 자신조차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만큼, 재원이 그에게 고의적(故意的)으로 가한 언행(言行)들은 너무나 시기적절하고 기가막힌 효과(效果)를 발휘해 결국 심각해야했던 상황이, 앙탈부리는 戀人을 혼내주는 것으로 마감지어버린, 단순한 사랑싸움으로 완전히 탈바꿈해버렸던 것이다. '......그 몸으로 또 어디를 간거야' 결국은 예상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기다리던 반응을 이끌어낸 재원은 뒤도 않돌아보고 그즉시 부리나케 부엌으로 내려가, 데운 우유에 수면제 역할을 해줄 도수높은 알콜을 넣어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혼자 내버려두고 나갔던건데,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일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신속하게 돌아온 재원의 이젠 가물가물한 시야(視野) 내로 들어온 방안은, 텅 빈채 주인 잃은 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것이다. 방문을 열던 바로 그 순간부터, 조건반사적(條件反射的)으로 세게 움켜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으며, 지친 기색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비어있는 침대에서 시선을 돌리던 재원이 방안을 채 둘러보기도 전에 이내 뭔가를 발견한듯 날카롭던 눈빛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숨을 곳이 거기밖엔 없나?" 처음 한순간은 그 잠시간을 못 참고 또 아까와 같은 사태(事態)가 재발생 (再發生)한게 아닌가 싶어 긴장했지만 들려야할 음향(音響)이 없다는 뚜렷한 차이를 감지하자마자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경직됐던 얼굴 근육이 약간 느슨하게 풀리며 저도 모르게 피곤이 짙게 베인 긴 한숨을 흘려내었다. '.......아니면....정말 결벽증인가..... 그 뻔한 몸으로....' 울다 지쳐 잠이 들었거나 혹시 기절해 있는 모습을 봤다해도 솔직히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겠다는 심정(心情)과 함께, 나중에 이 일로 우혁이 받은 수치심을 없애주려면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로서도 달갑지는 않지만 어쩔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해야했던 것이고, 또 가급적 빨리 그렇게 되길 바라긴 했지만 정말로 그가 의도했던 대로 우혁이 모든 것을 다 잊은게 아닌가 싶어, 약간 어이없는 빛을 띄우며 의심스럽게 속으로 뇌까리던 재원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우유가 담긴 컵을 손에 든채 몸을 돌려 굳게 닫혀 있는 욕실 앞으로 다가갔다. '.....뭐, 나름대로 그것도 괜찮... .설마..쓰러진건..!!' 가망성(可望性)이 큰 의심(疑心)이 들자마자 노크따윈 해볼 생각도 없는듯, 머뭇거림조차 없이 그대로 손잡이를 돌리며 세차게 잡아당긴 힘과 비례해, 철커덕하며 잠금쇠가 요란하게 걸리는 소리가 나자 아까 상황과는 또다른 차이점(差異點)인, 열리지 않는 문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리던 재원이 안에서 희미한 물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지자 이내 긴장을 풀며 입가에 조금씩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좀 나아진 것 같군. 대비까지 해둔거 보니...' 이젠 확연히 나른하게 풀린 표정으로 욕실 문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재원의 눈빛이 조금 짙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자조적(自嘲的)으로 입가를 비틀며 돌아서다가 손가락 사이로 뭔가 뜨뜻한 것이 흘러내리는듯한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조금 넘쳤는지 손에 묻은 우유와 내내 들고 있었으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던 컵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 컵을 옮겨잡고 잠시 주저하던 재원은 그대로 손을 들어 우유방울이 묻어있는 손가락에 혀를 갖다대다가 브랜디를 몇방울이나 넣었음에도 싫어하는 이유인 특유의 비릿한 맛은 여전하자 그대로 이맛살을 팍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다....' 아까 전과 같이 몇시간이나 내내 싸늘한 냉기(冷氣)로만 채워져 있던 빙굴 (氷窟)이 아닌, 눈앞의 사물이 제대로 않보일 정도로 뿌연 수증기로 가득차 마치 한증막(汗蒸幕)에라도 온 듯이 후덥지근하고 습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욕실에는 이런 수증기를 만들어낸 근원지(根源地)인 뜨거운 물이 담겨있는, 내부면적의 거의 반을 차지할만큼 커다란 욕조 안에 눈을 감은채, 그대로 부러질 듯 가느다란 목덜미를 숙이고 있는 우혁이 열탕(熱湯)이나 다름없는 물 속에 깊숙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드넓은 욕실내부를 짙은 안개처럼 뿌옇게 꽉 메운 수증기와 천장에 맺혀있다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의 온도로 보아 물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굳이 들어가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될 정도로, 욕조 안에 들어앉아 숙여진 고개밑으로 드러난 우혁의 뜨겁게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에도 땀방울이 무수히 맺혀 물방울과 같이 밑으로 주르륵 흘러 욕조의 수면 위로 쉼없이 떨어져내렸다. "...............차라리....." 심장에 압박감(壓迫感)이 올 정도로 유황온천처럼 뜨거운 물 속에 오랫동안 몸을 푹 담그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한데서 비롯된 우혁의 습관이자 즐기는 취미 중의 하나였지만, 애초에 이런 열기(熱氣)를 이겨낼만한 체력(體力)이 남아있지 않았던 그는 온몸이 심하게 달아올라 피부가 벌겋게 변한채로 목고개를 들 기운도 없는지 얼굴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들어감에도 느낌도 없는듯, 벌려진 붉은 입술새로 입김조차 뜨거운 숨을 연신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대로.....잊고....있었다면......." 수면 위로 거의 맞닿을 듯 숙여진 얼굴에 와닿는 뜨거운 증기 때문에 거칠어진 호흡 새로 힘겹게 한마디한마디 내뱉으면서도, 한눈에도 이미 더이상은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옥같은 열기에 괴로워하면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으면서도, 마치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라도 하는듯이 물 밖으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 우혁은 문밖에서 분명 재원임에 틀림없는 기척을 느끼자 한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다가 도로 멈추며, 잊고 있었던 과거를, 오랜 기간 잊은 채로 무의식 속에 내재되있다가 되찾아버렸던 그 과거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이 마음속의 비밀(秘密)로 간직해 두고자 했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하는 과거의 그 날을 다시금 회상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그해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단 한번도 눈이 오지 않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은 거의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해가 서서히 질무렵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함박눈을 본 순간 무척이나 들떠버린 우혁은 오랫동안 감기몸살로 누워만 있었기에 밖에 혼자 나가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못하고 결국,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으려 미리 털모자로 머리칼을 가리고 들키더라도 혼나지않게 옷을 두텁게 껴입고는, 때마침 서재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승호와 자기 방에 있던 칠현, 그리고 가장 고민이었던 에릭 뿐만 아니라 다른 고용인들한테도 용케 들키지 않고 집안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기인데다 내내 기다리던 첫눈까지 오자 화려한 츄리로 장식한 거리와 상점들의 분위기는 더한층 들떠있었고, 연인끼리 친구끼리 몰려다니며 북적대는, 캐롤송이 울려퍼지는 거리와 갑작스레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인해 차량이 밀리기 시작하며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대는 도로의 체증(滯症) 속을 지나, 그 모든 것을 구경하면서 분위기에 휘말려 이유모를 해방감을 즐기느라 해가 진지 꽤 오래됐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던 우혁은, 찬바람에 얼어붙어 감각이 없어진 얼굴을 만지다가 너무 오랫동안 몰래 나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쉬움 속에서도 이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대학과 같은 재단(財團)에 속한 부속 고등학교와 한 울타리 안에 같이 붙어있는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우혁은 눈에 익은 길을 통해 집으로 가려고 학교 앞을 지나치다가 낮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른, 가로등 불빛조차 거의 없는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예외없이 밀려드는 공포감(恐怖感)에 거의 뛰다시피하며 쓰고 있던 털모자를 더 눌러쓰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을 빨리 벗어나려했다. 하나 어떻게 알아봤는지 추운 날씨와는 하등 상관없이 전신을 소름돋게 만드는 기분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교정(校庭) 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이상한 시선을 던지던, 한눈에도 불량스러운 몇 명의 상급생들에게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반항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어두컴컴한 골목 뒤로 끌려 들어가야만 했다. -.......이런, 사 대 일이라니... 그렇게 여자가 궁한가?" 빛이라곤 한점도 없는 암흑 속으로 끌려 들어가 담벽에 세게 밀쳐지며 덩치 큰 상급생들에게 둘러싸인채, 그들이 왜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우혁이 비명소리도 내지 못할만큼 겁에 잔뜩 질려 얼어붙은 뺨 위로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든지 가로막고 서있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 비웃음이 베어있는, 웬지 듣는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느릿한 음성 하나가 귓속으로 강하게 파고들자 우혁을 포함한 다섯명 모두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더러웠는데....큭... 암흑만이 가득한 이쪽과는 달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비추고 있는 골목입구 에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우혁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상급생들보다도 키가 더 커보였지만 나이는 그들보다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색조의 반코트 호주머니에 한손을 넣은, 얼굴이 약간 흐릿해 보이는 소년 하나가 담배를 피워 문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해를 받은데다 일부러 시비를 붙이는듯한 그 건방진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한 네 사람이 험악한 기세로 다가갔지만, 포위를 당한 상태면서도 전혀 위기감 (危機感)도 못 느끼는지 그 자리에 꼼짝도 않한채 여전히 담배를 입에 문 여유자적한 모습으로 나즉하게 뇌까리는 그 조소섞인 음성은 변함없이 느릿하고 낮은 톤으로, 어떻게 보면 도와주려고 나선게 아니라 우연찮게 목격한김에 싸움을 하고 싶어 시비를 건듯한, 싸울 태세가 되어가는 이 상황을 혹시 즐기는게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들정도였고, 그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 공통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린 점이었다. -..... 너넨 입으로 싸우냐...? 비록 키나 덩치는 비슷하다해도 나이는 더 적어 보이는데도 완전히 사람을 깔아뭉개버리는듯한 반말투의 조소섞인 음성과 함께, 가장 근접해 있던 한 명의 턱을 잡아채자마자 그대로 압사시키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무지막지한 기세로 담벽에 거세게 처박아, 단 한번에 터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온 얼굴을 뒤범벅으로 만들어버린 그 손속은, 그들이 아무리 이지역 내의 폭력 써클을 통합한 제신고 소속이라해도 한순간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충분히 여유를 부릴 이유가 될만큼, 그렇게 잔인하고 난폭하기 짝이없는 것이었다. 입에는 담배를 피워물고 시선은 이쪽을 향한채, 손을 턱에서 머리칼로 옮겨 비명을 질러대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대로 몇 번이나 계속해서 콘크리트 벽에다 찍어 박으면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그 잔인한 모습에, 갑작스런 사태에 한순간 얼어붙어 있던 나머지 세명이 이내 분노로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번 제압(制壓)되었던 기세는 다시 역전되지 않았다. 긴다리를 이용해 거세게 달려들던 한명의 정강이를 그대로 걷어차며 덮치던 가속력과 군화같은 신발 굽에 실린 압력을 이기지 못해 뼈 나가는 소리와 함께 단 한번에 다리를 분질러버리고는, 이미 머리가 터져 기절해버렸음에도 계속해서 쥐고 있던 머리칼 때문에 바닥으로 늘어지지도 못하는 몸을 쓰레기 버리듯이 내팽게쳐버린 후, 뻗쳐오는 손목을 잡아채 손가락을 깍지껴 그대로 뒤로 꺽으며 뼈마디를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뜨리며, 간단히 바닥으로 쓰러뜨려 목덜미를 발로 짓밟는 동작까지, 그 모든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한 손과 한 다리로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은 숨결하나 흐트러지지 않은채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몇 발짝 이동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 ..그 대단한 인간이 뭐하고 있나 가서 보시지 그래... -........기분 더럽다고 했지. 성한 다리로 가고 싶으면 그만 꺼져. 자신과 맞먹는 덩치 세 명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뒹굴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버린 소년의 모습을, 동료 하나의 목덜미를 짓밟고 있는 바람에 덤빌 기회를 놓쳐버린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경악에 가득한 눈이 뒤늦게 발견한 것은, 술에 취한 듯한 모습과 이미 어디서 한차례 싸움이 있었는지 터진 입가와 얼굴에도 핏물이 튀어 있었고 펼쳐진 반코트 속에 입은 찢어진 셔츠에도 피일 것임에 분명한 얼룩들이 묻어 있는데다, 웬일인지 사용하지 않던 다른 쪽 손목이 부러진 듯이 축 늘어뜨려져 있다는걸 알아챈 순간, 그런 몸을 하고도 누군가와 거의 대등할 정도의 스피드를 냈다는 것에 완전히 기가 질려버린 그가 그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거렸지만 되돌아온 반응은, 한층 더 짙어진 조소어린 저음과 짓밟고 있던 목덜미에서 발을 떼자마자 데려가라는 의도인지 악랄할정도로 옆구리를 걷어차 그쪽으로 굴려버려 아예 숨도 못쉬게 만든 행동이었다. -......뭐야, 아직도 있었어? 보답해 주겠다는 건가? 왜 건드리지 않았는지 이해갈정도로, 기절한 한명을 들춰업고 숨이 막혀 컥컥대는 놈과 다리가 부러진 놈을 부축한 그 남은 한명이 이를 갈며 사라지기까지, 한순간에 일어나버린 그 모든 것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한 채 내내 보고있어야 했던 우혁이 온몸을 떨며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으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벽을 짚고 비틀대다가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뒤돌아서다가 희미한 인기척에 그제야 우혁을 발견한 그가 갑자기 싸늘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상급생 네 명보다도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 그에게 더 겁을 먹은 우혁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서기만하자 그런 행동이 신경에 거슬렸던지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이젠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서다가 넘어질뻔한 우혁의 어깨를 갑자기 낚아채는 바람에, 심하게 휘청대던 우혁이 술내음이 확 풍기는 그의 몸에 거세게 가 부딪히며 그대로 얼굴을 붙잡혀 위로 쳐들렸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무섭게 쏘아보고 있는듯 어둠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눈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쳐야만 했다. -..........우유맛. 빌어먹을 자식들, ....꼬맹이었잖아... 쳐들려졌지만 보이지도 않았을 우혁의 얼굴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순간 뭔가 그의 몸에서 풍기던 살기어린 분위기가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자마자, 그 대로 입술을 덮쳐 확퍼지는 짙은 술내음과 입안으로 밀려들어온 뜨거운 혀의 움직임에 우혁은 완전히 얼어붙은채로 태어나서 생애 처음, 다정하게 받는 뽀뽀가 아닌 영화에서나 봤던 키스라는 것을, 그것도 어두운 곳에 서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술에 취해 여자애로 착각하고 있는 듯한 그 소년에게, 격렬하게 입술을 탐하던 그가 한참만에야 입술을 떼어내며 심하게 가라앉아 잘 들리지도 않는 음성으로 중얼거릴때까지, 그대로 완전히 넋이 나간채 입술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있어야 했다. -...않가고 뭐하는거야?!! 이 자리에 눕혀줘?!! 입술을 떼어내며, 키스를 하는 동안 그대로 으스러뜨리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점점 압박이 세어지다가 그대로 놓아주자 한순간 비틀거리며 쓰러질뻔한 우혁이 파랗게 질린채 숨이 막혀 한참을 제대로 숨도 못쉬며 벽에 기대서 있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우혁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나이답지 않게 거친 음성으로 무섭게 다그치며 또다시 다가오려하자, 비몽사몽 중에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우혁은 무단으로 밤늦게까지 외출한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승호와 칠현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침실로 올라온 후에도 한참만에야 조금 진정이 됐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긴 했어도 그 소년이 자신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혁아, 왜그래? 불러도 대답도 않하고...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그후 한동안 우혁은 그 근처를 지날때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하다가 칠현의 재촉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정신을 차렸지만, 자신을 여자애로 착각하고 첫 키스를 빼앗아간 거칠기 짝이 없는,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키 큰 소년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도 무섭도록 빛을 발하던 그 날카로운 눈빛과 상당히 낮은 어조의 음성을 않그러고 싶어도, 왜그러는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수 없었으면서도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찾았지만 그날 이후로는 단한번도 그를 볼 수가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용모도 목소리도 흐릿해져갔으나 그 이미지만은 계속 뇌리 속에 남아있어, 그날 일어났던 일은 처음으로 승호에게도 칠현에게도 말하지 않은채, 그렇게 우혁의 마음 한켠 깊숙히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게 되었다.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던건......그 일을.......겪고나서..... 부분적인 기억을 잃었던 이유도 있었지만.....네가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었어...' 물방울이 맺혀있는 속눈썹을 힘겹게 들어올린 우혁은 열로 흐릿한 시선을 들어 뿌연 수증기가 가득해 가물거리는 욕실너머를 바라보며, 재원의 기억속엔 남아 있지도 않을, 아니 자신인 것도 모를게 뻔한 처음 만났던 그 날을, 그리고 잊고 있던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남아있던 그 이미지 때문에, 낯설지 않았던 그의 모습과 느낌에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그에게 쉽사리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지금까지의 일들을, 과거를 정리하듯이 계속해서 회상하고 있었다. -당하는대로 내주는 그런..!!!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지금까지 그런 식의 삶을 살아왔어..... 너나 승호형처럼 강인한 성격을 부러워하면서도.... 몸이 약하다는 사실로 그모든게 정당화될 수 없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내 힘으론 않되는 일이었다고..... 그렇게.....생각하고 싶었어..... 하지만.....지금까지 내 스스로가 원했던 적은 단한번도 없었어..... ......내가 원했던......유일한 것은........ 갈수록 더욱 힘겹게 가쁜 숨을 토해내며 열에 들뜬 듯 흐리멍텅한 우혁의 암청빛 눈망울에 이내 눈물이 차오르며 흐릿한 시야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넌 내 몸만 필요한거 아니었어? 네가 내 몸을 소유하고 있을땐..... 난......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널 거부할 의지도, 그렇다고 널 받아들일 의지도...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난.....내 자신의 초라함을 느껴야해..... 너처럼.....강한 애는 모르겠지.....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단지 내 외모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해지는지...얼마나 탐욕스런 시선으로 보는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당연하게 받아들였었어.... 하지만 네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너까지 날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얼마나 스스로가 미운지....아마 넌....모를거야.... 힘겹게 끌어모아 웅크린 다리를 물밑에서 팔로 감싸안으며 수면에 거의 닿을듯이 꺽여버린 가냘픈 목덜미가 심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네 몸이 대신 필요했어!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이 퍼붓던 세찬 물세례도.... 온몸을 불태울 듯한 이 지옥같은 열기도..... 내가 두 사람에게 끼친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두 사람의 마음을, 두 개의 마음을 동시에 농락해버린 내가 .....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어....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한 짓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를 잘 알면서도.... 두 번다시 용서받을수 없는 짓을 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네 손을.......놓을 수가 없었어...... 납치를 당한 후에.....정신을 차렸을 때..... 흐릿한 시야로 들어온 네 모습을 봤을때..... 왜 네가 그렇게 낯설지 않았던건지..... 왜 처음부터.....네게 그렇게 끌렸던 건지..... 그래서.....널.....놓치고 싶지 않았어..... 한사람의 마음에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또다시 너의 마음을 외면하고 내 감정조차 부정했어..... 난 이렇게 나약하기만 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짓밖엔 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 밖엔 못돼...... -...중 3때........성..폭행을...... .....그때.......그 순간에..... 떠올렸던 건...... .......승호형도.....칠현도 아닌......너였다는 걸.......... ......이름도...나이도 모르는.....얼굴도 흐릿해지던.....바로 너였다는걸........ .........네가.....또......나를.....구해주기를........ .......이번에도....나타나...날.....지켜주기를.....바랬다는걸....... ............널........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건........... ...........더럽혀진 내 모습을......초라한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왜 따라가지 않은거지? "...........우혁아......음...저기...." 흐릿한 시야너머로 어떻게 열었는지 욕실 문이 열리며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면서 조금씩 가라앉는 뿌연 수증기 너머로 나타난 하나의 모습에 물인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있던 흐릿한 암청빛 눈망울에서 빛이 서서히 사라져가며 자신의 이름을 다급히 외치는 음성과 무언가 뜨겁고 중압감(重壓感) 있는 것이 얼굴을 덮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재원.......그게........내.......답변이야........ -54- # # # 달조차 숨어버렸던 엇갈린 희비(喜悲)의 밤... 절망과 비애로 절규하는 한 영혼과 비운에 젖어 슬퍼하는 또 하나의 영혼... 남겨진 것은 갈 곳 잃은, 차갑게 외면당한 시간들... 바닥 위를 힘있게 짚고선 맨 발이 호흡에 맞춰 내딛어질때마다 반복적인 직선상의 움직임만 보이던 죽도가 한순간 미미한 떨림조차 없이 정지된 상태로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급선회를 하며 허공으로 내뻗치다가 다시 정지한 순간, 지금까지의 정적인 느낌과는 사뭇 다른,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히 긴장된 기운이 어두운 내실을 뒤덮기 시작했다. -넌 내 몸만 필요한거 아니었어? 긴장감서린 정적을 깨뜨리며 다시 휘둘려지는 죽도의 기세(氣勢)는 부러질 듯이 틀어쥐고 있는, 땀으로 미끌거리는 손가락과 팔목에 들어간 힘만큼이나 허공을 그대로 갈라버릴 듯한 매서운 파공성(罷工聲)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내 진심이 너한텐 그렇게 비쳤던가..... 그런 식으로 매도되야 할 정도로.... 나와의 시간이....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나.... 사람의 말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잘 아니까.... 입밖으로 내뱉는 맹세 따위가 얼마나 하잘것 없는지 잘 아니까.... 너도 알아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네겐.... 고작.....육체에 대한 탐닉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던가..... 기합성조차 없이 오직 나무바닥을 울리며 절도있게 내딛는 발소리와 죽도가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내부에 차츰 가쁜 호흡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아직 시간이 이른 새벽임에도 여름이 가까워졌다는걸 입증하듯 약간 후덥지근했던 공기가 더한층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모 얼굴도 모르는 고아......국적불명의 혼혈인 것도 그렇지만.... 지겹도록 끊이지 않는 병마로 약해빠진 몸에다......또.....굳이.... .....그 일만이 아니더라도......어차피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건 아냐....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을 제외하곤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있는 도관에서 죽도를 휘두르는 인영의 전신은 목욕이라도 한 듯이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네 몸만 원했다면..... 네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허약하기만한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 네게 빠져들지는 않았을 거다.... 남자든 여자든 아름다운 것들은.... 소름끼칠만큼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것들은.... 이미 질리도록 많이 봐왔으니까.... 개취급을 당하면서도 보장된 부과 권력에, 쾌락에 눈이 멀어.... 자기보다 어리고 버릇없는 난폭한 망나니에게.... 육신을 내던지며 덤벼들던 그 불나방들은.... 손짓 하나만으로도 장난감처럼 부리며 갖고 놀던 그것들은... 오히려 너보다도 더 아름답고 자극적인 것들이었다... 쳐들릴때마다 흘러내리는 소매 새로 드러난 경직된 팔근육에 베인 기합과 나뭇바닥을 울리며 힘있게 내딛는 발동작 하나에 따라 무겁게 펄럭이며 땀에 젖어 전신에 달라붙은, 어둠보다 더 짙은 도복 새로 드러난 희뿌연 목선에서 이어진 턱선이 간간히 경련을 일으키며 땀방울을 쉴새없이 목덜미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나 그건 단지 겉가죽뿐이란 것을, 시간이 지나면 추하게 변할 것에 연연해 겉만 화려하지 속은 텅빈 것들이란 것을... 그랬기에 애초부터 네 외모때문에 끌렸던건 아니었다... 그 언젠가 교내를 스쳐지나던 순간... 날 정면으로 직시해오던.... 갈색 막으로도 가려놓지 못한 그 처연한 눈동자 속에..... 잔인할 정도로 도발적인....그 곧은 빛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강간'이란 이름의 그 상황까지 날 몰아붙일 정도로... 그렇게까지 너란 존재가 날 뒤흔들어놓지는 못했을 거다... 땀에 절은 도복에 베인 후끈거리는 열기는 공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불규칙한 호흡에도 불구하고, 죽도를 거머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은 풀리지 않은데다, 유선을 그리며 힘있게 뻗어나가는 검세는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한 세기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구속도 보호도 아닌 나와 대등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게끔.... 그렇게 곁에서 도와주고 싶다고.... 다시는 울지 않게......포근히 감싸주고 싶다고.... 그렇게.....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바닥에 정좌를 하고 눈을 감은채 명상에 잠겼다가 정중동(正中動)의 자세로 손에 죽도를 들었을때, 일시적이나마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겨 잡념을 잊고 무아지경이 되었던 상태는, 매서운 파공성을 만들어내며 휘둘려지는 죽도에 서린 살기짙은 기운으로 인해 이미 깨졌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형을 사랑하지만....네 몸이 대신 필요했어.. 땀에 젖어 이마위로 흘려내려와 쉴새없이 땀방울을 떨궈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죽도 끝에 정지해 있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는 평소의 무심함이 아닌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냉기만이 가득했지만 그 차가움 속에 맴도는 이질적인, 열기로 달아올라 있는 공기를 한순간에 폭팔시켜버릴 듯이 위험하게 일렁이고 있는 그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네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에... 내가 반 미쳤던건 사실이다... 하나 차가운 물세례를 받던 널 본 순간.... 네가 혼절하며 쓰러지던 그 순간.....난 깨달아야했다... 그가 너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가를.... 너와 나의 관계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란 것을.... 그래서 네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내게 마음이 있어 남은거라고.... 강압이 아닌, 너도 조금은 날 원했기에 안겼던 거라고.... 그렇게 애써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잔뜩 힘이 벤 팔뚝으로 매섭게 휘둘려진 죽도에 의해 파생된, 이젠 숨기지도 않고 드넓은 도관 내를 가득 메워버리는 섬칫한 살기만큼이나, 물에라도 들어가 나온 듯이 땀에 흠씬 젖어 후끈거리는 열기를 토해내고 있는 도복을 걸친 마른 듯하면서도 근육으로 다져진 전신에서 발산되는 분노의 파장은 공기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렇게 크나큰 것이었다. "하앗!!!!!!!" 도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열리지 않고 굳게 닫혀만 있던 입술에서 터져나온 기합성과 함께, 치켜든 죽도로 아예 허공을 반동강 내버릴 듯이 비스듬히 가르다가 급속도로 선회한 죽도를 수직으로 세워 그대로 나뭇바닥을 찍어버리자 요란한 울림과 함께 허공으로 파편을 날려버린 죽도의 파열음(破裂音)과 그 속에 깃든 살기어린 분노가 내부를 진동시키며 바닥에 미진한 떨림이 전해졌다. "...헉....헉.... ...위험해.......이런건..." 허물어지듯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끝이 깨진채로 세워진 죽도의 손잡이에 이마를 기댄 재원이 숨을 몰아쉬며 굳은 듯 한참동안 그 자세로 있으면서 어떻게든 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한번 뒤헝클어져버린 심기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고, 애초에 이따위 훈련이 아닌 실전을 그것도 진검으로 대련하고 싶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파괴적인 욕구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에 대한 맹렬한 분노에 한동안 이를 악물며 치솟는 살심을 자제해야 했다. ".........안승호.........대단해......정말 대단해서.....박수라도 치고 싶을 정도야.... .......단 하루로 두 달여의 시간을.... 쓰레기 취급받게 만들어 놓더니..... .........겨우....보름만에 입을 연 첫마디가.........그건가......" 거친 호흡소리가 차츰차츰 사그라들면서 어느새 내부는 쥐죽은 듯 조용한 적막감에 휩싸였고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몸이 땀이 식어 급속도로 차가워 지고 나서도 한참후에야 몸을 일으킨 재원은 그대로 죽도를 떨어뜨리고는 전신에서 흘린 땀방울로 인해 물기가 흥건한 바닥을 지나 어둑어둑한 도관을 빠져나가면서도, 이렇게 밤잠을 못이루고 죽도를 손에 들게 만든, 머릿속을 울리는 하나의 음성으로 인해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분노와 이유 모를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며 입가에 쓰디쓴 고소(苦笑)를 베어물었다. "........결국..... 너한테 난.....아무 것도 아니었어....." -55- # # # 속절없이 서로에 매혹되버린 아직 어린 두 영혼... 애수(哀愁)에 가려 보이지 않던 열기서린 情念이.... 도발적으로 빛나던 그 빛이 다시 가려지던 날 이후... 성숙한 감정에 눈을 뜨게 되는 두 개의 영혼.... [上] "거기, 창문 좀 열어!! 등교하면 환기부터 시켜. 이 먼지 좀 봐. 어휴, 냄새. 이게 교실이냐? 돼지우리지! 사내놈들만 우글우글대니.. .........그리고............또 결석인가?" 조례를 하러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레퍼토리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지 항상 같은 잔소리만 해대는 담임이, 교탁 앞에 서자마자 자동적으로 시선을 준 자리가 여지없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잔소리의 끝마디에 매달은 약간 짜증섞인 말에,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월요일인데다 6월이 시작되는 첫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산만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껴 책에다 머리를 처박고 조용히 자습하던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돌아보면서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기회는 이때라는듯이 술렁이며 어수선해지는 통에, 아침부터 후덥지근한 날씨만큼이나 짜증이 돋은 담임이 들고 있던, 한 대 맞으면 어디가 않부러지는게 더 이상하지만, 성인이나 다름없는 덩치들에다 무거운 학업(學業)에 찌들었으면서도 엄청난 먹성에 걸맞게, 주체못할 정도로 넘쳐 흐르는 에너지를 발산치못해 불만이 가득한 10대 후반의 사내아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몽둥이나 다름없는 막대로 교탁을 부서뜨리기라도 할것처럼 연속해서 세게 내리쳤다. "이 놈들이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1분 1초가 아쉬운 판에 그따위 정신상태로 어디다 써먹어!!!!" 나무로 만들어진 교탁과 몽둥이가 거세게 마찰을 일으켜서 만들어낸,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위압적인 경고성(警告聲)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고3 수험생이라는 압박감 때문인지 시험을 연상시키는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 어떤 상황이라 해도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잠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예외없이 찬물끼얹은 듯 삽시간에 조용해진 교실에서 죄라도 진것처럼 밑으로 고개가 수그러져 축 쳐져있는 어깨들을 둘러보던 성난 눈동자 위로 애초부터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책만 들여다 보고 있는 한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자 이내 짜증과 노기가 서서히 사그라들며 다소 미묘한 빛이 섞여든, 감탄과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성격이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 하난 기가막히단 말야. 저번 모의고사도 전국석차 2등 먹었지... 결국 S대냐 아니냐가 아니라 수석이냐 아니냐의 문제군. ....그에 비하면....' 다시 빈자리로 시선을 힐끔 던지던 그의 눈동자에 이내 짜증섞인 의아함이 떠오르더니 다시 한번 아침부터 학생들에게 부담을 줘서 하루종일 소화가 않되는게 아니라 아예 입맛까지 없애버릴 소리만 연발한 후, 반장에게 자습을 지시하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게 벌써 몇일째야 대체. 집에 아무도 없나.. 전화도 않받고, 연락도 않되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만큼 조용하던 녀석이.... 한번에 몰아쳐 말썽 부리는군' 심기(心氣)를 반영하듯 요란하게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담임의 모습이 사라지며 발자국 소리가 이내 멀어졌지만, 교실에는 학생들만 남았음에도 워낙 아침부터 영양가 있는 소리만 들어놔서 그런지, 아니면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새삼 자각했는지 평소였다면 조금은 흐트러졌을 분위기가 여전히 침중한채로 다들 책에서 시선을 떼질 않고 있었고, 담당 선생들이 다 의아해할 정도로 그날 수업 내내 그리고 보충수업이 다 끝나갈때까지도 몇몇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그런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16일...' '종잡을 수 없다'라는 것은 상당히 미화된 표현이란 것을 그자신도 듣는다면 인정할 정도로, 과격한 성질과는 걸맞지 않게 세간에서 '천재'라 통칭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학교에서 S대 수석입학도 거의 확실시할 정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유망주인 칠현의 두뇌 회로속에 그날 내내 떠올라 있던 것은, 담임이 떠들어댄 공부도 입시도 아닌, 오직 16이란 숫자 하나뿐이었다. '저번 만찬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다음날 결석. 그것도 이번엔 16일 연속으로. 그날만도 멀쩡하던 놈이...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말 몇마디로 침체된 분위기에 동조해 하루종일 기분이 축 쳐져버린 덩치들 틈에 끼여 어깨뼈가 내려앉을듯이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교실 문을 빠져 나가는 칠현 역시 평소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아닌,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것처럼 맥빠진 듯 상당히 지쳐보이는 모습이었고, 오늘만이 아니라 요 몇일 내내, 아니 날이 갈수록 그런 경향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미친놈. ..놈이 그런 감정을 드러낸다고? 어림없지. 반대의 상황이었대도 그놈은 태연하게 학교에 왔을거다. 바보 멍청이같은 어느 누군가처럼 말이지' 비록 이후에 자신을 추스렸다해도 그렇게 완전히 흐트러져 금새라도 허물어질 듯이 불안정해 보이더니,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던 칠현의 밤을 지새 충혈된 눈동자가 예외없이 발견한 것은, 충격을 숨기지도 못하고 허둥대는 에릭을 동반한채 보좌관에게 그날의 스케쥴을 들으며 성큼성큼 홀을 가로지르는 승호의 모습이었다. -......혁이한테.......네가 좀 전해줘라. 손을 집어넣고 있던 교복바지 호주머니 속에 계속 원주인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 아니 애초에 재원에게 건네줄 심산으로 가져왔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아 어쩔수 없이 갖고 다니던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칠현은, 그것을 자신에게 건네주며 우혁의 이름을 말할 때 승호의 눈빛 깊숙한 곳에 어려있던 마치 뭔가를 결심한 듯한 그 눈빛을, 그 결심이 뭔지는 진절머리날 정도로 잘 알기에 직접 전해주라고 고함치려던 자신을 한순간 그대로 막아버린, 마치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이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내놓은 슬퍼보이던 그 눈빛을 다시 떠올리게되자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뇌리에서 그것을 지우려했다. '병신같이. 이미 다 타서 재라도 남았을까 싶지만.... 그런걸 속에만 담고 있으니.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갈 거야. 왜 도로 빼앗지 못하는 거지? 정말 내 형이지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 그리고......그놈 역시' 차가운 심장의 소유자라는걸 온몸으로 표출해낼만큼, 정말 바늘하나 들어갈틈도 없이 빈틈을 보이지 않는 평소 냉정한 그모습 그대로, 아니 그 얼음심장에 몇겹의 철판까지 덧대어 아예 중무장을 해버렸는지 이전보다도 더 냉철하게, 잠이나 제대로 자는지 의심스러울만큼 집에 오더라도 일중독자마냥 회사일에만 전념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칠현은 날이 갈수록 냉정을 잃고 있는 것은 형인 승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린페에서 둘을 동시에 보고서도 그걸 나중에야 깨닫다니. 혁이에게 향한 관심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는데, 왜 처음부터 놈의 시선만은 그렇게 유독 신경에 거슬렸던건지 나자신도 의아할 정도였지만.....이제야 알게 됐어. ...그 이유를' 언제나 목밑까지 꼭꼭 잠겨져 있던 셔츠 단추가 두어 개 끌러지는 바람에 빳빳이 서있던 셔츠 깃이 늘어져 있는데다, 숨막힐 정도로 바짝 조여매던 군청빛 넥타이마저 느슨하게 풀려져있어 칼같던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항상 쓰고 있던 은테안경도 어느결에 없어져버린 맨 얼굴에다 약간 헝클어져 눈 위로 흘러 내려와있는 검은 머리칼까지 더해져 상당히 허술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항상 지나칠정도로 단정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던 모습에 생동감을 더해줘 잘생긴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형과 그놈은.......다른 듯하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닮은꼴이야. 인정하긴 싫지만, 빌어먹게도 ....그건 사실이지' 학교들이 밀집해있는 지역이라 비슷비슷한 시간대에 하교하던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한번쯤 다시 돌아보거나 계속 힐끔거리는 모습에서도 그런 것은 잘 드러나 있었지만 정작 그자신은 워낙 한가지 생각에 골몰해 있느라 그런 시선을 느끼질 못하고 있어서 교문을 나선 순간부터 자신을 꿰뚫을 듯이 쳐다보고 있는 하나의 존재도 미처 깨닫질 못하고 있었다. "우와, 좇나.. ...씨팔, 끝내준다. 저거 YZF...어? ..SP잖아?! 일본에서 직접 사갖고 온건가?" 왁자지껄 소음으로 가득한 도로변으로 나왔을 때 옆을 지나치던 누군가의 열광섞인 중얼거림에 여느때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칠현이 깊이 빠져있던 생각에서 쉽사리 벗어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엄청난 고가에다 한정수량의 야마하 기종을 소유하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YZF?.......YZF....750SP.....' 그리고 고개를 돌리기 이전부터 이미 누굴거라 대충은 짐작하고 있던 칠현의 눈에, 교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세워져 노을지는 석양에 반사되어 은색에 간간히 섞여 있는 적빛이 불타오르듯 빛을 발하고 있는, 날렵한 외관이면서도 꽤 중량감 있어보이는 바이크에 기대서 팔짱을 낀채 긴다리를 교차시켜놓고 있는 재원의 모습이 여지없이 눈안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고의로 그 위치에 세워놓았는지는 몰라도 그 옆을 지나쳐야 리무진이 있는 장소로 갈수 있기 때문에 재원을 발견한 순간 멈칫하던 칠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걸음을 떼어놓으며 시선을 돌리지 않고 도전하듯 재원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수업은 않들어오고.....평상복에다....이 사람많은 시간에....저 요란한 악세사리까지 달고. 다른 덜떨어진 놈이라면 과시하는 걸로 보겠지만.......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하는 주제에. 광고를 할 의향이 아니라면........이런 행동을 할 놈이 아닌데....' 창백한 피부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단점이 있긴하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춘듯이 잘 재단된, 후덥지근한 날씨로 인해 몇 개의 단추가 끌러진채로 소매를 걷어붙인 검은 린넨셔츠와 블랙진으로 전신을 휘감아 맵시있는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서, 바이크의 이미지와 매치되 위험해 보이면서도 몸에 베어있는 특유의 나른함으로 인해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까지 풍겨, 나타난 순간부터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었던 그 모습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던 칠현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몇가지 사실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모습은... 주목끄는건 질색인 놈이 저런 모습으로 내앞에 나타난 것은....? ........저놈과 내가 연관지어질 일은 우혁이밖엔 없어. .....16일 결석의 원인이.....그럼 우혁이때문이었다는 건가...?' 보름 가까운 기간 안본사이 헤쓱하니 꺼칠해 더 창백해 보이는 안색과 굳게 다물려 있는 바싹 마른 입술,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있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과 원래도 살이 없었지만 더 꺼진듯한 눈두덩에다 눈밑의 다소 거무죽죽한 기운까지, 꼭 어느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모습을 본순간, 그대로 칠현의 어금니가 꽉 맞물려졌다. '왜 그따위 모습이냐. 그 거만할 정도의 여유는 대체 어디다 내버리고..... .....어째서 네 놈이.... 패배자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거지?!' 분명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던게 분명한 그 모습을 보며 칠현은 검은색을 입는 사람의 여러가지 심리상태 중 부정적인 면에서, 뭔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혹은 기분이 침울하고 불안정한 경우가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다시 재원의 표정을 살펴보며 용건이 뭘지 한번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겉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안칠현. 우혁이 널 보고 싶어해" 바이크 옆을 지나칠때까지도 석상마냥 꼼짝도 않더니 자신에게 볼일이 있을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버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칠현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자 한순간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잠긴 듯이 조용한건 변함없었지만, 반대의사는 절대 용납지 않겠다는 의지를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 놓는, 웬지 평소의 나른하고 조소어린 기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긴장감서린 저음과 경직된 표정에, 칠현은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의 심각성 여부를 타진해보는 한편, 닮은꼴임엔 틀림없지만 어느 정도는 표준치의 반응을 보이는 승호와는 달리 도무지 일반인의 상식으론 예측불가능한 재원의 행동에 한동안 잠잠하던 성질이 또 불끈불끈 치솟기 시작했지만 저조한 기분에 걸맞게 그런 충동은 금새 사그라들고 말았다. "걔가 왜 날 보고 싶어해? 날 미워할텐데" 무시하고 지나치려다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멈춰선 칠현이 빈정대듯이 대꾸하며 다시 지나가려했지만 기대서 있던 바이크에서 몸을 떼어낸 재원이 더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며 칠현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어린애같이 굴지마. 그렇지 않다는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의외로 다혈질기가 다분히 있는 그의 성격상, 평소였다면 이미 핏대를 곤두세웠을 말이었지만 의외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칠현이 간소한 키차이로 거의 수평선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전히 속을 알길없는 검은 눈동자를 탐색이라도 하는듯이 한참동안 직시하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갑자기 더 무거워진 듯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힘겹게 추스려 올렸다. "......난 할말없어. 보고싶지도 않고. 더 이상.....만날 필요도 없어. .......어차피 우린......남남이나 마찬가지니까. " 입가에 매단 미소만큼이나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지나치려던 발길을 다시 그대로 붙들어 잡아버린 것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담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며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떠올린 것은, 재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오직 단 한 단어때문이었다. ".....같이 가줘. ..부탁한다" 커다란 열대나무 기둥 뒤에 서 있던 유모는 연못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마치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린 듯이 꼼짝도 않고 수면을 응시하고 있는, 날이 갈수록 더 마르는 것만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도 거의 거르고....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만 보내니....' 입맛이 까다롭기보다는 원래 체질적으로 먹는걸 즐기지 않는듯한 우혁이 한번 맛을 보고는 무척 감탄했던, 직접 구운 바삭바삭한 크로와상과 쥬스잔, 신선한 과일들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던 그녀는 힐끔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우혁을 보며 굳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가 자신의 기척을 아예 느끼지도 못할 거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방해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잘 알기에 윽박질러서라도 먹이려했던 원래의 생각을 돌이켜 그대로 화원을 조용히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문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날 사진을 가지러 저택 내로 들어갔을 때 우혁에게 손님이 올테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게하라는 이회장의 지시를 뒤늦게 받은 그녀는 곧이어 그 손님인 듯한 말쑥한 정장차림의 두 청년이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화원 쪽으로 다가오다가 한 사람만 들어가고 나머지 한 명은 입구에 서서 아무도 접근을 못하게 감시라도 하듯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치솟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웬지 다른 듯하던 이회장의 엄명(嚴命)을 상기하며 화원이 잘 보이는 창가에 서서 굳게 닫혀있는 입구와 그 앞에 서 있는 청년만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우혁군이 그와 연관이 있었을 줄은......대체 무슨 사이길래....'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화원을 뛰쳐나오다가 입구에 서있던 남자와 부딪힌 우혁이 심하게 휘청대면서도 그대로 저택의 후문 쪽으로 도망치다시피 달려가버린 것과 완전히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우혁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뒤따라 나온 청년이 넘어질 듯이 위태롭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쫓아가려는듯했지만 현기증이 나는지 한순간 비틀거리는 바람에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황급히 부축하는 것을 창문으로 보고 있던 그녀는 우혁이 침실로 올라갔을거라 짐작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 청년이 웬지 눈에 많이 익어 그대로 서서 그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쫓아갈 생각도 잊었는지, 아니면 그럴 의지를 아예 잃어버렸는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만 보던 그가 고개를 떨군채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체념이라도 한 듯 그대로 몸을 돌리자 그때까지 그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가 당황해하며 연신 양 방향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앞서간 그의 뒤를 따라 잔디밭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가 그녀가 새벽에 부엌으로 내려왔던 재원에게 말해준 것들이었다. '분명....그 남자는 SM의 안승호 사장이었어.....' 재원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는 이회장이 사람들로 북적대는걸 삼가하는듯 연회를 열지 않아 근래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이전엔 파티 때마다 초대손님 중에 항상 최우선 리스트에 오르던, 멀리서밖엔 보지 못했어도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외모가 아닌데다, 사업계에선 머리에 피도 않말랐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젊은 나이임에도 이루어놓은 실적이 워낙 엄청난데다 악명까지 골고루 갖춘 남자인지라 그녀의 기억 속에도 꽤나 강한 인상을 심어줬던 젊은이였다. 게다가 몸 속에 아마도 차가운 피가 흐르는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밖엔 본 기억이 없었는데 그녀가 그날 본 안승호는 완전히 제페이스를 잃은듯한 모습이었기에 그녀의 의구심섞인 호기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계속 이 상태이니.....정말 사람 피말리겠군....' 그날 새벽, 재원을 올려보내놓고 다시 침실로 가 잠을 청하려다가 얼마안가 요란하게 울리는 내부전화의 수화기를 들자마자 흘러나온, 고막이 그대로 터질듯이 다급하게 외치는 음성에 부리나케 3층 침실로 올라간 그녀가 발견한 것은, 피부가 벌개져 온몸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상태로 반실신해 있으면서 괴로운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자꾸 뒤척이는 우혁의 모습이었다. -......하아......더...워......흑......아...... 또한 침대로 옮겨놓은 후에 보드라운 타월로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으려는 시도를 해보다가 피부가 따끔거리는지 아파하며 무의식중에도 흐느끼며 울자 그 이후론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침대가에 무릎을 꿇은채 우혁을 바라보고 있다가 열에 시달리며 괴로워할때마다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켜 저절로 갖다 대려는 자신의 손을 그때마다 으스러져라 꽉 틀어잡고서 전신에서 물을 떨어뜨리며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쇼크로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재원의 모습까지 본 순간 그대로 심장이 멎는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어떻게 그지경까지 됐는가에 대한 의문따위는 할 여유도 없이, 그나마 이런 위급 상황에 나름대로 노련한 그녀는 즉시 넋이 나가있는 재원을 밀쳐내고 주치의가올때까지 응급처치를 하며 온몸의 부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혀주려했다. 그리고 새벽에 자다가 호출되어 왕진가방을 들고 졸린 표정으로 황급히 들어서던 주치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성을 잃고 있던, 우혁이 마취제로 인해 깨어나지 못했던 그 이후로 간만에 다시 접하게된 재원의 시퍼렇게 날이선 시선에 그대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는지 불만어린 기색도 없이 우혁의 몸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경미한 화상으로 피부가 약간 데인 정도일뿐, 기력이 회복 되는대로 곧 의식을 차릴거라는 말에 그때까지도 잔뜩 경직된 채로, 진정제를 놔서 잠이 든 우혁을 아예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던 재원은 긴장이 풀린데다 전신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피곤에, 연겨푸 당한 쇼크까지 겹쳐 진이 다 빠졌는지 그대로 쇼파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또한 때아닌 소동에 잠이 깬 이회장의 호출로 잠시 내려가 일의 경과를 보고한 그녀는 그 다음날 저녁때쯤 우혁이 의식을 되찾을때까지 도움도 않되고 오히려 방해만 놓으면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재원을 간신히 떼어놓고 간호를 했지만 정신을 차린 우혁은 단지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닌듯, 그녀가 보기에도 이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 말을 잘 않하는 편이긴 했지만 분명 말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데다, 그래도 그녀는 좀 낫지만 재원이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만나도 흠칫거리며 바짝 긴장하는통에, 좀 떨어진 곳에 있다해도 좀체로 긴장을 풀지 않고 심지어는 경계까지하는 듯한 그 태도는 처음 우혁이 이곳에 왔을 때 둘사이에 일던 긴장감보다도 그 강도가 배는 더 센듯했고, 표면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재원의 심정이 어떨거란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기에 그녀조차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 나가줄테니 몸사리지 말고 자. 않건드릴테니. 학교에도 가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래도 우혁의 근처에 있으면서 잠도 쇼파에서 자는 기색이던 재원이, 결국 그런 날들이 열흘을 넘기게 되자 더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는지 아예 침실과 멀찍이 떨어진 복도 맨끝방으로 옮겨가 버린후로는 더 이상 우혁을 보려 하지도 않고, 한동안 타지않던 바이크를 끌고 나가 새벽녘이나 다음날 아침에 들어오거나 아니면 근래들어 출입을 거의 않하던 도관에만 처박혀 몸을 혹사하는 행동만 반복했고, 기력을 되찾은 우혁은 모든 일의 근원지인 듯한 그 화원의 연못가로 가 항상 같은 바위에 앉아 멍한 채로 하루를 보내는게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거야!!! 나 미치는거 보고 싶어?!!! 둘의 사이가 원만하기만을 바라던 그녀로서도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을만큼 상황은 갈수록 점점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달리는 듯했고, 급기야 어제 해가 다 저물고나서야 저택내로 들어오던 재원이 때마침 화원에 나갔다가 들어오던 우혁을 발견하고는 저항하는 그의 팔을 거머쥐고 침실로 끌고 들어가 방문을 닫자마자 이때까지 그녀가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난 듯하면서도 어딘가 절박감어린 고함성이 복도 밖까지 새어나왔다. 복도에서 재원에게 질질 끌려가던 우혁의 모습에 뒤쫓아갔던 유모는 침실문이 닫힌 순간 터져나온 고함소리 이후로 다시 불길할 정도로 조용해진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문짝을 그대로 부서뜨릴 듯이 거칠게 열며 밖으로 나온 재원의 모습을 본 순간 그만 저도 모르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예전의 손도 못댈 정도로 난폭하고 거칠던 모습에서 느꼈던 두려움은 지금에 비하면 차라리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정도로 전신이 아예 날이선 칼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재원의 모습은, 우혁에 버금갈정도로 말라가는 그 형편없는 몰골까지 더해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적색경보를 울리게 만들었고, 다음날도 어김없이 화원으로 향하는 우혁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듯한데다 심경을 반영하듯 점점 말라가는 그 모습은 거의 피골이 상접해 봐주기가 처참할 지경이었다.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는지 재원이 옮겨간 침실의 침대는 잠을 잔 흔적이 없었고 그의 취미이자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동쪽 별관에 딸린 창고 속의 가와사키 ZX-6R, 혼다 CB750, BMW K1100RS, APRILIA RS125 등 차 한대와 맞먹는 고가의 바이크들 중 한 대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자꾸만 고개를 드는 불길함에 가슴을 졸이는 한편 답답함에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쯧쯧.......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바보처럼 서로를 괴롭히기만 하니......언제까지 이럴려나...." "제기랄!!! 너 누구 심장마비 일으킬 일있어?!!" 퇴근시간인데다 학생들의 하교차량들로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혼잡한 도로를 무한질주(無限疾走)하다시피 하며 비좁은 차량들의 틈새로 완전히 곡예를 하다시피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가는 바이크의 뒷좌석에 불안정한 자세로 짐짝처럼 매달려가며 죽음의 공포가 어떤거란 것을 시시각각으로 체험하고 있던 칠현이 신호등에 걸려 처음으로 멈춰서자 버럭 고함을 질러댔지만 되돌아 온 것은 이 시끌법적한 도로에서 잘들리지도 않게 예외없이 사람 신경을 긁어대는 나즈막한 저음이었다. ".......뒤에서 앵앵거리지마. 않그래도 사내놈이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소름끼치는 판에.." "이런 빌어먹을!!! 난 뭐 좋은 줄 알아?!! 그러니깐 차로 가자고 했잖아!!" ".......한밤중에 도착하라고...?" 빠르게 달리는게 주목적인 레플리카의 특성상 긴급사태가 아니라면 뒷좌석에 사람을 태우게끔 배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2인승으로는 적합지 못한 바이크 인지라 지금도 앞보다 더 높은 위치에 앉아 상체를 잔뜩 수그려 재원의 등에 달라붙은 자세로 다리는 재원의 허리를 바짝 조인, 보기에는 아예 안다시피한 자세로 편할 것 같지만 상당히 허리에 부담이 가는데다 불편한 것만이 아닌 낯부끄럽기까지 한 자세로 매달려 있던 칠현은 이렇게 멈춰 서 있는 동안 버스 안에 가득찬 학생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후덥지근한 날씨라 쓰기 짜증났던 헬멧의 존재로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마치 알몸으로 무방비하게 노출된 것만 같은 수치심에 다시금 이를 갈아야 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이놈 수작에 말려들어 이따위로 매달려가다니..' 재원의 입에서, 그것도 자신에게 '부탁'이란 단어를 사용할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던대다 그같은 타입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는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칠현은 한동안 당혹스러하며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그 역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라 자신이 그동안 당한 것과 승호의 일까지 겹쳐 걷잡을수 없이 치솟은 분노와 지금 상황이 암시하고 있는, 재원이 자신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는 잔인한 심리로 인해 미처 어쩌기도 전에 그대로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그대로 내뱉고야 말았다. "부탁?.....그걸로는 부족해. 네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한다면 또 모르..."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칠현 역시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결코 이렇게 될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나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훤한 대로변에서, 게다가 않그래도 시선을 잡아끌고 있던 두사람이 같이 서있는 모습에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많던 이곳에서, 재원의 정수리가 칠현의 가슴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장면은 분명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뭐, 뭐야?!!!.....제기랄 그만해!!!" 재원의 한쪽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기 직전 칠현이 아차하며 고함을 질러 제지시키면서도 한순간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그 거만한 자존심에 평생 남을 앙금을 남길뻔한 일을 지금 칠현이 재원에게 시켰던 것이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행동을 재원은 하려했던 것이다. ".....너....제정신이야? 자존심도 없어?" 오히려 당사자인 재원은 멀쩡한데 마치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듯한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칠현이 황당함과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말했지만 몸을 일으키던 재원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안색 하나 변하지도 않았다. ".......자존심따윈 중요하지 않아. 널 꼭 데려가야해" "너...?!! 무슨 일 있구나. 뭐야, 무슨 일이야" 그리고 대충 얘기를 듣는 순간 지금 우혁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간파해버린 칠현은 거의 자발적으로 재원을 따라 지금 우혁에게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하나 녹색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뒷차들에게서 아예 멀찌감치 달아나버리는 바이크에 탄채로 재원의 등허리를 꽉 부둥켜안은 칠현은 눈이 벵벵 돌정도의 속도와 부딪히지 않는게 더 신기할 정도로 차 사이를 빠져나가는 곡예에 심한 어지러움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이를 갈아야 했다. '....빌어먹을!!! 이놈 수작에 넘어간 거야!!!!' -왜 이러는 거야!!! 나 미치는거 보고 싶어?!!! 그래?!!! 대답해!!!! 뼛속까지 파고들 듯이 우악스럽게 움켜쥔 팔뚝을 거세게 흔들며 귓속을 찔러오는 고함소리는, 저항할 기운도 없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금새라도 부러질 듯이 흔드는대로 이리저리 위태롭게 흔들리며 심한 현기증을 일으키던 우혁에게도 그 성난 음성속에 베어있는 고통과 애원에 가까운 절박한 심정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칠...현이...... 한번씩 세차게 흔들릴 때마다 들썩이며 허공으로 날리다가 다시 얼굴 위 한번씩 세차게 흔들릴 때마다 들썩이며 허공으로 날리다가 다시 얼굴 위흐트러져 내려앉던 윤기잃은 백금빛 머리카락 새로 드러난공허한 암청빛 눈망울에서 시선을 떼지않던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벌려지는 메마른 입술로 시선을 내렸을때, 너무나 강인해 흔들림따위는 없을 줄 알았던 그 눈동자 위로 한순간 상처받은 듯한, 허무에 가까운 빛이 스쳐지나갔다고 여긴 것은 분명 자신의 착각일 것이다. -........벙어리가 된건 아니었군 그래.... 연못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듯 흐릿한 망막 위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한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수면에 정지되있던, 생기를 잃어버린 암청빛 눈동자 위로 조금씩 뿌연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왜, ...그놈 이름은 차마 못부르겠으니 .....대신 그놈 동생이 보고 싶나? 한참만의 침묵 끝에 음산할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고는 잡고 있던 팔뚝을 놔주자, 간신히 몸을 지탱시키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바람에 심하게 휘청거리다가 바닥으로 힘없이 주저앉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던, 딱딱하게 굳은채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그 뒷모습을 떠올린 순간, 우혁은 약간 후덥지근한 내부온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오한에 흠칫하며 떨다가 계속 떨림이 멈추지 않자 양 팔로 어깨를 감싸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나 지금 뭐하는 거야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난 이방인이나 다름없는데....왜 아직도 이곳에 있는거지....?' 새로이 시작된 6월과 함께 저택내의 공기가 더한층 활기차지면서 진입로의 양옆에 쭉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녹색물결을 이뤄내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마치 파도처럼 한쪽으로 우수수 쓸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매일같이 수명의 정원사들에 의해 잘깎여 끝도 않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져있는 잔디밭의 군데군데 거대한 조각품처럼 놓여있던, 그동안 켜놓지 않고 있던 분수대들이 일제히 뿜어낸 물을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 올리다가 햇빛에 반사되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수십 개의 갈래로 나눠져 꺽어진 물줄기를 다시 수면위로 세차게 떨어뜨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더위를 한꺼번에 씻어내는 듯한 그 시원하고도 장관어린 광경은 저택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만들었다. 밤이면 그 치솟는 물줄기에 같이 섞여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광채(光彩)가 가로등이나 석등보다도 더 밝게 정원을 비춰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내는 모습과 방안에 있어도 창문으로 흘러들어와 저택내를 향긋하게 물들이는 라일락과 장미 향 등, 이전이라면 시선을 빼앗겨 넋을 놓았을 그 모든 것들도 지금의 우혁에겐 아무 감화(感化)도 주질 못하고 있었고 오늘이 몇일인지, 욕실에서 쓰러졌던 것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는 것을, 아니 자신이 이곳에 온지 어느새 2달 가까이 되간다는 것조차도 자각을 못하고 있었다. '....승호형도.....너도....내게서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정말....모르겠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사람들을 피해 매일같이 이 화원으로 숨다시피한채 쉴새없이 번갈아가며 뇌리로 밀려드는 두사람의 모습과 두 개의 목소리에, 자신을 끝갈데없이 다그치며 선택을 강요하는 두 개의 상반된 영상에 우혁은 계속해서 시달리며 끊임없이 번뇌해야 했다. '.....이 꼴을 봐, 이재원.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면서...저하고 싶은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수습도 제대로 못하면서 타인에게 폐만 끼치는 이 꼴을..... ....나도 내 자신을 참을 수가 없는데....넌 더하겠지...' 정신이 든 후부터는 않그러려해도 이전보다도 더 재원이 의식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자꾸만 움츠러들며 경직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지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은채 잠까지 쇼파에서 자다가 이젠 침실까지 옮겨버린 재원을 차마 붙잡지 못한 것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윽박지르듯이 고함치던, 괴로워하는게 역력한 그 모습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것도, 경련을 일으키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이름에 허망한 듯 쓴웃음을 짓다가 냉랭하게 돌아서던 그 모습에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하려 내밀었던 손을 그대로 떨궈버린 것도 계속해서 우혁을 심한 죄책감 속에 몰아넣고 있는 한 사람의 영상때문이었다. '지금은 날 원하고 있다해도......네 마음을 믿을 수가 없어. 그래서....겁이 나. 자꾸만....겁이 나. 넌...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잖아.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주적이지도 못한 인간인지...넌....아무 것도 몰라. 네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건 단편적인 것일 뿐이야. 하지만... 승호형은 달라. 분명.....너와는 달라....' 자신을 아기때부터 옆에서 내내 지켜봐온데다 잠이 들거나 아침에 눈을 뜰때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도 승호의 모습이었고,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질러도 크게 꾸짖지 않으면서 언제나 신뢰감 가득한 따뜻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비록 남들에겐 차갑게 대한다해도 또 그렇게 서로를 살갑게 대하는건 아니라해도 뭘 원하는지 눈빛만 봐도 알 정도로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언제나 변함없이 잔잔한 모습으로 평안한 안식처가 되주었던 그 모습을 자신의 손으로 처참하게 부숴뜨린, 두 번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모든 일의 근원이자 이 곳에서 벌어졌던, 절대적인 신뢰감을 깨뜨려버렸던 그 날로,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던 아니 아예 그럴 정신도 없이 급작스럽게 모든 일이 일어나버렸던 그날로 우혁은 되돌아가고 있었다. [下]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 미치는거 보고 싶어?!!! 할수만 있다면 아예 뇌리에서 지워버리고만 싶은 끔찍했던 그날의 영상이 승호에게서 다시 재원으로 넘어간 순간, 짙은 슬픔과 암울한 고통만이 가득하던 암청빛 눈동자가 간밤부터 쉴새없이 반복해서 귓속를 찔러오는 절박한 부르짖음에 심란한 심경(心鏡)을 반영하듯 쉴새없이 흔들리다가 마치 안개라도 뒤덮인 것처럼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던 우혁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았으면서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재원을 받아들이는게 쉽지 않은 것은, 아니 아예 그를 거부하는 듯한 반응까지 보이고 있고 또 재원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오해를 풀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너 하나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걸........알게 하고 싶지 않아....' 승호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탐하고 있던 그 순간에, 만약 재원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아무리 난폭한 취급을 당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해도 그렇게까지 자신이 그를 발작적으로 거부하진 못했을 거란 것을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난.......내 혈육이나 다름없던 사람까지도...... ......열정 하나에 미쳐서.... 내친거나 다름없는 짓을 해버렸어......' 이전까진 어떻게든 승호의 손길에 반응해 보려 한다던지, 되도록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버텨내려 했던 그 모든 노력이 가급적이면 승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우혁 나름대로의 처신이었는데 그날 자신의 감정을 깨닫던 순간, 그리고 재원을 떠올려버린 순간, 우혁은 마치 승호가 자신을 겁탈이라도 하는 듯한 반응을 보여줘 버렸던 것이다. '......십 수년간이나 지속된..... 그 안정적인 관계를....... ...고작.....몇 달의....불같은 장난과.....바꿔버린게......내가 한 짓이야....' 자의반 타의반으로 승호와 연인 사이로 있으면서도 우혁에겐 그란 존재가 연인이란 의미보다는 여전히 형이라는 의미로 더 크게 와닿았고, 그랬기에 자신이 그를 거부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승호의 배려를 자신이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항상 그와의 관계에선 속마음을 숨긴채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게 지금까지의 모습이었다. '.....그래.......네가.....날 원한다는 건 알고 있어......또한..... ......네 마음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어........하지만....' 그런데 재원을 향한 마음으로 인해 신뢰감어렸던 그 관계마저도 스스로 깨뜨려버리고 자신을 안으려는 승호를 그 순간엔 형으로서도 아예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타인보다도 더 심한 취급을 해버렸던 것이다. '......네 그 열정이......언젠가는 꺼질 불장난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승호 형을 거부해버린 내가....... ........좋아라고 널....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랬기에 지금까지 우혁이 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 정도로 그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는 줄은 몰랐던터라 스스로도 조절이 불가능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재원을 선택하게 만들어버린 그 무모한 감정에 때늦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하지 않을 거야........결국 언젠간......끝나버릴 것을....... ............내 마음을.......들키고 싶지 않아.........' 분명 이 모든 일이 그만의 잘못도 아니고 그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건만, 승호와 자신의 관계에 끼여들어 안정적인 그 관계를 자신의 손으로 깨뜨리게 만들어버린 재원에 대한 원망과 그럼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그에게 이끌리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우혁을 더욱 심한 자괴감(自愧感)에 빠지게 했다. '.......죽어도....알게하고 싶지 않아.....' 또한 형이자 보호자로서의 승호를 정말로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이젠 두 번 다시 승호나 칠현이 자신을 보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던 그 두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배신했다는 죄악감, 또한 마찬가지로 생면부지의 남이나 다름없는 재원을, 그의 마음 하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그런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재원을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선택해버린 자신의 무모함 등, 그 모든 심경이 하나로 뒤섞여 급작스레 한꺼번에 밀려든 그 혼란함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게 지금 현재 우혁의 상태였다. '.......하지만....내가....잘못하고 있는건지도 몰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빛보다 더 밝은 청록빛을 띄고 있는 수면 위의 연꽃에서 석교(石橋)로 시선을 옮겨간 우혁은 끝갈데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승호에 대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날이 갈수록 자꾸만 이기적으로 되가는 자신의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흘리며 바위 위로 끌어 올려 팔로 감싸고 있던 무릎 사이에 숨듯이 도로 고개를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할지.....정말....모르겠어....' 재원이 이런 자신의 혼란을, 혈육이나 다름없는 승호와의 관계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또한 이 모든 심적불화(心的不和)를 다 없애버리게끔 그에게서 확신을 얻고 싶어하는, 추호도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에 져서, 전날 자신을 윽박지르던 재원에게 그대로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까지 일으켰을 정도였다. 하나 결국 그 긴박한 순간에서조차 스스로도 자신이 정말 미울 정도로 여지없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또 고스란히 표출되어 마치 재원의 다그침에서 회피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고 말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 차마 그놈 이름은 못부르겠으니..... 승호만큼이나 칠현이 보고 싶었던건 사실이었지만 재원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지라 그 상황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해선 않되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분명 자신의 이런 혼란스런 심경을 이해해 줄, 자신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두려울만큼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 칠현을 만나고픈 마음이 그 순간에 그대로 충동적으로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와버렸던 것이다. '.......칠현인.....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렇게 보고 싶으면서도 실상 승호보다는 칠현과 마주치는게 더 겁날 정도로 재원의 곁에 남은 자신에 대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딱부러진 그의 성격상 분명 자신을 경멸하고 있을거란 것과 이젠 두번다시 자신을 보려하지도 않을 거란 것은 불을 보듯 훤한지라 우혁은 정말로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외로움과 쓸쓸함에 딱딱한 바위에 앉아 웅크리고 있던 몸을 팔로 더욱 세게 안으며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흑....." 하나 승호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지금 현재 자신을 본질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한순간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심상치 않던 냉랭함과 모든 것이 다 끝난 것만같은 느낌에 밤새 내내 눈물짓게 만든데다 계속해서 악몽까지 꾸게만든, 눈을 질끈 감고 있어도 또다시 떠오르는 재원의 싸늘한 뒷모습에 우혁은 다시금 서러움이 북박쳐오르자 웅크린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 계집애처럼 숨어서 혼자 질질 짜고 있냐. 나이 값 좀 해라. 장우혁"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조차 못느꼈는데 언제부터 뒤에 있었던건지, 흐느낌이 입밖으로 새어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귀에 익은 빈정거림이, 하나 원래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감기라도 걸렸는지 다소 낮아진 톤으로 목이 잠긴듯한 하나의 음성에, 그리고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란걸 깨닫는 순간 우혁의 몸은 그대로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테라스 창문의 반쯤 제쳐놓은, 하늘거리는 커텐 틈으로 밀려드는 달빛과 침대 옆에 켜놓은 스텐드 불빛으로 다소 어둑어둑하긴하나 사물은 분간해낼 정도로 밝기로 훤한 침실 내부의 어느 한 지점을,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대고 긴 다리를 교차시킨채 빨갛게 타오르는 필터끝에서 스물거리며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건네다 보는 한 인영의 전신엔 여유로워보이는 특유의 나른함과 무심한 기운이 자연스레 베어 있었다. 하나 가끔 담배 연기를 내뱉을때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에도 방안 쪽으로 흘러 들어갈 여지도 없게끔 그때마다 고개를 약간 돌리는 입술 틈으로 연기가 흘러 나올때마다 같이 스며나오는 희미한 한숨소리에는 뭔가 잔뜩 억눌린 기운이 숨기지 못하고 같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담배를 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지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인영의 전신이 침실 안쪽에서 간혹가다 희미한 새울음 같은 소리가 흘러 나올때마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약하게 흔들렸다. 달빛에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다소 창백해 보이는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무심함은 여전히 변함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억제돼 있는 잔뜩 짓눌려 있는 기운으로 인해 오히려 그런 느긋함이 보는 사람의 심기를 제압해 상상치도 못할 두려움을 느끼게해서 방대한 정원 곳곳에 모습이 드러나 있지 않은, 고성능 망원경과 감시 카메라로 사방을 살피고 있던 경호원들이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로 테라스 난간에 팔꿈치를 댄채 방 쪽을 향해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은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하나 그 자신은 그런 것은 깨닫지도 못하는지 가끔가다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기도 하며 몇 개피째인지도 모를 담배를 여유롭게 피다가 마침내 난간에 기대섰던 몸을 떼내 담배를 비벼끄고는 테라스 창문 너머 불 밝혀진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반쯤 걷혀져 있던 커튼을 쳐, 방안을 차단시키는 긴 신형(身型)의 그림자가 커튼에 비쳤지만 이내 경호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알아?" 정체가 된 도로 한복판에서 거북이 운행을 하다가 아예 멈춰서버린 차안에서, 차창 밖의 밤거리를 휘황찬란하게 밝히는 네온사인들과 화려한 쇼윈도 앞을 분주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무감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승호의 귀로, 밖의 소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고요한 차안의 적막을 깨뜨리는, 뭔가 의미심장한 기운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야심한 시각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있던 승호는 교복차림 그대로 회사에 찾아왔다가 바로 옆좌석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칠현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오늘따라 평소와는 다른 행동만 하고 있는 동생에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물어야 하는거냐?" ".... 전해주고 왔어" 자신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 전면만 뚫어지게 응시하던 에릭의 등이 움찔하다가 숨소리까지 죽이며 바짝 긴장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건네준 날부터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갔다왔다는 자신의 말에도 관심조차 없는지 차창 밖으로 향해져 있던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승호에게서 여전히 아무 반응도, 대꾸도 나오질 않자 칠현의 눈꼬리가 단박에 치켜올라갔다. "오늘 우혁이한테 갔다 왔다고! 듣기는 제대로 들은거야?!" 그 무심한 가면을 깨뜨려버리고 싶은 잔인함에 한순간 울컥해서 내뱉은 말에 대해 되돌아온 반응이, 승호의 턱선이 조금 굳어 있는 것과 부드러운 정장 바지에 휘감긴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손가락이 미약한 경련을 일으키다 이내 멈추는, 옆차선에서 스쳐지나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잠시 비췄다 사라진 순간 짧게 드러났던 그 희미한 반응을 놓치지 않은 칠현이 그 끔찍한 자제력에 이를 갈며 더 강도가 센 연속타를 날렸다. "혼자서 처량맞게 우는건 어딜가나 똑같더군. ....그 청승맞은 꼴이라니" "..................혼자.......울고 있었다고....?" 이미 더이상 헝클어질데도 없이 뒤죽박죽 뒤엉킨 심기였지만 칠현의 도발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서서히 속력을 내며 빠르게 달리는 차안에서 뒤로 휙휙 지나치는 밤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눈빛의 고요함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세차게 흔들리다가,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움켜쥔 승호가 한참만에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뱉은 음성은 잔뜩 목이 쉬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질질 짜기만 했어. 나보고 나서도 울고..."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미동도 않고 있는, 멀리서 봐도 바싹 마른 등줄기와 수그려져 있는 백금발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웬지 가슴이 뭉클해졌던 칠현은 재원과 같이 뒤로 바짝 접근할때까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던 우혁이 뒤돌아 자신을 보고부터는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먹거리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한순간 울컥했던 심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다시 걷잡을수 없이 마음이 답답해진 나머지 승호와 별다를바없이 잠긴 음성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목걸이 보고 또 울고, .......형 편지 보고부터는 완전 홍수던데....? .........울고 울고 또 울고 .......지겹도록 울었어" 어차피 마주쳐봤자 상처줄 말밖엔 하지 않을 것 같아 아예 만나지도 않으려 했었는데 마치 길잃은 새가 어미라도 발견한 듯이 미처 어쩌기도 전에 자신에게 달려들어 끌어안고는 혹시나 밀쳐낼까 두려웠는지 아플 정도로 등을 꽉 부둥켜안은채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던 그 가련한 모습에, 품안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뼈밖에 만져지지 않던 그 감촉과 애처로울 정도로 바싹 말라 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눈만 두드러진채로 눈물로 흥건히 젖은 그 얼굴을 본 순간, 결국 칠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혁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라고 썼길래..... 그렇게 ....... 통곡을 하게 만들어?" 전신을 미친듯이 떨어대며 겁에 질린 얼굴로 내내 주저하다 자신이 건네준 편지를 읽으면서 점점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더니 다리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아 아예 목을 놓고 울다가 심신이 탈진해 편지를 움켜쥔채로 반실신해버린 우혁의 모습이 마치 환각처럼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 순간, 또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놓는 그 애절한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다시 들려온 순간, 칠현은 옆에 앉아 있는 승호의 전신이 이젠 눈에 띌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시트 등받이에 뒷목을 기대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자식 표정..........큭........" 처음 화원에 들어서서 웅크리고 있는 우혁의 뒷모습을 발견했을때부터 웬지 표정이 굳어있는 듯하더니 자신에게 안긴채로 울면서 한참을 있어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우혁에게서 집요하게 시선을 떼질 않던 재원이, 편지를 읽고나서 반실신해버릴때쯤에 가서는 안색이 눈에 띌정도로 창백해지던 것을 다시 기억해낸 칠현은 그렇게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놓는 모습은 교실에서 그에게 당했던 이후론 처음봤던지라 눈을 감은채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혁이가....형 편지 읽고 나서 우는거 보고....완전히 한방 먹은 얼굴이었어...큭큭..." 목걸이와 편지라는 웬지 의미심장한 물증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눈앞에서 뚜렷하게 보여주는 우혁의 반응으로 인해, 그 상황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분일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일이었지만 칠현이 그때 느꼈던 감정은 통쾌한 복수심 따위가 아닌, 자신이 수년동안 진절머리 날 정도로 보아왔던 승호의 모습을, 그 전철을 되밟아 가는 듯한 반응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재원의 모습에 그도 별수 없구나싶은 마음이 불현듯 들어 웬지모를 씁쓸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재원의 얘기가 나온 다음부터는 아예 미동조차 않고 있는 승호의 전신에서 억제치 못하고 스며나오는 살기와 고통, 증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해 볼 수조차 없다는 울분섞인 체념까지 생생히 느끼고 있던 칠현은 그의 심정이 지금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느 누가 믿겠어. 기술하나 빼앗아간 이유로 회사 전체를 아예 짓밟아버리는 그 안승호가........실상 회사따위하곤 비교도 않되는걸 뺏겼는데도.......분명 죽여버리고 싶은 놈을 아예 건드리지조차 못하는 그 진정한 이유를... 나도 어이가 없을 정돈데..... ' 0 승호에게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재원이 우혁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기등등한 반응을 보여줬던 이전과는 천지차이로, 그로부터 시일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를 칠현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혁이가 그놈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꼴이라니. 미치고 환장하겠군, 정말!! 웬 신파야 이게....이러니 내가 속터져 죽지!!!' 물론 현실적으로 본다면 그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실상 재원을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그의 막강한 배경때문이 아니라, 우혁이 재원의 옆에 강압이 아닌 자발적으로 남아 있는 이유로 인해 그를 어찌해볼 수조차 없는 승호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칠현은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도 더이상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 승호를 괴롭히지 않고 다시 우혁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 바보... 분명 형이나 내가 아예 저를 않볼거라 생각하고 혼자 끙끙 앓았겠지. 자기를 못봐서 더 속 끓는건 우리라는 것도 모르는게. 대체 바보인건지, 순진한건지. 게다가....그 놈의 반응을 보면 웬지 둘의 사이도 원만치는 않은거 같고. 하긴, 혁이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않봐도 훤한 일이지만.... 어휴, 골치아퍼' 미처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대로 재원의 팔에 들어올려져 힘없이 늘어진채 실신한 상태로도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서 멀어지던 우혁의 모습이, 밑으로 내리뜨려져 맥없이 흔들리는 손가락에 움켜쥔 편지를 그래도 놓지 않고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꽉 움켜쥐고 있던 그 모습이 눈을 감고 있어도 이내 다시 떠오르자 칠현은 착찹함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가죽 시트 속에 깊숙히 파묻어버리고 말았다. 비록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어도 칠현에게 말로만 듣고도 눈앞에 그 장면들이 생생히 그려진 승호는 끝까지 침묵만 지킨채 아무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우혁이 울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안색은 헤쓱하게 변한지 이미 오래였다. '.......그 놈 때문에...' 귀를 막고 싶어도 들려오던 칠현의 씁쓸한 목소리와 눈을 감은채 말문을 닫아버린 울적한 모습, 그리고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승호의 음영이 드리워진 헤쓱해 보이는 옆얼굴을 운전석에 앉아 빽미러로 보던 에릭의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동자가 다시 전면을 향하더니 그 언젠가 자신과 부딪혔을 때 자세히 보았던 하나의 모습이, 앞 뒤 상황을 볼 때 이 모든 일의 근원임에 틀림없는 그 모습이 떠오르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차 내부는 이내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지만 세 사람 다 각자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 말로는 표현못할 비감어린 기운이 내내 맴돌고 있었고, 핸들을 거세게 움켜쥐고 있는 에릭의 얼굴에 한순간 갈등이 스쳐지났지만 이내 뭔가를 결심했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 위로 서서히 단호한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Z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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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혁의 창백한 얼굴은 눈물로 잔뜩 얼룩진채 긴 속눈썹엔 아직도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깊게 잠이 들지 못해 계속 미약한 흐느낌이 새어나오던 붉은 입술은 조금 벌려져 있어 이제는 한결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낮게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쿠션들 위로 부채꼴처럼 흩어져 있는 백금빛 머리카락과 땀에 젖어 실처럼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몇가닥의 머리칼, 눈밑으로 늘어져 그늘을 만드는 긴 속눈썹과 움푹 꺼져 검푸른기가 맴도는 눈두덩, 홀쭉해져 광대뼈가 도드라진 뺨 등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속내를 알길 없이 깊히 침잠되어 있었다. '...........완전히....반쪽이 됐군' 않그래도 갸름했던 얼굴이 그야말로 이젠 피골이 상접했다고 밖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몇일 새에 바싹 말라버린 얼굴의 윤곽을 다시 한번 두 눈으로 뚜렷이 확인한 순간, 검은 눈동자에 드리워져있던 나른함과 무심함 따위는 씻은듯이 가신채 안타까움과 염려로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분명 그 마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손으로 쓰다듬지 않을 수 없을게 뻔했기에, 간신히 깊게 잠든 우혁을 혹시나 깨우게될까봐 미리부터 호주머니에 아예 집어넣고 있던 손가락이 그래도 충동을 못이겨 경련을 일으키자 재원은 침대에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있던 몸을 떼어 뒤로 약간 물러섰다. 바싹 메말라 있다가 오늘 하루 쉴새없이 흘린 눈물로 인해 촉촉히 젖은채로 조금 벌려져 있는 붉은 입술과 그 속에 보이는 조그만 분홍빛 혀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간순간, 어두워져있던 눈빛이 다소 미묘하게 짙어지며 홀린듯이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하나 금새 자조적으로 입가를 비틀며 입술에서 떼어낸 시선을 섬세한 턱선으로 옮겨가 우아하게 뻗은 목선을 훑듯이 따라 내려오던 검은 눈동자가 쇄골에 걸쳐져 있는 목걸이에 멎는 순간 그대로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흰 피부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손톱 크기만한 핏빛 보석이 박혀있는 타원형의 메달은 단순히 루비보석 하나만이 포인트로 박혀 있었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은 섬세하고 우아한 세공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운데다 가늘고 정교한 줄은 어딘가 젊은 여성들에게 어울릴 듯한 그런 디자인이었지만 우혁의 가느다란 목에도 맞춘 듯이 너무나 잘어울린다는게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너절한 놈' 느닷없이 더워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자신에게도 이렇게 치졸한 감정이 있었는 줄은 이전엔 미처 몰랐던 재원이 요즘들어 부쩍, 특히 전날 우혁을 윽박질렀던 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懷疑感)이 또다시 밀려들자 자조하듯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하나 하필이면 돌려진 시선의 끝자락이 얼굴 옆에 놓여져 있는, 오른손 손가락이 반쯤 말린채로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구겨진 종이에 멈춘 순간, 그리고 그 종이 속에 무슨 글이 적혀있는가 하는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 글을 읽고난 후 우혁이 보여준 반응을 떠올린 순간, 다시금 끓어오르는 심화(心火)에 쓰디쓴 고소(苦笑)를 머금으며 막 뒤돌아서려 할때였다. "........으..........흑.........." 이제는 푹 잠든줄 알고 안심했더니 반쯤 벌려진 입술 틈으로 또다시 흐느낌이 새어나오자 이렇게 잠이 든 상태에서도 쉬지 못하고 심기를 해치고 있는 우혁을 안타까이 내려다보던 재원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려 시트를 적시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수그려 손가락으로 살짝 눈물을 훔쳐내었다. "..............흑......." 전날 자제심을 잃고 팔뚝을 거머쥐고 흔들던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는 16일만에 처음으로 우혁의 얼굴을 만져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눈물을 훔쳐내던 손가락이 아까부터 해주고 싶었던,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는 몇가닥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올려주다가 이마를 짚어본 재원은 미진한 열이 느껴지자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열을 식혀주듯 가만히 대고 있었다. 다시 피부를 쓸듯이 가볍게 밑으로 내려가 홀쭉한 뺨을 살포시 감싸쥔 채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눈까풀을 내려다보며 손에 와닿는 볼의 감촉으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에 재원은 그간 얼마나 우혁의 몸이 축났는지를 새삼 절감하고는 다시 한번 짙은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여전히 속눈썹에 매달려 있는 눈물방울을 보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가만히 입술을 갖다대려다가 내내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아닌 신음같은 한마디가 귓속을 파고든 순간 그대로 동작을 멈춘 재원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 이후론 더 이상 흐느낌조차 새어나오지 않자 나즉한 한숨과 함께 수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제발.......흑.......가지..마....." 하나 다시 눈물을 줄줄 흘려내는 경련을 일으키는 속눈썹과, 울음섞인 애원성을 토해내는 붉은 입술, 흐느끼느라 시트 밑에서 조금씩 들썩이며 흔들리는 몸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재원의 얼굴 근육이 조금씩 굳어지는 동시에, 더 이상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가로질렀다. "..........하아......." 하나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희미하게 귓속을 찔러오는, 내내 흘러나오는 흐느낌이 아닌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인 신음섞인 한숨소리에 잠시 멈칫하며 문 손잡이에 갖다댄 손을 돌리지 않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던 재원은 그 소리가 뭘 의미하는건지 깨닫는 순간 그대로 경직되버리고 말았다. ".......하아.........으.....응......." 한순간 자신이 뭔가 착각을 일으킨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뒤돌아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재원은 조그맣지만 이번에야말로 정확하게 귀로 파고드는, 이렇게 또렷한 맨정신인 상태에선 결코 들은 기억이 없던 그 소리에 완전히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가 충격에서 조금 벗어난 순간, 빨리 빠져나가지 못한 자신에게 이를 갈며 후회해야 했다. -....입다물어. 시끄러워. 과거 방탕한 시절 파괴욕(破壞慾)보다도 더 흥미를 끌지못했던, 단지 또 하나의 지겨운 유희에 불과했던 잠자리에서 연상의 그녀들이 온갖 난잡한 행동을 하며 유혹해도 특별히 흥분해 본 기억조차 없던 재원은 오히려 그런 그녀들과 스스로를 비웃으며 모멸에 가까운 수치심까지 주었는데다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건 기본이었고 그것이 아무리 작은 소리라해도 바로 옆에서 귀를 자극시키는 소리는 참지를 못했기때문에 항상 신음을 내지르는 여자들의 입을 아예 시작부터 무자비할정도로 시트로 막아버리기가 다반사였었다. "......하...아........" 그랬던 그가 항상 듣는 것만으로도 반쯤 미치지 않을 수 없는, 하나 다른 그 어떤 자극보다도 더 자신을 흥분시키던 그 에로틱한 신음소리가 지금 뒤에서 들려오고 있음에도 재원은 장승처럼 굳은채 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정신상태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생경하기까지한 그 소리와 거기다 그 소리에 같이 곁들여져 들려오는, 당장 뒤돌아서서 지금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미칠듯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시트자락이 느릿하게 쓸리는듯한 효과적인 배경음까지 유난히 크게 귓속을 찔러옴에도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기분은 흥분따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큭...." 이미 잔뜩 경직되버린 얼굴 근육이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며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그대로 부셔버릴것처럼 세게 틀어쥐고 있던 재원의 고개가 문에 닿을정도로 숙여지며 이를 악문 입술 틈새로 자조섞인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응....." 하나 갈수록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피가 날만큼 입술을 깨물고는, 마치 한열지옥 (寒熱地獄)에라도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전신이 싸늘하게 식었다가 급속도로 다시 끓어오르는 고통 속에서도 애써 살기를 억누르고 있던 재원의 무섭도록 창백해진 얼굴이 또다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온 순간, 심장에 비수를 박아 갈기갈기 찢으며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을 유발시키는 그 신음소리와 시트 위로 몸이 스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한차례 뒤집혔던 속이 완전히 뒤집혀 토할 듯한 기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급히 문을 열고 방을 나가느라 한참후에야 뒤늦게 들려온, 신음의 끝마디에 매달려 있는 이름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재.....워...." 탄식에 가까운 음성으로 다소 불분명하게 하나의 이름을 흘려보낸 붉은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며 울먹이듯 움찔하다가 이내 경련을 멈추며 다시 깊게 잠이 든 듯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자, 문이 닫히며 외부와 차갑게 단절되버린 드넓은 내실은 고요한 적막감(寂寞感)에 휩싸이며, 밝혀져 있는 불빛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어질수록 암울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56- # # # 어긋나버린 저주받을 운명의 굴레...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준다해도.... 어차피 다시 시작될 잔인한 운명인 것을.... 차라리 이때 모든 것을 잊고자 했다면...... 이 쓰레기같은 인생도 여기서 막을 내렸을텐데..... [上]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요란한 모터음이 저멀리서 들리나 싶더니 어느새 어두운 밤하늘에 나타난 헬리콥터의 동체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착륙장 정가운데의 H자에 정확히 내려앉자 프로펠러가 채 멈추기도 전에 바닥에 내려선 이회장은 늦은 시각임에도 기다리고 있다가 정중하게 허리를 꺽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평소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던 이전과는 달리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굳은 표정으로 대기해 있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회장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처음부터 홀로 떨어져 선채 차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아봤자 20대 후반 가량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뒤따라 올라타자 차는 착륙장의 진입로를 빠져나가 불빛 한점 없이 어두컴컴한 숲 사이로 난 포장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진, 그 놈이 아무 움직임도 보이질 않는다고?" 뒷 숲 너머의 공터에 만들어져 있는 헬기 착륙장에서 저택까지는 차로 10분 가량은 지체해야할만큼의 거리상에 놓여 있었기에, 중간 차단막이 올려진 실내등조차 켜놓지 않은 어두운 차의 내부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이회장과 그의 보좌관인 진이란 이름의 사내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하고자 하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틀림없습니다. 저택을 방문한 날부터 벌써 20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회사에 있는 때가 아니면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경제사절단의 고문격이자 사적으로 대통령과는 당총재시절부터 불가분의 우호적인 친분관계로 인해 이번 유럽순방 때 사절단의 일원이면서도 거의 관광겸 일진그룹의 유럽지역 지사들을 둘러본다는 차원에서 같이 동행했던 이회장은 떠나기전, 웬일인지 그대로 물러가버린 안승호를 예의 주시하고 있도록 그에게 지시했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는데...." 처음봤을때부터 이미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보였던 이회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미심쩍은듯 자신을 유례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건네다보고 있음에도, 또한 그 원인이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안승호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이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진이라 불린 독사처럼 차가운 인상의 사내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채 주저없이 대답했다. "제 시야에서 벗어났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날뛸 정도로 물불 않가리던 놈이....... 아직껏 아무 행동도 않한다?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게 분명해" 대외적인 명목상 그의 직책은 보좌관에 불과하나 실상은 이회장의 오른팔이자 조언(助言)까지 구하는 참모(參謀)로, 암암리에 일진그룹 산하의 모든 전반적인 주요정책이 거의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올 정도로 엄청난 두뇌의 소유자인 진은, 실상 이회장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제이인자의 위치임에도 전면적으로 표면상에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대대로 이씨가문의 가주 (家主)를 보좌해 왔던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감시의 눈을 떼지 말도록. 그놈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어. 놈이 행동을 개시하면 그 타켓이 누가 될거란건 말 않해도 알겠지. ........잘못되면.....아무리 자네라도 목을 내놔야 할거야"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이 진이란 사내의 정체가 단순히 이회장의 보좌관이 아닌, 방대한 그룹내 계열사 사장들을 막후에서 통솔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실권자 (實權者)라는 사실과 회사일뿐만 아니라 이회장이 눈을 돌릴 수 없는 잡다한 일까지도 대부분이 그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애는....?" "일주일 전부터 다시 등교하고 계시지만.....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승호가 저택을 방문한지 정확하게 24일째에 해당되는 오늘,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대통령의 환영만찬회까지 같이 참석했던 이회장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저택으로 되돌아오는 중이었지만 진에게서 그간의 근황을 내내 상세히 보고 받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대체 어찌했길래 그 아이가 그 지경까지 처했단 말인가!! ....그래 ....고작 그거 하나 못 말린단 말인가?!!!" 원인을 알길 없이 다시 시작된 재원의 폭음(暴飮)과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가 다시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바이크를 끌고나가 몰래 뒤쫓아 다니던 경호원들의 시야를 번번이 벗어나 종적을 아예 감춘다다던지, 술에 취하지 않는 날에도 새벽이 되야 들어와서는 도관에만 처박혀 있다는 사실을 유럽에 있으면서도 내내 전해들어 속만 끓였던 이회장이 이렇게 언성(言聲)을 높이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다. "잡아주게끔 데려온 아이 하나로 인해......좀 나아지나 했더니..... ....오히려 그 아이를 더 망치고 있는게 아닌가 지금!!!!!!" 도저히 눈뜨고는 못볼 정도로 몸이 축나 있는 재원의 모습을 몰래 찍어 팩스로 보내온 최근의 사진들을 통해 보게된 이회장은 분명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납치해온 소년에게 있을거란걸 짐작했기에, 애초부터 탐탁치 않아 납치후론 아예 관심밖에 두던 그 존재에 대해 진노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듣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정도로 계속해서 폭갈을 터뜨렸다. "그 소년이 원인인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회장님" 평상시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표면으로 드러날 정도로 숨기지도 못하고 불편해보였던 심기(心氣)의 원인이 이미 짐작했던 것이었기에, 더더군다나 그 납치 계획은 시종일관 자신이 추진했던 일이었기에, 이회장의 분노가 그 소년만이 아닌, 어지간해선 건드리지 않던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진의 음성은 톤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이회장과는 달리 여전히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납치만으로도.......위험수위에 다다랐으니까요" 평소 그 어떤 것에도 무심하던 검은 눈동자가 우연히 드넓은 저택 내에서 마주치는 자신을 볼때면, 삽시간에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다가 다시 칼날같이 곤두서며 언제든지 마음만 내킨다면 날을 잡아 사냥해 주겠다는 듯이 위험스럽게 번뜩이던 것을, 흡사 과거의 그 난폭했던 성정(性情)이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던 그 잔인한 눈빛을 진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소년에 관한 일은 이대로 모른척 관여치 않으시는게..." 이회장의 분노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한순간 섬뜩하게 만들던 그 눈빛이 경고하는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은 이회장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다짐시키듯이 계속해서 충고의 어조(語調)로 말을 덧붙였다. 하나 그에 대해 되돌아 온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드러내 놓지 않던, 냉혹하기 짝이 없는 그자신의 본래 성격을 고스란히 표출시키는 말들뿐이었다. "내 아이에게 하등 도움도 않된다면 내겐 쓸모없는 존재일뿐이야!!" 분위기만큼이나 무거운 암흑이 내리덮인 차 내부를 추상같은 노기(怒氣)로 계속해서 위험하게 진동시키며 얼음처럼 차가운 어조로 말하는, 어둠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싸늘한 냉기로 인해 눈동자만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앞의 이 사람이 일진그룹의 이재석 회장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란 것을, 아니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진은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일진을 이끌어갈 하나뿐인 내 후계자다. 마음만 먹는다면 수천억 자산(資産)으로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존재란 말이야" 그 말대로 한국의 정재계(政財界)를 손에 쥐고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졌음에도 오만한 기색 하나없이 함부로 힘을 남용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던, 평소 대외적(對外的)으로 명망높고 인자한 인상을 가진 그 일진그룹의 이재석 회장의 본래 성정(性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진을 포함한 극소수의 몇몇 심복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해야 옳았다. "그런데 고작.... 그런 보잘 것 없는 남자아이 하나한테 휘둘려서..... 그 아이가 더 망가지고 있지 않나!!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할텐가!!!" 이회장의 진면목(眞面目)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선대 회장의 성정까지 되새기면 혹시 혈통상의 유전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그가 얼마나 냉혹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알기에 얼굴 표정만 가지고 그 심기를 파악하려해선 절대 않된다는 것을 심복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진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를 종잡을 수조차 없어 계속 불안해해야 하는게 현실이었다.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과거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실 수 있었던 분과..... 과연 동일인인가 하는 의심이 간혹가다 듭니다. 어렸던 제게도.....그 사건은 정말 충격이었지요' 실제로도 이회장뿐만이 아니라 대대로 손이 귀해 몇 대째 독자(獨子)인 이씨가문의 후손들이 본래부터 무자비할 정도로, 용서라는 것은 아예 모르는 차가운 심성(心性)의 소유자들이란 것을, 그리고 그것은 대를 이을수록 더욱 심화(深化)된 사실이란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는 오직 진 한명 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의 당신이라면 그런 말을 하진 못했을텐데....결국은 당신도 그토록이나 증오했던 전대 회장님처럼 되고 말았다는걸.....자각이나 하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그 끔찍할 정도로 차갑고 오만한 피의 속성을... 당신이 젊은시절 그토록 증오했던 그 피를 결국은 대물림 받으셨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잘 아는 진으로서는 그 우혁이란 이름의 소년이, 이미 벌써부터 조짐이 보였던 재원의 그 냉혹한 심성을 순화시켜 줄지도 모를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정말 존재가치를 따질수도 없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회장이나 유모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과는 실상 비교도 않될 차원에서 항상 둘의 관계는 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신에겐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도련님을 미혹시키는 요물로도 비칠테지만 그래서 그 소년은 무척이나 귀한 존재입니다. 정말 도련님을 위한다면.... 절대 핍박받아선 않되는 존재란 말입니다. 과거 당신이 실패했던 것처럼... 이 관계가 실패한다면......또다시 같은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말겠지요' 리무진이 숲을 거의 다 빠져나와 어둠 속에선 윤곽밖엔 보이지 않는 저택의 거대한 외관이 차창을 통해 눈에 들어올때쯤 이회장이 여전히 냉혹한 음성으로 마치 마지막 통고(通告)을 하듯 싸늘하게 내뱉었다. "애초에 납치했던 근본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계속 저런 식이라면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나" 그 말마따다 어떤 것에도 관심조차 두지 않고 흔들림이 없던 재원을 좋은 방향이든 않좋은 방향이든 그정도로 흐트러뜨릴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소년이 얼마나 재원에게 중요한가를 이회장이 모를리 없을테지만, 또한 그랬기에 애써 좋게 생각하고 자신의 납치 계획에 동의했던 것이지만, 실상 이렇게 지금에서야 그 어린 소년에 대한 적개심에 가까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드러내놓는 본질적인 이유를 진은 이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로.....그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자체부터가.... 처음부터 꺼림칙했어" 주종인 철강, 반도체, 자동차산업같은 주로 수출에 치중하는 중공업뿐만 아니라 호텔, 백화점 체인에서부터 시작해 가전, 전자제품같은 내수산업에서도 수위(首位)를 차지해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업인 일진그룹의 총수좌라는 것은, 단순히 재계 (財界)만이 아닌 사회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그 지위가 의미하고 있는 책임감은 힘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아직 늦지만 않았다면.....아예 그 싹을 잘라버리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싫다해도 결국 언젠가는 회사를 이끌어야 하는 자신의 후계자를, 그토록이나 엄청난 힘을 갖게될 남자를 이 정도로 뒤흔들 수 있을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를, 그것도 유일하게 단 하나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위험성을 뒤늦게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애초에 기대감과는 별개로 그 존재에 대해 갖고 있던 불쾌감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젠 그 냉혹한 성격만큼이나 극단적인 수단까지 생각할 정도로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표정하나 바뀌지도 않은채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직은.....좀더 두고 보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회장님. .....서둘러서 좋을건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내 생각엔 오히려 서둘러야 할 것 같지만..... ............자네 말대로 좀더 두고볼 수밖에..." 사람의 생명 하나가 오락가락하는 상황임에도 그런 끔찍한 말이 마치 매사 듣는 말인 듯이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채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진도 사실은 납치를 계획했을때부터 혹시나 이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자신의 염려가 결국은 딱 들어 맞았다는 것에 내심 놀라고 있는데다, 예상보다 그 시기가 너무 일찍 왔다는 것에 미처 대안(對案)을 마련해두지 않은지라 당황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늦었습니다. 회장님. 그럴수 없다는걸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건.....그만큼 신경에 거슬리신다는 거겠지요' 게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과연 재원이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과 지금은 간신히 보류시켜놨다해도 이회장이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고 일을 단행했을때의 결과를 떠올린 순간 에어콘이 틀어져있는 내부온도와는 별무관한 한기(寒氣)에 오싹 소름이 돋은 진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난하게 타개해나갈 해결책을 고심하느라 셔츠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이야 알길 없지만 당신의 그런 행동이.....결국은 이렇게.....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걸.......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군요' 않그래도 자신을 이회장의 개로 보고 있는 재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납치를 진행한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알아낼 필요조차 없다는 듯, 아예 자신을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의 일에 또다시 간섭한다는 자체부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면서도 이 상황에선 모험을 단행할 수밖엔 없다고 생각한 진은 그 성격만큼이나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어쩔수 없군. 나라도 나설 수 밖에..' 이회장의 심복들은 다 개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 무심한 눈빛 속에 어쩔 수 없는 경멸이 떠오르는 것을 매번 봐왔었지만, 워낙 저택 내부가 드넓은데다 타이밍도 맞지 않아 사실 이때껏 몇번 마주치진 않은 편이었다. 하나 납치 이후로는 비록 입은 꾹 다물고 있지만 자신을 볼때마다 경멸의 차원이 아닌, 얼음처럼 싸늘하게 얼어붙던 그 잔인한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발적으로 목을 내놓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떠올린 진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이 분명 자기보다 어린 소년이란걸 잘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만....' 처음 납치를 했던 그때 당시와는 비교도 않될만큼 달라져 있을게 분명한 현재 재원의 성향을, 또한 근래들어 재원과는 마주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순간, 정말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진은 어둠속에 자신의 얼굴이 가려져 이회장에게 않보인다는 사실을 내심 다행스러워해야 했다. '.......베일 각오 해야겠군. 휴...어디 한군데 잘리지만 않으면 다행인데' [中] '아....방금....?' 이상한 진동음(振動音)에 흠칫하며 눈을 뜬 우혁은 자신이 꿈결에 환청을 들은게 아니라 실제로 바이크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또한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이내 멈춘 엔진음이 실제라는 것을 깨닫고는 반사적으로 벽시계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들어 오는거야? 그래서....' 잘못 본줄 알고 몇번이나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시간이 새벽 3시를 넘겼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반쯤 몸을 일으켜 쿠션에 기대앉은 우혁은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괸채로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칠현이 찾아왔던 날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안색이 어두워졌다. "....바보같이...." 미처 어찌해볼 틈도 없이 급작스레 틀어져버린 재원과 자신의 관계에 마음이 무거워진 우혁은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는게 분명한 그의 행동이, 이렇게까지 된데에는 분명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원망섞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날.... 내가 한 말때문에...?' 그날 이후 더 이상 화원에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책만 보면서도 내내 재원과의 악화된 관계로 울적해해야했던 우혁은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 하나때문인데도 그것도 몰라주고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재원의 행동이, 혹시 그것때문인가 싶어 한순간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내가 왜 남았다고 생각하는거야..... .....정말........바보같이.... 그 말을 믿고 있는거야.....?' 승호에 대한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학심(自虐心), 그리고 정말 자신에게 그런 잔인한 심리가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정도로 승호가 받은 고통만큼 재원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그 잔인한 말을 정말로 믿고서, 이제는 아예 자신을 보려하지도 않는건가 싶어 않그래도 헤쓱했던 낯빛이 더한층 창백해지고 말았다. ".........흑...." 그렇게 끔찍한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즉시 재원의 창백하게 질려버린 표정을 보며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는듯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승호가 당한 고통만큼 둘다 고통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혀를 깨물며 참아야 했던 그 비참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린 순간, 말한마디 하지 않는 그의 무정함과 이런 자신의 혼란한 심정을 몰라주는 야속함에 급속도로 다시 서러움이 밀려들자 이내 눈물이 가득 차올라 하루종일 울지 않으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입밖으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미안해.....형...나.... 지금만 울게....' 승호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울지 않으려 했었지만 벌써 일주일이나 재원과는 마주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말 한마디 나눠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그때문에 더더욱 서러워 금새 눈물로 얼굴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정말.....다시는 않울려고 했는데....' 여전히 변함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한건 둘째치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바라봐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우는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여자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侮蔑感)과 초라함,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비참함을 이기지 못한 우혁이 한참을 자기비하(自己卑下)만 하다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시트를 잡아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흑.......흐윽...."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목걸이를 손에 쥐고 매만지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내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 결국 흐느낌이 더 커지자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시트로 입을 틀어 막으며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야했다. 그래서 경호원들도 돌아다니지 않는 이 시간에, 쥐죽은 듯 조용하던 복도로 느닷없이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침실로 다가올수록 웬일인지 점점 느려지더니 문 앞에 다다를 쯤엔 아예 멈춰 섰다는 것을 우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지나친게 아닐까 싶을만큼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그대로 다시 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기척이 났지만,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희미한 소리들이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이 시간에는 조금만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들렸을텐데도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채 시트 밑에서 소리죽여 흐느끼며 자괴감 (自愧感)에 빠져 내내 괴로워하던 우혁이 갑자기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맞아....그게 있었지....' 갑자기 시트를 제쳐 몸을 일으킨 우혁이 눈물을 훔치며 서둘러 장식장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문을 열고 자신이 예전에 발견했던 술병을 꺼내 들고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한모금만 마시면.....가슴이 않아플지도 몰라...' 금색으로 도금이 된, 술병이라고 보기엔 이상한 반인반마(伴人伴馬)상의 외관을 처음 발견했을때는 조각품인줄 알고 호기심에 살펴보다가 뚜껑이 달려있는 것을 보고 열어봤을때야 술이란걸 알았기에 그대로 놔뒀던 거지만 한모금만 몰래 먹으려는 생각에 우혁은 술병을 들어올려 영어가 아닌, 불어로 쓰여있는 주명 (酒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레미...마르뗑...리모쥬... 포도주인가?" 술을 마셔본 기억은 이때껏 샴페인 몇잔 정도가 최대였지만 포도주 정도면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뚜껑을 연 우혁은 확 끼쳐오는 향긋한 향에 분명 포도주일거라 생각하고는 마음을 놓고 글라스 바닥에 깔릴 정도로만 조금 따라냈다. 맑은 호박빛 액체를 긴장감서린 눈빛으로 들여다보던 우혁이 분명 적포도주는 아니니 백포도주가 이런 빛깔이었나 하는 의심이 잠깐 들었지만 이렇게 향이 좋으니 포도주가 아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글라스를 입술에 갖다댔다. "제가 상대해 드릴까요?" 어둠 속에서 눈이 시릴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는, 사람을 베지도 않았는데 살기가 맴돌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선 검을 검집에 꽂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재원은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조용한 도관을 울리며 귓속을 파고드는 하나의 음성에 않그래도 굳어 있던 표정이 더욱 삭막하게 굳어졌다. "......사양하겠어" "자신 없으신가 보죠?"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보아 어두컴컴한 도관의 입구에 선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란 것은 음성만으로도 알 수 있었기에 재원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진검을 놓아두는 보관대에 검을 올려놓으며 차갑게 대꾸했지만 즉시 되돌아온 말에 순간 눈썹을 꿈틀했다. "......실력이나 쌓고서 그런 말을 하지 그래" 왜 자신을 도발시키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주칠때마다 지치지도 않는지 가식적인 정중한 인사를 하면서도 실제로 몇 년 동안 제대로 말한마디 나눠본 기억조차 없는데 이 새벽에 도관까지 찾아와서 수작을 거는 이유를 따지거나 도발에 넘어가 대련을 하기엔 지금 자신의 마음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은 고사하고 완전히 평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던 재원은 근래들어 자신이 참을성을 잃고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는 것을 매사에 느끼고 있었는지라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나직히 말했지만 이미 진이 자신에게서 칼같은 예기(銳氣)를 감지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건....?!!' 불빛 한점 없이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비쳐드는 달빛으로 간신히 사물(事物)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기에 도관 중앙에 세워져 있는 것들이 사람의 형체를 띈 인형들이란 것과 바닥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것들이 그 인형에서 떨어진 조각들이란 것을 발견한 진은 발걸음을 떼어내 그쪽으로 다가가 조각 몇 개를 들어올리다가 나무란 것을 알고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게.....전부다....!!!!' 토막난 나뭇조각들의 잘린 면이 무라도 썰어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흠 하나 나있지 않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직접 손으로 만져서 확인한 순간, 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대 위에 올려져 있던,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온 국보급에 해당될 정도로 유명한 장인(匠人)이 만든 일본도 몇 개를 차례차례 칼집에서 뽑아보며 칼날을 들어올려 살펴보는 재원의 훤칠한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맙소사....장난인줄 알았더니.....' 단 한번에 베지 않으면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 쉽지 나무를 칼로 벤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진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직접 이회장에게 초청받아온 몇 명의 이름난 무예인들에게 검도를 배워온 재원이 방탕해지기 시작했던 중학교 이전까진 검도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며 어린애 장난처럼 우습게 봤던 것이 사실이었다. '언제 이런 지경까지 다다른거지?' 게다가 그 이후에 싸움만 일삼는 난폭한 방탕아가 되버려 검을 잡아봤자 괜히 무예(武藝)를 욕되게 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실상 제대로 연습도 않하는줄 알았더니, 성장한 이제와서는 거의 완성된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무도인이라고 할수 있지만 방금전 얼마나 웃기지도 않은 도전을 했던건지, 재원이 자신의 도발에 넘어가 대련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를 상상해 본순간 아찔함에 완전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하긴.....그래서 그렇게 무심했던건가....' 예전이었다면 자신의 도발에 넘어가고도 남았을거란 것을, 게다가 미리부터 알았다면 털끝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을게 분명한 그 소년의 납치로 인해 감정이 좋지 않은 이 상황에서 분명 자신이 먼저 대련을 하자고 했으니 정당한 사유가 됨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된 진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자신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완전히 무시한채 내내 진귀한 보석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칼날을 살펴보며 손가락으로 날을 건드려보던 재원이 칼을 도로 칼집에 꽂고는 땀에 젖은 도복의 끈을 끄르며 관내에 딸린 샤워실로 향하는 것을 보자 미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처음 이곳에 온 목적이자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괜한 참견이라고 하시겠지만.....어째서 저렇게 방치해 두시는 겁니까?" 자신의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선채 아예 미동도 않고 있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진은 그동안 재원이 얼마나 그 소년을 소중하게 대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심정으로, 또한 죄수가 판결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심정으로 그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 모습이 정말.... 18세란 말인가..?' 아무 반응도, 대꾸도 없는 눈앞의 사람이 분명 자신보다 10살은 더 어린 소년이란 것을 계속 되새겼으나 도관내를 가득 메우는 숨막히는 기운으로 인해 그이상 굳어질 수 없을만큼 전신을 바짝 경직시킨 진의 귀로 한참만에야 들려온 말은 예상과는 달리 뜻밖에도 너무나도 침착하고 조용한 톤이었고 심지어는 그 특유의 조소까지도 그대로 담겨져 있는 느릿한 저음이었다. ".......납치해온 책임이라도 느끼는 건가....아니면....." 하나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 이후에 흘러 나온 것은 지금까지의 차가운 음성이나 방금 전의 조소어린 음성도 아닌, 도관 내의 달아오른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한 냉기(冷氣)가 서려있는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음성이었다. ".........다른 뜻이 있는건가, ....진선생" 그 다른 뜻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 납치 이후론 참견조차 않하던 자신의 이런 갑작스런 행동이 오해의 여지를 불러 일으킬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진 사람은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든지 저렇게 자신과 연인의 일에 간섭 하려드는 기색만 비쳐도 편협한 시선으로밖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요. 왜 더이상 다가서지도 않는 거죠? 이때껏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울리지는 않아야 할거 아닙니까?!" 확실한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 불안해 보이는 두사람의 모습과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만 해 혼란만 가중시키는 재원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처음 납치해 왔을때부터 몰래 눈여겨 주시하고 있던, 분명 재원의 또래란걸 알면서도 그와는 비할데없이 너무나 가녀리고, 애처로울정도로 처연한 모습에서 느꼈던 연민을 다시 떠올린 순간, 진이 더욱 표정을 굳히며 왜이리 어리석냐는듯 질책의 뜻이 가득담긴 싸늘한 어조로 연이어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시면서 왜...." 처음 도관에 내려와서 그를 봤을 때부터 전신에서 느껴지던, 잔뜩 짓눌려 억제되어 있음에도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을 더 두렵게 만들던 그 위험한 기운(氣運)이 갑자기 배로 증폭되는 것을 느끼자 진은 저도 모르게 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을 꽉 움켜쥐며 말을 채 다 끝맺지 못하고 말았다. '저런 기(氣)는 숨기지 못하면.....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게 될거다.....' 비록 그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저런 어린 나이에도 벌써부터 이회장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압박감이 들정도로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그의 기(氣)가, 분명 좋은 방향으로만 간다면 사람들의 추종(追從)을 받는데 중요한 요인이 될테지만 한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타협(妥協)이라곤 모르는 그 성격을 생각해보면 장래 어떻게 될건지는 불을 보듯 훤한지라 예전부터 진은 진작에 그 점을 염려해왔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그가 뭘 하는지 아십니까?" 그랬기에 빈번하진 않지만 간혹가다 저렇게 적나라하게 표출시켜 사람의 신경을 극도로 곤두서게 만들어 절로 경계하게하는 저런 기질(氣質)을 눌러줄 사람을, 앞으로야 어떻든 현재로선 그 사람이 우혁이라고 밖엔 볼수없으니 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서재의 책들을 탐독..." "이 문을 나왔을때도 눈에 띄면....그땐 말로는 끝내지 않겠어" 자신의 말을 가차없이 끊어버린 음성은 지금처럼 살기짙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부드럽고 나즉한 저음(低音)이었지만 분명 그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될건지는 바보라도 알정도여서, 재원의 모습이 샤워실 안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도 아무 말도 못하고 완전히 질려있던 진이 정작 해야할 말은 다 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도관을 빠져 나오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내가.... 겁을 먹은건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어이없다는듯 중얼거리던 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는 재원이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 순간 이내 다시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렇게 되면.....직접 건드릴 수밖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짓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을 벗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회장이 안승호뿐만 아니라 재원까지도 아예 무시해버리고 또다시 그럴려는 마음을 갖게 될 때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진은 더 이상 미적거리며 여유부릴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결심을 굳혔다. 새벽이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라 윗옷을 벗고 있는 상반신에는 뭔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듯한 흉터들이 이곳 저곳에 있어 한번씩 몸을 움직이며 내뻗칠때마다 흉터들이 마치 살아있는 지렁이마냥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몸에 나있는 흉터들을 보면 막굴러 먹은 불량배같은 느낌을 받게 했지만 가느면서도 균형잡힌 몸의 선은 기품이 베어 있었고 우아하게 팔을 내뻗치는 동작 하나하나에는 엄격한 절도(節度)가 베어있어 결코 하류배가 아닌, 고도의 수련을 쌓은 무도자(舞蹈者)라는 것을 짐작케 해주었다. -Rrrrrrrrrr..... 회초리를 휘두르는 듯한 파공성(罷工聲)밖엔 들리지 않던 조용한 내실을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수련을 방해받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시간에 연락이 올곳은 한군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동작을 멈추고 수화기를 들었다. < 어떻게 된거야!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 수화기를 들자마자 거두절미하고 터져나온 음성은, 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뭔가 꺼리는게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듣는걸 방지하려는지 잔뜩 소리를 낮춰 잘 알아 듣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떼어놓으면 개들이 다시 따라붙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수화기를 들기 전부터 이미 짐작했었기에, 또한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왜 화가 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내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 그건 진작부터 경고했던 사실 아냐!! 벌써 몇일째야!! > 하잘것없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듯 추궁의 뜻이 가득 담긴 음성에도 사내의 얼굴은 변함없이 태연했고 목소리 또한 여전히 잔잔해서 음정의 톤이 일정했다. "몸이 달은건 알겠지만, 최적기(最適幾)를 기다려야해. 한치의 오차라도 생기면......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수화기 너머에서 지금까지의 성난 음정(音程)이 아닌, 각오 (覺悟)하고 있다는 듯 잔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어. 어쨌든 최대한 이쪽과는 연관지어지지 않아야해. > 수화기를 어깨에 걸쳐놓은채로 손에 들고 있던 쇠꼬챙이처럼 가느다란 도(刀)의 날을 살펴보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피어올리며 장난기서린 어조로 말했다. "어린애 피맛은 어떨까....?" < 지저분한 짓 하지마! 단번에 끝내. 애송이라도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하곤 비교도 않되는 거물이니까. 그정도 예우는 해줘야지. >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군. 알겠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신경이 바짝 곤두선 어조로 경고하듯 낮게 소리치는 상대방에게 사내가 비웃듯이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심장을 찌를까, 목을 벨까. 단번에라고?......흠, 재미없군." 끔찍한 말을 태연자약한 어조로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며 그때마다 말과 같은 동작을 취하는 사내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 미소 하나로 인해 온순해 보이던 얼굴이 소름이 오싹 돋을만큼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상으로 뒤바껴버리고 말았다. 등 뒤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면서도 내내 침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재원은 시트에 덮여있는 인영(人影)이 꼼짝도 하지 않자 긴장으로 잔뜩 경직되 곧추세워졌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불빛이 훤히 비치고 있는 침대 맡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알면 또 화내겠지' 어느 누가 보던지 도둑고양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잘 알면서도 이런 일이 이젠 자연스레 습관화되가는 듯하자 재원의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우혁은 벌써 일주일 넘게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재원은 진작에 오늘만이 아니라 침실을 옮겨갔던 날부터 새벽만 되면 몰래 들어와 우혁의 잠든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나가곤 했던 것이다. '......또...' 시트를 꼭 움켜쥐고 엎드린 자세로 잠들어 있는 우혁의 얼굴에 눈물을 흘린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한 재원의 눈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그때까지만해도 전혀 미동도 않고 있던 우혁이 갑자기 몸을 뒤척이다가 바로 눕자 흠칫하며 도로 손을 거두고는 숨을 죽인채 전신을 바짝 긴장시켰다. 하나 잠결에 몇번 움직거리면서 뭔가가 불편한지 인상을 내내 찌푸리고 있다가 고친 자세가 이내 편안해진듯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며 푹 잠든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원은 조심스레 침대가에 걸터앉아 가만히 우혁을 내려다보았다. ".........남은게 네 의지라......" 흡사 마취제의 후유증으로 아팠던 그때 당시로 되돌아간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한번 볼때마다 점점 말라가는 듯한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던 재원이 도관에서 진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미 선택의 자유는 그 날로 끝났어' 우혁의 마음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를, 이렇게 눈에 띌정도로 마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놓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얼마나 비열한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면서도 재원은 그나마 있지도 않았던 관대함 따위는 그 날로 끝난거라고 추호도 마음 속의 결심을 번복하지 않았다. '........갈수록 지체되기만 하는군....' 몸을 수그려 우혁의 몸 양옆에 손을 짚고서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워진 얼굴을 내려다보던 재원은 겉으로 보기야 이이상의 곳이 없지만 삭막하고 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더러운 협작질과 암투(暗鬪)로 썩어가는 이런 공간에 더이상 우혁을 놔두고 싶지 않아 민우에게서 구해놨던 곳을 떠올리며 이렇게 하루하루 의미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을 생각하자 치미는 울화(鬱火)에 입술을 짓깨물었다. '......보면... 마음에 들어했을텐데......' 혼탁한 자신과는 그닥 어울리지 않지만 풍경화처럼 아기자기하게 예쁜 정경과 맑은 공기는 분명 우혁이 좋아할 거라는 것을, 혹시나 미소라도 보게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만들정도로 처음 봤을때부터 그이상의 적격인 곳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곳의 풍경(風景)을 떠올리자 재원의 굳어있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나 안승호를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다면 바로 데리고 이곳을 나가려고 들떠 있었던,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설레였던 그날 밤의 기억과 동시에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기억들까지 같이 연상되자 어느새 미소가 씻은듯이 사라져버린 재원은 지금 데려간다해도 우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둘만이 산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내일 거기라도 데려갈까....' 이회장 소유의 별장들과는 비교도 않될만큼 작고 간소하지만 근처에 인가(人家)가 없어 조용하고 호수까지 딸려있어 간혹가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때 들리곤 하던, 돌아가신 모친이 유산으로 물려준 별장 한곳을 떠올린 재원은 죄인도 아닌데 우혁이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집안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과연 외출을 할만큼 체력이 있을까하는 염려에 다시 우혁을 내려다보다가 열이라도 있는지 상당히 발그레한 뺨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감기기운이 있나.....' 자신의 손이 차가워서그런지 상당히 열기(熱氣)가 느껴지는, 광대뼈가 두드러진 뺨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던 재원은 전날까지만 해도 헬쓱하던 안색이 붉그스름하게 홍조(紅藻)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며 의아함에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이러다가는 뼈밖에 않남겠군' 날이 밝는데로 주치의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뜨린 재원은 화원에서 실신한 우혁을 안아들고 올 때 느꼈던, 살이라곤 하나도 없던 몸의 감촉으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로부터 겨우 일주일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시트 밑에 가려져 있긴 하나 드러난 몸의 윤곽선을 보니 또다시 그 짧은기간 동안 얼마나 몸이 상했는지를 새삼 깨닫고는 표정을 굳혀야했다. "......으....음...." 또다시 몸을 여러번 뒤척이다가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내던 우혁이 에어콘을 틀어놓아 방안이 시원한데도 불구하고 더웠는지 시트를 걷어차내며, 뭔가가 불편한듯 계속해서 몸을 뒤틀더니 가슴 부근을 움켜쥐려는듯 손을 들어올리다 이내 밑으로 다시 떨구었다. 식은땀이 송송 베어있는 이마가 찌푸려지며 다소 숨이 가빠지는 듯하다가 뒤척임을 멈추고 이내 다시 잠이 들자 내내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재원은 우혁의 몸이 급작스레 너무 않좋아진게 아닌가 싶어 근심으로 금새 얼굴이 어두워졌다. 몸 상태가 얼마나 않좋은지는 열에 들떠 땀으로 축축한 피부를 만져보기만 해도 알정도여서, 시트에 가려져 있을땐 몰랐는데 몸에 걸쳐져 있는 가운까지 흠씬 젖어 후끈거릴정도로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는 것을 확인한 재원이 지끈거리는 심장에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고는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몸을 일으켰다. "......음......." 잠시 주저하며 우혁을 내려다보던 재원은 또다시 신음성을 토해내던 우혁이 몸을 뒤척이다가 열이 오르는지 가운 새로 드러난 땀에 젖은 가슴과 목덜미가 더욱 붉어지는 것을 보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걸치적거리는 시트를 걷어 제치고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젖은 가운을 벗겨냈다. 가운을 다 벗겨내도 깨어나지 않는, 눈앞에 훤히 드러난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나신을 잠시 바라보던 재원이 실제로 직접 보니 얼마나 말랐는지 실감이 가자 또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욕실에서 갖고온 물에 적신 타올로 열에 상기된 얼굴을 닦아주다가 손을 계속 미끄러뜨려 전신 구석 구석을 차례로 닦아주었다.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식혀주려는듯 계속해서 바꾼 타올로 몇번이나 몸을 부드럽게 닦아주는 동안 단 한번도 눈앞의 나신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검은 눈동자는, 잠이 깊게 들었는지 정신을 못차리고 널브러져 있는 전라(全裸)의 인영(人影)이 분명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욕념(欲念)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무심하기만 했다. '.........꼭... 그때로 되돌아간거 같군' 납치됐을 당시 꽤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할정도로 허약했던 우혁이 그 청결한 성품으로 씻지 못하는 불쾌감 때문에 짜증을 부려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몸을 닦아주거나 욕실로 데려가 씻겨줄때마다, 경기일으킬 정도로 기겁을 하며 뿌리치려 애쓰거나 전신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화를 내며 어쩔줄 몰라하던 장면들이 다시 연상되자 재원의 입가에 자동적으로 짙은 웃음기가 베어나왔다. 하나 그것도 잠시, 몸을 다 닦아주고 고개를 들다가 애초에 빈약했던 몸의 곡선이 이젠 정말 못봐줄 정도로 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뼈가 툭 불거져나와 조금이라도 힘을줘 끌어안으면 부숴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말라깽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근심으로 미소는 금새 사그라들고 말았다. ".......더이상.... 아프지마......" 새 시트로 알몸을 덮어주며 다시 침대가에 걸터앉은 재원이 이마에 아직도 몇가닥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을 가만히 쓸어 올리다가 훤히 드러난 뽀얀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갖다 대고는 안타까움이 가득베인 음성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금새 또 송송 베어난 이마의 식은땀을 흡입하듯 입술로 부비다가 천천히 이마에서 입술을 떼어내고 고개를 들어올리던 재원이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에 시선을 멈췄다가 이내 발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뺨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전라(全裸)를 보고서도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조금 흔들리다가 이내 자조어린 빛이 떠올랐다. '.......정말 한심하군. 이래서 수컷은 할수 없다니까....' 곧게 뻗은 콧등을 천천히 훑어내려오다가 스스로에게 경고하듯 더이상은 내려가지 않던 시선이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머뭇거리며 조금 밑으로 더 내려간 순간,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냈을때부터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던, 살짝 벌려진 채로 얕은 숨결을 내뱉는 붉은 입술과 그 속에 보일락말락한 조그만 혀에 시선이 멎자 꿰뚫을 듯이 계속 쳐다보던 검은 눈동자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갈망(渴望)과 갈등의 빛이 서린 눈빛으로 한참동안 입술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수그려 살짝 입술을 포갰지만 닿자마자 불에라도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며 그대로 도로 황급히 떼어낸 재원이 우혁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벌려진 채로 더운 숨을 토해내는 입술, 열로 달아올라 불그스름한 피부 등을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입술을 댄 순간 우혁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아챈 재원이 진작에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어이없어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지금까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발견치 못했던, 침대 맡의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져 있는 술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심장이 멎는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오래된 원액 수십가지를 혼합해 만들어 맛과 향이 일품인 X.O 급의 최상품인, 마시는 용도보다는 소장품(所藏品)으로 가치있는 저 도수높은 꼬냑이 왜 지금 여기에 있는건지 하는 의문보다는 당장 우혁이 이 술을 마셨다는 것에, 왜 마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은 재원이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우혁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이를 가는듯한 음성으로 나직히 뇌까렸다. "........ 술을 드셨다.....이건가....?" 분명 주량이 세지 않을거란 것을, 아니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을거란 것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인지라 술까지 찾아서 마셨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괴로웠나 싶어 광대뼈가 질릴 정도로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노기(怒氣)를 참고 있던 재원이 다소 가쁜 숨을 토해내던 붉은 입술의 벌려진 틈새로 분홍빛 혀끝이 나와 입술을 축이는 것을 보고는 이내 자조어린 쓰디쓴 어조로 말했다. ".......이봐, .....도발하지 말라고 했잖아....." 고개를 수그려 입술을 갖다대자 마치 처음 키스를 하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어느새 노한 기색도 사라져버리고 정신이 아득해진 재원이 비록 술에 취했기는 하나 혹시라도 깨어난 우혁이 이런 자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긴장을 풀지 않고 눈앞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치한이나 다름없군' 백금빛 머리칼이 흩어져있는 쿠션의 양 옆을 짚고서 몸이 닿지 않게끔 주의하며, 잠든 사람한테 몰래 도둑키스를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너무 처량맞아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바로 눈앞의 유혹을 지나치기엔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지라 재원은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입술을 떼내진 못했다. 입술을 갖다댔는데도 속눈썹 하나 움찍거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자 잠결에 벌려져있어 애써 벌릴 필요도 없이 쉽게 입술 안으로 살그머니 혀를 밀어 넣고는 다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혀를 움직여 알콜 맛까지 곁들여진 입안의 달콤함을 맛보던 재원은 얼마지나지 않아 이런 정도로는 만족이 아니라 화만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하나 그럼에도 미련을 못버려 놓지를 못하고 한참을 입안을 샅샅이 훑으며 입술을 탐하던 재원이 이젠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간신히 입술을 떼내다가 키스로 촉촉히 젖은채 마치 유혹하듯 꽃봉오리처럼 살짝 벌려져 있는 붉은 입술을 본 순간, 격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 "......으...음.....?" 잠을 깨우게 될까봐 이젠 멈춰야한다는걸 잘 알면서도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연인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조금만 더 느끼고픈 마음에 져서 떼내지도 못하고 격렬하게 탐하고 싶으면서도 애써 참으며, 조심스럽게 입안을 헤치며 부드럽게 놀려지던 입술과 혀가, 갑자기 지금까지의 답답한 신음성과는 다른 의문섞인 신음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57- # # # 그가 나의 존재를 알기 이전부터 나는 이미 그에게 이끌렸다는걸..... 가식(假飾)에 가득찬 사람들 속에서 결코 숨기지 않는 진실함으로... 오직 나 자체만을 바라보고 다가온 그에게.... 두려울정도로 맹목적인 그의 마음과..... 나 자신을 망각하게 만드는 불타오르는 열정에.... 무모할만큼 속절없이 빨려들었다는 것을.... 그의 불같은 독점욕(獨占慾)에 지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애증(愛憎)에도...... 화염(火焰)에 휘말려 내 몸이 재로 된다해도..... 이젠 결코 그에게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모든 것은 늦었다는 것을.........난..... 깨달아야 했다....... 속눈썹에 가려졌다가 서서히 드러나는 암청빛 눈망울이 잠에 취한건지 아니면 술에 취한건지 잔뜩 흐려진채로, 시선이 마주친 이후로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가 조금씩 이상한 열기(熱氣)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순간, 잘못보지나 않았나 몇번이나 확인해 봐도 여전히 변함없는 그 눈빛에 재원은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따위는 할 수도 없을만큼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우혁.....?' 흐릿하긴 해도 분명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음에도, 또한 짓누르고 있는 입술의 감촉을 느꼈을텐데도 몇번 느리게 깜빡거리던 속눈썹이 다시 내려가더니 자신을 밀쳐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시트밑에 있던 팔을 들어올려 목덜미에 감아 끌어안고는 굳어있는 자신의 입술에 대고 능숙치 못한 키스를 되돌리자 완전히 딱딱하게 경직된 재원이 당황을 금치 못하다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맥이 빠져 조금 긴장을 풀고 말았다. '.......꿈인줄 아는거구나...' 분명 술의 영향도 큰데다가 꿈결에 하는 행동일테지만 자신의 목덜미에 감은 팔을 내리뜨려 어깨를 끌어당기며 매달리는 가느다란 팔의 감촉은 분명 현실이었다. 게다가 단한번도 먼저 키스해 온적이 없던 그 소심하고 내성적인 우혁이 어린애같은 키스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입술에 혀를 밀어넣고 능숙지 못한 키스를 해오는 것 역시 현실이었기에, 이렇게 엄청난 유혹을 뿌리치기엔 우혁이 먼저 키스해왔을때부터 이성따윈 이미 반쯤 날라가버린 재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상체만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우혁의 옆에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으....응........" 간간이 들리지도 않을만큼 작은 신음소리를 흘려내며 자신의 입술을 탐하고 있는 능숙지 못한 입술과 혀의 감촉에도, 대부분의 타액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올 정도로 정말 키스라곤 한번도 못해본 듯한 솜씨에도, 재원은 우혁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긴채 비몽사몽(非夢似夢)인게 틀림없는, 봉숭아 꽃물처럼 홍조(紅潮)가 더 짙어진 얼굴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당장이라도 눈앞의 백금빛 머리칼을 휘감고는 거칠게 입술을 탐하고 싶은 욕구에, 그대로 모든 것을 잊고 반항하더라도 그를 가지고 싶은 욕구에 지지 않으려 애쓰며 가만히 숨을 조절하던 재원은 키스를 하던 우혁이 목덜미에 팔을 두른채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자 미처 어쩌기도 전에 균형을 잃고 시트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목덜미에 팔을 감고 있었기에 같이 몸이 뒤집히게 된 우혁이 시트가 흘려내려 가려졌던 나신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채 몸 위로 올라온 자세가 되더니, 자신의 가슴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분명 아까 전에도 봤음에도 이젠 느낌이 사뭇 틀려져버린 눈앞에 훤히 드러난 나신에 , 재원은 충격의 차원을 넘어서서 완전히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하늘거리는 실크가운 한장만 걸친 자신의 몸 위에서 금새라도 쓰러질듯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던 우혁이 가슴을 짚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려 다시 철푸덕 가슴 위로 엎어지며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야기되버린 뜻밖의 사태에 완전히 경직되버린 재원은 몸 위에 우혁을 올려놓은채 꼼짝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쉴 정도로, 이 돌발상황(突發狀況)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심하게 가슴을 들먹이며 숨을 몰아쉴때마다 위아래로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강아지처럼 목덜미에 머리를 부벼대던 우혁이, 달아오르다 못해 급속도로 뜨거워진 자신의 가슴팍에 다시 손을 짚고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켜 열에 들뜬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재원은 땀이 베인 손으로 시트를 꽉 틀어쥔채 우혁의 손밑에 짚여있는,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미친 듯이 날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발갛게 달아올라 멍하니 풀린 얼굴로 잠시 어리둥절한 듯 자신을 내려다보던 우혁이 술에 취했으면서도 뭔가를 느끼는건지 점차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슴을 들먹이며 가쁜 숨을 토해내느라 벌려진 붉은 입술을 점점 밑으로 내리는 모습을, 평소의 수줍고 청초한 모습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이성을 잃을만큼 너무나 도발적인 그 모습에 재원은 여우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내내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하나 내리뜨린 입술로 얼굴을 더듬다가 다시 입술에 부딪혀오며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반쯤 내리깔린 속눈썹 밑에 드러난 초점이 흐릿하나 묘한 열기로 들떠 있는 암청빛 눈망울을 마주 쳐다보던 재원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한채로 자신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움켜쥔채 입술을 살짝살짝 부딪히며 장난처럼 키스하는 우혁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고 인형처럼 그대로 누워 있기만 할뿐이었다. ".....흐응......" 자신이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아서인지 아니면 뭔가가 불만족스러운지 나직히 실망섞인 신음소리를 흘려내던 우혁이 키스를 멈추고 자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입술로 더듬으며 내려가다가, 가운새로 드러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는 살짝 입술을 갖다대었다. "......우혁...헉!!!!!" 미처 우혁을 제지하기도 전에, 자신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건지 입안으로 살을 빨아 들이다가 혀로 할짝이자 애무가 아니라 아기가 어미의 살갗을 빠는 것같은 그 간지러운 감촉과 그럼에도 그런 작은 자극만으로도 전신을 치달리는 야릇한 감각을 참지못해 격하게 숨을 들이키던 재원이 이젠 완전히 제기능을 상실해버린 심장소리에, 이런 식으로 있다가는 얼마안가 전신의 혈맥(血脈)이 다 터져버리고 말거라는 생각에 몸을 움직여 벗어나려 하다가 그만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우혁...아......앗!!" 목덜미에서 내리뜨린 입술을 조금씩 미끄러뜨리며 가운 틈새로 드러난 가슴까지 내려오다가 더 이상 가지 못하자 손을 가운 안으로 밀어넣어 가슴의 맨살갗을 간지럽히듯이 수줍게 쓰다듬는 손길에, 휘청대며 상반신을 반쯤 일으켜 나른해진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방비한상태로 풀려 도취한듯한 그 암청빛 눈망울에, 재원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우혁을 부르며 손을 잡아채어 자신에게서 떼내려했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가슴을 살짝 꼬집는 손길에 완전히 사고가 마비되버리고 말았다. "......하.....이런......." 과거 여자들과의 잠자리에서 파트너들이 아무리 도발적인 행동을 해도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고 뱀같은 느낌에 아예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던 그 손길들과 비교하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행하는 이런 장난같은 손길에 자신이 이렇게 흥분할줄은, 이렇게 심장이 떨릴 정도로 감동받을 줄은 미처 몰랐던 재원은 다소 허탈한 심정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헉!!!!" 하나 자신이 반응을 보여줘서 기분이 좋은지 계속해서 가슴 위에서 꼬물락거리며 장난치다시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점점 밑으로 내려갈때부터 전신의 털이 다 곤두설 정도로 다시 바짝 경계하고 있던 재원은, 가운의 허리끈에 닿아 미적거리며 움직이지 못하던 손가락이 조금씩 틈을 비집고 그 밑으로 파고들려하자 헛바람을 들이키며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려 반사적으로 우혁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어 자신에게서 떼어놓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대체....얼마나 술을 마신거야....!!!' 열에 들떠 정신없이 뜨거워졌던 몸이 더 달아오르는게 아니라 오히려 한순간에 싹 식어버릴 정도로 장난기섞인 야릇한 흥분이 완전히 가셔버린 재원이 이를 갈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자신의 다리에 앉은 자세로 마주보고 있는 우혁을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무섭게 노려보았다. ".......으...응.....아....파..아....." 양 손목을 잡고 있는 바람에 뒤로 쓰러지지 않는대신 좌우로 흔들리다가 고개가 뒤로 젖혀져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안 가득 들어온 순간, 움켜쥐고 있던 손목에 저도 모르게 힘을 가했는지 흐리멍텅한채로 붉게 달아올라있던 얼굴이 아픈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어리광부리듯 칭얼대자 한순간 이대로 거세게 흔들어 정신차리게 하고 싶은 충동이 격하게 들었지만 간신히 억눌러 참은 재원이 멈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느라 한참을 거칠게 숨만 몰아쉬어야 했다. '..........맙소사......않돼겠군'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슴을 심하게 들먹거리던 재원은 손목이 잡힌채 뒤로 몸이 약간 기울어져 있던 우혁의 멍하니 풀린 얼굴 위로 재밌다는 듯한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봤음에도 미처 그 사실을 자각치못한채 저도 모르게 절망섞인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상태로 방치해뒀다가는 끝도 없을거란 생각에 다시 자신의 몸에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우혁의 몸을 도로 시트 위로 끌어내려 눕히고는 불만어린듯 삐죽거리며 벌려지는 입술을 그대로 덮쳐 격렬하게 탐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숨도 쉬지 못할정도로 입술을 떼지 않고 있던 재원이 처음 입술을 격하게 부딪혔을때 움찔거리며 정신이 좀 드는듯하던 우혁이 눈을 떴다가 이내 산소가 부족해 맥없이 늘어지며 반쯤 의식을 잃은듯 하자 급히 입술을 떼내었다. 숨이 막혀 다급히 숨을 몰아쉬던 재원은 자신의 팔에 축 늘어져 있는 머리를 쿠션 위에 잘 받쳐놓고는 몸을 반듯이 눕혀 시트로 덮어주었다. ".........기도 않차는군" 술에 취한 우혁이 잠결에 한 행동들도 충격이었지만, 실상 농도짙은 애무도 아니고 완전히 어린애 장난같은 손짓 하나하나에 그렇게 맥도 못추고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자신을 떠올린 재원이 새롭게 알게된 사실로 인해 어처구니가 없어 맥없이 중얼거렸다. 거울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열의 강도로 봐서 자신의 얼굴이 지금 우혁못지 않게 완전히 붉게 상기되있을거란건 기정사실인지라, 너무 한심해 어이없는 표정을 계속해서 짓고 있던 재원이 전신을 휘맴도는 열기와 이상야릇한 감각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자 입술을 짓깨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이 급속도로 오르는지 붉은 꽃물이라도 들여놓은 것처럼 전신이 발갛게 달아오른채로 열때문인지 아니면 속이 거북해서인지 계속 시트 밑에서 몸을 뒤척이며 간간이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재원은 가망성은 거의 희박하지만 정신을 차린 우혁이 혹시라도 오늘 일을 기억해내고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걸 깨닫는다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만큼 엄청난 쇼크를 받을거라는 사실을 떠올린 순간, 그 이후에 어찌될건지는 불을 보듯 훤한지라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끔찍하군" 우혁이 기억해내지 못하기만을 바래야겠다고 생각하며 분명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를게 뻔하니 앞으로는 술을 못마시게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던 재원은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어서는 않된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남아 있는 이성을 믿고 미적거리며 더있다간 후회할 짓을 하게 될 것 같아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마....." 하나 등뒤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불분명한 음성에 어느새 도로 깨어났나싶어 흠칫하며 멈춰 서던 재원은, 당장 뒤돌아 우혁에게 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입가에 쓰디쓴 조소를 머금고는 다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방을 가로지르는 중에 더이상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다시 잠이 들었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재원은, 비록 우혁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란건 알고 있지만 대체 오늘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몰라 당혹감어린 낯빛을 하며 뒤죽박죽 엉망으로 뒤헝클어진 머릿속을 잠시 정리하려했다. 하나 불현듯 자신이 없는 곳에서 술을 마셨을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본 순간,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으며 심장까지 싸늘하게 식어버린 재원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채 거의 이를 갈다시피하며 절대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했다. "...............가...지..마....." 하나 문 앞에 거의 다다른 재원은 술에 취한티가 역력히 날 정도로 혀가 좀 꼬였기는 하지만 이번엔 좀전보다 조금 더 뚜렷한 발음으로 들려오는 가늘고 미약한 음성을, 그 언젠가 자신의 귀로 분명하게 들었던 그 울음섞인 애원성(哀怨聲)을 듣는 순간 그대로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붙박혀버리고 말았다. "............가.........지...마............윽.....흑..........." 좀더 소리높인 음성으로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들리자 누워 있던 우혁이 몸을 일으키려한다는 것을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침실의 문 쪽을 향하고 있는 창백한 얼굴은 더 이상 굳어질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된채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흑........흑...." 침실의 적막을 깨뜨리며 계속해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검은 가운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 훤칠한 신형(身型)에 일어나는 경련의 정도도 확연히 눈에 띌정도로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흐흑........가...지..마....." 시트 위로 계속 풀썩하며 쓰러지는 소리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바둥거리며 일어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생생히 그릴수 있었지만 전신을 희미하게 떨며 이를 악문채 문만 노려보고 있는 재원의 눈빛은 잔뜩 가라앉은채 어둠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재......원.......윽......." 하나 떠듬거리며 들려오는 울음섞인 음성이, 그의 기억으론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사랑을 나눌때조차도 그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적이 없던 하나의 이름이 귓속으로 파고든 순간, 전신에서 간헐적인 경련이 멈추는 동시에 문을 그대로 꿰뚫어 버릴듯이 날카롭게 노려보며 뭔가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던 검은 동공의 떨림이 완벽하게 멈췄다가,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걸 마비됐다 깨어난 사고가 차츰 깨닫는 순간, 경악(驚愕)으로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지...마..........재....원..아...."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휘청댈뻔하다가 간신히 뒤돌아서자마자 한눈에 다 들어온, 침대 위에 쓰러지지 않게끔 비스듬히 팔을 짚고서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대며 시트자락에 이리저리 휘감겨 전신을 거의 다 드러내 놓은 상태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검은 동공은 감당치 못할 충격으로 더 이상 짙어질수 없을만큼 시커멓게 변해, 풍랑(風浪)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흑.......재...원..아...." 급속도로 밀려드는 현기증(眩氣症)을 이기지 못한 재원이 방문에 등을 기대서고는 이젠 분명하게 환청(幻聽)이 아니라는걸 깨우쳐주는 금새라도 꺼질듯한 그 가늘고 울음섞인 음성을,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전신을 계속해서 달콤하게 고문하는 그 유혹적인 목소리를 생생히 들으면서도 지금 우혁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란 것을, 자신이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게 뻔하다는 것을 억지로 되새기며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재....원.........아....." 하나 한번 마비되버린 정신은 그 사실을 부정하며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고 그대로 천천히 침대로 다가갈 동안 자신의 움직임을 일일이 따라붙으며 다시 주저하듯, 술에 취했어도 익숙지가 않다는걸 느끼는지 다소 어색하게 이름을 부르다가 흡사 길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암청빛 눈망울에서 같이 시선을 떼지 않은채 가까이 다가서는 재원의 얼굴은 더 이상 굳어질수 없을 정도로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천천히 떨리는 손을 뻗쳐 이마 위에 흘러 내려온 백금빛 머리칼 위로 손을 올리는 재원의 표정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눈빛은 불같은 격정과 미칠듯한 갈망,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경고하고 있는 심적인 갈등 등 온갖 감정으로 뒤범벅이 되어 빛이라곤 한점도 없이 블랙홀같은 암흑만이 가득차 있었다. ".......재..원아.." 하나 가까이 다가선 자신에게로 손을 내뻗쳐 어린애처럼 양손으로 가운자락을 꼭 움켜쥐고 나서는 울음을 멈추고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채, 눈물로 잔뜩 얼룩져 홍조가 드리워진 얼굴에 설레임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수줍은 기쁨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순간 조금 남아 있던 이성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운의 허리끈에 손을 갖다대고 천천히 매듭을 푸는 동안 단한번도 우혁에게서 시선을 떼질 않고 마주보고 있던 재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뿌옇게 흐린 암청빛 눈망울이 물기에 촉촉히 젖은채 조금씩 희미한 열망(熱望)의 빛이 서리는 것을 두 눈으로 뚜렷이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전신을 심하게 떨어야 했다. 가운의 끈을 푸는 와중에도 내내 갈등에 휩싸여 있던 재원은 불같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이이상은 않된다고, 냉정을 되찾고 이대로 중지해야한다고 계속 되내이고 있었다. 하나 가운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우혁이 손을 떼어내 자신에게로 내뻗치는 것을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린 재원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거머쥐며 가늘고 우아한 손가락에 천천히 고개를 수그려 입술을 갖다대고는 경애(敬愛)하듯 세게 짓눌렀다. 천천히 침대 위로 몸을 눕히는 발갛게 달아오른 나신과 흰 시트에 펼쳐져 가닥가닥 흩어지는 백금빛 머리칼, 홍조가 짙어진 양 뺨과 자신을 바라보다가 술취한 정신으로도 본능적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암청빛 눈동자를 천천히 덮으며 수줍게 내리깔린채 파들거리며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가빠지는 숨결을 토해내느라 살짝 벌려져 있는 황홀할정도로 유혹적인 짙붉은 입술 등 눈앞에 펼쳐진, 열에 들떠 정신이 점점 혼미해 지고있는 연인의 모든 것을,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단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며 재원은 천천히 등 뒤로 가운을 벗어내렸다. 먹구름처럼 짙은 어둠이 조금씩 가시는 6월의 어느 후덥지근한 날, 달빛이 은은하게 비춰드는 어느 테라스 밖으로 창문 틈을 비집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오며 후덥지근한 공기를 위험스럽게 달구더니, 애끓는듯 낮게 흐느끼던 신음소리는 허공을 그대로 꿰뚫어버릴듯이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교성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그 어느때보다도 더 열정적인 느낌으로 환희에 찬 색기어린 신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지만, 얼마안가 이내 다시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성이 새어나오며 또다시 시작된 열락(悅樂)에 끝갈데없이 달아오른 침실의 열기와 쾌락에 찬 신음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을듯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58- # # # 널 위해 해줬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위한 것들이었음을 알았을때..... 널 지키기 위해 행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널 숨막히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때.... 네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버린 이유가....... 자유를 갈망하는 새를 구속하려했던 죄의 대가였음을..... .................난......깨닫게 되었다...... 청담동에서 외제차 정도는 수시로 볼수 있어 그리 눈길을 끌지 못하나, 레지롱 마리에란 간판을 단 5층 전체가 멀티패션샵인 한 고급 부티크의 정문 앞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은, 은회색으로 번쩍거리는 차체에 길이만도 5m가 족히 넘어 보여 흡사 국가 원수들이나 탐직한, 첫보기에도 무척이나 호화로운 외제차였다. 뒤꽁무니에 'Silver Seraph'라는 금장장식이 새겨진 그 차가 세계 차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롤스로이스 신형이라는 것과 차값만도 7억이 넘는다는 것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린, 특권층 고객들을 많이 접해 처세술(處世術)이 능한 부티크의 주인은 용의주도하게 고민하고 자시고할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결단을 내렸다. 오전 내내 달라붙어 기분을 맞춰주며 의상을 골라주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던, 돈으로 전신을 처바른 까다롭기 그지없는 고객에게 적당히 양해섞인 미소를 띄워보인 그녀는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얼른 1층으로 내려가 유리문 근처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화사한 웃음을 입가에 드리웠다. 제복차림의 기사가 긴 차체를 빙 돌아서 차 문을 연 순간, 뱀처럼 싸늘한 인상의 젊은 사내가 나와 기사대신 문을 잡고 서 있다가 누군가를 부축해 주려는듯 몸을 약간 수그리는 것을 보며 그녀는 분명 그가 비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비위만 잘 맞춰 준다면 주체못할 정도의 돈을 물쓰듯 쓰고갈 것이 뻔한, 재벌가의 마나님이나 부호들이 하나둘 꿰차고 있는 내연의 처가 거만한 표정으로 내릴 것을 조금 시간이 지체되고 있어도 미소하나 흐트러지지 않은채 내내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눈이 차츰 놀람으로 커다랗게 뜨여지다가 저도 모르게 자연스레 호감어린 미소를 떠올렸다. 사내의 넓찍한 등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그가 옆으로 비켜서는 바람에 정면으로 드러난 사람은 처음 본 한순간은 키가 큰 여자로 착각했을 정도로 몸의 선이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했으나 분명 남자임에 틀림없었고, 굳이 걸친 의상의 색만이 아니더라도 그를 보면 하얗다는 말밖엔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시릴정도로 하얀 피부의 소년이었다. 청년이라고 보기엔 아직은 어린듯한 그 소년은 선이 가늘고 지나치게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어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못하고 병을 앓아온 환자처럼 보였으나 허리를 감아오는 부축의 손길을 밀쳐내며 거절하는 듯한 기색으로 보아 그리 많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손질이 않되 들쭉날쭉한 길이의 화려한 백금발과 부러울 정도로 갸름한 조막만한 얼굴,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뚜렷하게 보이는 실핏줄이 비칠정도로 투명한 피부와 그와 대비되 더 선명해 보이는 붉은 입술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남자치곤 가는 선을 더 강조해 상당히 여려보였다. 피부가 약한지 더운 날씨임에도 얇긴하지만 긴팔 차림으로 피부를 최소한으로만 드러내놓고 있었고, 콘택트 렌즈를 낀 것이 아니라면 금발과 피부색으로 보아 혼혈임을 증명하는, 긴 속눈썹에 감싸인 아몬드 모양의 암청빛 눈동자는 동공이 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 꿈을 꾸는듯이 조금은 몽롱해 보였다. 하나 희미한 미소조차 떠올라 있지 않은 표정은 일견 차가워보여, 소리를 내지 않고 걷고 있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 하나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우아함과 전신에 자연스레 베어 있는 기품까지 곁들여져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얼음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중한 인사를 하며 비켜선 자신의 옆을 지나칠 때 머리칼을 귀뒤로 넘긴 바람에 드러난 턱선의 섬세함에 감탄의 빛을 띄던 그녀는 그에게서 은은히 풍겨나오는, 향수를 뭘 쓰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지 않고 청아한 향기에 절로 상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독사같은 인상의 사내까지 뒤따라 들어온 이후, 닫힌 자동 유리문 너머로 보인 광경은 그녀를 바짝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언제 뒤따라 왔는지 롤스로이스 뒤에 서 있는 차를 타고온게 분명한, 이 무더위에 검은 정장차림을 한채 리시버를 꽂고 있는 세 명의 듬직한 사내가 부티크 문 앞을 가로막고 서서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항의는 아예 머릿 속에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차부터 시작해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위압적인 사실에 질려버린 그녀는 2층의 헤어샵으로 올라가며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있어 머리칼에 얼굴이 가려져 있는 소년과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사내를 돌아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뒤따라가며 미심쩍은, 하나 경탄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댁 자제길래...?" 고교시절 마지막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주말오후는 뙤약볕에 조금만 나가 있어도 노출된 피부가 타는듯이 화끈거리며 따가울 정도로 거의 살인적인 더위를 자랑하고 있어 휴가철로는 최적시였으나, 입시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여름과 더위는 불쾌지수(不快指數)만 더 높이는 반갑지 않은 계절이었다. "...........원...." 하나 전신을 땀과 먼지로 뒤범벅인채 헉헉대면서 지치지도 않는지 희뿌연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쉼없이 뛰어다니는, 태양에 반사되 반짝이는 땀방울을 훔치며 고함쳐대는 건강한 구리빛 피부의 하급생들에게는 폭염(暴炎)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듯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야, 이재원" 교무실 복도에서 운동장 쪽으로 향해있는 창 틀에 비스듬히 기대선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만 돌리고 있던, 하복 상의를 걸친 팀과 웃통을 벗은 팀으로 나뉘어 방학식이 종료됐는데도 남아서 거의 육탄전(肉彈戰)에 가까운 축구를 하는 학생들을 내다보고 있던 재원은 소리죽여 자신을 부르며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순서대로 정했기에 원래 재원이 마지막이었으나 전학오는 바람에 그의 뒷 번호가 된, 키가 짝딸막하고 남자치곤 좀 여리게 생긴 학생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약간 흠칫하다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자 그제야 자신이 그를 불렀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아차했다. ".........니 차례야" "어휴, 씨팔. 죽었다 이제.." 언제나왔는지 장대같은 키에 덩치는 자신의 두배는 됨직한 녀석이 방학 중에 집으로 날라올 성적표보다 먼저 전산처리되어 나오는 점수표를 들여다보다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 재원은, 자신이 또 멍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쓴웃음을 머금으며 기대서 있던 몸을 떼어내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원이는 차라리 이과로 갈걸 잘못했어. 과학이나 수학같은 과목은 전교에서도 거의 수위를 차지하는데.....암기과목은 왜 이렇게 점수가 낮지?"" 전형적인 엘리트 타입의, 일본인처럼 하관이 빠른데다 신경질적으로 창백한 인상의 담임이 건네준 점수표를 대충 훑어보는 재원의 눈빛은 마치 남의 성적을 보는 것마냥 이렇다할 반응없이 무심하기만 했다. "모의고사도 수리탐구영역은 난해하고 까다로운 것들은 다 풀었으면서 쉬운건 틀린게 몇 개 있어..... 이해력이 이 정도로 뛰어난건..... ....두뇌가...... ...하지만... ...소홀히 했기 때문에..... ....교차지원을.. .....대나 ......공대 쪽으로..." 겉보기에는 허리에 뒷짐을 진채 진지하게 듣고 있는듯 했지만 실상 담임의 말을 대부분 한귀로 흘려듣고 있던 재원은 공대란 말을 듣는 순간, 굳게 다물고만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놓았다. "......부모님께서.... 꼭 문과를 원하셨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결석을 오래한 이후부터는 자신에게 특출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담임을 그대로 놔뒀다가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기에 자의가 아니라 부모님 말이나 따르는 의지박약아(意志薄弱兒)로 비치게끔하는 말을 해 상황을 일찍 종료시키고 뒤돌아서는 재원도 사실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이해력이나 집중력은 남들과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높았지만, 몇 가지 극히 소수의 것을 제외하곤 뭐든지 싫증을 잘내는 체질(體質) 때문에 오랜시간 붙잡고 골을 싸매야 하는 암기과목같은 것은 딱 질색이었던 재원은 아무리 복잡하게 꼬여있다해도 그 밑바탕은 결국 공식에 의존하는 수리영역은 굳이 붙들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한번만 훑어봐도 점수가 높게 나와 스스로도 의아할만큼 상당히 매력있어하는 분야였다. 그랬기에 자신이 이공계체질이란 것은 진작부터 느껴왔던거지만 작년, 자신몰래 문과를 지망하게한데다 아예 바꾸지도 못하게, 자선사업의 일환인 재단 이사장의 권한으로 압력을 행사했던 이회장을 떠올린 재원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또한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결코 바라는대로 되지는 않을거라고 속으로 뇌까리며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또한 그때 지시를 받고 마치 자신의 형인양 학부형자격으로 찾아왔던 진을 얼떨결에 떠올린 순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더위로 풀러놓았던 차이나 칼라를 젖혀 목덜미의 땀방울을 훑어내던 재원의 이맛살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나가살기 전에도 1년가야 한두번 저택에서 마주칠까말까하던 인간이 요즘들어 유난히 자신의 앞에 많이 나타나 신경을 건드리는 이유를, 또한 오랫동안 떼놓았던 경호원들을 다시 붙인 이유를 재원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쓸데없는 간섭을 하려드는 그를 한번 손봐줄까하는 충동도 들었었지만, 그 독사같이 생긴 놈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우혁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기에 재원은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애꿎은 축구공에게 대신 화풀이를 했다. '......이렇게 더워서야, ......데리고 나갔다간 몇분도 않돼 늘어지겠군...' 교문과 근접한 지점에서 구둣발로 강하게 걷어찬 축구공이 멀찌감치 날아가 운동장 끝의 골대 가까이에 정확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혼잡(混雜)의 대양상을 빚더니 결국 선취점(先取點)을 얻게 해준 것도 보지 않고, 차자마자 걸음을 다시 떼놓고 있던 재원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에 손을 눈 위로 갖다대며 축축 늘어지게 만드는 더위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재.......워.....ㄴ..... 벌써 한달을 넘는 시간동안 시도때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멍하게해 수업 중에도 선생의 호명(呼名)을 듣지못해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만들던, 그날 밤 이후로는 들어보지 못했으나 흐릿해질 때도 되었건만 갈수록 점점 생생해지기만 하는 그 음성이 또다시 환청(幻聽)처럼 들려오자, 근처 아파트 숲 그늘에 놓아두었던 바이크를 끌어내 걸터앉으며 헬멧을 들어올리던 재원의 길고 마른 손가락이 움찔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창백한 피부에다 관절이 툭 불거져나올 정도로 살이 없어 약해보이는 것과는 달리, 검도를 배워 오랜기간 검을 쥐는 바람에 악력(握力)이 보통이 아닌데다 파괴력(破壞力)의 정도가 어느만큼이라는 것은 굳이 일부러 확인해보지 않아도 잘아는 자신의 손가락이 고작 헬멧의 무게를 감당치못해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자 재원은 저도 모르게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흘려냈다. 18년 동안 지겹도록 들어봐도 무감동하기만하던, 단지 남과 구분짓기 위해 붙여놓은 불리는 용도로밖엔 쓰이지 않는 그 이름이 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순간, 그렇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을 불러일으킬 줄은, 절정에 다다랐을때와 흡사한 쾌감을 불러일으킬 줄은 정말 이때껏 몰랐었다. 처음으로 침대에서 의식을 놔버렸을 정도로 완전히 미쳐버렸던 그날 밤을, 또한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뇌리에 남아있는, 자신을 부르며 흐느끼면서도 너무나 격정적이었던 그날밤의 우혁을 떠올린 순간, 햇빛에 반사되 검푸른 기가 맴돌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던 재원은 자신의 손이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이마를 짚으며 탁하게 갈라져 잔뜩 잠긴 음성으로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젠장, .....미치겠군..." 땀으로 약간 축축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재원은 연상작용(聯想作用)으로 이젠 감촉까지 느껴지는듯한 착각이 들자 그대로 절망적인 신음을 흘리다가 욕설을 주절거리며 바이크의 속도 계기판에 머리칼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팍 숙여버렸다. 이미 등이 흠씬 젖어버린 교복셔츠 밑으로 드러난 팔뚝이 핸들을 억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잔뜩 힘이 들어가 푸른 힘줄이 도드라져 나와 있었고, 숙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관자놀이에서 주루룩 흘러내린 땀방울들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가슴 앞섶을 적시기 시작했다. "..............장.우.혁. ..............존경한다......정말.." 또다시 예외없이 달아오른 몸때문에 지옥같은 고비를 간신히 넘긴 재원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상황장소 상관없이 물불가리지 않고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대부분의 십대 사내자식들과 별다를바없는 놈이 되버리게한데다, 무더위보다 더 타는듯한 고통을 맛보게하는 동시에 일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이, 절로 살인적인 인내력(忍耐力)까지 키워주는 우혁에게 다소 짖궂은 심정반, 허탈한 심정반으로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 마셔본 독한 술의 영향은 그날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심각한 후유증까지 몰고와 근 사나흘을 우혁은 고열과 두통, 구역질 등 심한 숙취에 시달려야했다. 가다가 기절하는한이 있더라도 고집스럽게 욕실까지 기어가다시피하는걸 발견해 자신이 옮겨줘야할 정도로 거의 폐인(廢人)의 몰골에 가까웠다가 겨우 회생한 우혁이, 한동안 자신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픽픽 쓰러지거나 몸살이 나 앓아 누워야했던 이유가 술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재원은 잘 알고 있었다. 우혁이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자신이 안도하는건지 아니면 실망하는건지 스스로도 아직까지 판가름할 수는 없지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해 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않봐도 훤한지라 재원은 눈꼬리가 접힐 정도로, 하나 짖굿은 티가 역력한 묘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나 이내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든 입술 끝자락에 대신 씁쓸한 미소가 매달리더니, 손을 이마에 대고 비스듬히 세워 가늘게 뜬 눈으로 구름 한점 없이 불덩어리같은 태양만 이글거리고 있는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재원은 더위로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을 열어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소 지친듯이 중얼거렸다. ".......그 바보자식. ......대체 언제까지 속일 셈이야...." ".......그래, 알았어. 하지만 너무 늦추진....." 공항과 호텔을 오가는 KAL 리무진 버스에서 일어로 써있는 피켓을 들고 속속들이 내리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핸드폰에 대고 나즉하게 말하고 있던 에릭은 갑작스레 왁자지껄한 소음이 등뒤에서 들려오자 한층 더 톤을 낮춰 황급히 말했다. "다시 연락할께" 무술유단자나 군 특수부대 출신이 틀림없는 귀에 살색 이어폰을 꽂은 감색 양복차림의 시큐리티 가드(보안요원)들이 특히 밀집되어 내내 주시하고 있던 리셉션장의 문이 열리자 비즈니스 잡지나 경제뉴스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꽤나 낯익은 인물들이 서너명씩 무리를 지어 나오며 소리낮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빨리 대표단을 구성해야 할텐데 자꾸 시일이 늦춰지고 있군요" "의장님이 아직 결정을 짓질 못하신 것 같습니다. 과연 누가 될지 초미의 관심이 쏠려 있지만, 부각되고 있는 후보들이 워낙 쟁쟁해서..." "오랜기간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게 좀 흠이지만, 결정권만 손에 쥔다면야....." "들리는 소문에는 의장님이 이미 누구를 지목했다고...." 소리를 죽였음에도 그 말을 한 사람의 주변에 있던, 특히 30대 정도의 젊은 사업가들이 다소 긴장한 기색을 띄며 그의 입을 주시했으나 얼결에 주목의 대상이된 남자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약간 겸연쩍은 미소를 떠올리며 대충 얼버무리는 모습을 쓰레기라도 보는듯한 눈으로 내내 쏘아보고 있던 에릭은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선진국에 비해 용도별로 세분화되있는 특급호텔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을 방문할때, 최고의 VIP들이나 국가 수반(首班)들이 자주 이용하는 이 초특급 (超特急) 호텔은 특히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제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외국유수의 기업대표들이 많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수준높은 국제행사에 많이 이용되는 수천명 수용의 크리스탈 볼룸을 포함한 십수개의 대형국제회의장과 디너파티나 리셉션에 많이 쓰이는 사파이어 볼룸같은 각종 소형 연회장들이 잘 갖춰져 있는데다, 다국어 동시통역시설과 컴퓨터 조명시설, 화상채팅에 사용되는 대형스크린 등의 최첨단 시설만이 아니더라도 고도로 숙련된 사원들의 세련된 매너와 공손한 태도는 투숙하는 고객들의 우월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나 이곳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던 에릭은 당장이라도 금방 터질듯한 분통(憤痛)에 가끔가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보안요원 하나의 목을 그대로 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적의 영역에 들어와서 직접 맞대면하고있을 승호를 생각해서 간신히 분을 억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우아하게 드리워진 샹들리에들과 유럽풍의 카페트, 귀족적인 실크벽화와 기묘한 천장문양이 품위를 더해주는 리셥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 서 있으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던 에릭은 주변에 흩어져 서 있던 요원들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는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시선도 주지않고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벌써 가려고하나. ...연회장으로 같이 올라가지 않고..." 하나 지금까지 지나친 무리와는 달리 카페트에 흡수된 발자국소리만 들릴정도로 쥐죽은듯 조용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느닷없이 침묵을 깨고 느긋한 바리톤의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오자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에릭이 그대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선약(先約)이 있어서 먼저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수대의 엘리베이터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채 기다리고 서 있던 에릭은 다소 메마른듯하나 지극히 잔잔한 억양(抑揚)의 낯익은 음성이 들려오자 시선을 돌렸다가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인채 가까이 접근해 오는, 이 더위에 조끼까지 다 갖춰진, 보수적인 정장 슈트 차림의 인영(人影)들을 보고는 옆으로 한발짝 비켜섰다. "그런가? 오랜만에 다 모였는데.....아쉽군" 추종하듯 조용히 따라오는 주변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분위기를 내내 주도하는 장신의 이회장이 그 말마따나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한마디씩 만류의 말을 건넸지만 승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도 않은채 정중한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이회장님" 실제로 정기총회(定期總會)가 열린 오늘, 하필이면 승호가 직접 대면해야할 중요한 외국바이어들과의 미팅까지 겹쳤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한 그가 별수없이 사과까지 하고 있으나, 뒤에 서서 내내 보고 있던 에릭은 이회장이 그 선약(先約) 이란 것을 핑계로 여기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감색 양복차림의 호텔 보안요원들과 구분되는 검은 정장차림의 사내들에게 어느새 둘러싸인 이회장이 늘씬하게 빠진 미녀가 문을 연채 45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기다리고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아닐쎄. 그렇다고 사과까지야.... 언제 시간내서 다시 자리를 만들어보세.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예의상 상투적인 말을 내뱉는가 했지만 그 뒤에 조금 시간간격을 두고 뒤따른, 문이 닫히기 직전 안에서 흘러나온 이회장의 말에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 정중하게 서있던 주변 사람들의 안색이 눈에 띌정도로 조금씩 굳어졌다. 대통령까지도 깊은 관심과 지지를 표할 정도로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할 그 교두보(橋頭堡)가 될, 거국적(擧國的) 차원의 K&G-project의 해외파견단을 이끌 대표자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누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이회장의 입이 굳게 닫혀만 있는 이유가 벌써 누군가를 내정해 놨다는, 불확실하나 꺼림칙하기짝이 없는 그 소문을 다들 그순간 떠올렸던 것이다. 이회장이 사라지자마자 한순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져버린 복도는 어색한 침묵만 맴돌다가 연회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불편한 심기를 말하듯 한번씩 낮게 헛기침을 하는 아버지뻘 연배의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目禮)를 하는 승호의 얼굴은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제기랄, 더러운 기생충들... 아부근성밖엔 없는 것들이!!!!'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던 에릭의 입매가 경멸과 분노로 잔뜩 굳어 1층 로비로 내려올때까지도 분을 이기지 못해 희미하게 떨렸지만 앞서서 걸어 가고 있는, 전혀 흔들림없는 강인한 뒷모습에 이내 맥이 빠져 잔뜩 경직되 있던 어깨에 실린 힘을 풀고 말았다. 일본인 관광객들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로비의 한쪽으로 비켜서서 지나치던 에릭은 귀빈단골의 영접담당으로 통역과 비서역할, 뛰어난 외국어실력은 필수인, 고급테이블에 화사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제복차림의 미녀들(GRO)이 자신의 앞쪽을 향해 고개가 조금씩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녀들이 누구를 쳐다보고 있는지를 눈치채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이내 또 기분이 우울해져야 했다. 서늘할정도로 시원한 호텔로비를 나선 에릭은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확 끼쳐드는 후덥지근한 무거운 공기에 한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으나 주차요원이 몰고 온 벤츠의 문을 잡고 서서 승호가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엔....." 하나 계단에 선채로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승호가 한참만에야 입술을 떼어 나즈막하게 중얼거린, 분명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릭은 치밀어오르는 온갖 심경(心鏡)에 입술을 짓깨물며 다시금 자신의 결심이 옳은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레모네이드를 타줘야 하는데...." -59- # # #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어도, 더이상 가질 수 없다해도... 미쳐버린 내 육신을 쇠사슬로 묶어 결박시킨다해도.... 죄의 대가를 치루라 한다면 그 모든건 내 몫이 될테니...... ...............그냥......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원하는건........오직..... 그것뿐이었어........ -59- # # #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어도, 더이상 가질 수 없다해도... 미쳐버린 내 육신을 쇠사슬로 묶어 결박시킨다해도.... 죄의 대가를 치루라 한다면 그 모든건 내 몫이 될테니...... ...............그냥......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원하는건........오직..... 그것뿐이었어........ 발리, 프라다, 구찌 등의 해외명품매장들과 고급 부티크들이 쭉 늘어서 있는 이 패션거리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벽돌 색깔의 붉은 건물은 잘못보면 아르마니 매장과 흡사했으나 다양한 연령과 까다로운 취향의 세련된 상류층 고객들을 만족시킬수 있는 멀티패션샵임에도 고객이 최소한으로 한정되 있는 이유는 워낙 엄청난 고가대의 수입품들만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객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대처하는 여사장의 능수능란한 화술(話術)과 날카로운 눈썰미로 고객의 취향을 일일이 잘 헤아려 만족감과 우월감을 채워줬기 때문에 비록 한정된 인원이긴 해도 입으로 소문이 돌아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 극소수의 고객이 고정 단골로 즐겨찾는 곳이기도 했다. 하나 그렇다해도 이렇게 전 층 매장이 텅 비어 있을 정도로 발이 뚝 끊겼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현재 레지옹 마리에는 이제 겨우 석양(夕陽)이 붉게 물드는 시간임에도 업무가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다. "갈증나실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면서 하세요" 평소라면 부유한 고객들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어야 할 직원들이 전부 다 손을 놓고 있음에도 그들을 제쳐놓고 사장인 그녀가 직접 나서서, 노트북의 화면에서 시선을 떼질 않고 있던 독사같은 인상의 사내에게 접대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슷한 시각대에, 더위를 못견디는 우혁을 떠올리던 승호가 망연히 중얼거렸던, 얼음을 동동 띄워놓은 레모네이드였다. 자신의 말을 듣진 못했더라도, 앞의 유리탁자에 길고 가는 글라스를 내려놓는 기척은 인지했을게 뻔한데도 시선 한번 주지않는 사내의 차가운 태도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듯, 그녀의 입가에 매달려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타인의 출입은 자제해주십시오. 남성 전문매장으로 여직원과 함께 소년의 모습이 사라진 이후, 부탁도 아니고 거의 명령조(命令調)의 그 지시를 군소리없이 그대로 이행한, 처세술(處世術)이 좋은만큼 눈치도 빠른 그녀의 머릿속에 그순간 떠올랐던 것은 오늘 재운(財運)이 따랐다는 것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않된다는 것이었고, 지금 현재 지시를 따른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에 사내가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그녀의 기분을 망쳐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달치 수입을 하루에 다 뽑다니...' 지금 그녀와 사내가 있는 곳인, 넓찍한 1층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지금까지 내내 어지러이 널려져 있던 쇼핑백들과 원통이나 직사각형의 포장된 상자들이 경호원들의 양팔 가득 들린채 롤스로이스로 계속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는 묻지 말고 알아서 해주십시오. 소년의 손길이 한번쯤 닿았던 의상이나 악세사리들을 재깍재깍 1층으로 옮겨와 포장한 것이 그 내용물이었는데 직원들의 귀뜸으로 대부분이 입어보지도 않고 그냥 손만 대보거나 힐끗 시선만 줬던 것들에 불과했고, 사내 역시 그 사실을 모를리 없을텐데도 가격표조차 보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한다는 식의 말만 내뱉고는 그 이후로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완전히 봉을 잡았다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그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잘 어울리는 의상을 골라주려고 올라가려던 그녀를 단번에 제지한 것은 물론이고 물건을 옮기기 위해 어쩔수 없이 남아 있어야하는 직원들도 소년의 곁에 가까이는 다가가지 말라는, 처음부터 계속 이상한 지시만 한 후 일만 하던 사내가 대략 한시간 전쯤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한 후에는 그 싸늘한 얼굴에 가끔가다 이상야릇한 미소를 떠올리기도 해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내심 의아해하던 그녀는 들끓는 호기심(好奇心)에도 불구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어야 했다. '돈자랑이나 일삼는 벼락졸부가 아닌건 틀림없지만, 소개를 어디서 받고 온건지만 알아도 금방 알아낼텐데.....' 귀족같은 품위를 지닌 범상치 않은 외모의 소년과 처음엔 비서인줄만 알았는데 돈을 물쓰듯 쓰면서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 사내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실상 입이 근질거릴 정도였으나 그런 내색을 조금이라도 비치거나 넌지시 돌아서 물어볼정도로 그녀가 어리숙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게 통할 상대가 아니란걸 진작에 알아봤던 것이다. -끼이이익!!!!! 경호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기척밖엔 없던 지극히 조용한 로비 안으로 갑자기 타이어가 급정거하는 소름끼치는 음향이 닫힌 유리문을 꿰뚫고 들려온 순간, 도로변도 아닌데 웬 사고라도 났나싶어 놀라 고개를 돌리려던 그녀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장면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의 입술꼬리가 치켜올라갔다는 것과 이때까지 꼼짝도 않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롤스로이스를 박을뻔했어!!" "어머 저애, 간이 다 오그라들었겠다!!" "..............정말이지.....완전 자동이군" 신나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평소답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여직원들의 고음 (高音)에 바로 옆에 서있던 그녀에게도 들리지 않을만큼, 나즉하게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같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부딪히지 않은게 행운일 정도로 롤스로이스의 옆면에 거의 박치기를 할만큼 근접해 대어져 있는 멋들어진 바이크였다. "아, 이런! 저 상자 떨어뜨리면 않되는건데!!" "소리난거 봐서 깨진거 아냐?!" 헬멧을 벗자마자 몸을 일으킨 바이크의 주인은 여직원들의 말대로 간도 크게 롤스로이스를 박을뻔했으면서도 경호원들에게 제지조차 받지 않고, 아니 실상 지나칠 때 몸이 거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그 고압적(高壓的)으로 보이는 경호원들이 들고 있던 포장된 상자들까지 바닥으로 떨어뜨려 게중엔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서 호들갑떠는 여직원들뿐만 아니라 그녀까지도 한순간 가슴이 철렁한 짓을 저질렀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데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지만 경호원들이 보여준 반응은 정말 의외의 것들이었다. "엣? 가만히 있네. 저 아저씨들? 웬일이지?" 독사같은 사내의 귀에 들릴까봐 소리를 한껏 죽인듯했지만 다 들리는 직원 한명의 그 말처럼, 그녀의 눈에도 오히려 그가 인사를 받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뒤에서 떨어진 물건들을 들어올리던 경호원들이 보여준 반응은 그가 저지른 짓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조용한데다 실상 정중하기 짝이 없는것처럼 비쳐졌기에 자신이 착각한게 아닌가 싶어 그녀의 의구심(疑懼心)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말 벼락같은 기세로 문을 박차고 들어선, 가까이서 보니 땀에 젖어 얼룩진데다 구김까지 심한 교복 차림으로 보아 학생인 듯한 장신(長身)의 그 남학생은 눈이 가릴 정도로 흘러내린 머리칼에서 쉴새없이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데다 차이나 칼라의 교복셔츠 앞섶을 거의 반 이상 단추를 끌러 그 사이로 슬쩍 드러난 가슴도 역시 땀으로 흥건해 무척 더운 듯했다. 하나 실상 다른 사람들처럼 붉게 달아오른게 아니라 피부가 워낙 창백해 보여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체질로 보였음에도 대체 뭘하다 왔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을만큼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땀으로 완전히 목욕을 한 것처럼 흠씬 젖어 있었다. "아, 저기..." "어떻게...." 그렇게 후즐근해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그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으로 보이는데다 30대의 그녀가 보기에도 위험할 정도로 성적매력(性的魅力)이 다분해, 카운터 근처에 있던 여직원들이 처음 구경거리라도 난 것마냥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달리 그 남학생이 로비 안으로 들어서 카운터 옆을 지나친 순간, 다들 인사를 해야할지 쫓아내야할지 어안이 벙벙해 있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그의 흐트러진 차림에 약간 얼굴까지 붉힐만큼 교복으로 보아 분명 한두살 연하(年下)의 남자임에도, 경호원들과 마찬가지로 우스울 정도로 너무나 의외의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 그런 모습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긴다리로 성큼성큼 들어서며 눈 위로 흐트러져 내린 젖은 머리칼을 거친 동작으로 쓸어올리던 그 남학생은 쇼윈도만 봐도 얼마나 고가대의 물건들만 취급하는 부티크인지 알정도로 웬만한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할만큼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에도 전혀 기죽는 기색은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보는 사람의 등골이 다 시원할 정도로 얼음처럼 싸늘하기 짝이 없는 표정만 짓고 있던 그 남학생이 시선을 돌리다 로비의 한켠에 우두커니 서있던 자신과 사내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지는듯 하더니 미간이 좁혀지며 눈썹이 급격히 치켜올라가는 것을 뚜렷이 목격한 그녀는 그가 누구에게 볼일이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었다. '이 남자와 아는 사이같은데...'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대 칠것같은 기세로 다가오는 그의 전신에 베어 있는 험악한 기운과 머리칼을 쓸어올린 바람에 드러난 날카로운 검은 눈에 서려있는 칼날같은 노기(怒氣)가 흡사 그녀 자신에게 미치는 듯한 착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기세에 밀려 한발짝 뒤로 물러설뻔했지만 간신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대체 누군데 저러는거지? 막아야 하는건가...' 한순간 그녀는 부티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딴판인 그 후줄근한 차림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밖의 경호원들이 제지하지 않는 것과 그의 시선이 꿰뚫을듯이 꽂혀 있는, 분노의 대상임에 틀림없는 옆의 사내와 아는 기색인듯해 어떻게 대해야할지 난처해 아무 말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의 주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하는게 아닌가 싶어 계속 망설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모습 가지고서는 도저히....' 분명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소년임엔 틀림없지만 특권층의 자제라면 외모나 차림에 세밀한 곳이라도 얼마나 일일이 신경쓰는지를 잘 아는 그녀로서는, 지금 자신의 주수입원(主收入源)이 될지도 모를 위층의 소년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차림새에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또한 눈에 띄는 외모임엔 분명했으나 전혀 세련되지 않고 거칠기만한 흡사 야생마 같은 그 모습과 옆에 선 사내를 힐끗 본 순간 저렇게 험악한 기세(氣勢)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웬지 이 상황을 즐기는듯한 미소에, 그가 중요시하는 인물은 분명 아닌듯해 돌려서라도 어중간하게 한마디는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막 입을 열려했다. 하나 계속 침묵만 지키던 사내가 먼저 입을 연순간, 이 무례하고 차가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정도로 너무나 정중한 그 음성을, 아니 그 말 속에 끼여있는 한 단어를 듣는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자신이 저지를뻔한 실수와 사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찌됐을지를 깨닫자 능숙한 처세술 따위는 싸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안면근육이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예상외로......빨리 찾으셨군요." 4층 남성전문매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밖의 소름끼치는 급제동(急制動) 음향이 들렸지만, 멀찍이 떨어져 서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며 귓속말을 주고받아 신경을 쓰이게 하다가 갑작스런 소음에 유리벽에 달라붙어 무슨 일인가 내려다보는 누나뻘의 여직원들과는 달리, 우혁은 오랜시간 전신에 따갑게 느껴지던 시선들이 자신에게서 떨어진 것에 한시름 놓는 기색을 비치며 그녀들이 뒤돌아서 발견하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옷을 들고 탈의실로 피하듯이 들어가버렸다. '......꼴보기 싫어...' 조명이 환하게 켜진, 사면이 흰색인 꽤 넓은 탈의실로 들어간 우혁은 나무가 깔린 바닥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에어컨을 틀어놓아 시원한 내부온도에도 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인지 어느새 축축히 젖어든 셔츠를 벗으려다가 문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벽에 부착되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는 그 비리비리하고 한눈에도 병약해보이는 모습에다, 하얀 피부때문에 지나칠정도로 붉어, 입술밖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자신의 얼굴이 매번 볼때마다 화가나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머리도 손질해야 할거 같고.... 않그래도 몸이 축나 있던 상태에서 포도주라고 착각하고 몇모금 마신 술때문에 거의 빈사상태로 완전히 폐인지경까지 다다랐다가 겨우 몸이 회복된게 얼마되지 않은지라 아직도 겉보기엔 병자처럼 보이긴해도 외출까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건 아니었다. 자신이 벌인 소동으로 얼떨결에 악화되었던 사이가 흐지부지되버려 승호가 찾아오기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 다시 같은 침실을 쓰게 된, 하나 아직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다소 미묘한 관계가 되버린 재원이, 자신이 많이 움직이는걸 꺼려한다는걸 잘 알면서도 우혁은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재원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고 그에게 매여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실상 자신을 너무 허약하게만 보는 그에 대한 반발심에 거의 오기로 나온 것이긴 해도 밖에 나온 것을 조금은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 집에 종신계약으로 몸이 묶인 사람이죠. 하핫.. 재원이 등교를 한 시간에, 침대에 누워 있던 우혁에게 찾아와 농담투로 자신을 소개한 진은 그 차갑고 독살스럽기까지한 외모와는 달리 농담도 잘했고 얘기를 듣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데다, 칠현 못지 않게 자신의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잘 파악해서 재원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말도 그에게만은 웬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오히려 유모보다도 짧은 기간에 급격히 가까워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 -뭘 고민하는지 알아요. 근본적인 원인은 그게 아닌거죠? 또한 도련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도.... 스스로 깨닫고는 있으면서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못할만큼 개념이 정리가 않되던 사실을, 재원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어놓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너무나도 잘 꼬집어 파악했기때문에 그가 자신과 재원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고, 거의 카운셀러 역할을 해주는 그에게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어느 누구에게도 말못할 고민을 사심없이 털어놓을 수가 있어 우혁은 요즘들어 한결 정서적(情緖的)으로 안정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에 대해 잘 모르는군요. 그는 외양만 가지고 남자를 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유모님께 대충은 들어서 알테지만......여자들은 그에게....... .......그래서, 우혁군을 대하는 그를 보면....지금도 놀랄때가 많아요. 진이 일례로 몇가지 말해준 재원이 과거에 어떤 식으로 여자들을 대했는가에 대한, 듣기 꺼림칙하고 미묘한 심정에 가슴이 지끈거리면서도, 아니 실상 자신에게도 이런 격한 감정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정도로 심장이 난도질당하듯이 아프면서도 결국 호기심을 참지못해 끝까지 얘기를 다 들은 우혁은 그가 자신을 난폭하게 취급하거나 수치심(羞恥心)을 주었던 것들은 그의 기준으론 거의 장난 수준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 우혁은 그런 말을 들어도 완전히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데다 재원에 대해 갖고 있던 근본적인 죄책감은 여전히 가슴 속에 응어리진채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어줍짢은 네 행동 때문에 또 멀쩡한 놈 병신만들 소지는.... 중학시절 같은 학교였던 칠현은 승호가 모르는 진상(眞想)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에 우혁 자신은 결코 원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친해지고 싶어 순수한 호의 (好意)를 갖고 다가오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흑심(黑心)을 품었으면서도 감히 접근은 못하고 있던 학생들까지도 우혁을 호시탐탐 노리고 시선을 떼질 않고 있던 놈들에게 적발되어 엄청난 보복(報復)을 당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서야 칠현에게 듣게된 우혁은 자기 하나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었다는 것에, 아니 남자인 자신을 그런 시선들로 봤었다는 것에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나도 남자를.... 안는 남자를 게이라고 한다는걸,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안단말야. 승호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난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아'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데서 행해진 그 일들과 정상적인 남자애들을 남자나 넘보는 놈들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예외없이 소심하고 마음 약한 우혁을 이후로 쉼없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자학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타인의 마음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건 결코 우혁군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 부분도 아니고요. 결국 우혁이 승호에 대해 갖고 있던 근본적인 죄책감(罪責感)도 그것때문이었고, 재원에 대해 갖고 있던 혼란한 심정들도 재원 역시 남자나 안는 사람으로 만든건 자신때문이라는 죄책감과 언젠가는 그가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까하는 공포(恐怖)에 가까운 두려움, 그리고 이렇게 이미 속절없이 재원에게 이끌렸으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는건 결국 언젠가는 이 관계가 끝나게 될거라는 불안감과 상처받고 싶지 않은 자기보존(自己保存)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정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그 불필요한 죄책감. 실수로라도 입밖에 내지 마십시오.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 때, 진의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것은 냉정한 그답지 않게 분명 두려움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혹시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우혁이 재원에게 그 말을 하게 될까봐 초조한 근심과 불안이 베인 경고(警告)의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그 어조와 표정에 어려있던 심각함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된 우혁은 결국 자신의 결심(決心)을 철회해야 했다. -18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마디만 하죠. 당신이 먼저 그에게 질려 벗어나고 싶어도 놔주지 않을겁니다. 그 말을 시험해보고 싶으면 한번 도망쳐봐도 좋고요. 그 후의 결과는.... 벗은 셔츠와 바지뿐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던 새옷들까지 바닥으로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속옷만 걸치고 있어 적나라하게 노출된, 키빼고는 전혀 남자답지 못한 자신의 빈약한 몸을 거울을 통해 어두운 눈빛으로 보고 있던 우혁은 한번 재원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고 싶었지만 그의 눈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감도 잡을수가 없었다. -이봐, 우린 같은 남자야. 달린거 똑같이 달렸고..... 솔직히 마른건 재원 역시 마찬가지지만 자신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단단하고 균형잡힌데다 남자다운 골격까지 갖춰서 자신의 앞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을때마다 시선을 어디다 놔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할때도 많았지만 분명 같은 남자임에도 지나칠정도로 부끄러움을 타는 자신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나 나나 한 두번 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사실.....본 것만이 아니잖아.....이젠 좀 익숙해 질때도.....아얏!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그렇게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원의 짖궂은 놀림에 매번 발끈한 나머지, 실상 계집애나 다름없이 손톱으로 쥐어뜯거나 쿠션으로 쳐대며 화내면서도 우혁은 자신의 빈약하고 볼품없는 몸을 그가 보는게 부끄러웠고 원래부터도 몸을 노출하는건 싫어했는지라 항상 옷을 갈아입는 것도 드레스 룸안으로 들어가서야 안심하고 갈아입곤 했었다. -말을 통해 확인하려 하지 말고, 행동에서 그의 마음을 찾아보세요. 분명 우혁군에게 보여줬을 겁니다. 그것을 찾았다면 외면하지 마십시오. 납치된 후 본의아니게 재원과 한 침대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기에 더욱 부끄러웠으면서도 스스로 애써 변명하며 그냥 재원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을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얼굴이 따끔거리는 기운에 눈을 뜰때면 항상 바로 옆에 누워 팔로 고개를 받친채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보기마련이었다. '그의 말대로.....내가 널.... 밀어내고 있는 걸까?' 승호의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과는 달리 미소조차 짓지 않고 있는 그 나른하면서도 무심한 눈빛이 무방비한 모습으로 자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게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매번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결국 노골적으로 꺼려하는 기색(氣色)을 내비친 다음부터는 아침에 눈을 떴을때 더이상 그의 모습을 침실에서 볼 수 없었던 사실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우혁은 꽤 오래 전의 그 일을 새삼스럽게 떠올려야 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두려워서 외면했던 걸까?' 그동안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표정, 사소한 손짓 하나 하나까지 신경쓰며 알게모르게 불편하지 않게 해줬던 그 모든 것들이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그의 마음을 표현했던 것임을, 그 말대로 정작 그의 진심을 외면하려했던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우혁은 차츰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진심을 알았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갑자기 탈의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흠칫한 우혁이 눈을 들다가 코끝으로 확 끼쳐드는 후덥지근한 땀냄새와 그럼에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묘한 체취가 미처 누구의 것인지를 자각할 새도 없이 갑자기 그대로 옆의 벽으로 강하게 밀쳐져 머리와 가슴이 석고벽에 부딪히며 고통과 경악으로 비명을 지르려다 돌려진 시야에 들어온, 옆 거울 속에 있는 재원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어떻게......?!! 으윽!!"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느닷없이 이러는건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여력도 없이 그대로 자신을 압사라도 시키려는건지 계속해서 세게 짓눌러오는 재원의 전신에 실린 힘과 땀에 젖어 후끈거리는 열기에 숨막히는 신음을 토해내던 우혁은 다급하고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와닿자 다시 온몸을 바짝 경직시키고 말았다. "대체 무슨 짓이야!!! 아..아읏!!!" 미처 제지키도 전에 가슴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줘 숨도 못쉴만큼 으스러질 정도로 옥죄이며 그대로 목덜미에 입술을 거칠게 밀어붙여 세차게 빨아들이는 재원의 격한 행동에 전신을 치달리는 야릇한 감각을 참지 못해 우혁의 고개가 젖혀지며 전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몸을 비틀며 피하려 했지만 허리부근을 애무하던 손이 그대로 앞으로 돌려져 속옷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려하자 순간 움찔하며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않돼!!! 하지마.......윽!!!" 하나 자신의 손에 손목이 잡혀 있으면서도 속옷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바람에 속살이 노출되어 에어컨 바람의 서늘한 기운에 오싹 소름이 돋기가 무섭게 그대로 깊숙히 파고들어 애무하는 재원의 손길에 순간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흐........윽....." 전신을 치달리는 쾌감어린 짜릿한 전율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갔지만 지금 자신들이 이러고 있는 곳이 탈의실이라는 것을, 밖에 분명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간신히 자각한 우혁은 피가 날정도로 입술을 짓깨물며 신음을 삼키려 애썼으나 뒤에 바짝 달라붙은채 갈수록 더욱 농도짙게 애무하며 어깨에 입술을 짓눌러 살갗을 이빨로 살짝 깨물던 재원은 그대로 우혁의 몸을 돌려 다시 벽으로 밀쳤다. "싫...싫어!!! 하지마!! 그만해!!!" 몸이 돌려진 순간 땀으로 흥건히 젖은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한 우혁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원이 몸을 밑으로 내리자 따라서 시선을 내리던 우혁은 그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보고는 뭘하려는지를 깨닫고 경악한 나머지 다급히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 했다. "아..읏! 그만....해.....윽.........아..아윽....아악!!!" 하나 그대로 억센 손아귀에 다리가 붙잡혀 옴짝달싹도 못한채 쉴새없이 몰아붙이는 뜨거운 혀와 입술의 감촉에 전신을 간헐적으로 떨며 어떻게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으로 입을 막다가 다시 정신없이 재원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멈추게 하려던 우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막히는 비명성을 토해내며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지만 이내 재원의 팔에 잡혀 반쯤 구부렸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하아....아.....하아..........너.........대체...." "...........제발...........가만.....히......있어....." 벽에 밀쳐지자마자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탱해 서있던 우혁은 자신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거칠어진 숨을 달래고 있는 재원의 몸을 밀쳐내려 애쓰다가 이를 악문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맞닿아 있는 그의 몸이 잔뜩 힘이 들어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그가 정욕을 참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온몸이 경직된채 그대로 몸을 맞대고 그의 팔에 허리가 감겨 끌어안긴 자세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어야했다. "..........제.........기...랄........" 미친듯이 날뛰는 심장소리가 누구 것인지도 분간이 않갈정도로 바늘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몸이 맞닿은 채로 서로의 뜨거운 체온과 더운 숨결만 피부에 느끼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재원을 도발시킬까봐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어 있던 우혁은 갑자기 숨이 더 거칠어지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재원이 탁한 음성으로 험악하게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몸을 떼어내자 긴장을 약간 풀려다가 시야에 들어온, 전혀 예상 밖의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뭐....뭐하는....거야...?!!!" 대부분 스스로를 다스리던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옷조차 제대로 벗을 여유도 없다는 듯 완전히 냉정을 잃은 채로 벨트만 끄르고 있는 그의 모습과, 그럼에도 그 사이에 도망치기라도 할까봐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질 않고 있는 땀에 젖은 머리칼에 가려 빛이 사라져버린 검은 눈동자에 서려있는 위험한 기운이 분명 광폭한 욕정(欲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순간, 사냥꾼의 덫에 걸린것마냥 전신이 얼어붙어버린 우혁은 피하지도 못하고 경악해 있다가 뻗쳐온 억센 손아귀에 팔뚝을 붙들려 몸이 돌려진채로 다시 벽에 밀쳐져야 했다.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가락들이 세게 옥죄어옴에도,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와 귓가를 전전하며 쉴새없이 부벼대고 있어도, 그런 감각따위는 느끼지도 못할만큼 등뒤에 바짝 달라붙어 벽으로 점점 세게 짓눌러오는 재원의 뜨거운 몸이 전달하는 심한 압박감(壓迫感)과 질식할 정도의 열기(熱氣)에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몸으로만 느끼고 있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 우혁이 신경이 바짝 곤두선채 몸을 간헐적으로 떨어야 했다. "...시....싫......어.........흐......흑......" 게다가 대체 무슨 일인지 말도 않고 처음 들이닥치자마자 완전히 냉정을 잃은채 자신을 몰아붙이는 재원의 모습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만큼 겁에 질려버린 우혁이 몸을 떨며 정신없이 흐느끼다가 혹시라도 누군가 들어와서 이런 모습을 보거나 자신의 신음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 어떻게든 그를 제지하려했다. "......하....하지...마........제..발........사람이...." "................아..무..도.....없...어...." 우혁이 저택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진에게 연락했던 재원은 쇼핑을 하다 우혁의 몸 상태가 갑자기 않좋아져 잠시 쉬다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전혀 걱정의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너무나 무사태평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 뙤약볕에 외출을 감행시킨 진에 대한 노여움과 우혁에 대한 염려로 저택을 뛰쳐나올때부터 이미 반쯤 냉정을 잃었던 상태였다. 게다가 이곳까지 물어물어 찾아오는 동안, 폭염(暴炎)까지 한몫한데다 이 더위에 헬멧을 오랫동안 쓰고 있는 바람에 숨이 턱끝까지 치밀은데다 전신이 땀으로 후즐근히 젖어 김까지 날정도로 후끈거려, 겉은 겉대로 속은 속대로 부글부글 끓어올라 완전히 뒤집힌 상태여서, 로비에서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진을 본 순간 그 모든게 한꺼번에 폭팔해 그 자리에 그대로 때려눕히려 했을 정도였다. 하나 그것도 우혁을 먼저 확인하고 나서의 일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내뻗치려는 주먹을 움켜쥐어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재원이 매장으로 올라갔으나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었고 문 닫혀 있는 곳이 휴식공간인가 싶어 문을 연 순간 그의 눈 앞에는, 분명 누워서 쉬고 있다는 우혁이 속옷만 걸친 완전 나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진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과 왜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도 전에 새하얗고 투명한 잡티 한점 없는 피부와 매끄럽게 뻗은 등줄기, 가늘고 우아한 긴 다리와 한 팔에 다 감고도 남을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 등 그 모든 것이 두 눈 가득 들어온 순간, 완전히 사고가 마비되버린 재원은 자신이 이 곳에 왜 왔는지, 왜 이 문을 열었는지 한순간에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이성으론 억제치 못할정도로 불길처럼 치솟는 격정에 결국 미친놈마냥 정신이 나가 이지경까지 와버렸던거지만 그래도 마지막 선까지 오자 강제로 가질수는 없다는 의식(意識) 하나만은 갖고 있었기에 재원은 간신히 자신을 억제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마........" 거의 놓칠락말락하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든채로 전신이 폭팔할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열에 들떠 있던 재원은 귓속으로 파고든 우혁의 흐느낌과 전신을 잔뜩 경직시킨채 파들거리며 떠는 기색에 결국 자신을 거부하는건가 싶어 절망한 나머지 거의 체념어린 심정이 되버리고 말았다. "...........................우......혁...아...." 단한번도 그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던 숨이 탁탁 끊어지는, 탁하게 갈라져버린 그 음성과 단지 이름만 부른 것임에도 그 속에 담긴 절박감과 애원에 가까운 처절함에 지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우혁은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으면서도, 급속도로 밀려드는 까닭모를 두려움에 전신을 더욱 경직시키며 자신이 어찌해야 좋을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타들어가는 신경에 그대로 이 자리에 쓰러지고만 싶을 뿐이었다. ".....하.......아......흐읏...." ".......!!!!" 전신이 땀에 흥건히 젖어 열로 정신이 아득해진채, 단단히 품안에 끌어안고 있어도 흠칫거리며 떨리는 가냘픈 어깨과 목덜미에 입술을 짓눌러 연약한 피부를 강하게 빨아들이다가 귓볼을 자근자근 깨물면서 미약한 신음소리에 더욱 자극을 받은 재원이 턱선을 따라 입술로 훑어내려가며 고개를 조금 들다가 순간 전면의 거울에 비친,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있었던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하마터면 입밖으로 욕설을 내뱉을뻔 했다. 하나 그럼에도 우혁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팔뚝을 놔주지 못하고 계속 힘을 주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가슴을 애무하던 손길을 점점 미끄러뜨리고 있으면서도, 그를 미칠 듯이 갈망(渴望)하느라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욕구와 타는듯한 육욕(肉慾)으로 인해 흉폭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지금같은 상태로 우혁을 가지려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도 분명 그를 상처입힐게 뻔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자신을 억눌러 이 상황을 이겨내려 했다. "...........아읏...!!" 그 모든 것을 전신이 바짝 밀착되어 있었기에 온몸으로 생생히 느끼고 있던 우혁은 그렇게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강제로 갖지 않으려는듯 숨이 턱끝까지 다다랐으면서도 약간 거친 손길로 애무만 하던 재원이 어깨에 키스하다가 다시 고개를 깊숙히 숙여 목덜미 앞쪽을 입술로 베어물더니 아플 정도로 세차게 흡입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신음을 터뜨릴뻔하자 얼른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아.......아..........하...아......하아....." 하나 밀착된 전신으로 온몸을 위아래로 쓸듯이 느리게 움직이며 흡사 사랑을 나누는 행위나 마찬가지로 피부를 마찰시키다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점점 격렬해지는 재원의 움직임에, 섹스보다도 더 욕정적인 처음 경험해보는 그 행위에 수치심을 느낄새도 없이 그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너무나 관능적이고도 야릇한 쾌감에 우혁은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다가 그대로 경직된 몸에서 힘을 빼며 그의 가슴에 몸을 실어버리고 말았다. 우혁을 점점 흥분시키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타는듯한 고통에 한계를 넘어서 있으면서도 강제로 가질수 없다는 의식에 지배받아, 실상 섹스나 다름없는 행위로 실크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던 재원은 맞닿아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동시에 자신에게 체중을 싣자 한순간 자신의 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하는건가 싶어 움직임을 멈추고 우혁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전신을 딱딱하게 굳힌채로 있어야 했다. "....하아.....하........하아....." 하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우혁의 몸이 어느결에 달라오른 상태란 것과 두르고 있던 팔뚝 밑의 가슴이 위아래로 들먹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한 재원은 그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건지 깨닫고도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어깨로 우혁의 머리가 눌러오고 있다는 것과 바로 귀 옆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리자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붉은 입술을 벌린채 가쁘게 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눈을 감고 가늘게 떨고 있는 우혁을 본 순간, 완전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진 재원은 지금까지 항상 자기자신보다 우혁의 기준에 맞춰 그를 배려해왔던 이전과는 달리 그럴 정신도 여유도 없이 경고도 않고 그대로 우혁의 몸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갔다. "하....아윽!!!!!!!!!!!" 급격하게 몸에 가해진 충격을 감내하지 못한 가는 육신이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삽시간에 경직되다가 본능적으로 충격을 줄이기 위해 등허리를 활처럼 휘며 경련을 일으키던 우혁이 뒤에 밀착해 있던 단단한 어깨에 다시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흐윽........윽....." 좁은 공간에서 어쩔수 없이 벽에 기대 선채로, 처음 겪어보는 자세인데다 실상 술에 취해있던 그날의 기억이 없는 우혁으로서는 근 두달만에 재원과 사랑을 나누는거나 마찬가지로 그 시일차를 착각하고 있었기에 심리적인 압박감에다 기억하고 있는 재원보다 더욱 거칠은 행동에 다른때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엄청난 고통을 이기지 못한 우혁이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할 정도로 전신이 쪼개지는 듯한 극통(極痛)에 온몸을 떨어야 했다. ".......윽............으....." "...........참...지마.....소리질러도 돼......아무도...못..들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뒷머리를 재원의 몸에 댄채 전신을 심하게 떨며 입술을 짓깨물어 비명을 삼키다가 귓가에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속삭이는 재원의 잔뜩 쉬어버린 음성과 자신의 입술에 손을 대어 깨물지 못하게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는 행동에 간신히 고개를 든 순간 잔뜩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에 우혁은 그대로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뭐....!!!"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던 건지 자각치도 못하겠으나 앞에 부착되있는 전면 거울에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연인의 나신이, 아니 자신의 뒤에 서서 몸이 가려져 있는 재원보다는 거울전체로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골적으로 재원의 눈앞에 완전히 드러나버린 자신의 전라와 가슴과 허리를 팔로 휘감은채 뒤에 서서 자신의 귓가에 입술을 댄채 거울에 시선을 주고 있는 재원의 모습을 본 순간, 처음으로 둘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된 우혁은 머리를 수십톤의 해머로 친듯한 충격에 사고가 완전히 마비되버리고 말았다. "......뭐....뭐야..... 이런거...싫어!!!" 닿은 어깨에 기대 고통을 참으며 덜덜 떨고 있던 자신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신음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내내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재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왜 그가 처음부터 거울에 자신을 밀쳤는지를 깨달은 우혁은 고통도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전신이 확 달아올라 피부가 새빨갛게 변한채 그에게서 도로 벗어나려했다. "아악!!! 아...아파!! 제발!!!" 하나 그러기도 전에 자신의 그런 모습과 벗어나려는 몸짓에 오히려 자극(刺戟)을 받았는지 갑작스런 쇼크를 감소시킬 여유도 충분히 주지 않고 전신에 격렬하게 부딪쳐오는 재원의 힘을 감당치 못한 우혁이 계속 거울에 몸을 부딪히다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윽!!!...악!!! 아파!!!!" 숨이 턱턱 막힐정도로 온몸에 힘을 실어 부딪혀오는 재원때문에 팔로 지탱하고 있어도 힘을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단단한 거울 벽에 얼굴과 가슴이 세게 부딪히며 고통스러워하던 우혁은 하체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까지 더해져 몸이 양분되어 갈가리 난도질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해 연신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흐....흑......아윽!! .......읏..........윽.......하악!!!" 하나 그럴수록 더 거센 속도로 격하게 밀어붙이는 몸놀림에 울음을 터뜨리며 고통어린 비명을 지르던 우혁은 어느 순간부터 고통대신 발끝까지 찌릿한 전율을 느끼다가 전신을 꿰뚫는 전류같은 자극이 몸을 관통해 흐르면서부터는 쉴새없이 몰아쳐오는 쾌감에 입술을 짓깨물며 참으려 했지만 결국 숨막히는 신음을 토해내야 했다. "....읏.......흐...윽........하악.........아.......아악!!!!!!" 격정적으로 움직이다가 한시의 쉴틈도 않주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재원의 움직임에 완전히 정신이 혼미해져버린 우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지금까지 겪어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얻은 대신 쾌감 역시 지금까지 경험해본 것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정도로, 차라리 죽는게 낫다 싶을만큼 또다시 정신없이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스런 쾌감을 참지 못해 쾌락에 찬 비명을 내지르다가 먼저 절정에 도달하며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다. "....하악....아.....하아..........읏...." 흐느적대며 축 늘어지려는 몸을 재원의 팔에 맡긴 우혁이 힘겹게 숨을 내쉬다가 절정에 다다른 우혁이 쾌락의 여운을 즐기게끔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거울에 기댄채로 꼭 끌어 안고만 있던 재원이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따라 혀로 훑어 내리며 입술로 짓누르자 순간 그 야릇한 감촉과 데인듯한 느낌에 등이 오싹할 정도로 전율이 흐르며 바짝 긴장하고 말았지만 재원이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조금씩 몸에서 힘을 풀려했다. ".....하아.........으.......응........."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재원의 몸놀림이 절정에 다다르기 전과는 완전히 판이하게 뒤바껴 흡사 몸을 어루만지듯이 너무나 부드러워지자 완전히 몸에서 힘을 빼며 전신을 휘도는 쾌락의 여운을 맛보기도 전에 다시금 밀려드는 전율어린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우혁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움켜쥐는 기색에 고개를 약간 뒤로 젖혔다. 순간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치는 뜨거운 입술과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은 재원이 혀를 휘감고는 달콤하고 부드럽게 빨아들이다가 점차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만큼 거칠게 탐하기 시작하자 우혁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돌려 재원의 어깨에 머리를 댄채로 격정적인 키스에 금새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하아......하아.......으........읏.........흐윽!!!" 다시 반복적인 리듬을 타듯 점차 격렬하게 움직이는 재원의 몸놀림에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열에 들떠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던 우혁은 또다시 휘몰아쳐 정신없이 전신을 강타하는 쾌락에 그대로 온세상이 새하얗게 변해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착각을 받으며 전신에 힘이 풀려 재원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헉.........하..아......." 우혁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재원이 흐릿한 눈을 들어 전면을 본 순간, 자신의 무릎사이에 끼여 열과 땀으로 후끈거리는 가슴에 등을 기댄채 한참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땀에 젖어 색이 더 짙어진 헝클어진 백금빛 머리칼과 식은땀으로 흥건해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느라 젖혀진 가늘고 우아한 목선과 파들거리며 쉴새없이 떨리고 있는 긴 속눈썹 짙붉어진 입술을 열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작약시킨 희열(喜悅)에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우혁의 모습이 눈앞의 거울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이자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우혁을 본순간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를 깨달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오랜시간 전희를 즐기면서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구를 눌러왔던 것과는 달리, 충분한 애무조차 없이 이런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우혁을 세워놓은채로 겁에 질렸을게 뻔한데도 욕망을 채우는데만 급급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제야 깨우쳤던 것이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만족치 못한 자신의 몸이 또다시 그를 갈망하느라 전신이 급속도로 들끓어오르자, 과거 쾌락을 갈구하며 매달리던 여자들을 비웃으며 섹스를 장난처럼 여기던 자신이 이젠 거꾸로 우혁에게 거의 구걸하다시피된 현실을, 이젠 두 번 다시 우혁 외엔 않될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절실하게 깨우쳐주는 현실에 재원이 잔뜩 짓눌린 음성으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정..말...........죽이고.... 싶다...." 불길처럼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이를 악물며 간신히 억제시키고 있던 재원은 다시 우혁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머리를 기댄채로 전신을 간헐적으로 떨며 지옥같은 고통을 인내하다가 간신히 고비를 넘기자 진이 다 빠져버려 한참을 숨만 몰아쉬다가 품에 안고 있던, 땀으로 흥건히 젖은채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우혁의 몸이 발그레한 기운이 가시면서 점차 체온(體溫)이 식어가려하자 시선을 돌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들을 발견하고는 그중 부드러운 것을 잡아채 우혁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으....응......." 구석구석 몸을 닦아주면서 거울을 쳐다보며 우혁의 반응을 예민하게 살피고 있던 재원에겐 쥐고 있는 천이 부드럽다는 것과 축 늘어진채 눈을 감고 자신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던 우혁이 천이 몸에 쓸리는 촉감을 즐기는 것처럼 나른해진채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다가 차츰 잠에 빠져드려는듯 숨소리가 느려지고 있는 것에만 온 신경이 다 쏠려 있을 뿐이어서 실상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다이아가 박힌 단추가 매달려 있는 실크셔츠가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일회용 타월로 뒤바껴 한번 걸쳐보지도 못하고 폐용(廢用)이 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응....." 귓속으로 가냘프게 파고드는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는 것처럼 목이 울리는 기분좋은 신음소리와 평소라면 이때쯤엔 정신을 차려 앙칼진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우며 부끄러워 얼른 벗어나려 했을테지만, 지금 눈앞의 우혁은 완전히 긴장을 풀고 몸을 맡긴채로 점점 나른해지고 있는데다 표정까지도 술에 취했던 그때를 제외하면 처음본다 싶을만큼 완전히 무방비하게 풀려 있어 짖궂은 미소를 짓던 재원이 우혁의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짓누르며 부드럽게 키스하다가 다시 내리덮인 눈까풀과 파다닥거리는 속눈썹에 입술을 부벼댔다. 간신히 불을 끈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쾌락의 여운에다 우혁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뼛속까지 환희어린 충족감으로 가득채워져 있던 재원은 자신의 품안에 폭 파묻힌 자세로 무릎을 구부린채 불편하게 드러누워 잠에 빠지려는 우혁을 추스려안고는 영원히 놓지 않으려는 듯 가슴을 단단히 부둥켜 끌어안으며 축축히 젖은 백금빛 머리칼을 쓸어올려주며 관자놀이를 입술로 짓눌러 쓰다듬었다. 나른한 상태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재원이 뭘하고 있는지 다 느끼고 있던 우혁은 점차 혼미했던 정신이 깨어나자 거울에 비쳤던, 쾌락에 들떠있던 자신과 재원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이 떠오르자 당혹감과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얼른 눈을 뜨다가 자신을 온몸으로 감싸안고 있는, 아직도 열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뜨거운 재원의 몸에 움찔하며 그에게서 몸을 떼내려했지만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팔뚝의 힘은 풀릴 줄을 몰랐다. ".........우혁아....."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닿자 흠칫하며 몸을 경직시키다가 부드럽게 속삭이는 나즈막한 저음에 머뭇거리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격하게 불타올랐던 조금 전과는 상이하게 이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정이 베어있지 않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는 재원의 눈속에 간혹가다 스쳐지나가는 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熱氣)와 오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우혁이 입술을 짓깨물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했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하나 그보다 앞서 맨가슴을 두르고 있던 손이 올라와 턱을 움켜쥐는 바람에 돌리지도 못하고 다시 재원에게로 얼굴이 들려진 우혁은 한참동안 의미모를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꿰뚫을 듯이 보던 재원의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벌려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귓속으로 파고든 잔뜩 목이 쉰듯한 음성과 그 음성에 베어있는 뭔가를 희구(喜懼)하는 듯한 상반된 느낌에, 비좁은 탈의실 바닥에 몸을 겹치고 앉은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부풀어 올라 더욱 짙붉어진 입술을 미미하게 떨고 있는 우혁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재원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질 않고 있는 암청빛 눈망울에 서려있는, 술에 취해 있던 흐릿한 눈에서 보았던 그 눈빛을 또다시 발견한 순간, 자신의 눈이 먼게 아니라면 착각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그 눈빛을 확인한 순간, 완전히 잠겨든 목소리로 간신히 입 밖으로 소리내어 속삭였다. ".........같이 가자" -60- # # # 끊임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종말이 보이지 않는 愛와 憎의 갈림길에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치솟는 불같은 獨占慾에..... 미쳐버린 내 육신을 불태워 없애서라도..... 이것으로.....종지부(終止符)를 찍겠어.... 눈이 시릴정도로 희고 깨끗한 테이블보를 씌운 긴 직사각형 테이블 위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은제식기들과 층층히 쌓여있는 칵테일 글라스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사한 빛깔의 생화(生花)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잔디밭 한켠에 세워져 있던 야외용 무대에 T자형으로 길게 쭉 뻗은 무대를 붙여놔 장신의 늘씬한 여자들이 쌍쌍이 워킹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무대를 경계로 양 옆에는 원형 테이블들을 세팅하며 생화로 장식하는 사람들과 정원용 흰 메탈 체어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고 있는 사람들로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흰 석조로 만든, 개방된 반구형(半球形)의 무대 한쪽 구석에는 언제 끌어다놨는지 흰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바이올린, 첼로, 플롯 등의 관현악기를 손에 든 흰 연미복 차림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 옆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음율(音律)을 맞춰보며 연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요란한 음악을 즐기는 줄은 몰랐는데요?" 정오를 넘기고부터 저택 내 분위기가 갑자기 들뜨고 분주해지는 기색이더니 폭염(暴炎)에도 아랑곳않고 잔디밭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며 소리치는 유모의 모습을 테라스 난간에서 내려다보던 우혁은 갑자기 방안의 음악소리를 뚫고 들려온 축 처진 음성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 베란다 창문턱에 기대서 있는 진의 모습은, 언제나 말끔하던 얼굴이 한 사나흘은 못잔 사람마냥 꺼칠하고 헤쓱한데다 수염까지 거뭇거뭇한 상태로 전날 입고 있던, 잔뜩 구겨진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어 무척 피곤한데다 추레해보이기까지 했다. "왜 그가 도관에 있나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군요" 뜻밖의 모습에 움찔하며 놀라던 우혁은 그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검도 연습을 하러 간다던 재원이 도관에 가 있는게 왜 궁금한가 의아해했지만 워낙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여 가만히 입을 다문채 피곤한듯 눈가를 주무르는 진을 걱정스런 눈으로 계속 살펴보았다. "대체, 어제 어딜 갔었습니까. 그렇게 나가고 나서...... .......거의 동틀 무렵이 다 되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어제 그렇게 사라진 이후로 새벽녘에 돌아와 피곤한 나머지 오전 내내 재원과 함께 잠만 잤던 우혁은 오후가 다 되도록 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 추레한 모습에다 지친 음성까지 들으니 설마하면서도 정말 그런게 아닌가 싶어 그의 안색(顔色)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저희 찾으러 다니신거예요? .....연락 못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걱정하실거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잘못한건 하나도 없으면서 또다시 죄를 지은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혁의 붉은 입술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본 진은, 한순간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의 매가 두려워 움츠러드는 자그마한 강아지같아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여서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인했다. "잘못한거 아니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어쨌든 이렇게 돌아온걸 봤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정말 어쩔수 없는 고질적(痼疾的)인 성격이란 생각이 들어 대체 어떻게하면 자신감(自信感)을 키워주나하고 매번 볼때마다 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진은 우혁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계속해서 입가에 드리웠다. 하나 저렇게 약한 성격으론, 그 자신이 강한만큼 확실하고 강한걸 좋아하는 재원을 받쳐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언젠가는 마찰을 빚게 되는게 아닌가싶어 진은 내심 우려(憂慮)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우혁한테 그런 내색을 비출 수는 없는지라 웃음기어린 음성으로 화제(話題)를 돌렸다. "둘이 데이트라도 했나 보지요? 쿡쿡...쫓아갈까봐 그렇게 내달린거보면.." ".....아, .....그런거 아니예요....." 여리고 청순한 이미지에 가려진, 성숙지 못한 은은한 요염함에다 미소를 짓지 않아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으로 인해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으로 오해를 살 것같은 모습이, 입만 열었다 하면 이렇게 아기처럼 맑고 순수한데다 겁도 많고 부끄러움도 잘 타는 성격이란걸 단박에 눈치채게 되는지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피곤도 싹 가실 정도여서 진은 자신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시선을 피하는 우혁의 곁으로 다가가며 자연스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세상에. 아니 어쩌다가.... 날이 저물고도 한참 후에야 로비로 내려온, 옷만 새 옷을 걸쳤다뿐이지 격투라도 벌인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다들 경악의 기색을 띈 것과는 달리, 사실 일을 벌인 당사자나 다름없는 진은, 냉정을 잃고 있었던 재원의 모습과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표정하나 변하지도 않았었다. 하나 진을 보고서도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 없던 재원이 그대로 우혁을 바이크에 태워 급속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두사람의 신변(身邊)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진과 경호원들은 종적을 감춰버린 둘을 찾아헤메느라 한바탕 곤욕(困辱)을 치뤄야했다. -놈이 행동을 개시하면 그 표적이 누가 될건지는..... 특히 진은 혹시나 그 사이에 이회장과 자신이 우려했던 불상사(不祥事)라도 생기거나 이 사실이 이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될까봐 전전긍긍하며 더욱 노심초사(勞心焦思)해야했기에 남들보다 두 배로 속을 끓여 하룻밤 새 팍삭 늙어버린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이런 더위에 가든파티라니, 땀 좀 꽤나 흘리겠군"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팔을 걸치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혼잡한 잔디밭을 힐끔 내려다보던 진이 따가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약간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우혁은 그가 코치코치 캐묻는다해도 실상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는지라 그가 화제를 돌린 것에 내심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너만 데려오고 싶었거든..... 경호원들을 따돌린 재원과 우혁이 도심지를 벗어나 얼마안가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한 밤중이라 주변경관이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흐릿한 달빛에 비친 풍경은 절로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게다가 작긴하나 천연 폭포 옆에 지어져 있는 분명 진짜 통나무로 만든 듯한 집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적한 풍경과 너무나 환상적인 조화(調和)를 이뤄내고 있어서, 항상 콘크리트벽 안에서만 살아왔던 우혁으로서는 그곳을 처음 본 순간 넋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속세와는 동떨어진 듯한 환상적인 정경(靜境)은 밤이라 더욱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도 웬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우혁은 탈의실에서 일어난 일에다 바이크를 타고 오느라 재원의 등을 끌어안다시피한 일까지 더해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원 역시 별 말 없이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었기에 실상 둘 다 폭포수 쏟아져 내리는 소리만 듣다온 꼴이나 마찬가지라서 그가 데려간 곳이 어딘지, 그 통나무집에는 누가 사는건지 또 왜 갑자기 그곳에 자신을 데려간건지는 우혁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너만 좋다면............ 뭔가를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을 때 재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지난 표정은 달빛에 흐릿하긴 했으나 뭔가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듯한, 탈의실에서도 보았던 그 표정이 틀림없었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답지 않게 확실히 결정을 짓지 못하고 심하게 갈등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비록 둘다 말은 않했지만 재원과는 처음으로 뭐라고 표현못할 교감(交感)을 나눈듯한 기분이 들어 우혁은 웬지 그곳을 입에 담으면 않될 것 같은 기분에 혹시나 진이 또 물어볼까봐 얼른 그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렸다. "저 무대는 뭘 하려고 만든거죠? 여자들이 모델들 같은데...." "무슨, 아! ....디너파티겸 해서 자선패션쇼가 있습니다. 초대된 사람들도 많고, ....이런 저런 공연까지 있을 예정이니까 재밌을 거예요" 온통 녹색과 흰색의 조화를 이루는 잔디밭의 전경과 무대 위를 오가는 모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우혁은 갑자기 내내 들려오던 음악소리가 뚝 끊기자 뒤돌아보려다 느닷없이 허리에 팔을 둘러 가볍게 끌어당기는 몸짓에 그대로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미처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던 우혁은 코끝으로 밀려드는, 향수도 스킨도 아닌 은은한 비누향만이 맴도는 신선하고 시원한 체취와 얇은 옷감 밑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기가 무섭게 머리 윗부분에서 들려온, 나즈막한 저음(低音)에 이내 경직된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뭘 그렇게 보길래 가까이 다가와도 몰라?" 샤워를 한듯 축축히 젖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잔디밭에 시선을 주는, 웬지 평소보다 더 느긋하고 나른해 보이는 옆모습을 힐끔거리던 우혁은 허리를 감고 있는 팔과 옆에 맞닿아 있는 몸에 온 신경이 다 쏠려 있어, 옆에 서 있던 진이 미묘한 미소를 띄우며 침실을 빠져나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허울 좋은, 자선...패션쇼...." 그 자신의 개인 영역이나 다름없는 동쪽 별채에 딸린 도관에 가기 이전인, 대략 2시간 전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틀려진 잔디밭의 변화된 정경에 시선을 박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전신에 베어 있던 나른한 기색이 단번에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피부로 생생히 느끼고 있던 우혁은 더이상 그를 힐끔거리며 훔쳐보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어느결에 시선을 그대로 그에게 고정시켜버렸다. '.....재원이는.....대나무같아......' 싸늘한 눈빛과는 달리 여전히 변함없는 나즉한 저음의 여운이 머물러 있던, 그에게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곳이 아닐까 싶은 입술의 단아한 선이 이지러지며 단정한 입매를 흐트러뜨리더니 약간 굳어지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암청빛 눈망울은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아 약간 멍하니 흐릿해져 있어, 흡사 꿈을 꾸는듯 몽롱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대나무 속처럼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어느 누구보다 성품이 곧고 허식이 없는......옳바른 정신의 소유자라는걸.... ....정말 대쪽같은......강인한 성격을 가졌다는걸.....알 수 있어.....' 햇빛에 반사되어 푸른기가 맴돌정도로 짙검은 머리칼이 빗질도 않하고 그냥 손으로만 빗어 넘겼는지 되는대로 헝클어져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었고, 완전히 마르지 않아 깃에 닿은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폴로 셔츠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께 그렇게 반항하고......스스로를 망쳤던 거지...? 지금도 사이가 않좋다고 하던데.... 어째서, 하나뿐인 아버지잖아.... .....널 이 세상에 낳아주신 분이잖아.....' 하나 테라스 난간에 올려져 있다가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느라 위로 들어올려지는, 폴로셔츠의 반팔소매를 걷어올려 어깨와 연결된 부분까지 훤히 드러난 팔뚝의 움직임에 시선이 멎는 순간, 우혁은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햇빛에 타지 않는 창백한 피부에다 울퉁불퉁한 근육도 아니어서 겉보기에는 약할 것 같지만 실상 실제로 닿아보면 단단하고 탄력적인 감촉에다 조금이라도 강하게 옥죄이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여서, 아무리 힘을 주며 몸부림을 쳐도 한번 결박되면 놔주지 않는한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승호형하고도 같은 침실을 쓰지 않았었는데....' 잠을 잘때도 항상 자신을 그대로 으스러뜨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짝 끌어 안고 자는데다 팔베개까지 해줘서, 승호와 연인이었으면서도 당연한 듯 따로 침실을 썼던 우혁은 남이 끌어안고 자는 것에 익숙지가 않았는데다 둘다 알몸으로 자야했기에 불편한데다 숨쉬는 것까지 괴로워 실상 처음에는 재원의 행동을 별로 달갑지 않아 하기도 했었다. 하나 어느새 그 불편함과 괴로움은 단단한 팔뚝이 몸을 강하게 압박하며 죄어들때마다 야릇하면서도 감미로운 압박감으로 뒤바껴, 재원의 품에 안겨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자지않으면, 그의 맨가슴에 귀를 대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 자지않으면, 세게 끌어안고 있는 그 단단한 팔 안에 갇혀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지않으면 숙면(熟眠)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을, 침실을 따로 쓸 때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던 우혁은 실상 그때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었다.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잠을 푹 잘 수 있다는건 새로 알게 됐지만......' 실상 재원과의 냉전상태가 얼떨결에 흐지부지되어 침실을 같이 쓰긴 했어도 여전히 둘다 서로를 대하는게 조심스럽고 미묘한 심정에 이전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었던데다 워낙 침대가 대형사이즈였기 때문에 타인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숨소리만 듣다가 어느결에 잠이 들기 마련이었다. 간혹가다 재원이 의미모를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끼긴 했었지만 실상 둘다 제대로 말도 않하고 그냥 침실만 같이 쓰는, 냉전 아닌 냉전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어제 일어난 일 때문에 모든게 다 급전환(急轉換)되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이렇게 되버린거지...?' 3층까지 올라오는 외부의 소음도 점점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자만의 상념(想念)에 깊이 빠져 있던 우혁은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뚝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 그런 눈으로....계속 보면 곤란해" 갑자기 귓속으로 허스키하면서도 조소어린 저음이 뚜렷하게 파고들자 흠칫하며 여러번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던 우혁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어느결에 다시 나른해진 검은 눈동자와 묘하게 비틀린 입매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자신이 생각뿐만 아니라 실제로 넋을 놓고 그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는 당혹감(當惑感)에 어쩔줄 몰라하다 얼굴을 붉히며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내가....무슨 눈으로....언제 계속 봤다고 그래...." 보지 않아도 재원이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우혁은 자신의 어이없는 실책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하나 그냥 있으면 재원이 놀릴게 뻔한지라 반박하듯 웅얼거리다가 자신이 완전히 진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움찔하며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언제.... 나가신거지...?!!" 어느결에 텅 비어있는 옆자리와 진의 부재(不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우혁은 허리를 두르고 있던 팔뚝이 갑자기 느슨하게 풀리는가 싶더니 반바지를 입고 있어 훤히 드러난 허벅지로 차가운 손가락이 와닿자마자 애무하듯 쭉 미끄러뜨리는 바람에 흠칫하며 고개를 다시 재원 쪽으로 돌리려 했다. 하나 채 돌리기도 전에 귓속으로 밀려드는 뜨거운 숨결에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던 우혁은 귓볼을 깨물며 나즉하게 속삭이는, 짖궂은 티가 역력한 허스키한 저음(低音)에 순간 그대로 전신이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도발적인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면..... ....침대로 데려가 주길 바라는거 같잖아? 뭐,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원한다면....." 그 말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무릎 뒤로 팔을 밀어넣어 너무나 가뿐하게 자신을 팔 위로 들어올리는 재원의 행동에도 완전히 사고가 마비되어 저항조차 않고 있던 우혁은 그가 장난으로 그러는게 아니라 정말 그말을 실천하려는듯이 발길이 침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다급히 발버둥치며 그의 팔에서 내려오려했다. "뭐, ...뭐야!!! 이거 내려놔!!!!!" "......이제 완전히 살아났군. 그래야 장우혁답지...." 더이상 발걸음을 떼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놔주지도 않고 여전히 팔에 안은채로 당혹감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던 재원이 발끈하는 우혁의 모습을 즐기는듯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중얼거리다 고개를 숙여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대려할때, 순간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얼음짱처럼 차가운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계집애야?!!! 도발이라니!!! 여자취급하지 마!!!!!" 노기(怒氣)로 턱을 파르르 떨며 어느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원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암청빛 눈동자는, 나른함은 씻은듯이 사라져버린 검은 눈동자가 웬만한 사람은 도저히 그 시선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칼날처럼 베일듯이 날카로워진채 자신을 꿰뚫을듯이 직시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은채 굽히지 않고 맞서서 쏘아보았다. 테라스 밖의 시끄러운 소음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침실의 적막을 한참만에야 깨뜨리며 흘러나온 것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정도로 속삭이는 수준의, 잔뜩 쉬어버린 음성이었다. "..........좋은 눈빛이다..." 재원의 팔에 여전히 들어올려져 안긴 상태로 저항도 멈춘채 그를 노려보고만 있던 우혁은 전혀 예상밖의 말에 흠칫하다가 자신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던 매서울정도로 날카롭던 검은 눈동자가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눈빛 속에 깃들어져 있는 것은 평소 우혁이 보아왔던 무심함도, 나른함도, 조소어린 짖궂음도 아닌, 훈훈할 정도로 따뜻한, 경탄(敬歎)에 가까운 찬사(讚辭)의 빛이었다. ".........아름다워. ......그 눈빛......잃지마"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말에 충격으로 멍하니 벌려져 있는 붉은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짓누르며 얼어붙어버린 혀를 휘감고 조심스럽게 빨아들이면서도 암청빛 눈망울 에서 시선을 떼질 않는 재원뿐만 아니라 우혁 역시 검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질 않고 있다가 자연스레 팔을 들어올려 재원의 목덜미에 감아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숨을 쉬느라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다시 서로의 입술을 찾으며 그렇게 한참을 전혀 격하지 않은, 잔잔하고 부드러운 키스를 교환하며 서로를 야릇하고 감각적인 쾌감에 젖어들게 했다. "....하아.....아...." 한참동안 부드럽게 입술과 혀를 놀리며 끝없이 달콤함을 맛보고 싶었지만 가만히 입술을 떼어내며 고개를 든 재원이 다소 가쁜 숨을 토해내는 촉촉히 젖은 붉은 입술과 어느 결에 다시금 발갛게 달아올라버린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흐릿해졌던 초점이 조금씩 맞춰지며 완연히 빛을 되찾고 있는 암청빛 홍채에서 시선을 떼질 않은채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으려던 재원은 이때껏 느끼지 못하고 있던 인기척에 그대로 시선만 돌렸다. "......뭐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건지 열린 문가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진을 발견하자 삽시간에 눈썹을 치켜뜬 재원이 막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던 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뭔가를 말하기 주저하는 듯한 음성을 듣는 순간, 전신을 휘맴도는 기분좋은 나른함이 급속도로 밀려드는 불길함에 이내 불쾌감(不快感)으로 뒤바껴 버리고 말았다. "저, 오늘 파티 손님 중에......" 다음 순간, 처음 진의 음성을 듣고서도 키스의 여운때문인지 나른하게 풀린채로 팔에 안겨 있던 가느다란 몸과, 목덜미에 감겨있던 가냘픈 팔이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경직되는 것을 생생히 느낀 재원의 표정이 그에 못지 않게 석고처럼 확 굳어버리고 말았다. "초대명단에......안승호가 올라 있습니다" 팔뚝에 느껴지는 경직된 피부가 얼음짱처럼 싸늘해지더니 이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재원이 이를 악물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시선을 내린 순간, 진의 말이 우혁에게 끼친 영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자 그대로 심장이 얼어붙으며 전신이 빙굴(氷屈)에 굴러떨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61- # # # 삭막한 대지 위의 하얀 석조 건축물..... 흐릿한 담배 향과 흔들리는 진홍빛 액체.... 폐부를 찌를듯이 차디찼던 암갈색 눈동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몽(惡夢)의 주체(主體)는..... 내 운명을 바꿔놓은 그날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악몽의 한 영역에서 위안을 받았던...... 생기를 잃어버린 청안(靑眼)의 금발 소년..... "에이 띠벌! 어떻게된게 집 한채도 없어? 여기 주거지역 아닌가? 설마, 이게 다 사유지(私有地)인건 아니겠지. 아니지, 설마가 사람 잡을 수도 있지" 건물의 형체따윈 찾아볼수 없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왼편을 끼고, 표지판삼아 쭉 따라 달리고 있는 오른편의 희끗희끗한 담장벽이 대체 그 끝이 어딘가 한번 두고보자고 괜시리 혼자 열받아 별렀던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이 씹탱이가.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줄 것이지..." 퇴근 차량으로 정체될 도로에서 죽치고 있지 않으려고 외딴 지름길을 알아낸게 오히려 더 시간을 허비하는거 같자 화나면 입이 걸어지는 버릇이 또 발동해버린 지원은 계속 욕설을 주절거렸다. 하나 완만한 커브길을 돌자마자 나타난 직선 도로의 몇백미터 떨어진 전방에서 보이는 빛의 행렬이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임을 알아챈 지원은 방향을 잘못 들어선게 아닌가하고 슬며시 고개를 들던 걱정을 싸그리 없앨수 있게 되었다. "우리만 늦은줄 알았더니 지금 도착하는 사람도 많잖아? 하여간에 이놈의 교통지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반사적으로 계기판의 시계를 확인한 지원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자 신경성 편두통이 금새 사그라드는 듯한 기분까지 들정도로 안도하며 속력을 서서히 줄여 행렬의 끄트머리로 핸들을 돌리면서 줄지어 멈춰 서있는 고급 세단들을 흘끔거렸다. "초대장이 어딨더라..." 양쪽으로 활짝 펼쳐진 철문 안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휘황한 빛 세례로 인해 대낮처럼 훤한 정문 앞에는 수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가로막고 서서 차들을 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꽤 지체되고 있었지만 초대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통과시키는 그들의 모습에 지원이 옆좌석에 놓아둔 가방을 열어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오는 내내 지원이 혼잣말을 하건 말을 붙이건 귀머거리인양 들은 척도 않고 대꾸 한번 없이 숨소리도 않들릴 정도로 쥐죽은듯 조용히 있다가 훤해진 주변으로 인해 외양이 선명해진 뒷좌석의 소년이 목을 쭉 빼고 앞 차량들 너머를 건너다보았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이래서 이런덴 짱난다니까" 죄수를 통솔하는 간수라도 된것처럼 정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고압적인 경호원들의 처사(處事)와 그 거만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않들었는지, 않그래도 비비꼬여 있던 심사가 더욱 뒤틀려버린 그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얼마나 잘났길래 이렇게 꼴값을 떨어?" "에? 뭐라고?" 한 대씩 들어갈때마다 천천히 차를 앞으로 굴리면서 쥐고 있던 초대장으로 운전대 모서리를 툭툭 치며 앞만 주시하고 있던 지원이 거의 2시간만에 처음으로 말문을 튼 약간 톤이 올라간 음성에 반사적으로 빽미러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다가 주변 차량들의 불빛이 차안으로 밀려들어 앞머리칼에 가려져 한쪽 밖에 드러나 있지않은 커다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지원의 입술 끝자락에 슬며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뭐가 맘에 않들어서 그러실까, 우리 희준이가?" "애다루듯 하지 말라고 했지? 자꾸 건드릴래?" 가죽시트에 몸을 묻고 팔짱을 낀채 잔뜩 심통난 어린애처럼 입술을 툭 내밀고 있는 모습에 이제 자신에 대한 화는 조금 누그러졌나 싶어 계속해서 피시식 웃던 지원이 화난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는, 금빛 머리칼로 얼굴의 반을 가려버린 희준이란 이름의 소년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짜식이, 성깔하고는. 또 뭣 때문에 성질부리는거야?" 아무 말 없이 뭔가를 향해 턱끝만 치켜 올리자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따라간 지원은 손님들에게 무례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듯 정중하게 목례를 하며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그 대상임을 알고는 잠시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어이없어해야 했다. "야- 저 치들도 위에서 시키니까 별 수 없잖아? 않그러면...." 세운 손날을 목 부근에 갖다대고 목을 자르는 듯한 동작을 취해 보이는 지원의 행동에도 희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퉁명스럽게 틱틱거렸다. "그러니까 이딴데 싫다고 했잖아. 초판부터 재수없게 저딴 꼴이나 보다니. 얼마나 대단한 위세길래 이렇게 길바닥에 세워놔?" "트집 잡을걸 트집 잡아라. 이곳만 이런 것도 아니잖아. 촌스럽게 파티 처음 와본 애처럼 왜그래?" "야쿠자 소굴도 아닌데 뭔 놈의 경호원들이 저렇게 많냐고 내말은!" 아직도 남아 있는 자신에 대한 화의 잔해(殘害)로 인해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튄다고 여긴 지원이 대꾸를 하지 않고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희준은 그에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덧붙었다. "지은 죄가 많아서 도둑이 제 발저리는 건지도 모르지" 오랜 시간 차를 몰아 결리는 어깨를 주무르다가 기지개를 켜듯 팔을 번갈아가며 허공으로 쫙 내뻗쳐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경직된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동작을 계속 반복하던 지원이 대충하고 끝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해라.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리고......사실 가진게 죄는 아니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스듬히 뒷좌석에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기대 앉아 있던 희준이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켜 허리를 똑바로 세워 앉는 모습이 빽미러로 보이자 뭔가 실수했다는 불길한 느낌에 지원은 들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죄가 아니라고?! 돈다발을 싸재놓고 사는 놈들이 정상적으로 그 돈을 벌었을거 같아?!" 운전석의 한켠을 잘 손질된 긴 손톱이 부러져라 그대로 가죽시트를 잡아 뜯을듯이 거세게 움켜쥐며 지금까지의 퉁명스런 어투(語套)가 아닌, 핏대를 곤두세우며 희준이 무섭게 쏘아붙이자 지원은 당황하고 말았다. "야, ....희준아...." 왜 그렇게 갑작스레 과민반응을 보이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 지원은 한순간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머리가 지잉하고 울리는듯한 느낌과 함께 아차하며 손을 올려놓고 있던 운전대를 탁 쳤다. '이런 젠장, 그 일때문이었구나. 어쩐지..... 처음부터 유난히 별스럽게 군다 했더니. 어쩌면 그자도 이곳에 올지 모르겠군' 소속사 사장의 일방적인 통고(通告)로 공연장도 아닌 개인의 사유지에서, 그것도 중후한 파티 손님들 앞에서 자선패션쇼와 접목시킨 공연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지원은 단지 사교적인 일의 연장일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도 훨씬 넘었구나. 휴, ...잊지는 못하겠지. 두사람은 부자간이라기보다는 정말 친구같았으니까...' 진작부터 연일 계속되는 무리한 스케쥴에 차츰 불만을 터뜨리던 희준이 노골적으로 화를 낼때만 해도 별다르게 생각지 않고 그냥 누적된 피곤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러는 것으로만 단순하게 여겼던게 자신의 오판이었음을 깨달은 지원은 또다시 기분이 침잠되 버리자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재석 회장이 주최하는 파티라면 특히 기업인들이 많이 올테지....... 그도 유명한 사업가인데다..... 또 이회장과도 친분이 있으니까...... 정말 가능성이 아주 농후한데 이거...' 과연 이 자리를 별탈없이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근심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미지근한 둔통(鈍痛)이 재발하자 지원은 습관처럼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갖다대어 꽉 눌렀다. 희준이 학업을 때려치고 돈을 벌어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원흉이자, 그 자신은 모를테지만 문희준이라는 인기 최고의 신인 가수를 탄생시키는데 역설적으로, 아주 지대한 공헌을 한 그 남자를 지원이 이제껏 실물로 봤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사진이 찍히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 경제잡지나 가끔가다 여성잡지에 심심찮게 오르는 사진이래봤자 멀리서 찍었는지 분간해낼 수도 없을만큼 작은 모습이거나 뒷모습이 거의 전부여서 최근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본적이 없었다. 하나 그에 대한 기사라면 단 한줄이라도 해도 모두 스크랩해 놓는 희준의 열성아닌 열성에,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경제나 사업같은 골치 아픈 일엔 그다지 관심없는 지원도 꽤나 많이 알고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진 운이 좋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고유영역이 달라서 그런건지 마주쳤던 적은 없었는데...... 잘못하면 오늘 일 나겠군' 그 남자에 대한 일이라면 희준이 얼마나 치를 떠는지, 입만 열었다 하면 욕설과 험담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그대로 가만 놔두면 하루종일 귀따갑게 떠들다가 스스로 치받치는 울분을 삭히지 못해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던 것도 한두번이 아니란 것을 옆에서 내내 봐야했던 지원은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 소문으로 듣거나 일부러 캐내어 귀동냥해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봐도 희준의 말이 개인감정때문에 과장된 비난이 아니란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여기 않왔기만을 바래야겠군. 아니면 운좋게 서로 못본다던지...' 하나 비열하고 양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냉혈한이든, 냉기(冷氣)를 풀풀 풍기는 고드름이든지간에, 한사람에 대한 관점이 그렇게 상반될 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극에서 극을 치달리는 평가를 받는 그 남자에 대해 지원은 희준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관심이 아주 많은 편이었다. 남들은 겨우 대학복학생이라든지, 기대와 두려운 가슴을 부여잡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을 그 나이에 이미 노련하고 쟁쟁한 사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막대한 부와 사회적 명성을 한 손아귀에 거머쥔 남자에 대해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에 대해 한가지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면 알수록 지원이 가지게된 감정은 애초에 희준에게 동조했던 경멸과 분노가 아니었다. '저자식이 알면 나랑 안면 몰수하겠지...' 저도 모르게 같은 연배의 남자로서 약간의 질투심과 함께 외경(畏敬)에 가까운 존경심을 갖게 되버린 지원은 실제로 그를 보게되면 친근감까지 들지 않을까 하는 심경까지 들 정도였다. "어쨌든 오늘 일은 정말 내키지 않아"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있던 지원은 다소 지친듯한 음성에 시선을 들었다가 우려와는 달리 불같은 성정(性情)에 꽤 오래갈 것 같았는데 애써 분을 삭히고는 어느결에 차분해진 희준의 모습을 보자 다소 안도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차피 연예인이라면 천박한 인간 아니면........ 데리고 놀 장난감이나 화려한 악세사리 취급하는 부류들일테니..." 남들 눈엔 화려하게만 보일테지만 시기와 질투, 더러운 베겟머리 송사로 얼룩진 연예계에 대해 벌써부터 환멸을 가진채로 모진 풍파(風波) 속을 헤쳐나가고 있는 사촌동생에 대한 연민에 지원의 표정이 흐려졌지만 내색치 않고 경각시키듯이 따끔하게 주의를 줬다. "사장님이 지시한 일이니 싫다고 해도 할수 없어. 그러니까 애처럼 분별력없이 굴지말라고" "분별력없게 굴었다고? 내가?" "자선패션쇼 1부 끝나고 바로 공연이니까 시간이 빠듯해" "자선패션쇼? 자선 좋아하네. 그저 어떻게하면 돈과시하나, 어떻게하면 남들보다 잘나 보일까. 다 속들여다보이는 짓거리들이야" 한껏 화를 돋구는 빈정대는 말투로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희준은 원치않은 스케쥴 하나 막지도 못한, 그의 말마따나 무능력한 매니저이자 이종사촌형인 그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지만 이미 그런 것엔 만성이 되버린 지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야 임마, 너한테는 이런게 다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비치겠지만 말야..." "당연하지. 그럼 이게 효율적인 일이란 말야?" "너도 이젠 알만한건 다 알잖아. 강력한 배후가 있지 않고서는 살아 남기 힘들다는거. 일부러 딴 애들 제쳐놓고 사장님이 널 선택한 것도 다..." "하, 그래서 어쩌란 말야? 나도 오늘 여기서 눈삔 놈 하나 골라 잡을까? 요즘 한창 TV에서 때려대데? 연예인 매춘, 해가지고 말야" "비약 좀 하지마, 어떻게 얘기가 또 그런 쪽으로 가냐? 어휴, 너랑 얘기하다 보면 내 혈압만 올라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다가 뒤로 약간 젖히며 뒷목을 주무르던 지원이 계속 꿍시렁거리며 투덜거리는 말소리를 한 귀로 요령껏 흘려들으면서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어디보자, ......그래, 지금쯤 거의 끝날 시간이군" "쳇! 권위적이고 음흉한 속물들이나 득시글거릴게 뻔해. 느글느글한 시선들....소름끼쳐, 끔찍하다구" "그렇게 생각하니깐 더 그래 보이는거야" "직접 보고서도 그딴 소리야? 그 변태새끼 손모가지를 분질러 놓으려다 관둔것만 해도 열받아 죽겠는데...." 여가수들 사이에서도 손버릇 나쁘기로 유명한 모 음악프로의 PD가 녹화 때문에 노래를 부르고 무대 계단을 내려오던 희준에게 다가가 쓸데없는 말을 시키며 어깨를 노골적으로 애무하다시피 한 일 때문에 거의 발작하려던 그를 간신히 제지시켰던 오전의 일을 떠올린 지원은 빽미러로 희준을 흘끔 쳐다보다가 절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식아. 거울을 보고나서 그딴 소리를 해라. 젠장할. 어째 갈수록 색기를 뿌려대냐 그래...' 입이 댓말로 튀어나온 희준은 지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여전히 이 상황이 못마땅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몸을 들썩거리면서 은근히 속살이 보일락 말락한 여러겹의 검은 망사로 만든 무대의상을 다 구겨놓았다. 까마득히 치솟은 아치형의 정문을 통과하기 직전 차를 멈춰세운 지원이 차창을 내린 순간, 숨통이 턱 막힐 정도로 후덥근한 공기가 얼굴에 확 끼쳐들며 괜시리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자 손부채로 바람을 일으켰다. "밤인데도 이렇게 덥다니. 어휴, 푹푹 찌는구나" "끝나면 바로 갈테니까 나한테 허튼 짓시킬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마. 사장한테도 똑똑히 말하라고" 정문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철문 양 옆벽에 부착되있는 감시 카메라들을 뒤늦게 발견한 희준이 립그로스를 발라 윤기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않그래도 큰 눈에 검은 아이라인을 그려 더욱 커 보이는 눈을 잔뜩 부릅뜬 희준이 차내부를 내내 촬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감시카메라들 중 가까이 있는 렌즈를 통해 컴퓨터 화면으로 이쪽 현황을 보고 있을 어느 누군가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마주 노려보았다. "역시, 재수없어. 대체 이놈의 집구석은...." 지원이 차창을 도로 올리고 차를 출발시키는 기색에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린 희준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약간 경사진 언덕길인 진입로를 올라간 순간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그만 아연실색(啞然失色)해버리고 말았다. "방에 있나? 젠장, 전화라도 하고 오는건데"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다른 테이블들을 살펴봐도 재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혼잣말로 투덜거리던 민우는 옆 사람들과 낮은 음성으로 주식얘기를 하느라 정신없는 아버지를 흘끔 쳐다보았다. "개새끼, 지 아쉬울때만 나 찾지? 뭐하길래 코빼기도 않보여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웬일인지 도로 본가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재원이 오랫동안 얼굴 상판대기도 보여주지 않고 있어서 파티라면 민우 역시 질색이었지만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나 예상대로 재원은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헤에~알만한 얼굴도 꽤 많잖아?" 패션쇼가 펼쳐지는 무대에 시선을 주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파티손님들 중에 브라운 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꽤나 낯익은 얼굴들도 여럿 보이자 연예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건 처음인지라 신기하단 투로 중얼거리던 민우가 테이블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쌔끼들....속이 바짝바짝 타겠지. 저새끼 침 삼키는거 봐. 쯧쯧' 일부러 그렇게 골랐는지 다들 풍만한 굴곡선을 그리는 모델들이 비키니나 속이 비치는 비치웨어를 선보이는 패션쇼라 그런지 거의 대부분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태우거나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며 잔너머로 슬며시 건너다보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던 민우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의자 뒤로 한쪽 팔을 턱 걸쳐놓았다. '날도 더운데 이래저래 이열치열인가? 젠장' 더운 날씨라 격식을 따지지 않아서 남자들은 턱시도나 딱딱한 정장이 아닌, 반팔 셔츠와 캐쥬얼한 정장 바지같은 간편한 평상복 차림들로 파티라기 보다는 단체로 야유회에 놀러 나온듯한 인상들이었다. 하나 그들과 동행해 옆에 앉아 작은 부채를 부치거나 웨이터들이 서빙하는 샴페인을 마시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파트너들은 속이 비칠정도로 하늘거리는 얇은 시폰드레스나 살갗의 대부분을 노출시키는 끈달린 화려한 의상들을 걸치고 있어, 남자들과는 극도로 대비된 차림새를 보여줘 상류층 파티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추잡한 속물 덩어리들......" 치렁치렁 몸에 무겁게 매달은 값비싼 보석들로 누가 더 우월한가 은근히 서로의 부를 과시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며 민우가 경멸기 가득한 음성으로 머릿 속의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리내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는 못한듯 했다. '에잇 씨펄!! 타이밍이 않좋잖아?!! 바로 공연이라니' 이제나 저제나 몸을 일으킬때만을 기다리며 샴페인을 들이키던 민우는 비치 웨어를 선보이던 패션쇼 1부가 드디어 끝나고 사회자의 호명(呼名)에 의해 무대 위로 누군가 나오며 즉시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문희준이잖아? 이런데도 불려다니나?" 속살이 은근히 비치는 검은 망사 티와 각선미를 드러내놓는 검은 스판바지 위에 수십개의 큐빅이 박힌 치렁치렁한 레이스망사로 하의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여기저기서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문희준이네?" "누구....?" "가수 몰라? 영혼 부르는 애" "글쎄... 그런데 남자야 여자야? 얼핏 봐서 잘 모르겠는데..." 조명에 반사된 큐빅이 영롱하게 반짝거렸고 바닥까지 늘어진 수십겹의 레이스자락들이 허공에 나풀거리며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모습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체구로 무대 위를 휩쓸고 다니는 인영에게 다들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구죠, 저 아이는? 남자....아닌가요?" "글쎄요, 요즘 애들은 하도 분간이 않가서..." 사자갈기같은 금발머리를 머리 위에 하나로 묶어 고정시킨채 앞머리를 길게 내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난 커다란 눈과 조명으로 더 하얘 보이는 피부, 노래를 부르며 크게 벌려지는 선홍빛 입술과 팔과 다리의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움직임은 남자들로 하여금 묘한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도발적이기 그지없었다. "저거 정말 좇단 새끼 맞어? 심심한데 한번 족쳐볼까?" 아들뻘 밖에 되지 않는 희준의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란 인간을 포함한 여타 체통높은 양반들의 모습을 경멸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비웃던 민우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波紋)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갑자기 분위기가 술렁거리자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 사람들은.....?' 아직 무대 위의 공연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리를 뜨려는건지 의자를 밀치며 하나 둘 몸을 일으키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인상을 약간 찌푸리던 민우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훤칠한 키의 사내에게 저절로 눈이 먼저 갔다. 옅은 베이지톤의 면바지와 흰 폴로셔츠를 입은, 방금전 골프라도 치고 온듯한 차림의 그 중년사내는 만면에 미소를 매달고 있어 무척이나 느긋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범처럼 우아하고 느릿하게 걸음을 떼놓는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던 민우는 그런 나른할 정도의 여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신에 자연스레 베어 있는, 지배자 특유의 압도적인 위압감(危壓感)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는 오싹한 전율을 느끼다가 한가지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본 인상인데.....누구길래 이렇게 낯이 익은 거지?'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어보이는 훤칠한 몸과 주름한점 없는 매끈한 피부, 단정한 검은 머리를 보며 그와 비슷한 누군가가 연상될듯 말듯하던 민우는 자신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시선을 돌린 파티 손님들이 모두다 그를 집중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의아함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한테이블 한테이블 지나칠때마다 실례한다는 양해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모습을, 입술꼬리가 약간 치켜올라가며 웃는듯 마는듯한 묘한 웃음을 본 민우는 곧 왜 그가 그렇게 낯이 익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런 똘빡! 이제야 알아보다니. TV에서 본 것보다 더 젊어 보이잖아? 기껏해야 30대 후반? 40대 초반?' 반사적으로 옆에 앉아 자신처럼 그를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흘끗 쳐다본 민우는 모든 면에서 극도로 명확하게 대비되는 모습에 갑자기 쓴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입안이 써짐을 느끼며 마른 침을 여러번 삼키다가 이내 씁쓸한 고소(苦笑)를 지어야 했다. '자식 새끼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젠 아버지까지..... 젠장할....' 파트너들과 함께 저택 방향으로 이회장을 뒤로한채 먼저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분명 그에게 선택받았음에 틀림없는 특출난 서너 명의 남자들을 이회장을 쳐다볼 때와는 다른 무감동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민우는 그들 중 옅은 바닷빛 셔츠에 검청색 바지를 걸친, 고작해야 20대 중반밖에 않되보이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씹쌔끼. 저거 완전 얼음 아냐? 저렇게 굉장한 미녀가 봐달라고 보채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다니.....아깝다 아까워' 관능적인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놓는 슬립형 검은 이브닝 드레스를 걸친,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빌로드처럼 윤기흐르는 긴 흑발의 미녀가 팔에 매달린채 계속 흘끔거리며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단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걷기만 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민우가 속으로 욕설을 퍼붓다가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문에 잠시간의 부재를 양해해달라며 그동안 공연을 계속 즐기라는 말을 하고 있는 이회장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아직 눈치 채질 못하고 있었으나 민우는 립씽크하는 것도 잊어버린 듯 입을 멍하니 벌린채로 굳어있는 희준의 얼굴이 무대 밑의 손님들이 아니라 저택 방향 쪽으로 향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뭐야, 저새끼......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네?' 희준을 쳐다봤다가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대충 가늠해서 쫓아가본 민우는 시선의 끝자락에 걸리는 모습이 바로 자신이 배알이 꼴릴 정도로 부러워하며 쳐다봤던 그 젊은 남자란 것을 알아채고는 의아함에 계속 그를 주시했다. '아는 사인가, 저 남자하고? 꼭... 무슨 저승사자 본 것 마냥 왜 저래?' 어느새 노래가 끝나버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금새 확 붉어지며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인사도 제대로 않하고 허둥지둥 무대 뒤로 뛰쳐들어가 버렸지만 민우를 제외하곤 아무도 그 1분도 않되는 극히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돌발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의 도발적이고 묘하게 색기가 어려있던 표정이 아이처럼 당황해 어쩔줄 몰라하며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희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던 민우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저거 보기보단 꽤 귀엽잖아?' 계속 큭큭대며 웃다가 창문마다 불이 훤히 밝혀져 그 위용(偉容)을 과시하며 당당히 잔디밭의 끝부분에 세워져 있는 저택의 어느 한 지점을 잠시 바라보던 민우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방에 있나보군. 그 새끼한테나 가봐야겠다' 뒤에서 자신의 부재를 눈치챈 아버지가 뒷목을 낚아채기라도 할까봐 저택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빠른 속도로 잔디밭을 가로지르던 민우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시선이 닿자 대낮처럼 환한 파티장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이게 웬 전력낭비야? 서울시내 전기는 여기서 다 소모되는거 같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길거리에서 볼수 있는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정원수들의 불빛들과 패션쇼가 벌어지고 있는 잔디밭 한가운데의 무대 주변으로 휘황찬란하게 조명을 밝혀놓는 바람에 경계선인 정문 하나의 차이로 완전히 낮과 밤으로 이분되버린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환했다. 끝갈데없이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 위에는 청동 조각상들과 석상들이 조경수와 어우러져 잘 배치되어 있었고, 수 대의 대리석 분수대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일제히 뿜어져 수십미터까지 솟구쳐 올라간 물기둥은 더위까지 식혀줄만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기 그지없는 장관을 이뤄내고 있었다. 또한 수십 갈래로 세분된 물줄기로 나눠져 수직강하하며 이뤄내는 하얀 포말과 물줄기에 섞여 같이 뿜어져 나오는 오색찬연한 광채는 파티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킬 정도로 환상적인 정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새끼가 아예 나가사는 이유를 알만하군" 중학 시절에 술에 취한데다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잠에 곯아떨어진 재원을 데려다주기 위해 한차례 방문했을때는 한밤중인데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이는게 없었는데 같은 밤시간대라도 천지차이로 뒤바뀐 풍경에 민우가 혀를 내두르며 시선을 돌리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헉, 이게 웬 파라다이스야....." 전형적인 직사각형도 원형 풀도 아닌 기형학적인 모양으로 휘어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무대 오른쪽 편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야외 수영장 옆을 천천히 지나치던 민우의 입꼬리가 조금씩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패션쇼에 온 모델들인가 보지?" 새파란 타일을 깔아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넓찍한 풀장에는 수영을 하려는 목적보다는 몸매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더 큰 듯한, 비키니 차림의 늘씬하게 뻗은 미녀들이 한가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모델처럼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미녀들이 수영장 계단에 걸터앉거나 검은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얘기하다가 소리높여 웃어대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거나, 준비 운동하듯이 몸을 비틀다가 밑으로 상체를 숙이는 등 아슬아슬한 장면들을 연출해 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민우는 즉시 재원을 떠올렸다. "저렇게 건드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올라가서 끌고 내려와야겠다. 오랜만에 같이 즐겨...." 이런 재벌가의 파티에 들어온 이상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건지 노골적으로 부유한 남자들을 유혹하는 여자들의 관능적이고 섹시한 모습을 보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중얼대던 민우는 불현듯 뭔가 전신을 강타해버리는 불유쾌한 기분에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아니지... 그새끼 이제는........에?" 분명 머릿속은 알고 있으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일을, 그동안 뭔가 잊고 있었던 일을 기억해낸듯한 기분이 들자 민우는 한순간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했다. "잠......잠깐만........에게게? 진짜 심각하잖아 이거?!!" 한번 마음 먹으면 끝장을 보고마는 그 성격때문에, 거의 매일 여자와 술, 폭력을 끼고 살던 퇴폐적인 삶을 청산한 이상 재원이 근 2~3년간 여자와는 일절 담을 쌓고 살아왔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자각한 민우는 새삼 그 기간이 오래된 것에 흠칫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새끼..... 욕구불만이 틀림없어. 한두달도 아니고 거의 3년 다되가니까 어, 어휴.....징하다. 독한 새끼. 녹슬지 않았나 몰라?" 요 몇달간 계속 그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 한번씩 볼때마다 일절 끊었던 술에다 담배 피는 횟수도 급속도로 늘어난데다 말투까지 거칠어지는 듯 하던 이유가 분명 그것임에 틀림없다고 자신의 추측을 거의 확신한 민우는 그 앞에선 감히 내뱉지도 못할 음담패설 수준의 말들을 지껄이며 혼자서 괜시리 킬킬댔다. "기다리라고, 누님들. 끝내주는 녀석 하나 델구 올테니까 잘 꼬셔봐. 하긴 뭐, 누구란 것만 알면 아예 벌거벗고 덤벼들테지만. 완전히 의도적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끌며 눈요기를 시켜주는 모습을 보고는 거의 걸음을 멈춘 민우가 음흉하게 휘파람을 휘익 불며 넉살좋게 중얼댔다. "그 새끼가 넘어가나 않넘어가나 한번 두고봐야지. 지가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뭐...." 재원을 어떻게 이 자리로 끌고 내려올까 고심하던 민우는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하마터면 볼쌍사납게 넘어질뻔하자 누군지 확인도 않하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썅!!! 어떤 새끼야!!!"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돌린 민우는 손목에 매단 은팔찌들이 부딪혀 짤깍거리는 소음을 내며 휘날리는 망사자락을 붙잡고 거의 날다시피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잔뜩 찌푸린 인상을 도로 폈다. 저택쪽으로 향하고 있는 금발머리의 뒷모습에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분노가 급속도로 가라앉아버린 민우는 꽤 통증이 일어나는 어깨뼈를 계속 문지르면서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씨팔, 쌀려고 하나... 왜 저렇게 급해?" "그놈이야. 분명 그놈이었어!! 1년도 더 지났지만.. 틀림없어!!!" 붙잡는 지원을 뿌리치고 현관에서 육중한 기둥들이 3층까지 삥 둘러서 있는 저택을 향해 거추장스런 망사천을 휘어잡고 정신없이 달려가며 희준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서 외쳐댔다. 내달리는 와중에도 곳곳에 리시버를 꽂은채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경호원들을 발견한 희준은 이와 비슷한 광경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자 다시금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는 과거 이와 유사한 곳을 방문했던 때를 떠올리고는 그에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같이 연상되는 다른 기억들에 희준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래, 그놈 집도 이랬었지!! 어쩐지 처음부터 여기가 재수 없더라니!!!" 이곳과는 천지차이로, 잔디밭 위에는 무슨 공사라도 하는지 무수히 많은 나무를 벤듯한 흔적과 뭔가 무거운 것들을 치워낸 듯 군데군데 잔디 대신 붉은 흙이 패인 흔적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처음 봤을때는 황폐한 느낌까지 받아야 했던 곳이었다. 비록 잔디밭 위에는 달랑 2층의 흰 석조 건축물만이 세워져 있었지만 방 4개짜리 주택에 네식구가 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로서는 실제로 저택이란 건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진에서나 볼듯한 그 저택은 그것만으로도 황폐한 조경을 충분히 커버 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워서 그때당시 그를 괜시리 주눅들게 했던 곳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학생같은데... 무슨 부탁을 한다고 그래? 경호원들에 의해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그 곳은 전체적으로 삭막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희준은 애초부터 그런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짓눌려버렸다. 게다가 방문목적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인해 집주인과 대면하기 전부터 이미 벌써 공포에 가까운 심경을 가져야 했다. -헛수고 말고 그냥 가. 만나주지도 않을테니. -이 간 큰 녀석보게. 사장님 오시기 전에 얼른 가라.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왜 찾아왔는지를 알게된 경호원 몇명이 놀랍게도 동정이 아니라 오히려 기겁을 하며 쫓아내려는 기색에 희준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않그래도 몇일 전에 도둑이 들어서 그놈 하나 때문에 정원까지 다 갈아 엎었을 정돈데... -큰 도련님이 그 때문에 지금 기분이 무척 않좋으시단 말야.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웃는건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아 척하면 몰라? 외출도 못하니 낙이래봤자 정원에 꽃피는거 보는건데..... 저번에 얼핏 보니까 사장님을 대하는게 찬바람이 불더라고... -이상하네. 친형제는 아니라도 싸우는건 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놈 어떻게 처리했지 정말? 경찰도 않부르고... -에잇! 시끄러! 별 미친놈 하나 때문에 분위기 정말 엿같네. 너도 하필이면 이렇게 않좋은 때 왔냐 그래...쯧쯧... 어떻게 해보겠다는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오긴 했어도 자신을 만나 주지도 않을거란걸 뒤늦게 깨달은 희준은 경호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감으로 않좋은 얘기라는 것만은 분명했기에 더욱 불안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냥 기다릴께요. 혹시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모르고... 하나 밤이 다 되서야 나타난 리무진은 미처 멈춰 세우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정문을 통과해버려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희준이 애원했지만 경호원들의 강한 제지에 거의 내쫓기다시피 하며 그곳을 떠나야 했었다. "이런 씹!! 그 개자식 얼굴 한번 봤다고 이 생지랄을 떨어야 하다니" 과거의 기억을 되떠올린 희준은 않그래도 더운 날씨에 넓다란 잔디밭을 달리느라 후끈거리던 몸이 분노로 더 확 달아오르자 욕설을 주절거리며 땀으로 인해 몸에 착착 감기는 옷 때문에 더 더워서 숨차하면서도 뛰는걸 멈추지 않았다. "젠장, 어디로 들어갔지? 이쪽으로 들어온건 분명한데......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활짝 열려 안이 개방되 있는, 분명 '그놈'이 들어간 저택의 홀로 뛰쳐 들어간 희준은 원피스같은 검은 제복에 흰 앞치마를 입은 전형적인 외국의 하녀 복장 차림을 한 여자들이 양팔 한가득 식기와 유리잔 등을 들고 왔다갔다 하느라 북적대며 정신없는 홀의 분위기에 잠시 혼란함을 느껴야 했다. "나도 미쳤지. 찾아서 뭘 어쩌자고....멱살잡고 따지려고?" 차츰 숨이 가라앉으면서 차가운 이성을 되찾은 희준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황당해하다가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여자들의 새된 비명성에 미처 찾아보려는 시도도 해보기 전에 그대로 우뚝 멈춰서야 했다. "어머, 문희준씨 아니예요?! 꺅!!! 저 팬이예요!!" "난 몰라. 어떻게!! 가까이서 본거 처음이야!!" 온통 벗어 던진 옷들과 화장도구들, 튜브나 투명 백, 수경같은 비치용품들로 발디들 틈도 없이 난장판인 1층 홀과 연결된 응접실에서 쉬고 있던 몇몇 모델들이 홀에서 서성대던 희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쟤가 문희준이야? 뭐....그렇게 난리칠 정도는 아닌거 같은데?" "야, 듣겠다. 조용히 해" "기생처럼 살살 눈웃음이나 치는거 같지 않아?" "저런 얘가 뭐 좋다고. 그것도 여.장.남.자.한테 다들 그 야단법석이야?" 파티 손님들과는 달리 즉시 그를 알아보고 팬이라 자처하며 좋아하는 어린 모델도 있는가 하면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남자연예인을 직접 대면한 것치곤 이상할 정도로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는 모델들도 여럿 있었다. "희준오빠! 영혼 노래 너무 좋아요!! 저 지금 고1이거든요. 이름은..." "싸인 좀 해주세요!!!" "네.....안녕하세요. 네, 네.....고맙습니다" "희준 오빠!!! 저 사진 좀 같이 찍어주시면 않되요?" 이젠 습관이 되버린 가식적인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는 여러 손이 내미는 몇 개의 종이나 T셔츠 등의 옷에 싸인을 해준 희준은 더 이상 미적거리지 않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버렸다. "이쪽은 후문 쪽인가?" 사람들을 피해 굳게 닫힌 문들이 쭉 있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벚꽃 대신 붉은 버찌 열매를 매달은 수많은 벚나무들이 무성히 보이는 테라스로 나간 희준은 다른 곳과는 다른, 소음도 차단된 듯한 한적한 분위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제길... 지금 나 뭐하는 짓거리지?"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테라스 구석에 놓여 있는 긴 등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희준은 비스듬히 팔걸이 위로 엎드려버리고 말았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어처구니 없이 놓쳐버리자 그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은 것처럼 맥이 다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놈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봤자 소용없다는거 알면서..."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희준의 아버지가 과거 경영하던 회사는 시장 점유율이 3분지 1이상이나 되는 한 컴퓨터 회사의 부속품 일부를 전담해서 대주는 하청업체로 꽤 튼실하고 안정적인데다 신기술 연구개발비에 많은 투자를 해 성장가능성이 아주 농후한 중소기업체였다. "2년 전....그게 시발이었나? 젠장! 왜 망했냐고 대체!" 모회사(母會社)의 원일모를 점진적인 주가하락에 이어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명성, 오랜 교분을 생각하면 너무나 냉랭한 반응을 보여준 은행들의 무차별적인 자금압박으로 인해 얼마후면 안정세를 되찾을 줄 알았던 사태가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부도 위기까지 당면하고 말았다. 그 파장은 그 회사의 하청업체들까지도 연쇄부도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고 게중에 그래도 안정적이었던 희준 아버지의 회사도 예외없이 그에 휘말려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새 공장을 증설한 이 때 이런 일이 터지다니.... 무리하게 은행빚을 내어 업친데 덮친격으로 회사뿐만 아니라 집까지 가압류 (假押留) 처분당해 그래도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돈걱정은 않하고 살았던 단란하고 오붓한 가정은 말그대로 하루아침에 풍지박산나 버리고 말았다. -벌써 기업 3개를 이런 식으로 헐값에 꿀꺽 삼켜버린 SM그룹의..... 그때 그 컴퓨터 회사를 말이 합병이지 완전히 독식해버린 거대기업에서 그 회사의 기존 하청업체들과는 일절 관계를 끊어버리는 횡포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조금의 회생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져 결국 회사와 집이 은행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그런 부탁 들어줄 놈이었으면 그런 짓따윈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거란걸 알았어야 했는데..." 충격으로 쓰러져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다른 하청업체 사장들처럼 그 악덕 기업주에게 찾아가 사정해보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1년도 훨씬 전의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팔걸이에 기댄 상체를 조금 일으킨 희준이 부시시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충 사정얘기는 드렸지만, 기회는 단 한번뿐이니까 그분 앞에선 언행(言行)을 조심해라. 한달여쯤을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던 어느날, 웬일인지 리무진이 들어간후 안쪽에서 나타난, 딱딱한 말투였지만 웬지 동정하는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말로 주의를 주는 한 남자를 따라 희준은 학교도 가지 않고 거의 한달간 내내 하루종일 기다린 끝에야 드디어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반지르르하게 잘 닦인 검은 대리석 바닥..... 먼지하나 없이 깨끗한 페르시아산 양탄자....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던 화려한 불빛의 샹들리에들..... 벽에 붙어 있는 거대한 사이즈의 유화들.... 흙묻은 운동화를 신은 발로 걸음을 떼놓기가 겁날 정도로 영화에서나 보던 저택의 화려한 내부는 더더욱 희준을 압도시키며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사장님.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가 데리고 들어간 곳은 한쪽 벽면 전체가 천장까지 닿은 책장으로 짜져서 수천권도 더 되보이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고풍스럽고 장중한 서재였다. 웬지 무거운 기운이 가득한 내실의 숨막히는 공기와 쥐죽은듯 조용한 분위기에 희준은 한동안 입도 벙끗 못할 정도로 바짝 얼어붙은채 매케하게 풍겨오는 담배 향을 맡으며 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쓰느라 식은땀까지 날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심장병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여기서 더 충격을 받으면 위험하다고 그랬습니다. 사장님, 제발...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겨울에는 정말로 불을 지피는듯한 벽난로 앞에 놓여져 분명 이곳의 주인이 앉아 있음에 틀림없는 커다란 안락의자를 향해, 공부보다는 춤과 노래, 노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희준으로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굴욕과 치욕감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 얼굴을 심하게 붉히며 내내 망설여야 했다. 하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런 일에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마음을 추스린 희준이 사정을 얘기하며 어떻게든 그에게서 도움을 얻으려 애썼지만 되돌아온 것은 묵묵무답, 완벽히 무시하는 듯한 반응일 뿐이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사장님!!! 시키시는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서재의 중앙 부근에 서있던 희준의 눈에 유일하게 보였던 팔걸이 위에 걸쳐져 있는 손가락에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담배가 꽂힌 채로 붉은 와인잔이 같이 쥐어져 있어서 그것만이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증거일뿐이었다. 또한 간간히 팔을 들어올릴때마다 머리 부근의 의자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다시 팔걸이 위로 손이 내려앉으면 잔 속의 와인도 조금씩 줄어 있기 마련이어서 가끔가다 행하는 그런 기계적인 동작이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지만 그럼에도 희준은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무겁고 암울한 기운에 감히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발,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결국 희준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계속해서 애타게 부탁하고 사정했음에도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준 반응은 싸늘한 어조로 내뱉은 단 한문장의 말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내부의 온도를 몇도는 더 내려가게 만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그 목소리만 듣고서도 희준은 남자의 나이가 예상외로 젊다는 것과 얼마나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所有者)인지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을 데려온 남자가 나가자고 팔을 붙잡는 동시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선 사내의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을 본 순간 희준은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냉기(冷氣)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은 부탁하지 마라. 에릭. 멍청히 서있는 자신을 완전히 무생물취급하듯 지나치면서 싸늘한 눈으로 에릭을 스치듯이 쳐다보고는 서재를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순간 희준은 깨닫게 되었다. 에릭이란 남자가 간청해서 자신을 만나줬던 것임을.... 애초부터 부탁 따위는 들어줄 의사가 전혀 없었음을... -이 악마같은 놈!!!! 두고봐!!! 가만두지 않을거야!!!! 이곳까지 데려온 에릭이라 불린 남자에게 붙잡혀 않딸려가려고 버티면서도 힘에 부쳐 홀 바닥을 질질 끌려가던 희준이 너무나 큰 분노와 절망에 이성을 잃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가로지르는 남자를 향해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욕을 해댔다. -이 개자식아!!!!! 어디 얼마나 잘사나...악!!!!! 계단에 막 발을 올려놓으려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다시 되돌아와 팔을 치켜올리기가 무섭게 그대로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기자 몸이 홱 돌아가 버릴정도로 극심한 타격을 받은 희준이 에릭이 팔을 잡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조용히 해. 너 때문에 깨어나면 이것만으로 끝내지 않을테니. 부모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던 얼굴을 맞았다는 충격보다도, 심하게 화끈거리며 따가운 왼쪽 뺨과 터져버린 입술에서 베어나온 비릿한 피맛보다도, 더러운 하등동물이라도 보는듯이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초리에 욕설을 내뱉는 것도, 우는 것도 잊을 정도로 희준은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에릭의 부축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충격을 감당치 못해 전신을 떨어대던 희준은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 앞까지 걸어가던 남자가 다시 우뚝 멈춰서는 것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하나 뭔가를 올려다보는 듯 고개를 뒤로 약간 젖힌 남자의 모습에 계단 위를 쳐다본 희준은 홀로 내려오는 사람의 모습을 본순간 말그대로 전신 근육이 한순간에 굳어버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흰 실크 파자마 위에 느슨히 걸쳐진 끈풀린 흰 기모노 가운 자락..... 대리석 난간을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들.... 한계단 한계단 밟고 내려오는 새하얀 맨 발..... 백색에 가까운 금빛 머리카락 끝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들..... 촉촉해 보일정도로 투명하고 매끄러운 하얗디 하얀 피부..... 내려오는게 힘겨운 듯 양손으로 난간을 붙들고는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밟아 내려오는 사람은 희준과 비슷한 또래의, 불확실하게 남자라고 추측되는 소년이었다. 저런 머리색도 있었나......? 나도 흰편이지만 인간의 살색이 저렇게 하얄수도 있다니..... 맙소사......혈관도 보여..... 뽀드득 소리가 날거 같아......만져보고 싶어...... 그 상황에서 그런 한가한 생각까지 들정도로 선이 가는 외모에 희준은 거의 넋을 놓은채로 계단을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내려오고 있는 가냘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맨발로 여기까지.... 가운 자락이 다리에 휘감기며 실크 천끼리 스치는 소리만 크게 들릴 정도로 숨막히는 정적에 휩싸여버린 홀을 향해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년을 그때까지도 굳은듯이 서서 올려다보고만 있던 남자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가 나즉히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여 계단을 올라갔다. -..........혁아......시끄러워서......깬거니? .........샤워......했나 보구나..... .........칠현이는 뭐하고 너 혼자...... 뒤돌아 서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저히 저 냉혈한의 입에서 나온 음성이라곤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목이 쉰듯하면서도 감미로울정도로 너무나 부드러운 그 목소리와 감히 만지는 것도 겁난다는 듯 조심스런 몸짓에,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180도 틀려져버린 모습에 희준은 심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하나 남자의 손에서 잡힌 팔을 매정한 느낌이 들정도로 싹 빼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 공허해 보이는 눈빛과 차가운 표정에 희준은 흠칫하다가 이전에 경호원들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그제야 그때의 대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큰 도련님이.....저 애를 말하는건가 보다..... 그런데.....친형제가 아니라고.....? 굳은듯 계단 위에 서있는 남자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계단을 다 내려온 소년이 팔만 끼인채 등 뒤로 사르륵 흘러내린 가운자락으로 바닥을 쓸며 느릿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희준은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떼질 못하고 계속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설마.....? 저 애가 팔을 뿌리쳐서....? 소년이 옆을 지나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뒤돌아선 남자의 얼굴이 냉담한 표정이 아니라 근심과 동시에 뭔가 씁쓸한 듯 보여, 그 원인을 눈치챈 희준은 이 악마같은 냉혈한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그즉시 깨닫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온 소년의 긴 속눈썹에 감싸인 눈동자가 에메랄드보다 더 어두운 빛깔인 청록빛이란 것을 알아본 희준은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우는 거야.....?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그 질문에, 한순간 전율을 일으킬정도로 소름 돋는 그 음성에 희준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 애.....사람 맞아? 왜 이렇게....뭔가가 이상해 보이지? 막 이 세상에 탄생한 가장 순수하고 오염이라곤 하나도 않된 청정무구한 결정체 (結晶體)인것처럼, 현실 속의 사람이 아닌듯이 너무나 청아하고 고결한 외모였지만 신비로우면서도 뭔가 비현실적인듯한 분위기에 희준은 한껏 숨을 죽인채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춰선 그 소년에게서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뺨.....맞은 거야? 그래서.....우는 거야......? 미처 말릴새도 없이 맞아서 붉게 부풀어오른 뺨을 차가운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며 열을 식혀주듯이 매만지더니 물에 젖은듯 촉촉하면서도 가늘은 미성 (美聲)으로 속삭이듯 중얼거린 소년이 양쪽 뺨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 뜨리며 눈물을 닦다가 피맺힌 입술에 손톱끝을 갖다댔다. -뭐... 뭐하는 거야? 무슨 짓이야?" 잠이 덜깬 것처럼 약간 멍한채 초점이 어긋나 있는듯 흐릿한 암청빛 눈동자와 뭔가를 말하려는듯이 조금 벌려져 있는 붉은 입술을 보며 당혹감과 황당함에 얼굴이 잔뜩 상기되버린 희준이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홱 뿌리치고 말았다. 가볍게 밀쳤는데도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지 그대로 휘청거리며 뒤로 몇발자국 물러서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으려는 소년의 모습에 에릭이 갑자기 숨을 격하게 들이키며 황급히 다가가려했다. 하나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소년의 몸은 어느새 그 악마같은 남자의 팔에 들어올려져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이름.......말해줘 ........이름 뭐야....? 사내에게 안긴채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자신에게서 계속 눈을 떼질 않고 있던 소년의 어느새 슬퍼보이던 흰 얼굴과 집요하게 이름을 묻다가 마침내 알아내자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던, 아직도 생생한 그 모습을 다시금 떠올린 희준은 양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사망 이후,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길거리로 나앉게 되버린 차가운 현실과 맞부딪히게 된 나머지 가족들은 이리저리 친척네로 뿔뿔이 흩어져서 더부살이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다. 노는게 좋아서 즐겼던 노래랑 춤이 돈벌이 수단이 되다니.....하..... 부유한 특권층들, 특히 기업가에 대한 희준의 맹목적인 적대감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고, 복수심과 증오에 불탔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부양 하겠다는 의지로 학업을 포기하고 대신 신인가수 오디션에 공모했다. 수천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오디션에 합격한건 정말 운이었어.... 기획사의 전폭적인 지지로 바로 가수로 데뷔한 것도.... 또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도....... 데뷔앨범의 수록곡 중 절반이상이 그의 자작곡일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과 특유의 끼,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기필코 성공하고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은 희준을 다른 신인들과 차별화시킨 특별한 존재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성멸모호한 컨셉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게이라고 수근대건 말건.....변태놈들이 찝쩍대건 말건.... 성공만 할수 있다면 나체춤이라도 춰보이겠어.... 아직 완전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완성되지 않은 중성적인 이미지의 컨셉이 만들어낸 외모는 기존의 스타들에게 조금씩 식상해가던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놀랍게도 데뷔한지 겨우 1달만에 그의 자작곡인 '靈魂'이 각종 챠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앨범판매만도 100만장을 거뜬히 넘기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내 성질이 이렇게 지랄같다는걸 알면 다 나자빠지겠지...큭큭.... 이제 겨우 데뷔 석달밖에 않된 까마득한 신인이지만 본업인 가수뿐만 아니라 게스트로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보다도 방청석을 휘어잡아버리는 그의 천부적인 끼로 인해 쇼, 오락프로그램에서는 빼놓지 않고 고정적인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인기가 없다면 이런 기회는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 마다하지 않겠어..... 돈이라면 나도 좋으니까..... 그가 찍은 CF만도 수종이나 달해 현재 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는,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반짝 스타가 아닌,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먼트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는게 현재 문희준의 모습이었지만, 사촌형인 지원도 상상치 못할정도로 그의 내면은 갈수록 괴멸하듯 상처가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내 이런 집착이 단지 그날 당한 치욕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를 죽게만든 그 자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한번만이라도....그 애를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때문일까... 1년도 훨씬 전의 그 날을 이때껏 단한번도 잊은 적이 없던 희준은 그 남자에 대해 키워왔던 증오와 집착의 근본적인 이유를 스스로도 분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혼란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그를 지탱해왔던 복수심이 사그라든건 절대 아니었다. 네놈이 내게서 소중한걸 앗아간만큼..... 나도 네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말겠어..... .............두고봐.......안.... "승호씨?! 어디가세요? 회장님께서.. " "아.....잠깐....." 뚜벅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테라스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도 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지도 못할 정도로 전신이 얼어붙은 희준은 숨소리도 죽인채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눈치채이지 않으려 했다. 적막감을 흐트러놓는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음.... 칙-하고 켜지는 라이터 소리.... 손에 묻은 코밑으로 흘러들어오는 은은한 담배향..... 입술 밖으로 내뱉어지는 짙은 한숨소리...... 그리고......... "............혁아....." 애닲은 느낌이 맴도는 슬픈듯한 목소리..... ========================================================================= 에고... 오늘하고 내일이면... 저장량 땡이다... ㅠ.ㅠ 번 호 : 24497 / 24509 등록일 : 2000년 06월 23일 19:05 등록자 : KIMSIN3 조 회 : 70 건 제 목 : [퍼옴] 愛憎 -62- -62- # # #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떴을 때..... 달콤하고 감미롭기만 한 것이 아닌..... 반복되는 애증(愛憎)으로 끊임없이 상처주고 괴롭히며........ 서로를 파멸(破滅)로 치닫게하는 그 맹목적인 감정이......... 언젠가는 그를 파괴시킬 거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난...... 마블 옥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황금빛 광채로 번쩍거리는 내부시설과 후로랄 계열의 향으로 가득한 욕실은 쇼파나 탁자같은 휴식 공간에다 미니컴퍼넌트 오디오와 전화기, 샴페인과 크리스탈 글라스까지 비치된 소형 냉장전용고까지 있어 퇴폐적일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드넓은 욕실 내부의 정중앙에 위치한, 사치의 극치인 계단식 월풀 욕조는 세계적인 부호들을 위해 보석의 일종인 사드오닉스로 특수제작된 것이었다. 또한 욕조의 뒤쪽에 위치한 불투명 올글라스로 만들어진 Cebien 일자 슬라이드형 샤워부스는 미세한 소음도 완벽하게 차단시키는 방음장치까지 되어 있었다. 압축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샤워부스 내부에는 누군가 있는듯 사람의 형체가 반투명 유리를 통해 비쳐졌으나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때문에 선명치 않고 흐릿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쾅!!!!! 물소리까지 완벽하게 차단되어 적막할정도로 고요하던 넓찍한 욕실 내부가 갑작스럽게 샤워부스 안쪽에서 뭔가 둔중한 흉기로 유리벽을 치는듯한 진동음(振動音)이 발생하는 바람에 평화로울 정도로 조용했던 내부의 정적이 삽시간에 깨지고 말았다. -쾅!!!!!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울린 굉음으로 인해 부스 전체가 부르르 떨리면서 희미한 진동을 일으키더니 그중 한쪽 유리벽이 쩌적-하는 소음과 함께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쾅!!!!!!! -콰장창--- 창!!!! 챙그랑!!!!! 금이 가기가 무섭게 또 한차례 부스 안쪽에서 내벽을 텅-하고 울릴정도로 엄청난 타격이 가해지자 3mm 압축유리가 이미 금이 간 상태에서 그 충격을 감당치 못해 날카로운 파열음(破裂音)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렸다. -쏴아아!!!!! 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각조각 깨진 유리 파편들이 무수히 바닥으로 떨어지자 상어이빨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흉측한 구멍을 통해, 그동안 완벽하게 차단되었다가 새어나온 물소리가 순식간에 욕실내부를 가득 메워버렸다. "죽어!!!!!! 이 미친새끼!!!!!!!" 그와 동시에 이때껏 밖으로 들리지 않던,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잔뜩 쉬어버려 거의 금속성에 가까운, 피를 토하는 듯한 고함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리는 물소리에 섞여들어 욕실내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강도(强度)가 일반유리의 7배 가량되는 고밀도 강화유리를 산산조각으로 박살낸채 물소리를 뚫고 그보다 더 크게 욕실내부를 벼락같이 울려대는 고함성을 지르는 장본인은 바로 재원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려!!!!! 개자식아!!!!!!!!!!" -콰장창!!! 챙!!!!!!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연신 질러대며 다시 주먹을 휘둘러 깨지고 남은 유리벽마저 내리쳐 깨뜨려버린 재원이 그대로 옆 유리벽에 머리를 거세게 처박은채 간질환자처럼 전신을 심하게 떨어댔다. 너 이거밖에 않되는 놈이었어? "............윽....." 주먹을 휘둘러도 가시지 않는, 계속해서 뭔가를 부숴버리고 싶은 파괴욕 (破壞慾)과 미칠듯한 괴로움, 이대로 깨진 유리조각으로 목을 긋고 전신을 난도질해버리고 싶은 자학적인 충동에 재원은 물에 젖은 창백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이렇게까지 최저인 쓰레기였어? "..........죽.......어.........이재...원..........." 완전히 성대가 망가진듯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던 재원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광대뼈가 새하얗게 질릴정도로 이를 악문채 전신에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이럴려고 그놈에게서 뺏어 온거야? ".............하........." 뼈마디가 새하얗게 질릴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쥔채 유리벽에 이마를 맞대고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세례를 고스란히 받고 있던 재원이 물에 흠씬 젖은 전신을 푸들거리며 미미하게 떨다가 이내 입술 틈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흘려내보냈다. "........나........미친거 아냐....?" 술에 취한 사람마냥 힘없이 비틀대다가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물로 흥건한 나무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재원이 목청이 완전히 가버린 음성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불안하게 몸을 휘청대다가 다시 유리 벽에 주춤거리며 기대선채 손으로 눈을 가려버린 재원은 버티고 서 있는 것도 힘들어지자 상체를 밑으로 수그렸다. 몸을 아래로 숙이자 피가 얼굴로 몰리는 느낌과 함께 해일(海溢)처럼 밀려드는 현기증에 재원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전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을 받아야 했다. "........씨팔......" 구역질까지 치밀어오른 재원이 맥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바로 세웠지만 이내 비틀거리며 다시 유리벽에 몸을 기댄채 어지러움을 달래느라 한참을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어서 몸을 움직여 이재원..... 여기 숨어 있지 말고 나가.... 나가서 네가 저지른 짓을........ 시퍼렇게 얼어붙은 입술을 물어 뜯다시피 짓깨물며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부스 밖으로 걸어 나와 욕실을 빠져나가려던 재원이 대리석 세면대 위의 초대형 거울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물에 흠씬 젖어 새파랗게 질려버린 초라한 몸뚱아리...... 핏기라곤 찾아볼수도 없을만큼 시체같이 헤쓱한 낯빛..... 총기(聰氣)를 잃은채 핏발이 곤두선 잔뜩 충혈된 눈동자... 음산할 정도로 가라앉은 살벌한 표정.... 낯설기까지 한 그 모습에 흠칫하며 굳은채로 거울에 시선을 박고 있던 재원은 동시에 미처 발견치 못했던,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을 차례로 감지하게 되었다. 몇차례나 세게 깨물린듯 이곳저곳 흠이 패여버린 왼쪽 어깨와 피부 위에 박힌 손톱 자국들을,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짓이 거짓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새겨져 있는 몸을 본순간 재원은 그대로 주먹을 으스러져라 틀어진채 더이상 부정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한참을 그렇게 거울 속의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세차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잠시간 거울을 바라보던 재원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 부위들을 차례차례 만져보다가 뒤의 거울 벽에 비친 뒷모습이 우연히 눈에 들어오자 한순간 그대로 숨을 멈춰야 했다. 그래...... 그 모든게.... 거짓이 아니었어..... 창백한 피부 위로 시뻘겋게 금이 쫙쫙 가 있는, 회초리에 맞은 듯한 무수한 선들은 손톱에 날카롭게 찍혀 살점이 뜯겨나가 물에 씻겼음에도 아직도 피가 베어 있는 곳도 있어 그냥 놔두면 심각하게 덧날 상처들도 여럿 눈에 띄였다. 두눈 뜨고 똑똑히 봐 이재원..... 생살이 뜯긴 쓰라림이야 이루 말할수 없을 것은 분명하나 재원이 그것을 본 순간부터 느끼고 있는 전신을 불태울듯한 화염(火焰)같은 고통은 결코 그따위 하잘 것 없는 육체의 통증에 기인한 것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저지른 죄악의 증거를..... 혼절할때까지 겪은 고통의 흔적을.... 이제와서 후회하고 괴로워해봤자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지지 않을거라는 것만은 명확한 진실이었기에 재원은 이성을 잃고 두번다시 돌이킬수 없는 짓을,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러버린 자신에 대한 경멸과 자괴감(自愧感)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논둑이 갈라진듯한 건조한 음성으로 허탈하게 뇌까렸다. "...............네 손에 맡겨야겠지......" 완연히 냉정을 되찾아가는 재원이 스스로를 단죄하는건 차후의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듯 계속 되새기며 선반에 놓여있던 리모콘으로 손을 뻗쳐 방금전 등이 비쳐졌던 거울이 부착된 벽면을 향해 개폐(開閉) 버튼을 눌렀다. 스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자동으로 옆으로 밀쳐지며 실크 가운이나 새 욕의들이 걸려있는 숨겨진 벽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중 아무거나 손에 걸리는대로 빼내어 물기도 닦지 않은 몸에 그대로 걸친 재원은 허리끈을 있는 힘껏 꽉 졸라매고는 비치된 약상자를 들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 어떤 장면과 마주치게 될지,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욕실로 들어갈 때도 직감했던 것이었지만 직접 목격한 침대 위의 광경은 재원에게 약상자를 떨어뜨린것도 의식치 못할만큼 나락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격심한 쇼크를 안겨다 주었다. 쉴새없이 흘린 눈물과 땀으로 끈끈히 얼룩진 파리한 얼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수십 번도 더 물어뜯었을...... 새빨갛게 헤집어져 핏물이 엉겨 있는 입술...... 그가 저지른 짓을 두 눈 뜨고 뚜렷이 봐야하는 눈앞의 결과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신상태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만큼 처참할 정도로 너무나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시트자락을 움켜쥔채 생명줄처럼 놓지 않고 있는...... 갈고리처럼 휜채 굳어버린 가느다란 손가락..... 시퍼렇게 변해 움푹 패여버린 눈두덩과.... 여전히 눈물이 매달려 있는.... 죽어버린 암청빛 눈동자를 숨겨놓고 있는 긴 속눈썹...... 방금전까지 어떤 상황이었을지 생생히 보여주는 잔뜩 구겨지고 더럽혀진 침대 시트 위에는 오랜 시간 계속된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결국 혼절해버린 후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혁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자줏빛으로 변해버린 양 손목의 멍과...... 연약한 피부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울긋불긋한 낙인들.... 그리고..... 백옥처럼 매끈히 뻗어 있는 가느다란 다리에..... 뚜렷히 박혀버린 시커먼 손가락 자국들...... 차츰차츰 시선을 내리면서 갈수록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려가던 재원은 하반신에 시선이 닿은 순간 그 끔찍한 참상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지만 이미 보아버린 그 모습은 망막에 각인되어 눈을 감고 있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같은 분노에 이성을 잃은.... 광폭한 욕정에 미쳐버린 짐승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또 짓밟힌..... 서글플 정도로 가냘픈 하얀 나신..... 재원은 지금 이대로 도관으로 뛰쳐내려가 입에다 칼을 물던지 배를 갈라 할복 자살해 버리고 싶은 심정밖엔 들지 않았다. 하나 스스로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것을, 자신을 단죄해야할 권리는 우혁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재원은 그대로 우혁에게 다가가 시트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들을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세세히 펴내고는 널브러진 그의 몸을 흔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팔 위로 들어올렸다. 하나 그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닌지라 한동안 우혁을 팔에 안은채로 걸음을 떼지 못하던 재원은 어지러움에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줬다. 우혁을 들어올린 순간 흥건한 핏물과 쾌락과 정욕의 흔적들로 난잡하게 더럽혀진 침대시트가 고스란히 두눈 가득 들어오자 재원은 다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팔 위에 축 늘어진채로 체온까지 얼음짱처럼 차가워 시체처럼 보이는 우혁이 살아있다는 증거인 가늘은 숨소리와 아주 간간히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다 집중한채 재원은 그대로 그를 안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인체공학적으로 사람의 몸에 맞게 설계된 욕조에 우혁을 눕혀 놓으며 둥글게 움푹 패인 머리 부분에 우혁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재원이 버튼을 누르자 욕조 내부에 만들어져 있는 수십개의 분사구에서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거품섞인 따뜻한 물이 일제히 뿜어지기 시작했다. 우혁의 전신을 마사지하듯이 각 부위마다 골고루 위치해 있는 분사구에서 뿜어진 물이 욕조에 차올라 점점 수면이 위로 올라왔다. 흰 거품 밑으로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물과 함께 위로 올라오며 서서히 번져나가는 핏물에 다시금 자학적인 충동에 시달리던 재원은 욕조 가장자리로 둘러진 계단에 무릎을 꿇고 팔을 수면에 밀어넣어 부드럽게 우혁의 몸을 씻기 시작했다. "...................으..........."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아픔에 정신을 차린건지 아니면 몸을 매만지는 손길을 느껴 그런건지 조금씩 잃었던 의식을 되찾는 듯한 우혁이 눈도 뜨지 못한채 재원과 마찬가지로 잔뜩 목이 쉬어버린 음성으로 힘겹게 신음을 흘려냈다. ".............흐..........윽............" 정신을 차린 듯 축 늘어진채로 흠칫거리며 물속에서 몸을 떨어대던 우혁이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목과 가슴을 어루만지듯이 씻고 있는 재원의 양 손을 떨궈내려는 듯한 몸짓을 취했으나 팔을 다 들어올리지도 못한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눈꼬리를 타고 쉼없이 눈물을 흘려냈다. ".........흑.........윽...............하......지........마......." 재원이 조심스럽게 하반신으로 손을 밀어넣어 다리를 들어올리며 씻으려 하자 눈도 못뜨고 내내 애절하게 흐느끼기만 하던 우혁이 몸을 격하게 떨어대며 들리지도 않을만큼 미약한 음성으로 잔뜩 겁에 질린채 재원에게 호소하듯 애원했다. "...........제.......발.............그......만.............." 울음소리도 내지 못할만큼 맥없이 내뱉는 희미한 흐느낌과 오랫동안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쉬어버린, 공포로 가득한 목소리에 더이상 찢겨질데도 없던 재원의 심장은 또다시 계속해서 칼로 난도질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제 .........않해........" 미칠듯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입밖으로 소리를 쥐어짜낸 재원이 어떻게든 쇼크상태의 우혁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흐........흑........싫.....어........흑..........승....호..형........." 하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내내 흐느끼기만 하던 우혁의 입술에서, 겁에 잔뜩 질린 아이가 본능적으로 어미를 찾듯 계속해서 애절하게 부르던 그 이름이 다시금 흐느낌을 비집고 흘러나오자 재원의 신체기능은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흑.......윽..........승......호..........형...."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게 된 시발점이자 그를 더욱더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그 이름을 다시 듣는 순간 고통과 절망에 잔뜩 흐려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그대로 싸늘하게 얼어붙는가 싶더니 이내 암울한 빛으로 젖어들며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승....ㅎ........" "......................우혁아......." 이미 핏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며 고개를 숙인채 욕조 모서리를 거세게 움켜쥐고는 통렬하게 죄어드는 심장의 고통에 비명이라도 내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재원의 굳게 닫힌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흘러나온 것은 그를 뒤흔들어놓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우혁...아.........눈떠 봐......." 차츰차츰 진정이 되가는 듯 흐느낌이 사그라들며 거칠었던 숨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눈물도 이내 멈춘 우혁이 그대로 잠이 들 듯 의식을 잃어가는 것을 고개를 들고 계속 바라보고 있던 재원의 흐릿한 눈동자가 차츰차츰 습윤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제발............우....혁...아........"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재원의 간절한 음성이 들리는지 우혁의 속눈썹이 다시금 미미하게 떨리다가 들어올리려 애쓰는듯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대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려 욕조 뒤로 목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바람에 그 후에 뒤따른, 비참함과 절망감에 심하게 흔들리며 목이 메여 간신히 내뱉는 그 음성을, 이재원이란 한 남자의 전 생애를 통틀어 이전에도 또한 이후로도 다시는 없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그 처절한 음성을 듣지 못했다. ".......................사..........랑....해...............그러니까......" 목이 메여 더이상 뒷말을 잇지 못하고 물기어려 있는 우혁의 창백한 뺨에 떨리는 손을 갖다대고 가만가만 애타게 쓰다듬던 재원이 고개를 숙여 파랗게 굳어 있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사랑해...........장우혁............. .........정말.......죽이고 싶을만큼.........사랑해....... ................................그러니까.............................. .............그러니까................보내주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그에게.................... 싸늘하게 굳어있는 입술의 감촉을 언제까지라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는듯 계속 입술을 떼지 않고 있던 재원의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우혁의 입술을 촉촉히 적시며 얼어붙은 감촉을 서서히 녹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지금은.........용서해줘.......... ....................이게 .......마지막이니까...................... .............두번다시........널........ 괴롭히지 않을테니............ ..........이재원이란 이름은.......이젠 기억하지마.......... .........................절대........기억하지마.............................. .......................사랑해......................영원히............... ...................우혁아...............사....랑......해.............. 번 호 : 24498 / 24509 등록일 : 2000년 06월 23일 19:08 등록자 : KIMSIN3 조 회 : 74 건 제 목 : [퍼옴] 愛憎 -63- -63- # # # 정신적으로 갈구하는 사랑이 다른 이라면... 육체가 갈구하는 사랑은.....나라는걸.... 처음부터 어긋나게 시작된 관계로 인해.. 전신을 강타하는 육신의 쾌락을.... 아직 어려 감정에 서투른 그가..... 사랑으로 오인하고 있다는걸...... 훗날 그 사실을 깨우쳐 자멸하기 전에...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내가 먼저 물러나야 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장내 계신 여러분, 모두 자리에 앉으시고.. 잠시 정숙해 주십시요" 스피커폰에서 울려퍼지는 말과 함께 주심과 심판관들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돼어, 약간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던 장내 분위기가 정돈되는듯 했다. 하나 뒤이어 호완을 낀 손에 죽도를 거머쥔채 호구를 걸친 검은 도복차림의 경기자와 상의가 흰 도복차림의 경기자가 정방형의 경기장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차분히 가라앉았던 공기는 이내 시합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김회주 선배님!!!" "선배님!! 힘내세요!!!"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든 관중석에는 검도를 수련하는 사람이나 출전한 선수의 모교에서 응원온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하나 휴일에 올림픽 공원으로 놀러왔다가 현수막을 보고 구경하러 들어온 일반인들도 꽤 여럿 있었고 의외로 여자들도 꽤 많이 참관하러 온 편이었다. "규칙을 모르니 재미없을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 학생들이 잘하네~" "어리긴. 고등부는 덩치가 다 산만하구만" "누가 누군지 못 알아보겠어. 저 얼굴에 쓴 투구같은 것때문에.." "니 애인도 검도하는데 아직 그것도 모르냐? 그건 호면이라고 하는거야. 무식하기는" "뭐? 그러는 너는.." 명칭 하나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여자애가 얼굴이 새빨개지며 입술을 삐죽대다 뭐라고 쏘아붙였지만 주위의 다른 소음들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올해도 대진의 김회주가 우승하겠지?" "그럴 확률이 더 높아졌지. 강진형은 운이 나빴지만" "그래도 상대방도 스피드라던지 도약이 뛰어난거 같던데?" "글쎄,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으..추워. 왜 다지나간 개그하냐?" 여기저기서 미리부터 시합결과를 점쳐보는가 하면 이 마지막 시합을 잠시 지연되게 만들었던 일을 얘기하며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까 걔 실려나갈때 얼추 봤는데....얼굴이 완전히 피로 범벅이더라. 너무 잔인해" "원래 시합하다보면 다치기도 해. 특히 머리에 상처나면 훨씬 더 심각해 보이거든, 피가 많이 나서" "거기다 손목까지 부러진거 같던데?" "뼈를 잘못 맞으면 가끔 그렇게 재수없는 일이 생기지. 걔가 실력이 나쁜게 아니라 오늘 운이 않좋았나봐. 강력한 우승후보였대잖아" 끔찍하다는듯 중얼대다 또 생각났는지 절로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떠는 여자애의 모습에 옆에 앉아 있던 남자친구가 괜시리 아는 척하며 떠드는 말을, 바로 뒤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다가 듣게된 민우의 얼굴이 삼킨 콜라가 갑자기 써지기라도 한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와, 시작하나 보다!!" 사각의 선내로 들어와 상호 예를 취한 후 3보 안으로 나아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면서 죽도를 뽑아 중단세를 취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민우는 그 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흑빛으로 휘감고 있는 마른 체구의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김회주 선배님 파이팅!!!" "필승!! 김회주!!! 필승!! 대진!!!" 요란한 환호성과 일방적인 응원소리가 장내에 울려펴지는 가운데 주심의 시작 선고로, 대한검도회가 주최한 이번 96'전국 중고교 검도대회에서 가장 이변이 많이 일어난데다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고등부 결승전이 드디어 개시되었다. '네놈이 강진형을 깨고 올라온 놈이라 이거지.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놈에게 지다니...' 작년 자신과 호적수를 이뤘다가 아깝게 준우승에 그쳤던, 올해 가장 큰 라이벌이자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성도고의 강진형을 시합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머리와 손목치기 연타로 한판을 따내, 너무나 쉽사리 결승전에 올라온 훤칠한 신형의 상대방과 대치해 선 작년도 우승자 김회주가 죽도의 병혁 (손잡이)를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너무 방심했군. 시작하자마자 머릴 맞다니. 또 대체 어딜 어떻게 잘못 맞았길래 머리가 터져? 운도 없게..' 그 머리치기 한판승이란게 호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터져버려 온 얼굴이 피로 뒤범벅이 된채 기절한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것을, 같은 동시간에 준결승을 치르고 있었던 그로선 얘기로 밖에 듣지 못했던 그 일을 되새기며 자신처럼 거리를 좁힐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대방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신 엉뚱하게 네놈이 어부지리를 얻은건가?' 검선을 중심에 놓은채 움직일듯 말듯 섬세한 스텝으로 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의 호리호리한 체형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내리는 김회주로서는 좋은 시합을 벌였을지 모를 강진형 대신 자신의 대진 상대자가 된, 뚱딴지같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행운아 따위는 다소 얕보고 있었던게 사실이었다. 하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니, 손목까지 부러뜨릴 정도의 타격과 그 속도라면.. 적어도...강진형보다 뒤떨어지는건 아닌거 같군' 머리를 내리치자마자 급속도로 선회한 죽도로 손목을 다시 내리쳐 머리와 마찬가지로 호완에 보호받고 있던 손목을 부러뜨렸다는 얘기를 되떠올린 김회주는 상대방의 흔들림 없이 물흐르듯 유연한 발놀림과 큰 시합임에도 긴장하지 않는 듯한 그 몸짓에, 작년 우승자답게 새삼 경각심을 갖고 시합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잠시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지 않고 능숙한 신법을 구사하며 죽도를 겨눈채 서로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호흡을 내뱉는 순간 즉각적으로 치고 달려들며 처음으로 격돌하려 했다. 상대와 동시에 공격을 일으켜 이기는 것을 대등의 선이라 하는데 이것은 머리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오랜 수련을 통해 본능적인 느낌과 쉬임없는 훈련으로만 가능한 기술로 자신과 힘이 비등한 상대이거나 하수일 경우엔 정통으로 먹히는 승부였다. '병신! 허리가 비었어!!' 흰색 도복 상의를 걸친 김회주는 일족일도의 근거리로 좁혀 들자마자 어느결에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치려는 죽도를 반사적으로 맞받아 치며 그 순간의 헛점을 노려 기세좋게 반격하려 했다. '헛점투성이잖아?! 씨팔, 그럼 뭐야. ...힘하고 스피드밖에 없는 이런 초보한테 졌단 말이냐?!! 강진형?!!!' 상대방이 예상보다 너무나 형편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자 김회주는 도복에 감싸인 전신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어처구니 없어했다. -카가--각!!!!!! 하나 기괴한 소음을 내며 죽도의 중첩 부분끼리 맞부딪힌 순간, 그는 자신의 판단착오를,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착각을 했는지를 그 짧은 순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허억!!! 윽!!!" 맞부딪힌 순간 흡사 벽력과 부딪힌 듯이 엄청난 파워와 스피드가 실려 있는 죽도의 타격력에 호완을 낀채로 죽도를 붙잡고 있던 양 손이 그대로 찢겨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며 하마터면 죽도를 떨어뜨릴 뻔했으나 용케 놓치지 않았다. "....으...제..길..." 손에 경련이 멈추지 않을정도의 엄청난 타격에 놀랄틈도 없이, 중첩끼리 맞부딪히는 바람에 거의 맞닿을 듯이 근접한 호면의 쇠망에 가려진 얼굴을 본 순간 김회주는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착각을 받아야 했다. 윤곽선이 날카로운 싸늘한 인상... 시체같이 푸르스름한 안색.... 위험스레 번뜩이는 야수의 눈빛.... 입술 끝자락에 매달린 비릿한 웃음.... "...........제법인데.."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이 비틀리며 나즈막히 중얼대는 그 조소어린 음성을 듣는 순간, 김회주는 불길할정도로 써늘한 감각이 심장을 꿰뚫듯이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 좋아, 아까 그 놈보단 한수 낫군..." 그 순간 김회주는 그 일이 행운도, 그 무엇도 아니라 그의 의지로 행한 짓이란 것을, 실력 그대로 판가름난 승부였다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그 눈빛 속에 번뜩이고 있는 것이 단순히 우승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싸우고 싶어하는 극심한 갈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자 순간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쳐버리며 그대로 뒤로 화급히 물러서려했다. 하나 불행히도 그러기도 전에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헛!!!" 맞부딪힌 채로 팽팽히 대치한 상태가 갑작스레 배가된 죽도의 기세에 밀려 버팅기지도 못하고 거세게 밀쳐지는 바람에 힘을 이기지 못한 그가 그대로 몇발자국이나 뒤로 휘청거리며 밀려나 버린것이다. '뭐, 뭐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다 있어!!!!!' 하나 미처 중심을 되찾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한 이상 끝장을 보겠다는 건지 한 호흡에 거의 10여회 이상으로 죽도를 광폭한 기세로 연달아 내리치자 김회주는 한번 받아칠때마다 천근을 맞받아치는 것 같은 압력에 팔뚝 근육이 찌르르하며 혈관이 터져나갈듯한 압박을 받아야 했다. "....크흑..!!" 게다가 사막에 부는 광풍처럼 갈수록 더 무시무시해지는 기세를, 부딪힐 때마다 거세게 휘어지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죽도 하나로 맞설때마다 어깨가 그대로 내려앉는 듯한 격심한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이런...윽!!!!" 폭풍같은 공세에 휘둘려 반격은 커녕 일일이 받아쳐 넘기느라 혼이 나갈 지경에 다다른 김회주는 이미 자신과는 비교도 않되는 상대방의 압도적인 파워와 가공할 스피드, 자유자재로 죽대를 휘돌리는 현란한 기교에 눌려 절절매다가 웬일인지 그가 뒤로 퇴격하자 그제야 가까스로 숨을 내뱉을수 있었다. "허억...헉..헉..." "....조금만 늦었으면 숨넘어갔겠군. 큭..." 순간 그가 물러선 이유가 시간이 다 되어서였음을, 점수를 딸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갖고 놀기 위해 일부러 신체에 가격을 하지 않고 계속 죽대로 맞받아칠 수 있게끔 손에 사정을 두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쇼크와 치욕감에 호면 속의 얼굴이 급속도로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하나 그것보다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실력으로 내내 자만에 차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자 감당치 못할만큼 큰 충격에 이내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누구냐? 저 새끼. 강진형을 운좋게 이긴것 같더니.. 그게 아닌거 같은데?" "덩치는 오히려 김회주가 더 나은거 같은데. 이거...쨉도 않돼잖아?" 단 한번의 맞부딪힘으로 거의 뒤로 넘어질뻔하다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기가 무섭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다가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는 전년도 우승자의 모습을 두눈으로 똑똑히 본 관중들은, 특히 응원차 왔던 성도고와 대진고 학생들은 다들 경악에 찬 반응을 보이며 분위기가 급격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진표 봐봐..어디의 누군지.." "나 검도란게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건 줄 몰랐어. 정말... 끝내준다. 나도 검도나 배워볼까?" "나도... 검도가 저렇게 현란해 보일 줄은 정말 몰랐어. ....멋지다, 야.." 관중석에 끼여있는 꽤 많은 수의 여자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중앙의 결승전이 펼쳐지고 있는 시합 장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하나 자신들의 주장이 단번에 깨져버린 모습을 봤던 성도고 검도 부원들이 한차례 겪었던 충격처럼 김회주가 주장으로 있는 대진고 검도부원들이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충격에 비하면 관중들의 경악어린 반응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맙소사..주장..." "이건 말도 않돼... 주장이 죽도를 휘두를 틈도 없다는게 말이나 돼? 저새끼 저거 고등학생 맞아?!"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에 격앙된 음성으로 다들 한마디씩 소리치며 석연찮은 기색을 드러냈지만, 눈에 뚜렷이 보이는 실력 앞에서는 뭐라고 떠들든간에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걸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스피드 봤어? 씨팔, 한순간....죽도가 않보였어.." 검도에 문외한이 보더라도 한눈에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의 실력차로 방금 전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격퇴시킬수 있었던 기회도 많았다는 것을, 이제 검도에 입문한 초보들을 제외한 나머지 선배격의 부원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첫 출전으로 전년도 준우승자를 단 일격에 격퇴시키며 결승전에 올라온, 이번 대회 파란을 일으킨 주역의 검은 도복에 감싸인 훤칠한 모습은 확실히 옆의 김회주보다 더 돋보여 보였다. 처음의 기세좋게 응원하던 소리는 어느결에 조금씩 사그라 들었고 시합이 다시 시작되자 시끌법썩 요란하던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져버리고 말았다. 숨소리만 들릴정도로 쥐죽은듯 조용해진 것은 시합장만이 아니라 TV에서 중계되고 있는 시합을 보는 두 사람이 있는 어느 넓찍한 방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넌 변한게 없구나...' 우연히 TV를 보다가 그 모습을 봤을때부터, 아니 호면을 쓰고 있어 누군지 몰랐다가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숨이 멎는듯한 충격을 감당치 못해 심장이 찢어질듯이 아파 한동안 가슴을 움켜쥔채로 호흡을 골라야 했었다. '...여전히.. 무서울정도로...강해...' 머리는 보지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한 마음에 굴복해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시선을 떼질 않고 보고 있었던 그는 자신이 흡사 그 경기장에 가서 시합을 하고 있는양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며 몸이 조금씩 열기에 휩싸임을 느꼈다. '..지금까지...단한번도 연락이 없다는건... .......이젠 .... 잊었다는 뜻이니....?' 100인치짜리 대형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호리호리한 전신을 검은 도복으로 휘감은채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갑과 갑상을 그 위에 걸치고 죽도를 쥔채 호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모습은 꽤 오래 같이 있었으면서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날 네가 승호형에게 한말들...거짓이라고..믿고 싶었어.. 널 안다고 생각했었으니까...진심이 아니라고...믿고 싶었어. 그런데..지금은..모르겠어...그게 정말..네 진심이었던 거니?' 움켜쥐고 있던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었고, 어느새 눈물로 촉촉히 젖어들어가는 암청빛 눈동자 위로 물기가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그는 입술을 짓깨물며 자신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옆에 앉은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오해를 풀 여유도 주지 않고...넌...넌... 네 멋대로.. 날 납치해왔던 것처럼...또다시 네 멋대로.. ....날....형에게 떠넘기듯이...... 내버렸어...' 쇼파에 파묻히다시피 앉아 있는 가냘픈 몸이 미약하게 떨림을 일으키자 팔로 몸을 감싸안았지만, 지금까지 단한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악몽같은 기억에 경련은 쉽사리 멈추질 않았고 오히려 전신이 점점 싸늘해져 눈에 띌정도로 심하게 몸을 떨어댔다. '네가 미워.....날 이렇게 만든...네가...미워... 그렇게..지독한..취급을...그런..치욕을 받았는데도.. ..널....잊을수 없는 내가...얼마나 한심한지 나도 알아.. ...하지만..가끔.....아주 가끔은..날...생각하니..?'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일부러 TV에서 눈을 떼질 않은채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있는대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눈치채고, 보고 있었던 것은 옆 쇼파에 앉아서 처음부터 같이 TV를 보고 있었던 남자만이 아니었다. 굳은듯이 입구에 서서 쇼파 등 위로 보이는, 갈수록 경련의 정도가 커지고 있는 백금빛 머리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남자도 꽤 오랫동안 그 모습을 숨을 죽인채 석고처럼 굳은 표정으로 내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쇼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한명은 감당치 못할 비애로, 또 한명은 주체못할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인해 등뒤의 존재를 눈치 채질 못하고 있었다. "...헉....헉...." 장내에 유난히 크게 울리는 자신의 거친 호흡 소리를 들으며 전신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김회주는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자세를 바로잡고 상대방을 쳐다 봤지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기가 질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 새끼....' 호면을 쓰고 있는데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가쁜 숨을 내쉬느라 심하게 가슴을 들먹이는 자신과는 달리 그런 공격을 취했으면서도 입을 굳게 다문채 숨결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고 있는데다 여전히 자신에게 죽도를 겨누고 있는 모습에 처음 그에 대해 갖고 있던 경시감따위는 이미 완전히 없어져버린 상태였으나 대신 극심한 분노에 전신이 들끓어올라야 했다. '....날 갖고 놀고 있어..!!!' 죽도를 맞부딪혔을때 느낀 그 엄청난 타격력과 숨쉴틈도 주지 않고 몰아 붙이는 공세에 실려있던, 가공할 정도의 파괴적인 살기는 분명 자신과는 비교도 않되는 실력임에 틀림없었다. 자신과 검을 맞부딪힐때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을 텐데도 재역습에 대처하는 그 철저한 자세를 보자 그가 결코 헛수로 혹은 멋으로 검도를 배운게 아님을, 자신의 실력을 자만 하지도, 또한 단 한치의 실수를 저지를 여건도 아예 없애버리는 타입이란 것을 깨달은 그는 침통한 기색을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죽도를 겨눈채 계속해서 천천히 자리를 맴돌며 그를 경계하던 김회주는 그의 눈을 본 순간, 어느 결에 차분해진 눈빛에 곁든 완벽한 무심함에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전과는 다르잖아? 검도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눈싸움을 먼저 가르치고 계속해서 이를 반복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안법을 제대로 익히면 눈만 보고도 상대의 수련 혹은 수양의 도를 가늠하게 해주며 모든 움직임을 예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단 검도뿐만 아니라 무도에서 상대방의 눈을 놓치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특히 검도에서 이 안법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바로 한칼에 승부가 나버리기 때문이었다. 검도란 것은 그처럼 눈깜빡할새에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설마...싸우면서...스스로를 다스려 가고 있다..?' 호면 사이로 보이는 이젠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본순간, 또한 그의 시선이 자신과는 달리 눈을 보는게 아니라 자신의 죽도 끝에 눈이 고정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순간 김회주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놈......적어도 우리와는 차원이 틀린 놈이다.. ........ 대충 배운 놈이 아니야..!!!!' 대부분 대련을 할때는 상대의 눈을 보라고 하나 고수일 경우엔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썹을 보거나 발을 보며 거리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 잠시가 아닌, 오랫동안 상대방의 죽도를 보는 실수를 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야 옳다. 웬만큼 반사신경이 좋지 않고서는 '죽도가 움직인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은 죽도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죽도를 보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시선인, 초보자도 하지 않는 바보짓인 것이다. 하나 상대가 그런 바보도 초보자도 아닌게 판명된 이상, 죽도를 보고 있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의 반사신경을 믿고 있다는 증거도 된다. 자신의 실력에 완전무결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10년도 훨씬 넘게 검도에 매진해 이젠 어느 정도 완숙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던 김회진도 감히 그런 자만심은 갖질 못했으나 눈앞의 상대가 단순히 자만해서, 허장성세로 그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게 아님을 직감했던 것이다. '어디서 이런..괴물같은 놈이...' 검도에서 공세란 것은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다. 무념무상인 상태가 깨지며 상대방에 대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갖게 되버리면 이미 그 시합은 종결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실상 단 한번의 공세가 불러일으킨 결과는 95' 전국 검도 선수권 대회 고등부 우승자의 심신을 짓눌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승부는 판가름 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김회주의 상태를 눈치챘음에 틀림없었으나 그의 표정이나 눈빛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단지 이젠 승패를 내려는듯 눈매가 약간 날카로워졌을 뿐이었다. "하앗!!!!!!!!!!" 동시에 이때껏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며 단전에서 끌어 올려진, 상대를 압도해버리는 기합성과 함께 바닥을 박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드는 그의 모습에, 그리고 눈깜빡할 새에 관자놀이 우면으로 내리꽂히려는 죽도의 살기어린 기세에 김회주가 흠칫하며 엉겁결에 죽도를 들어올려 막으려 했다. "헉!!!!!!" 하나 머리가 아닌 왼쪽 허리를 울리는 강력한 타격과 함께 충격을 잘 흡수시키는 갑을 걸쳤음에도 허리에 느껴지는 쩌릿쩌릿한 통증에 격하게 숨을 들이킨 김회주는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는 뒷모습에 그가 머리를 노리는 척하며 헛점이 드러난 허리를 치고 지나간 것임을 깨닫자 그대로 숨을 멈춰야 했다. '..병신같이.....이런 실수를...' 맨처음 그가 공격해 올때 자신에게 드러냈던, 초보나 다름없이 무방비하게 드러낸 헛점을 이번엔 자신이 어처구니 없게도 역이용당해버린 것이다. 시합은 삼판 승부에서 먼저 2판을 선취한 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니 아직은 기회가 있음에도 김회주는, 대진표를 분명 봤음에도 별 관심이 없어 이름도 학교도 제대로 외우지 않고 있었던 이 무명의 학생에게 자신이 완벽하게 졌음을 깨닫고는 죽도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몸을 지탱한채 떨리는 음성으로 힘없이 물어보았다. "....너....이름이 뭐냐...?" 시합을 위해 다시 마주보고 섰을때까지도 대답할 의사가 없는듯 심드렁한 모습에 포기하려 할때쯤, 꽤 오랫동안 침묵만 지키던 호면 속의 입술이 주심의 시합개시를 알리는 외침과 함께 천천히 열렸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혼잣말처럼 중얼대는 느릿한 저음이 귓속을 파고든 순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미처 피하거나 맞받아칠 엄두도 낼 수 없을만큼 광속같은 기세로 달려들어 내리친 죽도가 그대로 호면을 쓴 머리 위에 작렬하며 일으킨 둔탁한 타격음이, 쥐죽은듯 조용해진 장내에 유난히 더 크게 울려퍼졌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호면 위를 내리친 압력을 이기지 못해 거세게 휘어지던 죽도가 요란한 파열음을 일으키며 부러져 버리는 것을 보며 칠현이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또 부러뜨리는군. 무식한 새끼.." 그 파편들이 허공으로 분산되 날라가 버리는 장면이 100인치 짜리 벽걸이 멀티비젼 화면을 가득 메워버려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생동감있어 보였다. '젠장. 하필이면.....어쩌자고 이걸 봐가지고. 또 저 자식은 검도부도 아닌데 여긴 왜 나와서 설쳐대는 거야?' 언제부터 우리학교가 검도부 우승에 목을 매달았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대낮부터 해준 전국 중고교 검도 대회를 꽤나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칠현은 고등부 준결승 전을 TV에서 보여줬을 때부터 급속도로 기분이 저조해져 버리고 말았다. -..놔..놔둬!!! ..볼거야....그냥...놔둬... 그때 꺼버리려던 자신을 의외로 완강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못내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냥 놔두고 계속 본 것을 후회하며 칠현은 앉아 있던 쇼파 옆쪽으로 흘끗 눈을 주었다. < 도무지 고등학생의 실력이라곤 볼수 없는데요? 처음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이재원군이 결국 올해 고등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 TV 화면에서는 재원이 머리치기 공격을 성공시키는 장면과 죽도를 떨구며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는 김회주의 모습을 계속 느린재생으로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 네, 성도나 대진같은 검도 명문교 출신도 아닌데 정말 기대되는 인재가 새로 등장한것 같습니다 > 무릎을 두팔로 끌어안고 쇼파에 잔뜩 웅크린채로, 격앙되고 들뜬 음성으로 감탄사를 발하는 사회자들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우혁의 모습을 보자 칠현은 슬그머니 부아가 돋아 차갑게 툭 내뱉었다. "확실히 저 놈은 위험해....거기다 잔인하기까지. 저 것만 봐도 알만하잖아? 저놈 본질이 어떤지.. 폭력적 성향이 다분해. 그동안 널 속여 온거라고" 하나 자신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듯 속눈썹이 쉴새없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는 우혁의 시선이 뚫어질듯 박혀있는 곳은 여전히 TV 화면이었다. 경기장 구획선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은채 호완을 손에서 벗겨낸 다음 호면의 끈을 풀고 있는, 96' 전국 검도 선수권 대회 고등부 우승을 차지한 재원의 전신이 화면에서 계속 비춰지고 있었다. 호면을 벗어 무릎 옆에 놔두는 재원의 안색이 햇빛이라곤 단한점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원래도 하얀 편이었지만 지나칠정도로 헤쓱하게 질려 있는 것을, 살이 없던 얼굴이 더 말라서 쇠꼬챙이처럼 날카로워보이는 것을 발견한 우혁은 가슴이 심하게 죄어듬을 느꼈다. '...어디...다친거니.? ...아파보여....' 면수건을 푸르니 땀에 흥건히 젖은 검은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로 이마 위로 흘러내리며 창백한 얼굴을 가리자 짜쯩난듯 재원이 손을 들어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쓸어넘기는 것을 보며 그보다 더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는 우혁이 떨리는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오늘 경기장엔 의외로 많은 여성분들이 와 계시는군요. 여성분들도 요즘 검도에 관심이 많으시죠. 호신술로 배우기에도 적합한 무도입니다 > 거추장스런 호구를 다 벗고 검은 도복차림으로 가볍게 몸을 일으킨 재원이 고등부 우승상패와 상금을 받으러 심판관들이 앉아 있는 단을 향해 걸어갔다. 흑범이 움직이듯이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를 일일이 따라가며 홀린듯이 바라보고 있는 우혁의 애잔한 표정과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붉은 입술이 저도 모르게 살며시 벌어지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다 금방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짓깨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칠현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다가 이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하하. 이거 이재원군 대단한 인긴데요? 시청자분들껜 들리지 않겠지만 장내가 온통 여성분들의 고음으로 가득합니다. 하하하 > 마지막 멘트로 사회자들의 넉살좋은 말과 함께 카메라가 땀에 흥건히 젖은 재원의 얼굴을 클로즈업 시켰다. 자막이 올라가는 100인치 화면 가득 잡힌 장면은 한쪽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간채로 단아한 입매가 이지러지며 눈이 가늘어 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괴로워....심장이...너무..아파...' 짜증났을때 특유의 그 모습을 본순간, 다시금 비수로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에 더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 려던 우혁은 갑자기 옆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뒤이은 말을 듣는순간, 반쯤 일어서던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혀..형...언제 왔어..?" 번 호 : 24542 / 24552 등록일 : 2000년 06월 24일 18:51 등록자 : KIMSIN3 조 회 : 54 건 제 목 : [퍼옴] 愛憎 -64 (上)- -64- # # # 윽박지르고 강요해 한순간의 위기를 넘겼다해도... 언제까지고 되풀이될 이 일을 끝맺을수 있는건... 내가 아닌 그에게 있다는걸...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졌다면... 아니 희박한 가능성에 언제까지 매달려도 좋으니... 스스로의 의지로 되돌아오기만을....... 적과 백의 스트라이프 차양, 고전적인 느낌의 나무 의자와 마루, 차양과 동일한 테이블 보, 바 주위를 장식한 브라스 레일 등의 클래식한 실내장식과 스태인드 글라스,섹스폰,나무비행기 프로 펠러 등과 같은 골동품으로 벽과 천정을 꾸민, 격조 높으면서도 또한 요란스런 분위기의 이곳은..... 10월 하순의 싸늘한 바람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훈훈한 온기와 이탈리안, 멕시칸 요리의 매콤하고 자극적인 향이 맴돌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업계인 T.G.I.FRIDAY'S이다. "뭐 하는 사람들 같아? 스타일이...꼭 모델같지 않아?" "알게 뭐야? 뭐하는 놈들인지" 오늘같은 주말에다 저녁 시간대는 사람들의 기분을 평소보다 들뜨게 만드는데 충분했기에 당연히 음악소리까지 덮어버릴만큼 평일보다 더 번잡하고 시끌법썩한 소음들로 가득했어야 마땅했다. 하나 지금은 음악과 옆 테이블의 수근거리는 말소리까지 뚜렷한 발음으로 들릴 정도로 지극히 조용한데다, 동(動)에서 정(靜)으로 분위기가 뒤바껴버린 매장 내에는 그에 맞춰 뭐라 표현 못할 미묘한 기운이 파문처럼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뭘 그렇게 계속 봐? 뒤에 뭐 있어?" "........" 뭘 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짜증나 눈꼬리를 파르르 떨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물으며 주의를 돌리려 하는 여자들의 쌍심지를 돋군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몇몇 남자들, 특히 20대 정도의 남자들이 음식을 먹는 것도 잊고는 아예 넋을 놓은채로 계속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말 않들려?!" "어, 어? 뭐라고 했어?" 하나 톤이 한단계 올려진 새된 음성에 흠칫하며 얼른 고개를 돌린 남자들이 그제야 파트너들의 부루퉁한 얼굴과 마주치자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버무리듯 쑥쓰러운 미소를 짓다가도 어느새 슬그머니 다시 그곳으로 눈을 돌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묘한 기운의 파생지이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그곳은 매장 내 가장 안쪽 구석에 창가를 옆에 끼고 있는 테이블로 막 날라진 음식들을 맛보고 있는 세사람이 바로 이들의 화제거리였다. "안경쓴 애 진짜 잘생겼지? 옆 모습이 조각같애" "좀 어려보이는데? 그보다는 그 앞의 남자가 더 멋있지 않냐? 저 싸늘한 표정 좀 봐" 그 세사람 중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막 뽑아져 나온 듯한 20대 중반 가량의 사내는 정장 상의를 벗은 조끼차림에 구김한점 없는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으로 포크를 들어올리거나 와인잔을 입으로 갖다댈때마다 손목의 루비 커프스단추가 불빛에 반사되 빛나고 있었고, 청빛 실크 넥타이 위에 꽂힌 역시 새빨간 루비 넥타이핀이 유난히 붉게 번쩍거려 대개 편안한 차림을 하고 나온 여타의 손님과 확연히 구분되고 있었다. 하나 리셉션이나 연회장에 가 있어야 할것 같은 복장만이 아니더라도 그의 전신에 베어 있는 성공과 부의 체취,그리고 잘생긴 얼굴에 떠올라 있는 냉막한 표정이 더욱 그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시켜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로 비치게 하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난히 짙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애는 그와는 상대적으로 이곳의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을만큼 청바지에 마호가니 빛 가죽쟈켓 밑에 체크셔츠를 걸친, 지극히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비록 은테안경으로 얼굴을 가려놓기는 했으나 그 밑바탕은 어디가지 않는지라 보기드문 핸섬한 얼굴로 인해 그 냉막한 사내와 마찬가지로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때부터 여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워낙 노골적인 시선들인지라 진작에 눈치챘을테지만 사내와 마찬가지로 눈하나 깜빡하지도 않고 주위로 시선조차 돌리지도 않은채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을 일일이 챙겨주는데 더 열중하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 역시 남자애처럼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앞의 모습들에서 눈을 떼질 않고 있었다. "재 남자애 맞니?" "여자애 같지 않아? 재수없어, 생긴게 저게 뭐니?" "에게? 너네들 질투하냐, 지금?" "남자애를 질투해서 어쩌자는 거야? 되게 웃긴다, 니들" 사내와 남자애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인 듯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 두사람보다도 더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수면 위에 뜬 기름처럼 섞여들지 않고 혼자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하는 존재이자 미묘한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근원으로 남자애와 같은 또래의 금발머리 소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투명해 보일수가 있지? 너무 맑고 깨끗해. 나 쟤 보니까 웬지 기분이 이상해. 막 보호해 주고 싶고.." "야야. 진정하고 눈돌려. 너같은 얌생이가 웬일이냐? 여자도 거들떠 않보는 놈이? 앞의 두 남자가 여자들에게 호감어린 시선을 받는 동시에 남자들의 적의를 일으키고 있다면, 그 소년은 어이없게도 같은 남자임에도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뭐야 저 얼굴은...꼭 흡혈귀 같은게 입술까지 피 처먹은 것처럼 시뻘개가지고 말야" "문희준인가 뭔가하는 가수도 화장해서 좀 야시럽더만.. 잰 아예 원판이 그렇잖아? 설마 화장한건 아닐테고" "좀 노는 앤가 본데? 머리까지 금발로 염색한거 보면" 남자애들의 시선을 모조리 그 소년에게 빼앗기고 있는 여자애들의 극단적인 표현 그대로까지는 아니라해도 그렇다고 딱히 그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백금빛 머리칼에 감싸인 투명할 정도로 하얀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보여 핏기라곤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고 흰 피부로 인해 유난히 도드라져보이는 입술은 핏물을 머금은듯 요사스러울 정도로 짙붉어 오물거리며 조그맣게 움직거리는 것이 너무나 자극적인지라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헤쓱하게 들어간 볼은 않그래도 가는 선을 더욱 가늘어보이게 했고 거리가 먼데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채 무거운듯 전혀 들리지를 않아서 눈빛이 드러나 있지는 않았으나 눈꺼풀 위의 푸르스름한 기가 흡사 푸른 아이새도를 펴발라 놓은 듯한 효과를 내고 있어 그야말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게 할 정도로 요염함의 차원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요기로워보일 정도였다. "...좇나 ... 이.쁘.다....정말 남자야?" "어라? 야야, 이새끼는 숨까지 거칠어지잖아? 킥킥" "이 씹쌔는 어떻고, 심장 뛰는 것 봐라. 숨넘어간다, 짜샤" "어휴, 누가 변태들 아니랄까봐. 새끼들아 일찌감치 정신차려" "뭐야? 니들!! 누구 보고 그러는 거야 지금?!" "어머, 웬일이니?" 옆자리에 하나씩 꿰차고 있는 계집애들의 뾰족한 음성을 완전히 깔아뭉개버린채 지독히도 음험한 말투로 거칠게 내뱉으며 그 소년의 전신을 눈으로 핥듯이 훑어내리며 아예 노골적으로 시선을 박고 있는 대 여섯명의 성인과 같은 덩치의 10대 남자애들의 불량스러 보이는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성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으..저 표정 봐. 만지면 얼음같겠는데?" "씨팔, 아우...미치겠네. 오늘 재 내 밑에 깔아버리지 않으면 잠 못 잘거 같아" "쯧쯧. 꿈깨라. 같이 있는 놈들 봐라. 찔러도 피도 않나오겠다" 지나칠정도로 헤쓱한 흰 얼굴 위에는 표정이 베어 있지 않아 더욱 요염함이 두드러진데다 생기를 잃고 있어 흡사 향을 잃어버린 흰 장미꽃과도 같은 소년의 모습은, 보는 남자들로 하여금 절로 그 얼음같은 얼굴을 깨어 짓밟아버리고 싶은, 사디즘적인 잔인한 충동을 격하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좇나...저 입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는 어떨까?" "킥킥. 이거 완전 된통 걸렸잖아? 꿈에서 실컷 박아보고 알아봐" "이 저질들!! 너네들, 뭐하는 거야?!! 진짜 농담이 치나쳐!!" "킥. 농담? 야 농담이랜다"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그것도 그 대상이 남자란 경악스런 일에 질려버린 여자애들의 비난섞인 야유에 비웃음 베인 음성으로 하나둘 이죽거리던 남자애들의 얼굴이 어느 순간 뭘 봤는지 다들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확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저...저....뭐하는 거야 저.." "아--씨!팔! 뭐야 저거! 지금 도발하는 거냐?!" ============================================================== 허... 오늘로 저장량 땡이네.. --;;; 번 호 : 24543 / 24552 등록일 : 2000년 06월 24일 18:53 등록자 : KIMSIN3 조 회 : 50 건 제 목 : [퍼옴] 愛憎 -64 (下)- 병원 복도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서 있는 민우의 모습은 환자나 문병온 사람들이 한번쯤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이런 씹- 왜 저렇게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나?' 이런 말도 않되는 착각을 하며, 오랫동안 금발이었다가 석달전 홧김에 충동적으로 초록색으로 바꿔버렸던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민우는 폭주족은 이래야한다는 사명이라도 있는듯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폭주족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리에 달라붙는 검은 가죽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가죽장화, 역시 마찬가지로 체인이 무수히 많이 매달려있어 누더기같아 보이는 검은 가죽쟈켓으로 머리칼만 빼면 전신을 올 블랙화시킨 민우의 모습은 그럼에도 꽤나 곱상한 외모로 인해 의도대로 멋있다거나 폭주족 짱다운 험악한 기세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왜 이렇게 않나와? 전해주고 나오면 그만 아닌가? 젠장, 지 힘으로 딴것까지 갖다 바치는 새끼는 또 첨봤다" 눈앞의 굳게 닫혀 있는 9인실의 문에 붙어 있는 환자들의 명패를 보던 민우는 이번에 새로 알게된 한 이름을 노려보며 병신 쪼다 멍텅구리라며 누군가를 향해 아는대로 욕설을 주절대며 투덜거렸다. 한쪽 무릎을 구부려 약간 높은 장화굽으로 기대서 있는 등뒤의 벽을 툭툭 치던 민우는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오자 막 내뱉으려던 욕설을 도로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뭐라더냐, 고맙데? 사실 니가 잘못한게 뭐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냐? 어차피 걔가 나가봤자 우승은 커녕..." "....민우야" 각 층마다 서면서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숫자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불만을 터뜨리던 민우가 다소 지친듯한 기색이 어려 있는 나즉한 저음에 시선을 돌렸다가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의 야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재원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급격히 내려간 기온으로 싸늘해진 밤바람을 얼굴에 맞고 있는 재원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휩쓸려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려왔다. 청바지와 아이보리빛 폴라T 위에 단순한 청쟈켓만 걸친 차림으로 도복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죽도를 들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그동안 축난 몸으로 인해 더 추워보여 도저히 검도대회 우승은 커녕 손에 든 죽도를 휘두를 힘이나 있을까 의심이 갈정도로 바싹 말라 키만 껑충한 꺽다리처럼 보였다. '날만 새면 마르는군. 그럴거면 대체 왜 보낸거야? 저 새끼 사고는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날카로운 턱선과 불러놓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없이 굳게 닫혀만 있는 메마른 입술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금치 못하던 민우는 다시금 지끈거리는 심장에 저절로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몸을 돌린 재원과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한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공허하고 텅 비어버린 눈빛.... 석달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보아왔던 눈빛이다. 아무 의욕도 없어 보이는 그 눈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살아나는 때는 싸우거나 죽도를 휘두를 때 밖에 없었다. 과거 재원을 처음 봤을때도, 또한 고등학생으로 들어가서도 역시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의욕도 없어 보였던건 마찬가지지만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고 인생 다 산것 같은 눈빛을 보여줬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석달이나 봐왔음에도 아직도 익숙지가 않아 볼때마다 한순간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그 눈빛을 보던 민우는 꺼칠하니 각질이 일은 입술이 벌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마시러 가자. 사람이 없는...조용한 곳으로.." 자신들이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히 술렁이던 분위기와 끊이지 않고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시선들을 피부로 따갑게 느끼면서도 묵묵히 돼지갈비로 만든 베이비 백 립스 조각을-포크보다는 손으로 집어 먹기도 함- 먹고 있던 칠현은 앞에서 잔을 들어 올리는 손길에 다소 조급함이 베어 있음을 눈치 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와인을 입안으로 흘려넣는 것도 잊어버린 듯 입술을 잔에 댄채로 자신의 옆에 시선을 틀어박고 있는, 바싹 경직되버린 얼굴과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 시야에 들어오자 칠현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왜 저렇게 넋나간 표정을 짓고 있어? 먹는거 첨보나. 것도 너무 오랜만에 보니깐 감격스러운가 보지?' 하나 거기서 그친게 아니라 이젠 잔을 쥐고 있는 손가락까지 떨려 그 안의 붉은 와인이 일렁이고 있는 것을 본 칠현이 이렇게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놓는 승호의 모습에 의아해져 우혁을 쳐다보려다 그냥 관두고 대신 입안에 든 고기를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짓씹었다. '으휴, 등신. 아직도 모르나. 어쩜 저리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나 몰라. 그러니 갈수록 불편해하지. 차라리 전처럼 옆에 붙어서 다독여나 주던가. 겁난다고 도망가더니 더이상 못 참겠나 보지? 정말 잘났어. 안승호씨~' 이재석 회장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한다던 승호가 느닷없이 거의 시체같은 형상의 우혁을 안아들고 저택으로 돌아온 것도 벌써 석달도 전의 일이었다. 심신이 다 피폐해져 매일같이 흐느껴 울기만 하던 우혁의 상태가 점차 낫는듯 하자 출장이다 회의다, 바쁜 회사일을 핑계로 오늘 이때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승호가 마침내 저택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 새끼 나온 시합 보고 있는데 들어올게 뭐람' 그때까지도 TV에서 아직 화면을 차지하고 있던 재원의 모습까지 더해 기력을 회복한 이후론 처음 마주치는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기묘한 긴장감으로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방안의 정적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계속되자, 과거에도 서먹서먹한 두사람의 중재자 역활을 도맡아 해왔던 전적을 되살려 숨막히는 분위기를 깨뜨려야 하는건 자신이라는 의무감에 즉각적으로 생각해낸게 결국 밖으로의 외출이었다. '하여간에 우혁이를 성형시키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언제까지고 되풀이되겠지. 어휴..' 외식을 할때면 가곤 하던 답답하고 경직된 곳이 아닌, 기왕이면 사람도 많고 가족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런 곳으로 우혁과 승호를 이끌고 왔을 때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긴장감을 완화시키기를 바랬던 것이나 칠현이 간과했던 한가지 사실로 인해 그 계획은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버린데다 오히려 승호의 신경만 더욱 자극시킨 꼴이 되버리고 만 것이다. '그새끼...그래도 조금은 믿었는데. 형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어. 그것도.....폭력적인 최악의 방향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승호나 우혁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지만, 처음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우혁을 목욕시킬때 그 몸을 봤던 칠현은 굳이 머리 좋은거 티낼 필요는 없었지만 보자마자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그동안 당한것만해도 충분히 물고 뜯는 견원지간같은 사이가 되고도 남을테지만 승호가 그랬던 것처럼 우혁과 연관된 미묘한 관계로 인해 그래도 재원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가 여지없이 깨져버린 칠현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살심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야 했다. 하나 방학 내내 억눌러 참아왔기에 개학하고 나서는 요행히도 재원에게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실상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 해도 보통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버렸다. '변했어. 그 새끼는.. 우혁이가 갈수록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처럼...그 새끼도...' 개학후 학교에 나온 재원은 그의 기준으론 변해도 상당히 많이 변해있었다. '어쨌든간에 이대로 끝난게 아니란 것만은 분명해. 아까전 우혁이를 봐도 그렇고...그놈 상태를 봐도 그렇고...' 외견상의 변화를 봐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양 바싹 말라 뼈에다 가죽밖에 붙여놓지 않은듯한 몰골인데다 그의 전신에 베어있던 나른하고 무심한 기운은 이미 씻은듯이 가셔져 있는 상태였다. '학교 주변 폭력배들을 쓸어버리더니 저번주에는 교내 폭력써클 놈들을 아주 박살내버렸지. 쳇, 먼저 시비붙인건 그 자식인데 처벌받는건 그놈들이라니.쯧쯧..그놈들도 알고보면 피해자군. ....잠깐...피해자?!' 그렇다고 또 크게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을만큼 조용하게 지내는건 마찬가지였으나 예전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을 간혹가다 행하던 재원의 불안정해보이던 모습을 떠올리던 칠현은 순간 머릿속을 관통하며 지나치는 한가지 사실에 우물거리며 고기를 씹고 있던 움직임을 멈칫하며 멈춰버렸다. '검도...피해자....아하, 그래서 검도대회 나왔었던 거구나. 의왼데?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의 그녀석이 그런 책임감을 느끼다니..' 검도부도 아닌 재원이 느닷없이 검도대회에 출전하는 바람에 그래도 점차 안정되가던 우혁의 심기를 여지없이 뒤헝클어놓은데다 타이밍도 못맞춰 들어온 승호로 인해 분위기가 경직되버렸던 아까전의 상황에서, 재원이 검도대회에 출전한 일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칠현은 불현듯 깨달은 사실로 인해 그제야 그 일이 납득이 되자 고개를 끄덕이며 별 생각없이 힐끗 옆으로 눈을 돌리다 한순간 그대로 숨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번 호 : 24544 / 24552 등록일 : 2000년 06월 24일 19:00 등록자 : KIMSIN3 조 회 : 62 건 제 목 : [퍼옴] 愛憎 -65- 드뎌... 저장량의 마지막 편... 담편은 언제? -65- # # # 5월의 햇빛이 축복처럼 느껴졌던 그날.... 그의 눈빛에 새겨져 있던 내 모습도.... 찬란한 햇빛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음을... 정념으로 불타오르던 암청빛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고 매혹적으로 빛나던 그날.... 그날이 내게 깨우쳐 준 것은...... '또 변덕스럽게 군다고 화내겠지? 하지만 그래도 먹기 싫은걸...' 칠현이 시킨 주요리를 그대로 따라시킨 우혁은 메뉴판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접시에 수북이 쌓인 훈제된 고기의 양에 먹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린 상태였다. 내내 샐러드나 포테이토만 먹다가 한소리 들은 다음부턴 고기에 손을 대었지만 옆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칠현이 잠깐만 눈을 돌려 자신을 본다면 당장 또 뭐라 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혁은 정말 말그대로 깨짝거리며 먹고 있는 중이었다. '맛있긴 맛있는데.....샐러드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나이프의 날로 고정시킨채 포크로 뼈에 붙은 살을 조금씩 갉아먹듯이 뜯어먹고 있는 우혁은 갈비의 특성상 그런 식으로 먹기가 힘들어지자 귀찮은 나머지 속으로 말도 않돼는 변명을 하며 포크로 그냥 뒤적뒤적 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숨막혀... .....왜 이렇게 답답하지?' 우혁은 언제부턴지 차츰 그의 전신 모공을 압박하고 죄어드는 이상한 기류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약간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많이 입어서 더 그런가? 너무 갑갑해' 풍덩한 청 멜빵바지와 연한 회색 빛의 터틀넥 니트 위에 받쳐 입은 윔셔츠 위에 또 레이어드해 입은 에스닉 무늬의 라운드 니트까지.... 입고온 하늘색 오리털 파카와 머플러는 내부의 훈훈한 기온으로 인해 벗어놨다 해도 우혁이 현재 걸치고 있는 옷들만 해도 이런 늦가을에 입기엔 좀 거한 느낌이 드는 옷들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 칠현이가 강제로 여러겹이나 껴입힌 옷들이 갈수록 더욱 무게를 더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워져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지쳤지만 육신보다도 정작 그의 마음을 더 지치게 만든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렇게 갑자기 널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겨우 TV로 봤을 뿐인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우연찮게 봐버린 재원의 모습은 우혁을 아직까지도 계속 심란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쟁이라도 하듯 번갈아가며 연락을 해오는 진이나 유모가 잠시 잊을수도 없게끔 은근슬쩍 흘려내던 그에 대한 얘기에서 혼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피폐해보이던 그 모습에, 않그래도 울적하고 심란해 있던 우혁의 심사 (心思)는 급속도로 침체되 버렸던 것이다. '잠시라도 널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온 건데.... 어느 곳이든 다 마찬가지야' 주변의 불분명한 수근거림들이 반 이상은 자신들에 대한 얘기란 것은 개미가 스물거리며 전신을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을 야기시키는 시선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재원에 대한 일도 잊을 수 있도록, 시끌법썩한 분위기에 휩쓸려 이 시간을 조금은 즐길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우혁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기껏 나왔는데 가자고 하면 않돼겠지? 칠현이가 이런데 오자고 한것도 처음이니까. 칠현이나 형은 이런 복잡한 곳은 싫어하는줄 알았는데'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승호의 얼굴을 살피려다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얼른 다시 시선을 밑으로 내린 우혁은 입술 틈으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남들보다 좀 특이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취급받는건 너무 불공평해. 하지만... 요즘은 금발도 눈에 많이 띄던데...' 소심한 성격 탓에 타인에게 드러내려하지는 않지만 실상 우혁은 자신의 병약한 체질이나 외모, 혼혈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는 그런 문제들을 자각하게 하는 느낌만 받아도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이럴때면 어김없이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원망스러워지는 우혁은 차라리 자신을 낫지 않았던게 더 나았을거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다가 언제부턴지 점점 삐딱해져만 가는 자신의 이런 마음에 흠칫하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거나 마찬가진데 겨우 이런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나...왜 이렇게 못됐지?' 얼굴도 이름도 아니 존재한다는 흔적조차 없는 아버지보다는, 아기를 낳고나서 젖도 한번 물려주지 못한채 힘겹게 그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 아기에게 들려주길 원했다는, 하나 얼마 말하지도 못하고 숨이 멎었다는 금발의 소녀는 좀더 구체적인 얘기였다. 자신이 죽어가는건 아랑곳 않고, 와주지 않는 무정한 연인에 대한 원망 한마디 하지 않은채 아기에 대한 염려 밖에 하지 않았다는 모친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뭉클해져 코끝이 시큰해지던 우혁은 눈앞이 뿌옇게 변하자 누가 볼새라 얼른 눈을 깜빡이며 앞에 놓인 칵테일 잔으로 손을 뻗었다. '.....맛있어...' 보죨레를 마시는 두 사람과는 달리, 역시 우혁의 입맛을 잘아는 칠현이 주문한 무알콜 칵테일 스무디의 일종인 안드레 피치 리프터를 한모금 조심스럽게 마신 우혁은 입안에 확 퍼지는 맛에 누가보면 정말 단순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식간에 기분이 뒤바껴버리고 말았다. 천진난만한 아이마냥 실상 좋아하는 것에는 금방 쉽사리 이끌려버리는 우혁은 한순간에 칵테일 맛에 매혹되어 양손으로 잔을 감싸쥐고는 잠시 눈을 감은채로 꺼끌한 입안을 적시는 코코넛 크림과 바닐라, 복숭아, 라임등이 블렌디된 맛을 음미하며 만족된 미각으로 인해 기분이 한결 나른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음.....맛있어...." 생각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는 것도 자각치 못한 우혁은 바로 옆에 있는 칠현과는 달리, 신음과도 같은 그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들은 승호가 막 와인을 마시려던 것도 잊을 정도로 넋을 잃은채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삼키기가 아까울 정도로 혀에 느껴지는 촉감이 소프트한 액체를 눈을 감은채로 음미하며 우혁은 꽤 오랫동안 소음에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가지각색의 음성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음악소리 등을 듣다가 다시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한순간 승호가 숨을 멈췄다는 것도, 떨리는 손 때문에 쥐고 있던 와인 잔이 흔들리자 결국 마시지도 않고 잔을 내려놨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로 칵테일을 한껏 즐기며 너무나 오랜만에 기분이 느긋해진 우혁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불현듯 속눈썹을 반쯤 들어올려 맞은 편의 승호를 건너다 보았다. '이젠 승호형 얼굴조차 제대로 볼수가 없어. 이전엔 그래도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고기를 유연하게 썰고 있는 나이프를 쥔 손가락과 조각낸 살코기를 포크로 찍어올려 입술로 가져가는 것을 따라가던 우혁은 소리내지 않고 작은 움직임으로 고기를 씹고 있는 승호의 턱 부근에서 시선이 멈춘채 더 이상 그 위로 올리지를 못했다. '형은......그래, 승호형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난....'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승호가 우혁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어디 잠깐 떠났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우혁은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그날 일은 분명....내가 형을 화나게 했기 때문일거야. 내가 잘못했는데도....난 형을 마치.....마치.....' 처음으로 승호가 이성을 잃어버렸던 그 화원에서의 일은...... 그를 연인이라기보다는 형으로 더 의지하고 존경하며 사랑해왔던 우혁에게 안승호도 감정을 갖고 있고 화를 내며 욕정을 느낄수 있는.... 그것도 재원에 버금갈 정도로 너무나도 위협적인.... ...........하나의 남자란 것을 마침내 깨우쳐줬던 것이다. '한순간 승호형이 아닌 것 같았어. 분명 형인데....' 결국 그날 일은 재원에게 속절없이 이끌리는 마음을 깨닫게된 날인 동시에.... 그토록 오랫동안 승호가 염원해왔던 것처럼..... 안승호란 남자를 새로운 시점으로 보게된, 형이 아닌 하나의 남자로 자각케된 계기가 되었던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말 네 말대로 내가 내 감정을 모르는 걸까? 내가 내 마음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은 걸까?' 그 때문에 한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쉽사리 녹초가 되어 결국 그걸 예민하게 눈치챈 승호를 집밖으로 내몰아 버렸던 자신의 이런 모습은...... 또한 승호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민감해지는 자신의 모습은.... 이미 형제를 대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우혁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매사 너무 의식하는 자체가.....형을 사랑하는 거라고? 널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보고 싶기만한 마음이.... 형만 생각하면 이렇게 불편하고 긴장되는데...그게 사랑이란 말야? 단지 너무 오랫동안 같이 지내서 자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라니' 우혁은 석달전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끔찍했던 날 재원이 했던 말이 머릿 속에 떠오르자 어느새 승호에서 재원에게로 초점이 돌려진 자신에게 화가나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포크를 들어올려 먹는것에 열중하려 했다. -........이건 말야...... 여전히 먹기 불편한 립스를 포크로 찍다가 뼈에 걸려 다 들어가지도 않자 다시 한숨을 내쉬던 우혁은 느닷없이 환청처럼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하고 말았다. '......재원....?' 이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환청까지 들리나 싶어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진 우혁은 도리질을 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먹으면 않돼..... 하나 그럼에도 웃음기 섞인 나즉한 저음이 다시 환청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리자 어느새 접시에 시선을 주고 있는 암청빛 눈동자 위로 차츰차츰 아련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막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넥타이에 손을 뻗어 느슨하게 당기던 승호가 주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미약한 한숨소리에 손동작을 멈추고는 축 쳐진채 단 한번도 위로 들어올리지 않고 있는 백금빛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역시.....아직은 무린가. 곧바로 회사로 가야겠군. 회의를 하려면 어차피 아침에 일찍 나서야 할 판이니....' 고개를 숙이느라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려온, 윤기가 자르르 흘러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 우혁의 모습에 씁쓸해진 승호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손질 좀 해야겠어' 막 잔을 입술에 갖다대던 승호는 느닷없이 들려온 신음섞인 한숨소리와 뭐라 웅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중얼거림에 흠칫하며 다시 우혁을 바라본 순간, 그런 한가한 생각따위는 더 이상 할수 없게 되버렸다. 입술에서 잔이 천천히 떼어지며 얼굴 위로 나른한 빛이 어리는 것을.... 다시 입안으로 칵테일을 흘려 넣은 후 분홍빛 혀끝이 살짝 나오는 것을.... 슬며시 사라져버린 혀가 적셔놓은 촉촉히 젖은 입술이 벌려지는 것을.... 만족감어린 한숨을 내쉬느라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잔잔하게 떨리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승호의 눈빛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을 정도로 어둡게 물들어 버렸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이이상 내 자신을 속이는건 기만이다' 마치 키스해 달라고 유혹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톰하고 짙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승호는 자조적인 허탈한 웃음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널 칠현이같은 동생으로만 본다는건, 그 옛날로 되돌아간다는건..... 이젠 불가능해 혁아. 그런 일은...이젠 다시는 있을수 없어' 자신의 입술에 와닿던 새틴처럼 보드랍고 감미롭던 감촉과 생크림보다 더 달콤했던 그 입술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은 열망이 불길처럼 걷잡을수 없이 맹렬하게 치솟자 승호는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는게 더 우습군'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고 이젠 확고해졌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쉽사리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를, 이회장의 저택에서 우혁을 본순간 이미 자각했던 그 사실을 승호는 다시한번 비참할 정도로 절감해야 했다. '널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서 오래 보고 있을수도 없다는걸 알겠니?' 가냘픈 몸에다 본질적으로 애처로울만큼 여리고 순진해 흡사 청초한 수선화 같았던 우혁의 모습은 재원을 떠난후 근 석달이 지난 지금, 본래의 그를 잘 알던 사람들이 보면 잠시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청초한 이미지에다 알게 모르게 재원에 의해 밖으로 끌어내어진 미묘한 관능과 재원과 헤어진 것이 원인인 듯한 애잔한 비애미까지 더해져 본래의 처연한 분위기가 더한층 짙어져 있는데다 수심이 깊게 어려 있는 헤쓱한 얼굴은 보는 사람들마다 숨막히지 않을수 없을만큼 지독히도 매혹적이었다. '이대로 모든걸 다 던져버릴 수만 있다면.....' 그자신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동작 하나하나마다 그 모든 것이 절절이 녹아들어 선천적으로 타고난양 이전보다 더 사람들을 한순간에 미혹시켜버리는 우혁의 모습은, 불가항력적인 마력이라고밖엔 볼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미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 의해 변해버린 그 모습을 봐야하는 승호의 기분은 지구상에 산재하는 인간의 언어따위론 결코 표현못할만큼, 그 어느누구도 짐작조차 할수도 없고, 또한 이해하지도 못할만큼 그렇게 복잡다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든걸 다 잊고......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숨겨놓고 싶은 이 저열한 마음을 넌 짐작조차 못하겠지. 너와 그 녀석이....우연히 만날 가능성조차 없는....그런 곳으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꾹 깨물며 포크를 쥐어 접시 위의 고기를 뒤척이던 우혁이 이내 먹기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승호의 눈빛이 갈수록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혹시나 옆의 칠현에게 들켜 혼날까봐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팔로 접시를 가리고 있는 우혁의 모습은 아이처럼 너무나 천진난만해 보였지만 승호에겐 그런 모습조차도 항거할 수 없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비쳐졌다. '정신차려, 안승호. 이성을 잃었던건 그 날로 충분해. 저애가 바라는게 뭔지 뻔히 알면서....그 녀석이 그런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녀석이나....저 아이나....아직 서로를 놓은게 아니야...' 승호는 석달전, 그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었다. 이회장의 보좌관인 진의 요청으로 어딘가로 동행하게 되었을 때만해도 승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건, 자신을 청했다는 정체불명의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이회장과의 밀담 내용이었다. -연륜이나 자격문제에 대해선 그리 문제삼을게 없다고 생각하네. 우리 모두 이미 자네를 지지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자네 의사를.... K&G project에 참여한 회사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사업주들 몇몇과 함께 이회장의 서재에서 나눈 밀담의 주 내용은 바로 미국 현지에 나가 사업 전반을 지휘해야할 대표자의 결정여부였다. '그 건을 고려하려 했던건....너한테 더 이상 내가 필요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어. 그 녀석 곁에 있는게 네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하나 진의 안내로 당도한 3층의 침실문을 연순간, 아니 정확히 말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우혁을 본순간, 그때부터 승호의 사고는 정상적인 기능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여전히 접시 위의 고기를 포크로 찍어, 먹지는 않고 소스 위로 굴리고만 있는 우혁의 백금빛 머리칼을 바라보던 승호는 또다시 되살아난 그때의 끔찍했던 기분으로 인해 명치끝이 막히며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때 한순간......네가.........죽은줄 알았었다... ..꼭........그때처럼.... 그때 느낀 기분은......두번다시 맛보고 싶지 않아' 흰 침대 시트 보다도 더 투명하고 하얗던 우혁..... 푸르스름한 안색과 젖어 있던 백금빛 머리칼 그리고..... 피처럼 붉디붉던 고혹적인 입술..... 하나 가까이서 본 그 입술은 엉망진창으로 물어뜯어 살이 헤진채 꺼질 듯 말 듯 미약한 숨을 힘겹게 내뱉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속에 불덩이가 들어앉은 것마냥 속이 타들어가자 승호는 눈앞의 우혁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더 이상 그날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혼절했다가 요란한 소음에 깨어난 우혁과 재원이 그 침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은 듯,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질 않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발작적인 편두통에 동반해 속까지 역해져 승호는 급히 와인을 들이켰다. '.....그 눈은.....포기를 한 눈이 아니었어... 그렇게 쉽게 물러설 놈이 아니야. 혁이 역시....' 광폭한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두른 자신의 손에 고스란히 맞으며 반항도, 변명도 하지 않던 그 모습은.....분명 살기를 포기한 모습 같았었다. 하지만 우혁이 깨어나던 순간..... 소음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을 그 희미한 신음소리를 가장 먼저 캐치한 사람은 승호가 아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던 이재원이었다. 그때 승호는 그의 전신에 맴돌던 자포자기하던 기운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너무나 예상밖의 말들이었고, 승호가 쇼크로 거의 반실신 상태인 우혁을 안아들고 방을 나설 때까지도 미동조차 않은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승호는 이대로 끝날 것이 아니란 것을 진작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입밖으로 내뱉는 말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던....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혁을 따라붙을것만 같던 그 집요한 눈빛....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나올때마다.... 이미 헤쓱해져 있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며.... 눈물로 흠뻑 젖은채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젓던.... 위태롭게 흔들리던.......너무나 애처로운 우혁의 모습..... 입안으로 확 번져나가던 잭 다니얼스 향이 쓰디쓴 약초처럼, 최상의 연한 육질이 씹을 때마다 질긴 소가죽처럼 느껴져 채 다 씹지도 않고 입안으로 힘겹게 넘기던 승호는 느닷없이 접시 위로 하얀 손가락이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한순간 심장이 덜컹하지 않을수 없었다. '혁아?' 소스로 뒤범벅인 고기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호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먹는 경우를 보긴 했지만 그 소심한 성격으로 절대 하지 않을 행동에 놀랐던 것도 잠시, 다음 순간 그보다 더 큰 쇼크로 인해 경직되 있던 얼굴 근육이 푸들거리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5월의 어느 화창했던 휴일 오후..... 저택 뒤의 숲으로 소풍이라도 하듯이 재원에게 이끌려 나가 잔디밭에 유모가 정성스럽게 싸준 음식들을 펼쳐놓고 먹으며 평화로운 한때를 즐겼던 그 날로.... 우혁은 되돌아가 있었다. 재원의 손을 잡고 따라간 곳은 저택 뒷숲 너머에 있는, 이름 모를 새소리만 들릴 정도로 인적하나 찾아볼 수 없이 한적한 호숫가였다. -이렇게 손으로 먹어야 더 맛있어.... 처음에는 포크로 찍어 먹던 음식들이 언제부턴지 모르게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하면서부터 학창시절 소풍이란 것은 가본 기억도 없던 우혁에게 피크닉 기분을 한껏 돋구어줬던 그날은..... 납치된 후 처음으로 재원에게 안겼던 전날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지만 그 저주받을 날 이후 처음으로 우혁에게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도 살아 숨쉬며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던 날이었다. -.....장우혁.. ...아깝게 낭비하면 않되지... 물티슈로 닦으려던 자신의 손가락을 매번 그대로 잡아채어 입술로 가져가 장난스럽게 할짝거리거나, 입가에 묻은 소스와 과일즙을 급습하듯이 핥으며 은근슬쩍 입술을 훔치던 재원의 모습은.... -가....간지러워!! 하지마!! 자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질 않은채 짖궂게 쳐다보는 시선과 전신에 피어오르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얼굴이 붉어진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짙어지던 그때를..... -너 이럴려고 이렇게 먹으라고 한거지?!! 음흉한 속마음을 들켰으면서도 눈하나 깜빡 않하고 발끈해서 소리치는 자신의 머리칼을 그대로 휘감고 격정적으로 키스를 퍼붓던 그때를...... -.......이런, .....내 실력이 그렇게 환상적이었나....? 잔디밭에 누운채 완전히 멍해져버린 자신을 내려다보며 짖궂게 말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끈하는 모습에 나즉한 웃음을 터뜨리던 재원의 모습이..... 웬지 그 모습이 너무나 눈부시고 생명력이 넘쳐보여 그만 사르륵 마음이 풀려버렸던 그 때를...... -......우혁아...... 너무나 감미롭게 키스하며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던 날씨도 너무나 화창한...... 햇빛 찬란하던 5월의 그 날을..... -......우혁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혁아...... 비운(悲運)에 지쳐버린 나약한 육신을..... 포근히 감싸안던 대지(大地)와 한몸이 되던 그 순간을.... -......우혁아...... 달아오른 살갗에 짓눌려지던, 손질되지 않은 푸르른 잔디밭.... 휘어진 손가락에 감기던 기다란 풀잎들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를.... -......우혁아...... 사방을 가득 메운 풀내음과 바람한점 없이 맑았던 5월의 하늘.... 잔디밭 풀잎 위에 파묻히듯 누워 젖혀지던 고개 너머로.....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하늘이 얼마나 청명하고 높았는지를...... 잎사귀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얼마나 눈이 부셨는지를..... -......우혁아...... 커팅된 보석처럼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던 땀방울들.... 금발과 하나로 어우러지던 매혹적인 검은 머리.... 너무나도 부드럽게 안는 그 모습에 왜 그리 가슴이 미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이름을 부르던 그 모습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를..... "...우.....우혁아?!!" 우혁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바베큐 소스대신.... 가늘고 투명한 손가락에 묻어 있는 것은.... 이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순간의 꿈.... 칠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떨리는 듯한 목소리도..... 승호의 경악으로 세차게 흔들리는 듯한 눈동자도.... 혀 끝 어딘가에 맴돌고 있을 향신료의 맛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원이는....." 이젠 곁에 있지 않은 그는.... 잊고자 해도 결코 잊지 못할 낙인(烙印)을 남긴 그는...... "......이젠......" 서러운 한기(寒氣)에 몸이 주체할수 없이 떨려왔다. 생기를 잃어버린 암청빛 눈동자 위로 뿌연 막이 떠올랐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승호의 모습..... 비수로 할켜대는 심장의 통증..... 알고 있었다...... 자유를 줬다고 하나 자유를 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몸의 흔적보다도.... 머릿속에 뚜렷이 박혀버린 기억의 잔상들이야말로.... 그가 새겨놓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각인(刻印)임을.... 그가 남겨놓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형벌(刑罰)임을.... 알고 있었다...... 내밀던 그 손을 놓던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는 것을... 그 날로 꿈은 깨져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왜 이다지도 마음이 아파오는지를......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만나지도 않겠다는 거야. 그 놈 이름만 들어도 이렇게 사색이 되버리는데 오해라고? 계속 회피하면서 만나지도 않고 죽을때까지 숨어 지내겠다 이거야? 팔뚝을 잡아끌던 손아귀에 베어 있던 억제치 못한 극렬한 분노.... -내버려 둬!!! 네가 내 심정을 알기나 해?!!!! 꺼꾸러질 듯이 침실바닥을 끌려가며 부르짖던 비통한 울음소리..... -자유롭고 싶어했잖아!! 내가 잘못 본거야?!! 그런데 언제까지 그 놈 그늘에 묶여 지낼거야!! 이렇게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그 놈을 가만 놔둘 정도로 난 그렇게 마음 좋은 놈이 아니야!!!! 극악스럽게 표출해내던 살인적인 적의(敵意)...... 심장을 한순간에 얼려버릴 정도로 위협적인 차가운 음성....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한텐 그런 권리가 없어!!!!! 모든걸 무시하고 그를 선택한 자신과 재원에 대한 분노.... 이성을 잃고 표독스럽게 내뱉은 두 번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 말...... -..............권....리......? 팔뚝을 거머쥐고 있던 마른 손가락의 떨림.....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던 허망한 듯한....그 모습...... 그리고.....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마른 등줄기로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질식할 듯한 두려움에 떨리는, 물기 젖은 손가락이 천천히 위로 들려졌다. -.........네 입에서 권리 운운한 이상...... 나한테 그런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한번 알아봐야겠군. 감정이 베어 있지 않은 기계적인 무감동한 음성....... 얼음처럼 투명해지던 .......무감각한 눈동자..... 한순간.....그 눈동자 위로....핏빛이 스쳐지났다고 생각했다...... 승호가 찾아왔던 그날.....중단되었던 그날밤의 연장선...... 전신세포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육체를 범하던.......사랑이 없는 행위...... "혁아!!!!!!" "뭐...?!!! 우혁아!!!!" 바닥으로 우당탕거리며 넘어지는 의자의 소리.... 승호와 칠현의 부르짖음.....웅성거리며 귀를 울리는 소음들.... 눈물로 흐릿한 공허한 암청빛 눈동자 위에 투영된 것은..... 쇼크를 넘어 새파랗게 질려버린 승호의 얼굴..... 칠현의 손에 잡혀 있는....짓깨물어 핏물이 흐르는 손가락...... 희고 투명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디 붉은 핏물..... 피...... 붉은 색...... -난 아버지같은 사랑은 하지 않을거라고 맹세했었어. 사랑하는 사람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그런 사랑은..... 유난히 짙붉었던 석양(夕陽)...... 쾌락에 허덕이며 휘어지는 땀에 젖은 등줄기.... 전신을 훑어내리며 쓰다듬던 기다란 손가락...... -가문과 회사에 얽매인.....정략의 희생자는 내 어머니로 끝낼 거라고..... 그런 가식과 오만의 세월은.....내 대에서 끝낼 거라고....... 나무 등걸에 걸쳐져 바라본 하늘은..... 나무숲 사이로 보인 하늘은 그토록이나 높았는데...... 5월의 그날은 그토록이나 아름다웠는데........ -꿈이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낼 뭔가가 있기를..... 날......그렇게 만들 수 있는게 존재하기를...... 생긴다면......절대 물러서지 않을거라고...... ...........끝까지....소중히 지켜낼 거라고...... 그리고....그보다도 더 높고 아름다웠던 이재원...... 굳건한 신념으로 가득한.....흑요석같은 눈동자..... 그 속에 갇혀 있던......초라한 내 모습....... -하지만 내게 그런 운은 없을거라 여겼었는데..... 너무나 빛나서 눈을 뜨고 쳐다볼 수도 없었던 그 눈빛..... 물결처럼 흔들리던 육신은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은 닿을수 없을 것만 같은, 손에 쥐어지지 않을 존재.... -..............내게........그럴 기회를 주겠어....?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아득히 들려오던 떨리는 목소리.....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나도 이젠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렇게.....생각했었는데........ 한순간의 짧았던 꿈...... ".........재원이는....." 알고 있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그 앞에서..... 초라한 내가 내세울건 오직 자존심밖에 없었다는 것을..... -처음....그래, 처음 그 날도.......납치된 이후의 날들도..... 결코 네 의지가 아니었는데도...... 나 혼자 강압적으로 저지른 짓인데도....난.....착각하고 있었어..... 아니라고..... 그런게 아니라고.... 끝까지 떼어내지 못했던.....마음을 배신한 입술...... -그래.......그때 넌.....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걸로 알았어야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수 없었던 그 말..... 이제서야 알게 된.....그 말의 의미......... 알고 있었다..... 내밀었던 그 손을 외면한건...... 그 손을 놓았을 때 더 이상 살 수 없을거란걸 알았기 때문임을..... 다가오던 그를 계속 내몰았던건...... 그를 위해서라고.....언젠간 끝날 시한부적인 관계라고 치부하면서도..... 끝까지 나를 놓지 않는가....시험하려는.....죄악에 찬 마음이었음을..... -아직도 널 원해. 그건 거짓이 아냐. 앞으로도 널 원할테지.... 그날.... 악몽과도 같았던 그날..... 모든 것은 깨져버렸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놈이 저혼자 미쳐 날뛰는 것을... 동정이나 연민만으로 봐주기엔....너도 괴로웠을거야..... "........오...지........" "혁아?!!! 정신차려!!!! 내 말 들리니? 혁아!!!!!" "............않...을........거.........야....." "우혁아!!!!!!!!!!" 맥없이 쓰러지는 얼굴에 와닿는 가슴은.....체취는..... 무너지는 육신을 감싸안는 그 팔뚝은..... 뺨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그 손길은.... 자신을 업는 그 등은...... 더 이상 그가 아니란 것을..... -.......이렇게 있으니까........정말 좋다....... 잠과 피로로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 꿈처럼 아득히 들려오던 다정한 목소리...... 어두컴컴한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저택으로 돌아올 때...... 업혀 있던 등은 그토록이나 따뜻하고 편안했는데.... 목덜미에 감고 있던 팔을 놓는 일은 없을거라 여겼는데...... 이젠.....누구도 대신해 줄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이젠.......이것으로........끝내자........ .............이미.... 알고 있었다......... ========================================================================================== 드뎌... 그다지도 원하지 않던 마지막 저장분입니다... 이게.. 수요일인가 목요일에 올라왔던 거니... 담편은 언제나 올지... ㅠ.ㅠ 하지만... 보내주시는 바로바로 올려드릴께요. ㅠ.ㅠ -66- # # # 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나 자신도 정의내릴 수 없는...복잡미묘한 것이었다. 어느 누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날부터 시작된.... 선과 악이 교차되는 이 양분된 마음을.... 하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란 존재는 날 살아있게 하는 기쁨이자... 날 점점 죽게만드는 지옥이란 사실이었다... 중학시절 마지막 임원회의가 있었던 그 날은.... 전날 내린 폭설이 녹지 않고 얼어 도로 위까지 얼어 붙어버릴만큼 무척이나 추운 날씨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기다릴께" "먼저 가라니까! 너 오늘따라 왜 이래?!!" 내내 차분히 타이르던 말투가 급기야 짜증섞인 억양으로 돌변해 한층 톤이 올라간 음성이 빈 복도에 울려퍼져 본래보다 더 큰 소리로 귀에 전해졌다. 순간 실내화 발자국이 군데 군데 찍혀 있는 석회벽에 기대서 있던 인영의 몸이 흠칫하더니 바닥을 내려다 보느라 숙여져 있던 백금빛 머리칼이 가는 떨림을 일으켰다. "칠현아!! 어?! .....우혁이도 있었구나? 어..저기..저.. 칠현아....곧 회의 시작 한다는데..."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뜨끔해 얼른 어깨에 손을 대려했지만 닫혀 있던 앞문이 열리며 부회장 녀석이 고개를 내밀며 소리치다가 어깨 너머로 백금빛 머리칼이 보이자 갑자기 말을 떠듬거리며 바보처럼 어버버 거리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보고는, 도로 손을 내려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약간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들었지? 나 너랑 실갱이할 틈 없으니까 빨리 가. 정문에 김기사가 차 대기시켜 놨을거야. 형도 오늘쯤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마지막이라는 명분론을 내세워 회의직후 임원들과 뒷풀이 약속이 되있는데다 다른 약조까지 되 있어서 여느때처럼 회의끝나고 바로 같이 갈수가 없게된 나는 계속 남아 있겠다는 우혁을 말리다가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고집을 피우는 모습에 결국 짜증을 부렸지만 그런다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알았어. 나혼자 가면 되잖아" 토라진 음성과 함께 위로 들려진, 예상 그대로 눈물 맺힌 암청빛 눈동자에 서러운 기색이 떠오르며, 붉은 입술이 움찔거리며 울먹이는가 싶더니 용케 울지 않고 고집스레 꽉 다물려지는 것을 보자 입술 틈으로 끙~하는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너... 정말 애처럼 굴래?" "현이 너 미워!! 나랑 같이 있는거 창피해서 그렇지?!! 거기 나도 같이 따라가도 되잖아!!! 그런데 왜 자꾸 먼저 가라는거야!!" 고집스레 앙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벌려지는가 싶더니 앙고라 벙어리 장갑을 낀 양손을 움켜쥐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우혁의 모습을, 복도를 가득 메운 찬 기운에 얼어붙어 있던 통통한 양 뺨이 분한 마음에 열이 올라 발그레해지는 것을, 지나치던 남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흘끔거리며 계속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아이고 두야~하는 심정으로 이마에 손을 짚고 말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거야?! 내가 지금 놀고 있어? 어? 계집애같이 왜 이래?!" "현이 너....너어....." 복도나 계단에 괜시리 얼쩡대던 놈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나 했겠지만 칠현은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딴애들이랑 놀러가려고 나 따돌리는 거지?! 내가 귀찮아서 그런거잖아!! 너 형오면 다 이를꺼야!!!" 귀청이 따가울정도로 빽- 내지르는 어린애같은 울음섞인 목소리... 이렇게 될줄 알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혁아!!!" "칠현아, 뭐해?! 어서 들어와!!" 정말 중 3이란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걸작인 말을 내뱉어 그런 모습과 그런 말을 하는걸 처음 접한 몇몇 동급생들을 꽁꽁 얼려놓고는 그대로 홱 돌아서 뛰어가 버리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뒤쫓아 가려다가 뒤에서 재촉하는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너무 한심한 나머지 속이 끓어 올라 싸늘한 기온에도 전신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미친다, 정말. 지 맘대로 않되면 땡깡부리는건 대체 언제 고칠려고 저러는거야? 이게 다 대부님하고....아니지. 이건 다 형때문이야. 계속 오냐오냐 해주니까 저렇게 제멋대로지" 저렇게 팩 토라진걸 풀어주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할지 생각하니 골치가 지끈거려 저런 성격을 만들어놓은 주장본인인, 일본에 가 있는 형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 잡아 죽일듯한 기세로 씨근거렸다. 하나 소심한 성격만큼이나 부끄러움도 잘타고 다른 것엔 절대 집착을 보이지 않지만 형이나 자신에 관한한은 이상하리만치 강한 독점욕을 보여, 조금만 다른데 신경을 써도 애처럼 돌변해 버리는걸 잘 알기에 이내 자조섞인 한숨을 흘려냈다. "낼모레면 고등학생이 될 녀석이...어휴..하여간에 계집애같이 삐지기도 엄청 잘한다니까. 그러면서 계집애라고 놀리면 울기나 하고" 뛰어가느라 허공으로 나풀거리는 백금빛 머리카락과 등에 맨 가방이 들썩 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우혁이 저러는 이유가 딱히 기분나쁜 것도 아니어서 이내 피식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삐졌다는걸 보여주려고 뒤도 않돌아보고 달려가는 아이보리 반코트와 회색 바지에 감싸인 마른 체형의 뒷모습이 복도 코너를 돌며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 모습이 사라진 복도 끝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던건... ".....차있는데까지 데려다 줄걸 그랬나" 간혹 생떼를 부려서 짜증나게 하고 울보에다 고자질쟁이라서 얄밉기가 이루 말할수 없을때도 많아 괜히 툴툴거리게 만들지만 생기발랄하고 나이와 성별을 떠나 귀엽기까지 하던 그 모습을..... 사랑을 듬뿍 받고 커온데다 모든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해 교만할것 같은데도 전혀 그런 구석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애교도 많고 어리광도 심한 그 모습을.... 끊임없이 병치례를 앓아 마음대로 딴 애들처럼 놀지도 못하는데다 고아와 혼혈이라는 사실에도 구김살없이 순수함과 동심을 간직한 그 모습을...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던 암청빛 눈동자와 보는 사람까지도 절로 미소짓게 만들어주던 그 해맑게 웃는 얼굴을...... 두번 다시 볼수 없게된 것을 그때 이미 알았던 것일까.... "에잇, 나까지 형닮아가나. 왜 이래?" 우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웬지 기분이 얺짢아지며 뭔가를 하다가 만듯한,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불쾌감에 인상을 조금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그 불쾌감의 정체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맞아..그새끼들..!!" 우혁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밖으로 끌어내어 무차별적으로 구타를 가하던, 상당히 질이 나쁘다고 소문난 고등부 상급생들을 떠올리고는 아차하며 복도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내다보다가 왼쪽편의 고등부 건물과 내부가 연결되 있는 브릿지로 시선을 주었다. 하나 아직 교정에 남아 있는 학생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는데다 설마 학교 건물에서 정문까지 나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조금 망설이다가 너무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안가 학생회장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느라 방금 전의 전신을 관통하던 불안감이라고 해도 좋은 기분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회의가 끝나고 뒷풀이까지 마친 후 임원들 중 친구들인 몇몇 녀석들과 함께 미팅 약속이 되있던 장소로 몰려갔다. 실상 우혁을 먼저 보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때문이었다. 그러니 사실 이번엔 우혁의 땡깡부리는 그 말이 진짜가 된것인지라 조금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미팅 장소에 우혁을 데려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않봐도 훤한지라 그동안 보모처럼 돌봐왔으니 하루쯤은 내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어 내내 같이 나가자고 조르던 녀석들에게 흔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사실 외모에 관한한은 우혁못지 않게, 하나 다른 의미에서 경탄어린 시선을 어렸을때부터 많이 받아왔지만 본래부터 조금 차가운 외모와 인근 근방까지 널리 퍼졌을 정도로 소문난, 지나치게 뛰어난 수재라는 사실, 그리고 항상 매 붙어 다니는 우혁의 존재로 인해, 실상 여자애가 접근해 온다던지 여자에게 눈을 돌릴 틈도 없어 다른 놈들과는 달리 그때껏 여자친구 하나 없었던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우혁의 외모에 워낙 단련되서 웬만한 미모가 아니고서는 눈하나 깜빡 않할 정도였기 때문에 미팅장소에 갈때도 처음 동의했을때와는 달리 그렇게 썩 내키는 기분은 아니었었다. 하나 실제로 여자애들을 가까이 접해보니 외모를 떠나서 작고 아담한데다 웬일인지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그 모습들이 우혁과는 뭔가 다른, 이상야릇한 기분을 들게 해서 밤늦게까지 어울리며 벌써부터 고등학생이 되기라도 한듯, 좀더 어른이 된듯한 기분에 들떠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죄책감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또한 형이 돌아와 우혁과 같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집에 연락을 해 확인해 보려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난, 서울과 마찬가지로 도쿄에서 내리고 있는 폭설로 인해 전 항공기가 공항에 묶여버렸다는 사실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방종어린 자유를 선택했던 이 날의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단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 이 날... 내 목숨을 재물로 원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되돌리고만 싶은... 하나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생지옥은... 눈 뜬채로 죽을때까지 내가 감수해야 할 이 지옥같은 형벌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쇼파에 앉아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던 진의 몸이 한순간 세차게 흔들리며 발작적으로 고개가 처들려졌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의 반문이 못들어서 묻는게 아니라 쇼크때문에 미처 어쩌기도 전에 터져나와버린 말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회장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진을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버린 말을 다시 꺼냈다. "재원이를 약혼시킬 생각이라고 했네" "하지만 회장님. 도련님은..." 감당치 못할 충격으로 인해 혀가 마비되버린듯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진을 힐끔 돌아본 이회장은 그런 그의 반응을 다른 이유로 오인하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결국.....그..소년도... 소모품에 불과했으니... 약혼이라도 시키면 조금은 마음을 잡지 않을까 싶어서 해본 말이네" 땅밑으로 꺼져들어간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진은 요즘들어 수시로 경험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 강도가 큰 것은 처음이었다. 우혁이 안승호에게 돌아가 있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회장이 설마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던 것이다. 단지 좀더 기간이 길었을 뿐이지 얼마 못가 싫증내버리는 재원의 기질이 또 유감없이 발휘되버려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회장이 내심 못마땅해하고 적대감까지 갖고 있던 우혁을 고작 '소모품' 취급해 버리고 새로이 내세운 대안이란게 약혼이라니!! "...하지만...회장님. 도련님 나이가 아직 어리신데 약혼은 너무 이른게 아닐지...." 평소답지 않게 긴장감이 잔뜩 베어있는 진의 말에도 이회장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상관 없네. 나중에 할 것을 어차피 좀더 일찍 앞당겨서 하는것 뿐이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어떻게하면 그 애를 오게 하느냐가 문제지. 강제로 끌고 오게 할 수는 없는거 아닌가" 입으로는 미소를 잘 짓는 편이지만 본래 그다지 잘 웃지 않는다는 증거인, 4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주름 하나 져 있지 않은 눈 주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심하는 이회장을, 밑의 쇼파에 앉아 올려다 보고 있는 진의 안색은 말그대로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린 상태였다. 재원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행동을 할지 눈에 선히 보이는듯 하자 또 한차례 불어닥칠 태풍으로 인해 진은 한순간 등골이 오싹해져 버리고 말았다. '맙소사...이를 어쩌면 좋지?' "...!!!" 양쪽으로 칸막이가 세워져 있는 책상에 엎드려 있던 칠현의 몸이 전기 충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큰 동작으로 흠칫거리다 멈추더니 한참후 부시시 상반신을 일으켰다. 땀이 베어나오는, 수면부족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로 손을 갖다대어 세게 짓누르며 벗어놓고 있던 안경에 손을 뻗는 칠현의 반쯤 내리깔린 눈동자는 잠이 덜깼다기 보다는, 몽마에 시달린듯 생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맥없이 축 처져 보였다. '....또...꿨나 보군' 비록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눅눅해져 있는 교복 셔츠와 식은땀이 베어있는 이마, 목덜미로 흐르는 끈끈한 땀방울과 눈을 뜬 채로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 더러운 기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11시...5분전..'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 손바닥에 묻어 나오는 축축한 식은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다가 다시 미적지근하게 냉한 이마를 짚은채로 시계를 들여다보던 칠현은 우혁의 감기기운이 전염되기라도 한듯 들고 있기도 무거운 머리와 끈적하게 전신에 베어있는 땀이 짜증나 의자를 뒤로 끌었다. 3학년에게 우선권이 있는 학교 도서관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자리가 꽉 메워져 쥐죽은듯 조용해 발자국 소리도 다 들릴 정도였지만 이마를 손으로 짚은채 파리한 안색으로 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돌아보며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쏴아아... 시간이 늦어 히터를 꺼놓는 바람에 냉랭한 한기가 싸하게 밀려드는 화장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안경을 벗어놓은 다음, 얼음처럼 차디찬 물로 얼굴을 씼으며 멍한 정신을 깨려고 노력하던 칠현이 고개를 든순간 급작스런 현기증에 잠시간 눈을 감은채로 거울에 머리를 기대고 있을 때였다. -투--툭-- 콧속에서 뭔가 진득한 것이 흘러내린다--라고 생각한 순간.... 손으로 막을틈도 없이 입술에 찝찝한 느낌을 남겨놓으며 턱밑으로 주루룩 흘러내린 코피가 그대로 회색 니트 조끼 위에 떨어져 흡수되며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이런..!!"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으로 막다가 메쓰꺼움에 다시 앞으로 몸을 수그리자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린 코피가 세면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생전 않터지던 코피까지 터지다니..."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연신 핏물을 훔쳐내다가 비익(鼻翼)을 눌러 지혈시키며 거울을 들여다보던 칠현은 전날 말도 않되는 억지를 부리며 생고집을 피우는 우혁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잠도 못잔 증거가 이제야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지러움에 세면기를 부여잡고 상체를 숙이고 있던 칠현은 멈춘줄 알았던 코피가 다시 터져 세면대 위로 뚝뚝 떨어지며 엷게 희석되어 번져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번엔 지혈시킬 생각조차 않고 백색의 세면대 위로 붉은 피가 떨어지자마자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면대 위로 떨어진 피가 유난히 더 붉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흰 바탕 위로 색이 옅어지며 넓게 번져나가는 붉은 색의 아름다움에 현혹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 흰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던 혼탁치 않은 선명한 붉은 핏물... 핏물처럼 짙붉은 입술 안에 살그머니 머금어지던.... "제기랄!!!!" 또다시 이틀전의 영상이 뇌리 속을 가득 채우자 성난 외침을 토해내며 칠현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수업까지 방해할 정도로 그를 뒤흔들어 놓은 그 충격적인 장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손으로 연신 핏물을 훔쳐내며 휴지로 젖은 얼굴을 거칠게 닦던 칠현이 다시금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모습에 그만 휴지를 꽉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연분홍물이 흘러내렸다. "맙소사. 이젠 나도 미쳐가는건가?" 그 곳에서 손에 묻은 소스를 핥아먹는 사람을 보지 못한건 아니었지만 우혁같은 행동을 한사람은 아마도 T.G.I. 창사이래 처음일 것이다. "내가.... 그딴 행동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장우혁" 대부분 손가락을 재빨리 쪽쪽 빨아먹던가, 그냥 묻은채로 계속 고기를 먹던가 하지, 분홍빛 혀로 살짝살짝 손가락을 할짝이다가 그 붉은 입술로 손톱끝에서부터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핥아 내려가며 내리깐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만큼 괴롭혀야 만족하겠어. 형만으로 부족해서 그새끼까지 돌게 만들더니..." 잔뜩 이를 악문 음성으로 마치 거울 속에 우혁이 있기라도 한듯 전면 거울을 무섭게 쏘아보는 칠현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 광경을 봤던 몇몇의 사내들을 한순간에 발정난 짐승으로 만들어버렸던 그 모습은, 아니 눈을 감은채 손가락의 소스를 음미하듯 핥던 하얀 얼굴 위로 떠오른 그 표정은.......지독히도 뇌살적이었다. 나른하고 어떻게보면 음탕할 정도로 퇴폐적이기까지 한 그 표정에서... 사랑을 나눈 직후의 모습이 어떨지 연상됐을 정도로.... 칠현은 그때 우혁을 보던 승호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잊을수가 없었다. 처음의 격심한 충격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대신 메운 것은.... 당장이라도 뭔가를 찢어발겨 버릴듯한....지독한 살기.... 그 대상이 누구라는 것 정도는 칠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갑자기 그러는 거지? 날씨도 추워지는데.." 여전히 멍한 정신으로 화장실을 나와 텅빈 교실들을 지나치며 흔들리는듯한 착각이 이는 복도를 맥없이 걸어가며 중얼거리던 칠현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걸음을 멈춰버린 이유는, 지끈거리던 두통이 급작스레 더 심해진 이유는, 목구멍에 불덩이를 삼키기라도 한것처럼 속이 끓어오르는 이유는.. 그 곳에서 벌어졌던 그 믿지 못할 충격적인 일뿐만 아니라... 정신을 차린 우혁이 일어나자마자 포천에 있는 별장으로 가 있겠다고 고집을 피운 일이.... 강하게 반대하는 자신과는 달리, 결국 허락을 한 승호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그역시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재원.....그 새끼 때문이었군" ************************************************************************** -67- # # # 내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면... 내 기억 속에서 다시 널 없애버릴 거야... 이대로 그냥 이렇게... 이대로 묻혀 지냈다면.... 아마.....분명 죽을만큼 괴롭더라도........ 우리의 만남을 후회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결코 잊을 수 없다해도.... 우리의 사랑이....부정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어휴~ 회식이고 뭐고 오늘 나갔다가는 애들한테 치이겠는데?" "광란이지 뭐. 우린 않그랬나? 결국 남는건 허무밖에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손에 쥔 자유를 어쩌지 못해 미쳐보는거지" 음악잡지에 실릴 사진촬영에서 간신히 해방되어 칸막이처럼 세워 놓은 간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있을때 조명과 촬영에 쓰인 무대장치들을 치우던 직원들의 대화는 방금 전까지만해도 잊고 있었던 일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흐응, 수능이었군. 끝나도 벌써 예전에 끝났을 시간이잖아? 뭐 이젠 나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하나 그럼에도 4층에 위치한 잡지사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썰렁한 한기가 감도는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희준의 모습은 그렇게 마음처럼 태평해 보이진 않았다. 한국의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의 어머니가 현재 그러는 것처럼 만약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대학 시험을 치지 않기로 결심한 자신에게 분명 실망하셨을거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대학따윈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그렇게 한가하게 대학생활하며 여유부릴때가 아니라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고 공부해서 들어갈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나 대기실이나 로비에서 시간 날때마다 문제집을 들고와 공부해대던 같은 또래의 연예인을 보면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었다. 하나 주차장에 엔진을 걸어놓고 차옆에서 담배를 태우며 무슨 일인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는 지원이 멀찌감치서 보이자 희준은 그런 내색을 비쳤다간 당장 가수 때려치고 공부해서 대학가라고할게 뻔하다는 생각에 추워 죽겠다는 얼굴로 옆으로 달려갔다. "으~~추워추워. 왜 매년 이 날만 되면 이렇게 추운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히터를 미리 켜놓아 따뜻한 차 앞좌석에 올라타며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던 희준이 대충 목에 걸쳐놨던 머플러를 동여매는데 열중하다가 무심코 창밖을 본 순간 차가 방송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의심기 가득한 눈으로 지원을 쳐다봤다. "어디 가? 오늘은 이게 끝이라고 하지 않았어?" "...생방 있어" "뭐?! 나 약속있다고 했잖아!! 저녁 시간은 비워준다고 하지 않았어?" "취소해" 푹 눌러쓰고 있던 벙거지를 확 제껴버리며 성난 표정으로 자신을 죽일듯이 쏘아보는 희준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지원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펑크낸 애가 있어서 제일 근처에 있던 네가 대신 무대에 오르게 됐어" "씨팔!! 어떤 좆같은 새끼야!! 내가 땜빵용으로 밖에 않보여?!! ....아 않먹어요 누나" 벼락치는 기세로 버럭 고함을 지르다가 자판기에서 뽑은 뜨끈뜨끈한 맥캔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코디네이터가 내밀자 손을 내저으며 거절한 희준이 다시 지원을 무섭게 노려봤다. 하나 웬일인지 더이상 변명조차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모습이 평소 살살 달래던 것과는 확연히 틀려 그 심각한 분위기에 더이상 물고 늘어질 수도 없자 등받이에 털썩 기대며 shit-을 연발했다. "몇시쯤이면 끝나?" 한참을 혼자 식식대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묻는 희준을 슬며시 눈동자만 돌려 쳐다보며 오케바리~를 외치는 지원의 속마음은 네가 그럼 그렇지 별수 있냐 딱 그거였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심각모드였다. 핸드폰을 받은 후부터 이를 어째 죽었다 죽었어 저 자식 또 성깔낼텐데라고 중얼대면서 어쩌지 어쩌지 내내 고민하며 안절부절 못하던 지원이 희준 앞에서는 침중한 분위기를 짓고 있자 저런 눈에 뻔히 보이는 속임수에 넘어간 희준이 너무 귀여워서 코디네이터가 손으로 미소띈 입을 가렸을때... "1시간 후면 네 볼일 봐도 돼" 라고 지원이 나 지금 건드리지마 터지기 일보직전이니까 딱 그 말투로 말하면서 빽미러로는 자신을 보다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윙크를 하자 푸훗-하고 웃음이 새나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않되는 놈은 끝까지 않된다니까. 일찍 가 있으려고 했더니.. 흥신소에 고액을 지불하고 익명으로 알아낸, 안승호가 잘가는 바에 요 몇일 스케쥴이 끝나는 즉시 가서 죽치고 있던 희준은 단한번도 그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아 사기 당한거나 혹은 흥신소에서 잘못 안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직은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오늘도 사진촬영만 마치면 그곳으로 가보려던 중이었다. 우쒸-- 계속 않왔었는데 설마 나 없는 동안 왔다 가는건 아니겠지.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더해야 하니.. 그래도 일찍 끝나는 것만으로도 어디냐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던 희준은 생방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여자애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는 방송국 외관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리허설도 못해보고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지원에게 다시 신경질을 내려했다. 하나 미처 입밖으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담배 냄새가 갑자기 목구멍에 맵게 느껴지자 심하게 쿨럭대야 했다. "쿨럭-쿨럭...쿨럭!! 웁...거기 창문 좀 더 열어!!" "어어--? 앗차차---미안" "어머 희준아 괜찮니?" "쿨럭쿨럭쿨럭...아씨팔..쿨럭! 누나 나 캔 좀.." 찬기온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4개 다 내려 환기를 시켜도 가시지 않고 차안에 남아있는 매케한 담배향에 연신 기침을 해대던 희준이 코디네이터가 건넨 캔을 따서 미지근한 커피를 들이키자 간신히 기침을 억누를 수 있었다. "어휴-우 ...숨 넘어가는 줄 알았네. 으 목따거" 남은 커피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희준이 기침이 가라앉자 안도어린 한숨을 내쉬다가 불현듯 담배냄새때문에 기침을 참느라 혼났었던 또 한번의 경험을 되새기고는 삽시간에 표정을 굳혔다. 차에 맴도는 솔내음과 혼합된 담배향이 마치 그날밤 테라스에서 벗나무 내음에 섞여들어 코끝으로 밀려들던 그 담배 냄새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구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안승호가 테라스를 나설때까지 기침을 참으며 기척을 죽이느라 식은땀까지 흘리던 자신의 모습까지 덩달아 떠오르자 가라앉혔던 화가 도로 머리끝까지 치솟은 희준이 애꿎은 지원에게 한꺼번에 화를 퍼부었다. "그렇게 인상쓰고 있으면 누가 봐줄줄 알아?! 괜히 어울리지 않는 무게 잡지 말고 담배나 끊어!!! 가수를 옆에 앉혀 놓고 줄담배 피는게 매니져냐?! 으휴- 내가 앓느니 죽지 죽어" 갑자기 웬 히스테리야-하는 표정으로 지원이 돌아보는게 느껴졌지만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듯 도로 벙거지를 내려 푹 눌러쓴 희준은 팔짱을 낀채로 스스로 치받는 분을 이기지 못해 한참을 씨근거려야 했다. -혁아.... 씨팔. 슬픈 듯한 목소리? 하! 젠장. 내 귀도 썩었군. 그 개자식 입에서 슬픈 듯한 음성이 나올리가 없잖아!! 덕분에 괜히 쫄아가지고 숨도 못쉬고.. 기침 참느라 얼굴은 시뻘개지고.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 그 목소리가 생각나는거야앗!!! 휘이익-- 휘이익-- 유리창이 요란하게 덜컹거릴 정도로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에 설핏 든 잠이 도로 깨버렸다. "...읏...머리야.." 눈을 뜬 순간 깨질듯한 머리에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우혁이 신음을 흘리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없어 채 반도 못 일어나고 도로 시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바람소리...? 몇시지...왜 이렇게 어두워.... 시트에 반쯤 얼굴이 파묻힌 채로 있다가 가슴이 답답해져 몸을 약간 틀어 모로 비스듬히 누운 우혁이 지끈거리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머리맡의 창을 고개를 비틀어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머리는 왜 이렇게 아픈거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겠어..... 침을 삼켜보다가 한결 스무스하게 넘어가며 목구멍이 따가운 것도 덜하자 이제 감기가 많이 나았나 싶어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든 이마를 손을 들어 짚어봤지만 손바닥에도 열이 있는지 이마가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아주머니가 미음을 먹여주고 약먹은 다음부터...내내 계속 잔건가? 잠시라도 들어 올리기 무거운 머리와 메쓱거리는 속에 아직도 완전히 나을려면 멀었다는 생각에 힘없이 팔을 축 늘어뜨리던 우혁은 방금전까지 꿈을 꾼듯한 기분이었지만 도무지 기억해 낼수가 없어 곰곰이 뭘하다 잠들었는지 생각하다가 순간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해내고는 아차했다. 아...맞아... 오늘 수능이었지....현이야 시험 잘쳤겠지..... 나와는 달리 뭐든지 잘하니까..... 중요한 시험을 쳤는데도 전화로 격려도 못해주고 이렇게 비칠거리며 누워서 잠만 잔 자신을 한심해 하던 우혁은 칠현이 어느 대학에 원서를 쓸까 무슨 과를 지망했을까 생각해보다가 어김없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영상에 곁들여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넌 뭐가 하고 싶어? 가고 싶은 과라던지... 과묵하게 침묵을 지키다가도 가끔가다 입을 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어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던 질문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유난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혁의 장래희망이었었다. 그가 우혁의 과거를 물었던 적은 단 한번 뿐이었고 그 한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후로는 두번 다시 입밖으로 꺼내 물어보거나 관심을 표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만큼 과거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앞날에 더 충실코자 하는, 이미 지나가버려 어쩔수 없는 일을 구질구질하게 질질 매달리는건 딱 질색하는 재원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묻지를 않았었어.. 하긴...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해야 더 옳을테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다 유모님과 진씨한테 들었던 얘기뿐이야.... 재원이 앞으로 뭐가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물며 왜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흠칫한 우혁이 눈을 뜨며 덮고 있던 시트자락에 매달리듯 꽉 움켜잡았다. 나 대체 뭘 알고 있는거지... 같이 있었던게 3달도 넘었는데 난 그에 대해 뭘 아는거지... 그만큼 재원에게 직접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고 한다해도 가급적 둘과 관련된 화제는 피하려했던 편이었던 자신에 비해 재원은 그렇지 않았었다는 것을 되새겨야 했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야.... 지금 날 괴롭히는건 그게 아니라.... 한가지 한가지 그에 대해 되떠올릴 때마다 뭔가 무거운 것에 짓눌리는듯 숨쉬기도 괴로울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져 고개를 가로젓던 우혁이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하....이제와서 그에 대해 아는게 무슨 소용이야...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미 이미...... 갑자기 체온이 급속도로 내려가는 듯한 심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세차게 떨던 우혁의 얼굴이 비참함에 당장이라도 울듯하다 순간 그대로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말았다. 이미.... 끝난 사인걸..... 전통을 중시하는 남성적인 장중한 품위와 초현대적 감각이 절묘하게 이루어져 향나무로 정교한 조각을 새겨놓은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공기 중에 한 요소처럼 베어있는 위압감에 절로 주눅들게 하는 이곳은 이재석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비서... 결국 그래봤자 주요업무는 다른 능력 있는 일류대 출신의 남비서들에게 다 빼앗기고 얼굴과 몸매,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무기로 전화업무와 찻잔이나 나르는 접대용에 불과한 팔등신 미녀 두 명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세트를 들고 들어오다가 순간 미소가 굳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프로답게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하나 간신히 허벅지를 가린 미니 스커트 정장을 입고 살얼음판을 걷듯 카페트 위를 조심조심 걷고 있는 두 여비서는 이미 극도의 긴장으로 숨까지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첫째는 내실의 숨막히는 적막감 때문이었고.. 둘째는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회장의 잔뜩 굳은 표정때문이었으며.. 셋째는 그녀들이 찻잔세트를 올려놓고 차를 타야할 유리 테이블 위에 교차시킨 긴 다리를 올려놓은채 가죽쇼파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때문이었다. 어느 누가 감히 일진의 이재석 회장 앞에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겠냐만은 지금 그녀들의 눈앞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테이블 근처에서 멈춰선 여비서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쇼파에 팔짱을 낀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흘끔거리며 쳐다봤지만 한참을 있어도 아예 굳어버린듯 미동조차 할 생각도 없는듯 했다. "됐어. 물러들 가라" 어쩔줄 몰라 서로 눈짓을 하던 여비서들이 평소와 다름없는 그윽한 목소리에 움찔하며 급히 허리를 숙이고는 최대한 신속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니. 너 한번 만나기가 대통령보다 더 힘들구나" 책상 위에 놓인 옥빛의 사각 케이스에서 이회장이 시가를 꺼내자 한쪽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진이 라이터를 꺼내며 몸을 숙여 불을 붙였다. ".....하실 말씀 없으면 가겠습니다"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여느 부모와 다를바없는 이회장이 착찹한 얼굴로 시가를 피며 한숨쉬듯 연기를 내쉬는 모습에서... 돌려진 시선의 끝에 닿은 것은 전신에서 지옥같은 냉기를 뿜어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재원의 창백하게 굳은 옆모습이었다. "이번 주말저녁에 집에서 파티가 있을 예정이란다. 가까이 교분을 나누는 집안끼리 모여서 간단히 식사나 하는 자리니까 네가 꼭...." "....약속 있습니다"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정떨어지는 말투로 딱잘라 대꾸하며 멈췄던 발을 떼놓는 재원의 무례한 행동에도 이회장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지만 피다 말은 시가를 그대로 크리스탈 잿덜이에 짓눌러 끄는 손끝에 억눌린 분노가 베있음을 눈치챈 진은 아찔함에 핑-하고 머릿속이 울려댔다. "오피스텔로 6시까지 차를 보내마"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듯한 일방적인 통고에 천천히 뒤돌아 서는....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에 검은 롱코트를 걸치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더이상 십대의 고등 학생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성에게 자극적이고 섹시한.... 성숙한 남성의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고 냉소적으로 비틀려 올라간 입매와 나른한 눈빛은 나이에 맞지 않게 뇌쇄적인 차가운 매력을 무한대로 표출시키고 있었다. ".....이젠...교양있는 여자나 골라보라 이겁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부인조차 않는 말에 희미하게 조소가 깃들어져 있던 눈빛이 단번에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하며 분노로 냉기가 서렸지만 이회장이 시선을 맞췄을땐 이미 무심하게 가라앉아 다시 베일에 가리듯이 속마음을 감춰버렸다. "......큭...결국...후계자를 낳아줄 씨받이가 필요하다 이거군요" "재원아!!" 나른할 정도로 무심한....투명한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이죽거리는 조소어린 말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그에게 이런식으로 굴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자식이지만 나이답지 않은 저런 모습엔 이회장조차도 한순간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려울 것 없겠죠. 애를 갖게만 하면 되니까" 빈정대는듯한 미소를 입가에 짓는 그 모습에 뭔가를 말하려는듯 떼어진 이회장의 입술이 그대로 다시 닫혀버린 동시에 옆에 서 있던 진의 입은 쩍-하고 벌려지고 말았지만 덧붙여진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맥박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단, 할아버님이 했던 방식으로" "뭐...뭐라고?!!!!" ".....필요한건 대를 이을 후계자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 애를 낳든...그건 전적으로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벼락이 내리꽂혔다 해도 이렇게 극심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 ".....어머니도 하신 일인데 말이 않될 수가 없죠. 평생 처녀로 늙어죽을 자신이 있는 여자라면... 처녀의 몸으로 애를 낳을 자신이 있는 여자라면 아무나 좋습니다" "재원아...너도 이젠 알잖느냐. 그때는 어쩔수 없이..." 시가를 다시 꺼내 피워무는 이회장의 손끝이 수전증 걸린 사람마냥 눈에 띌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네....두분다 원하지도 않았었죠. 더구나 아버지는 의식조차 없었으니.. 오직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신 할아버님께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변명하시겠죠" 지극히 침착한 평상시 어조로 말하는 재원의 눈빛이 잔인함으로 번뜩이며 급격히 타올랐지만 이내 지루하다는 듯한 기색을 비치기 시작했다. "....할아버님이야 워낙 회사밖에 모르셨으니 그렇게 시대에 역행하고 인륜을 무시한 행동을 버젓이 저지르셨겠지만..... 그런 짓을 강요당한 어머니를.... 아버지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또.....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뭘 하셨죠?"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듯 한순간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진 목소리는 이미 평소의 음정이 아니었다. 단 한번도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재원을 본 적이 없었고 단 한번도 이렇게 목소리가 떨려나올 정도로 자신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재원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걸.......해보니까 알겠더군요. 같은 남자로서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랑이란게..... 사람을 어느 정도로 미치게 하는지 알았으니까요" 지극히 조용한 음성은 방금전까지 떨리던 기색은 이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검은 눈동자 위로 한순간 처절한 고통이 스쳐지나가며 씁쓸한 미소가 입술에 드리워졌지만 이내 그 상태 그대로 굳어지며 흘러 나온 것은 거의 이를 가는 듯한 음성이었고 극심한 분노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으로선.... 아버지의 행동 용납 못합니다. 그러기엔.....어머니가 당한 고통이 너무 크니까요" 이미 평소의 모습을 완전히 비껴나간 채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억눌렸던 분노를 있는대로 표출해내고 있는 남자와 그 분노의 대상이면서도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충격으로 창백한 낯빛을 띄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진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곪을대로 곪았던 상처가 결국 이렇게 터지나 싶어 연민어린 한숨을 속으로 내쉬지 않을수 없었다.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자기 감정하나 다루지 못해 여러 사람을 현혹시켜놓고.... 바라봐주지 않는걸 알면서도 그 잘난 사랑때문에 그리워하며 가슴 태우게 만드는... 그런 무책임함...정말 진절머리 납니다" 순간 진은 너무나 쓰디쓴 그 말이 이회장에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재원이 그 자신을 스스로 경멸하며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이란 것을 단번에 직감할수 있었다. 더이상 할말 없다는듯 뒤돌아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쇼크를 이기지 못해 경련을 일으키는 양손을 꽉 틀어쥔 이회장이 재원이 했던 말들을 되씹다가 순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충동적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그 애 때문이냐? 네가 이러는게 그 소년때문이냔 말이다" 그대로 문 앞에서 멈칫하는 모습에 더욱 확신을 얻은듯 삽시간에 표정이 싸늘해진 이회장의 얼굴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잔혹하게 뒤바꼈지만 경직되 있던 어깨선이 느슨하게 풀리며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문을 열기전 내뱉은 예상 밖의 그 조소어린 저음은 이회장 보다도 진에게 더한 충격을 안겨주고 말았다. "저하곤 상관없는 일입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훤칠한 신형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집무실 내부엔 숨통이 조이는 듯한 정적에 휩싸여버렸다. 저하곤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하곤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나 진의 머릿속은 몇초전의 그 나즉한 저음이 내뱉은 말이 던진 충격파로 쉴새없이 메아리치며 고막까지 울려대는 듯한 착각을 받아야 했다. . . . . . 그래서...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작은 갓등만 켜놓은 어둑어둑한 내실에서 깊게 잠든 것도 그렇다고 잠이 깬 것도 아닌 몽환적인 상태로 누워 있는 우혁의 시트에 덮여 있는 몸이 계속해서 비틀렸다. 고작 섹스따위로.......착각하지마. 이재원...... "......으.......아.....냐....." 커다란 쿠션에 기대져 있는 땀으로 젖은 백금빛 머리칼이 부정하듯 좌우로 힘없이 가로 저어지며 갈수록 점점 거칠어지던 숨소리가 헐떡임과도 같이 변하자 가느다란 몸이 흠칫거리며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 못할거 같아?..........어차피 깨끗한 척 할 필요도 없어.... ".....아...니야........그런게.....아니..었..어..." 가늘게 떨리던 속눈썹이 위로 들려질듯이 움직거렸지만 끝내 들어올리지 못한채 애처롭게 파르르 떨리다가 물방울들을 머금으며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러니 내가 네 소유라고 착각하지마... "............아...니야........아니...." 불빛에 음영이 드리워져 더욱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더니 내리깔린 속눈썹 사이로 굴러떨어진 눈물방울이 양쪽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귀밑으로 턱밑으로 줄줄 흘러내려 베고 있는 쿠션을 축축히 적셨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얼어붙어버린 분위기...그 싸늘한 침묵..... 이젠 나와 상관없어.... ".......아니..야...."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착각을 주던 무섭도록 냉혹한 그 눈빛... 이젠 나와 상관없어!! ".......아니야..."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게 고통일 정도로 한계에 다다랐을때 침묵을 끊어버린 잔인할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이젠 나와 상관없어!!!!!! "아니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흠씬 젖어든 얼굴이 비참함에 정신없이 도리질을 치다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토해낸 순간 물기로 젖어든 속눈썹이 번쩍 들리며 빛을 잃고 시커멓게 변해버린 눈동자를 드러냈다. "커헉.....허억.....헉....." 극심한 충격으로 동공이 열려버린 눈동자가 어두컴컴해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에 시선을 박은채 두려움으로 세차게 흔들리다가 차츰 숨이 가라앉자 삽시간에 다시 차오른 물기로 인해 시야를 뿌옇게 가려버렸다. "......흑......윽........아니야.....아니야....." 자신이 뭘하는지도 모르는듯 정신없이 흐느끼며 몸부림치던 우혁이 어느 순간 갑자기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것처럼 몸을 파드득거리며 심하게 떨어대더니 그대로 실신하듯 쿠션 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어지러워.... 왜 이렇게 어지럽지..... 취한것 같아....사방이 움직여..... 하아......더워.....가슴이 갑갑해..... 으응......시원해.....더....더해줘.... 물기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으응.....누구야 넌........ 머리칼 때문에 얼굴이 않보여...보여줘.... 웬일인지 남자의 얼굴을 꼭 봐야한다는 절박감에 눈을 크게 떴지만 더 흐릿해서 분명하지 않았고 다만 머리칼이 유난히 짙검다는 것과 검은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몸이 길고 마른 체격이라는 것만은 알수 있었다. 뭐하는 거야.... 왜 가운을 벗는거야..... 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가? 난 어디 있는 거지? 창백한 피부를 갖고 있는 남자의 손가락이 가운의 허리끈을 푸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남자를 향해 누군가 팔을 들어올리자 순간 남자가 내뻗쳐진 손을 움켜쥐며 그 손등에 키스하는 것을 보던 우혁은 왜 그 모습에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지 영문을 몰라했다. 아....이런.....저 사람은....나잖아.... 그럼 넌 누구야..... 이런거 기억에 없어.....얼굴을 보여줘....누구야.... 전신이 진한 핑크빛으로 곱게 물든 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채 흰 침대시트에 드러 누우며 그에게 몸을 숙여오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향해 손을 내뻗쳐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사람은 분명 우혁 자신이었다. 뭐....뭐야....말도 않돼.... 왜 반항도 않하는 거야.... 더이상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의 몸에 와닿는 남자의 뜨거운 피부와 단단한 육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달콤할정도로 몸을 죄어오며 압박하는 팔과 다리의 탄력적인 근육... 무겁게 전신을 짓누르다 감미로운 고통을 주며 강하게 부딪혀오는 단단한 가슴... 아아..... 하아....뜨거워.....못견디겠어....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주던 악몽은 어느사이에 급속도로 전환되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세계로 우혁을 이끌어 현실과 다를바 없는 감각을 육체에 불러일으키며 마치 가위라도 눌린듯 몸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게 했다. ".......하.....아....." 실제로 누군가가 위에서 짓누르는듯 가슴 답답한 한숨과 함께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은 전신이 급속도로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며 후끈거리는 열기를 자아냈다. 어디한군데 빼놓으면 않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전신을 핥아올리는... 괴로울정도로 관능어린 반응을 이끌어내는 입술과 혀의 감촉... 제발 그만해...못참겠어....... 불에 델것 처럼 뜨거운 혀가 귀와 목덜미를 전전하다가 천천히 쇄골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가슴, 겨드랑이, 옆구리, 허리... ...어느 한 곳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발가락 하나 하나까지도 집요하게 핥고 빨아들이며 입안에 머금고 강하게 흡입했다. "......흣........아....." 다리가 위로 치켜들려지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몸에 인식시키려는듯 너무나 느릿하게 전진해 들어와 타는듯한 고통과 함께 견딜수 없을 정도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행위... ".....아윽............" 눈물로 젖어들어 불빛아래 더욱 색기어린 빛을 띈 채 가빠지는 호흡 사이로 얕게 내뱉어지는 신음소리를 간간이 흘려 내보내는 붉은 입술이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듯 크게 벌려질듯하다 한숨과도 같은 신음성과 함께 다시 다물리며 애태우듯 요염하게 움직거렸다. 때로는 미풍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때로는 폭풍처럼 격하고 거칠게 자신을 밀어넣던 그... 그만해.....그만해.......제발..... "....아읏.........흑..." 뜨거운 숨결만큼이나 주체못할 정도로 뜨거워진 몸을 어쩌지 못해 관능적으로 뒤틀며 시트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이 땀으로 흠씬 젖어들었다. 이미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허물어져 버렸다. 최후의 최후까지 마치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듯이 결코 멈추지 않는... 매순간마다 느껴지는 절박하다 할 정도의 불타는듯한 갈증.... 어두컴컴했던 시야가 다시 뿌옇게 흐려지며 멈췄던 필름을 돌리듯 다시 침대의 정경이 보여졌다. 고통스러운듯 일그러진 얼굴이 쾌락의 눈물로 흠뻑 젖어든채 목덜미에 매달려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격렬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들어올린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놓치지 않으려는듯 세게 조여대고 있었다. 실제로 남자의 허리를 죄어드는듯이 양 다리가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하아......마...맙소사.... 아니야.....저건 내가 아니야...... 난 저런 짓 한적 없어......내가 아니야.... 남자의 스피드와 힘을 따라가지 못해 몇번이나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땀에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지면서도 다시 남자에게 매달려 그의 몸을 팔다리로 칭칭 휘감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어야 했다. 꿈이야....현실이 아냐.... 이런 일 있지도 않았는걸..... 그래.....그냥.....그냥 꿈일 뿐이야....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남자가 격렬하게 밀어붙이다가 허리를 감고 있는 다리가 힘없이 미끄러지자 백옥같이 쭉 뻗은 다리를 그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체위를 바꿔 단번에 밀어 올리며 교묘하게 허리를 움직인 순간.... 귀가 멍멍해졌다... 분명코 방금 전에 들린 것은 찢어질듯 뾰족한 고음의... 자지러지는 듯한 여자의 교성이었다... ".....읏.......하아....하....." 남자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가 따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퍼드득 경련을 일으켰다. 그대로 쿠션 뒤로 부러질듯 제껴져 떨리는 가느다란 목덜미.... 희디흰 목선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자 고개를 숙인 남자가 목덜미에 입술을 밀어 붙여 거칠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탈것처럼 뜨거운 입술.... 차라리 전신을 찢어발기고만 싶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어린 쾌락..... 백금빛 머리칼에 감싸인 창백한 흰 얼굴이 쾌감어린 눈물로 젖어들었고 활처럼 휘어진 등허리가 그대로 꺽일듯 젖혀지자 남자가 가는 허리를 감싸 자신에게 닿을듯 바짝 끌어당기며 다시 격렬하게 역동적으로 파고들었다. "......하.........아윽...." 뱀처럼 남자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다리가 팽팽해지며 더이상 버틸수 없는지 부들부들 떨렸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이 다리에 힘을 주자 단 한번도 들려오지 않던 남자의 신음소리가 악문 입새를 뚫고 밖으로 희미하게 터져나왔지만 이내 벌을 주듯 되받아쳐 숨넘어갈듯한 교성을 토해내게 만들었고 숨쉴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막아버렸다. 하아....하아..... 아니야.....저건 내가 아니야.....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불타듯이 격정적인 키스가 끝난 순간... 입술이 떼어지기가 무섭게 부풀어 올라 핏빛으로 충혈된 입술이 찢어질듯 벌려지며 끊임없이 뭔가를 소리쳐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저건 내가 아니야!!!!!!!! 침대시트를 흥건히 적실 정도로 식은땀에 젖어든 우혁의 몸이 튕겨 오르며 팔다리가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아.... 뭐라는 거야.... ......워...ㄴ.... 뭐라고 외치고 있는 거야... .........원아...... 대체 누굴 부르고 있는 거야.... 막바지를 치달려가는 남자의 검은 머리칼이 쉴새없이 흔들리며 땀방울을 떨궈내고 있었다. 거친 숨을 토해내는 뜨거운 입술이 다시 얼굴 위로 내려왔다. 숨을 내쉬려는듯 붉은 입술이 크게 벌려졌지만 신음조차 흘려내지 못할 정도로 전신을 강타하는 죽음같은 쾌락에 남자의 몸을 가둔채로 활처럼 휘어져버린 가느다란 나신이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켰고 신음성을 내뱉지 못한채 벌려져 고정되버린 입술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것은...... 재원아...... 재원아......... 재원아-!!!!!!!!!!!!!! 호흡조차 정지되버린 입술이 벌려진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휘어져 허공으로 뜬 허리가 털썩 침대시트 위로 내려앉으며 쿠션 뒤로 완전히 젖혀져버린 목덜미가 떨림이 정지되더니 그대로 옆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불빛에 비친 마른 몸은 땀으로 목욕한듯 푹 젖어 얇은 실내복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엉망으로 뒤엉켜버린 백금빛 머리칼은 땀에 젖어 얼굴 여기저기 실처럼 들러붙어 있었지만... 그날 이후 깊이 잠들지 못했던 우혁은 완전히 녹초가 된채로 정말 너무나도 오랜만에... ....달콤할 정도로 깊디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깨어나면 곧 깨져버릴 한순간의 짧은 평화이지만...... -68-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회의실 안은 전면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스크린의 발광으로 내부 사람들이 누군지 간신히 얼굴만 분간해 낼 정도로 어둠에 싸여 있었다. 길게 쭉 뻗은 타원형의 테이블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나 회의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만큼 한기어린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과천과 구미의 센터만으론 실행이 불가능합니까?" 감정이 베있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가 마침내 적막을 깨뜨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스크린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일제히 돌려졌다. 스크린 상에 떠 있는, 세계 여러 지점을 향해 나뭇가지처럼 수많은 선이 갈라져 있는 국내의 출발지점에 가는 지휘봉을 갖다댄 남자가 다른곳보다 유난히 더 어두운듯한 테이블의 상석을 직시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1, 제2 센터만으로도 가능하긴 하지만 완전치는 않습니다. 2개 데이터 센터를 중심으로 국내 33개 통신거점 및 해외 5개 IT (Information Technology)센터, 그리고 182개의 해외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글로벌 IT서비스 체제를 구축한다는 계획은 대덕 정보통신 연구소내에 위치할 대덕 제 3 데이터센터까지 완성된다면 한층 더 완벽한 시스템과 네트워크 서비스가 가능해질거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완공년도가 99년도라고요" 예의 동일한 인물의 끝을 올리지 않는 나즉한 질문에 컴퓨터 전용센터 e-데이터센터의 통합 책임자인 유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2년 후면 축적된 시스템 및 네트웍 운영기술과 우수한 전문인력을 기반으로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 운영환경과 자체 네트워크 인프라와의 복합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21세기의 인터넷 비즈니스 전문기업을 지향하는 SM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3 데이터 센터의 신설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창문들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가 일제히 자동으로 위로 올라가며 회의실 안에 불이 밝혀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승호는 유실장과 보좌관을 대동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조용한 대리석 복도를 지나치는 사장과 간부들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원들은 하나같이 모두다 SM그룹의 사원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류대 출신의 엘리트들이었다. 개중에는 악명높은 사장의 얼굴은 처음 보는...이런 경기불황에도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하반기에 채용되는 행운을 얻은, 아직 대학을 졸업 치도 못한 신입사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2년 후라....딱딱 들어 맞는군. 마치 계획된 것처럼..." 사장이 저렇게 젊다는데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비껴서서 쳐다보고 있는 사원들의 시선을 뒤로한채 혼잣말로 나직히 중얼거리던 승호가 유실장이 문을 연 비서실 안으로 들어서자 업무를 보던 비서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사장님. 동생분이신데요. 안으로 연결시킬까요?" 집무실로 들어가려던 승호는 전화를 받고 있던 한 여비서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으면서 그를 부르자 멈칫하다가 그대로 뒤돌아섰다. 비서에게서 수화기를 건네받아 귀에 대자마자 다짜고짜 터져나온건 있는대로 짜증이 베어 있는 고함소리였다. < 진짜 같이 않갈거야?!! > "어디냐 지금" 칠현의 윽박지름보다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주변의 시장바닥같은 시끌 법적한 잡음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며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하나 그에 대해 흠칫하는 반응을 보인건 수화기의 맞은편 상대가 아니라 비서실 내에 있던 유실장을 포함한 남녀비서 4명, 이렇게 5명이었다. < 의정부 역 > "아직도 거기밖에 못갔니?" < 사고 나는 바람에 차가 꽉 밀렸어. 그래서 그냥 여기서 버스타고 가려고. 에릭형도 아마 늦게 들어갈거야 > "혼자 갈수 있겠어?" < 내가 바본줄 알아?! > 손을 내밀어 유실장이 들고 있던 계획서를 받아들고는 서류를 넘겨보던 승호가 대번에 그런 말이 나올줄 짐작했다는듯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입술 끝을 올렸다. "전화는 해봤니?" < 계속 않받는데? 대체 이 추운데 어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지 몰라 > "겨울 좋아하는거 알잖아" < 쳇. 감기나 않걸리고 그딴 소리 하라지 > 이렇게 속눈썹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사장의 모습과 목소리를 접해 본 적이 드문지라 여비서 두명이 한숨어린 시선으로 승호를 주시했지만 흘러 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사장의 관심은 매혹적인 미모의 여비서들이 아니라 손에든 서류에 더 있는듯 했다. "언제 올라올거니" < 가봐야 알지! 그 고집불통이 내 말 들을거 같애?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 "나보다는 네가 얘기하는게 더 나을거다" < 으-- 일은 형이 다 벌려놓고 어째서 내가 뒤치닥꺼리를 해야해? 그거 울고불고 질질 짜는거 보기 싫단 말야! > 눈으로는 서류내용에, 귀로는 전화 내용에 집중하며 적절히 세분화시켜놨던 두뇌가 한순간 작동이 멈추더니 이내 사이렌같은 경보음을 발했다. "...왜 미리부터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 뭐? > 신경이 가닥 가닥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신경은 말 하나하나에도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그대로 넘어가지질 않는다. < 형? > 않그래도 회의 시작때부터 심기가 편치 않아 보였던 사장의 차가운 얼굴이 이젠 보고 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지자 비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실장까지도 바늘방석에 앉은 것마냥 이 자리에 있기가 극히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 형 듣고 있어? > "...이만 끊자. 봐서 나중에 시간 내 볼테니까" 뭐라 불평의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칠현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승호가 집무실로 향하자 문이 닫히기도 전에 등뒤로 비서들의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히 피부로 느껴졌다. '...완전히 괴물취급이군'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그런 것들이 신경쓰이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죽의자에 기대앉아 얇은 금빛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내 피워 무는 단순한 동작에는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피곤함이 짙게 베어있었다. 서류가방에서 꺼낸 CD를 컴퓨터 CD롬에 집어 넣던 유실장이 그런 승호의 안색을 눈여겨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 근래 댁에도 않들어가시고 거의 회사에만 계신다고 하던데... K&G-Project때문에 너무 무리하시는거 아닌가 걱정입니다" 유실장은 장씨가문의 친인척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SM그룹 내에서도 처음부터 친사장파였던 사람으로 어린나이의 승호가 이름뿐인 사장이 아니라 회사의 전권을 차지하는 실권자가 되기까지 많은 협력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예전같았다면 전혀 달갑지 않았을테지만 어린 사장에 대한 연장자로서의 염려와 안타까움이 베인 관심이 이렇게 새삼스레 가슴에 와닿는건 그가 꽤 많이 지쳐있다는 증거라는걸 승호는 자각치 못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을 써야하니까 어쩔수 없지요" "언제 떠나십니까?" "새해가 되기 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빨리...." "제가 없더라도 이곳 일은 유실장님이 계속 진행해 주십시요" "염려 마십시요. 그런데...언제쯤 돌아오실 계획인지.." 피고 있던 담배를 잿덜이에 비벼끈 승호가 그 질문엔 대답치 않고 손짓을 하자 뭐라 더 말하려던 유실장은 이내 포기한듯 입을 다물고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실행키와 연속으로 요구하는 암호 몇개를 집어 넣자 모니터 화면에 바로 뜬 것은 회의실에서 중견간부들이 보았던 자료화면보다 더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세계 전도였다. Europe Center, Asia IT Center, America Office, China IT Center, Tokyo Office까지...화면에 한눈에 들어온 World-Wide Branch office들은 21세기에 SM그룹이 Global Company로 거듭 성장하게될 승호의 야심찬 계획이자..... 한국 실업인들과 컴퓨터 전문인력들에겐 불모지나 다름없는 실리콘밸리에 일차로 정착하게 될 타 소프트웨어 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프로젝트였다. 국내 소프트웨어 수출의 전진기지 역할 수행과 해외 진출 기반 구축 마련, 중소기업의 해외 시장과 기술 정보 획득 지원을 위한 정통부의 S/W 산업 육성계획이 국내 유수의 대기업체들의 계획과 맞물려 이뤄진 것이 바로 K&G-Project였다. 미 IBI와 해외소프트웨어 지원센터의 설립추진 관련 협약체결이 이뤄짐에 따라 실리콘밸리의 캐피털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샌호제이(San Jose) 시에 KSI(Korean Software Incubator)가 설립되는 것이 Project의 시작이었다. 사전에 미리 그 책임자로 내정된 SM그룹의 안승호 사장이 막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를 결국 맡은 것은 회사차원에서도 계획의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도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몇년이 걸릴지도 모를 긴 여정을 떠나려는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아니 지금 눈앞에서 자신에게 열심히 데이터 분석을 해주고 있는 유실장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충분히 짐작코도 남아 씁쓸한 미소를 짓던 승호의 얼굴이 유실장 위로 장성혁 회장의 모습을 떠올린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대부님... 결국 이런 것조차도 전 저를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건 이따위 사업계획이 아니란 말입니다... 회사가 어떻게 되든.....K&G-Project가 잘되든 망하든.... 지금 제겐 다 필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부님? 대부님이 절 믿고 넘겨주신 권리를 이용해 제가 얼마나 비열한 짓을 하려고 하는지를.... 계곡 입구로 들어선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겨울 바람의 한기는 뼛속까지 얼릴듯 차디찼고 명성산 귀퉁이에 걸린 석양은 귀곡성같은 바람소리로 인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하나 살을 에일듯이 매섭게 불어닥치는 한풍(寒風)이 병들고 상심한 마음까지 얼리지는 못하는듯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곡들을 들으며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때마침 워크맨의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Jim Chappell의 Lullaby...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내는 피아노 음과 Jeanette의 감미로운 허밍에 평소였다면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찼을 테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남자라는걸 스스로에게 일부러 상기시키지 않으면 않될만큼 이렇게 목이 메어오는 것은...이렇게 가슴이 저릿해지는 것은..... 추위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고독(孤獨)때문이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어 서서히 눈물로 젖어드는 가파른 볼을 깍는 찬바람은 한파(寒波)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과..... .....이젠 두번다시 돌아보지 않을듯한 연인의 무정한 마음이었다. 쇠가 맞부딪히며 요란스럽게 철커덩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있던 검은 도메르망이 주인을 반기는 양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앞다리를 치켜드는 모습에 힘없는 손짓으로 몇차례 쓰다듬어 주며 나갈때 목에 매놨던 쇠줄을 풀어주려했지만 손이 곱아 몇번이나 헛손질을 해야했다. 추위에 고독에 번민에 지쳐 쉬고만 싶은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여느때처럼 과하게 달려들지도 짖지도 않는 개가 고마웠다. 무겁게 질질 끌다시피했던 다리가 정신없이 후들거렸지만 불을 켜놓고 나간 집안의 훈기는 마음까지 녹일듯이 훈훈했고 계단도..문갑도... 페치카 앞에 놓인 흔들 의자도.....낡고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오크의 재질이 그 세월만큼이나 정겹고 편안했다.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엔 없는듯 했다. 마주친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길에서 우혁은 몇년만에 찾아 왔음에도 아직도 꺼지지 않고 떠도는 그에 대한 온갖 소문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럴거라 짐작했었기에 웬만하면 마을로 내려가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어쩔수 없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는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지금... 우혁은 이대로 쓰러져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빠져들고만 싶을 뿐이었다. 나무 문에 등을 기대서며 자각한 어깨의 타는듯한 통증은 반쯤 가사상태에 빠져있던 의식을 깨워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외 누군가가 이 공간에 더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희미한 음식냄새...싱크대로 흘러내리는 낮은 물소리.. 포천댁이 -양부가 생전에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또 일부러 식사를 챙겨주러 왔나 싶어 민망해진 우혁이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줘 황급히 목재 마루를 지나쳐 부엌 쪽으로 향했다. "아줌마...제가 오시지 말라고..." 얼어붙은 입근육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조금 어눌하고 느릿한 발음으로 말하며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와 도마에 대고 칼로 뭔가를 찧는듯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가스렌지 불 위에 올려진 냄비 속에서 매콤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어 대는 찌개에다 마늘 찧은 것을 집어넣어 휘젓고는 국물을 뜬 국자를 막 입에 갖다대며 우혁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시골틱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펑퍼짐한 몸매를 지닌 50대의 중년여인이 아니었다. "앗 뜨거---!!" ".....혀.." "역시, 미나리랑 콩나물이 않들어가니까 국물 맛이 시원하지가 않아. 해물탕거리가 있으면 뭐하냐? 냉장고에 파하고 무밖에 없는데" 뜨거운 국물에 디었는지 말하는 도중 계속 안면을 찌푸리며 혀를 살짝 빼물던 칠현이 놀람으로 혀가 굳어버린 우혁을 흘끗 돌아보았다. "이 추운데 제정신이야? 얼씨구, 콧물까지 훌쩍대고.. 잘한다 잘해. 꼴을 보니까 마을에 내려갔었군. 거긴 뭐하러 내려가? 무슨 좋은 꼴 볼거라고. 그건 또 뭐야?" 추위때문만은 아닌, 운게 분명한 붉그레한 눈자위를 보고서 왜그런지 짐작한 칠현이 달래주기는 커녕 평소때처럼 있는대로 면박을 주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우혁의 손에서 봉지를 빼앗듯이 낚아채었다. 손에 든 봉지로 관심을 돌린 칠현이 그 속에 든 종이 봉투를 굳이 펼쳐볼 필요도 없이 달작지근한 탄내와 뜨뜻하게 만져지는 감만으로 뭔지 알아채고는 으이그으---하고 한심해하다 이내 혀를 찼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많이도 샀네. 이번엔 또 누구야. 늙은 할아버지? 아니면 알바하는 불.쌍.한 중고생들?" 족히 오천원어치 이상은 샀는지 꽤나 묵직한 중량의 군고구마가 담긴 뜨끈뜨끈한 비닐봉지를 뭉개지거나 말거나 식탁 위로 툭 내던진 칠현이 속터진다는 눈빛을 우혁에게 던졌다. "않봐도 비디오다. 어휴... 나 없었으면 미련스럽게 이거 억지로 먹고 또 체하려고 했지?" 조금만 불쌍하다고 느끼면 남한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어김없이 동정심을 발휘하는 그놈의 바보같은 성격은 대체 언제 고치냐..... 영락없이 딱 그런 의미의 눈빛에 우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하나 편안한 옷 위에다 검은 바탕에 흰 주사위가 무수히 많이 프린트된... 바둑이를 연상케하는 앞치마를 걸치고 국자를 들고 있는 모습은 우혁을 말 몇마디 만으로도 주눅들게 만들던 평소 모습보다는 그 위력을 많이 감소시키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뭐하다 이제 온거야? 아줌마네 가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냉장고에 포천댁이 만들어놓고간 반찬이란 반찬은 다 꺼내놓았는지 한상 가득 차려진 식탁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하던 칠현이 별 생각없이 내뱉은 그 말은 분명 의도된건 아니었지만 우혁의 심장에 꽤나 강한 타격을 가하고 말았다. 떨어질듯 말듯하면서도 질기게 않떨어지는 감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열로 계속 비칠거리면서도 굳이 이 추운데 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오늘밤 칠현이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 여기 온게 6시쯤이었는데 지금 7시가 넘었잖아. 저녁때는 됐는데 아줌마도 않오시고....조금만 늦게 왔으면 찾으러 가려고 했어" "........." "아줌마 어디 가셨어?" "....아..아니..." 긴장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갈수록 불규칙하게 뛰더니 칠현의 미간이 의아함으로 찌푸려지는걸 보고선 아예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박동이 격해졌다. "그런데 왜 않오시는 거야? 밥도 없고. 방금 전에 전화 걸어봤는데 않받아서 여기 오는 중인가 했어" 포천댁이 집에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면 칠현에게 사흘 전부터 자신이 이젠 오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했을 것임을, 칠현에게 당장 그 일을 추궁받았을 것임을 깨닫는 순간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운좋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당분간 혼자만 있고 싶어 별생각없이 내린 결정이 자신을 서울로 도로 끌려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순간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의 존재감이 우혁을 무겁게 짓눌렀다. "...많이 편찮으셔서 못오시게 했거든" 눈은 칠현에게 고정한채로 대충 얼버무리듯 말하고는 손을 약간 볼록하게 나온 호주머니로 가져가 주머니 속의 약병을 손으로 잡고는 슬며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올 줄 몰랐는데 어떻게 온거야?" "의정부 역에서 버스 타고 왔어" "미리 연락해줬으면 나가지 않았잖아" "했었어. 니가 않받았을뿐이지. 뭐해? 옷벗고 거기 앉아. 밥먹어야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던 우혁이 다시 옆 의자를 빼내 코트를 반 접어 올려놓고는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자리에 앉는걸 내내 바라보고 있던 칠현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새파랗게 얼어붙은...밖에 천지로 널린 마른 나무가지처럼 바싹 말라 애처롭기 짝이 없는 얼굴과 폴라니트 위로 뼈가 앙상히 드러난 어깨에서 파랗게 질린채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에 시선이 멈춘 칠현은 팔푼이같은 머저리라고 스스로를 욕하며 팔팔 끓여 식히고 있던 보리차를 머그컵에 따라 식탁에 놔주었다. "우선 이거나 마셔. 아니면 코코아 타줄까?" "아니....화아, 따뜻하다. ....시험은 잘 봤어?" "뭐 대충. 이것저것 할일이 좀 있어서 바로 오지 못했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양손으로 컵을 감싸 뜨끈한 훈기에 손을 녹이며 이제야 살것같다는 표정을 짓던 우혁이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물을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조심스럽게 마시자 그제야 칠현이 탐색어린 시선으로 우혁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잠을 제대로 못자는지 옅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눈가를 배회하다가 뼈굵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는 손목과 툭 튀어나온 푸른 정맥을 보며 칠현은 입술 안쪽을 잘근 씹어댔다. 잠시 머그컵을 떼어내며 후---하고 아주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컵 모서리를 무는 입술 빛깔이 붉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들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한참만에야 비워진 컵에 다시 물을 따라주다가 잔기침을 하며 코끝이 빨개진채로 연신 훌쩍거리자 감기가 꽤 오래가는것 같아 눈썹을 찡그렸다. "거봐. 이 추운데 쓸데없이 마을엔 왜 내려가? 약은 제대로 먹고 있어?" ".....응.." "대답이 왜 시원찮어? 하긴 뭘 바라겠냐 너한테. 겨울 내내 감기 달고 살래?" 방금 지은 밥과 해물탕을 놓은 다음 식탁 한켠에 물주전자와 함께 놓여 있는 약봉지를 들어 일주일치 정도 남아 있는, 한약 냄새가 솔솔 풍기는 약을 살펴 보며 비아냥거리듯 말하다가 앞치마를 벗고는 우혁 앞에 마주 앉았다. "먹어. 너 해물탕 좋아하잖아. 그리고 내일 시내 병원에 가자" "칠현아..저기 있잖아.."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는 손에 아예 숟가락까지 쥐어주던 칠현은 묻는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흐리는 우혁을 보고는 표정만 보고도 뭘 묻고 싶어하는지 알기에 한숨쉬듯 낮게 중얼거렸다. "형은 잘 있으니까 우선 밥부터 먹어. 먹고나서 얘기해. 저녁먹고 약먹고 목욕한 다음" 입안이 소태같이 깔깔해 그다지 식욕이 땡기진 않았지만 먼저 수저를 든 칠현은 빈약한 재료로 꽤나 먹음직스럽게 끓인 해물탕을 한입 맛보고는 우혁 앞으로 더 밀어놓고 한숟갈 떠서 후하고 불어 식히다 조심스럽게 입에 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연신 와아- 맛있다라고 감탄사를 발하는 우혁의 모습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짓던 칠현은 그럼 많이 먹어..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 그까지 식욕이 왕성하게 생길 정도로 잘 먹는 모습을 보자 그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른건 한 사나흘은 밥 구경도 못한 애같다는 생각이었다. 매일같이 젓가락으로 밥알 갯수를 세가며 그렇게 먹으라 먹으라 잔소리를 해대도 깨짝거리며 먹는둥 마는둥 해서 같이 먹는 사람 식욕까지 없애곤 하던 그 우혁이... 랩핑해 놓은 접시의 랩을 일일이 벗겨내고는 평소엔 잘 먹지 않는 반찬들까지도 젓가락을 갖다대고 있었다. "너 되게 잘먹는다?" 해물탕에서 커다란 조개를 꺼내 한손으론 껍질을 잡고 다른 한손에는 쥐고 있던 젓가락으로 살을 막 떼내려 하던 우혁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더니 변명하듯 낮게 웅얼거렸다. "어--사실 좀 배고팠거든" 잔소리 않해도 편식하지 않고 알아서 골고루 잘 먹는 모습에 평소라면 꽤 흐뭇한 심정이 되었어야 할 칠현이지만 지금은 의심기 가득한 눈으로 머리부터 식탁에 가려진 가슴 밑까지 한차례 슥 훑어보았다. "너... 그동안 혼자 있다고 밥도 거의 않먹었지" "..아냐. ...않먹기는 왜 않먹어" 느릿느릿 입안으로 밥과 함께 집어넣고 오물거리며 먹다가 조용한 기색에 슬쩍 눈을 들어 맞은편을 보던 우혁은 금방 티날 거짓말은 왜하냐는 듯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삼킨게 가로 넘어가 캑캑대며 급히 물을 마시고도 얼굴이 시뻘개 지도록 한참동안 기침을 해야했다. "아줌마가 반찬만 만들어 놓고 밥 먹으라고 챙겨주지도 않았어?" "아냐. 아줌마 아프다고 했잖아. 몇일 전에 나한테 감기 옮는 바람에 지금 몸져 누우셨단 말야. 그래서 내가 오시지 말라고 말렸어. 아줌마 잘못아냐" 괜한 사람에게 불똥이 튈까봐 얼른 포천댁을 변호하고 나서는 우혁에게 역력히 화난 기미를 보이며 해물탕의 뜨거운 김에 뿌얘진 안경을 벗어든 칠현이 눈이 잘 않보이자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다가 웬일인지 자신을 봤을때부터 계속 좌불안석인듯한 우혁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그대로 손을 뻗어 얼굴에 갖다대었다. "...현아?" 화난 사람마냥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듯 슬쩍 만지는 행동에 놀란 우혁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저도 모르게 뒤로 빠지려하자 칠현이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는 얼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아야-- 왜그래, 현아. 놔아. 아프단 말야" 그리 세게 잡지 않았는데도 아픈듯 찌푸려진 눈을 꿰뚫어버릴듯이 쏘아보는 검은 눈동자에 어려있는 기운은 명백한 분노였다. 제기랄... 알겠어 장우혁? 알겠냐고... 형을 점점 두려워하는 네가 안쓰러워 잘해주고 싶다가도.. 이따위 사소한 일 하나가지고도 뒤집어져버리는...이 빌어먹을 마음을. 하나 급격히 치솟았던만큼 사그라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해가 바뀔수록...이런 감정을 다스리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손가락을 떼내자마자 꽤나 아픈지 뺨을 부비며 갑자기 또 왜그러는지 모르겠다는듯 울상을 짓는 우혁의 입술 근처에 난 두개의 붉그스름한 자국에서 시선을 돌린 칠현이 최대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뭐야 너. 너무 말랐잖아. 손에 만져지는게 뼈밖에 없어. 피부도 꺼칠하고. 혼자 잘 있을수 있다면서 고작 이꼴이나 보여주려고 여기 있겠다는 거야?" "아냐!! 요즘 잠을 설쳐서..." 짙은 검은 눈썹이 단번에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미처 자각키도 전에 무심코 내뱉어버린 말에 우혁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잠을 설치다니?" "아냐. 그냥....요몇일 잠을 좀 늦게 자고 그랬거든" 속마음까지 그대로 들여다 볼것처럼 날카롭게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애써 피하려 했지만 화끈거리며 조금씩 붉어지는 목덜미만은 어떻게도 숨길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실수로라도 들킨다면... 그리고 그사람이 바로 승호나 칠현..둘중 하나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더 나았다. 하룻밤만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게되면 어느 누구라도 눈치챌 것이다. 벌써 열흘째.... 밤마다 이상한 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꿈에 항상 나타나는 몽마의 정체가... 순간 뜨거운걸 삼키기라도 한듯 속이 확 끓어오르고 말았다. 달아올라 분명 붉게 상기되었을 얼굴이....저렇게 의문스런 눈빛으로 계속 시선을 떼지 않는 칠현에게 어떻게 비칠지 몰라 혀끝을 세게 깨물며 열을 삭히려다가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밥먹는데만 온 정신을 쏟으려 했다. 뭔가를 계속 말하려는듯하던 칠현이 결국 체념비슷한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들자 따갑던 시선의 부재에, 긴장으로 바짝 곤두서 있던 신경이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하나 우혁은 때때로 그런 그를 염려와 갈등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칠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숨기고 있는 일따위와는 비교도 않될만큼 큰 충격을 안겨줄 일을 칠현이 갖고 왔다는 것도. 참나무로 꾸민 벽장식과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대나무숲, 은은한 조명.. 힐튼 호텔의 정통 영국식 바인 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내부를 감미롭게 휘도는 조지 윈스턴의 서정적이고 애잔한 피아노 연주곡은 밤이 깊어갈수록, 추위 만큼이나 모진 세파에 시달려 삭막해진 사람들의 심성을 달래주고 있었다. 하나 바앞에 몇몇 이처럼 홀로 앉아 술잔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승호의 얼굴에 드리워진....어두운 조명으로 인한 음영과는 별무관한 암울한 기운은 그런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잔 더.." "사장님. 벌써 2잔이나 드셨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바텐더가 정중하게 그만하라는 뜻을 내비치다가 지독하게 가라 앉은 그의 분위기가 독한 술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것 같아 더이상 아무말 않고 음용하고 Keeping Box에 보관해 놓았던 Absolut bottle을 다시 꺼내었다. 대리석 바에 내려진 글라스 속의 얼음 알갱이들이 유리벽과 맞부딪혀 발하는 청명한 음에 고개를 든 승호는 어두운 조명 아래 보드카 잔 위로 흐릿하게 맺혀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려냈다. 저 모습 어디가 냉혈한이란 말인가... 버러지보다 못한 저 초라한 모습 어디가 그렇게 두려워서... 수면 부족으로 핏발선 흐리멍텅한 눈동자와 헤쓱하고 꺼칠한 얼굴, 헤집어 헝클어진 머리칼, 풀려진 셔츠 깃 사이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 구겨진 정장....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병이되어 성공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샐러리맨이 점차 이상과 어긋난 현실에 치여 지쳐가며 직장 상사에게 얻어터진 울화를 하룻밤의 술로 달래고 있는듯한.... 이렇게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빈틈투성이인 모습을 적들이 봤다면 먹이를 본 들개 떼처럼 달려들어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다. 하나 승호의 얼굴에 떠오른건 염세적인..허무하고 지친듯한 미소뿐이었다. 하.....그따위가 이제 무슨 소용이야. 다 필요없어...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날 물어뜯고 싶다면 달려들어 물어뜯어라.. 기회를 줬을때 쓰러뜨려... 두번 다시 재생할 수 없도록.. 바에 팔을 기대어 상체를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이대로 쓰러져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승호는 육체적으로..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만큼 심하게 지쳐 있었다. 내일이면 또 같은 날의 반복이겠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뭘 위해서...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나자신을 억누르고 죽이면서 살아야 하는거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술의 강렬한 감촉을 느끼기가 무섭게 빈 속에 들이킨 보드카가 흡사 염산이라도 된 것처럼 격렬한 통증을 일으키더니 명치부근이 꽉 막히며 유황 불에 타들어가듯 속이 활활 불타올랐다. 후훗...알고 있잖아. 안승호... 이젠 두번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란걸... 다시 채워진 보드카 잔을 뚫어질듯이 노려보던 승호가 격해지는 감정을 자제하려 애쓰며 잔을 으스러뜨릴듯이 꽉 움켜쥐다가 이내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스트레이트로 한번에 들이켰다. 지독한 고통이었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는건 아마 이럴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 독주를 마시고 있지만 취하지조차 않는 얼음같은 정신은 내장을 쥐어짜고 산채로 불타는듯한 고통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하나 지금 승호의 속을 계속해서 불태우는건 보드카가 아니었다. 혁아... 난 말야... 후회하고 있단다..... 죽고싶을만큼 후회하고 있어... 그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었어... 널 형으로서 지켜줘야 했는데.... 언제까지나 형제로 남아 있어야 했는데.... 내가 내 손으로 널 꺽어버린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였다는걸.... 어떻게든 널 차지하고 싶다는..... 그 지옥같은 갈증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다는... 더이상 괴롭고 싶지 않다는 지독한 에고이즘이... 오랜기간 버텨온 정신을 이겨버렸기 때문이야... 그 더러운 욕망이....그 추악한 이기심이..... 그리고.....내가 결정한 일도........ 얼음만 남은 빈 글라스에 다시 채워지는 보드카를 응시하는 승호의 눈빛이 급속도로 뿌옇게 흐려졌다. 무색...무미...무취... 물반, 에틸 알콜 반의 독주, 보드카의 특성은 purity이다. 승호가 술중에서 특히 보드카를 즐기는건 그 순수한 이미지때문이었다. 하나 보드카의 순수함 뒤에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 음산한 북구의 겨울, 제정신으로는 눈이 감기지 않는 극지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잠들기 전 마시는 보드카는 한 두 잔만으로도 몸 속에서부터 후끈 달아 오르게 만드는 독주로 추운 지방에선 기호품이 아닌 살기 위한 생필품이었다. 승호에겐 우혁이 그랬다. 순수한 이미지....그의 냉혈한 심장을 달아오르게 만들수 있는... 그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존재.. 더이상 자신을 깨끗치 못하다고, 더럽다고 여겨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비하하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 달팽이마냥 껍질 속에 틀어박혀 살지만... 그 무엇으로도 오염시킬수 없는...더욱더 빛을 발하는 순수한 결정체... 하나 그 순수함 뒤에 숨겨진 모습은 모든 남자들의 꿈이었다. 연인으로서의 우혁이 얼마나 잔인한지 승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태어린 모습으로 몸을 바짝 달아오르게 만들며 속이 시커멓게 썩을 정도로 극악한 고통을 주는....침대에서만큼은 요부와도 같은 모습.... 감히 더럽힐 마음조차 가질수 없게 만드는 고결하고 청백한 순수함.... 짓밟고 더럽혀서라도 환희와 쾌락, 고통으로 흐느끼며 신음하게 만들어 그 모습을 보고 싶게 만드는... 죄악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모습... 어느 누구든 그 이중성을 깨닫는다면.... 두번다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마약같은 존재....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 맹세를 어기고 금기를 깬 이후에도... 각혈을 하고 정신까지 잃을 정도로 마음의 병이 깊게 들었으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살고 싶었던 이유가... 더이상은 통제못할 에고이즘이 한꺼번에 폭팔해버린 이유가... 미칠듯한 소유욕에 스스로 공포까지 느껴야 했던 이유가... 그 네 마리의 짐승을 쉽게 죽이지 않고 죽을때까지 나올수 없는 정신병원에 처넣어 버렸던 이유가... 그 이중적인 모습을....결코 보아선 않될 모습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이 한명 더 있다는 것을 승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재원... 일진그룹 이재석 회장의 외동아들....일진의 차기 회장감... 초등학교부터 중1 때까지의 성적은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 납치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년기때부터 호신술로 배운 검도와 가라데, 합기도 등을 익혔고 특히 격투기와 격파에 능한 무술 유단자. 순종적이고 조용한....나이답지 않은 차분한 성격으로 기록되 있음. 중2 때부터 성적이 급강하. 참석하는 파티마다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 교내폭력써클의 실세이자 폭주족 OUTRYDER의 서브리더. 여자관계 문란. 반항적이고 충동적인데다 다분히 공격적인 성향. 고1때부터 현재까지... 무난한 성적과 무던한 성격의 평범한 고등학생. 여자관계 자료 無. 취미는 스릴과 스피드를 즐기는 것. 자주 가는 곳은 압구정동 Prestige Club Sybaris와 Stockers. 테크노 바 Stockers는 친구이자 OUTRYDER의 리더인 이민우의 소유임. 특이점.. 교내 폭력써클과의 시비에 휘말려 다리가 부러진 검도부장 유건상 대신 10월 26일 열린 96'전국 중고교 검도대회에 출전, 고등부 개인전 우승. 8월부터 11월 초까지 외교관 넘버를 단 슈퍼카 페라리를 몰고 일곱차례나 부산과 서울을 왕복질주한 기록이 있음. 11월 말부터 12월 첫주까지..세번 연속으로 이재석 회장의 파티에 불참해 부자간의 사이가 극도로 않좋아진 것으로 사료됨. 증거. 이재석 회장의 압력으로 오피스텔 폐쇄. 현재 거주하는 곳은 이회장의 앙숙이자 처남인 온라인 증권사 키움닷컴의 사장 민주하에서 이재원으로 명의이전된 도곡동 Tour Fellice의 펜트하우스. 그동안 에릭이 알아낸 데이터만 보자면 이재원이란 녀석은 그의 부친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치한 행각을 벌인 전적을 가진 삐뚫어진 성격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나 승호는 이런 유형의 인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원하기만 하면 별 노력없이도 이뤄내는 다재다능한 인간형. 분명 이재원은 승호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같은 또래와는 비교도 않될 정도로 무서운 절제력과 자기 통제력이 강했고 한번 결심하면 끝장을 내버리는 성격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완벽한 신체적 조건에다 두뇌까지 우수했다. 2,3년 후면 어떻게 변할지 감도 못잡을 정도로...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가 될 것이란건 불을 보듯 훤했다. 하나 본능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살인적인 적의에도 불구하고 승호는 적으로 간주한 그를 해칠 수도 없었다.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스런 마음은 미칠듯한 질투심에 불타는 연인으로서의 안승호이나... 건드릴 수조차 없는 마음은 몇년 동안 웃음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동생이 처음으로 뭔가를 갖고 싶어했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형으로서의 안승호이기 때문이다. 이런 극과 극의 상반된 심리상태는 언젠가는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바 위로 길게 내려와 있는 갓을 씌운 등의 어둑어둑한 조명이 고개를 숙인 얼굴 위로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더욱더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앱솔루트 보드카를 단번에 들이킨 승호가 속을 화르륵 태워버리는 독주의 지독한 화기에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후회한다 해도 결코 되돌릴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선택권을 줄 아랑따윈 더이상 남아 있지도 않았다. 미치지 않고 별장으로 보내준 것만으로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다. 별장에 혼자 있도록 내버려둔 그동안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안다면 자신을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원은 갖지 못한 시한부적인 권리를 이용해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끔 극한까지 몰아붙여버린 이 결정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지를, 얼마나 우혁을 괴롭힐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1999년... 그때까지 자신은 우혁의 후견인이었다. 그의 양부인 장성혁이 안승호에게 준 법적권리가 유효한한은.... 장우혁은 안승호의 결정에 따라야할 의무가 있다. 수만번도 더 포기하고자해도 어찌할수 없는 우혁에 대한 미칠듯한 사랑과 갈망... 이재원에 대한 증오와....사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허우적대는 자신에 대한 비참한 자괴감과 경멸감에 괴로워하던 승호는 당장이라도 터져버릴듯한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언제부턴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시선도 깨닫지 못한채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정신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다시금 독한 술을 들이 퍼부었다. "말할 기운 없으니까 빨리 문 열어" 이젠 만성이 될때도 되었건만 같은 남자끼리 이런 일로 매번 실랑이를 벌여야한다는데에 정말 심신이 지칠 정도였다. 버스에 시달릴대로 시달리고 오자마자 부엌일까지 하는 바람에 쉴틈도 없었던 칠현은 목고개조차 가눌 힘도 없을만큼 졸음이 밀려들어 이마를 문에 갖다댔다. "장우혀억... 나 졸리다고오. 너 나올때까지 언제 기다렸다 씻어.." 말 그대로 정말 졸린 기운이 다분한 음성이었다. 열릴 기미도 않보이는 안의 동정에 목욕이고 얘기고 간에 그냥 자버릴까 고민하던 칠현은 한참 만에야 찰칵하고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에 붙였던 눈을 힘겹게 떼냈다. 빼꼼히 열리는 문과 함께 첨벙-하고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욕조 안으로 뛰쳐들어간게 분명했다. "정말 징하다. 너 그래갖고 평생 온천이나 사우나한번 가겠냐?" 맨몸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은 칠현이 한증막처럼 후덥근하고 희뿌연 수증기로 가득찬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며 한껏 빈정댔지만 말의 반이 하품섞인 말투라 그가 들어도 별 효력이 없었다. 온천수의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네모난 통모양의 백단목 욕조에 팔로 무릎을 감싼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혁을 잠시 내려다 보다가 몸에 칠한 비누거품을 샤워기로 씻어내린 칠현이 욕조 안에 한쪽 다리를 집어넣자 수그려있던 어깨가 흠칫 떨리는게 시야에 들어왔다. 젖어서 색이 더 짙어진 백금발이 실처럼 달라붙어 있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입술의 붉음, 목에서 유려하게 이어지는 어깨와 쇄골, 팔과 무릎으로 몸을 최대한 가려놓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였지만 별소용도 없다는걸 아는지나 모르겠다. 승호였다면 -이런 행동을 할 주변머리도 없는 인간이지 그 인간은..하고 칠현은 생각했다- 아예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을거라는걸 잘 알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너 피곤하게 자꾸 이럴래?" "......." "이 넓은 욕조에서 사내새끼끼리 뭐하는 짓이야? 나 안경 않써서 너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니까 다리 뻗어. 어?" 발끝으로 우혁의 무릎을 툭툭 치며 피곤으로 뻣뻣한 목을 주무르던 칠현은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을 겉으로 표현해주는 맞은편의 앙증맞게 꼼지락거리는 열개의 발가락들이 보이자 아예 몸을 길게 쭉 뻗어 버렸다. 우혁의 몸을 벌린 종아리 사이에 가둔 꼴이 된데다 아무리 욕조가 넓다해도 접촉이 되지 않을수 없었지만 칠현은 그에 대한 우혁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듯 욕조 뒤에 팔을 걸치고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가장 편안하고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길 자세를 취했다. "아~~시워어언하다아.." 않그래도 졸렸는데 뜨거운 물속에 몸을 눕히니 근육이 릴랙스해지며 나른하다 못해 노곤해지자 나오는 목소리까지 길게 늘어졌다. 천장과 사면 벽, 바닥 그리고 욕조까지 백단목으로 짜맞춰 뜨거운 온천수에 나무내음이 베어들어 욕실 안에 가득 퍼진 향긋한 백단향과 우혁의 젖은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스트로베리 향에 취한듯 점점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천근을 매단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지자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던 칠현이 어느결에 잠들어 버렸는지 깜빡 졸다가 깬 것은 욕조 안의 물이 흔들리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기척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앉았다 갑자기 일어나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대며 벽에 기대서는 나신이 흐릿한 시야로 들어오자 계속해서 눈꺼풀에 들러붙던 수마(睡魔)가 삽시간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오른쪽 벽으로 약간 휘어진채 숙여져 있는 목덜미의 우아한 선과 가닥가닥 목뒤에 달라붙어 있는 백금발을 본 순간 칠현의 눈썹이 급격히 모아졌다. 벽을 짚느라 한쪽으로 웅크려진 어깨에서 백옥처럼 곧고 반듯한 등을 타고 유연하게 내려오던 시선이 가느다란 허리와 작고 동그란 엉덩이에 잠시간 지체하다가 무릎까지 물에 잠겨 있는 매끄럽고 길게 뻗은 아름다운 다리선을 쭉 훑어내렸다. 분홍빛으로 곱게 물든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약간 침침한 조명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발하자 흡사 분홍 실크 위에 흩뿌려진 작은 다이아몬드 알갱이같아 보였다. 왜 승호나 재원이 같은 남자임에도 우혁에게 빠져 들었는지 조금은 수긍이 갈 정도로 희뿌연 수증기에 감싸여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물에 젖은 나신은 성인군자라도 충분히 타락시킬수 있을 것처럼 매혹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무척 아름답고 연약한 인종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우혁의 벗은 몸을 봤다고 해서 성욕이 인다든지 안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키스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몇번 있지만...이라고 생각하던 칠현은 어느 누구든지 석류처럼 붉고 도톰한데다 촉촉히 젖어 있는 입술을 본다면 키스해 보고 싶은건 당연한거라고 속으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하나 그가 방금전에 떠올렸던 그 입술이 우혁이 물밖으로 나가려고 약간 몸을 돌리는 바람에 눈에 들어온 순간 칠현은 그대로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냐. 나 먼저 잘테니까 더 있어" 자는가 했더니 아무 기척도 없던 칠현이 갑자기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냅다 기지개를 펴자 흐익-하고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 벽에 달라붙는 우혁의 어깨를 잡은 칠현이 밀듯이 도로 욕조에 앉혀 놓았다. 더 않해도 돼는데..나도 잘건데 어쩌고 하며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감싸 밖으로 나온다음 닫힌 욕실문에 기대서 있던 칠현은 한참 후에 욕실 안에서 첨벙첨벙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는 정신차리려는듯 물기가 맺혀 있는 얼굴을 몇차례 쓸어내렸다. 냉장고의 500ml짜리 생수를 꺼내 병채 들고 마시던 칠현은 아무래도 얘기는 내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불을 끄고 나오려다가 식탁 의자에 놓여져 있는 카멜 색 더플코트를 보고는 우혁의 방에 갔다놓으려고 잘 개켜놓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반으로 개어져 있던 코트가 밑으로 주루룩 흘러내리면서 플라스틱에 뭔가 자잘한게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나자 뭔가 싶어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자 구겨진 종이같은게 있어 꺼내 펼쳐보았다. < 도곡동 Tour Fellice. 펜트하우스 2501호. TEL XXX-XXXX H.P 011-XXX-XXXX > 낯선 주소와 연락처에 도곡동에 누가 사는가 떠올려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 의아해하던 칠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도로 구겨놓은채로 집어넣고는 반대편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 안에 들린 플라스틱 병이 약병이란 것을 알자마자 콘솔에 놓아두고 잊어 버렸던 안경을 찾아 낀 칠현은 흐릿하게 퍼져있던 점만한 크기의 영문자가 제대로 뚜렷하게 보인 순간.... "이자식이....이게.. ..!!!" 안면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는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굳이 밑에 적혀 있는 효능을 읽어 보지 않아도 약병의 라벨에 찍혀 있는 <정 XANAX>라는 약이 무슨 약인지는 칠현도 잘 알고 있었다. 자메로, 아티반, 제르다실, 자비로, Pubrium와 같은 신경안정제들보다도 XANAX(자낙스)는 한층더 성분이 강한 향 정신성약이다. "하...이거 사려고 마을에 내려갔던 건가?" 자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약병 속에 든 알약을 손바닥에 부어보니 21개. 딱 일주일치였다. 이런 약을 약병 가득든채로 통째로 파는 곳은 없다는걸 잘 알지만 우혁이 언제부터... 얼마나 신경안정제를 먹은건지 몰라 욕실문을 당장이라도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던 칠현은 왜 이런 약을 먹으려고 하는지에 생각이 미친 순간 손에 든 코트를 떨어뜨리고는 근처에 있던 페치카 앞의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비록 자폐증이란 전적으로 인해 상당히 허약하고 불안정한 심리상태지만 적어도 이런 약을 먹어선 않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우혁이었다. 이런 약을 먹고자 했다면 손을 대도 벌써 손을 댔을 거였고 이미 치유불가능한 중독 상태에 빠졌을 것이지만 약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우혁이 약한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약했다면 약중독이 아니라 아마 수십번도 더 자살기도를 하고도 남았지만 혹시나 그럴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무모한 짓따위는 하지 않을만큼.... 장우혁이란 인간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무작정 약하고 어리석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그랬던 우혁인데.... "그 개자식...정말 끝까지 속을 썩이는군"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뜨린 코트 주머니에 도로 약병을 집어넣으며 이를 바드득 갈던 칠현은 접은 코트를 식탁 의자 밑에 도로 갖다 놓았다. 당장 욕실에서 끄집어내 한바탕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피곤한 상태로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내일 얘기해자..내일 내일...하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던 칠현은 승호의 결정도... 우혁의 예상치 못한 행동도...다 그 원인이 한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우혁이한테 달라붙어 있을거야... 어찌됐든 헤어진거잖아... 이제 잊을때도 되었건만... 대체 네놈이 뭔데.... 네놈이 뭐길래 우리 셋다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거냐고!!!! 제기랄!!!! -69- Visions of you in shades of blue Smoking, shifting, lazily drifting My darling, I miss you so Time goes by, no wonder my senses go reeling Your eyes so appealing I see the whole night through When will we meet again? When, when, when When we meet again? When, when, when I remember the days, beautiful days tenderly gleaming My whole life seeming to start and end with you 올해는 유난히 더 추운것 같다. 나이가 들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좋은자리가 났다고 선 한번 보라는 모친의 성화가 다시 떠올라 나오느니 씁쓸한 한숨뿐이었다. 상대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컴퓨터범죄전담수사반의 수석검사로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고 어린시절 개천에서 발가벗고 수영까지 같이 했을 정도로 마을에서 한데 같이 커온, 오빠동생하는 사이였다. 미남에다 잘나가는 검사니 그녀로서도 별로 손해날 것은 없지만 싫은건 싫은거다. 그런데 선이라니--말도 않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렸지만 이번에 휴가를 받아 내려왔다는 그와 혼기가 꽉찼다는 자신을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벌써부터 어른들끼리 말이 오갔다는 얘기에 이렇게 남몰래 한숨만 내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온갖 잡소문의 근원지니까. PM 6:27. 겨울철이라 일손을 놓고 무료해하는 마을 어른 몇분이 감기약도 지을겸 겸사겸사 마실 나왔다가 차주전자를 올려놓은 석유 난로가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끓여놓은 생강차를 마시고 있는 8평 남짓한 공간은 밖에서 보면 꽤나 한가롭고 여유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맘때쯤이면 약국 안은 약을 짓는 목적보다는 저녁식사 전까지 수다로 시간을 보내려는 마을 사람들.. 특히 며느리에게 저녁식사를 맡겨 놓은 한가한 시어머니들로 꽉 차게 된다. 한약재로 감기약을 제조하며..간간이 아주머니들의 말상대도 해드리면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들을 흥얼거리고 있을때였다. -딸랑..딸랑.. 문에 매달아 놓은 종소리에 칸막이를 해놓은 제조실에서 이번엔 누군가 싶어 고개를 빠꼼히 내밀던 그녀는 열린 약국 문틈으로 싸한 찬바람을 몰고 들어온 남자를 본 순간... 정말 조건반사적으로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녀뿐만 아니라 한창 신나게 들려오던...고향이 대부분 경상도나 부산인지 사투리 억양이 심한 나이든 여자들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쑥 내려간 것으로 보아 수다보다도 새로운 손님에 대한 호기심에 더 끌리는 모양이었다. 와~~ 잘생겼다. 산정호수로 놀러온 관광객인가?.....라고 생각하며 도회지 인다운 창백한 얼굴과 세련된 옷차림, 전신에서 풍기는 무언가 사람을 압도 시키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조금 주눅들어하다가 약간 가늘어진 검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괜시리 멋쩍은 나머지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저기...어떻게 오셨는지.." 상당히 부끄러움이 많은 듯한 여약사가 태연하려 '노력' 하는 모습을 지극히 무감동한 눈빛으로 비껴가듯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석고로 빚은 조각상처럼 딱딱해 보였다. ".......레놀 좀 주십시오" "예???" 안색이 무척 않좋구나 어디 많이 아픈가...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낮은 목소리에 뭐라 했는지 정확히 듣지 못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반문하자 아주 희미한 한숨을 내쉰듯한... 느낌이 들던 남자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타이레놀이나...잘 듣는 진통제 아무거나 주십시오" 낮게 울리는 듯한 허스키한 저음.... 분명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샀을것 같은 검은 롱코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젊은 남자...래봤자 그녀보다 적어도 5살은 어려보이니 대학 1,2년생 정도일 것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연륜높은 어른의 그것이었다. "진통제요? 어디가 아프신데요?" "............" 비록 느릿하고 약간 거만하게 느껴지는 말투였으나 어머 목소리 괜찮다라고 감탄하면서 확인차 물었지만 되돌아온건 묵묵무답... 이럴때 대부분은 설명을 해줘야 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하나 미간이 살짝 좁혀진 것과 쓸데없는 관심은 사양한다는듯 희미한 짜증이 베어있는 눈빛으로 보아 그 당연한 일이 이 남자에겐 당연하지 못한듯 했다. 울컥울컥... 잘생긴 놈들치고 성깔 좋은 놈 못봤다는 사실을 그녀는 다시한번 깨달았다. 잘못하면 그녀의 선 상대자가 될판국인 잘난 검사나으리인 유현도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잘못보면 쪽바리로 오인할만큼 얼굴이 얄삽하고 미끈한 사내지만 역시나...성격은 그의 동생만큼이나 개차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지속되었던 그 성격이... 커서 검사가 되었다고 어디로 갑자기 증발되는건 아닌 것이다. "잠시만요" 외지에서 온 손님한테 너무 되바라진 말투로 말한게 아닌가 싶어 금새 민망해진 그녀는 여자들에게 점령당한 석유난로 위에서 뚜껑이 달그락거리고 있는 주전자에 시선이 멎자 순간적으로 갈등하지 않을수 없었지만...역시 양심이 앞섰다. 상냥모드가 경직모드로 바뀌었음에도 별대수롭지 않다는듯 -이 남자는 그런데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다라고 그녀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유현이 그러니까- 유리문 근처에 서서 밖을 쳐다보는 그에게 저..저...하고 조심스럽게 두어차례 불러보던 그녀는 여전히 그가 돌아보지 않자 팔뚝을 살짝 건드렸다. "저, 이거 생강찬데... ...!!" 가볍게 살짝 건드린 접촉에 남자의 몸이 흠칫하더니 홱 뒤돌아서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차갑게 굳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놀란 표정에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킬수 있었다. "생강찬데 날씨가 추워서 손님들께 드리고 있거든요" 생강차를 마시는 척하며 이쪽을 흘끔거리는 노친네들 쪽에 힐끗 시선을 주며 변명하듯 중얼거리던 그녀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녀가 내밀고 있는 종이컵만 뚫어지게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에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검은색임에도 유리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눈동자는 사람을 웬지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간 거절하는게 아닌가 싶어 먼저 물어보지도 않고 불쑥 차를 내민 경솔함을 후회했지만 이내 고맙다는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남자가 내민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진열대안으로 들어가다가 흘끗 돌아본 그녀는 그때까지도 마시지는 않고 종이컵 안의 연황색 액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는 남자의 모습에 혹시 않좋아하는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천천히 차의 향을 맡더니 한모금 마시는걸 보고는 하휴, 차한잔 주기도 힘드네하고 꿍시렁대면서도 내심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지 않으세요?" "..........." "생강을 좀 많이 넣어서 쓸지도 모르는데.." 동네어른들께도 똑같은 말투, 똑같은 음정으로 똑같은 말을 했었지만 웬지 이 남자한테 말할때는 연하의 남자에게 추근덕대는 것 같다는 느낌에...또한 남자도 그렇게 오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말을 하면서도 젠장....하고 입술을 살짜기 깨물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이미 한눈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타입이란걸 알아챘는데도 저렇게 괜찮다고까지 말하는걸 보면 말이다. 물론.....사람 무안하게.....황당할 정도로 반응이 쪼.오.끔 느리긴 하지만. 하나 차를 조금씩 마실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눈살이 찌푸려지는걸 몰래 눈여겨본 그녀는 남자가 그다지 생강차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자신이 무안해할까봐 거절치 못하고 마시는거라 확신하고는 어느새 다시 상냥모드로 뒤바껴 미안함에 어쩔줄 몰라해야했다. 어쩔수 없지 않는가. 성깔나빠도 미남한테 약한건 당연지사니까. 물론 유현은 당연히 제외지만. 물론 그녀는 남자가 호의를 거절당한 마음 따위는 신경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걸 일일이 생각하고 배려해 줄 정도로 타인에게 다감한 성격이 못된다는 것을.. 상당히 특이해보이는 이 남자의 성격이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녀 기준으로 인간 말종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종이컵에 든 생강차를 홀짝이다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것처럼 격하게 가래끓는 기침을 해대던 노친네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생강차를 조금씩 마시는 남자를 흘끔대며 쳐다보다 이내 요즘 이 마을 최대의 이슈거리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랑께 저 콘도 생긴 다음부텀 요 아랫마을 민박집들이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라는거 아녀" "그렇다니께. 손님이 반으로 뚝 떨어졌다더만" "거 아랫마을하니까 생각나는디...그 얘기 들었남? 우리 며늘아가 그러던데...돌아가신 장어르신 아들 말여.." "장어르신 아들이라니?" "아 그 왜 머리 노랗고 밀가루 반죽마냥 얼굴 허연..거왜 튀기 있잖여~!!" 타이레놀을 꺼내놓고 남자를 부르려고 막 입을 열던 그녀는 그의 시선이 난로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노친네들에게 향해 있음을 알고는 의아함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 그 실팍치 못하고 가스나맨치로 곱상하던 가? 근디 가는 와??" "벨장에 내려왔다카데. 포천댁이 가끔 들락거린다 않카나" 구겨버린 종이컵을 휴지통에 간단히 골인시키는 남자의 얼굴이 처음 약국에 들어설때 보다도 더 한층 헤쓱해 보였다. "은제 내려왔노. 우리 큰아는 그런 얘기 없든디.." "여 온지 쪼께이 됐다카드라" "그랴? 참말로 세월 한번 빠르제...장어르신 돌아가신기 대체 언제여... 어르신 그렇게 가신 뒤로 여 온적 없제??" "무신 좋은꼴 볼라꼬 설서 여까정 오겄노. 그 아아만 보면 잡아묵을라드는 할망구 아있나" 편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를 짓누르면서 간간히 눈살을 찌푸리던 남자의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귀밑 턱선이 이를 악물었는지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별장의 머리 노랗고 밀가루 반죽마냥 얼굴이 하얀....여기까지 말하면 누구를 말하는건지는 이 지역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다 알고 있었고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명성산 계곡의 별장에 머무는...산정 호수의 물빛과 똑같은 빛깔의 눈동자와 단순히 금발이라하기엔 너무나 미흡한 표현인 빛깔의 머리칼을 지닌, 튀기란 저속어가 너무나 않어울리는 사람. 마을에 혼자 내려왔다가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사기인형같이 깨끗하고 예쁜 모습에...시골 남자애들의 호기심어린 짖궂은 장난과 욕설로 점철된 거친 말, 억양이 센 발음에 겁을 먹고 훌쩍훌쩍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느새 그녀보다 더 키큰 청년이 되서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여름만 되면 이곳 별장에 내려와 마을내 어린 여자애들의 마음을 괜시리 들뜨게 하더니 장성혁 회장의 사후로는 단한번도 오지 않다가 몇년만에 다시 모습을 비친 그는 어린 시절의 앳띠고 인형처럼 예쁘장하기만한 철없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처연한 미소와 환자같이 창백하나 그래서 더욱 사람의 마음을 끄는...유리인형처럼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위태로운 모습.. 그를 볼때마다 자연적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오던 예쁘다.. 이런 표현이 아닌,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시적인 표현이 절로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변한 그에게서 특히..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부분은 눈이었다. 웃지 않는 눈....무언가에 깊게 상심한듯 어둡고 우울한 눈빛.... 무엇으로도 치유하지 못할 크나큰 상처를 숨기고 있는 눈동자.... 여름 햇살에 찬란하게 반짝거리던 호숫물처럼 유난히 맑게 빛나던, 세파에 전혀 오염되지 않을듯하던 암청빛 눈동자는 흐른 세월만큼이나..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와 말의 시작부터 끝까지 욕설이 난무하는 둔감한 시골 남자애들에게 익숙해져 남자애들마냥 드센 여자애들에게는 호화로운 별장에 혼자 머무는 그 병자처럼 창백한 모습이.....게다가 금발머리에다 혼혈이란 특수한 사실이 묘한 매력으로 비쳐지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동네 말만한 여자애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의 얘기로 수다를 떤다는 것도 그들 무리에 끼여 있는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라고보니 그 마구같은 할망구가 무신 일로 이리 잠잠하노. 그라서 가아가 여 내려온지도 몰랐다 아이가" "아이다. 공부한다꼬 미국간 큰손주 본다고 저 미국갔다 않카나. 않그랬으믄 부정탄다꼬 눈에 불을 키고 쫓아냈을끼구만" "와 않그렇겠노. 언놈의 핏줄인지 모를 아를 버젓이 호적에 올리뿔고 재산까정 다 줘버렸으니 속이 멀쩡하면 그기 사람이가" "그랴서 여우한테 홀린기라고 한동안 말들도 많았다~" 이곳 토박이인 장성혁 회장의 친누이와 장씨집안 사람들이 그라는 존재를 못마땅해 한다는 것도, 이 근방 사람들에겐 다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나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그녀로서는 외지인 앞에서까지 남의 일이라고 있는대로 떠벌리며 혼혈아라는데 거부반응을 갖고 있는 고리타분하고 전근대 적인 노친네들이 못마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가 백인의 혼혈아인데다 보통이 아닌 외모였기 망정이지... 아마 흑인의 혼혈아여서 피부색이 검고 머리칼이 흑인처럼 곱슬이었다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거의다 천시와 경멸의 눈길로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건 이미 그 개념이 무너져버린 단일민족이라는 것에 연연해 희안한 우월 의식을 갖고 타민족과 피가 섞인 혼혈아들과 외국인, 특히 피부가 검은 동남 아시아인이나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천대의식을 갖고 있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단면이자 병폐라 볼 수 있었다. "생긴것도 않그렇트나. 그 왜 누꼬. 과수원하는 성씨 아들.." 순간 콧등을 찡그렸다. 그 과수원 성씨의 두 아들 중 한명이 성유현이라서가 아니라 말 나온김에 아주 작정을 했는지 웬만하면 꺼내지 않던 옛일까지 다시 들춰내고 있는 노친네들이 새삼 징해서였다. "설서 검사한다는 아 말이가" "그 아는 현이 아이가" "그아 말고. 그 밑에 아, 한이 말이다" "한이이?" 저렇게 잊어먹은척 하고 다시 묻는 노친네의 두뇌속에는 그 사건과 관련된 온갖 소문들이 고스란히 내장되 있을 것임을 그녀는 장담할수 있었다. 하지만 했던 얘기 또하고 했던 얘기 또하고....첨듣는 얘긴양 또 듣고..... 새삼 놀라고 감탄하고 하는 것은 나이잡수신 분들의 특기이자 취미인 것이다. "한이가 그기 얄상하니 가스난줄 알고 멱감는데 덮치려 했다 않카나" "그기 벌써 언젯 일이고. 우리 명아가 중1때니께...5년도 훨씬 넘어삣꾸만" "마 고마 치이뿌라. 지난 얘기 또 꺼내서 뭐할끼고. 입만 더럽제" "성씨가 그 아 얘기만 나왔사면 치를 떤다카이. 자식취급도 않했다카드라" "그랴도 지 어메한텐 엔가이 소식 오나 보드라. 설서 무신 사업인지 크게 한다카드만" 이 지역에선 장씨가문 다음으로 꽤나 부유한축에 들던 과수원 성씨의 둘째 아들 성유한은.... 대검찰청 검사이자 수재라고 소문난 그의 형 유현과는 다른, 고등 학교도 폭력사건으로 퇴학당해버리고 마을의 건달들과 어울려 못된 짓은 도맡아하던 개망나니 중에서도 상종못할 망나니였다. 야심한 밤에 무더위를 식히려 개울가로 나와 간단히 목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는건 시골에선 특별치도 않고 흉잡힐 일도 아닌...특히나 남자들에겐 아주 흔한 일이어서 여름밤엔 그런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수 있었다. 문제는...별장과 가장 인접해있는 유일한 인가인 성씨네 집으로 술에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던 유한이 개울에서 수영을 하던....달빛에 비친 우혁을 보고는 여자로 착각 하고 덮치려다가 비명소리에 득달같이 달려온 별장 사람들에 의해 들켰던 것이다. 그냥 술김에 실수한 일인데다 진짜 여자도 아니었고 또한 성씨 형제들과 우혁이 모르는 사이도 아닌, 형제처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니 그냥 엄하게 꾸짖고는 간단히 넘길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나 충격이 극심했는지 물속에서 유한에게 끌려나온채로 풀밭에서 그대로 기절해 버린 우혁의 몸에 난...뚜렷한 반항의 흔적인 생채기들로 인해 그 인자한 장성혁 회장마저도 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장한들에게 얻어맞아 인사불성이 되버린 둘째아들을 옆에 둔채로 성씨 내외가 무릎까지 꿇고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무마됐을 만큼 예상외로 커져버린 사건이었다. 또한 이일로 인해 두 집안 사이가 예전같지 않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나 그날 일을 철저하게 입단속을 했음에도 그런 소문이 퍼지는건 시간문제였고 남보기 넘사스럽다고 성유한은 그의 집에서 거의 내쫓기다시피하며 서울로 쫓겨 올라가고 말았다. 게다가 그 사건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혁이 남자를 홀린거라느니하는 않좋은 헛소문이 계속 돌은데다 장성혁 회장이 그해 겨울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유산 상속문제까지 겹쳐 온갖 해괴한 소문이 난무했었다. 그런데 이젠 두번다시 이곳엔 않올줄 알았던 그가 몇년만에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에 대한 온갖 소문이 가라앉은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 당시만큼 그런 배타적이고 노골적인 적대감은 많이 줄어든 편이었고 더욱이 그 적대감의 주축인 장성혁 회장의 누이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나서 내려올 결심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제 불면증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왔던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나서 신경안정제인 자낙스를 줬던 기억까지 떠올리던 그녀는 아차하며 남자를 불렀다. "저 여기 타이레놀.." 상태가 더 않좋아진듯 했다. 표정이 저렇게....섬칫할정도로 싸늘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간이 오그라들지 않았나 염려스러울만큼, 그가 뒤돌아서서 이쪽으로 다가올때 한순간 이었지만 정말 무서웠다. 이 남자의 신경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 거라는걸 본능적으로 깨우치게 만들 정도로. 가격을 말하니 남자가 꺼내든 지갑안에 수표로 보이는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흘끗 보여 얼른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약을 사들고 맞은편 도로로 건너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유리문 너머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낡은 경운기 뒤에 세워져 있는, 드라마에서 몇번 봤던 레이서들이나 탈듯한 새빨간 스포츠카가 한눈에 들어왔다. "새파랗게 젊은 아같은디 뭔 돈이 있어서 저런걸 몰고 다닌댜?" "부모 잘둔 덕이지 뭐겄어. 하여간에 저렇게 도시년놈들이 죄다 몰려드니 마을 아들 간에 괜히 바람만 넣는거 아닌가 모르겄어" 운천 문암리 3거리에서 산정 호수쪽으로 우회전해서 사라질때까지..... 못마땅한듯 혀를 끌끌 차는 마을 어른들 옆에 서서 차를 구경하다가 약국 안으로 들어온 그녀, 연희는 짓다만 감기약을 다시 제조하느라 잠깐 스쳐지난....두번 다시 안면 부딪힐 일 없는 외지인에 대한 일은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쉽사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쾅!!!!! 그때까지도 자리에 서 있던 비서들의 몸이 흠칫하고 떨리더니 서로에게 급격히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집무실 문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세게 닫히자마자 곧이어 안쪽에서 뭔가를 있는 힘껏 내리친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던 것이다. 단한번도 지각이란걸 해본 적이 없던 그 칼같은 사장이 퇴근시간이 다되어서 회사에 나온 것만으로도 놀랄노자인데 시퍼렇게 굳어버린 표정으로 비서실 문부터 시작해 집무실 문까지 아예 부서뜨리려 작정을 한듯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닥치던 그 모습은.......첫주자인 로비의 경비원들과 그 시간에 운나쁘게 복도를 지나치던 간부와 사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서들의 심장에도 심한 데미지를 안겨주고 말았다. 너나할것 없이 몸성하려면 오늘 최대한 조심하자란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 앉던 비서들은 어느새 소문을 들었는지 결재서류를 맡으러 왔다가 불안한 표정으로 닫혀 있어도 냉기가 솔솔 풍겨나오는 듯한 집무실 문을 힐끔거리는 간부들에게 나중에 오시라는 충고까지 해주었다. 출근하자마자 항상 마시는 커피와 대여섯개의 국내외 신문을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쟁반에 커피잔과 신문을 받쳐든 여비서 한명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지 싶었다. 항상 보는 광경은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고개조차 들지도 않던 사장의 윤기흐르는 마호가니빛 머리칼과 먼지 한점 내려앉아 있지 않은 정장에 감싸인 넓은 어깨였는데...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신문과 커피를 놔둘때까지도 회전 가죽의자 뒤로 몸을 젖힌채 오른팔로 눈을 가리고는 미동도 않고 있는 사장의 모습에 여비서는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못해 비서실 밖으로 물러 나오자마자 다급히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린프레시 계열의 에고이스트 플라티늄의 향수내음과 함께 입끝에 감도는 잔향이 담백한 블루 마운틴의 향이 코로 밀려들었지만 승호는 여비서가 나가는 기척이 들려도 여전히 그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치안국 수사 지도과 감식계에 있는 김경일 경감에게서 연락이 올때까지 그는 죽은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안사장님께서 부탁하신 일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뭔가 발견이 됐습니까?" "몇사람의 것이 찍혀 있었지만 신원조회를 해보니 모두다 그 호텔 종사자들이었습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상대방에게 침묵 끝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끝이 갈라지고 목이 꽉 잠긴, 듣기 거북할 정도로 탁한 음성이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경감님" 수화기를 내려놓는 승호의 얼굴은 하룻밤새 안색이 형편없이 나빠져 있는데다 지나치게 창백하고 아파보여 흡사 암말기 환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채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듯 하던 승호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모금 마시다가 쓴 위액이 넘어와 커피잔을 도로 내려놓고 말았다. 빌딩 외벽의 유리창으로 밀려드는 석양에 다시 팔로 눈을 가린 승호는 전날 있었던 일을 차례차례 더듬으며 기억을 되떠올리려 애썼다. 하나 호텔 바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후부터 오늘 오후 3시경에 호텔 스위트 룸에서 눈을 뜰때까지...거의 14,5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승호는 기억해 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눈을 떴을때 침대에 누워 있던 그의 옆에는 알몸으로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자고있던 금발의 여인이 하나 있었고 침대 맡의 사이드 테이블에는 숙취를 없애는 약과 호텔 용지에 글을 적어놓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 잘 주무셨습니까. 안승호 사장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신거 같습니다. 무척 울적해 보이셔서 제가 위로의 선물을 드렸는데 마음에 들어 하시는거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후후....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했습니다. 역시...취향이 금발의 미녀라는 소문이 맞는거 같더군요. 하지만 그 미녀분한테 사과를 하시는게 좋을겁니다. 미녀를 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건 예의가 아니지요. 않그렇습니까? 후후훗.... 그 아름다운 분은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죠? > 팔 밑에 가려진 승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입술 틈을 비집고 이를 악문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 증거도 포착되지 않았다. 호텔 투숙객을 위한 서비스로 찍어두는 비디오카메라도 스위트 룸에 투숙한 손님이 거절해 그 날밤만은 작동을 멈췄고 조롱기 어린 메모에는 지문하나 검식되지 않았으며 여자는 고위관직들만 상대하는 최고급 콜걸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끔 용의주도하게 일을 벌렸다. 게다가 숙취를 제거하는 약은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 우롱하는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뇨. 저도 목소리밖에 듣지 못했어요. 젊은 남자같았는데... 특이하게 금발만 찾더군요. 글쎄요..누가 들어온 기척은 못 느꼈는데.... 저도 조금 술에 취해 있었거든요. 그것도 요구 조건이었어요. 닳고 닳은 콜걸임에도 간밤의 정사가 잊혀지지 않는다는듯 눈과 볼을 붉히며 수줍게 몸을 추스리는 여자는 묻지 않은 말까지도 그에게 해주었다. -원래 상대한 손님한테 이런거 말하지는 않지만....혁이란 분을 너무 애타게 부르시던데..... 절 그분으로 착각하셨나 봐요..... 담배를 꺼내 라이터 불을 붙이려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깨달은 승호는 그대로 라이터와 담배를 책상 위에 내던지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대체 어떤 놈이!!!!" 양 주먹으로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며 승호는 주체못할 분노와 모멸감에 온몸을 미친듯이 떨기 시작했다. 분명 미리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자신이 잘가는 바도...옆에 에릭이 없었다는 것도...금발의 여자도... 소문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일까지도 다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조롱기 어린 말투와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도저히 억눌러지지 않는 격심한 분노에 치를 떨던 승호는 순간 그대로 얼굴이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후후훗....그 아름다운 분은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죠? 그 아름다운 분은 당신에게... 그 아름다운 분은... 허물어지듯 의자에 도로 앉은 승호는 극심한 편두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다가 살가죽을 뚫고 뛰쳐나올것처럼 맥박이 심하게 드날뛰고 있는 목으로 손을 갖다댔다. 그 아름다운 분...이란 대목은 상대방이 우혁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자신과 우혁의 관계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진 거의 없다고 해야 옳았다. 우혁이 납치를 당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큰 분노때문에 이성을 잃고 생각치도 못했던 일을 자각한 순간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엉켜버린 머릿속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노리는 것은 명백했다. 간밤의 일을 어떤 식으로 해서든 증거물을 남겨놨을 것이다. 비디오 테잎이든 사진이든... 하나 자신을 협박하려 했든 그의 적들에게 넘겨주려 했든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인간이라면 그따위 일로는 미세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다는것 또한 알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그 아름다운 분은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죠? 한순간이었지만 심장이 완전히 기능을 잃고 멎은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숨이 턱 막혀 입술을 열었지만 갈수록 목이 더 졸리자 파랗게 질려버린 승호는 양 손으로 목을 감싸 쥐며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애써야 했다. 단순히 자신만을 노리는게 아니었다. 우혁 역시 어떤 식으로든 노리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자신에 대해 이 정도로 알고 있다면 우혁에 대해서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승호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경직되며 의식키도 전에 제멋대로 손이 경호실과 연결된 인터폰 벨을 누르고 있었다. 삑-하는 소음과 함께 에릭의 음성이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 네. 사장님 > "........." < 사장님? > "....차 대기시켜" < 알겠습니다 > 수전증 걸린 것마냥 손이 심하게 떨려 버튼을 몇번이나 다시 눌러서야 겨우 번호를 완성시켰지만 계속 신호음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자 거의 내팽게치다시피 수화기를 던진 승호가 코트를 낚아채 팔을 끼면서 집무실을 급히 뛰쳐 나갔다. SM 그룹 본사 내 있던 수천명에 달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이날 다 죽어가는 안색으로 밖으로 뛰쳐나간 사장의 이성을 잃은듯한 모습이 두고두고 회자된건 말할 나위도 없었다. 포천 방향으로 향하는 벤츠 안에서 카폰으로 계속 별장과 통화를 시도하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승호의 얼굴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불안감과 극심한 초조, 긴장으로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미친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이미 통제 불능이었다. 떨림을 진정하려 꽉 움켜쥐었다가 기도하듯 모아쥔 양손에 이마를 기대며 승호는 오직 한가지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제발...제발... 않돼....절대 그 애만은... 제발...우혁아!!!!!! 핸들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다시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식은땀까지 나고 손발이 저려 몇번이나 차를 길 한편에 세워두고 핸들에 머리를 처박은채로 한참을 있다가 진정되면 출발하고....그러다 도착지가 가까워올 즈음에 와서는 증상이 발작적으로 더 심해져 어지러움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으니...별수없이 진통제가 필요했던거지만 아직까진 약효가 들지 않는듯 했다. 거의 술로만 채워졌던 빈 속을 매섭게 할퀴며 목구멍으로 역행해 넘어오는 생강의 쓴물이 역겨워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악물지만 그 쓴맛 덕분에 정신이 조금씩 원위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나 약을 차안에서 삼켰음에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심장과 질식할 것만 같은 호흡곤란, 갈수록 더 심해지는 현기증에 재원은 그대로 브레이크를 거칠게 밟아버렸다. 군데군데 자갈투성이에다 흙길인 비포장 도로를 시속 8,90km를 넘나들며 달리던 타이어의 급제동음은 눈앞에 보이는 명성산까지도 울려퍼질 것처럼 소름끼쳤다. 겨울은 낮이 짧은데다 특히 이런 산간지방은 특히 해가 빨리 저문다. 아직 7시도 않된 시간이건만 불꽃같은 강렬한 붉은 컬러와 관능적이며 개성있는 바디를 가진, 무엇보다도 스타일이 압권인 슈퍼카 페라리 360 모데나의 화려한 외관은 인가하나 없는 주변의 어둠에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자마자 안전벨트에 걸리면서 핸들에 가슴을 세게 들이받쳐버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재원이 한참 후에야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코트 안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 피워물었다. 차창을 조금 열자 겨울 혹한에 순식간에 피부가 싸늘해졌고 취한것처럼 어지럽던 정신까지도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정적에 휩싸인 시골의 고적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거슬려 라디오를 켜자 약국에서 틀어놨던 라디오와 주파수가 동일한지 한번 들은것 같은 진행자의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곡인가를 곤욕스럽게 듣다가 상당히 늘어지는 조용한 음의 흘러간 팝송이 귓속을 파고들자 아예 꺼버리려 마음먹었던 손길이 그대로 뚝 멎고 말았다. Visions of you in shades of blue Smoking, shifting, lazily drifting My darling, I miss you so Time goes by, no wonder my senses go reeling 담배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요즘들어 느끼는건 자신이 꽤나 감상적이 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법복제한 테이프를 파는 노점상에서, 레코드점에서,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곡의 유치한 가사들이 전부다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듯 했고 특히 이별한 연인의 사랑노래는 더욱 그러했다. 지금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건 마찬가지였지만 예전이었다면 소음이나 별다를바 없는 음악을....적어도 가사를 들을수 있을 정도로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When we meet again? When, when, when My whole life seeming to start and end with you.... << ... 씨께서 신청해 주신 Cliff Richard의 Visions이었습니다. 국내에서 그리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떠나간 애인에 대한 환영으로 힘들어 하는 남자의 마음이 잘 녹아난... ...... 다음 사연은.... >> 뿌연 담배 연기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는 취한듯 잔뜩 흐려져 있었다. 팝송 가사처럼...그도 흩어지는 연기의 우울한 음영 속에서 헤어진 연인의 환영을 보는듯 했다. 벌써 다섯 달이나 흘러버렸다. 7월 21일.... 죽어도 놔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가....스스로 우혁을 떠나보낸 날이었다. 행복하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더이상 울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어도 죽고 싶을만큼 보고 싶어도 자신이 저지른 짓때문에 차마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눈물로 베게가 축축히 젖도록....침대가 식은땀에 흠씬 젖어 눅눅해지도록...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도 않날 정도로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졸리듯이 숨통이 막혀서.....비명소리에 잠이 깨야만 했던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수화기를 들었다가 첫 신호음에 바보처럼 놀라서 그대로 수화기를 놔버린 것도.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자신을 봐달라고 애원하고 싶어도 그럴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미치게 했었다. 라디오를 끈 재원은 어둠에 물든 전방을 담배연기 너머로 멍하니 주시했다. 이제 막 부산에서 돌아오는지라 상당히 몸이 피로했다. 페라리의 강력한 450 마력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힘과 엄청난 쾌속감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말그대로 허공을 나는 듯한 아찔한 쾌감에 재원은 가끔 부산까지 그렇게 미친척하고 내달렸다가 다시 쉬지않고 서울까지 질주하곤 했었다. 참고 참아도 가끔씩 치받고 올라오는 가슴속의 답답함과 울분을 풀지 못할 때면 그런식으로라도 해소하려 했었고 운좋게도 아직 무면허나 과속이 걸린 적은 이때껏 단한번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차 번호판이 외교관 넘버를 달았기 때문이었다. 청초한 그 모습을 다시 눈에 담을수 있다면....호수처럼 깊은 슬픈듯한 그 눈빛을 다시 볼수 있다면....수줍어 미약하게 떨리는 그 음성을 다시 들을수 있다면.....그 붉은 입술을...그 달콤함을 다시 맛볼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부러질듯 가냘픈 그 몸을 다시 품에 끌어안아볼 수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제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그럴수만 있다면... 구차한 미련때문이었다. 그때문에 서울로 향하려던 핸들을 돌려 이곳으로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다. 우혁이 이곳 별장에 내려와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안승호가 곁에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참고 참고 또 참아도...불가항력이었다. 앞뒤않가리고 무턱대고 찾아온 자신의 무모함에 몇번이나 그대로 차를 돌리려 했지만 이대로 그냥 돌아간다면 분명 죽을때까지 후회하게 될거라는 것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하나 전혀 예상밖의 장소에서 그가 알지 못하는...우혁에 대한 얘기를 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노인들의 얘기는 굳이 다 듣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케 해주었다. 혼혈이라는 사실에....또한 자신의 외모에 우혁이 유별나게 심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도...여자취급 당한다는 느낌을 조금만 받아도 펄펄 뛰는 것도....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재원의 생각보다도 더 깊숙한데 그 원인이 있었고 상처또한 그만큼 컷을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를 다독이고 달래준 사람은 분명 안승호였을 것이다. 담배연기를 내쉬며 한데 섞여 나오는 한숨 속에는 번번이 자신은 어찌해 볼 수조차 없다는데 대한 울분섞인 분노가 베어 있었다. 남자 여자 그런걸 의식키도 전에 그가 눈에 들어왔고.... 남자를 안는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전에 강제로 그를 안아버렸다. 물론 가벼운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랑같은 감정도 아니었다. 순수한 영혼의 교감이라고는 절대 볼수 없는.... 오로지 미칠것 같은 육체적 욕구와 본능만이 앞섰을 뿐이었다. 셀수 없는 나날들을....꿈속에서...눈뜨고 있을때조차도 수없이 그를 탐하고 또 탐했다. 아마도 그런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집착했던 건지도 몰랐다. 키스하고 싶다..안고 싶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정신이 자각키도 전에 몸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고....갖고 싶다...소유하고 싶다...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라는 생소할정도로 불같이 격렬한 감정에 괴로워할때조차도...분명 사랑은 아니었다. 남자를 사랑한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사랑이란 어줍잖은 감정만으로 견뎌내기엔 얼마나 어렵고 괴로울 것인지를 깨닫기 전에 현실적인 어려움따위에 연연해 그와 헤어진다든지.. 그를 놔줄 일은 없을거라 여겼었다. 그때도...사랑은 아니었다. 단지 파괴적인 독점욕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정말로 견디기 힘들때가 온다면....헤어지느니 같이 죽어버리면 된다고... 내 손으로 고통없이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사랑하니까..그럴수 있다고...그렇게 어리석고 안일한 생각을 했었더랬다. 간신히 한걸음 다가섰다 싶으면 어느결에 두세발자국은 뒤로 물러서 버린다. 빗장을 걸어닫은 마음의 문을 간신히 조금 열었다 싶으면...두겹 세겹 더한 방어 벽을 쌓고 더욱더 견고해져버리고 만다. Kew Word는 언제나 안승호였다. 안승호를 죽이든지 자신이 죽든지 둘중 어느누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한은 언제까지고 같은 상황이 계속될거라는 것을 결국 알게 되었을때... 안승호를 직접 건드리게 될 경우엔 어떻게 될거란 것을....직접 확인하고야 말았다. 사랑하니까...놔주느니...안승호에게 다시 뺏기느니... 차라리 죽이는게 더 낫다라고 여겼을땐..내게 그의 목숨을 어찌할 권리는 없다는 진실까지 동시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짓을 발견했을때...정말로 죽일뻔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런 미성숙한 마음으론 감히 사랑이란 단어를 입밖에 낼 자격도 없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이미 다 타버린 마음... 짧은 기간 너무나 많은 감정을 소진했기에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는 더이상 재생치 못할거라 여겼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거라고.... 않보면 마음이 멀어질 거라고.... 사랑이라 착각했을뿐인..... 쉽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 처음으로 자신을 거부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었을뿐이라고.. 그렇게 여겼었는데... 담배를 창문 밖으로 떨어뜨리고는 입안쪽의 연한 살을 지긋이 씹어물며 수십번도 더 했던 고민을 다시 하던 재원은 이내 자조어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더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불안해하겠는가. 이미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봤으니 더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고 여기서 더 상처받는다 해도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할 심장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오늘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혁을 사랑하는 한은....안승호가 살아 있는 한은....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다시 시작할수 있다 하더라도 둘의 관계는 여전히 위태로울 것이고 언제든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이건 어줍짢은 추측이 아니라 명백한 확신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이곳까지 온것은... 손가락들이 잡고 있던 핸들을 아예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침에 눈을 뜨기전...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며 그의 품에 안겨 잠에 취해 자고 있는 하얀 연인이...하늘거리는 커텐에 여과되서 들어온 아침 햇살에 비친...시릴 정도로 하얗디 하얀 나신과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백금빛 머리칼, 아기처럼 살짝 벌려져 있는 붉은 입술을 눈에 담기 전에... 눈을 감은채로 따뜻한 체온과 옅은 숨소리와 느리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음미하듯 느끼며....오늘도 내 곁에 있구나..여전히 내 품에서 자고 있구나.....꿈이 아니었구나...하고 의식이 깨어난 그 순간부터 그를 안심시켜주며 .....지쳐 잠든 연인이 깰까봐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싶어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의 하얀 연인은 이젠 옆에 없다는걸...... 술에 취해 옆자리로 손을 뻗어 더듬다가 차디찬 시트만 만져져 화들짝 놀라 깨어났을때.. 숙취에 시달리며 잠이 깬 후 눈을 뜰때마다....싸늘하게 텅 비어있는 옆자리를 봤을때... 그의 연인은 이제 없다는 사실을 매번 깨달아야 했을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도...찾아갈 수조차 없는 절망감은 육신을 피폐시키고 정신을 갉아먹어갔다. 음식대신 술로 연명하며 신경을 마비시키고 술에 취해 고통을 삭히며....그는 그렇게 의미없는 나날을 버텨가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터였다. 하나 더이상은 버틸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수면부족으로 눈이 탈듯이 따가웠고 급성 위경련이라도 일으켰는지 속이 아플 정도로 당기며 손으로 내장을 무지막지하게 쥐어짜는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이제 얼마 않있으면 우혁을 볼수 있었다. 우혁을 다시 손에 넣든지.... 그렇지 않을때는... 채워놨던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는 악셀레이터를 밟는 발에 서서히 힘을 주며 전방을 주시하는 재원의 표정에서는 더이상의 흔들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감정을 끊어버린다. -70- 두 사람이 만날 때는... 물가에 나란히 핀 백합과 같아야 합니다 봉오리를 오무리지 않은 채 금빛 수술을 온통 드러내 보여주는... 호수를... 나무를... 하늘을.. 비추어내는 두 송이의 백합처럼.. 닫힌 마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갔을 때 우리는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대의 시간을 그토록 오래 차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에게 드리는 것이 거짓 없는 '나 자신'이 아니면 결코 안됩니다 ...1920.9.10 메리 해스켈 "여기 다 됐습니다" 줄기 끝을 전지 가위로 다듬는가 하더니 꽃들에다 올리브 그린 리본까지 묶어 어느결에 하나의 꽃바구니를 완성시킨 화원의 젊은 여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우혁에게 꽃바구니를 넘겨주었다. 흐드러진 꽃바구니는 백합이 피는 시기인 6,7월이 아닌, 겨울이란 계절이 말해주듯 비싼 가격만큼이나 칠현의 눈에도 꽤나 아름다워 보였지만 바구니를 안고 있는 사람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듯 했다. "왜 이렇게 활짝 핀걸 사냐?" ".........." "봐봐. 벌써 이건 시들려고 하잖아. 하루도 못가겠다" "....더이상 거짓되고 싶지 않아서" 뜻을 알길없는 말에서 느껴지는....스스로에게 다짐하는듯한 굳은 의지에 지갑에서 막 돈을 꺼내려던 손길이 잠시 멈칫하며 옆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향긋하다.." 얼지 않게 덮어 놓은 투명한 비닐틈새로 흘러나오는 백합의 향기만큼이나.. 꽃잎에 입술을 닿을락 말락 가까이 댄채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아찔함마저 느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흰 꽃잎에 맞닿아 있는 입술이 핏빛처럼 붉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는 칠현에게 우혁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백합의 꽃말이 뭔지 알아?" "몰라. 뭔데?" 꽃뿐만 아니라 꽃 몇송이의 꽃말까지 적혀 있는 판넬이 벽에 붙어 있었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감정의 흔들림에 칠현은 불퉁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순결....그리고 희생...." 열송이의 꽃이 뿜어내는 향기에 취한듯 한숨처럼 뇌까리는 음성조차도 은근히 취한듯한 그 모습은 백색의 마돈나 릴리를 지칭하는 희고 기품있는 백합꽃만큼이나 그렇게 한없이 순결한 순백의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거 보니까 같은 꽃이라도 몇송이냐에 따라 꽃말이 틀린데? 그럼 이건 뭐야?" "............" "활짝 핀 흰 백합 열송이는 '당신에게 나의 전부를 드리오니 당신의 색으로 나를 물들여 주세요'예요" 친절하게 답변을 해준 것은 백합꽃송이에 코를 묻은채 눈을 감고 있는 우혁이 아니라 금고에서 잔돈을 꺼내 칠현에게 건네주려던 화원 여주인이었다. "나의 전부를 드리니...당신의 색으로 나를 물들여 주세요? 되게 기네.." "꽃으로 보내는 사랑의 메세지 중에서도 특히 청혼의 의미가 깊답니다. 여자친구에게 주실건가 보죠? 좋겠어요. 받으시는 분은" "....청혼의 의미?" "네. 거기다 올리브 그린 리본까지 묶여 있으니까 '저를 믿어 주세요'란 의미까지 포함되지요" 올리브 그린 리본은 우혁이 고른 것이었다. 설마..하는 의심기어린 시선으로 꿰뚫을듯이 쳐다보는 칠현을 느꼈을텐데도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속눈썹은 들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또 백합은 4월의 탄생꽃이기도 해요" 정말로 친절한 여주인이었다. 아니면 손님이 없어 심심하든지. 않해도 될말까지 계속 덧붙여 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혁과 칠현은 겨울에 태어났지만 승호의 생일은 4월이었다. 하나 칠현은 4월에 태어난 사람이 그가 아는 사람 중에 한명 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린페에서 우혁이 어디로 납치됬는지를 안후 그 다음날 결석한 재원의 집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학생기록부를 들춰봤던 것이다. 비록 오피스텔은 텅 비어 있었지만. 하나 분명 칠현의 두뇌는 재원 역시 4월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장우혁... 너.." "어머.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반가움이 물씬 베어나오는 여주인의 톤이 올라간 음성에 하려던 말을 방해받은 칠현은 그 덕분에 겨우 꽃말 하나가지고 지레짐작해서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거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우혁아, 가자. 형한테 전화 왔을지도 몰라" 반지갑을 무스탕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어두컴컴한 창밖을 본 칠현은 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혁에게 눈을 돌리다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뭔가에 방어라도 하듯 백합꽃 바구니를 가슴에 꼭 붙이고 있는 우혁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완전히 탈색되어 있었고 암청빛 눈동자는 동공이 커진채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뭘 봤길래 저러나 싶어 뒤돌아선 칠현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화원 여주인을 뒤따라 들어오는 남녀 두 사람... 곱게 늙은 중년 여인과 노란 파카 차림의 생김새가 번듯하고 훤칠한 젊은 남자였다. "어머~서울에서 검사하신다는 그 아드님이신가 보다아. 휴가 나왔나 봐요? 잘도 생기셨네" "저녁먹고 잠깐 나올라니까 얘가 하도 따라오겠다고 해서 같이.. ...!!!!!" 다 큰 아들이 졸졸 따라다닌다고 창피한 말투로 말하지만 은근히 자랑스런 티를 내던 중년 여인의 말이 중도에 뚝 끊어지고 말았다. "어? 너희...칠현이하고.....설마...우혁이?" 단번에 시베리아 한랭 전선이 드리워진 중년여인과는 달리 칠현과 우혁을 번갈아 돌아보며 크게 놀라하는 것도 잠시, 반가운 기색을 비치며 가까이 다가오는 젊은 남자를 보며 칠현의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른 것은... 씨팔 이런 재수없게 하필이면...이었다. "정말 칠현이하고 우혁이네? 야~~ 정말 반갑다" "....어 유현형. 오랜만이네요. 언제 내려오셨어요?" "어제. 너넨 언제 왔냐? 어머니는~ 아셨으면 말 좀 해주시죠. 승호는? 승호도 같이 왔겠네? 어딨냐? 그녀석" 이세상에서 안승호를 그녀석이라 부를수 있는 몇않되는 사람 중의 한명인 유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승호를 찾다가 우혁을 힐끗 쳐다보면서 바늘가는데 실이 않따라오다니..하고 짓궂게 놀렸지만 얼어붙은 분위기를 되살리는덴 역부족이었다. "이 녀석들 진짜 많이 컸네~ 칠현인 나만하겠는데? 너 키 몇이냐?" "글쎄? 180인가?" "햐...요즘애들은 발육이 좋아가지고 180은 기본이지?" 칠현의 머리에서 자신의 머리로 손을 이동시키며 키를 어림짐작으로 눈대중해 보던 유현이 그때까지도 칠현의 뒤쪽에 몸을 가리듯이 서 있는 우혁에게 고개를 디밀고는 싱긋 웃더니 숙이고 있는 백금빛 머리칼을 부시시 흐트러놓았다. "우혁아, 형 쳐다도 않볼거야?" "......형..." "사내녀석이 그렇게 부끄럼이 많아서 어떻하냐 이녀석아. 어머니. 아시죠? 칠현이하고 우혁이잖아요. 별장에.." "나도 눈 있다" 유현의 노력을 단번에 무마시켜버리는 얼음이 조각조각 깨지는듯한 목소리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안고 있는 바구니 속의 백합꽃만 바라보고 있던 우혁이 입술을 살짜기 깨물다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아..아주머니..그동안 안녕하.." "이거 품종이 뭔가? 처음 보는거 같은데" 지독히도 모욕적인 태도였다. 기어들어가는 듯한 인삿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난화분이 놓여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년 여인에게선 영하의 날씨보다도 더 차디찬 기운이 느껴졌다. 새파랗게 질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우혁과 싸늘하게 얼어붙은 칠현의 경직된 표정에 유현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어머니!!!!" "귀 않먹었다. 소리는 왜 지르니?" "아...안녕히... 형...저... 먼저 갈게요" "우혁아!!!!"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꾸벅인사하고는 몇발짝 가지 않아 후다닥 화원을 뛰쳐나가는 우혁을 부르며 뒤쫓아가려는 유현을 제지시킨 칠현이 몇초간 시선을 교환하다가 미안하다는 난색의 빛을 띄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섰다. "나중에 봐요 형" "그래. 빨리 가봐. 그녀석 마음도 여린데..많이 상심했을 거야" 청바지 포켓에 손을 꽂으며 칠현이 달려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유현은 고집스레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채로 난을 보고 있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에 화났던 것도 잠시, 그녀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아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나중에 별장으로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자갈 밟히는 소리만 들려오는 요요한 적막 가운데 어둠 속에서도 투명한 빛을 발하는 목덜미가 백합꽃잎 속에 마음마저 묻고 싶은듯 더욱더 수그려졌다. "않추워? 그거 내가 들고갈까?" "...아니...괜찮아.." 핏기없이 창백한 뺨이 세찬바람에 조금씩 붉어지는 모습이 흡사 죽기 직전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불태우는 회광반조(恢廣返照) 현상처럼...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고 요기로워....칠현은 불안했다. 붙잡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허공으로 산화(散華)되 버릴것만 같았다. 검진을 받던 병원 침대에 누워 호수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보고 싶다고 힘없이 미소짓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꺼질듯 불안해 보여 산정호수에 데려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들른 것을 칠현은 후회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마주쳐선 않될 사람들 중의 한 명과 마주쳤던 것이다. 무슨 비난의 말을 던졌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들을 생으로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머니란 이름을 가진 여인의 싸늘한 눈초리는 겨울 혹한만큼이나 우혁이 견뎌내기엔 너무나 모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에...곰같이 우락부락한 아들네미 둘만 보다가 딸처럼 곰살맞게 구는 우혁이 별장에 내려올때마다 얼마나 예뻐했었는지를 알기에.....그녀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차디찬 냉대와 적의에 얼마나 크게 마음을 다쳤을지를 알기에.....칠현은 위로의 말조차 해줄수 없었다. 시퍼렇게 얼어버린 입술을 세게 베어물며 우혁은 죽을 힘을 다해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자신 하나로 인해 상처받고 변해버린 사람들과 마주칠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 흔한 눈물을 흘릴 자격따위는 자신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아!!!!!!" 하나 그런 사람들과는 비교도 않될만큼 많은 것을 잃게된 사람을.... 그 하나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두려움의 존재가 되버린 남자를 본 순간... 참을수 없는 서러움에 볼을 타고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형?!!" "대체 어딜갔다 이제..... 혁아?" 별장의 활짝 열린 문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이 너무나 따사로워서.... 그에게 달려오는 승호의 걱정어린 모습이 그에게는 없는 부모의 그것같아서... 떨리는 그 목소리와 뺨에 흐르는 눈물로 손을 뻗는 그 손길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왜 이러니 혁아. 응?" ".......윽...." 물밀듯이 밀려드는 오한과 북받치는 설움에... 우혁은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승호의 어깨에 그대로 얼굴을 묻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혁아?" "흑....흐흑.....흑..." "혁아 잠깐만.. 형 좀 봐봐" 품안에서 미친듯이 떨어대며 소리내어 흐느끼는 우혁의 모습에 당황한 승호가 목을 감고 있는 팔을 잡고 얼굴을 보려했지만 세차게 도리질을 치더니 더욱더 세게 끌어 안으며 놔주지 않자 그대로 우혁의 다리를 휘감아 팔에 들어올렸다. 눈물로 축축히 젖어드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우혁의 격한 흐느낌과 간헐적인 경련에 승호는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에릭이 잡고 서 있는 별장 문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칠현과....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휘 둘러보던 에릭을 마지막으로 닫혀버린 견고한 나무문에서 풍기는 기운은 더이상의 외부인은 출입을 거부하고 있었다. 바닥에 수북히 떨어진 담배꽁초 위로 다시 한개가 툭 떨어졌다. 하나...둘...밖으로 난 창문에서 꺼지는 불빛에 희뿌연 연기를 피워올리던 담배를 그대로 손바닥에 꽉 움켜 잡아버렸다. 700도의 엄청난 고온에 살이 타들어갔지만 극심한 고통에도 굳게 닫혀버린 입술에선 미미한 신음조차 흘러나오질 않았다. 딱딱하게 얼어붙어버린 흙바닥에 나뒹구는 백합꽃바구니를 집어 올리는 긴 손가락은 창백한 피부만큼이나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달빛에 창백한 음영이 드리워진 뺨에서 턱으로 이어진 강파른 선을 타고 흘러내린 ...달빛에 한순간 빛난 것은 무엇이었는지.... 투명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음은.....휘청이는 발자국 소리는...... 자조어린 낮은 웃음소리는.......코트 자락의 펄럭거림은......... 계곡에 부는 을씨년스런 바람소리에 파묻혀버렸다. -71- 답이 없는 사랑을 했기에 망설임도 많았으며 그런 사랑을 하면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아픔을 한 조각씩 맞추어야 했습니다 행복하기만을 바라던 구름같은 욕심은 잡을수 없다는걸 알게 되었고 그러기에 더더욱 진실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슬프기 때문에 지금 어이없는 이별 앞에서 제몸도 가누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져야만 합니다 이 마음 진심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텐데... 이 마음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아파하지도 않았을텐데.. .......the sorrow of parting 고풍스런 페치카....오크 목재와 회분을 사용한 벽과 마루...최대한 자연미를 살리고 있는 별장 거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성격 불분명한 긴장감은 자정이 넘도록 거실 테이블 위에다 해물탕을 안주로 술판을 벌려놓고 있는 두 남자에게서 파생되고 있었다. 본래는 인원수가 네 명에서 시작한 술자리였지만 무서운 속도로 소주와 맥주를 짬뽕으로 들이키는 두 술고래에게 질려버린 에릭과 칠현은 현재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니가 이해해라" 불편한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타이르는듯한 어조로 이해를 구하는 말에 그다지 익숙지 않은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는 모습에서 스며나오는 씁쓸함이 퇴색어린 빛으로 더욱 짙어졌다. 1시간 전쯤.... 울다 지쳐 겨우 잠든 우혁을 보고는 도로 밖으로 나가 소주와 맥주 십수병을 사온 유현이 곁에 있으려하는 승호를 어거지로 잡아끌어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이 그자식.. 그 일 있고 나서 자식 잘못키웠다고 타박 받으시던게 더 심해진데다 알잖냐 너도.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거"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사람 혀라더니. 입방정 떨어대는 여편네들이 심장에 대못 박는 짓을 꽤 했나 보더라" 말하다 보니 새삼스레 분이 올랐는지 연달아 소주잔을 비우고는 입술을 손등으로 쓸어내는 유현의 몸짓에도 그와 별다를바 없는... 못내 씁쓸한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같은 처지였으면서도 떠나면 그만인 사람들과는 달리 평생토록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당한 수모는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남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제멋대로 떠드느라 뼈에다 살을 붙여 눈덩이처럼 불어난 온갖 헛소문과 잡다한 구설수에 직접적으로 자존심과 마음을 다쳐야 했던 사람들은 바로 유현의 가족들인 것이다. 그 사실을 승호나 칠현이 모를리 없었다. 애초에 칠현이 반대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은 이곳을 찾으려드는 우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불안해 하면서도 보내줬던 것을 승호는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음모에 휘말린듯한, 당장이라도 우혁이 어떻게 될것만 같은 극심한 불안에 휩싸여 정신없이 내달려온 이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그의 가슴을 짓이겨 놓는 우혁의 눈물이었다. 술잔을 갖다댄 입술에서 새어나온 한숨이 투명한 액체 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혁이 저러는거 아주머니 원망해서 그런거 아니야" "알아. 내가 저녀석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거 같냐?" 소주를 단번에 들이키고 내려놓는 잔에 유현이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마시고 기분 풀어.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뭐냐?" "줘. 내가 따라줄테니" "병째로 마실란다 나는. 잔으로 홀짝홀짝 마시니까 감칠맛 나" 병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던 유현이 대각선 방향으로 보이는 침실의 열린 문틈새로 희미하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또다시 들려 오자 입에서 병을 떼내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승호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승호야" "잠깐 보고 올께" "앉아 임마!!" 겨울방학특선으로 해주던 홍콩액션영화의 기관총이 난사되며 시끄럽던 TV의 소음이 볼륨을 내렸는지 한순간에 팍 내려가버렸다. 그와 함께 거실 내부에는 한차례 숨막히는 정적이 스쳐지나갔다. 탁자 위에 빈병 갯수가 늘어남에 따라 서서히 술이 오르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또릿한 눈동자는 전혀 취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정도로 않죽어. 니가 그렇게 벌벌 떨면서 감싸고 도니까 저녀석이 저렇게 대범치 못한 거야!"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던 문제를 되새기게 만드는...저 밑바닥 깊숙히 숨어 있는 죄책감을 비수처럼 날카롭게 찌르며 양심을 건드리는 말에... 자리에 도로 앉는 승호의 가슴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모르냐? 그런데 기집애도 아니고 사내자식이 저렇게 약해빠져 엇따 써먹냐고!!" 승호와 한자리에서 술을 같이하는게 불편했던지 계속 내미는 유현의 술잔을 정중히 사양하고 입구 근처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던 에릭과..... 소주 반병으로 정신이 약간 아찔해지자 페치카 앞의 흔들의자에 거의 드러 누운채로 흔들~흔들 의자를 움직이며 TV를 보고 있던 칠현은.... 경악으로 한순간 숨을 죽이고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승호를 돌아봤다. 얼굴 근육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져 있다. 젠장할! 누군 뭐 그걸 몰라서 그동안 입 닫고 살은줄 알아!! --하고 속에서 부르짖으며 신경이 바짝 곤두서버린 칠현이 의자에서 몸을 바로 일으켰다. 지금 성유현은 안승호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안승호는 겉모습은 변한게 없어보여도 유현이 알고 있는 몇년 전의 안승호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틀린 인간이다. 특히나 우혁에 관한 일을 저렇게 직접적으로 건드릴 경우에는. 하나 분명 급변화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을텐데도 유현은 술을 계속 마시는 와중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혁이가 칠현이 반만 됐어도 나도 이렇게 걱정되진 않겠다. 아까 잠깐 봤는데도 저자식 큰일나겠다-- 싶더라고" "............" "내 말 고깝게 듣지 말고 명심해 들어. 죽을때까지 니가 델고 살거 아니면 너부터 고치란 말야. 이제 애 아니잖아. 언제까지 끼고 살래" 29세란 나이에 벌써 수석 검사가 됐을만큼..... 누가 강력 사범들과 범죄 조직을 비호하는 변호사들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는 그 컴퓨터 두뇌 성유현 검사아니랄까봐...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통찰력이 좋은건지 신랄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승호에게 참을수 없는 극심한 괴로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해물탕을 떠먹다가 안주로 사온 훈제 오징어를 쭉 찢어 질겅질겅 씹으며 힐난의 눈빛을 던지는 유현 앞에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승호는 비에 젖은 가련한 새처럼 날개를 접고 구슬프게 울어대던 우혁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 험난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약하다. 우혁이 알고 있는 책 속의 세상은 현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 왜 모르겠는가... 그 자신이 그럴려는 의도로 날개를 꺽어버렸는데... 눈치채지 못하게....서서히.....길들여 왔는데... 그가 그에게 중독된 만큼.....자신에게도 서서히 중독시켜 왔는데... 그 누구도 아닌...안승호가 아니면 않되게끔.... 22세가 되어 구속을 벗어나 자유를 찾더라도.... 혹시나 다른 사람이 생기더라도 결국엔 안승호란 남자가 아니면 않되게끔.... 어쩌면 유현은 그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기에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우혁을 위한다면 그래서는 않되었다. 우혁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래서는 않되었다. 대인기피증에 가까울만큼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하던 우혁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모든 것이 저택 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 그것은 허울좋은 명목일뿐...실상은 저택이라는 커다랗고 안전한 새장 속에 상처받은 새를 가둬버린 것밖엔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하얀새를 보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그에게서 하얀새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점차 상처가 치유되갈수록...차츰차츰 자유를 갈망하는 새의 날개짓을 알아보지 못한듯 외면하고 계속 구속하려한 대가는.... 손에 쥔 상감청자의 소주잔에 박힌 시선이 한순간 큰 동요를 일으켰다. 처음 술이란 것을 배운 것은 십대로서는 마지막 겨울 이맘때쯤이었다. 한국에서 최고라는 대학..그것도 과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에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만의 술로 기분좋게 취한 장성혁 회장이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는 거라며 내밀은 술잔 역시 이와 비슷한 문양의 청자였었다. -승호라면 믿을수 있지...승호야...우리 혁이 부탁하마... 그때 처음으로 그와같은 의중을 내비쳤던 것은...당신이 떠난후 재산에 눈독을 들여 앞에서는 감히 아무 말도 못하던 집안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를 우혁의 앞날을 근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병환이 점점 깊어감에 따라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혼자남겨질 우혁을 걱정해 속에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지 겉으로는 믿음직스럽기만한 대자에게 술김을 빌어 간곡히 부탁하던 대부를 떠올린 순간... 후견인으로서 여전히 곁에 있게될 것임을 알았을때 눈물 맺힌채로 신뢰의 빛을 가득 담으며 파아랗게 미소짓던 해맑은 암청빛 눈동자를 떠올린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혁아... 네가 그토록 믿었던 형이란 사람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같은 일을 자행하려한 이 남자가... 네가 그렇게도 믿고 의지했던 형이란 인간이었구나... 내가 어찌하면 좋겠니.... 이토록이나 널 사랑하는데... 이토록이나 널 원하는데... 내가...널 어찌했으면 좋겠니.... 따르기가 무섭게 잔을 금새 비워내고는 다시 술을 따르는 승호의 얼굴에 드리워진 죽음과도 같은 암울한 기운에 유현도 더이상 아무 말 않고 병나발을 불었다. 눈을 감은채로 있으면 언제나 재원이 보인다. 오늘은 재원이 담배를 피고 있었다. 뿌연 연기를 피워올리는 담배를 물고 있는 붉그스름한 입술 ... 감정이 베어 있지 않은 눈동자를 반쯤 덮고 있는 나른한 눈까풀...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는듯한 진지한 표정의 단아한 얼굴... 허공으로 비산하며 바람에 먼지처럼 휘날리던 담배재들.... 불타는듯한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테라스에 기대서 있던... 웬지모를...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던 그 모습에 주책맞은 가슴이 괜시리 콩닥콩 뛰기도 했었다. 담배를 피다가 물고 있는 끝을 이빨로 느릿하게 짓씹는건 극심한 화를 삭히려 할때 나오는 오랜 버릇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둘다 서로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던 그 날... 실수로라도 내가 있는 곳에선 담배를 피지 않던 재원이 바로 코 앞에서 담배를 꺼내 피려할때 이미 조짐이 보였음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거의 히스테릭해있던 나에겐 분별력같은건 이미 남아 있질 않았었다. 승호가 도착하는 것을 보며 담배를 피고 있던 재원이 파티장으로 같이 데리고 내려가려할즈음에는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울만큼, 조금만 자극을 가해도 신경줄이 터져버릴 정도로 그렇게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었다. 너한텐 그런 권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독살스럽기까지 한 모진 음성이 나올수 있었는지 믿을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에도 타격을 받지 않을거라 여겼던 그 강인한 검은 눈동자가... 반문하는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음에도 한번 마비된 이성은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버렸다. 네 입에서 권리 운운한 이상...... 나한테 그런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한번 알아봐야겠군 그 모든것은 그렇게 시작되버렸다. 어깨를 낚아채여 몸이 허공으로 붕 뜨며 뒤로 넘어간다고 느꼈을땐 이미 재원의 손에 의해 침대 위로 내던져진 상태였었다. 그 자신은 옷도 벗지 않고 몸을 결박하려고 하지도 않은채 옷을 마치 걸레조각 마냥 찢다시피 거칠게 벗겨내던 그를 침대에 널브러진 상태로 보면서도 반항은 커녕 옴짝달싹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그 눈빛 때문이었다. 살을 베버릴듯한 시선..... 눈빛만으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보일 수 있다는 걸 그때 확실히 깨달았었다. 전신이 주체못할 정도로 떨려 세게 악문 이까지 덜덜 떨릴만큼..... 소름끼치도록 너무나 무서웠던 그 눈빛...그 표정... 화원으로 승호가 찾아왔었던 그 날, 그토록 냉혹해 보였던 그 모습에서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그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었다. 그때문에 그런 말이 터져나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고작 섹스따위로 네 권리를 입증하겠다고? 착각하지마. 이재원. 쾌락따위...다른 사람한테서도 얻을 수 있어. 결코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낄 수 있을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순간 심연처럼 점점 가라앉던 그 눈빛과 불길한 침묵은... 미칠듯한 공포심을 유발시켜 히스테릭한 상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왜, 못할거 같아? 이미 버린 몸이니까 어차피 깨끗한 척 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 내가 네 소유라고 착각하지마!!! 미쳤다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이해할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되돌아온... 마치 뼈를 깍아내는듯한 그 목소리... 그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아. 네가 누구한테 안기건 누구한테 마음이 가 있던...이젠 나와 상관없어. 거칠면서도 달콤한 전희나 애무. 그때처럼 수치심을 자극시켰던 키스.... 그 따위는 존재치도 않았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수차례 억눌렀을만큼... 시작부터 단번에 살을 갈가리 찢어발기며 몸 속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하듯 헤집던 무자비하고 잔혹한 행위... 자존심때문에 입술을 물어뜯으며 참았어도 끝끝내 터져나온 비명과 울부짖음에도.. 심상치 않았던 모습때문에 파티 중간에 올라왔던 진과 유모가 잠긴 침실문 밖에서 그만두라고 고함치며 쉴새없이 문을 두들겨대도 결코 멈추지 않던...잔인한 남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전날 있었던 일도, 아니 단 몇시간 전만 해도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며 스스로 그에게 자신을 맡겼으면서도 마치 뭔가에 홀렸던 듯이 재원을 자극시키고 그의 자존심을 찢어놓은 것도 자신이었고... 그 정심한 성격상 스스로를 용서치 못할 일을 하게 만들어 그 마음에 결코 회생치 못할 상처를 주고 물러서게 만든 것도 분명 나 자신이었다. 감은 눈꼬리를 타고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품에 안은채 계속 쓰다듬으며 달래주던 승호에게 안긴채로 울다 잠이 든 우혁이 다시 깨어난 것은 끝내자고 간신히 속삭이듯 말할때 내비친...가슴아픈 그 눈빛때문이었다. 자면서도 계속 울었었는지 고개를 돌리자 흠씬 젖은 베게가 뺨에 축축하게 와닿았다. 잊고 있던 백합꽃 바구니를 떠올린건 깬후 얼마되지 않아서였지만 밖으로 찾으러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눈을 감은채 침대에 누워 있었던건 거실에서 들려오는 유현의 목소리때문이었다. 부끄러웠고....죽고 싶을만큼 창피했다. 또한 자신의 생각짧은 행동으로 인해 말도 않되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승호때문에...가슴이 아팠다. 그의 꿈속을 찾아드는 사람이....눈을 감고 있을때 보이는 사람이..... 백합꽃의 꽃말을 알았을때, 우연찮게 본 시집에서 발견한 시때문에 활짝 핀 백합꽃 열송이를 사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 사람이.... 승호가 아니란 것에......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하나 다음 순간... 눈물방울을 속눈썹에 매단 암청빛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뜨여지며 눈물을 관자놀이 양옆으로 주루룩 흘려내보냈고 벌려져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던 입술이 어느 순간부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방금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답변이라도 해주듯 승호의 낮으나 단호한 음성이.... 이미 확정을 내린듯 마지막 통고를 하는듯한 그 음성이... 충격으로 멍해져버린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곳에 혼자 놔둘순 없어. 혁이도 미국에 데려갈거야" -72- 화려한 유럽풍 인테리어의 내실에는 열린 창문 새로 들어온 찬바람에 쉼없이 펄럭거리는 커텐 자락 위로 마음처럼 이지러진 달빛이 서늘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늪지대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침몰해 들어갈것만 같은 눈동자는 공허할 정도로 텅 빈채 젖혀진 고개 너머...커텐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달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 새벽녘 하얗게 쏟아져내리는 월광은 고층건물 사이로 삭막하게 불어대는 북풍만큼이나 섬뜩하도록 푸르런 서슬과 냉기가 베어 있었다. 서슬 퍼런 월광이 드리워진...쇼파 팔걸이 뒤로 젖혀져 있는 목덜미와 강파르게 깍인 얼굴, 셔츠 틈새로 드러난 가슴은 잘갈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도 날처럼 창백할 정도로 시린 느낌을 안겨주고 있었다. 햇살 아래 뽑히는 일본도는 지독하게 하얗지만 월야(月夜)의 일본도는 쇠붙이의 색깔만 봐도 소름이 끼칠만큼 처절할 정도로 하얗게 빛난다. 미동조차 않는 인영의 전신에 스며드려하는 월광도 월야의 일본도처럼 그렇게 섬칫할만한 냉기를 뿜어내며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쇼파 밑으로 늘어뜨려져 움직일줄 모르는 손가락이 향해 있는 곳... 희디흰 백합꽃들도 달빛에 처연히 빛나고 있었다. 겨울 달밤이 가슴시릴 정도로 차디차다. 문암산 상공을 한바탕 광마처럼 휩쓸어 가던 바람이 계곡 골짜기까지도 밀려들어왔다. 목련나무의 잎진 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려 있던 작고 어여쁜 꽃눈들이 세찬 바람에 파르르 떨림을 일으킨다. 울타리 문 근처에 떨어뜨렸던 백합꽃 바구니를 찾다가 목련나무 밑에 힘없이 기대선 우혁은 서러운 느낌이 드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검청빛의 밤하늘에 천역덕스레 흘러내리는 달빛은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온 사람의 얼굴처럼 창백하다. 목련나무의 꽃눈들이 달빛을 잔뜩 머금어 제각기 영롱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눈물 방울같아 보였다. 나뭇가지새로 날리는 바람에 마음 조각마저 실려보낼수 있다면... 창백한 달빛이 드리워진 양 빰 위로 흘러내리는 두줄기 뜨거운 눈물이 얼어붙은 볼을 조금씩 녹여갔지만 마음만은 녹여주지를 못했다. 서릿발로 내려쌓이는 달빛에 비친 눈물이 너무나도 서럽고 애닲다. 달빛 속에서 흐느껴 본 이들은 안다고 하던가.. 어째서 달빛은 서러운 사람들을 위해 밤에만 그렇게 쏟아지는지를... * * * 메세지가 몇개 있다는 녹음된 기계음에 자동응답기의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자 삑-하는 소리와 함께 메세지들이 하나씩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 집에 없나 보구나. 흠..차는 마음에 드니? 외숙모가 너 보고 싶덴다. 주연이가 없으니까 외로워 그러는건지.. 아마 내일쯤 거기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래..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일찍 다니도록 해라. 집에도 좀 놀러오고. 끊으마 > 굵직하고 위엄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된 첫 메세지가 녹음된 날은 12월 17일로 딱 일주일 전의 것이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것도 새벽녘에 내린 첫눈으로 인해 올해는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삑-하는 기계음과 함께 귀에 많이 익은...조급하고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연속으로 계속해서 들려왔다. < 야 너 어떻게 된거야! 시바리스에 오기로 해놓고 어디로 증발했어! 핸폰도 않되고! 이거 듣고 빨랑 와 임마!! 죽이는 애들로 골라놨단 말야!!> < 아쒸 또 없네? 얌마 너 죽었냐? 연락 좀 해라 이 자식아!! > < 뭐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않돼? 젠장...어디 갔나? 이새꺄. 나 폭팔하기 일보직전이니까 연락 좀 하고 살아!!>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맨 가슴위로 떨어져 주루룩 흘러내리자 손에 쥔 타월로 머리칼의 물기를 세차게 털어냈다. 긴다리에 리바이스 청바지만 걸친채 유리탁자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리는 모습은 TV 광고나 잡지에 나오는 섹시한 청바지 모델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팔과 어깨, 젖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내린 옆 얼굴의 급격하게 날카로워지는 선과 무뚝뚝하게 닫혀 있는 입술,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맺힌 상반신은 석고로 빚은듯이 매끄러워 보였고 흰 피부때문인지 남자치곤 지나치게 청결하고 신선해 보였다. 흠뻑 젖은 타월을 욕실 바구니에 던져 넣고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나선형의 나무 계단을 올라간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쇼파 근처의 바닥에 놓인채로 꽃과 잎파리가 바짝 말라 비틀어져 먼지가 뿌옇게 앉은 초라한 백합꽃 바구니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들하고 어쩌고 하는 민우의 목소리가 아랫층의 빈 공간에 울려퍼지며 윗층까지 올라왔지만 한 귀로 흘려들으며 꽃바구니를 집어들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휴지통에 처박아버린 재원은 그대로 벽 한켠에 만들어져 있는 바로 다가갔다. 대리석 소재의 테이블로 길게 한줄로 연결되어 있는 바의 안쪽에는 술집을 차려도 좋을만큼 많은 주류들이 디스플레이 효과를 내며 진열되어 있었지만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음용하고 남은 병채로 체리글라스 소재의 고급스런 Keeping Box에 진열되어 있었다. 한 병에 삼백만원이나 하는 칼바도스 루이 13세를 꺼내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병채로 들이키려고 막 입구에 입을 대던 재원의 귓속으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한참 후에 작동된 자동응답기에서 조용하고 침착한... 그래서 더욱 귀에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 거기 계신거 압니다. 동해에서 도련님을 놓쳤습니다만 새볔에 돌아 오셨다고 그러더군요. 전 지금 움직일 수가 없어서 전화로밖엔 연락을 할수가 없습니다. ....이제와서 이런 말씀 드려야할지 어째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알고 계시는게 나을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우혁군에 대한 일입니다.. > 차디찬 대리석 바에 팔꿈치를 구부려 댄채로 기대서서 술을 들이키다가 전화 코드를 아예 뽑아버릴까 생각하던 재원의 얼굴이 다음 순간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 안승호가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회사와..회장님과도 관련된 일때문인데 최소 2년은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안승호가 우혁군의 후견인이라는건 아시겠지요. .....제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아실겁니다. ...정리하고 돌아오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씀 않드리려 했지만.. ... > 자동응답기의 목소리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세차게 닫혀버리는 쇠철문 소리에 잠시간 잠식되어 들리지 않았지만 기계는 텅 빈 공간에 대고 계속해서 침중한 기색의 음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 엄명으로 그들의 출국날까지 도련님은 감시받게 될겁니다. 지금쯤이면 펜트하우스에 사람들이 가 있을겁니다. 그들은....제가 드릴수 있는 말은 웬만하면 충돌은 피하시라는 겁니다. 제가 움직일수 없는 이유도 그때문이지요. 안승호는 삼일후에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도련님...듣고 계십니까?> 비명은커녕 희미한 신음조차 없었다. 어깨를 잡으려는 남자의 팔을 잡기가 무섭게 뒤로 꺽어 기형학적으로 젖혀진 어깨 쭉지를 팔꿈치로 그대로 사정없이 가격해버린 재원은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탈골된듯한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밑으로 축 쳐져 들리지도 못한 오른팔이 팔병신처럼 덜렁거리고 있는데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팔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에게서 나온 말은.....이미 지하 주차장 바닥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수명의 남자들이 했던 그 말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일했다. "도련님...올라가십시요. 더이상은 회장님이 용서하지 않으실겁니다" 얼굴 위로 굵은 땀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어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듯 했지만 이를 악물고 천천히 할말 다하는 남자의 음성에는 절대 보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의사가 어려 있었다.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로 지하주차장까지 직통으로 내려갔던 재원은 페라리 근처에 가기도 전에 정체 불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지극히 정중한 말과 행동으로 다시 펜트하우스로 올라가길 종용하며 가급적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는듯 했지만 십수명의 남자들은 전신에서 지독한 냉기를 발하는 재원을 마주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호원들은 분명 아니었다. 한벌에 5~600만원이나 하는 이태리제 정장을 걸친 채로 그와 거의 비등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데다 지독하게 훈련받은 티가 나는 남자들의 정체는 단지 이회장이 보냈다는 것밖엔 알 수가 없었지만 재원은 그들에게서 짙은 어둠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암흑가...그것도 자잘한 조무라기가 아닌, 폭력조직 세계에서도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조직에 속한 무리들...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져 있는 재원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대기업과 암흑조직의 공생관계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것이다. 재원은 눈만 돌려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나..둘...셋....다섯....일곱.. 쓰러진 자들보다 멀쩡히 서 있는 자들이 더 많았다. 그것도 그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사내들 대여섯만 바닥에 눕혀 버렸을뿐.. 남은 사내들은 실력이 더 월등하다는걸 재원은 알수 있었다. 남자들은 재원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는지 처음부터 얕잡아보는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직접 체험한 지금은 더욱더 경계를 하고 있어 접근키도 용의치 않았다. 맨손으로는 상당히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손에 죽도나...하다못해 나뭇가지라도 들려있었다면 지금 눈앞에서 두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 남자들은 존재치도 않았을테지만 벌써 한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소리없이 계속되는 싸움에 재원은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팔을 움켜잡고 있던 사내의 눈빛이 한순간이었지만 흔들린 것을 보자 마자 재원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뒤로 회전하는 자세 그대로 돌려차기를 했다. "컥-!!" 처음으로 반응이 나왔지만 타격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했다. 달려드는 속도와 다리근육에 실린 강력한 힘으로 인해 몇배나 압력이 배가되버린 힘으로 옆구리에 타격을 가하자 샌드백을 친 듯한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주차되 있는 자동차의 보넷 위로 나가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갈비뼈가 나가버렸는지 끅끅거리며 눈을 뒤집는 동료의 모습에 그때까지도 침착을 지키던 남자들의 안색이 확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할수 없군요. 무력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 했는데..." 지하 주차장에 부는 겨울바람보다 더 냉랭한 그 음성에 재원의 날카롭던 눈빛이 오히려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장우혁을 납치해온게 당신들인가?" 차갑고 억양이 없는...감정을 느낄수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표면이 바삭바삭 말라붙는 듯한... 내뱉는 어조. 뜻밖의 질문에 무리의 우두머리격인 남자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심한 그 표정에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그렇다고 바로 시인했다. 우혁을 깜쪽같이 납치해온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또한 비밀리에 재원을 경호하던 사람들도. 재원에게 어린시절부터 격투술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이들과 같은 조직원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던 일종의 교관격이었다. 그랬기에 에릭이 재원을 피습하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명씩만 대응하느라 뒤에서 방관하는듯한 자세로 서 있던 남자들이 포위하듯이 조금씩 안쪽으로 좁혀들다가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웃고 있었다. 땀으로 젖어든 창백한 얼굴 위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하나 그 웃음을 본 남자들의 등줄기에 순간적으로 으슬한 한기가 스쳐지나며 오싹 소름이 돋치고 말았다. 교관이 그들에게 해줬던 경고 중에 포함되있던 한가지 주의사항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살벌한 표정일때는 오히려 안전해. 하지만 혹시 싸우는 도중에 웃으면 주의해라. 그녀석...제일 화났을 때거든. 그때는 어렸는데도 나조차도 심하게 당했었다. 스포츠 카의 기능과 같은 원리다. 일반도로에서는 다른 차들과 성능의 우위를 논할수 없지만 계기판의 스포츠 모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스포츠 카의 역동성은 한차원 올라가게 되지. 녀석의 웃음이 바로 그 버튼과 같은 역할이다. 입술 끝에 매달린 웃음이 짙어질수록 검은 눈동자도 얼음처럼 점점 더 투명해지며 섬뜩할 정도로 냉혹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교관의 말은 헛소리도 과장된 말도 아니었다. 거친 호흡소리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무수한 구둣발자국 소리들... 살과 뼈로 이뤄진 인간의 팔다리가 맞부딪히는 소리.. 하나 둘...드디어 지하주차장에 처음으로 소름끼치는 비명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73- 골라낸 LP판을 전축 위에 살짝 올려놓고 전원을 넣자 거실을 잔잔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곡은 웸의 Last Christmas였다.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를 한껏 돋구는 죠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의 감미로운 하모니는 에릭과 함께 창고에서 찾아낸 트리에다 금빛 볼과 전구들을 매달던 칠현에게 이곳 별장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를.....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케하며 아련한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 하나 정작 겨울철에 이곡을 듣기 좋아하고...그때문에 승호가 일부러 판을 찾아 틀어놓게 만든 장본인은 양털깔개가 놓인 통나무 의자에 앉아 거실 한면을 차지하는 통유리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큼직한 유리창 너머로 먹구름이 껴있는 명성산 스카이 웨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우혁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 앞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승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도..돌아보지도 않았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올해 겨울은 눈 대신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린다. 새볔녘에 내린 눈은 다시금 비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별장 내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볔 먼동이 트기 아직 이른 시간때쯤... 몇일을 눈뜬채로 꼬박 밤을 지샌 우혁이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몰래 밖으로 나갔다가 맞닥뜨린 것은 겨울의 삭막한 메마름을 순백으로 물들여 신비로운 설경을 이뤄낸 올해의 첫눈이었다. 첫눈이 올때면 평소 우혁을 놀리는 악역은 도맡아하던 칠현뿐만 아니라 양부와 승호까지도 우혁을 강아지같다고 짖궂게 놀려대곤 했었다. 눈밭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좋아 어쩔줄 몰라하던 모습이... 어린 주인을 따라 그 옆에서 같이 뜀박질을 하던 몇달박이 강아지들하고 별다를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내부 온도와는 무관한 스산한 한기에 우혁은 떨리는 몸을 팔로 감싸안았다.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들은... 다시는 돌아갈수 없다는걸 알기에 그에게는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더욱이 올해의 첫눈은 설레임도 기쁨도 아닌...첫눈이 무슨 의미였는지 몇년 만에 각성하게 된 그로서는 또다른 아픔을 느낄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에 날린 빗방울들이 통유리 위로 비스듬히 내리꽂히자 우혁은 가만히 손바닥을 유리표면에 갖다댔다. 차갑다... 몸에 미열이 있어서인지 손에 닿은 유리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허리를 감는 손길에도...느껴지는건 손바닥의 냉기 뿐이었다. "어? 유현형 밖에 비와요? 왜 그렇게 젖었어?" "뭐했길래 비오는 줄도 몰라? 이러다 눈 다 녹겠는데? 아줌마 이거 어디다 놓을까요?" "거기 아무데다 놔두고.. 기름냄새 베니까 어여 나가" 양손에 무겁게 들고 있던 먹거리가 가득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를 바닥에 놓고는 전과 지짐같은 음식을 만들고 있는 포천댁을 도와주려다 부엌에서 쫓겨나 거실로 나오던 유현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칠현아. 쟤네 원래 저러고 노냐?" ".......가끔" "사내새끼들이 저게 웬 닭살돋는 짓이야?" 우혁의 허리를 끌어안은채 통유리 밖을 내다보고 있는 승호의 뒷모습에 칠현은 표정을 굳혔다. 타인의 앞에서...하다못해 자신이나 에릭앞에서도 승호가 두드러지게 애정 표현을 하지 않는 이유는 소심한 우혁때문이었지만 오늘은 둘다 이상했다. 굳이 자신이나 에릭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자리엔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유현과 포천댁까지 있는데도 남이 보기에 저렇게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승호는 차치하고라도 우혁의 반응은 더욱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미국행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건만 지금 저 모습은 ... "혁아...무슨 생각하니" 땅바닥에 채 얼어붙지도 못하고 내리는 겨울비에 질척질척하게 녹아들어 금새 더럽혀지는 눈을 보며 우혁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 근처에서 느껴지던 승호의 따뜻한 숨결이 실제로 살갛에 와닿았을 때조차도.... 뜨겁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냉한 기운이 점차 가시면서 새롭게 자각한건 목덜미에 느껴지는 화인같이 뜨거운 입술이었다. "형은...혁이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서 불안해. ..느껴지니?"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니트에 감싸인 넓은 가슴이..... 점점 숨이 가빠지는지 들썩거리는게 느껴졌다. 어느새 길은 머리칼을 뒤로 넘긴 귀 밑에 와닿는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 "혁이가 그곳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형 마음.....이해할 수 있겠니?" 턱선을 따라 입술로 훑으며 나직히 속삭이는 그 말에.... 뭔가를 그리는듯 내내 애잔한 빛이 맴돌던 암청빛 눈동자 위로 이른새볔녘 호숫가에 피어오르는 하얀 물안개처럼 습윤한 막이 차오르며 시야를 가려버렸다. 고개를 들어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하늘을 보니 소슬하니 보슬비처럼 부슬부슬 흩날리던 겨울비가 어느새 장대비처럼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것만 같았다. 겨울철 마른 밭처럼 푸석푸석하게 메마르고 텅빈 우혁의 가슴에도 눈물같은 겨울비가..반목처럼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유리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내 젖어드는 눈가를 닦아내던 우혁의 손짓이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품 안에서 희미하게 떨리던 가느다란 몸은 세게 껴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팔 안에서 주체못할 정도로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체온까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백단향이 은은히 베어나오는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기도 전에 불안하게 뛰노는 심장이 발하는 최악의 경고음은 현실로 다가왔다. 허리를 껴안고 있는 팔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스르르 밑으로 떨궈지자... 새롭게 시작할 곳을 찾게된 하얀 새가 날아가버린 자리엔 겨울비같이 차가운 눈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통유리 너머...나무에 흰 페인트를 칠한 울타리 밖에서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몇 발자국 남겨놓은채 마주선 두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왜 이다지도 흐릿하게 보이는건지... 아마도 비때문이겠지....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해후하는 두 연인의 모습에 한 남자의 가슴 속에도 차디찬...눈물보다 더 진한...붉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핏기가 사라져 빗물에 흠씬 젖어 있는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창백해 보였다. 보고 싶은데.....가까이 가 그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더이상 발걸음이 떼지질 않았다. 이렇게도 눈앞이 흐려지는건 빗물때문인지...그 속에 섞여든 눈물때문인지.. 세차게 퍼부어 내리는 겨울비는 이렇게도 차디차건만... 뺨을 타고 쉼없이 흐르는 눈물은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줄듯 뜨거웠다. 회색빛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것은 겨울비이지만.. 오늘처럼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었다. 12월의 어느날 밤 어두컴컴한 뒷골목... 한사람의 기억엔 남아있지 조차 않은 짧았던 만남... 하나 그 한순간만으로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버렸던 강렬한 이미지... 단 한차례 짧게 스쳐지난 인연이라고... 두번다시 볼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었다. 운명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진부할정도로 마치 계획된 것처럼 나머지 한명의 뇌리에서조차 가려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때늦은 해후... 납치의 충격으로 인해 되찾아버린 기억....아차하고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속절없이 빠져버린 나날들....이별의 고통에서 다시 맞은 해후... 눈 위를 덮고 있는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단순한 동작조차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건...같은 남자임에도 남자를 생각하며 그리워하게 만들고... 남자의 품에 거리낌없이 안기게 만들어버린.......이 남자의 마력때문이었다. 얼굴 윤곽선이 좀더 날카로워진 헤쓱한 안색을 바라보던 우혁은 그가 이 한겨울에 그것도 뼛속까지 시린 이 찬 겨울비 속에... 청바지와 물에 젖어 속살을 훤히 비춰내며 몸에 달라붙어 있는 얇은 셔츠 한장만 걸치고 있다는 것도 자각치 못하고 있었다. 야수같은 눈빛....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리는...감정이라도 하는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의 자석같은 흡착력에 감히 눈을 돌릴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와 팔만 내뻗치면 닫을 거리에 멈춰서서 아무말도 없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를.... 우혁 역시 아무 말도 않고 갈수록 더 뿌옇게 흐려지는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마주보고 선 두 사람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순간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혁아..."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온 잔뜩 잠겨버린 그 음성은.... 실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그대로 우혁을 맥없이 쓰러지게 만들었다. 하나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단단한 팔에 몸을 붙들려 그대로 그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을때.....축축히 젖은 얇은 셔츠 밑으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과 빠르게 뛰는 심장의 울림을 느꼈을때... 우혁은 깨달았다. 이 마음은.....분명 연애감정이었다. 같은 남성이면서도 더이상 性에 구애받지 않게 만들 정도로.... 몸 전체로 감싸듯이 따뜻하게 안은채로 등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양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잠시 흠칫하며 머뭇거리는 기색이다가 마침내 두번다시 놓지 않을듯이 으스러져라 전신을 옥죄이며 꽉 끌어안자 우혁은 그의 팔에 안긴채로 온몸을 심하게 떨어야 했다. 추위때문이 아니라 너무 벅찬 나머지 가슴속에서 넘쳐흐르는 격정때문이었다.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했어....그때문이야...그것때문에 온거야.." 볼에 닿는 차가운 머리카락 새로 떨리는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드러난 피부에 따뜻한 숨결이 와닿았을때 우혁은 맞닿아 있는 그의 몸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차가운 빗속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건지 몸이 얼음짱처럼 차가웠다. 안과는 달리 어둠이 깔린 외부에서는 비에도 불구하고 환한 불빛으로 인해 내부가 어느 정도는 보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유리문 너머로 승호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건지..... 그 모습을 비를 맞으며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네가.....나한테 사과해야 할 일따윈 없어..." 눈앞에 바로 보이는 그의 입술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듯하자 손가락을 내뻗던 우혁은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입술을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만지며 손끝에 와닿는 얼음같은 차가움에 계속해서 잔뜩 쉰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입술이 얼었어" ".....울지마....내가 다 잘못했으니까....이젠 울지마.." "않...울어. 바보야... ...빗물이란 말야...." 울먹거리면서도 애써 미소짓는 우혁의 속눈썹에 아롱져 매달려 있는 눈물방울을 빗물과 함께 훑던 재원이 마찬가지로 얼어버린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파르르 떨리던 긴 속눈썹이 스르르 내리깔리자 짙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 격하게 타올랐지만 간신히 충동을 억제하고는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맞대어 점막같은 피부를 세심히 빨아들였다. 얼어붙은 입술을 서로의 체온으로 녹여주다가 조금씩 열기가 느껴질때쯤 우혁은 입안으로 밀려들어와 조심스럽게 자신을 찾아 휘감는 그의 혀에 미미하나마 순순히 호응하며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아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휘감았다. 한참후에야 마지못해 입술을 떼며 고개를 들던 재원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왜..." 통유리 앞에서 아예 석상이 되버렸는지 꼼짝도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는 안승호였다. 가쁜 숨을 토해내다가 물기젖은 긴 속눈썹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더니 왜 계속 키스를 해주지 않느냐는듯한 그 눈빛에 재원은 질끈 이를 세게 악물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안승호가 보고 있어" .....예상대로였다. 한순간 완전히 잊고 있었던지 빗물에 젖은 얼굴이 더 파랗게 질리는듯한 그 모습에 재원의 얼굴에 자조어린 미소가 떠오르며 안고 있던 팔을 풀려했지만 순간 그대로 미소가 굳어지고 말았다. "키스해줘" 가슴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들어올려 밀어내지 못하게 목덜미에 감는 그 모습에... 단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대담하고 유혹적인 음성에.... "키스해....이재원.."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 밑으로 분명 빗물이 아닌...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명령조의...잔뜩 목이 멘 음성을 토해내는 그 붉디붉은 핏빛 꽃봉오리에... "..재..흡!!!" 한가닥 남아있던 절제의 끈이 그대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날을 얼마나 애타게 그려왔던지...얼마나...얼마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백금빛 머리칼과 목덜미를 거세게 휘어잡고는 거친 행동에 놀란듯 커다랗게 뜨여진 암청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나운 기세로 밀어붙인 입술은 붉은 입술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갈망해왔다는듯이 입안을 빠짐없이 샅샅이 훑어가며 굶주린 야수처럼 격정적으로 키스를 퍼붓는 재원의 모습에 어느새 눈물도 말라버린 우혁은 더이상 아무 생각않고 다시 목에 감긴 팔에 힘을 주어 그에게 매달렸다. 부끄러움으로도.....자신이 남자라는 사실로도...이 감정을 멈출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재원의 팔이 그대로 가는 허리를 아예 부러뜨려 버리려고 작정을 했는지 사정없이 힘을 가하며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지옥의 유황불보다도 더 뜨거운 입술... 괴로울 정도로 압박하며 옥죄는 강한 팔... 맞닿아 있는 단단한 몸과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 자신의 모든것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빨아들이며 가져가겠다는 듯이 제대로 숨쉴틈도 주지않고 광폭하게 몰아붙이는 불꽃같은 절박한 키스에 우혁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단한번도 편하게 잠들지 못했던 그 수많은 날들이.....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급속도로 허약해진 육체와...병들었던 마음이.... 긴장을 풀며 안도하는 순간 한꺼번에 들이닥쳐버렸다. ".....이재원......나... 너.....많이... 좋아하나 봐..." 목덜미에 감겨있는 자신의 팔이 스르르 힘없이 풀리며 의식이 흐려지자 팔에 힘을 주며 꺼질듯한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이던 우혁은 자신을 내려다보던 얼굴이 그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불신과 경악으로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안심시켜주려는듯 미소를 짓다가 그대로 그의 팔안에서 힘없이 늘어져버리고 말았다. 네가 좋았어... 처음봤던 그 순간부터 내가 먼저 널 좋아했어... 그러니 놓지 않아.... 두번다시... 놓지 않아... 이젠......내가 놔주지 않을 거야.....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 살과 뼈를 으스러뜨릴듯이 단단히 끌어안는 팔은 죽을때까지도 놓아주지 않을듯했다. 나 이제 행복해도 되는거지? 우리 이제 행복해지는 거지? 더이상...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거지? 전신을 감싸는...더이상 차갑지 않은 겨울비를 타고... 떨리는 듯한...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